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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벡의 글, 인터뷰

새벽길 2008. 10. 25. 10:36
최근에 울리히 벡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한겨레는 지난 6월말에 뜬금 없이(?) 울리히 벡의 특별기고를 내보내더니 이번에도 특별기고를 실었다. 6월의 기고는 그가 <위험사회>라는 책에서 근대화와 함께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일상적 위험을 강조하였고, 지금의 촛불시위가 그와 관련이 되기 때문에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이번 글도 그가 세계화와 한국의 현실에 가진 관심에 비추어 충분히 납득은 되지만, 이 정도의 글은 국내에서도 충분히 필자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울리히 벡은 지난 4월에 방한한 적이 있다. 아마 그 때부터 울리히 벡은 한국사회의 상황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나 보다. 
 
울리히 벡은 이념적 성향을 볼 때 중도 좌파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06년 저작에서 코스모폴리탄적 기획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대안이 과연 이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물론 민족주의가 아닌 코스모콜리타니즘에 입각할 필요가 있겠지만, 조금 더 급진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번 글과 관련하여 울리히 벡을 인터뷰했던 글들도 담아놓는다. 2006년에 김창호 박사가 국정홍보처장일 때 인터뷰한 것도 있는데, blog.korea.kr 내에 있었던 그의 블로그가 사라져서 원문은 찾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링크만 하는 것보다는 발췌라도 글을 담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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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세계 위기 ‘국경없는 대응’ 필요 (한겨레,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사회학), 2008-10-23 오후 07:40:18)
사회·공간·시간적으로 경계선은 이미 무너져
국경없는 대응 필요한 때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중국식 체제와도 거리를 두어온 서구의 복음 원리, 즉 자유시장 경제가 하룻밤 사이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열광적인 개종자라도 되는 듯 설쳐대는 은행가들은 정작 이윤은 자기네들이 챙기면서 손실은 ‘국유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때론 조롱거리로, 때론 악마 취급을 당하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던 중국식 국가계획경제가, 이제 자유방임을 외쳐대던 앵글로색슨 사회의 중심부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일까?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고 온 세계정치의 대변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상 상황이 닥칠 것이란 ‘기대’는 전세계의 국경 없는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비상 상황은 더 이상 일국 단위가 아닌 범지구적인 사건이다. 세계 경제위기, 기후 변화, 테러리즘 등 ‘세계적 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적, 공간적, 시간적인 의미에서 비상상황의 ‘탈국경화’ 가 진행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세계정치 무대에서 새로운 금융정책의 장이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상 상황은 ‘사회적’으로 탈국경화되고 있다. 이는 가장 좋은 구제방안을 둘러싼 각국 정부의 경쟁에서 잘 드러나는데,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처럼 경쟁의 승자에게는 국내외적으로 불사조처럼 정치적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 그간의 완고한 국제정치 룰을 변화시키려는 권력 게임은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사이에서, 또 글로벌 경제와 정치, 초국가적 기구들 사이 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게임에서는 누구도 혼자서만 승리를 챙길 수는 없다. 마치 한 나라의 정부가 글로벌한 테러리즘과 맞서 싸울 수 없듯이, 한 나라 정부가 혼자 힘으로 기후변화와 맞서 싸울 수 없고, 한 나라 정부 혼자서 금융시장의 대파국에 대처할 수 없다.
 
비상 상황은 ‘공간적’으로도 기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극도로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금융 리스크란 계산될 수도, 만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국민국가가 중심이 된 ‘첫번째 근대’의 공간에서도 가끔씩 나타나는 대규모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적어도 만회할 수 있는 것이었고, 실제로 각국은 그 피해를 (예를 들어 금전적인 수단을 통해) 어느 정도 되돌려왔다. 그러나 만일 세계 금융 시스템이 붕괴된다면, 지구상의 기후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화한다면, 테러조직이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쥐게 된다면, 때는 이미 늦다. 이처럼 인류가 맞닥뜨린 질적으로 새로운 위협 앞에서 더 이상 ‘만회’의 논리는 설 자리가 잃게 되고, 대신 ‘예방’의 원리가 그 자리를 꿰찬다.
 
마지막으로 비상 상황의 ‘시간적’ 탈국경화는 앞서 말한 위험의 계산 불가능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든 이들은 바로 눈앞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며 으레 파국의 악숙환이 이제는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라 믿고 싶어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더 나쁜 상황이 비로소 자신들 눈앞에 닥쳐 그 희망이 산산조각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악성’ 신용이란, 마치 끝없는 폭설 속에서 일어나는 눈사태와 비슷하다. 즉 사람들은 리스크의 존재는 알지만, 언제 어디서 눈덩이가 무너져내릴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이처럼, 모든 이들을 나락으로 몰고가려 위협하는 각종 위험에 대한 인식은 그 위험에 맞선 대항 행동을 촉발시키는 동력이 된다. 일국 차원의 정치공간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 세계정치 차원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글로벌한 위험에 대한 인식은 만만찮은 대가를 치러야했다. 보통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그 인식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위험의 ‘지각’(수용)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다보니, 세계무대 차원에서 글로벌 위험에 맞서려는 시도의 유효기간도 미디어의 관심에만 크게 휘둘려왔다.
 
오늘날 동시대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물질적 상호의존성의 망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그래서 세계 위험사회의 민감한 작동기제가 아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베버와 푸코 같은 이들에게는 공포의 시나리오였던 ‘다스려지는 세계’, 곧 통제 합리성이 지금 이 순간 금융위기의 잠재적 희생자들에게 하나의 동아줄이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역설적 상황에서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은 어찌됐든 국민국가의 이기주의가 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범세계주의자(코스모폴리탄)로 탈바꿈해야한다는 점일 게다. 물론, 이는 파국에 대한 ‘기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또 다른 가능성이란 이런 움직임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일테고.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사회학)
<위험사회> 저자인 세계적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한겨레>에 세계 금융위기에 대한 특별기고를 보내 왔다. 자유방임 시장경제의 붕괴로 일어난 탈국가적 위기에 맞선 ‘국경없는 대응’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