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가는 길/이길저길-샛길(펌글)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지음 | 후마니타스, 2008)
대학원의 동학들을 보면 자신들이 왜 공부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는 듯하다. 다들 교과과정을 따라가거나 자신의 논문주제와 관련된 내용, 프로젝트에 쓸모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관심의 범위를 더 확장시키지 못한다. 사실 자리를 잡으려면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안타깝다. 백수인 내가 뭐라고 조언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담아놓은 글이 너무 길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도 드네. 이것은 담아놓은 글 중에 지식인과 관련된 글이 몇개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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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2008 05/06 뉴스메이커 773호, 최영진 기자)
지식인은 왜 재벌 앞에 침묵하는가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지음 | 후마니타스 | 1만4000원
경향신문 이대근 정치·국제에디터는 책의 서문을 통해 지식인이 두 번 죽었다고 밝힌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위대한 저항 정신의 상징인 지식인까지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진 것이 지식인의 첫 번째 죽음이다. 두 번째 죽음은 민주화 과정을 통해 구축된 지배 질서를 전복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 체제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보루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대표 역시 “지식이 권력이 되고 부가 되는 사회에서는 지식 생산자가 그 자체로 권력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지식인의 변화를 다각적이고 심도 있게 분석한 것이다. 총 10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부터 3장까지는 총론 격으로 민주화 20년 동안의 지식인의 풍경과 위기를 말한다. 4장부터 10장은 각론으로 분야별로 지식인이 처한 위기를 진단한다. 정치권력과 지식인, 경제권력과 지식인, 문화권력과 지식인 등 사회권력과 손을 잡은 지식인의 모습이 충격적이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술진흥재단(학진)의 권력이 대학교수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또 돈벌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자화상은 이 시대의 어두운 일면이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이렇게 대학과 지식인의 모습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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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책소개
한국의 지식인은 “특별한 계급”이다. 학벌 체계의 수혜자로서 다른 부분의 엘리트들과 쉽게 친분을 맺을 수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무시 못할 연고 자본을 보유한 특권층이자 기득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최고 엘리트들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식사회가 권력에 의해 식민화되거나 아니면 거꾸로 지식이 영향력 획득을 위한 투자처가 되는 현실에 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다른 영역의 엘리트들과 다름없이 평범해지고, 영악해지고, 무규범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간 지식사회에 부여했던 존경과 권위의 위임은 이제 철회할 때가 되었다. 지식인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워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경향신문의 특별기획팀은 2007년 3월 초 구성됐다. 연재에 들어가면서 특별취재팀은 ‘담론을 담론으로 전하지 말자’ ‘코멘트와 현장 케이스로 풀어내자’ ‘데이터를 직접 만들자’ 등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기획 보도 원칙을 정했다. 엑셀 프로그램 등을 이용한 보도 기법도 적극 활용했다.
‘지식인 저널리즘’의 접합도 시도했다. 특별취재팀의 기사를 메인으로 하면서 외부 기고를 한 면에 배치했다. 기고자들에게는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요청했다. 기고자의 사진을 쓰지 않고, 이름과 직책을 기고 끝에 바이라인으로 처리했다.
연재 기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08년 1월이었다. 전체 내용 구성에 있어서 체계성을 벗어나는 기사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기사에서는 축약할 수밖에 없었던 내용은 전문을 살렸다. 그 결과 기사로 연재된 내용 못지않게 한국 사회 지식인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완결된 책이 나왔다.
차례
발간에 부쳐|송영승
서문|이대근
1장 민주화 20년, 한국 지식인의 풍경
지식 찍어 내는 사회, 지성은 숨 쉬는가
한국 지식인의 풍경
지금 왜 지식인이 문제인가|장석만
대의 불가능한 사회의 지식인|고병권
2장 지식인,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한국 지식인의 이념 분포
1987년 이후 지식인상의 변화|박헌호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
한국의 지성 ‘금서’가 키웠다
3장 지식인이 말하는 지식인의 위기
지식인의 위기인가 몰락인가
자본ㆍ시장ㆍ서구 편향이 ‘지성’을 목 조른다
이상한 나라, 한국의 지식사회|박노자
4장 정치권력과 지식인
정권과 지식인
지식인의 현실 참여, 그 복합적 의미|김우창
선거와 지식인의 줄 서기
폴리페서: 정치권력과 지식인|윤해동
노무현의 ‘위원회 정부’와 지식인|전영평
5장 경제권력과 지식인
‘기업 장학금’ 유혹에 소신은 어디로?
기업 식민지, 대학
재벌 앞에 ‘자기 검열’ 빠져 드는 지식인|김상조
6장 문화권력과 지식인
혀와 글로 얻은 ‘명성’으로 정치와 손잡다
문화권력, 어떻게 만들어지나|이동연
7장 시민운동과 지식인
시민운동과 지식인 참여
시민 없는 시민운동은 없다|박상필
8장 정책지식과 지식인
국가와 자본이 만드는 정책지식
독립적 민간 싱크탱크 필요|손석춘
9장 지식인 생산 공장 미국, 그리고 학술진흥재단
지식의 종속성과 미국
미국 기업 기준이 한국 학문 ‘쥐락펴락’
국가의 학술 지원과 학문의 창의성: 학술진흥재단의 명암
지식 체계 종속 깨져야 한국 정치도 바뀐다|홍성민
10장 지식사회의 새 경향, 대중지성
대중 앞의 지식인, 대중 속의 지식인, 그리고 대중 지식인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의 지식투쟁|고병권
다중지성이란 무엇인가?|조정환
11장
[좌담] ‘지식인의 죽음’을 넘어|남재일, 박헌호, 윤해동, 장석만, 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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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기사.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이라는 이름의 과목을 수강한 학생을 탐탁치 않게 바라보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런 과목이 필수로 되어 있는 사회 또한 마찬가지이고... 소위 민주정부라고 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하에서 비판적 지성이 사라지는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향신문에서 작년 창간 60돌 특별기획 '진보개혁의 위기'로 재미를 보더니, 6월 항쟁 2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다시한번 기획기사로 낼 모양이다. 다른 언론사의 기획기사와는 차별화된 느낌이다. 앞으로의 기사도 궁금해진다.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 (경향신문, 김종목·손제민기자, 2007년 04월 22일 17:50:26)
서울대 경제학부 김수행 교수는 1989년 3월부터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마르크스 강의였다.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300명 규모의 강의실은 매번 만원이었다. 비좁은 계단을 파고들어 앉아 기어코 강의를 들었다.
91년에 이 강의를 수강했던 신모씨(36)는 “중간·기말 고사 때 1000여명이 모여 시험을 치르느라 건물 한 동을 다 빌릴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지난달 30일 오후 1시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김교수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가르치고 있었다. “케인스는 상당히 훌륭한 경제학자예요. 자기가 살던 시대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현대마르크스 경제학’ 과목. 이날 수업은 케인스의 유효 수요 이론과 장기 정체설에 관한 것이다. 210명 규모의 강의실에 40여명의 학생만 앉아 있다.
조교 정상준씨(32)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업에는 안 들어와도 시험 때 들어와서 밖에서 토론하고 ‘학습’한 가락으로 일필휘지 답을 적고 나가던 ‘고수’들이 있었다. 지금은 강의를 열심히 듣지만 판에 박힌 답안만 제출한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요즘 학생들을 보면 다들 취업에 너무 매달려. 신입생 때부터 그래. 이해는 돼. 대한상공회의소 이런 데서는 성적표에 마르크스 경제학 표시가 돼 있으면 ‘이런 수업을 왜 들었느냐’고 물어본다지”라고 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김교수는 요즘 후임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경제학부 교수가 34명인데 미국 박사가 31명이야. 비주류 경제학은 나 하나뿐이야. 올해 내가 정년퇴직하면 비주류 경제학이 없어질지 몰라. 요즘 새로 들어온 경제학과 교수들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 마르크스 경제학을 둘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가진 젊은 교수들이 많아.”
이 문제는 비주류 경제학자를 뽑을 것인가라는 단순한 임용 문제가 아니라 한국 지식 사회에 비판적 지식인의 재생산 구조가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학부 시절 김교수의 ‘마르크스’ 수업에 열광했던 인문학자 고병권씨는 ‘지식인의 비극적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김교수 같은 분들의 글이 잡지에 실리면 논쟁에 불이 붙고, 대자보도 붙이고 했는데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제는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고 말하는 이도 드문 세상이 됐다. 실용과 부가가치 창출은 대학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일부 대학의 국문학과는 ‘시나리오 학과’로 명칭을 바꿨다. 대학가 인문과학서점은 하나 둘 줄더니 요즘 대부분 문을 닫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걸쳐 전개된 ‘지식기반사회’ ‘지식기반경제’는 우리 사회가 지식을 비판이성의 관점이 아닌, 산업으로 수용하도록 주입시켰다.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시민’의 육성이 아닌, ‘시장반응형 인간’ 양성으로 변했다. 기업은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경제교과서를 만들어 노동을 모욕하고 재벌을 찬양하는 세상이 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지식인’이란 명사를 동사로 만들었다. 지식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지식iN’ 네트워크와 검색툴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식은 붕어빵처럼 대량생산되는 복제품이 된 것이다. 한때 시대 정신을 선도했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저술활동은 쓴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들만 읽는, 틀에 얽매인 지루한 논문들로 대체되고 있다. 학자는 ‘논문 작성 노동자’로 변모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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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1. 2007년 한국 지식인의 풍경 (경향신문,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2007년 04월 22일 17:26:35)
“지식인의 몰락 또는 위기 담론에 동의하는가.” 특별취재팀이 지식인들에게 던진 물음이다. 한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위기’니 ‘몰락’이니 하는 건 그 이전 지식인이 큰 힘을 쓰던 시절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건데, 과연 그랬던 적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김진애(도시건축가)는 “‘합리적 대안 생산자’ ‘대승적 소통자’로서의 지식인 역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진애는 “‘지식인의 ‘위기’니 ‘몰락’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고 말했다.
87년 이후 민주화 20년을 맞아 등장하고 있는 지식인의 죽음 논쟁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관 주도로 전 국민을 직업과 지위에 관계없이 신지식인으로 만들겠다는 김대중 정부의 발상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의 개편과 교체를 예고한 서막이었다”고 말한다. 98년 12월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12차 경제대책조정회의. 김태동 정책기획수석이 학력 위주의 지식인 개념을 독창성·능동성 위주로 확장시킨 ‘신지식인상’을 보고했다. 이듬해 초 신지식인 찾기 운동이 ‘제2의 건국’ 캠페인과 맞물려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용가리’로 272만달러 수출 계약을 성사시킨 심형래씨가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었다. 그는 신지식인 광고에 나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당신도 신지식인입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부가가치 창출의 다른 말이었다. 졸지에 ‘구지식인’으로 몰린 지식인들이 반발했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우리 사회가 지식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엄격한 비판정신과 사회적 책임감에 있을 것이다. 신지식인은 이러한 지식인의 근본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한다(경향신문 1999년 4월29일자 칼럼)”고 했다.
지식인은 이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자’가 되었다. 지식인은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고 있다. 권력에 위험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키워지고 있다. 교육부 정식 명칭은 교육‘인적자원부’이다. 사람을 어떻게 효율적인 생산 수단으로 만드는가를 고민한다는 뜻이다. 교육부가 2005년 대통령 보고에서 “다양화·특성화된 ‘시장반응형’ 인력을 양성”하고 “지식기반 경제의 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산학연 협력 활성화’를 통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시장반응형 인적 자원? 이들이 바로 새 세대의 지식인이 될 것이다.
한 계간지 편집장은 “학술지 또는 계간지에서 그야말로 ‘재미있는’ 글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담론 논쟁을 주도하는 경우도 거의 없어졌다. 모두 학진 등재지에 딱딱하고 재미없는, 심지어는 같은 전공자들도 안 읽어줄 글을 쓰느라 밤 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틀에 박힌 지식을 재생산하는 데는 학진 체제가 유용할지 몰라도, 한 시대를 뛰어 넘는 창의적인 저술, 그 저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라는 지식사회의 풍경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느 대학 교수는 “예전에는 권력이 정부에 반대되는 글쓰기를 통제하는 정도였다면 지금 학진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식인들의 글쓰기를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문 성과? 최근 한 문화재단에서는 학술상 심사를 벌였다. 심사위원 5명 중 2명이 추천대상을 내놓지 않았다. ‘사회개혁·발전과 학문업적을 연결시키는 저작’이 수상 요건이었지만 적격자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다수 학술상 주최측이 수상 요건 미흡 때문에 수상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논문의 양은 갈수록 늘지만 ‘성과’라 할만한 결과물은 갈수록 줄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교수들은 이런 체제에서 행복할까? 요즘 교수들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사귀는 데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어느 방송 진행자는 “최근 모 대선 주자 캠프 소속의 지식인이 참여한 정치 관련 토론을 진행하다, 그 지식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걸 봤다”고 말했다. 이런 살기어린 토론은 교수와 정치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잘 나가는 대선 주자 캠프에 지식인 수백명이 줄서 있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니다. 어느 대학 교수는 지식인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3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①정·관계에 진출하려면 대학에 사표를 내야 한다. ②대학에 있으면서 특정 정치 집단의 브레인이 되면 그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 ③각종 위원회에 참여한 경우 그 활동을 통해 얻은 금전적 수입과 활동내역을 대학에 보고해야 한다.
부수입 올리고 영향력 행사하며 재미는 다 보고, 학생 가르치기는 소홀히 하는데도 ‘업적평가’ 점수를 덤으로 받는 이들이 오늘날 대표적인 지식인의 한 모습이다. 이렇게 정치권력에 종속되거나, 아니면 저항하거나 양 극단 사이에 방황해 온 것이 한국 지식인 사회이다.
기성 지식인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 메카니즘이 고장난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더 이상 지식인은 막걸리 집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강의실에서의 논쟁을 통해, 감옥의 사색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다. 지식인은 미국이라는 거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은 지난달 말 미국을 제외하고 올해 가장 많은 합격생을 배출한 국가는 한국이라고 밝혔다. 35명이다. 불과 두자릿수라서 적다고 여겨진다면, 미국 이민세관국(ICE)의 최근 발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ICE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미국 내 외국인 학생 중 한국 출신이 9만3728명으로 전체(63만998명)의 14.9%를 차지, 국가별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미국 고등교육전문 주간신문 ‘고등교육 연감(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에 따르면 99년에서 2003년 사이 미국 박사 학위 취득자의 학부를 조사한 결과, 서울대가 1655명으로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의 주권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지식인은 ‘경제권력’과도 잘 어울린다.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지 못해 안달이고, 산학협동은 ‘산학일체’로 진화중이며 대기업 연구 용역비를 받는 상당수 교수들은 재벌개혁 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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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지금 왜 지식인이 문제인가 (경향신문, 장석만 충간문화연구소 소장, 2007년 04월 22일 17:27:49)
지식인은 신분적 특권이나 재산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힘을 행사한다. 지식인과 그 출신 배경이 반드시 직접적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지식인의 지식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지식인의 자유로움에 대한 주장은 이런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지식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독학으로 유명 지식인이 된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식을 통해 힘을 행사하는 정도의 지식인이 되려면 권위 있는 교육기관에 소속되어 오랫동안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동안 지식의 습득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학(同學) 끼리 유대 관계도 맺어진다. 이른바 학벌(學閥)이라는 것은 이런 친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지식인은 한편으로 신분과 계급으로부터의 상대적인 자유로움과 독립적인 사고를 자랑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집단의 이익을 위해 결속을 하며 문화적인 동질성을 도모한다.
집단으로서의 지식인은 두 가지 다른 집단을 상대한다. 하나는 지배 엘리트로서 정치적, 경제적 지배 집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피지배 집단인 일반 대중이다. 지식인은 지배 엘리트와 결탁하기도 하고, 피지배 집단에 봉사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지식인은 기존 체제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며 지배집단의 헤게모니를 정착시킨다. 후자의 경우에 지식인은 현 지배체제의 착취구조를 폭로하며 대중의 혁명의식을 고취시켜 새로운 지배체제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체제 고착이든 체제 전복이든 지식인은 자신의 무기인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어느 경우에나 지식인의 힘은 자신의 이해 타산을 숨기면서 공정하고 보편적인 수사학을 동원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지금의 체제가 강고하게 버티건, 아니면 뒤집어져서 새로운 체제가 되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 지식인이 지닌 관점을 보편성의 준거로 삼으면서 그의 상징적 권력을 인정해주는 상황이라면 지식인은 어느 쪽이라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어떠한가? 그럴 경우라면 지식인의 위기를 논하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으로서의 지식인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위기에 처한 한말과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던 일제시대이다. 기존 신분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권력 기반이 형성되는 상황에서 지식인은 당시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질곡에서 벗어날 방향을 일반 대중에게 알려주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했다.
망국의 울분을 토로하고, 독립의 희망을 간절하게 표현하면서 지식인은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구자로서 인정받았다. 더구나 위기상황 돌파의 유력한 방법으로 교육을 통한 체제 갱생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지식인은 자신의 재생산 기반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그동안 민족독립의 공통분모 아래 억눌려있던 지식인 집단의 다양한 노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의 냉전 상황에 따라 좌우의 극단적 대립을 보이면서 지식인은 양극화되었다.
이런 대립은 결국 한국전쟁으로 나타났고, 휴전과 더불어 남쪽과 북쪽의 체제는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섬기면서 서로 이질적 이데올로기의 배제와 탄압에 골몰했다. 우파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게 된 남쪽의 경우 지식인 집단은 민족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북쪽과의 경쟁에 적극 참여했다.
좌우의 민족통합 이데올로기가 억압된 상태에서, 1970년대의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경제성장을 위한 개발독재의 옹호,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인권과 민주화 지향 노선으로 나뉘어 복무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하여 대부분의 지식인은 우리 사회의 인권과 민주화 노선의 역사적 타당성에 동의하게 되었다.
민주화 노선이 대세를 점하기 시작한 1987년부터 지금에 이르는 20년 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인권과 민주화의 명제를 확산시키는 작업에 주도적으로 가담했고, 그 명제의 안정적인 정착과 함께 그동안 상대적으로 억압되었던 민족 통합의 이데올로기도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의 차이를 넘어서서 민족 통합을 이루려는 이와 같은 남쪽의 시도는 동유럽과 소련의 해체, 중국의 급속한 개혁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던 북한의 모험주의를 견제하고, 새로운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요청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처럼 민주화와 민족 통합을 동시에 이루고자 노력했고, 지식인의 담론도 대체로 이런 방향에 호응했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시기에는 인권 보장과 민주화의 장치가 제도적으로 마련되고 정착되었다. 언론에 대한 권력의 직접적 통제도 사라졌고, 그동안 금기 영역이었던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비판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공적인 자리에서 대통령이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였다.
그동안 지식인 현실 참여의 주요 통로였던 민주화 명제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고, 민족 통합에 대한 전망도 남북 교류의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부시 정권의 북한 퇴출 압박에 북한이 핵개발로 맞서면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계기로 하여 남쪽과 북쪽의 대결을 주장하며, 민족 통합의 지향을 견제하는 담론이 부각되었고, 이른바 ‘신우파’라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민주화의 실현과 정착에 따라 지식인의 민주화 명제는 구호의 단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취를 위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민족 통합의 명제는 정부의 주도 아래 검토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신우파’의 미미한 견제만 보일 뿐이다. 민주화의 명제가 현실화되고, 민족 통합의 노력이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이를 맹렬하게 요구하던 지식인은 담론의 초점을 잃고 새로운 열정을 찾아 헤매고 있다. 더구나 공산주의가 몰락한 국제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한국 사회가 강제로 포섭된 사건은 지식인의 위기의식을 첨예하게 만들고 있다.
여러 이데올로기가 각축하는 가운데 스스로 보편성을 구현한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한 지식인이 이제 신자유주의의 나팔수로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세계적인 ‘투명’ 경쟁 체제의 효율성을 당연하게 선전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역사의 종말을 외치며 자신이 절대 지존임을 자랑한다.
그 헤게모니 체제에 대항하는 지식인은 대안 없이 허풍만 떠들어대는 자이고, 현실성이 없는 자로 취급 받는다. 지식인의 상상력은 대항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공장 체제 안에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써야 한다고 선전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식인의 전통적 권력도구였던 글쓰기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바야흐로 문자시대가 가고, 새로운 구술시대와 영상시대가 오고 있는 마당에서 지식인은 자꾸 낯선 곳으로 몰리고 있다. 이전에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었던 자들이 지식인의 독점 영역에 침입하여 ‘신지식인’임을 주장한다. 그에 따라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구지식인’으로 치부되는 형편이 된다. 보편적 지식인의 요새였던 대학의 변신도 현저하다.
대학도 수요와 공급 법칙의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대학의 지식인은 상인(商人)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제 지식인은 시대의 방향을 이끄는 선구자가 아니라, 문화상품을 만들어 파는 샐러리맨의 처지가 된 것이다.
지식인은 더 이상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를 자랑하지 못한다. 그들의 지식은 문화 콘텐츠 개발에 연관될 경우에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적 동질성도 더 이상 확보될 수 없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기반인 글쓰기의 위상 변화에 보이는 그들의 당혹감일 뿐이다. 그들의 옛 열정은 사그라졌고, 그들의 상징권력은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기 때문에 바야흐로 지식인의 위기가 설왕설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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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이영희, 최장집, 강준만이 큰 영향을 미쳤다. 지도교수였던 김진균 교수가 미친 영향은 사상적으로는 미미하다.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국내 저술들 중에서 대부분의 책들을 다 읽은 듯하다. 그 중에서는 전태일 평전과 태백산맥,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나에게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해외저술을 보면 책들을 다 소장하고는 있는데, 제대로 읽지는 않았다. 맑스의 자본론부터 새로 읽어야 할 텐데, 언제 시간을 낼까.
지식인의 위기에 대한 기사는 읽어둘 만하여, 그대로 퍼왔다.
경향신문 취재팀은 이달 초 각 학문 분야와 언론·문화·출판·법조·시민사회 등 각계에서 활동 중인 지식인 100여명을 대상으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e메일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이중 74명(10면 명단 참조)이 답변을 보내왔다. 문항은 9개로 복수응답을 허용했다. 민주화 이후 20년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식인 ▲국내 저술 ▲해외 저술 ▲(지식인 사회에 영향을 준) 사건이 주요 항목이었다. ‘지식인 위기 담론’ ‘지식인의 정치 참여’ ‘지식인 사회의 문제점’ ‘향후 지식 사회의 주요 담론’ ‘새로운 지식인상’에 대해서도 물었다.
취재팀은 설문 결과를 백분율로 환산하거나 순위를 매기지 않았다. 이번 조사 결과는 민주화 이후 20년간 한국 지식 사회의 유의미한 흐름을 보여주지만 엄밀한 통계로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설문조사에 담긴 의미 (경향신문, 손제민 기자, 2007년 04월 29일 17:33:52)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친 지식인이 누구인지 묻는 이번 설문 결과에서 리영희, 백낙청, 최장집 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이 꼽히자 예상 가능했던 결과라는 지적이 다수였다. 세 사람 선정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이다. 한국 사회는 정치·사회 갈등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왔다. 따라서 정치·사회적 발언을 해온 세 사람이 선정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미성숙한 한국 사회, 지식인 사회의 빈약함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 사상의 깊이를 가진 새로운 지식인이 왜 없었는지, 있다면 왜 선정대상에서 제외됐는지라는 의문을 남기기 때문이다.
문광훈(고려대 연구교수)은 “세 분의 현실적 성취에 대해서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지식인 사회의 의견이 이렇게 일정하게 유형화 된다는 것 자체가 어떤 편향성, 나아가 협소한 지평을 반증한다고 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백낙청이 김우창보다 훨씬 영향력이 강한 인물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시대적 제한성이 강한 ‘분단체제론’보다 김우창 선생의 철학이 훨씬 더 심층적이라 할 수 있지만, 이런 부분들은 ‘정치투쟁의 과열’ 속에 가려져 잘 안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함석헌이나 유영모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것도 의미심장하다”고 했다. 그는 “사상의 깊이나 독창성으로 봐서는 두 분이 20세기 후반 국내에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인데, ‘종교적 철학’보다 ‘정치’가 우위를 점하는 세상이다 보니 그런 것”이라고 했다.
이명원(문학평론가)은 “왜 오늘의 현실 속에서는 허리 역할을 할 만한 소장 지식인의 출현이 눈에 띄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며 “지식인이 죽었다기보다는, 새로운 지식인의 등장 자체가 어려운 현실이 아닌가 한다”고 풀이했다. 윤해동(성균관대 연구교수)은 “민주화 20년을 맞은 한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지식인사회 역시 중대한 전환기에 들어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이런 지식사회의 빈곤 이유에 대해 기성 지식인들이 개인으로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김은실(이화여대 교수)은 “사실 87년 이후 대학,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80년대 백낙청, 최장집이 행사했던 것만큼의 영향력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히려 실명을 통해 지식인 사회를 고발하고 지배언론에 도전하거나 탈식민성을 강조하며 새로운 관점을 소개한 강준만이나 조한혜정 같은 사람들이 90년대 이후 변화된 한국 사회를 인식하고 설명하는데 새로운 시각들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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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3. 한국을 바꾼 지식인 (경향신문, 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2007년 04월 29일 17:33:48)
지식인들 사이에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 지식인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세 사람이다.
‘대중적 글쓰기’로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깨는 도전적 작업을 해온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90년대 이후 등장한 지식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77)는 지난해 9월 “지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사상의 은사’로 기억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시대의 흐름을 이끈 70~80년대 학번들의 이념적·사상적 출발점”(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이나 “한국사회에 보기 드문 보편주의, 국제주의자로 ‘지적 거인과 같은 존재’”(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왜 아직도 리영희인가.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는 “87년 민주화의 분수령 이후 한국사회는 새 변화를 추동할 세력을 창출하지 못했다”며 “이것이 리영희 선생의 주 활동기가 87년 이전인데도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리영희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지방 말단직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혼자 서울의 공업학교로 유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해방된 사회에서 동창생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만사에 불편하였다”고 되뇌곤 했던 그는 평생 누구와 무리지어 세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중국전문가로서의 리영희는 외신부 기자생활을 하며 단련됐다. 합동통신·조선일보에서 해·복직을 거듭하면서도 굵직한 특종들을 남겼다. 특히 그는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함과 중국 사회주의의 인본주의적 모습을 서구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 소개하는 방식으로 반공주의에 맞섰다. 리영희는 기자직과 교수직에 있는 동안 다섯 차례 구속되고 모두 1012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독재의 시대에 그의 글들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몽롱한 의식에 끼얹는 찬물 한 바가지”(강준만)였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는 힘은 사회적 발언의 중단을 선언할 만큼 스스로 자신의 육체적, 지적 한계를 인정할 때까지 그가 의미있는 비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한국사회를 ‘시장맹(盲)’ ‘북한맹(盲)’으로 만들었다”고 리영희를 본격 비판한 것은 불과 4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계간 ‘비평’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윤평중은 이번 경향신문 설문에서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리영희를 꼽았다. 그는 말했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화운동 시기의 젊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대적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그 여파는 87년 체제 이후에도 지속됨으로써 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보수진영이나 우파에서는 그 특유의 이론적 빈곤이나 도덕적 결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만한 인물이 전혀 부재하다.”
리영희는 민주화 이후 자신의 책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계속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왜일까. 그 대답은 백낙청, 최장집 등 후배지식인들의 왕성한 지적, 실천적 활동이 요구되는 현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말해준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69)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 1위로 꼽힌 것은 40년 창비 역사와 함께 해온 그의 실천적 글쓰기 덕분이다. 차병직(법무법인 한결 변호사)은 “한반도 특유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민족 문제를 고려하면서 지속적으로 분석해 왔으며 현재와 미래의 대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이라고 했고, 박명림(연세대 교수)은 “언제나 시대정신에 맞는 화두를 잘 던지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맛깔나는 문체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다”고 말했다.
백낙청은 55년 경기고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인제대 백병원을 세운 백인제·백붕제가 각각 그의 백부·친부이고, 현 인제대 이사장인 백낙환이 형이다. 스스로 ‘변칙적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말한 바 있는 백낙청은 28세 때인 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며 한국 사회의 분단현실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는 데 투신했다. 창비는 정간, 폐간, 판금 처분을 반복하면서도 “지난 40년간 비판적 연구자-문인-저술가 그룹을 한데 묶은 ‘비판지성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유지해오며”(조효제) 백낙청의 실천적 지성 활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백낙청의 담론 주도력 뒤에는 “유일하게 시장에서 성공한 비판적 지식인 미디어인 창비”(류준필 성균관대 연구교수)가 있었던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에 문학이 기여해야 한다는 ‘민족문학론’을 펴온 백낙청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최근 그 이름에서 ‘민족’을 떼느냐 마느냐 문제로 논란을 벌일 때 민족의 삭제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뿌리는 여전히 민족과 통일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최근 이명원(문학평론가)과의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상당수의 진보적 학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보수 논객이나 학자보다 분단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마치 이 사회가 분단과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없고, 분단이라는 것이 하나의 부수적인 사실로 있는 것처럼 전제를 깔고, 분단 안된 사회의 척도로 진보 보수를 따지는 경향이 많아요. 최장집 교수도 그런 예의 하나이고, 손호철 교수도 그런 경향이 강하고, 그런 분들이 많아요.”
일관되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학문적, 실천적 역량을 쏟았다는 점에서 최장집(고려대 교수·63)은 백낙청에 비견된다. 최장집은 강릉의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고려대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한 4·19 세대다. 그는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1년여 일하기도 했으며 잡지 ‘세대’에서 기자생활을 거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만개했던 각종 변혁이론들이 91년 소련 붕괴로 몇 년 못가 시들해졌을 때 최장집은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1983년 40세 늦깎이 박사를 받고 돌아온 최장집은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80년대 초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제3세대 학자군’을 이끌며 그람시류의 네오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비판이론을 소개했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서구의 눈을 빌려오되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왔던 흐름을 꿰뚫어보고 현실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최교수 정치학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최장집은 외형적 자유화가 아닌 실질적 민주화를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국 민주주의 이론’(1993) 때부터 피력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하다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에 휘말려 1년 만에 학교로 돌아온 뒤로 그의 공부는 더욱 깊어졌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이 책 제목이 하나의 관용어로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학문적 천착보다는 사회적 활동으로 유명해진 학자도 아니고, 순수한 학문의 세계에 갇혀 있는 교수도 아닌, 이 둘을 아우르는 이론적 실천가라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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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한국의 지성 ‘금서’가 키웠다 (경향신문, 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2007년 04월 29일 17:36:26)
◇ 국내서적
지식인들이 뽑은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저술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른바 ‘금서목록’에 올랐던 책들이 주류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23명)과 ‘자본론’(18명), ‘전환시대의 논리’(15명)는 대표적인 금서였으며 ‘태백산맥’(10명)은 불과 2년 전까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계류돼 있었다. 79년 10·26 사태를 열흘 앞두고 한길사에서 출간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은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였다.
송건호·오익환·백기완·진덕규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대다수 응답자들이 “대학시절 지하 이념서클의 의식화 교재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이 책 내용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발간 당시는 상식이 불온하던 시절이었다.
김언호(한길사 사장)는 “애초 송건호 선생과 책을 기획할 때는 ‘한 5000권 나가려나’ 예상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40여만권이 나간 초특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 실린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였어요. 진덕규, 임종국 같은 필자들도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관계 없는 분들이었죠. 그런 책인데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1차적으로 독자들이, 즉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정말 대단했어요. 10·26이 터져 책이 판금될 때까지 열흘 만에 4000권이 나갔으니…. 판금됐다고 그 책을 안 읽었겠어요. 판금시키면 오히려 복사본이 더 많이 나돌던 때였죠.”
해전사가 한국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줬다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깨우쳐 준 책이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으로 드러난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한 본질을 폭로하고, 중국사회주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냉전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았던 대학생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으로 하여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줬으며 김세균(서울대 교수)이 “밤 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의 ‘우상과 이성’(2명)과 함께 “사회과학도로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 고마운 책”(신광영 중앙대 교수)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광영은 “이 저술로 인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가능함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조정래(소설가)의 ‘태백산맥’에 대해 이광일(성공회대 교수)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준 책은 태백산맥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냉전의 족쇄를 깨는 데 일조했다”고 평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소련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항한 우파-전통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 보편성을 획득한 솔제니친이 있다면, 한국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한 좌파-민족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한 조정래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복거일(소설가·미래문화포럼 대표)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태백산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2000년대에 나온 책으로는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3명), 임지현·권혁범·박노자·임은실 등이 함께 쓴 ‘우리 안의 파시즘’(2명)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 해외서적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 저술로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꼽은 ‘자본론’(18명)은 1980년대 후반 과학적인 변혁이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첫 한글 번역본이 나온 87~89년 이전에도 일본어 번역본 등의 형태로 은밀하게 유통됐지만 본격적으로 학생들 손에 쥐어진 것은 87년과 89년 강신준(동아대 교수)과 김수행(서울대 교수)이 잇달아 번역본을 내면서부터이다. 고병권(수유+너머 대표)은 “87년 이후 첫 10년간이 지식사회가 마르크스주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후 10년간은 마르크스주의에 회의하거나 그것을 전환시키려 시도했던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화 직후 서울대 교수 김수행을 통해 자본론 1~3권을 번역해낸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자본론은 지금도 해마다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라며 “다만 책의 결론에만 줄 치는 운동권식 독법보다는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논리를 따라가는 자본론 읽기가 더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81년 미국에서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6명)은 번역도 되기 전에 널리 읽히며 냉전체제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현대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우리를 옥죄어 온 냉전체제를 뒤집어보게 해 준 의미를 높이 살만하다”고 했다. 김원(서강대 연구교수)은 “냉전적 시각, 빈약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한국현대사 해석을 하던 한국학계에 ‘지적인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8명)은 98년 서울대 교수인 한상진·박찬욱에 의해 번역돼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와 ‘중도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얘기되며 대안적 진보이념을 갈구하던 시점에 소개돼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진영은 공개적으로는 기든스를 비판하면서, 자기 방에서는 몰래 정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책이 소개된 90년대 후반을 거쳐 최근 와서 대안적 진보이념으로 사회국가, 사회투자 국가, 사회서비스 국가, 사회연대 국가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거의 모두 기든스식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일종의 ‘거명되지 않는 영향력, ‘스텔스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조효제는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저술은 권력과 담론에 관한 인식 전환의 계기를 줬다”면서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한국적 문제의식의 지형에 맞지 않았음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대중 서적들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대중사회 수준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소설, 성공학 번역서들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전영평(대구대 교수)은 “지식인 집단보다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으로 파악한다면 해리포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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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백낙청·리영희·최장집…한국사회 가장 큰 영향” (경향신문, 2007년 04월 29일 18:16:25)
‘위기론’ 설문조사 분석 (경향신문,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2007년 05월 01일 17:45:19)
민주화 이후 20년간 한국 지식인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은 ‘IMF 외환위기(22명)’ ‘소련 및 동구권의 현실사회주의 붕괴(21명)’ ‘87항쟁(15명)’ 순서였다. ‘광주민주화항쟁(8명)’ ‘김대중 정부 등장(6명)’ ‘노무현 정부 등장(6명)’ ‘남북정상회담 및 6·15공동성명(6명)’ ‘황우석 교수 사건(5명)’ ‘송두율 교수 사건(4명)’도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조사됐다.
‘지식인이 위기에 처했다는 주장에 동의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74명 중 51명이 동의(43명)하거나 부분적으로 동의(8명)한다고 답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 이는 19명이었다.
위기에 동의한 51명(복수응답 포함 81명)이 가장 많이 꼽은 위기의 원인은 ‘신자유주의 및 세계화’(10명)이다. 이어 ‘현실에 대한 성찰 및 비판의식 부재’(7명), ‘정치(국가) 권력 종속 및 결탁’(6명), ‘비전 및 대안 창출 능력 약화 및 부재’(6명), ‘지식의 대중화 및 정보화’(6명) 등도 위기의 주요 이유로 지적됐다.
다음으로 ‘자본 종속 및 시장 논리 지배’(3명), ‘연구 및 학문성 부족’(3명), ‘대중과의 소통 부재’(3명) 등이 위기를 불러온 원인으로 지목됐다. ▲관념적·추상적 담론(2명) ▲서구 학문 중심주의 및 종속(2명) ▲공적인 사고의 결핍(2명) ▲이념 대립·편향(2명)도 응답자들이 밝힌 위기 원인이었다.
‘지식인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74명 중 70명(복수응답 106명)이 답했다. ‘서구 학문 중심주의 및 종속’(8명)이라고 답한 이가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 ‘대안·비전 제시 능력 부재’(6명), ‘관념적·추상적 담론’(6명), ‘지적 불성실 및 연구 성과 부족’(6명), ‘신자유주의 및 세계화’(5명), ‘자본 종속 및 시장 논리 지배’(5명), ‘정치화 및 권력 유착’(2명) 등의 순서였다.
이밖에 ‘사익 추구 및 배금 사조’(5명), ‘학연·지연 등 패거리주의’(5명), ‘대학사회 먹이사슬 구조’(2명), ‘특권의식 및 권위주의’(3명), ‘엄숙주의·도덕주의’(2명) 등이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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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4. 지식인, 위기를 말하다 (경향신문,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2007년 05월 01일 17:45:37)
경향신문이 특집기획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을 위해 실시한 설문에서 ‘지식인 위기론에 동의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많은 지식인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定義)로 답변을 시작했다. ‘지식인의 위기·몰락’에 동의한다고 밝힌 최장집(고려대 교수)은 “비판적 입장에서 현실 사회·정치 체제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 발전 방향이나 미래상에 대해 총체적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에 충실한 근대화 이행 시기 유럽 지식인들의 전통이 한국 사회에도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개념도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비판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인텔리겐치아형 지식인의 의미가 중심이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최장집의 지식인 위기·몰락론은 그가 제시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등 ‘민주화 이후 20년’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직결된다. 그는 “지식인의 몰락은 민주화 이후 ‘군부 독재 반대’ ‘불의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쟁’의 의미를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는 대안적 비전을 갖는 데 실패한 결과”라고 말했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은 “동의하는 측면과 동의하지 않는 측면이 동시에 있다”고 전제한 뒤 “인텔리겐치아적 지식인의 위기라는 측면에는 동의한다”고 말했다. 최장집처럼 그도 한국적 지식인 전통이 인텔리겐차에 있음을 지적했다. “자신의 전문 지식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지식인(Intellectual)’의 전통이 강한 서유럽이나 미국과는 달리 동유럽이나 한반도의 경우 정통성이 취약한 권력에 대한 저항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인텔리겐치아적 지식인의 전통이 강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 이후 이른바 인텔리겐치아적 지식인이 대거 권력에 참여하고 자신의 전문 지식을 통해 국가 권력에 봉사하는 ‘지식인’으로 변신하면서 과거 인텔리겐치아적 지식인이 가졌던 도덕적 위상 등이 붕괴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군정에서 문민으로의 체제 전환, 여야간 정권 교체 등 민주화 20년간 권력 이동을 거치는 동안 ‘권력과 지식인 관계’도 변하면서 지식인이 위기에 빠졌다는 설명이다.
조국(서울대 교수)도 “민간·민선 정부의 출범 이후 비판적 지식인이 정부에 참여하는 범위와 수가 늘면서 권력과 지식인 간에 존재해야 할 긴장이 약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교수는 “위기의 주원인은 진보 정권 출범 이후 소위 진보 지식인들이 대거 정권에 투항해 어용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학자는 “과거의 전투적 민주화 운동 진영이 국가에 대항해 진척시켰던 기본권 차원의 민주화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면서도 “그러나 이후 국가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에서 미래지향적 틀을 만들지 못했고, 과거처럼 선명성과 상징성을 띠는 데도 실패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화에 따른 사회 다원화, 권위의 파괴 등을 들어 ‘인텔리겐치아적 지식인의 위기’는 비정상이 아닌, 불가피한 현상이란 해석도 제기됐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은 “유교적 습속에다 식민지 상황, 군사독재 아래서 지식인의 전범은 저항적이고 체제 비판적인 우국충정의 양심지사였다. 그 문학성과 별 관계없이 박정희 시절 김지하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이 실례이고, 고은 시인이나 리영희 교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윤평중은 “그러나 87년 이후 민주주의의 빠른 성장이 오히려 지식인 사회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먼 배경으로 작용했다”며 “거대한 적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계몽적 지식인의 목소리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식인의 전문화가 가속화되고, 전자 민주주의의 도래, 권위의 파괴 등이 맞물려 지식인의 위기 소리가 나온다”고 설명했다.
신광영(중앙대 교수)은 지식인의 위기를 ‘민주화의 역설’로 설명했다. 그는 “지식인의 위기는 민주화 운동의 성공에 따른 사회 다원화의 산물”이라며 “다원화되면서 각 영역에서 독자적인 지식과 활동 논리가 등장했고, 과거와 같은 포괄적 이론이나 지식의 필요성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식인에 대한 요구와 기대도 ‘지사적 지식인’에서 ‘전문적 지식인’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지식 성격의 변화, 지식 기반·토대의 변화, 전문가의 등장, 지식인의 권위 하락은 하나의 맥락속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재일(한국언론재단 연구위원)은 “유기적 지식인의 몰락과 인문학의 몰락은 세계적인 추세다. 정보화 사회는 지식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라며 “일제 치하, 군사 독재 아래서 저항세력의 구심점으로 지사적 지식인의 존재가 요구됐지만 현재는 기능적 전문가로 대체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지식인의 자질 문제라기보다는 토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적 추세”라는 분석이다.
어느 대학의 한 교수는 “‘위기’니 ‘몰락’이니 하는 건 그 이전에 지식인이 큰 힘을 쓰던 시절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건데, 과연 그랬던 적이 있는지 의문이지만 상대적 의미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지식 정보 사회로의 진입에 따른 지식 성격의 변화에 있다”고 말했다. 실용적 가치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전통적 지식인의 입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도 “신비화되어 있던 지식인들의 실체를 점차 확인하게 되었고 정보와 지식의 일상화 및 대중화도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은 “칼 만하임의 ‘자유부동하는 지식인’이나 안토니오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 등으로 상징되어온, 지식인의 특별한 지위가 점차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중기(한신대 교수)는 “지식인은 지식 테크니션이 아니다”라며 “진지하게 사회와 민중에 대해 고민하고 학술적·운동적 실천으로 옮기는 지식인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현연(가톨릭대 교수)은 “우리 학문과 지식 체계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고, 특권·엘리트 의식이 팽배해 있으며 현실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위기론에 동의하지만, 그 위기를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는 지식인도 있다. 이광백(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지식인의 위기는 지식인과 일반인을 구분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서 “모든 사람이 지식인이 되는 ‘지식 정보화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이며, 지식인의 위기는 역으로 사회의 진보”라고 말했다.
임헌영(문학평론가)은 위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지식인이 비판의식을 전제로 한 개념이라면 한국사회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나 여전히 지식인은 강력하게 존재한다. 인류 사회에 부패와 부정과 평화 위협과 인권 탄압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식인은 강력하게 부각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보(연세대 교수)도 “위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식인의 기능화, 지식인 사회의 권력화 등 많은 문제점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성찰과 미래의 대안을 희구하는 욕구가 어느 나라보다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이환(서울산업대 교수)도 “지식인의 사회적 발언권이나 중요성이 과거보다 크게 감소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사회가 정상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국에서 지식인의 위상은 외국에 비해 왜소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명희(공주대 역사교육)도 “현대는 지식 기반 사회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지식인의 역할은 더욱 증대되고 있다. 다만 과거의 지식인상이 몰락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지식인상이 정립되지 않아 혼란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을 지식인의 위기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힌 지식인들의 말속에도 지식인 사회에 대한 회의·절망이 깔려 있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현재에 이른 한국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의 주역이 결코 지식인일 수 없기 때문이고, 동시에 한국 사회의 현실이 절망적·부정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책임은 결코 지식인에게만 물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상조(한성대 교수)는 “기존의 지식 패러다임이 현실 분석과 미래 전망의 힘을 상실하였다는 의미에서 위기를 언급할 수는 있겠으나, 이것은 한국 지식인만의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문제는 지식인 자체라기보다는 지식인과 사회 일반(대중·정치인·언론) 간의 소통 메커니즘의 부재이고, 이는 한국 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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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자본·시장·서구 편향이 ‘지성’을 목조른다 (경향신문,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2007년 05월 01일 17:45:11)
경향신문의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 설문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인의 죽음’을 부른 요인이 ‘신자유주의 및 세계화’ ‘자본 종속과 시장 논리 지배’ ‘서구 학문 중심주의 및 의존’이라는 것이다. 서구 학문 중심주의라고 할 때 서구는 사실 미국을 의미한다. 5월 현재 서울대 사회과학대 경제학과 교수 34명 중 31명, 정치학과 11명 중 10명, 외교학과 11명 중 10명, 사회학과 14명 중 9명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4개 학과 교수 70명 중 61명, 87%가 미국 박사다. 비단 서울대만의 사례는 아니다. 다른 주요 대학 교수들의 미국 박사 비율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학문 편중 현상은 연구·방법론의 획일화, 학문적 종속, 미국적 가치관의 확산 등을 낳고 있다. 어느 대학 교수는 미국박사 독점체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해외에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고 있는 한국인 교수가 모국에서 연구를 하고 싶어 국내 어느 대학에 여러 차례 지원했는데 계속 떨어졌다. 임용 탈락의 이유는 미국 박사가 아니라 유럽 박사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교수는 경향신문 설문에 응하면서 “가슴 아픈 이야기”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미국 박사가 많은 이른바 주요 대학 인문 사회 분야 특정학과 교수진의 자녀 교육을 점검해보면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이다. 자녀를 미국에서 키우는 교수들이 많다. 심지어 어느 대학 어느 학과는 방학 중엔 학과 교수회의를 미국에서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방학만 되면 자녀를 보러 다 미국에 가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사명? 가소로운 소리다. 기러기 아빠의 사명이라는 게 훨씬 더 어울린다.”
서구 학문의 ‘자기화’ ‘한국화’를 해내지 못하는 지식 사회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김원(서강대 연구교수)은 ‘지식의 수입-복제’ 문제를 거론하며 “대부분 해외 학위자들(또는 선구적인 개념 도입자들)의 자극에 따라 새로운 문제틀이 제기되지만 이를 ‘자기화’해서 변용시키려는 시도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도 “서구의 경험을 어설프게 원용하는 깊이 없고 비현실적인 지식 사회의 풍토가 문제”라며 “지식 상품 시장이 정치 권력 시장보다 더 천박하고 무책임하다”고 말했다.
미국 중심주의가 빚어낸 한국 지식인의 무지를 지적한 이들도 있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아프리카 수단의 다르푸르 학살을 예로 들며 “미국만 바라보는 한국에서 다르푸르 사건에 대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는 지식인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취재팀이 한국언론재단 언론사 종합 뉴스 데이터베이스인 카인즈(KINDS)를 검색한 결과 다르푸르 사태가 일어난 2003년 2월 이후부터 2007년 5월 현재까지 이와 관련한 지식인 칼럼은 모두 9개(경향신문 3개·동아일보 1개·세계일보 3개·한겨레 2개)였다. 이 중 한국인이 쓴 것은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의 한겨레 기고뿐이다.
조효제는 이어 “한국을 해석할 때도 지적 준거는 무의식적으로 서구에 편향돼 있다. 서구의 2류, 3류 학자는 높이 치면서 한국의 1류 학자는 대접하지 않는데 이 점은 진보·보수 진영 모두 똑같다”고 전했다. 그는 “진보 진영의 지적 사대주의도 심각한 상태”라며 “외국에서 나오는 낮은 수준의 진보 담론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그대로 가져다 베끼는 경향이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지식인 사회의 문제점은) 세계를 잘 모른다는 점이다. 김수영과 장폴 사르트르는 똑같이 지식인을 ‘세계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그런데 한국의 이른바 지식인의 대부분은 세계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고민하기는커녕 세계를 잘 모르는 자신에 대한 고민조차 없다.”
미국 박사로 대표되는 학문 편중, 지식인 재생산 문제는 신자유주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최갑수(서울대 교수)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대학교수 자리는 젊은 학자들에게 너무 좁은 데다, 충원되더라도 미국 박사로 채워진다”며 “교수가 되어도 연구 여건은 미국 대학에 훨씬 뒤떨어지지만 업적은 미국보다 더 요구한다”고 말했다.
박상훈(후마니타스 주간)은 “대학은 이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이끄는 전당이 아닌 ‘신자유주의 세계화 논리의 생산지이자 이를 교육하는 기관’이 되었다”고 말했다. 나임윤경(연세대 교수)은 “(지식인의 위기는) 지식인 사이의 소통과 지식인들의 사회 참여가 점점 적어지고 있기 때문에 비롯됐다”며 “교수들의 경우, 세계화라는 엄청난 물결 속에서 개인적인 업적에만 몰두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체제가 구축되고 있어 현실 참여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 및 세계화’ 문제는 지식인 사회의 자본 종속 현상과도 이어지고 있다.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은 지식 사회의 신자유주의 득세를 프로젝트비, 연구비 등 돈의 문제로 설명했다. “지식인이 소위 전문가라는 이름의 지식 노동자가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촉발하는 역할을 떠나 지식을 그저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지식인의 세계에 돈(프로젝트, 연구비)이 흘러들어와 자신의 관심사나 대중적 관심사보다는 돈이 되는 연구를 하게 된 게 아닌가.”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교수)는 돈을 매개로 한 국가·기업의 학술 지배, 그로 인한 지식인의 종속 문제를 지적했다. “학술진흥재단과 기업들의 연구비 없이는 이미 학계가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이 곳으로부터 연구비를 받는 게 학술 활동의 목적이 되다시피했다.”
고세훈(고려대 교수)도 “한국에서 지식은 그저 보상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제도적 지식세계에 편입되면 권력이나 돈과 무관한 의미 있는 연구를 진행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식인의 위기란 게 있다면 일차적으로 지식인의 책임이겠지만 단기적,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는 대학 안팎의 연구비 제도 자체도 큰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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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Ⅱ-9 이상한 나라, 한국의 지식사회 - 박노자 노르웨이 국립 오슬로대 교수 (경향,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2007년 06월 21일 18:25:16)
-지식인이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 사회 범주에서 이야기하자면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지식 노동자죠. 자본과 국가에 필요한 전문 지식을 자본과 국가에 고용되어서 제공해주는 특수 노동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본과 국가 존재의 당연성을 대중한테 설명하고, 이 질서가 유익한 질서이고 합리적 질서라는 담론을 사회에 유포시킴으로써 기본 질서를 합리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지요. 미국 민주주의의 경우 펜타곤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아무런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요. 정확한 의미에서는 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습니다. 노엄 촘스키 말대로라면 민주당, 공화당도 ‘대자본 당’입니다. 야당이 없어요. 두 여당 사이에 전쟁이 있는 거지요. 민주사회라 부르기에 수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지식인이나 정치학 가르치는 교수들 중 열에 여덟아홉은 민주사회라고 부릅니다. 노엄 촘스키나 하워드 진 같은 사람은 극소수예요. 반대로 지식인을 진보적 의미에서 보면, 이 사회의 생산 구조, 소유 구조에 대해 문제 제기하고, 이 사회의 구조가 이 사회의 생산력 발전 수준에 알맞게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또 인성을 황폐화시키는 지금과 같은 사회 정치적인 구조를 어떻게 좀더 환경, 인간 친화적으로 바꿀 수 있는가, 폐단을 극복해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가를 탐색하는 사람들을 지식인이라고 봐야죠. (이런 지식인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다수가 될 수가 없죠.”
-해방 이후 지식사회를 보면 지식인들은 권력에 저항하거나 아니면 추종하거나 하는 두가지 선택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교수라는 아주 특별한 사회 위치를 가진 사람은 1960, 70년대 와서 권력자들로부터 러브공세를 받았죠.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해서 고속 압축 성장을 지향할 때 브레인이 필요했습니다. 정통성 없는 권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지식인이 필요했어요. 평가 교수단을 만들어서 고속 성장 드라이브에 필요한 과제를 맡겼고, 교수들의 권위를 이용해서 고속 성장의 어두운 면을 정당화시켰습니다. (대표적 인물로) 철학자 박종홍이 있었고, 이선근이란 어용 사학자의 국난극복사가 있었고, 대단히 많았습니다. 실제로는 유신 시절을 보면 반정부 투쟁 지식인 중에서는 대학교수가 없었어요. 함석헌 선생, 송건호 선생이 계셨지만 교수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대학교수의 경우에는 강만길, 백낙청 선생 등 해직당하신 분들이 계십니다만, 이분들은 민중운동에 필요한 이론을 제공한 부분은 있지만 운동과 직접적 관계를 맺었다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 권력자들이 대학교수 집단을 대단히 온건화시켰어요.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에는 진보적 교수 부류가 소수지만 생겨났는데 역시 자본과 국가가 강력히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온할 것 같은 사람은 교수로 뽑지 않는 게 지금 매우 쉽습니다. 정치적 문제뿐만 아니라 순응적이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학 재단들이 알아서 조치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게 아닌가 싶어요. 또 한가지는 지금 같으면 시간 강사 몇년 않고는 교수할 수 없는 분위기인데, 시간 강사 하는 것이 생계 해결 못할 직업이에요. 박사 과정 들어가는 사람들 보면 가난뱅이 출신들 별로 없어요. 십중팔구 중산층 그 이상 출신인데, 그들은 대한민국에 대해 불만조차 없지요.”
-대선 정국이라서 그런지 권력과 지식인 관계, 권력을 좇는 지식인들의 행태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 문인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문열·황석영의 작품 많이 번역했어요. 저로서는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황석영 작가의 소설 ‘무기의 그늘’은 제국주의 전쟁의 실체를 예술적인 수단으로 보여줌으로써 비판적 사실주의의 백미를 우리한테 보여준, 문학사에서는 기념비적 작품이죠. 문제는 뭐냐면 70, 80, 90년대를 지나 중도우파가 등장하면서 그분들이 싸웠던 독재는 없어지고, 지금 새로운 독재 권력이 생겼습니다. 그게 자본의 독재죠. 중도우파가 하수인으로 섬기고 있는 재벌의 독재입니다. 기업에 예속되어 있고 노예화되어 있는 사회로 지금 접어든 것인데, 70~80년대에 등단하시고, 여태까지 문단을 주도해오신 분들은 이 변화를 거의 느끼지 못한 것 같아요. 여전히 이 사회는 민주화 단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중도우파의 영향력을 벗어나야 황석영 선생님도 사회에 유의미한 발언을 하실 수 있는데, 지금 황석영 선생의 견해는 그렇지 못하시는 게 아닌가, 매우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지난번 황석영 선생이 저를 아주 놀라게 만든 것은 손학규를 지지하면 어떨까라는 뉘앙스를 풍기신 겁니다. 뭐랄까 노무현이라는 자본의 하수인 대신에 훨씬 더 자본에 친화적인, 또 하나의 하수인을 받들자는 이야기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전향한 경험 있는, 자본에 백기투항한 사람을 우리가 진보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이신데, 그만큼 지금 사회의 급선무가 무엇인지 황석영 선생이 파악 못하신다고 봐야 합니다. 이 분들의 영향력이 문단에서 대단히 강하기 때문에 문단의 급진화,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불리한 계층, 피해 계층의 투쟁을 막는, 지식의 힘으로 작동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시민운동과 지식인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시민사회 대표적 지식인들도 정치 권력과 이래저래 연관을 맺고 있는데요.
“한국 시민사회의 큰 문제는 극단적으로 위계 서열화되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참여연대나 경실련 특히 경실련을 주도하는 층은 명망가층이고요. 말 그대로 상당한 권위와 권력을 갖고 있지요. 그런데 밑으로 갈수록 환경이 열악해요. 참여연대 밑에 분들이 간사급 활동가들이 노조 만들고 싶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명망가들이나 지식권력 소유자들은 시민운동을 발판삼아 보수 정계에 영입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시민운동 단체들이 정부에 이용되고 한국의 지배자들에게 이용되고, 하류층의 급진화를 막아주는 완충지대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되는 부분이 있는 거죠. 특정 시민 단체의 고급 활동가가 정부에 영입될 경우, 그 단체로서는 정부에 대해 해야 할말, 현정부를 범죄정부라고 할 수 있어야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는 힘듭니다.”
-지식인에는 국책연구원에 소속된 ‘정책 지식인’들도 있습니다. 국가에 소속되어 있어서 학자·연구자로서의 소신을 지키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뉴스를 보면 교실 붕괴든 학교폭력이든 비정규직 노동 문제든 사회현상에 대한 학자의 의견을 묻고 싶다고 할 때 늘 찾아가는 사람이 교수 혹은 국책연구원이지요. 거기에는 학교에서 취직 못한 고급 전문가들이 다행히 취직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책연구원은 아무래도 전제 조건상 독립적이기 대단히 어렵지 않습니까. 한국개발연구원이라든가 경제 관련 연구원에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는 바른말을 거의 하지 못하는데, 국책연구원의 한계성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대중들한테 국책연구원의 말이 거의 진리로 비쳐진다는 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인은 별 권위가 없어요. 종교인도 자기 신도 말고는 권위가 없지요. 국책연구원에 대해서는, 이 분야 전문가라는 확고한 의식이 대중의 머리에 각인되어 있어요. FTA 같은 망국적 실책을 지지한다든가, 농업 분야 손실 덜 본다고 말하면서 FTA 찬성 담론을 주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어요. 권위도 별로 없는 사회에서 나름의 권위를 갖고 있고, 그 권위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용되는 것이죠.”
-대학이 비정규직 강사를 착취한다고 하셨는데, 이 문제는 학문 후속세대 양성 문제와도 관계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강남의 명문고나 특수목적고를 나와 명문대에 진학한 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지식인이 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피지배자가 지식 권력, 지식이라는 영역에 어느 정도 진입할 수 있고, 진입해서는 지배 관계를 청산하는 쪽으로 사회를 평등화할 수 있는 사회라면, 그런 자본주의라면 덜 나쁜 자본주의예요. 노르웨이마저도 피지배층으로서 지식의 영역에 들어가는 데 나름의 부담이 있는 겁니다. 한국 사회는 (말할 것도 없이)가난뱅이에 대한 우민화와 지식 영역으로 가난뱅이를 들여보내지 않는 제한이 가면 갈수록 많아지고 있어요. 우리 지배자들이 선진화라는 단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지금 후진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선진화는 가난뱅이도 지식 권력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말하는데, 한국은 여태까지 있었던 가능성마저 봉쇄되어 가는 거죠. 출세의 좋은 발판이 되는 명문대에 들어간다는 그 자체는 일부 사회 계층에 한정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는 명문대 학생 중에 생산직 노동자 자녀 비율이 10%를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이 사회 교수들 중에는 60, 70%가 유학파들이고, 그 중에서도 압도적 다수는 도미 유학파입니다. 유학파에 속한다는 게 주류를 의미합니다. 유학파에 속하자면 유학이라는 고비용의 문화 자본축적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국가가 거의 지원하지 않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피지배 계층 출신자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한국 사회는 명문대 입학, 다음에 유학, 귀국 뒤에는 시간강사라는 시련기의 여러 필터 장치를 둬서 가난뱅이가 한국 사회 지식 담론을 주도하는 교수층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노무현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선진화는 단순히 꿈이 아니고 악질적 기만이죠.”
-많은 지식인들이 학술진흥재단(학진)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학진은 우선 무엇이 학술적인가, 또 어떤 게 학술지이고 등재지인가 즉 학술성을 규정하는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진이 어떤 잡지만 학술지라고 규정하게 됨으로써 수많은 진보 계간지나 잡지가 경제 위기를 느끼는 거죠. 교수들은 학술지에 기고해야 점수가 올라가는데 학술지로 인정 않는 학술지에 기고하면 허사가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녹색평론 같은 매체는 학술지에 등재 안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면 거기 기고하는 교수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지죠. 학교의 진보적 담론을 대중화할 수 있는 그런 매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발생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올해는 민주화 2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학계에서는 87년체제에 대해 많은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민주화 20주년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민주화라는 기만적 주술부터 풀어놨으면 좋겠습니다. 민주화된 적 없잖아요. 민주화라는 게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기만 중에 가장 나쁜 기만 아닌가 싶습니다. 제도적 정당 경쟁이 도입된 건 사실이고, 군사 집단 물러나서 숨겨져 있는 자본 독재 체제로 접어든 것은 사실입니다만, 민주화는 자기 기만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는 경제 부문에서는 기초적 민주주의도 없습니다. 유럽 대다수 기업의 운영위원회를 보면, 노동자들이 대표 3분의 1을 차지하거든요. 한국 사회에서 경영 참여가 있습니까. 가장 절박하고 가장 필요한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아요. 한국 대학에 민주주의가 있습니까. 두발 규제 있는 학교에서는 민주주의 ‘민’자도 맞지 않아요. 우리가 ‘민주주의 없는 민주화’예요. 한국 지식인들이 이 사실에 눈을 떠가지고, 진실된 의미의 민주화 투쟁 다시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진실된 의미의 민주화 투쟁은 거대 기업의 사회 지배에 대한 투쟁이기도 하고, 일자리 민주주의,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투쟁이기도 하고, 양심수 석방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고, 비정규 노동의 정규화·조직화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투쟁에 지식인이 앞서야 하고, 그걸 못하면 부끄러워야 하는데 우리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게 유교에서는 아주 큰 덕목인데, 그게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지식인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1970년에 전태일의 분신 자살이 있지 않았습니까. 이 사건이 한국 사회 수많은 지식인들을 일깨워줬습니다. 한국 노동 운동을 일깨운 데 있어서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지식이들이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 되는 어떤 결정적 전환점이 된 거죠.
지금도 해마다 수많은 전태일들이 분신 자살하기도 하고 투쟁하다가 죽기도 합니다. 한국 감옥들이 양심수로 아직 붐비고 있어요. 여호와의증인이 많지만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제외하고도, 업무방해죄니 집시법 위반이니,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이니 같은, 노동자들의 약간의 자기 방어 행위도 가혹하게 폭력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김성환 삼성일반노조위원장처럼 비판이 명예훼손이 된, 재벌이 만든 양심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감옥이 양심수로 붐비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 교수들 중에 양심수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양심수를 계속 생산하는 사회가 도대체 어떤 사회인가라는 것에 대해 고심해야 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교수를 할 생각은 없습니까.
“그랬으면 제일 편했을 겁니다. 한국에서 교수 못하는 게 자리가 안나는 이유도 있지만, 설사 자리가 나도 한국 교수로 봉직한다는 것은 몇가지 한계성이 있다고 봐야죠. 예컨대 사립대의 경우, 사회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도, 대학 재단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습니다. 국립대 교수라 하더라도 쉽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죠. 공무원이고 공복인데, 징병제 문제라든가, 병역거부 문제라든가 대한민국 공무원의 몸으로 그 말을 진실되게 할 수 있을까….”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대선 구도를 ‘중도 우파의 종말’ ‘신자유주의 심판’이라고 규정하셨는데요.
“중도 우파(노무현 정권)의 종말이라고 봐야지요. 노무현 정권의 가장 독한 정책은 이라크 파병이었어요. 미국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군사 모험에 한국의 중도우파가 이용될 정도밖에 안된다면 이걸 중도우파, 중도라고 부를 만한 근거가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요. 극우와 중도우파를 구별하는 여러 기준 중 하나는 대외 정책에 있어서 대미 태도인데, 바뀌어가는 세계 질서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이라도 잡을 수 있는가는 중도우파의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균형 잡기는커녕 숭미주의를 극대화시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파병해서 사람(오종수 중위)까지 죽었잖아요. 파병이 인간의 희생을 가져왔다면 이건 범죄죠. 김선일씨 때도 범죄라고 규정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범죄를 저지른 뒤에는 중도우파에서 중도 두 글자를 빼버려야 합니다. 그냥 우파인데, 문제는 이들이 한나라당과는 경쟁이 안되는 우파라는 거예요. 유시민씨의 경우, 처음 전투병 파병 대신에 비전투 요원의 파병을 주장했다가 청와대 분위기가 파병 쪽으로 기우니까 ‘파병의 불가피성’을 역설했잖아요.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에서 국제연대활동을 했던 이 사람은, ‘보스’인 노대통령이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하니 갑자기 꼬리를 내려 거기에다 무비판적으로 따랐고, 결국 그렇게 해서 장관도 되었잖아요. 이게 권력에 들어간 지식인의 대표적 모습이라면 한국 지식인이 망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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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아래 기획기사는 나에게는 특히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색칠한 부분은 내가 공감한 부분도 있지만, 나름대로 생각해볼 꺼리가 있어서이다.
지식인의 정치참여의 범위와 내용에 있어서는 나의 명확한 의견을 제시하기 어렵다. 정치의 개념에 혼돈이 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에서 지식인들이 각종 위원회와 정부기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전영평 교수의 글은 흥미롭다. 꼭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노무현 정권에 참여한 정치지식인들은 외관상으로는 어느 정부 못지않게 화려한 학벌을 가진 사람들이고 비교적 젊은 연령대의 교수들이었다. 이들은 각자 분야를 나누어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고유성과 정통성을 유지 계승하기 위한 작업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중 몇 사람은 ‘위원회 정권’으로 불리는 노무현 정권에서 주로 비상근 위원장에 부임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정부위원회에서 참여정부의 개혁을 진두지휘하는 위치를 갖게 되었다.
어떤 식의 정치참여가 바람직한 것일까. 정치가 삶의 현실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이를 외면하고 자신은 그와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까. 문제는 자신의 역량과 철학과 원칙과 관계없이 부화뇌동하는 것일 터이다. 그게 아니라면 당연히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그 과정에서 하고 싶은 말과 실천을 다 할 수 있어야 하고...
한노정연이 해산된 후 진보전략회의라는 게 생겨났고, 참세상에 가끔씩 그 회원들의 기고글이 실린다. 그런데 진보전략회의가 구성될 무렵 소위 교수 등의 지식인은 활동가들과 별도로 취급되었단다. 지식인은 활동가여서는 안되는 것일까. 그렇게 특별한 존재도 아니고, 자신들도 똑같은 회원으로서 활동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일까.
보수나 진보나 지식인의 정치참여는 참 논란이 많은 주제인 듯 싶다.
2007. 6. 8 (2007.02.28 02:07)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 나가서도 샌다더니...
김대환, 박태주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나 보다.
김대환 교수가 공기업 민영화를 비판하고, 박태주 교수가 공공연맹 위원장 하면서 사회공공성 강화 어쩌고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나도 저렇게 될까 두렵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레디앙에 실린 이재영의 글은 뛰어난 선동력을 보인다.
내가 공부하지 않고, 글만 쓴다면 그렇게 쓸 수 있을까?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2-3. 정치권력과 지식인 下 (경향신문,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2007년 05월 20일 17:12:40)
정치학을 전공하는 서울 한 사립대의 ㄱ교수는 최근 같은 대학 출신 선후배 교수, 주변 교수들로부터 정치 참여 동향을 자주 듣게 된다. 그에 따르면 이 학교 ㄴ·ㄷ교수 등은 교수 회식 때면 “나는 이번에는 꼭 누구 대선기획단에 들어갈테다”라며 공공연하게 말한다고 한다. 이미 “비선 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교수도 여럿이다. “나보다 훨씬 못한 녀석들이 정치 한답시고 이름 날리는 거 그냥 못 보는 게 교수들이야.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했고, 빽 써서 교수 된 데다 교수 되고 나서 연구도 게을리한 애들이 어느날 정치권에 이름을 떡 하니 올려놓는 거야. 그 꼴을 못 보는 거지.” 그러니 이 참에 나도 한번 나서보자고 뛰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ㄱ교수는 정치권에 줄대는 교수들의 행태의 본질을 ‘명예욕’으로 규정했다. 그는 “교수들이 정치에 무슨 전문성을 보여주겠느냐”면서 “전문성을 가장한 정치판 가담 행위”라고 지적했다.
국립대 어느 교수의 월·수·금 수업 중 금요일은 ‘자율 학습’이다. 그는 금요일 여의도를 오가며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고 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기필코 대통령시켜야 한다”며 열변을 토하던 서울 사립대의 어느 교수. 그는 ‘이명박 대세론’이 일자 MB캠프로 선회했다. 교수들 사이에서는 “‘대선 로또 5년장’이 섰다”는 말이 나들고 있다. 한 교수는 “될 만한 후보 캠프에 줄만 잘 서면 차기 정권에서 중요한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것을 몇 차례 대선을 거듭하며 학습한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지식인의 정치 참여가 정치인을 통해 자기의 철학과 신념을 구현하는 일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지난달 27일 문화방송 ‘100분 토론’의 경우를 보자. 이날 주제는 이명박 전 시장이 공약으로 내건 한반도 대운하였다. 정동양 한국교원대 교수(기술교육학), 유우익 서울대 교수(지리학)가 찬성쪽 패널로, 홍종호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와 박진섭 생태지평연구소 부소장이 반대쪽 패널로 나왔다. 팽팽하게 진행되던 이날 토론의 균형은 시민 패널의 질문 하나로 깨졌다. 주부 김정애씨는 정교수에게 이렇게 따졌다. “2004년 건교부 주최 전문가 회의에서 ‘서울에서 배를 타고 소백산맥을 넘어 부산까지 가려면 1주일에서 열흘까지 걸린다며 경부운하를 프로젝트를 위한 프로젝트’라고 강하게 비판하셨던데 지난 11일 심포지엄에서는 운항시간이 24시간이라고 바꿨다. 3년 사이에 같은 사안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지느냐.” 정교수의 답변은 “오래돼 잘 기억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질문이 계속됐다. 그러자 그는 “당시엔 깊이 있게 검토해보지 못한 것이었고, 설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명했다.
곽승준 고려대 교수. 환경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새만금생명학회의 창립멤버다. 정부의 지속가능개발위원회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2001년 5월 정부가 새만금공사를 강행하자 학자적 소신을 지킨다며 위원회를 탈퇴했다. 그런 곽교수는 지금 이명박 전 시장 캠프의 정책실장이다. 그는 지난 3월 라디오 프로에 나가 “한반도 대운하 주위에 산업단지, 유락시설이 만들어질 수 있다. 부가가치 창출도 고려해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새만금공사를 강행한 정부 논리와 비슷했다.
지식인들도 야당에만 몰리고, 인기없는 여권에는 ‘지식인 가뭄’이다. 한자릿수 지지율을 보이는 여권 주자들에게는 교수들이 모이지 않는다. 유력 주자에게 몰리는 현상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여권 한 주자의 핵심 참모는 “후보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몇몇 소신형·이념형 교수들만 참여하고 있다. 우리 후보랑 맞을 것 같아 영입을 타진해보면 대부분 사양한다”고 말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권 전체나 지지율이 바닥인 게 제일 크다”며 “이념·소신이 맞아서 저쪽(한나라당) 캠프에 가는 분들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대세론’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은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 설문에서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설문 대상 74명 중 68명이 답변을 해왔다. 주관식 답변을 유형화해 크게 분류하면 ‘찬성(긍정)’이 49명(66.2%)으로 ‘반대(부정)’ 11명(14.9%)보다 훨씬 많았다. 찬성(긍정) 중 정치 참여의 조건과 전제를 내건 ‘조건부 찬성(긍정)’ 24명(32.4%), ‘인간은 정치적 동물’ ‘참정권’ 차원의 원론적 찬성(긍정)이 12명(16.2%)으로 절반가량(36명·48.6%)이었다. 조건부·원론적 찬성(긍정)의 의견을 낸 지식인들도 정치 참여 행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어느 교수는 “교수들의 지위가 과대 평가되었다. 사회가 필요 이상으로 교수에게 많은 권위를 떠안겼다”며 “정부에 참여할 때 4급 서기관이나 5급 사무관 정도의 자리로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에서 지식인 정치 참여가 문제되는 이유는 ‘비정치적 경로와 수단’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식인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정치인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조선 시대 이래 지식인이 ‘사대부-선비-권력 진출’의 틀을 은연중 답습하려는 경향을 지적했다. 유명 지식인일수록 정치 참여 때 ‘공천’이 확실시되는 것이 바로 그런 전통의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사례로는 서울대 총장이라는 후광 효과로 정치권의 꽃가마를 기대했던 정운찬 전 총장이 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은 정치 참여는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지식인의 정치 참여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민주화는 넓은 범위에서 볼 때 정치에 대한 지식인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처럼 하나의 좋은 전통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문제는 정부나 정당에 참여하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정치 참여의 경우 지식과 권력과 거래하는 것”이라며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행태가 그 부정적인 양상의 한 전형”이라고 말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도 “지식인에게 넓은 의미의 현실 참여는 불가피하며 비판적 참여조차 이미 정치를 뜻한다”면서 “그러나 최근 의원 공천을 위해, 또는 정부 고위직을 위해 대선 캠프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고병권 수유+너머 대표는 지식인들의 정부 위원회 참여를 주목했다.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도덕적 판단을 떠나서 하나의 현상이다. 과거에도 통치 계급의 이해에 복무하거나 혁명에 참여하는 형태로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있었고, 앞으로도 지식의 중요성이 증대될수록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싫든 좋든 증대될 것이다.” 그는 “다만 지난 20년간 김영삼 정부 이후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제도 정치권에 참여했는데 진보 인사들이 권력에 다가갈수록 진보 운동이 쇠퇴하는 ‘역설’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참여가 아니라 변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참여 지식인들은 스스로 대중의 시선을 잃어버리고 통치자의 시각에서 사회발전 방안을 고민하게 된다. 사회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하던 ‘투쟁위원회’에서, 갈등의 중재자인 양 행세하는 ‘수습위원회’, 나아가 국가 전체의 성장과 발전을 자기 과제로 삼는 ‘발전위원회’로 변신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장기 휴직계-〉낙하산 식 정계·공직 진출-〉대학 복직’에 대해 하종문 한신대 교수는 “정치 참여의 뜻이 있는 사람은 ‘사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 참여의 범위와 내용을 두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우선 ‘제도 정당’ 참여 여부를 두고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이제는 바깥에서 한가로운 평론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념에 맞는 정당에 적극 참여해 일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정치에 참여)할 수야 있지만, 자신의 철학과 원칙을 따르면서 하는 게 좋을 듯하다”며 “예컨대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의 좌파 지식인이 노무현의 신자유주의적 정권에 들어가서 일한다는 것은, 그 지식인 신념의 진솔성을 의심케 한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최근 민노당 노회찬 후보 지지 뜻을 밝혔고, 정태인 교수도 민노당 심상정 캠프에서 일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지식인의 현실 참여가 곧 제도 정치권에의 접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식인의 현실 참여는 기본적으로 시민사회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도 “운동 정치 참여의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정부나 국회에 참여하는 것은 지식인이 허명이나 지위, 지식을 팔아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서 정치를 정의한다면, 그런 정치 참여는 지식을 삶과 결부시키려는 점에서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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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靑코드 맞춘 실패한 참여” (경향신문,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2007년 05월 20일 18:20:43)
개혁을 표방하며 출범했던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지식인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충성과 출세 코드로 일관하거나 책사로 기능함으로써 결국 지식인의 노무현 정부 참여는 실패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전영평 대구대 교수는 20일 경향신문 특별기획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기고에서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지식인들을 “충성심 코드만 있는 ‘정치 지식인’”으로 규정했다.
전교수는 “(이들에게는) 진보나 보수라는 코드, 좌파나 우파라는 코드보다는 청와대가 원하는 코드가 무엇이며, 무엇이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면밀한 계산이 중요했다”며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우파적 정책에도 청와대의 코드에 맞추어 처신을 이리 저리 바꾸면서 제 자리를 지키는 수완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전교수는 김병준 대통령 정책기획위원장(국민대 교수)에 대해 “외관상으로는 지식인 교수지만 실질적으로는 노무현의 정치적 동지 및 책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교수는 “지방분권 프로젝트는 그가 일본에 머물렀을 때 체험한 일본 지방자치를 본뜬 것”이라며 “지방의 열악한 정치적 상황은 무시한 채 도식적으로 분권을 끼워맞춘 지식인 참여의 대표적 실패 사례”라고 지적했다.
대통령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도 김병준 위원장에 대해 “전형적인 정치가”라면서 “교수 시절 열린우리당·재정경제부와 잘 지내려는 사람 정도였다”고 밝혔다. 정교수는 김위원장의 역할이 삼성과 재경부의 영향을 받아 내부에서 개혁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교수는 “2004년 말쯤 청와대에서 조윤제 경제보좌관 후임을 추천하라고 해서 개혁적인 이동걸 박사(전 금융감독위 부위원장)를 추천했더니, 김위원장이 삼성과 재경부가 극렬하게 반대한다며 한·미 FTA의 주역이 된 정문수씨로 뒤집었다”고 말했다.
정교수는 성경륭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에 대해서는 “공무원보다 더 공무원다웠던, 덕분에 행정가로서 일정 부분 성공한” ‘행정가형 지식인’으로 분류했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 시장주의와 경쟁 체제에 대해 입장을 선회하려고 노력했다”고 평했다.
재벌해체·사회복지정책 강화 등을 주장하다 장관이 된 뒤 각종 노사분규에 대해 직권중재 결정을 내리며 노동운동과 대립했던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에 대해서는 “내가 청와대에서 쫓겨나기 전부터 실망했다”고 말했다. 평소의 진보·개혁적 소신을 뒤집었다는 지적이다.
정교수는 개혁적 소신을 유지하던 이정우 경북대 교수(전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 이동걸 박사, 유종일 교수(전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위원)의 조기퇴진 배경에 대해 삼성생명 상장 및 개혁정책을 둘러싸고 청와대 386 및 관료들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린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진보·개혁적 지식인들의 노무현 정부 참여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박교수는 “이정우 교수는 ‘사회투자형 국가를 지향한다’는 등의 ‘사민주의적’ 발언을 해오신 분”이라며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사회 투자를 거의 늘리지 않고, 이라크 침략을 방조했는데도 어떻게 해서 3년이나 같이 갔는지 의아하다”고 비판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은 “최근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행태는 지식과 권력을 거래하는 부정적 양상의 한 전형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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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노무현의 ‘위원회 정부’와 지식인 (경향신문, 전영평|대구대 도시행정학과 교수, 2007년 05월 20일 17:13:24)
노무현 정부를 위원회 정부라고도 한다. 정권마다 필요시 위원회를 두는 것이 상례였으나 노무현 정부는 그 숫자와 권한 부여에 있어서 이전의 정부와 구별된다. 이런 이유로 노무현 정부가 위원회 정부라는 말이 나왔다.
대통령이 공무원 조직을 활용하기보다는 위원회를 따로 두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의 개혁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함이며, 다른 하나는 기존 공무원의 간섭을 억제하기 위함이다. 노무현 정부는 기득권 공무원의 현상 유지 습성을 잘 간파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예 이들과의 동거형 개혁을 원하지 않았다. 결과는 대통령과 늘 직접 대면하는 위원회의 창설이었다. 그 중에서도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동북아시대위원회는 대표적인 정권 차원의 개혁 위원회라 할 수 있다. 한편, 노정권은 청와대 참모에 의한 개혁도 빠뜨리지 않았다. 청와대 정책기획실, 청와대 비서실장, 홍보수석실, 시민참여수석실 등을 활용한 정치적 개혁도 추진하였다. 정치적 개혁에 치중한 나머지 교육문화관련 수석과 같은 자리도 두지 않았다. 노대통령 당선 이후 열린우리당은 정권의 신 인맥이 되어 구태의연한 민주당을 제치고 새로운 정치 지원 세력이 되었다.
이로써 개혁의 분담 체계가 완벽하게 정비된 듯하였다. 청와대는 정치 개혁의 눈과 부리의 역할을, 대통령 직속 위원회와 열린우리당은 개혁의 양 날개 역할을, 기존 행정조직은 개혁의 성과를 뽑아내는 기능적 발톱의 역할을 하게끔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기존 행정 조직도 그냥 두지 않았다. 장·차관급은 물론이거니와 준공공기관의 장, 감사, 이사, 대학 등 교육기관에까지도 코드와 낙하산 인사를 통해 장악하였다. 개혁이란 명분으로 한국의 권력 기득권 상부 구조를 청소하는 수준의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비록 하향식 개혁 구상이지만 노정권 나름대로는 상당한 공을 들인 구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사청탁하면 패가망신이다’라는 구호는 코드 인사에는 통하지 않는 경구가 되었다.
실제로 노무현의 코드 인사는 참여정부 개혁 추진의 몸통을 구성하는 것이었기에, 노정권으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획이었다. 코드 인사의 핵심은 이른바 ‘진보그룹’에 속하면서 정권창출에 기여한 지식인을 동원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기준에 해당하는 지식인은 거의 찾기 힘들었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 경력을 쌓은 지식인조차 배척되었으며, ‘노무현 지지의 의리를 지킨’ 진보적 지식인이 새 판을 주도해야 한다는 폐쇄적 나눠먹기식 인사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러다 보니 그동안 소외된 비주류 정치지식인이 대통령위원회 및 각종 정부 기관의 장으로 앉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노정권의 개혁 정책에 아첨을 일삼는 아마추어 정치지식인의 시행착오적 정책 남발이었다. 대표적인 실책으로는 민생 경제 파탄, 청년 실업, 전국적 부동산 투기 조장을 들 수 있다. 또한 엄청난 시간과 인력을 들여 수백개에 달하는 개혁 로드맵을 만들었지만 결국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러한 혼란은 종국적으로는 노대통령의 경륜 부족과 판단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대통령에게는 측근 지식인을 믿어주는 우직함이 있었을지 몰라도, 세계화 시대의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폭넓게 쓰는 도량과 노련함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아직까지도 ‘그 나물에 그 밥’ 식 인사를 고집스럽게 계속하고 있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른바 정치권을 어슬렁거리는 지식인의 습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신문이나 방송에 출연해서 이념적 논쟁을 일삼는 정치지식인들이 얼마나 ‘자기 판매’에 능숙한 사람들인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 정치지식인에게 좌파 성향이니 우파 성향이니 하는 것은 어쩌면 겉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은 것인데 말이다. 그들 지식인은 진보로 해달라면 진보로 코드를 맞출 것이며, 보수로 해달라면 보수로 코드를 맞출 것이다. 그동안 변방을 떠돌며 권력에 굶주린 비주류 정치지식인들에게 노무현 정부는 한판 놀 수 있는 ‘일터’를 제공한 셈이다.
그들에게는 진보나 보수라는 코드, 좌파나 우파라는 코드보다는 청와대가 원하는 코드가 무엇이며, 무엇이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면밀한 계산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라크 파병, 한·미 FTA와 같은 우파적 정책에도 청와대의 코드에 맞추어 처신을 이리 저리 바꾸면서 제 자리를 지키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장관이 되라면 장관이 되고, 장관 사직하고 선거에 나가라면 나가고, 선거에 지면 다시 공직에 돌아가고, 위에서 지시하면 정치적 충성자를 공무원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그들의 코드였다. 대통령보다 앞서서 정권 홍보의 ‘괴벨스’와 같은 역할을 자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정치지식인의 코드는 정말로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권력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코드 외에는 진보라는 코드도 보수라는 코드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이러한 구성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송강의 ‘양산박’을 연상시킨다. 세상을 바꾸어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일념으로 모인 양산박 협객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노무현 정권에 참여한 정치지식인들은 외관상으로는 어느 정부 못지않게 화려한 학벌을 가진 사람들이고 비교적 젊은 연령대의 교수들이었다. 이들은 각자 분야를 나누어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고유성과 정통성을 유지 계승하기 위한 작업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중 몇 사람은 ‘위원회 정권’으로 불리는 노무현 정권에서 주로 비상근 위원장에 부임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정부위원회에서 참여정부의 개혁을 진두지휘하는 위치를 갖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노무현 정권에 참여한 지식인들은 정권의 행동대원 역할 정도는 매우 적극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과거 정권 지식인의 주된 역할-소극적인 정권의 하수인-과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서투르고 조급했다. 그들은 정권 창출과 초기 개혁 청사진 마련에 기여하였으나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 일등 공신급 정치지식인들은 제 풀에 지쳐 돌아간 반면, 삼등 공신 반열에도 못 드는 정치지식인들은 감지덕지하며 여전히 공직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노대통령은 자기의 인맥을 3기로 나누어 분류하였다고 한다. 인맥에도 기수와 ‘짠밥’(서열)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노무현 인맥이 기수와 짠밥에 따라 어떻게 움직였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노무현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경륜과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노무현 지식인은 코드, 충성심, 활용가능성이라는 여과장치를 통해 등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정권의 나팔수가 되든지 기능적으로 봉사하든지 해야 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치가는 언제나 지식인을 필요로 하고, 지식인은 정치인을 필요로 하는 공생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극히 적은 사례를 제외하고는 지식인이 나서서 정치를 성공으로 이끈 적은 거의 없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정치지식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도 노무현의 지식인은 아직도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국민과 비평가를 원망하고 싶겠지만 말이다.
한국에 키신저나 그린스펀 같은 학자출신 정치인이 당장 나타나기는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이 시행착오를 피하고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다소 보수적이지만 경험과 학식이 대내외적으로 검증된 학자를 등용하는 것이 선진국의 추세라는 점에서, 노무현의 지식인 기용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외형적 학벌이나 학력 앞에 무릎을 꿇자는 얘기가 아니다. 지식인 사회, 전문가 사회에서의 인증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치인의 지식인 선택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저명교수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술 이론서가 아닌 교과서를 써서 유명세를 탄 사람들이거나, 방송 출연에 열중하고,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학술적 식견이 탁월한 사람이 정책을 잘 만든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이렇다 할 학문적 식견도 없이, 정치적 주장만 일삼는 저급 학자들이 더 잘한다는 보장은 더욱 없지 않은가.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정책 실패를 그들 학자의 실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실책의 근본 원인은 대통령과 청와대가 제대로 된 정치와 정책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이다. 어차피 정치지식인들이야 어떤 정권에서든 권력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바칠 수밖에 없는 신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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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당치 않은 '욕설' 그만 두라" (레디앙, 2007년 02월 27일 (화) 14:43:44 이재영 기획위원)
[김대환-박태주 비판] 장관 한 사람이 교수들 '정치화'됐다고?
전두환 노태우 이래 가장 많은 퇴진 요구를 받았던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은 <한국경제> 2월 23일자 인터뷰에서 예의 ‘법과 원칙’을 다시 한 번 피력한다. “(KTX 여승무원 직접고용론은) 적절치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노사 자율에 맡겨놔야 할 문제입니다. …… 불법 시위 때 온정적으로 또는 상당히 정치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이게 법과 원칙을 훼손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 우리 현실에서는 독일의 공동 결정제도는 이른 감이 있습니다. …… 우리 노동계는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 저도 시민단체 활동을 해봤지만, 모든 견해나 결정이 대다수 구성원의 생각 신념 의식과 자꾸 괴리돼 나온다는 게 문제입니다. …… 민교협은 처음 출발 때와는 달리 너무 정치화되고 변질됐다는 느낌입니다. …… 우리나라 좌파학자들은 너무 비겁하고 용기가 없습니다.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할 말을 안 하는 것이죠.”
김대환의 ‘법’은 사회적 룰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것 같다. 파업과 시위에는 강경 대처하는 개입주의를 취하고, 고용 문제에는 노사 자율이라는 방임주의를 취한다. 따라서 그의 ‘원칙’은 철저히 자본 편에 선다는 단 하나 뿐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 구속된 노동자는 임기가 1년 넘게 남은 작년 11월까지 837명으로,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보다 훨씬 많다. 축하한다. 노무현과 김대환은 전두환에 필적하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노동계가 ‘배타적’인 게 아니라, 노무현 정권이 노동계를 배타한다.
‘민주화위한전국교수협의회’는 처음부터 ‘정치화’되어 있었으므로 정치화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곧 정치다. 장관 한 사람이 교단에 있는 사람들더러 ‘정치화’되었다거나 ‘변질’되었다고 욕질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괴리돼’ 있는 사람이 ‘대다수’ 교수들과 노동자들인지, 김대환 전 장관인지 스스로 되짚어 보라. 막말을 하지 않으면 ‘비겁하고 용기 없’는 것인가? 나는 이 정부의 정체를 도대체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노출증이 아닌가 싶다.
<한겨레> 2월 22일자는 1면 머리기사와 16면에서 “현대차 이대로는 미래 없다. 노사 빅딜해야”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사전문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는 박태주 노동교육원 교수를 인터뷰하여 대기업전문기자가 작성한 이 기사의 논지는 부제 “사-고용 보장하고, 노-생산성 향상 협조를”에서 보이는 바대로 노사 양측의 양보와 협력이다.
전문노련 위원장을 거쳐 청와대에서 일했고 지금은 한국노동교육원에 몸담고 있는 박태주의 주장에는 쉽사리 무시하지 못할 내용이 많다. “힘이 상대적으로 더 센 회사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 파업 책임을 노조에만 뒤집어씌우는 것도 옳지 않다 …… 노동자들이 임금을 많이 받는 게 무엇이 잘못인가”라는 발언은 현장 노동운동가의 말과 다르지 않다.
“회사는 노조를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노조도 단기 실리주의와 파업 의존주의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제안은 현대차 노사 합의가 아니더라도, 노사 각각이 큰 줄기의 목표로 삼을만한 내용이다.
그런데 ‘고용 보장’과 ‘생산성 향상 협조’가 현대자동차 빅딜의 공정한 내용일 수 있을까? 노동조합이 생산성 향상에 협조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더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노동 자체가 생산성 향상의 과정이라 간주하여도 무방하다. 문제는 고용 보장과 생산성 향상 협조 사이에 공정한 거래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고용은 법률과 단체협약에 의해 보장돼 있는 것이다. 반면, ‘생산성 향상 협조’는 노동조합의 추가적이고 구체적인 양보를 의미한다. 즉, 박태주의 빅딜론은 노동조합에게 추가적인 권리 확보 없이 여타의 권리를 포기하라는 압력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장기적인 고용 보장이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현재의 고용 보장 협약이 사측에 의해 해지될 가능성이 있다면 미래의 고용 보장 협약 역시 같은 운명을 타고 날 것이다.
“현대차 …… 현장의 노동자들은 제 기능을 못한다. 도요타는 …… 숙련노동자들이 생산현장에서 끊임없는 개선을 통해 품질과 생산성을 확보하는 구조”라는 박태주의 분석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런 분석에서 “노사문제는 현대차가 지속성장을 하는 데 발목을 잡게 됐다. 현대차가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발전하는 데 덫이 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옳지 않다.
현대차 노동자들의 노동이 창의적이지 못하다면, 쟁의를 줄이라 조언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억압하는 전근대적 경영을 혁신하라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김대환과 박태주의 발언은 그 내용보다 그 시기가 중요하다. 예전과 다를 거 없는 평소 지론이 하필이면 2월22일과 23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을까? 2월 25일 경총은 대졸초임과 대기업임금을 동결하겠다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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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혀와 글로 얻은 ‘명성’으로 정치와 손잡다 (경향,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2007년 06월 03일 17:44:15)
Ⅱ-6. 문화권력과 지식인
‘문화권력’은 문화예술 활동으로 얻은 명예·명성에 바탕한 ‘상징자본’과 ‘발언권’으로 사회 전반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인·집단을 말한다. 한국 지식사회에서 문화권력 논쟁에 불을 댕긴 것은 강준만 전북대 교수다. 강교수는 1997년부터 발행한 ‘인물과 사상’을 통해 정치·언론인뿐 아니라 소설가 이문열씨, 철학자 김용옥씨, 유홍준 문화재청장(당시 영남대 교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 상징자본, 상징권력을 갖고 있던 명사들을 실명 비판하면서 한국 지식사회에서 새로운 비평의 장을 열었다. 강교수의 ‘성역과 금기가 없는 전투적 글쓰기’의 대상이 된 문화권력에는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 지식사회 미디어와 조선일보도 포함되었다.
99년에는 문학평론가 이명원씨가 문학계 대선배이자 손꼽히던 ‘문학권력’이었던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가 일본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표절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2007년 대선 정국을 맞아 문화적 영향력이 큰 몇몇 인사들의 정치개입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문화권력 논쟁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인 이가 황석영씨와 시인 김지하씨다. 황씨는 올 초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계개편을 거론하며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황씨의 ‘총대론’은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김지하씨도 손전지사의 한나라당 탈당을 적극 권유한 핵심 인사였다. 황씨와 김씨는 지난 4월말 출범한 손전시자의 지지모임인 선진화포럼의 고문단으로 이름을 올려놨다.
지식인들이 문화권력을 이용해 정치권력과 네트워킹하는 행위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김지하 시인은 옛 기억의 향수를 바탕으로 최근 오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사회적 실천과 유리된 채 자신의 말 한마디로 세상을 좌우할 수 있다는 허황된 허위의식의 발로”라고 비판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교수는 “70, 80년대 문단에 등단한 이후 여태까지 문단을 주도한 분들은 자본이 독재 권력으로 떠오른 변화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이 사회가 민주화 단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황석영 선생도 중도우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사회에 유의미한 발언을 할 수 있는데 지금의 견해는 그렇지 못하다”며 “황선생 같은 이들의 영향력이 문단에서 워낙 강하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불리한 계층, 피해계층의 투쟁을 막는 지식의 힘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의 견해는 다르다. “오히려 미국이나 유럽을 보면 철학자, 사상가, 문인들이 고도로 정치적이다. ‘나는 사회당이다’ ‘나는 우파다 또는 좌파다’라는 의식이 명확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치에서 초연해야 하고, 정치적 발언을 하면 점잖지 못하다고 여긴다. 정치, 경제 권력에 영향받는 시민으로서 정치 발언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다.”
직접적인 정치 발언을 거의 하지 않지만 소설과 인터뷰라는 ‘텍스트’가 정치적으로 해석되곤 하는 소설가 김훈씨도 ‘문화권력’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씨는 “‘남한산성’의 텍스트는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나 경향, 한겨레 등 진보 성향 언론 모두에 언급되고 인용되고 있다”며 “김훈은 자기 소설에 대해 정치적인 해석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정치 냉소주의’ ‘미묘한 허무주의’같은 이데올로기를 가장 유력하게,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문화권력을 비판하며 스스로 문화권력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역설의 비평가인 강준만 교수는 올해 다시 백낙청 교수에 대해 비판의 날을 곧추세웠다. 백교수의 한겨레 인터뷰(3월6일자) 중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지식인, 학자들의 상당수가 말로는 (진보의) 위기를 논하지만 사실은 87년 이래 민주화가 가져온 공간 속에서 상당히 즐겁게 살고 있다고 봐요. 이 공간에서 위기를 말하고 정부를 비판하고 하는 것이 요즈음 지식인에게 참 남는 장사거든요”라는 내용이 발단이 되었다.
강교수는 “‘남는 장사’라니, 이게 웬 말씀인가? 보통사람들의 술자리에선 ‘남는 장사’일 수 있다. 그런 자리에서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옹호했다간 왕따되기 십상이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개혁·진보 성향의 지식인 집단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백낙청은 참여정부 옹호했다고 비판·공격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반면 최장집은 엄청난 비판·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참여정부를 지지하는 개혁·진보파로부터 받는 것이다. 유시민으로부터는 ‘분열이라는 질병의 한 증상’이라는 말까지 들었다”며 “이게 과연 ‘남는 장사’인가. 최장집이 언론에 뜨고 싶어 안달이 난 무명의 젊은 학자라도 된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올해 들어 ‘창작과 비평’과 이 매체 글을 쓰는 지식인 집단에 대해 ‘지식인-국가’의 관계 설정 문제를 두고 문화권력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강준만 교수는 1997년 창간한 ‘인물과 사상’을 통해 수많은 문화권력을 실명 비판하면서 스스로가 문화권력의 위상을 갖게 된 역설의 비평가다.
또 다른 문화권력 논쟁은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인사들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창동·김명곤 두 영화계 출신 지식인과 ‘스크린쿼터’ 문제가 상징적이다. 이창동 감독은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 투쟁에 앞장선 대표적 영화인이었다. 이감독은 2000년 3월 발족한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의 정책위원장을 맡는 등 90년대 후반부터 스크린쿼터 사수 논리를 치밀하게 제공했다. ‘노사모’로 활동한 그는 2002 대선 공간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공약한 노무현 후보를 도왔고, 2003년 노무현 정부 첫 내각에 들어갔다.
장관 재직 시절 내내 가해진 미국측의 폐지 압력에 대해 ‘양보 불가’ 입장을 고수하던 그는 재경부 등 경제 관련부처와 몇차례 갈등을 거친 뒤인 2004년 6월 “한국 영화산업의 미래를 위해 스크린쿼터 축소와 변화에 대해 검토해야 할 시점”이라며 축소안을 내놓고 퇴임했다. 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도 입각 뒤 스크린쿼터에 관한 소신을 뒤집었다.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 대책위 관계자는 “(이감독이) 힘에 부쳤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이감독이나 김장관이나 사수를 위해 노력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실망이 크다”며 “현직에 있을 때 관직을 걸고 경제나 외교 관료들에게 강하게 저항했어야 했는데 결국 힘의 논리에 밀렸다”고 말했다.
이창동·김명곤 두 문화부장관의 사례는 권력에 참여한 지식인이 평소의 신념을 어떻게 지키느냐 또는 관철시키느냐의 문제와 함께 공직을 맡으며 획득한 문화권력이 정치·경제권력 ‘너머’ 또는 ‘아래’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는지를 보여준다.
정희섭 한국문화정책연구소장은 “문화권력이란 용어를 권한과 책임이 있는 공직에 한정해 쓴다면, 문화권력이 정치권력의 부속물인 것은 어쩔 수 없다”며 “문제는 예산과 인사에 관한 것인데 그 결정권은 정치와 경제 쪽에 있다”고 말했다. 방현석 기초예술연대 위원장은 “새로운 전망을 담은 여러 문화 정책을 내놓았지만 퇴임 이후 폐기되곤 한다”며 “결국 지속성이 문제인데, 문화예술인이 제대로 역할을 하기에는 움직일 공간이 너무 좁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관료 중심, 경제 중심 논리로 시스템이 돌아가기 때문에 가시적 성과를 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밖에 ‘창비’와 창비에 글을 쓰는 지식인 집단의 ‘문화권력’ 논쟁도 다시 불붙고 있다. 대신 창비의 문단에 대한 영향력의 문제에서 창비가 생산하는 지식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 그것은 ‘창비는 곧 국가지성’이라는 문제 제기이다. 류준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는 “2006~2007년에 이르는 과정에서 창비가 출간한 인문·사회 책들은 주로 정책 또는 사회적 아젠다를 다루고 있다. 구색 맞추듯이 특집으로 다루어지는 ‘문학 기획’은 굳이 없어도 그만인 일이 되었다”며 “이처럼 국가의 발전 전략을 구상하거나 정책을 입안하는 데에 활용되는 또는 그것을 목표로 하는 지식(인)과 지성을 ‘국가 지성’으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백영서 창비 주간은 이에 대해 “우리를 비판하는 분들은 국민 국가의 억압적인 것만 본다. 지식인들이 국가 입장에서 발전 전략을 짜는 것을 기피할 이유가 없다. 비판하려면 창비 그룹이 어떤 점에서 국가와 결합하면서 잘못했는지 지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민중과 함께하는 유기적 지식인 이야기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민중 지성’인가”라고 반문했다.
지식인과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이렇게 문화권력의 장으로 옮겨가서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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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2-4. 문화권력, 어떻게 만들어지나 (경향,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교수, 2007년 06월 03일 18:02:08)
우리 사회에 ‘문화권력’이 새삼 화두로 떠오르게 된 것은 참여정부 초기의 코드인사 논란 때문이지 싶다. 참여정부 출범 당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을 포함해 주요 산하 단체장에 진보적 문화예술 인사들이 대거 진출하자 노무현 코드 인사로 규정됐다. 심지어 문화예술계의 코드인사는 중국의 문화대혁명기의 ‘홍위병’, 혹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기의 ‘즈다노프주의자들’로 험악하게 분류되기도 했다.
권력은 물리적인 힘뿐 아니라 상징적인 힘에서 나오며, 상징적 힘이 가장 강력하게 행사되는 지점이 바로 문화권력이다. 문화예술계 코드인사 논란은 정치적 공세 효과가 사라지면서 잠잠해졌지만, 한국사회의 문화권력의 발생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성찰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내가 보기에 문화권력은 두 가지 발생원리를 갖고 있다. 먼저 문화권력은 이념적,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일정한 권력을 획득한 개인 혹은 그룹들이 행사하는 제도적 힘을 의미한다. 문화권력은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급대로 ‘전복’과 ‘배제’의 규칙이 작용하는 장의 논리를 갖는다. 문화권력의 장은 서로 같은 입장을 가진 자들이 만든 구조적 공간으로서 장을 유지하기 위한 배제의 논리와 그것을 깨기 위한 전복의 논리가 치열하게 경합을 벌일 뿐, 애초부터 정치적, 윤리적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념적으로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자신들이 장을 지키려는 문화권력의 속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코드인사 논란은 문화권력의 발생원리로 볼 때 지극한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독재정권 시절 정부의 시녀 역할에 충실했던 보수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권력을 독식했던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참여정부에 요직을 맡고 있는 진보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순수한 봉사와 헌신의 정신만 있을 뿐 문화권력을 행사한 바가 없다는 발언 역시 허구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권력을 행사하는 제도적, 절차적 권한과 권력을 개인의 취향으로 남용하는 사적인 권한은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불미스러운 행적처럼 성찰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할 제도적 권한을 사적인 권한으로 수렴하는 경우들은 문화권력의 전형적인 개인화, 관료화의 폐해이다. 진보적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이러한 사적인 물의는 이른바 ‘예술사교계’의 상징권력에 대한 집착과 권력 행사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주관적’ 결정 때문이다.
문화권력의 개인적 남용과는 다르게 제도적 권한이 권력의 중심 장으로 흡수되는 경우도 발견하게 된다. 가령 이창동 장관이나 김명곤 장관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원활한 협상을 위해 스크린쿼터 축소를 지시한 청와대의 입장에 소신 있는 발언을 하지 못하고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한 경우는 문화권력이 정치권력에 어떻게 종속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따라서 ‘제도적’ 문화권력의 한계에 대한 비판은 코드인사의 형성 그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것이 행사되는 방식에 있다.
문화권력의 또 다른 발생 원리는 사회적 분류 체계에서 나온다. 이 분류 체계는 복잡한 원리를 갖는다. 이것은 정치적, 이념적 성향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학력, 지연, 성차, 심지어는 문화적 취향에 의해 구별된다. 권력으로서의 분류체계는 사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고 복잡한 모순관계를 갖고 있다. 분류체계로서 문화권력은 국가권력의 장에 속하지는 않지만 문화예술 현장에서, 아카데믹한 장에서, 출판과 지식시장에서, 지적 학력 분파들의 장에서 행사될 수 있는 힘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1987년 민주화운동 이래 한국의 문화권력의 분류체계는 크게 보아 세 가지 특이점을 갖는다. 첫째, 1987년 민주화 체제가 문화운동의 이념적 지향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면 1990년대 초반 소비자본주의의 도래는 예술의 상업화라는 극단적인 반작용을 몰고 왔다. 급변하는 사회현실에서 문화권력은 진보적 이념이 상실되면서 예술시장의 상업적 논리, 문화적 취향의 구별짓기, 권력행사의 헤게모니 싸움을 둘러싸고 과거와는 다른 문제들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대표적인 사례가 ‘문단 권력’의 지각변동이지 않을까 싶다. 1980년대만 해도 문단, 혹은 문학 권력은 순수 대 참여, 진보 대 보수라는 간단한 대립구도 하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문단의 권력은 학벌, 담론, 장르, 저널리즘의 분파들 속에서 복잡하게 분화된다. 가령 ‘창비’와 ‘문지’라는 전통적인 문단권력은 ‘문학동네’가 등장하면서 이른바 주류·비주류로 구분하는 상업적 경계로 분할되고, 문학시장의 주도권을 누가 잡는가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인 이념을 표방한 ‘창비’ 역시 시장경쟁의 논리에 가세해 문단권력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으며 ‘작가-잡지’ 동맹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신예 평론가 이명원씨가 제기한 김윤식 비평의 표절 논란은 비평의 윤리와 인용의 도덕성에 대한 논쟁이 아닌 출신학교의 카르텔주의의 논쟁으로 이행하기도 했다. 이밖에 안티-조선일보 운동의 국면에서는 특정 신문사를 반대하는 문인들과 지지하는 문인들로 구별되면서 저널리즘이 문단에 미치는 막강한 권력을 절감하기도 했다.
두 번째, 문화 지식인들의 권력지형의 이동 역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전통적으로 문화권력은 문인, 혹은 본격 예술가들에 의해 행사되었다. 한국에서 문인의 힘은 다른 어떤 예술 장르에 비해 윤리적,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상징적 권위를 누렸다. 또한 굳이 문인이 아니더라도 본격 예술가들은 미디어를 통해 혼탁한 세상을 구원해 줄 ‘감성의 메시아’로서의 지위를 얻었다. 시국사건 때마다 문인들과 본격 예술가들은 항상 시대의 전위에 있었고, 시인의 언어는 민중을 구원할 상징적 권위를 부여받곤 했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성장과 라이프스타일의 다변화로 문학이 절대적 지위를 상실하면서 문인권력, 혹은 엘리트 문예지식인의 권력은 문화지식인의 권력으로 대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소 해프닝에 그쳤지만 국민의 정부가 선정한 신지식인은 본격예술 엘리트 지식인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개그맨 심형래와 같은 사람이었다. 학력, 지식의 축적과는 상관없이 문화권력의 헤게모니는 서태지와 같은 시대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대중문화인들에게 넘어갔다. 또한 어느 매스커뮤니케이션 학자의 지적대로 문화비평가, 문화연구자들의 출현은 문학비평가와 같은 지배적인 권력의 장에 있던 주체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문화권력을 취득하기도 했다.
과거 직업 영화평론가들의 비평에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던 영화제작자들은 이제 포털 사이트에서 평점을 매기는 네티즌들의 활동에 더 긴장하고 있다. 네그리가 말한 이른바 대중지성은 위로부터의 문화권력을 아래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주시해야 할 또 한 가지 문화권력의 분류체계는 바로 1987년 이후 민주화를 주도했던 한국사회의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의 협력 체계이다. 4.19세대에서 386세대에 이르는 한국사회의 지배적 정치권력은 문화권력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재인용하면서 탈권력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문화권력은 진보적 정치권력의 탈권력화의 알리바이로 작용한다. 가령 제도권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진보적 정치인들은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문화적 감성에 충실한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이 과정에서 문화권력은 순수와 상업, 진보와 보수와는 상관없이 정치권력의 구성요소가 된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정치적 표백이 가해진 문화권력은 문화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 가령 386세대로 표상되는 정치권력이 문화적 성찰 없이 한류를 국운의 징조로 간주하여 과장된 예찬을 늘어놓는 것은 한국의 문화권력이 문화민족주의로 포장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문화권력은 이로써 정치권력의 감성적 전위이자 국가선진화의 기수가 된다.
우리 시대 문화권력은 그 자체로 자본이고 정보이다. 문화예술의 상징권력은 화폐자본보다 더 무서운 상징자본을 가지며, 정보의 헤게모니를 강력하게 행사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정명훈과 조수미만이 할 수 있는 상징적 권위와 힘, 문화대통령 서태지, ‘동방신기’만이 해결할 수 있는 미디어 협상력, 그리고 그 자체로 정보로 존재하는 수많은 대중스타들과 통신콘텐츠들. 우리 시대에 정말로 무서운 문화권력의 존재들은 바로 이들이다. 상품으로서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 문화권력은 바로 상징적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상징적 문화권력은 상징적 폭력을 행사한다. 기꺼이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 정보에 접근하도록 포박하는 상징적 폭력말이다. 우리가 해체해야 할 문화권력은 정치적 코드 인사가 아닌 독점적인 자본과 정보로서 존재하는 괴물 같은 ‘상징적 리바이어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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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2-5. 시민운동과 지식인 (경향, 장관순·김종목·손제민기자, 2007년 05월 29일 17:40:43)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1주년 기념자료집’에 따르면 창립 첫해 중앙위원 이상 임원 370명 가운데 현직 교수는 104명(28.1%)이다. 이 교수들 가운데 역대 정권에서 각료 및 정부 행정·자문위원으로 발탁된 이들은 최소한 44명이다. 김영삼 정권에는 중앙상임위원 등을 지내던 박세일 서울대 교수가 1994년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이 된 이래 이수성 당시 서울대 총장(95년 국무총리), 최광 한국외대 경제학과 교수(97년 복지부장관) 등 22명이 진출했다. 김대중 정권에는 강철규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98년 금융발전심의위원) 등 18명, 노무현 정부에는 최정표 건국대 경상학부 교수(2003년 공정위 비상임위원) 등 4명이 공직에 진출했다.
참여연대도 경실련만큼은 아니지만, 공직 진출이 화려하다. 참여연대 ‘1차 정기총회 자료’에 따르면 창립 초 전체 임원 120명 가운데 교수 출신은 43명(36.6%)이다. 이 가운데 김영삼 정부 때 6명, 김대중 정부 때 7명, 노무현 정부 때 9명 등 모두 22명이 정부에 참여한 것으로 나온다. 국회의원의 경우 열린우리당 이은영 의원이 참여연대 창립 당시 운영위원을 지냈으며, 한나라당 김석준 의원은 경실련 창립에 크게 관여했다.
두 단체 창립 임원으로 참여한 교수의 43~51%가 정·관계에 진출한 것이다. 창립 멤버는 아니지만 박재완·윤건영 의원도 각각 2004년 경실련 정책위원장, 2001년 경실련 정책협의회 의장이었다. 경실련 창립 임원 가운데 변호사는 31명(8.3%)이었다. 이중 천정배·신기남 변호사가 국회의원이 되었고, 황산성(93년 환경처 장관)·조영황(2005년 국가인권위원장)은 정부및 국가기관에 들어갔다. 참여연대 창립 임원의 16명(13.3%)이 변호사였다. 이들 중 송두환 변호사는 헌법재판관이 되기도 했다.
지식인들은 시민운동 ‘간판’을 얻어 자기 이름을 알리고, 정부와 정치권은 이들을 영입하면서 “시민사회의 참신한 인재를 충원했다”는 명분을 얻는 등 지식인과 정부·정치권은 시민단체를 매개로 거래를 하고 있다. 한명숙 전 총리의 경우 99년 참여연대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는 당시 대표이기는 했지만, 참여연대 회의에 출석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시민운동에 별 열의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시민운동은 권력을 감시해야지 스스로 권력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계에 들어간 지식인들이 흔히 ‘이것이 궁극적인 사회참여’라고 강변하지만 이는 시민사회의 영향력을 무시한 발언”이라며 “우리 사회구조 상 시민운동은 정치에 충분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식인들의 시민운동에 대한 근본적 의문는 ‘시민운동을 하긴 하느냐’는 것이다.
김헌동 경실련 아파트값거품빼기운동 본부장의 설명은 이렇다. “지금 시민단체에 무슨 위원으로 명단 올린 사람들은 시민을 위해 일을 안 합니다. 그냥 카메라 있는 세미나 같은 곳에만 얼굴을 내보일 뿐이죠. 경실련과 참여연대를 대표했던 박원순, 이석연, 서경석 같은 지식인들조차 돈벌이에 급급합니다. 시민사회에서는 돈 나올 구멍이 없어요. 모든 돈이 재벌이나 정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죠. 지식과 열정을 지닌 사람들은 이미 시민운동을 떠났습니다. 그나마 강준만, 최장집, 손호철 등이 시민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한 경실련 출신 시민운동가는 지식인들의 줄서기도 목격했다. 그는 “경실련 회원도 아니면서 정책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많았는데, 어떤 해는 정책위원이 수백명이 되던 시절도 있었다”며 “별의 별 경우가 다 있었다”고 회고했다. 시민단체는 명망가를 필요로 했고, 지식인 개인은 명예가 필요했기 때문에 ‘대량 참여’가 가능했던 것이다. 인기 있는 시민단체로 몰려다니는 현상도 나타난다. 90년대 초 경실련, 2000년대 참여연대, 최근에는 ‘뉴라이트’ 등 이름 있는 단체에 지식인들이 몰리고 있다.
경실련을 떠난 지식인들이 경실련에서 쌓은 경력과 명망성을 바탕으로 경실련과는 다른 성향의 보수단체를 창립, 시민운동의 ‘대세’를 이끄는 경우도 있다. 서경석 목사·박세일 교수(선진화국민회의), 김석준 한나라당 의원(바른사회시민회의), 최광·문용린 전 장관(자유지식인선언) 등은 경실련 창립 초기 중앙위원 이상 임원을 지냈다. 김정수 투명사회운동협약 사무처장은 “지금 참여연대보다 뉴라이트가 상종가인 이유는 한나라당이 대권을 잡을 것으로 예측되는 ‘정세적’ 측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김처장은 “행여 특정 지식인이 과거에 보였던 언행과 지금 보수단체에서의 활동이 합치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지식인은 자신을 둘러싼 모순된 상황을 효과적으로 조합해 일관된 입장인 양 내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지식인의 시민운동 참여는 최근까지만 해도 개인적 친분관계나 학연 등 인적 네트워크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참여연대의 창립에는 비판적 법학자, 사회과학자, 운동권 출신 사회운동가 등 3개 그룹이 모여 조직의 핵심을 이뤘다. 경실련의 경우는 복음주의 교회 인사, 경제학자, 비판적 사회과학자, 기독학생운동 출신 등이 모였다. 각 그룹들은 대학이나 활동기구의 선·후배를 모아 각자의 조직을 꾸렸으며, 실제 살림을 도맡은 상근자들은 대체로 운동권 출신들이었다. 한 사립대 교수는 시민단체도 지식인 집단의 패거리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단체를 만들고 개혁·진보를 내걸긴 하지만 자기 패거리만 독식하고 자기 패거리 아닌 사람들에겐 매우 배타적인데 거의 조폭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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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2-7. 정책지식과 지식인 (경향신문, 글/손제민·장관순·김종목·사진 김대진 기자, 2007년 06월 11일 18:02:02)
“이박사님, 이번에 ‘마사지’ 많이 당하지 않았습니까?” “김박사는 이번에 ‘몇 킬로그램’ 했습니까?” 국책연구기관 연구원들 사이에는 종종 이런 농담이 오간다. ‘마사지’는 보고서에 ‘민감한’ 내용이 있을 때 연구용역 주문자(정부)의 입맛에 맞게 보고서 내용을 다듬는 것을 뜻한다. ‘몇 킬로그램’이란 보고서의 무게다. 발간 보고서 수가 고과나 연봉 협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양적인 면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대화는 국책연구기관에 소속된 정책지식 생산 지식인들이 처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은 정권이 바뀌거나, 원장이 새로 올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연구 자율성이 요동을 치기 때문이다. 원장의 전공이 무엇이냐에 따라 보고서를 많이 낼 수 있는 전공자도 생기고 보고서를 외면당할 다른 전공자도 생긴다. 한 국책연구원 소속 연구원의 말이다.
“알다시피 저희 연구원은 재정적으로 특정 행정부처에 거의 의존하고 있어요. 친정부적일 수밖에 없죠. 원장, 부원장, 교육실장 등은 부처에 상시적으로 인사를 다녀요. 영업 나간다고도 하죠. 우리가 정부 하수인이라고요? 하수인이 아니라 ‘동체(同體)’죠.”
정권 교체에도 민감하다. 특히 외교안보 관련 연구기관 소속 연구원들은 어떤 정권 하에 있느냐에 따라 연구 주제 자체가 180도 달라진다. 매우 보수적인 성향의 통일연구원 홍관희 박사는 지난 2005년 7월 “정부가 편향된 연구만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는 더 이상 자유로운 연구 활동을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직했다.
외환위기 이후 23개 국책연구기관들이 총리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산하에 들어가면서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의 외형적인 운영 체제에 큰 변화가 생긴 듯했다. 그러나 연구기관들의 부처 종속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일선 연구원들의 느낌이다. 허영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연구원들이 용역을 받아올 수 있는 곳은 기존에 속해있던 정부 부처”라며 “옛날에 종속돼 있던 관계가 그대로 유지된 채 총리실 등의 통제를 받으니 통제기관 수만 늘었고, 연구 자율성은 훨씬 저해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은 연구 자율성에 대한 고민 외에도 많은 보고서를 생산해내야 하는 스트레스도 있다. 같은 기관 안에서도 그 대우는 천차만별이다. 이들의 보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은 보고서의 질보다는 ‘발간되는’ 보고서를 얼마나 많이 작성하느냐와 연구 용역을 얼마나 따오느냐다. 발간된 보고서만 인사 고과에 반영되므로 발간에 문제가 없도록 알아서 윗분들의 성향에 맞춰 ‘마사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선 연구원들에 따르면 대략 기본과제 한 편을 혼자서 수행했다면 100점을 받는다. 1억원짜리 용역을 따오면 100점, 3억원짜리 용역을 따오면 300점 하는 식이다. 동일한 호봉이라도 용역 수주 수준에 따라 연봉은 40~45%까지 차이가 난다는 것이 한국개발연구원(KDI) 관계자의 설명이다.
국가 주도 경제개발의 핵심 브레인으로 70년대 초반 이후 속속 설립된 국책연구기관들의 시대적 효능은 이미 끝났다는 진단을 받고 있다. 연구 자율성이 없는 태생적 제약 때문에 자유로운 연구를 원하는 연구원들은 기회만 있으면 대학 교수직으로 옮기려고 한다. KDI 한 연구원의 말이다. “예전에는 서울의 주요 대학이 아니면, 자리가 나도 안가던 때가 있었죠. 요즘에는 지방의 대학이라도 교수 자리가 날 때마다 지원한 경험들이 있다고 해요. 이곳의 평균 근속연수가 10년이 채 안돼요. 다들 기회만 있으면 떠나려고 하죠.”
경제 관련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들 사이에는 ‘서울대 마피아’ ‘시카고 마피아’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경제 관련 한 국책연구원 소속 연구원의 말이다. “얼마 전 나를 안좋아하던 고참한테 치욕적인 비판을 들었어요. ‘너는 이래저래 경쟁력이 없어. 미국에서 학위를 받지도 않았고, 계량적 연구를 안하고 질적 연구를 하는 것도 그래’라고요.”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에 미국에서 주류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KDI 연구원들 내에서도 성골, 진골, 6두품으로 나뉜다. 정치권에 있는 한 KDI 출신자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사람들은 성골,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출신은 미국 박사를 받아와도 진골에 머무르고 그 외는 모두 6두품으로 분류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KDI의 역대 원장 12명 중 11명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사람이다.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강봉균 전 원장(현 열린우리당 의원) 역시 석사학위를 미국에서 받아 넓은 의미에서 100% 미국 학위자라고 볼 수 있다. KDI 내의 박사 학위자 72명 중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는 무려 70명(97.2%)이다. 국내박사는 단 1명.
그러나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KDI를 비롯한 국책연구기관들의 존재감은 날로 약해지는 반면 기업 연구소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특히 삼성경제연구소는 현 정부 들어 ‘2만달러 시대론’ ‘매력있는 국가론’ 등 국가 정책의 큰 밑그림까지 제시하는 등 최전성기를 누리는 중이다.
이 책은 ‘정책지식’을 ‘정부가 국정에 관련된 의사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지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6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이 책은 정책지식이 만들어져 유통되기까지, 생산자들은 정책화를 염두에 두고 지식을 생산해야 하며 소비자도 생산자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지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특히 “과거 권위주의 시대가 정부 출연 연구소들이 중심이 돼 정책지식을 생산했던 정부의존적 정책지식 생태계가 적합성을 가졌던 때였다면 이제는 기업, 노동자, 시민사회 등 민간 부문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개체들이 인적·지적 교류를 통해 정책지식 생산 경쟁을 하고 더 나은 것이 채택될 수 있는 적절한 선별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일부 국책연구소의 거버넌스를 재설계하고, 독립적인 싱크탱크에 대한 민간 기부 등 지원을 강화하자는 도발적인 제안도 내놓는다.
이 책의 해외 싱크탱크 부분에 도움을 준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학)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이 작업에 1년 이상 시간을 쏟아부은 것으로 안다”며 “이제는 기업 연구소도 기업 차원의 연구를 넘어서 공공적이고 큰 국가 계획을 짜는 시대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강교수는 “국가 주도의 경제 건설 시대가 지나가고 민간 영역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국책연구기관의 시대적 한계는 분명해졌고, 국가기관에서 사회개조나 국가개조에 관련된 ‘그랜드플랜’을 짜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때가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삼성경제연구소와 KDI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치가 있다. 웹사이트별 방문자 수를 체크하는 ‘랭키닷컴’에 따르면 지난 6일 현재 경제 관련 연구소 웹사이트를 찾는 온라인 방문자들의 72.8% 정도가 삼성경제연구소에 몰렸다. 2위는 LG경제연구원으로 8.3%, 전경련 산하 연구기관이었다가 분리된 자유기업원이 7.1%로 3위였다. KDI 웹사이트 방문자는 3.8%이다.
이에 대해 KDI 국제정책대학원의 한 교수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충격적이다”라고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학)는 “KDI가 이렇게 무기력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라며 “정책지식 생산의 주도권이 완전히 기업 연구소로 넘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는 “KDI는 당연히 정부 편을 들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FTA처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어려운 것도 정부 요구대로 생산해내면서 신뢰도가 자꾸 떨어지게 된다. 반면 삼성경제연구소는 당장 일어난 일을 정당화해줘야 할 부담은 없다는 점에서 일반인들에게는 삼성경제연구소가 더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KDI측은 삼성경제연구소의 ‘대중성’과 KDI의 ‘수월성’을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전홍택 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상업적인 성공은 커뮤니티를 통해 일반인들의 접근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라며 “그것이 외형적으로 삼성경제연구소를 더 크게 보이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의적절하고 기민하게 트렌디한 연구 보고서를 잘 내는 강점은 있지만, 학문적으로 엄밀한 검증 과정을 거치는 국책연구기관의 보고서와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KDI와 달리 외형상으로도 다양한 인적 구성을 보이고 있다. 미국 박사의 비율은 40%선이고, 일본·유럽 박사가 20%, 국내 박사가 40%로 고루 분포돼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형식적으로나마 중립성을 표방하며 일본의 우경화, 대북정책 등 경제 이외의 다양한 이슈에 대한 연구도 진행해 왔다.
하지만 삼성경제연구소의 한계는 자본의 이해를 정당화하는 정책지식을 생산해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KDI가 정부에 대한 연구 자율성이 부족하다면, 삼성경제연구소는 자본에 대한 연구 자율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글로벌경제실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9월 인천대 경제학과로 자리를 옮긴 양준호 교수(경제학)의 말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단기적 과제에 아주 강합니다. 그리고 중립성을 유지하려 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스피드 있게 대응하며 다양한 아젠다를 연구소재로 삼습니다. 저 같이 일본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정치경제학을 하고 온 연구자도 받아줄 만큼 열려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경제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 양극화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저의 학문적 신념을 지키려면 삼성경제연구소가 추구하는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저는 그 안에 있는 동안 진보적인 문제의식을 내지 않는 식으로 보고서를 썼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저의 인식, 독점자본과 기득권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전개해 나가지 못했던 거죠. 그런 점은 KDI에 있건 삼성경제연구소에 있건 비슷하다고 봅니다.”
양교수는 삼성경제연구소에 있던 지난해 7월 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 반대하는 경제학자 171명의 서명에 이름을 올린 뒤 인천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양교수는 “연봉은 삼성경제연구소에 있을 때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지만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내 사립대학의 한 정치학 교수는 “삼성경제연구소가 다루지 못하는 문제가 딱 두 가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정치 투명성 또는 정치 개혁에 관련된 보고서, 기업지배구조를 정면으로 다루는 보고서”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삼성이 과거 정경유착의 당사자로서 이 주제를 정면으로 조명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직 형성돼 있지 않다”면서 “이 때문에 한국정치학회에서 정치개혁 관련 세미나를 하면 삼성측에서 돈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한국의 정책지식 생산은 정부와 기업이 양분하고 있다. 양질의 인적 자원과 어마어마한 물적 자원이 두 부문에 일방적으로 쏠리고 있음에도 정작 시민들이 필요한 정책지식은 ‘가뭄에 콩 나듯’ 한다. 독립 민간 싱크탱크의 출현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정책지식 생산 능력은 매우 부족하다. 경제개혁연대, 희망제작소, 민주노동당의 진보정치연구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정도가 열악한 물적, 인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이 가운데 지난해 3월 등장한 희망제작소는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정책지식 생산으로 담아내며 새 바람을 몰고 있다.
윤석인 희망제작소 부소장은 “국가와 자본의 정책지식과 정책논리가 아닌 시민사회,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정책지식으로 담아내는 일이 필요하다”며 “국책과 자본 연구소가 국가 아젠다에 치중할 때 우리는 지역 아젠다를 제기하고, 학술보고서나 전문용어와 거대담론이 넘쳐나는 보고서 아니라 잘게잘게 나눠진 과제들에 대한 정책대안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386 세대’ 생활인 120명이 월급의 십일조를 내서 운영 중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도 자본과 국가권력 일변도의 정책지식 생산에 대한 대안으로 나왔다. 손석춘 원장은 “‘개미군단’으로 신자유주의 공룡과 맞서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120명이 내는 십일조만으로는 운영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김헌동 경실련 국책사업감시단장은 “정책이란 건 정당에서 연구 개발해서 유권자들에게 제시해 표와 거래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어떤 정당이 집권해도 재벌 총수 30명을 위한 정책만 생산한다”고 강조했다.
정책지식 생산 측면에서 대학 연구소와 각종 학회들의 기여를 더 늘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양준호 교수는 “정책지식 인프라로서의 학회와 대학 연구소들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슷한 이념과 이론을 갖고 모인 학회나 대학 연구소들이 그간의 이론·학술 중심적인 연구 성향에 정책, 실천적 연구를 병행하며 시민단체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식으로 하면, 상당히 중요한 제3자적인 싱크탱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보수진영과 중도진영이 집권했을 때를 대비해 각각의 진영을 위해 안정적으로 정책지식을 공급해주는 헤리티지재단과 브루킹스연구소가 있는 미국식이 아니더라도 한국적인 정책지식 생산 싱크탱크를 위한 지식인의 역할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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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시민의 싱크탱크 ‘희망제작소’ (경향, 손제민기자, 2007년 06월 11일 18:24:55)
이곳의 47명 상근자들은 모두 연구원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 일본 사무소에도 2명의 연구원이 있다. 박사학위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희망을 얘기하기 전에 절망부터 치유하라’는 것이 모토다.
희망제작소가 문을 연 지난해 3월27일부터 지난 4일까지 1년2개월여 기간 동안 1455개의 아이디어를 접수했다. 이중에 ‘참좋은 아이디어’ 189개, ‘주목할 아이디어’ 375개를 내놓았다. 이들 가운데 연구원 리포트(41) 및 시민평가단의 조사(322) 등으로 363개에 대해 조사를 완료해 한 출판사와 연말까지 ‘세상을 바꾸는 시민 아이디어 101개(가제)’라는 책을 낼 예정이다.
특이한 것은 공무원들도 희망제작소의 일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부터 운영 중인 30명의 시민평가단에 공무원들도 시민 자격으로 가입해 있다. 희망제작소 관계자는 “이들은 ‘감시’ 목적이 아니라 진짜 시민적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며 “희망제작소도 이들이 공무원인 걸 알지만 활동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무원도 시민으로 참여한 셈이다.
희망제작소는 시민평가단 외에 각 30~40명이 가입해 있는 창안클럽, 전문가클럽 등 각계 각층별로 활동할 하위 커뮤니티를 운영 중이다. 희망제작소는 이날 정책지식이 제대로 입안되기 위해 최종적으로 거쳐야 하는 국회와의 거래도 텄다. 국회의원들 15명을 모아 ‘호민관클럽’(대표 홍미영 의원)을 발족시킨 것. 직능별 커뮤니티는 지난해부터 쉽게 만들어졌지만 국회의원 클럽인 호민관클럽은 창립 1년이 넘어서야 만들어진 것이다.
윤석인 희망제작소 부소장은 “거대담론뿐 아니라 잘게잘게 나눠진 과제들에 대한 정책대안을 만드는 훈련을 하는 과정이지만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삼성경제연구소에 앞서보겠다는 의욕을 갖고 임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독립적 싱크탱크라는 이 실험이 성공할지는 우리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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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독립적 민간 싱크탱크 필요 (경향신문, 손석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2007년 06월 11일 18:24:49)
권력과 자본이 세운 연구조직이 내놓는 모든 결과물은 주관적 열성과 무관하게 신자유주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강조되는 가치는 ‘경쟁’이다. 연구조직들 또한 안팎으로 경쟁한다. 누가 더 효율적 경쟁 방법을 제시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들의 연구 결과는 틀이 똑같은 언론을 통해 마구 퍼져간다. 가령 노무현 정권은 물론, 그와 싸우는 부자신문들 모두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를 ‘존중’한다.
그 결과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이 거리에서 대낮에 ‘공권력’에 맞아 죽어도, 정규직 노동자가 한·미 FTA에 반대하며 스스로 몸을 불살라도, 당대의 지식인들 대다수는 무감각하다. 흔들림 없이 나아간다. 신자유주의로, 경쟁 만능으로.
바로 그래서다. 권력과 자본에서 독립한 연구조직이 절실하다. 무릇 모든 조직에 고갱이는 돈과 사람이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정책을 만드는 데 허울뿐인 ‘참여정부’가 지원할 리 없다. 되레 한·미 FTA 강행을 정당화하는 연구에 국민 혈세를 쏟아붓는 저들을 보라. 대기업은 이를 나위가 없다. 물적 토대가 가멸지면 내용이 부실한 보고서들일망정 쏟아낼 수 있다. 여론시장을 독과점한 부자신문들이 흔쾌히 받아준다. 경박한 보고서까지 중요하게 부각한다. 문화면만이 아니다. 경제면으로도, TV 경제뉴스로도 강조한다. 언론만이 아니다. 전경련과 경총, 보수정당이 으밀아밀 토닥인다.
하지만 새로운 대안을 제안하는 연구조직은 어떤가. 돈이 없기에 사람, 곧 연구역량 확보도 어렵다.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인재에게 최저생계비를 강요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연구역량은 돈처럼 큰 문제는 아니다. 한국 사회가 낳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숱한 까닭이다. 게다가 미국 유학파가 주도하는 한국 사회과학계는 진보적 지식인을 내돌리고 있다. 교수 충원 과정을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기존 교수들이 좌지우지해서다. 그들은 미국보다 더 미국적이다. 젊은 지식인이 대안사회를 공부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차원에서도 진보 연구조직은 뿌리 내려야 한다.
문제는 진보적 연구조직의 ‘역량’보다 ‘평가’에 있다. 비단 보수 또는 수구 세력만이 아니다. 진보세력 내부에서도 연구 결과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 십상이다. 대학교수의 명함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연구도 평가의 대상조차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렵게 낸 보고서를 온전히 읽지도 않은 채 폄하하거나 재단하기 일쑤다. 진보적 지식인이나 언론인 다수가 연구 성과를 인정하거나 북돋는 데 인색하다.
물론, 연구 결과물의 정합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을 아울러 적잖은 진보 매체들이 보수적이거나 중도적 지식인의 연구 결과에 들이대는 잣대보다 더 혹독한 기준을 들이댈 때가 있다. 연구결과를 아예 모르쇠 하는 게 그 보기다.
이해할 수는 있다. 다만 옳지는 않다. 돈과 사람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나오는 연구물 아닌가. 국책연구기관과 대기업연구소의 담론에 비해 귀에 설고 더러는 거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대안 정책의 모색은 왕가뭄의 비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다. 누군가 대안을 연구해야 하고, 그 대안을 퍼뜨려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참다운 선진화로 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대안정책을 내놓을 연구조직은 어떻게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원천적으로는 연구결과를 책으로 내고 그것이 재정을 뒷받침하는 게 ‘정답’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순수 경제학’의 논리다. 출판시장의 문제만이 아니다. 연구물이 나오기 전까지 창립과 운영에 드는 자본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닌 까닭이다.
방법은 권력과 자본이 아닌 민중에 있다. 가령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은 생활인 120명이 달마다 월급의 ‘십일조’를 내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것만으로 운영이 어렵다. 연구결과물을 <이스트플랫폼>(www.eplatform.or.kr)에 무료로 공개하고 대안 연구에 참여하거나 후원하고 싶은 생활인들을 대상으로 월 1만원의 정책회원을 모으고 있다. ‘개미 군단’으로 신자유주의 공룡과 맞서겠다는 다짐이다. 자발적 정책회원이 지며리 늘어나는 현실은 더없이 우리를 경건하게 한다.
기실 그것은 단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는 재정문제 해결만이 아니다.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다함께 만들고 다함께 구현하려는 의지다. 더불어 대안을 만들고, 더불어 알려가고, 마침내 실현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권력이나 자본의 연구조직이 제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다. 권력·자본·대학·연구조직·언론은 서로 부추기며 새로운 사회의 상상력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고통받는 민중에게 미국을 추종하는 길을 ‘부드럽게 강제’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정책연구는 진보와 보수를 떠난 문제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더없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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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Ⅲ-(1)지식인생산공장, 미국 (경향신문,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2007년 06월 24일 17:46:15)
한국 지식인을 생산하는 최대 공장은 미국이다. 우선 1948년부터 2007년 6월 현재까지 학술진흥재단에 해외 박사학위 논문을 신고한 이는 2만4691명. 이 가운데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은 1만3782명(55.8%)이다. 한국에서 대학교수, 특히 수도권 소재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은 미국박사이다. 경향신문이 6월 현재 서울 소재 9개 대학(경희대·고려대·서강대·서울대·성균관대·연세대·이화여대·중앙대·한양대)의 정치외교·경제·사회학과 교수 365명의 국가별 박사학위를 조사한 결과, 미국박사는 306명(83.8%)이고, 한국박사는 24명(6.6%)이었다.
미국 대학원의 엄격한 논문 지도·심사 등을 거치면서 학자로서 단련이 되기 때문에 미국박사를 선호한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미국박사 아니면 인정을 하지 않는 미국박사 맹신주의에 있다. 신율 명지대 정외과 교수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교수는 “유럽 정치 관련 연구 단체의 회장도 미국박사 출신이 도맡고, 영미박사 출신들이 유럽 정치사 등을 가르치는데 이것은 웃지 못할 코미디”라고 말했다.
미국박사 출신 교수들이 쌓은 벽은 높고 견고해지고 있다.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가 경향신문에 칼럼을 써 지식사회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사회과학논문인용지수(SSCI) 3위의 ‘케임브리지경제학논집(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의 편집자였던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서울대 교수에 3번 지원했지만 계속 떨어졌다. 정교수는 당시 서울대의 한 교수가 장교수를 두고 “3류 잡지 에디터가 무슨…”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장교수는 “미국 주류경제학 입장에서는 나 같은 사람은 경제학자로도 안 본다. 우선 미국 저널에 논문을 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방법론적으로 수학과 통계학을 많이 쓰고 깔린 생각도 시장주의여야 한다. 나는 둘 다 아니다. 경제학과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은 싫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교수가 말한 ‘수학과 통계학을 많이 쓰는(수리경제학) 시장주의자’는 ‘시카고 보이스’를 가리킨다.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시카고 학파가 태동한 시카고대. 이 대학에서 신자유주의를 배워 모국에 적용하기 위해 돌아간 칠레의 경제학자들을 지칭하던 ‘시카고 보이스’는 이제 미국 대학에서 주류경제학을 배운 이들을 통칭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경향신문의 분석 결과 서울 소재 9개 대학의 미국박사 출신 경제학과 교수들은 대부분 미국의 유명대에서 학위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9개 대학의 정치외교·경제·사회학과 교수 306명 중 30명(9.8%·경제 9명, 사회 11명, 정외 10명)이 시카고대를 나왔다. 하버드대 24명(7.8%·경제 16명, 사회 4명, 정외 4명), 위스콘신대 18명(6.2%·경제 10명, 사회 7명, 정외 1명), 예일대 16명(5.2%·경제 9명, 사회 2명, 정외 5명), 워싱턴대 15명(4.9%·경제 9명, 정치 5명, 문화인류 1명), 미네소타대 12명(3.9%·경제 11명, 사회 1명) 등이다. 미국내 대학이 3000개 정도인데 유명 대학의 사회과학대 교수의 반 이상이 미국의 유명 10개대에 몰려 있다.
경향신문 취재팀은 이들의 박사학위 논문 내용 분석을 의뢰했다. 홍성민 동아대 교수는 “미국 10위권내 대학 선호현상이 뚜렷하다. 그래야 국내에서 좋은 자리를 잡고 인맥과 연결된다”면서 “서강대 정외과의 경우 10명 중 3명이 예일대 출신”이라고 말했다.
홍교수는 “70년대 미국에 유학간 50대 교수들은 대부분 군사론, 80년대 유학간 40대 교수들은 소련이나 중국, 일본의 지역연구, 30대는 주로 정치경제론을 공부했다”면서 “그 시기에 미국의 대외정책이나 국가의 이해관계가 그러한 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지식이 한국의 이해와는 관계없이 마구잡이로 수입되어, 한국의 세계관으로 침윤된다는 설명이다.
김호기 교수는 “이례적인 경우도 있다”면서 고려대 정외과를 예로 들었다. 김교수는 “미국박사들이 주종을 이루지만 미국 정치이론에 입각해 우리 사회 정치 분석에 나름대로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보적 정치학자 최장집(시카고대), 중도적 정치학자 임혁백(시카고대), 보수적 정치학자 김병국(하버드대) 등은 미국박사 출신이지만 신자유주의 일변도는 아니며 다양한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며 한국 지식사회에서 미국박사의 득세·독점 현상은 강화되고 있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올해 자신이 정년퇴직한 뒤 비주류 경제학자가 아예 없어질까봐 걱정을 하고 있다. 장하준 교수도 영국에서 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 그는 “김교수처럼 마르크스를 전공한 사람은 물론 나 같은 사람(제도경제학 전공자)도 들어가기 힘들 것”이라며 “(미국박사들의) 제일 큰 문제는 ‘내가 하는 게 제일 나은 것’이라는 수준을 넘어서 ‘내가 하는 것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는 “우리는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외국대학에 위탁하고 있다”며 ‘학문 주권의 상실’을 지적했다. 신교수는 “그 부작용으로 미국적 가치관을 가진 지식인들이 넘쳐난다”고 말했다.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는 “국내박사 할당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한 대학 교수는 이렇게 토로했다. “연구 이외에 다른 데에 시간 많이 쏟는 교수들이 너무 많다. 기업체 대상 강연에 교수들이 왜 가나. 골프는 또 왜 치나. 그러니 교수들의 연구력이 떨어지고, 학생들을 엉터리로 가르친다. 그래서 국내 학위자들을 교수로 안 뽑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모교 출신을 우선 채용, 학문의 동종교배 현상도 여전하다. 서울대의 정치·외교·경제·사회학과 교수는 모두 70명. 이 가운대 서울대 학부를 나온 이는 모두 64명(91.4%)이다. 모교 출신 비율이 가장 높다. 연세대는 정외·경제·사회학과 교수 58명 중 46명(79.3%)이 자교 출신이다. 이어 고려대 47명 중 30명(63.8%), 부산대 29명 중 15명(51.7%), 서강대 44명 중 20명(45.5%) 순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어느 대학에 진출하는가를 기준으로 분류할 경우 대부분 지방대 출신은 지방대에 자리를 잡아 서울 소재 대학 진출이 막혀 있음이 확인되었다. 전북대를 나온 교수는 모두 12명인데 100%가 전북대에 임용됐다. 부산대는 16명 중 15명(93.8%), 경희대는 11명 중 10명(90.9%), 성균관대는 17명 중 15명(88.2%), 경북대는 11명 중 9명(81.8%), 이화여대는 15명 중 9명(60.0%), 서강대는 34명 중 20명(58.8%), 고려대는 56명 중 30명(53.6%)이 모교 교수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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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美기업 기준이 한국학문 ‘쥐락펴락’ (경향, 손제민기자, 2007년 07월 08일 17:14:28)
“언제는 ‘등재지’라고 하니까 모두들 등재지로 몰렸다가 또 어느 순간 ‘영어강의’를 해야 한다기에 그 쪽으로 확 쏠리더니 이제는 ‘SCI급 논문’으로 너도나도 몰려가고 있습니다. 다음엔 또 뭐가 나올지 궁금해요.”
지난 4년간 학술진흥재단 등재지에 10여편의 논문을 쓸 정도로 부지런히 연구했지만 아직 대학에 자리를 못잡은 국내박사 출신 사회과학 연구자의 말이다. 그는 “대학이 요구하는 영어강의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영어로 옮긴 강의노트를 달달 외우는 것까진 할 수 있지만 언제까지 그런 ‘원숭이 같은 짓’을 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이 말은 2007년 한국 지식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이 어디인지 잘 보여준다. 학계 내 발언권 있는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문제제기 하지 않는 사이, 대세는 ‘생산성’과 ‘세계화’ ‘미국화’에 맞춰졌다. 대다수가 대학 교수가 되고 싶어하지만 그 자리는 영어강의 능력과 SCI급 논문 게재 없이는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국사회에서 SCI라는 말이 자주 쓰인 것은 90년부터다. 자연과학쪽에 주로 쓰이다가 90년대 중반 이후 사회과학쪽에서도 SSCI 논문을 교수 신규임용 등의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연구비 배분기관인 학진의 권력이 커진 것도 이와 관련있다. ‘SCI 담론’이 대학사회 내의 ‘경쟁’ ‘생산성’ 논리와 결부돼 진행됐기 때문이다. 학진의 학술지 평가기준은 SCI 서비스를 하는 미국의 민간기업 ‘톰슨’사에서 따온 것이 많다. 연구자들이 학진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국제화’ ‘세계화’를 주제에 포함해야 유리하다는 것은 상식이 됐다.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년간은 한국 대학들이 신자유주의 원리를 내면화하고 자발적으로 따라오는 과정이었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는 “SCI와 학진의 역할은 IMF가 한국사회에 했던 것과 비슷했다”고 말했다. IMF가 재벌개혁을 요구했듯 SCI 담론에 올라탄 학진은 학계 내 비합리성을 개혁하려 했던 것. 신교수는 그러나 “전세계적인 공통 프로그램이 확립된 자연과학은 SCI 잣대를 수긍할 수 있지만 사회과학·인문학에까지 논리가 그대로 확장되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한국의 연구자가 SSCI급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려면 영미권 연구자들의 관심사를 영어로 표현해야 가능하다. 우리 현실을 설명하는 ‘우리의 언어’를 갖기 힘든 구조다. 나임윤경 연세대 교수는 “독일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SSCI가 뭔지도 모르고, 국제법의 가장 권위있는 저널은 SSCI가 아니다”고 말했다. 김원 서강대 연구교수는 “‘우리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우리의 언어’를 많이 갖는 것이 한 사회의 지적인 성숙”이라고 했다.
미국의 민간기업인 ‘톰슨’사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논문 인용지수이다. ‘SCI(과학논문인용지수)’는 영어권 자연과학 연구자들에게 특정 논문이 다른 논문에서 얼마나 인용됐는지를 포함한 참고문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고안됐다. 톰슨사는 자연과학 논문을 다루는 SCI 뿐만 아니라 SSCI(사회과학논문인용지수)와 A&HCI(인문학논문인용지수)도 제공한다. 한국의 대학들은 SCI급 논문을 국내 학술지 논문보다 1.5~2배 가량 높게 쳐주며 이 지수들을 교수 신규이나 재임용, 승진 등의 잣대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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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Ⅲ-(3)학술진흥재단과 학문의 창의성 (경향, 손제민·장관순·김종목기자, 2007년 07월 08일 17:14:42)
연구비를 배분하는 기관인 학술진흥재단은 학술지에 대한 규정 권한, 연구 프로젝트 선정 권한 등을 행사하며 연구자들 사이에는 최대의 ‘학문권력’으로 인식되고 있다.
“교수님은 논문을 그렇게 안 쓰고도 정말 괜찮으신가요?” 최근 서울대의 한 대학원생이 소속 과의 한 교수와의 술자리에서 당돌하게 물었다. 그 교수는 연구 업적, 그것도 양적인 성과물을 강조하는 요즘 대학 분위기에서 지난 3년간 학술진흥재단에 등재된 학술지에 논문을 한 편도 쓰지 않았다. 이 대학원생은 그런 교수가 걱정되기도 하고, 왜 그랬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논문 적게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의외의 답을 했다. “적은 양의 글을 써도 정말 좋은 문제의식이 담긴 논문을 정성 들여 써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신념을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교수는 대학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논문만 제출하면 잘리지 않는, 정년보장(tenure·종신교수직)을 받은 정교수이기 때문에 소신을 펼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교수만 되면 정년이 보장되던 시절 정교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40대 후반 세대로 한정된 이야기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국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은 해마다 1만명씩 늘고 있다. 대학교수 이외에는 박사학위자들을 위한 별 다른 취업 통로가 마련돼 있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박사 실업자’ ‘비정규직 박사’가 넘쳐남을 의미한다. 이제 ‘학문을 한다’는 것은 곧 ‘논문을 쓴다’는 말과 동의어가 됐다. 논문은 ‘교수로 임용되기 위해’ ‘정교수로 승진하기 위해’ 연구자들이 하는 활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한국 교수들은 공부를 너무 안한다’는 이른바 ‘철밥통’ 담론이 확산된 지 10여년이 지난 요즘 학계 풍경은 확연히 달라졌다. 대학에 임용만 되면 논문 한 편 안 써도 정년까지 별 문제 없이 갔던 ‘좋은 시절’은 옛날 얘기가 됐다. 이 치열한 경쟁의 배경에는 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이 있다.
경향신문이 지난 4월부터 연재해온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시리즈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지식인들 대부분이 ‘지식인의 위기’를 논하며 언제나 말 끝에는 학진 지원체제를 언급했다. 대학 안에 있는 이건, 밖에 있건 이건 마찬가지였다. 일반인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이 조직이 어떻게 해서 지식인들의 뇌리에 그렇게 강하게 박히게 됐을까.
학진은 1981년 교수들의 연구비 지원을 위해 교육부 산하기관으로 설립됐다. 학진이 교수뿐만 아니라 석·박사들에게까지 존재감을 갖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채 안된다. 학술지에 등급을 매기는 ‘학술지 평가 사업’과 학문후속세대 지원을 위한 ‘두뇌한국 21(BK 21)’을 시행한 98~99년부터다.
오창은 중앙대 강사(국문학)는 “초기의 학진은 ‘상대적 진보’로 받아들여지며 젊은 연구자들의 암묵적 지지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대학의 주먹구구식 평가 시스템보다 훨씬 근대적이고, 연구비를 주는 통도 컸기 때문”이다. 김성보 연세대 교수(한국사)는 “학진은 학술진흥 예산이 국가재정 규모 확대와 더불어 팽창하는 현실에서 연구비의 분배를 제도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생긴 기구”라고 말했다. 학진이 가진 강점은 제도적 합리성과 개혁성이었다. 관료(교육부)가 직접 학계를 평가하는 대신 교수들을 참여시켜 교수사회의 반발을 무마했다. 또한 외부 비판과 요구를 수용하고 끊임없이 자기 개혁을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연구자들의 자발적 동의를 얻어냈다. 사회경제학회, 산업사회학회 등 학술단체협의회 산하의 비판적 학술단체들도 대부분 학진 등재지를 신청하며 제도 안에 편입됐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유일한 기관인 학진의 역할은 많은 박사 실업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지금 학진의 돈을 받는 젊은 연구자들의 상당수는 학진이 거대한 학문권력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치학을 전공한 한 시간강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학진이 굉장한 권력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좋든 싫든 자신이 학진의 프로젝트 및 평가 시스템에 올라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학진이 학계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큰 권력 중 하나는 ‘학술지’를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이다. 학회나 대학 연구소들이 발간하는 학술지는 학진의 인정을 받은 등재지 및 등재후보지와 학진의 인정을 받지 못한 비등재지로 나뉜다. 최근 몇 년간 등재지에 논문을 몇 편 실었느냐는 것은 신규교수 임용이나 전임강사에서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로 승진하는 데 필수적이다. 등재·등재후보지 이외의 어떤 매체에 쓴 글도 ‘점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대학원생 때부터 일찌감치 이 체제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의 한 대학원생의 말이다. “이제는 주변의 대학원생들 중 누군가가 어떤 학술지에 논문을 냈다고 하면 가장 먼저 묻는 것은 ‘그거 혹시 등재지야?’예요. 예전엔 어떤 성격의 학술지에 어떤 내용을 실었는지가 중요했는데 이제는 오직 등재지냐 아니냐에만 관심이 있어요. 어린 대학원생들도 하루 빨리 등재·등재후보지에 논문을 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어요.”
나임윤경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학진체제에서는 ‘학문에 정진한다는 것’이 진리를 탐구한다거나 우리 모두의 한층더 나은 삶을 향한 진지한 노력이 아니라 교수 개인의 승진을 위한 도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의 학회에 대한 평가기준도 단순해졌다. 그 학회가 얼마나 전통이 있느냐, 어떤 학자들이 참여하느냐보다 등재·등재후보지를 간행하고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등재지 제도 도입 후 학회 수도 급증했다. 해방 후 1995년까지 1260개이던 학회가 96년 이후 2배 가까이 증가해 2007년 현재 2393개에 이른다. 학술지를 내기 위해선 학회가 필요한데, 논문을 많이 실어야 하는 교수들이 도처에 학회를 만든 것이다.
학회의 급증은 학술지의 난립으로 이어진다. 학진은 학술지 등급 심사를 위해 ▲연간 학술지 발간 횟수 ▲학술지의 정시 발행 여부 ▲일정 비율 이상의 논문 탈락률 유지 ▲논문 투고자 및 편집위원의 전국적 분포 ▲논문 1편당 심사위원 수 ▲논문초록 수록 형태 등을 심사한다. 학회들이 등재지의 형식적인 요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쏟는 노력은 보통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복제 논문’이 양산되는가 하면 학회들이 등재지가 되기 위해 ‘유령 논문’을 받은 뒤 ‘탈락’시키는 방식으로 탈락률을 높이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물론 등재지 제도 자체는 과거보다 진일보한 것이다. 학회장이나 학회지 편집위원장의 친소 관계에 따라 논문이 실리곤 했던 과거에 비해 심사·평가 방식을 체계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명성의 확보만큼 논문이 질적으로 향상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에서 발간하는 사회과학 등재지의 논문 심사를 맡았던 한 교수는 “과거에 비해 논문 관리가 되긴 하지만 질 관리가 제대로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1~2개월 정도밖에 안되는 짧은 심사기간, 심사자 본인이 써야 할 과다한 논문 작업 때문에 정작 제출된 논문을 거의 읽지도 못하고 심사하는 경우가 많다”며 “또한 특정 분야에 대한 연구자 수는 많지 않은 대신 학술지 수만 늘어나 누가 어떤 글을 썼는지 서로 다 아는 처지에 공정한 심사가 이뤄지기도 어렵다”고 했다.
사회과학 분야에 비해 인문학 연구자들은 등재지 제도가 학자들의 창의성을 억제한다는 점을 더 큰 문제로 지적한다. 학술지들이 대개 획일화된 논문식 글쓰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전보다 논문 수는 늘었지만 도발적인 문제제기나 참신한 생각이 담긴 논문을 찾아보기는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한 국문학 연구자의 말이다. “가끔 학회지에 글을 쓰면 ‘평론적 글쓰기라서 게재 불가’라는 회신이 올 때가 있어요. 논문식 글쓰기가 아니라는 거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해진 틀 내에서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죠.”
박헌호 성균관대 연구교수(국문학)는 “좀 도발적인 관점에서 파격적 형식으로 쓴 글은 결코 통과되기 어렵다”면서 “창조적 사고와 기발한 실험이 생명인 인문학을 자연과학, 공학과 같은 식으로 평가하려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등재지를 발간하는 한 학회가 최근 학진 웹사이트를 통해 낸 논문 모집 공고에는 제목, 필자, 목차, 국·영문 초록, 주제어, 참고문헌, 각주 표기 방법 등을 상세히 규정한 ‘논문작성지침’이 첨부돼 있다. “반드시 한글 2002 버전 이상으로 작성해 주십시오”라는 주문도 있다.
이런 획일적 글쓰기는 인문학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대중과의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계간 창작과비평 주간인 백영서 연세대 교수(중국사)는 “요즘 잡지에서는 논평, 리뷰라는 게 사라졌다. 한 마디로 글에 ‘맥아리가 없어졌다’는 거다. 다들 학술지 논문 쓰듯 글을 쓰니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글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모두들 등재·등재후보지에만 글을 쓰려 하기 때문에 창비처럼 오래된 전통의 잡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잡지들이 원고를 받는 데에도 허덕인다. 같은 노력을 들이는 것인데 이왕이면 교수 임용 또는 승진이라는 ‘경력관리’에 도움 되는 글만 쓰려 하기 때문이다.
한 문학잡지의 편집위원은 최근 모 대학 교수에게 특집 원고 청탁을 하다가 “새로 논문을 써야 하는 건 아니죠?”라는 반문을 받고 놀랐다. 과거에 쓴 논문을 적당히 새롭게 포장해서 내도 된다면 청탁에 응하겠지만 새롭게 써야 한다면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 편집위원은 “새로 쓴 글들은 다 학진 등재지로 가고, 잡지는 이미 나온 글들을 적당히 짜깁기해 내는 곳으로 변했다”고 했다.
최근 문학관련 반년간 잡지를 창간했던 서울지역 사립대의 한 교수는 동료들로부터 “내용이 꽤 충실하다. 계간으로 전환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당장 다음 호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등재지가 아니어서 아무도 선뜻 글을 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학진 체제에 비판적이었던 그였지만 결국 등재지 신청을 했다. 한 동료 교수는 “학진을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떡고물이라도 얻어걸리면 말도 못하고 그 체제에 편입되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고 했다.
계간 역사비평의 주간인 김성보 연세대 교수는 그래도 학진 체제를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등재지 제도가 실천적이며 창의적인 글쓰기, 대중과 소통하는 글쓰기를 가로막는 측면은 있어요. 그래도 역비 편집진은 등재지 신청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등재지라는 제도의 틀 안에 들어가더라도 실천성, 대중성이라는 본래의 지향점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판단했고, 현재까지 그 결과는 대체로 긍정적입니다. 글이 잘 들어오게 된 현실적인 이점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글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써달라고 적극적으로 주문하는 식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역사비평은 99년 등재후보지로, 2005년 등재지로 승격됐다. 학진이 학술지 평가를 시작한 98년 당시 57개였던 등재·등재후보지가 9년만에 25배(1435개)로 급증했다. 오창은 중앙대 강사는 “등재지가 늘었다는 것은 우리 학술지들 수준이 그만큼 업그레이드 됐다는 뜻인데 과연 여기에 선뜻 동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학진이 등재·등재후보지로 자꾸 승격만 시키고, 자격이 안되는 학술지들을 퇴출하는 것에는 인색했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대학 내에서 자체적으로 운영됐던 소규모 학회지나 박사후 과정 등에 대한 학술지원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모두 학진의 우산 아래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대학들 자체 기금으로 연구자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들이 이제는 유능한 연구자들이 학진 프로젝트를 따오면 대학측이 ‘매칭펀드’를 해주는 식으로 모두 바뀌었다. 영문학을 전공한 한 시간강사는 “과연 대학 내 작은 학회지들이 사라지고 대학의 학술지원 기능이 모두 학진으로 넘어가는 것이 능사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학진체제는 분명 ‘제도적 합리성’을 구현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반드시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대학원생들을 각종 프로젝트에 동원하다 보니 과거보다 대학원에서 공부하기 위한 조건은 좋아졌지만, 좋아진 조건이 대학원의 학술역량을 강화시켰는지는 의문이다. 대학원생들이 각종 프로젝트 조교로서 ‘일할’ 뿐 예비연구자로서의 자신의 관심 주제를 파악하고 좋은 논문을 준비하며 ‘연구하는’ 활동에는 소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양대의 한 연구교수는 “연구가 프로젝트 중심으로 진행되다 보니 축적된 연구역량이 쌓이기보다 여럿이 모여서 추진할 수 있는 연구주제만 하게 된다”며 “연구자 개인이 관심있는 주제가 아니다보니 동료 연구자나 후학들에게 도움 되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학진의 연구비를 받지 않겠다는 연구자들도 나온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씨가 대표적이다. “학진 체제는 대다수의 학문후속세대를 일종의 ‘취로사업’에 투입된 하층민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학진 프로젝트에 선정되는 것은 연구과제에 필요한 연구비를 지원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고등실업자들의 생계유지비용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죠. 그리고 ‘업적으로 가치가 없는’ 모든 인문적 글쓰기는 무의미해져 버립니다. 저는 그런 체제에 비판적이기에 지원과제에 단 한 번도 응모하지 않았습니다.” 학계의 원로교수를 비판했다가 재직 중이던 대학에서 교수직을 잃은 이씨는 요즘 소설가 공선옥씨와 함께 매주 구치소를 방문해 재소자들에게 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이씨는 “재소자들이 무언가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보며 그들에게서 오히려 내가 많이 배운다”고 말했다.
한국 지식인들의 논문 생산성은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영어 논문도 마치 모국어인양 곧잘 쓴다. 그러나 쌓여가는 논문 더미들 뒤로 여기저기서 ‘지식인의 죽음’이 운위되는 것은 어쩐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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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지식체계 종속 깨져야 한국정치도 바뀐다 (경향신문, 홍성민|동아대 정치행정학부 교수, 2007년 06월 24일 17:46:07)
사회변동의 원인을 경제적 토대나 제도의 변화에서 찾는 것이 유행하는 오늘날 학계 흐름에서 보면, 단지 하나의 개념이나 지식체계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는 주장은 지나친 관념론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몇몇 지도자들이 사회 변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정치 리더십의 구체적 내용이 몇 개의 학문적 개념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영향력을 차분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군사독재 시절 권력의 정당성을 보충하기 위해 ‘선진조국 창조’라는 정치언어가 동원된 바 있는데, 이것은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근대화이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보면 한국사회에서 지식체계의 변화가 정치변동에 큰 영향을 주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필자는 개인들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학문의 언어라고 본다.
한국사회의 보수성은 오랜 세월 체계적으로 유지돼 온 지식의 구조적 기반에 근거해 있다. 따라서 한국정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지식체계가 변화해야 한다. 지식은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기초이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만들고 새로운 사회운동을 촉발하는 정치적 자원이다. 다시 말해 한국 진보정치의 미래는 시민사회에 자리 잡는 지식의 성격에 달려 있다. 필자는 이러한 구조적 상황을 ‘지식 이전의 국제정치학’이라고 이름 붙이고, 문제점과 정책대안을 지식의 공급, 유통, 수용이라는 세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첫째로 공급의 차원을 보자. 한국정치의 기반이 되는 대부분의 언어자원은 현재 미국에서 유입되고 있다. 남북관계(악의 축, 민주평화론), 정치행정분야(거버넌스), 경제분야(신자유주의), 대외관계(세계화)를 규정하는 개념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것들은 미국적 가치를 전파하는 정치이데올로기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대학가에서 공식적인 교과과정 안에서 교육됨으로써 과학이라는 보호막 아래 끊임없이 증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으로부터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의 압력이 있기 전, 한국에는 미국식 정치경제론에서 강의되었던 ‘거버넌스’라는 개념이 미국 유학파 교수들을 통해 대학가에 수입됐으며, 이를 근거로 미국과의 무역협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시민사회에 확산돼 있었다. 가시적인 외부압력이 있기 전에 지식의 지배가 먼저 행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 빨리 미국이 만들어내는 지식의 성격을 규명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미국의 대학과 연구소, 그리고 공익재단들의 특성을 밝히고, 여기에 관여하는 학자들의 인맥을 파악해야 한다. 또 그들이 어떠한 지적훈련을 받으며, 자본과 권력에 어떻게 연관되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이러한 지식의 지도가 만들어진 후에야 자주적인 대미 외교가 가능해진다. 이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행돼야 할 대외정책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진보담론의 공급과정 자체도 철저하게 분석돼야 한다.(들뢰즈와 네그리가 한국의 진보학계에서 유행하는 이유를 필자는 이해할 수 없다.) 한편 학문의 민족성 안에 안주해 온 소위 자주파도 반성할 것이 많다. ‘우리 학문’을 실천하는 방식이 이미 서구적이며 미국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구의 ‘근대성’ 개념과 유길준의 ‘문명개화론’을 바로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개념과 지식의 체계가 생성하게 된 사회적 조건을 무시한 채, 오로지 텍스트 안에서 학문언어를 비교하는 매우 순진한 발상이다. 최근의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은 일본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에 한국 학계가 방향을 상실한 또 다른 예다.
둘째로 유통의 차원을 생각해 보자. 우선 오늘날 미국 유학이 계급 재생산을 유지하는 공인된 과정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는 미국 유학을 통해 기득권 권력이 유지되며, 이것은 미국의 세계지배전략과 그대로 맞물려 있다. 미국과의 FTA 협상 과정을 보자. 한국에서 FTA를 두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는 지식인 그룹을 눈여겨보면, 미국 유학이 어떠한 형태로 국내정치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남미에서 1980년대 말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 혹은 ‘버클리 마피아(Berkeley Mafia)’가 주도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와 신자유주의를 남미에 도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에서 FTA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미국 유학파들이다.
미국에서 교육 받은 사람들이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의 쟁점들(이라크 파병문제, 남북관계, 미국과의 FTA)에 전문가로 나서 언론을 통해 토론을 하고 평론을 써 왔던 것이다. 그 결과 자국의 이해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우리의 언어가 사라지고 말았다. 일본, 중국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미국 편향이 실로 위험스럽지만, 정작 한국 대학의 교수들이나 언론 종사자들은 그 심각성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영어로 강의할 수 있는 자를 교수초빙에 우대한다는 광고가 버젓이 신문에 실리고(이것은 국내박사나, 비미국권 박사에 대한 인권침해 소지가 있지 않은가), 미국의 SSCI 논문이 교수연구능력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며, 미국 대학의 판별기준으로 한국 대학을 구조조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이다.
우리만의 지식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유학이 필요하다면 3~4년 외국에 나가서 필요한 언어와 자료를 습득하고 돌아와 한국어로 논문을 쓸 수 있다. 더구나 유학이 왜 미국이어야만 하는가. 유럽과 남미에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외국학계에 한국 학문을 알리고 싶다면, 우수한 논문을 선정해 영어로 번역한 후 외국의 한국학연구소를 통해 단행본을 발행하면 된다. 이제 지식은 과학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의 역할이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고, 그것의 기초가 학문의 언어에 있다. 이제라도 한국의 진보정치는 자생적 지식을 만들어내는 대안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실질적 민주화를 완성하는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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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지식인이 사라진 시대의 지식투쟁 (경향신문,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 2007년 06월 18일 18:26:42)
작년 초 어느 잡지로부터 한국 사회의 지식인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자료들을 이것저것 뒤져보면서 내가 도달한 결론은 아주 역설적인 것이었다. 지식을 둘러싼 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격화되고 있는데, 정작 지식인이라는 존재는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쓴 글의 제목이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죽음을 예감하다’였다. 현재 지식인은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믿는 자들의 자의식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내가 학부시절 지켜본 격렬했던 논쟁의 당사자들, 수강신청에 상관없이 매 학기마다 수백 명을 불러 모았고, 내게 ‘공부도 피를 끓게 하는 구나’를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여전히 발표하고 토론하지만 이제는 박수도 욕설도 없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시위대의 맨 앞에 서 있지만 내 눈엔 그들 뒤에 서 있는 것이 한 무리의 허전함으로 보인다.
대신에 신종 지식인들이 나타나고 있다. 가령 정부는 매년 수십에서 수백 명씩 ‘신지식인’들을 발표하고 있다.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생산력 향상 및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수십, 수백 명의 신지식인들. 나는 정부가 양산하는 이 지식인들에게서 지식인의 희극적 죽음을 느낀다. 나는 또 어느 포털 사이트에 출현한 탈인간적 형상을 한 ‘지식인(지식iN)’의 대성공을 보면서도 지식인의 죽음을 생각한다. 이제 ‘지식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어떤 ‘인간을 만난다’는 뜻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접속한다는 말이 되고 있다. 나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지식인의 죽음을 예언하는 징표들을 보고 있다.
물론 지식을 다루는 일도, 그 일을 하는 사람도 사라지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지식기반사회’로 이행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 중요성은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집단으로서, 하나의 범주로서 지식인이 존재할 것인가. 만하임의 말처럼 “어디에도 뿌리를 박지 못하므로 도리어 보편적”일 수 있는 ‘인텔리겐치아’가 우리 사회에 존재할 것인가. 그람시의 말처럼 계급의 눈이 되어 총체를 바라보는 ‘유기적 지식인’이 존재할 것인가. 어떤 냉소적 기운도 담지 않은 채 나는 ‘아니오’라고 답하겠다.
1980년대에 글을 썼다면 나는 ‘지식인의 죽음’이 아니라 ‘지식인의 탄생’을 예감했을지 모르겠다. 흥미롭게도 80년대 초반의 지식인들, 이른바 ‘현장’에 침투한 이들은 스스로의 지식인성을 지우려 애썼다. 지식인들이 자기 긍정의 운동을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에 들어서였다. 해직교수들, 대학원생들, 재야학자들이 아카데미 바깥에 조직한 여러 연구실들. 그곳에서 지식인들은 지식과 사상, 담론의 영역을 자기 현장으로 삼아 운동했다.
지식인들은 노동운동가에서 학술운동가로 변모해갔다. 일부 논자들은 이를 운동의 퇴보라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이때 지식인 운동은 어떤 긍정적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공장만큼이나 연구실을 자기의 ‘현장’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80년대 중반 아카데미 주변에선 파업 현장만큼이나 높은 긴장이 형성되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공안검찰에 소환되고 구속되기도 했다. 80년대 후반 어느 원로 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야말로 ‘학문이 태풍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긍정적 가능성이 현실화된 시간은 섬광만큼이나 짧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지식인의 자기발견은 이미 자기변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령 1990년대 초반 문단에서 잠시 관심을 끌었던 ‘지식인 소설’ 논쟁은 한편으로 8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된 지식인의 자기 발견과 관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으로부터 지식인의 탈퇴를 지향하고 있었다. 오직 두 개의 나쁜 방향만이 나타났다. 일부는 지식인임을 포기하고 대중에게 뛰어들 것을 요구했고, 일부는 대중들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려 했다. 어떤 지식인도 지식인인 채로 대중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1990년대 이후 진보적 지식인들의 권력은 외견상 크게 확대되었다. 정치권에서든 학계에서든 진보세력들이 권력에 다가갔다. 많은 지식인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중들을 ‘떠나’ 청와대로 갔고, 대중들을 ‘떠나’ 대학으로 갔을 뿐이다. 진보적 연구실들은 ‘학회’가 되었고 진보적 잡지들은 ‘학회지’가 되었다. 그러나 연구와 교육은 대학과 학회지의 폐쇄적 회로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들은 대학으로 들어가 거기서 고립되었다.
한 때 한국의 대학은 지나치게 탈속적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민중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자왈만 읊조리는 상아탑은 세상과 참 멀리 있었다. 그러나 요즘 대학은 지나치게 세속적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을 만하다. 대학 교육은 시장과 연동하는 인간 양성에 맞춰져 있고, 대학 연구는 지식기반 경제에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지식 생산을 지향하고 있다. 많은 대학들이 학내 기업을 만들었고, 교수이면서 사장이고 대학원생이면서 직원인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작년엔 기업활동으로 100억원대 이상의 자산을 갖게 된 교수들도 탄생했다. 경제적 부만이 아니라 정치권력에도 교수들은 상당히 가깝다. 작년 7월 현재 현 정부에서 각료를 지낸 64명 중 14명이 교수였고,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04명의 교수가 출마했고, 현재 32명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식인은 이런 식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지식인이 사라진다고 지식을 둘러싼 투쟁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식이 권력이고 지식이 부이기 때문에, 어떤 지식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극심한 갈등의 대상이 된다. 지식과 정보에 대한 실질적 접근성이 계급별로 차별화 되고, 국가의 테크노크라트들은 중요 지식과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통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렇다면 저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나는 그것이 지식인 없이도, 지식인이 죽은 채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로 하여금 ‘지식인 없는 지식 투쟁’을 떠올리게 한 몇 개의 사건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황우석 교수 사건이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정부와 대학, 기업의 긴밀한 협력 결과 아주 흉측한 괴물이 탄생하고 말았다. 그런데 PD수첩이 그 실체를 고발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 논문의 진위 여부는 해당 전문가들의 몫이며 학술지를 통해서만 반박될 수 있다는 논리가 한 동안 모든 언론을 지배했다. 전문가 영역에 대한 대중들의 개입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논문의 검증을 끌어낸 젊은 연구자들의 웹사이트가 있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사이트에서 지식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양상이다. 여기에 글을 올린 이도 해당 분야에선 전문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명을 알 수 없는 아이디로 글을 올렸고, 그 글은 다른 익명의 필자에 의해 보완되고 재가공 되었다. 그리고 무수한 익명의 대중들이 다시 그것을 ‘퍼 날랐다.’ 논문 제1저자의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일부 사람들에게만 전문 학술지를 통해 유통되는 통상적인 학계의 지식 순환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보통신기술에서 나타난 최근의 진보는 이런 식의 지식 생산과 소통에 더욱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자본주의 대공업이 발전할수록 생산은 점차 사회 협력적 형식을 띠며, 집합적 생산자의 일반지성에 의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지적인 존재의 단위가 개체가 아니라 집합체라는 주장은 최근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다. 가령 하트와 네그리는 열대지방 흰개미의 놀라운 건축술을 지적하며 ‘무리지성(swarm intelligenc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개별 흰개미의 지능은 미미하지만 이들이 이룬 무리의 지능은 정말로 대단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인간의 뇌가 그렇다. 인간의 뇌란 신경섬유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단지 그 연결만으로 우리 뇌는 창조적 지성이 된다. 그렇다면 그런 뇌들이 다시 연결된 네트워크로서 대중지성(mass intelligence)은 어떨 것인가. 게다가 상품의 생산과 유통, 나아가 상품 자체가 지적인 형태를 취하며, 사람들을 지적으로 훈련시키고 소통하게 하는 상황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지배계급을 대변하든 피지배계급을 대변하든 나는 이제 그런 지식인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상황을 보건대 지식인은 더 이상 자기 계급의 지배를 위해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지식은 권력과 자본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이전에 곧바로 권력과 자본이고, 대중의 투쟁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 이전에 대중의 투쟁 자체이다. 지식인들은 한편에선 곧바로 통치자와 자본가일 것이고, 다른 한편에선 대중들의 지적 네트워크일 것이다. 나는 지식인의 죽음이 찾아온 이 시대가 결코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저 높은 파수대에서 세계를 내다보는 현자는 잃었지만, 저 넓은 세계에 걸쳐있는 무수한 익명의 현자들을 얻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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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계급의 지식인에서 지식인 지배계급으로 (참세상,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 2007년06월21일 11시16분)
[특별기획 : X맨은 바로 너!](6) - 우리 사회의 지식인
지식인 환상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끼여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해야하는 운명의 소유자.” 그러나 이 말은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진리가 아니다. 사실 그런 운명은 몇몇 지식인의 자의식 속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자의식을 가진 지식인들도 그리 많지 않다.
최근의 담론들을 살펴보면 지식인들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끼어있기는커녕 두 계급 ― 대부분은 지배계급 ― 으로 빠르게 해소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식이 권력과 자본을 옹호하던 시대에서 곧바로 권력과 자본이 되는 시대로 변하면서, 지식인 역시 권력과 자본의 옹호자에서 곧바로 권력자나 자본가로 전화하고 있다.
신은 죽었으나 그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고 했던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존재라던 인텔리겐치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그런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환상이 여전하다. 다시 말해 지식인은 자신들의 이해에 충실한데 대중들은 여전히 그것을 우리 모두의 이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 지식인에 대한 환상이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지식인 시대를 허용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국익’이니 ‘글로벌스탠다드’니 하는 전칭(全稱) 용어들은 사실상 특수 이해를 표현한다. 즉 ‘모두’가 살기 위해 ‘부분’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말하지만, 지난 십여 년의 경험은 그 ‘모두’가 일부 집단이며, 다수는 희생이 불가피한 ‘부분’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처럼 보편이 특수이고 특수가 보편인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가 과학이고 과학이 이데올로기다. 즉 보편적 지식과 지식인이 그 자체로 당파성을 띠게 된다.
환상 속의 지식인
현재 우리의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신앙에 가깝다. ‘시장개방과 자유화가 모두의 복리를 증진시킨다’, ‘탈규제와 사유화(민영화)가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인다’ 등의 말 앞에는 ‘나는 믿는다’는 한 문장이 생략되어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주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현실에 비추어 검증하지 않고, 현실을 자기 믿음에 맞추어 검증한다. 자신들의 교과서 안으로 현실을 강제로 끼워넣는 것이다.
2002년까지 4년간 영국의 무역과 산업 담당 각료였던 바이어스(S. Byers)는 <가디언>(2003년 5월 19일자)에 독특한 제목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내가 틀렸다. 시장 자유화 정책은 가난한 자들을 상처 입힌다.' 그는 '자유화(liberalisation)'가 모두의 복리를 증진시킬 것이라는 신념, 지금도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들을 지배하는 그 신념으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벗어나게 되었는지를 고백했다. 그는 “에어컨 나오는 각료 사무실을 떠나” 직접 대중들을 만난 게 결정적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직접 본 현실은 자유화가 경제체질을 강화하고 결국에 빈곤층을 구제할 것이라는 신념과는 정반대였다.
불행히도 현실을 직접 목격하는 이런 관료나 지식인들은 아주 희귀하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며칠 전 대부업체의 폭리를 고발하는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재경부 관료는 대부업체의 이자율 상한선이 너무 높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자율을 낮추면 자금 공급이 줄어 결국 돈을 써야하는 서민들에게 피해가 간다고. 그러면서 그는 이자율이 낮추면 공급이 주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대부업체들이 사상 최대의 이익을 실현하고 높은 금리를 탐내서 외국 자본까지 국내 사채시장에 뛰어드는 판에, 그리고 원금의 몇 배까지 불어난 채무 때문에 목숨을 끊는 서민들이 양산되는 판에 한가하게 수요공급이론이나 들먹이는 그는 틀림없이 ‘에어컨 나오는 각료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필리핀의 사회학자 월든 벨로(Walden Bello)는 권력과 정책에 대한 아카데미의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좌파 이론의 사회적 영향력은 1960-70년대를 정점으로 퇴보했고, 포스트모던 계열의 급진 이론들도 오직 대학 안에서만 급진적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도 알고 보면 대학의 연구실에서 주조해낸 이데올로기이다. 진보 이론은 대학 안으로 말려들고 있지만 보수 이론은 대학 바깥으로 펼쳐지고 있다. 주류 지식인들은 대학과 기업, 정부를 오가며 현실을 자신이 구상한 대로 직접 디자인하려 한다.
신자유주의가 이처럼 득세하게 된 것도 시카고 학파로 상징되는 일군의 지식인들이 레이건과 대처 정부 하에서 대단한 정치적 성취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 세계를 자신들이 이론적으로 상상한 세계로 개조할 실질적 권력을 획득했다. 현재 세계는 그들 진리에 대한 증명이라기보다는 그들 권력에 대한 증명이라 할 수 있다. 이론이 현실을 반영하는 시대가 아니라 현실이 이론을 반영하는 시대인 것이다.
지식인의 당파성
이른바 ‘시카고의 아이들(Chicago Boys)’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다. 원래 ‘시카고의 아이들’은 2-30명 정도의 칠레 경제학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1950년대 중반에 시카고 대학에서 강도 높은 경제 교육 프로그램(일명 ‘칠레 프로젝트’)을 이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국에서 배운 대로 칠레 경제를 디자인했다. 하지만 이제 ‘시카고의 아이들’은 미국에서 주류 경제학을 공부하고, 미국식 주류 경제학을 신봉하는 각국의 경제학자 및 경제 관료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엥겔스는 기독교라는 ‘전복당’이 로마를 정복한 비결을 ‘군대와 싸우기 전에 군인들을 모두 기독교도로 만들어 버린 것’에서 찾았다. 이 말은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정복한 비결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사회를 보면 이 점은 더 분명하다. 재작년 <시사저널>과 서울대 인터넷 뉴스 <스누나우>의 조사에 따르면, 서울대 사회대 교수의 86%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러 매체에 회자되어 지금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지만, 재작년 미국의 고등교육 전문 잡지 <더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은 미국 내 박사학위 소지자의 출신 학부조사 결과 서울대가 전체 2위를 차지했다는 놀라운 뉴스를 전하기도 했다. 서울대가 미국 박사 학위자 수에서 미국 유수의 대학들을 제친 것이다.
대학교수만이 아니다. 지난 주 경향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국책연구기관인 KDI 연구원들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주류경제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고, 역대 KDI 원장들 모두는 사실상 미국에서 대학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물론 기업 연구소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신장섭과 장하준이 미국의 신규 경제학 박사들의 이름을 조사한 결과, 1987-1995년 사이 약 10%인 8백 명 가량이 한국인 이름이었다고 한다. 단순 환산하면 매년 8-90명의 미국 경제학 박사들이 한국에 상륙하고, 대학과 정부, 기업의 요직을 차지한다. 사실상 대학과 정부, 기업의 주류 지식인들은 인식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들 사이에는 활발한 자리바꿈도 일어나고 있다. 교수가 경제 관료로, 정부나 기업의 연구자들이 대학교수로 자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달에 펴낸 <대한민국정책지식생태계> ― 지식생태계의 구성은 자본의 진정으로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 에 따르면, 정치사회적 주제와 달리 경제 분야에서는 소수의 지식인들이 전체 논의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가령 국민연금제도 개선 문제의 경우 KDI, 경총, 국민연금관리공단 등에서 연구자들이 논의를 제기하면 그 바탕위에서 나머지 지식인들이 논의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점차 정부와 기업, 대학의 전문 지식인들이 디자인한 세계 위에서 구축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지식인들은 특정한 나라에서 특정한 이념으로 무장한 동종의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들이 충원되는 계급적 기반도 매우 협소해지고 있다. 고급 고등교육 기관은 고소득층 자녀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서울대 사회과학원이 2004년 발표한 서울대 신입생 가계조사 자료를 보면, 1985년 고소득층 자녀와 비고소득층 자녀의 1.3대 1이었으나 그 차이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2002년에는 17대 1에 육박했다. 35명 정도의 정원을 가진 과라면 33명 정도가 고소득층 자녀인 셈이다.
권력의 지식에서 지식의 권력으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계급적 독점이 한국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계층이 지배계급으로 전화하고 있다. 그리고 지식정보화 사회로 나아갈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될 것이다. 글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지식인은 점차 통치계급의 이데올로그이기를 멈추고 통치계급 자체로 전화되고 있다. 현재에도 우리 사회에서 주류 지식인과 통치계급을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이다. 지식인 자신이 이제는 이해의 당사자이다. 그들 이론의 과학성은 이제 그들 자신의 권력과 부를 통해 증명될 것이다.
지식 투쟁이 계급 투쟁이 되어가는 시대. 한동안 계층 이동의 통로였던 교육이 계급 재생산의 주요 통로가 되고 있다는 보고서들이 여러 나라에서 나오고 있다. 교육이 바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중요한 접근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식인에 기대는 투쟁의 시대는 끝나고, 지식인 없는 지식 투쟁의 시간이 오고 있다. 지식과 정보의 계급 독점을 깨고 그것을 대중에게 순환시키는 정보 운동, 교육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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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좌파지식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참세상, 이득재(논설위원) / 2007년06월26일 15시58분)
자본 위탁경영과 대학 외주경영, 혼연일체로 아수라장
나는 공범자다. 나의 소비를 통해 자본주의는 지금도 굴러간다. 영화 <매트릭스>는 매트릭스 안에서 누구든지 자본주의의 요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자본주의의 목줄을 끊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물길을 터주는 나는 자본주의의 공범자다. 1999년 교수계약제 관련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으로 우리 대학에는 비정규직 교수들이 봇물처럼 늘어났다. 이것을 호기로 삼아 대학은 교육 하청사업을 벌였고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시행되기 전부터 이미 비정규직 교수, 정규직 교수들은 노동자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소비자로 ‘등극’했고 대학이라는 동일한 공간 안에 노동자.소비자가 공존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BK21인지 뭔지 국가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정규직 비정규직 가릴 것 없이 교수들은 자본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러나 가만히 이제껏 이루어진 일들을 반추하다 보면 국가가 헐값의 비정규직 교수들을 사들여 그들에게 대학교육을 위탁했고 하청을 주었던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 연간 강의료가 1080만 원으로 2006년도 최저생계비 기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는 이제 신물 나도록 들었다.
문제는, 국가와 자본이 옆의 동료들에게 교육 하청사업을 벌이는 동안 손 놓고 있었던 나는 국가와 자본의 공범자였던 것이다. 방송에서만 프로그램을 외주 주고 기업에서만 아웃소싱 했던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도 그동안 버젓이 교육아웃소싱이 벌어지고 있었고 위탁경영을 해왔던 것이다. 말로는 신자유주의 비판한다면서 정작엔 대학이라는 교육의 공간 안에서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활개치고 다니는지 눈치 채지 못했던 나는 알게 모르게 공범자로 살 수밖에 없다. 내가 공범자인지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동안 자본은 민자유치사업 방식으로 대학에 노골적으로 침투했다. 고대 서강대 서울대 등 B O T 등의 민자유치사업이 대학 안으로 밀려들고 있다. 국가와 자본이 개입하고 노동자.소비자가 공존하는 대학은 한 나라의 미니어쳐라 부름직하다.
내년부터 건설직 일용직 노동자들은 4대 보험 적용을 받는다는데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들은 파견직 노동자로 살면서 일용직 노동자보다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살아가게 될 형편이다. 청주대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투쟁이 과연 강 건너 불구경 할 일일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청주대 사건을 남의 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 더욱 심각한 문제는, 물질적인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투쟁하는데 비물질적인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토론회나 하고 세미나만 하면서 투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68혁명은 멀티튜드였는가 하는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사고가 우리에게 과연 필요한 것일까? 60년대의 남미혁명가 체 게바라는 이런 말을 남겼다. "머리는 우리가 발을 움직이지 않으면 축구공일 뿐"이라고. 축구공은 발로 차야 득점으로 연결되는 것 아닌가? BK21 사업이 대학의 진보세력의 씨를 말렸다고 말하는 우리는 왜 국가와 자본에 대해 현장에서 저항하지 않는가? 축구공에 불과한 머리가 왜 나의 발을 작동시키지 못하게 하는가? 학생운동이 죽었다고 하면서 운동을 학생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우리 대학의 현실은 지식생산기지로서의 역할은 일찌감치 물 건너갔고 자본의 위탁경영사업과 대학의 외주경영사업이 혼연일체가 되어 아수라장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사회는 사회대로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채 시행되기도 전에 제3의 왜곡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전망이다. 뉴코아 - 이랜드 계산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생존투쟁을 벌이고 농협중앙회 노동자들이 싸우며 성신여고 행정직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음독자살을 기도하는 동안에, 좌파는, 좌파지식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늦었다. 너무 늦은 감이 든다. 국가와 관료와 CEO들과 자본과 대학은, 그리고 언론은 미래로 줄달음치고 있는데 좌파는 의자에 앉아 투쟁을 안 하거나 구태의연한 투쟁 형태만 반복하고 있다. 좌파는 교과서적인 새로운 지식에는 민감하면서 ‘지금.여기’의 현실에는 너무 둔감한 것 아닌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대한민국 지식생태계리포트>에서도 자극을 받자. 자본은 조직과 경영혁신, 6T 등으로 끊임없이 이윤율의 증가를 꾀한다. 국내 자본만 그런가? 2002년 상반기 달러가 미국으로 환류한 스톡의 양은 2294억 달러였다. 2001년의 5228억 달러에 훨씬 못 미치는 숫자다. 그 양은 점점 줄고 있다. 그러니까 한미자유무역협정은, 그리고 미국이 일방적으로 세계 각 국에 강요하는 자유무역협정은, 결국 그 스톡의 환류량을 늘리려는 음모 아닌가. 전쟁상태 또한 밖에 있는 달러가 돌아오는 기회를 증가시킨다.
늦었지만 시작하자. 각각의 운동이 각재 약진하여 네트워크를 구성할 때까지 좌파 중심의 아이디어 전략회의가 절실히 요청된다. 투쟁의 아이템을 모으고 아이템별로 투쟁의 포트폴리오를 만들며 국가를 규제하고 자본을 통제하기 위한 투쟁의 주기, 투쟁의 일정표를 짜자. 국가와 자본의 공범자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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