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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날개를 단 미술, '소통'을 향해 비상하라 (대학신문, 2008-09-06)

새벽길 2008. 9. 8. 19:42

공공미술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 거의 모르지만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을 듯하다.
이 또한 공공성과 관련이 있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나만 모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알려고 하는 의지와 관심이 중요한 것이지.
공유하기 위해 대학신문에서 담아와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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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날개를 단 미술, '소통'을 향해 비상하라 (대학신문, 2008년 09월 06일 (토) 19:46:01 이진이 기자)
 
청계천 복원사업 기념 조형물 올덴버그의 「스프링」. 그러나 총 34억원의 거액을 지불한 이 거작은 서울시의 역사성과 시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설치 초기부터 논란이 됐다. 공공의 돈으로 만들어졌지만 공공의 뜻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 공공미술 작품은 1995년 일정 기준 이상 건축물 건립 시 건축비의 1%를 회화·조형물 등 미술장식품 설치에 쓰도록 한 제도가 의무화되면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건축허가 및 준공검사 통과를 위한 까다로운 절차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유명작가 이름에만 기댄 채 주변 환경 및 대중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스프링」 같은 작품도 수두룩하다.
 
이처럼 시민의 소통과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작품은 진정한 의미의 공공미술이 아닌 단순한 조형물이나 장식품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런 변화에 따라  공공미술의 개념은 단순한 미술창작 작업에서 예술을 매개로 한 지역과 지역민 사이의 교감으로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국내 공공미술은 공공성이란 날개를 제대로 달지 못해 제대로 비상하기 힘든 상황이다.
 
공공미술이란 개념, 정확히 아는 사람 드물어
예술이라는 사적 작업이 공공성이라는 공적 가치와 만나는 지점에 놓인 공공미술. 이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작품이 놓이는 장소, 작품을 만들고 즐기는 참여자, 작품에 담긴 내용 모두 공공성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작품을 전시장에서 끄집어 내 공공장소로 옮겨놓는다고 공공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작부터 향유까지 최대한 많은 지역민이 참여해야 하고, 장소에 담긴 역사와 그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삶이 제대로 투영돼 있어야 한다.
 
해마다 공공미술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아직 이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일반 대중은 물론 정책을 시행하는 정부·지자체,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조차 공공미술이 반드시 담고 있어야 할 요체인 예술과 장소, 예술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간과하기 일쑤다. 미술평론가 홍경한씨는 “소통은 공공미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공공성’의 또 다른 말”이라며 “현재 국내 공공미술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대부분 소통의 부재에서 파생된다”고 지적했다.
 
관주도 공공미술, 전시성 도시미관 정비사업?
공공미술에서 정부·지자체는 지역민이 예술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중계자다. 그런데 현재 정부·지자체는 중계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채 오히려 예술과 지역민 간 괴리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공공미술에 소통을 지우고 시각적 아름다움만 채워 넣고 있기 때문이다.
 
‘아트인시티’와 ‘도시갤러리 프로젝트’는 각각 문화관광부와 서울시가 주최한 공공미술 사업이다. 하지만 실상은 낡은 벽에 그림을 그리고 간판을 꾸미는 등 도시미관 정비사업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런 이유로 현재 관주도 공공미술 사업은 ‘보여주기’에 급급한 단발성 전시행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장소의 특색을 반영하지 못한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복제되는가 하면 사후관리가 미비해 그마저도 훼손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더욱이 지역민들의 참여와 소통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해 ‘주최 측만의 잔치’, ‘잠깐의 오락거리’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트인시티’ 사업의 일환이었던 ‘2007 인덕원 프로젝트’의 경우, 종료 이후 작가들이 설치한 조형물, 벽화 등이 훼손되고 지역민들의 관심도 끊겨 관주도 공공미술 사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걸음마 단계인 국내 공공미술 상황에서 정부·지자체의 하향식 공공미술 정책 시행을 무조건 비판만 해선 안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영욱 교수(전주대·도시환경미술학과)는 “정부·지자체의 정책지원이 있었기에 국내 공공미술이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며 “현 단계에서 관주도 정책마저 없다면 공공미술이 존립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미술 작가, 매개자 혹은 조력자로 바뀌어야
현재 공공미술은 단순히 회화나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을 넘어 작가와 지역민이 함께하는 활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뉴장르 공공미술’이라 불리는 최신 경향의 공공미술은 특정 장소를 공유하는 지역민들의 주체적 역할을 중시한다. 이에 따라 공공미술 작가의 위치와 역할 역시 변해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공공미술에서 작가란 미술작품에 특정 장소의 역사와 분위기를 담아 지역민에게 전달하는 매개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김민수 교수(디자인학부)는 “작가는 지역민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 도시의 역사성, 장소의 영혼을 받아내는 영매”라며 “공공미술 작가에게는 지역의 삶터를 해석하고 창조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지난 7월 20일 행정도시 건설이 확정된 충남 연기군 종촌리에서 지역 미술인들이 마련한 「종촌-가슴에 품다」라는 공공미술 전시회는 모범적 사례 중 하나다. 작가들은 곧 사라질 마을의 옛 모습을 담기 위해 지역 내 비문, 문패, 간판 등의 탁본을 떠 전시하고 주민들의 추억이 담긴 명소와 그들의 일상생활을 그림과 사진에 담았다. 주민들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의 공공미술이었기 때문에 참여도도 매우 높았다.

일부 뉴장르 공공미술 작가는 지역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최소한의 역할만 수행하기도 한다. 공공미술단체 ‘프로젝트 쏠’은 2006년 9월부터 마산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자발적으로 공공미술 사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신종진 작가는 “한번은 낡은 벽면 앞에 화단을 만들고 벽에 꽃과 나무를 그렸더니 며칠 뒤 지역민들이 그 화단에 나무를 가져다 심었다”며 “작가들은 지역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토대만 마련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홍경한씨는 “작가는 공공미술에서는 결코 자기만의 예술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작가는 지역민에게 예술을 가르치는 계몽자나 훈계자가 아닌 그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조언자, 조력자, 동업자란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방법론 모색하고 수용자 의식수준 높아져야
현재 국내에서 자발적인 공공미술 활동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홍익대 미술대학 거리미술전 기획단’은 1993년부터 지금까지 거리미술전을 열고 있고, ‘생각과 실천미술문화의 상상놀이 모임’은 지난 3일 낙성대 일대에서 골목예술제를 개최했다. 두 단체 모두 미술에 무관심한 대중에게 일상적 공간인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미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북 고창 돋음별 마을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마을을 ‘국화꽃 마을’로 탈바꿈시킨 사례다. 주민들이 직접 붓을 들고 담장에 그림을 그리는 적극적 참여가 돋보였을 뿐 아니라 지역 고유의 특색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공공미술 사례로 꼽히고 있다.
 
주민참여형 공공미술을 지향하려는 시도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부분의 공공미술은 거리전시, 벽화그리기, 아동미술교육, 활동 종료 후 토론 등 형태나 내용이 서로 엇비슷한 상황이다. 임재일 교수(목원대·조소과)는 “참여자가 몸소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져야 할 것”이라며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지역민의 지속적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수용자의 의식 부족 문제도 극복해야 한다. 신종진 작가는 “장소의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골목길 담벼락의 옛 손때를 남겨두면 일부 주민들은 그냥 전부 흰색으로 깨끗하게 칠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아직도 공공미술을 쾌적하게 거리를 꾸미는 인테리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송도영 교수(한양대·문화인류학과)는 “국내 공공미술은 역사가 짧아 그간 공공미술의 지향성이나 이념을 지역민과 충분히 공유할 시간이 부족했다”며 “정부·지자체와 작가는 진정성 있는 공공미술을 지역 현장에 어떻게 적용시킬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민수 교수는 “공공미술은 그것을 향유하는 대중의 정서와 안목까지 결합된 한 나라의 문화지표”라며 “앞으로 공공미술 발전을 위해 대중의 시각독해력(visual literacy)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교육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공공미술은 사회적 소통이 중시되는 현 시대에 어울리는 미술 장르다. 이영욱 교수는 “그동안 미술은 사적인 예술에 국한돼 있었다”며 “전시관에 갇혀 있던 미술이 사회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미술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진정한 ‘소통’이 절실한 국내 공공미술. 현재 국내 공공미술은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냄과 동시에 다양한 방법론을 모색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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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공공미술을 엿보다 (대학신문, 2008년 09월 06일 (토) 19:47:49 김민지 기자)
 

 
 사진: 성재민 기자, 네이버 블로그
   
 
성공의 관건은 대중의 기호와 눈맞추기
공공성 무시하고 독선적 작가주의로 나아가면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어
 
해외 공공미술은 우리나라에 비해 그 역사가 긴 만큼 잘된 사례도 많다. 성공한 해외 공공미술을 교과서 삼아 우리나라 공공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보자.

일본 도쿄의 롯본기 힐즈는 박물관, 호텔, 상가 등이 모여있는 일본의 대표적 관광지다. 이곳이 더욱 각광받게 된 것은 지난 2000년 모리미술관에 의해 추진된 ‘공공미술 프로젝트’ 덕분이다. 거대한 거미(위쪽사진)와 장미 조형물을 포함한 8개의 조형물은 롯본기 힐즈를 단순한 번화가가 아닌 문화적 명소로 만들었다. 공공조형물이 관광객과 지역주민에게 사랑받으며 지역의 랜드마크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성공 배경에는 지역 주민과 작가의 긴밀한 의사소통이 있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150여차례의 세미나가 열려 작품에 대한 지역 주민의 의견을 수렴했다. 또한 주민들에게 작품의 탄생 배경, 설치 과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작품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예술기획가 최혜원씨는 “롯본기 힐즈는 작가와 시민의 소통을 통해 꾸며져 시민들이 일상에서 예술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공공미술은 예술가와 시민들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미국의 문화단체 ‘희망의 초상(Portraits of Hope)’은 시민들의 참여로 아름다운 공공장소를 만드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어린이, 자원봉사자, 예술가가 함께 건물이나 광장바닥 등 공공장소에 꽃무늬 도안을 그리는 활동이다. 화려한 색채의 꽃무늬 도안은 기쁨, 생명력, 치유 등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2000년에 완성된 ‘희망의 타워(Tower of Hope)’(아래 왼쪽사진)는 수천명의 난치병 어린이들이 참여해 만들어진 건물로 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아트컨설팅서울 박삼철 대표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시민의 참여를 기반으로 한 공공미술은 자유로운 예술을 창조하고 개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진다”고 말했다.
 
공공장소에 돌발적으로 작품을 전시했다가 2~3일 내에 철거하는 ‘게릴라아트’(아래 오른쪽사진)도 눈에 띈다. JR이라는 머리글자를 쓰는 익명의 프랑스 미술가는 게릴라아트를 통해 시민들에게 사회 참여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JR은 분쟁지역이나 프랑스의 게토지역 등 소외된 지역의 풍경을 촬영, 대형 출력해 공공장소에 부착한다. 매스미디어에서 보여주지 않는 현장을 도시 한복판에 공공연히 전시함으로써 닫혀있던 시민들의 눈과 귀를 직접 두드리는 것이다. 풍자와 유머로 가득 찬 그의 작품은 사회문제와 관련해 시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모색한다.
 
이처럼 성공한 공공미술은 지역 주민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그들의 삶 속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다. 그러나 소통을 무시한 작품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79년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세워진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작품 「기울어진 호(Tilted Arc)」를 들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광장을 두개의 공간으로 구분해 시민들이 이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경험하는 것을 의도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보행을 방해하고 기울어진 모양새가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세워진 지 10년 만에 철거됐다. 이는 아무리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라도 공공성을 무시하고 독선적인 작가주의로만 나아간다면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한국의 공공미술도 시민의 삶이나 주변 경관을 고려하지 않은 채 조형물을 설치하는 등 여러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 그렇지만 공공미술의 참여와 소통의 측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점차 생겨나고 있다. 일례로 흥국생명 앞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 의 「해머링맨(Hammering Man)」은 4.8미터 옆으로 이동했다. 해머링맨의 입장에서는 단지 한발짝 옆으로 이동한 셈이다. 그 결과 시민들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공공성을 위한 해머링맨의 거대한 한발짝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공공미술이 시민들의 삶 속으로 한발짝 더 나아가길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