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좌왕 행정 정책/공공성, 행정이론, 행정이념
최갑수. 2001. 서양에서 공공성과 공공영역. 「진보평론」 9호
최갑수. 2001. 서양에서 공공성과 공공영역. 「진보평론」 9호 (2001년 가을): 3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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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공공성과 공공영역
1. 문제제기
본고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말하는 ‘공공영역’*의 등장이 근대적인 정당성의 토대를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공성’의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내어 ‘근대성’의 주요한 기저의 하나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비교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문제의식은 유럽사의 특수성과 관련된다. 유럽은 예컨대 중국과 비교하여 국가형성과정이 늦었고 이 상대적으로 지체된 정치적 축적과정 속에서 ‘시민사회’와 국가를 매개하는 공공영역이 출현했던 것이다.
* 독일어 Öffentlichkeit의 우리말 번역어이다. 현재 연구자들에 의해 빈도수의 순서로 ‘공론영역’, ‘공공영역’, ‘공론장’, ‘공중영역’, ‘공공성’, ‘여론형성기제’ 등으로 옮겨지고 있으나, ① ‘공개성’과 ‘여론’을 함께 아우를 수 있어야 하고(이것만 고려하면 ‘공론영역’이나 ‘공론장’이 더 적절하지만) ② 그것이 단지 의사소통의 사회적 공간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공공성’이라는 규범적 내용을 함축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공공영역’을 선택하였다.
2. 전통적인 지배방식과 공공성
우리말의 용례에서 ‘공(公)’은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저 ‘공(公)’, ‘공적(公的)’, ‘공공(公共)’ 등의 예에서 보듯이 그것은 국가 및 사회에 관련되는 어떤 현상들을 지칭한다. 하지만 ‘공적 독점’, ‘공적 부조’, ‘공적 경제’ 등의 예시는 그것이 “국가와 관련된 어떤 성질”을 지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공공성(公共性)’이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사회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로 간주하는데서 보듯이 그것은 또한 국가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회의 자율적 속성으로 여겨진다.*
*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동아, 1999) 관련 항목 참조.
위의 용례는 세 가지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공공성’이 어떤 보편적 속성을 뜻하면서도 그것이 추상적인 어떤 것(예컨대 ‘왕도’나 ‘철학자-왕’ 등)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실체(즉 국가나 사회), 즉 ‘공공영역’의 존재를 선제한다는 점이다. 둘째로 ‘공공영역’의 성격에 관해서는 위의 용례들이 혼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어떤 경우는 국가나 사회와 배타적으로 관련된 영역을 지칭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국가와 사회를 두루 아우르는 영역을 말하기도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의 용례들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대전제이다. 그것은 국가가 명확한 경계를 갖는 뚜렷한 실체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사회가 국가에 대해 독자적인 자율성을 지닌 별도의 공간이라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 사회의 실체성이나 국가와 사회를 나누는 이분법은 사실상 그것 자체가 ‘근대성’의 핵심적인 표상방식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18세기말-19세기초에 유럽의 지식인들이 목전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성찰했던 결과물이다. 우리가 그냥 국가나 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근대의 국민국가나 시민사회라는 특수한 역사적 실체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개념을 그 이전의 시기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의 우를 범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바꿔 말하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세계에서 ‘공공성’은 근대세계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고 표상되었던 것이다.
먼저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 명‧청 시대의 중국이나 조선조의 한국에서 ‘공공영역’의 존재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세 영역 내지는 위상을 설정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관(官)’으로서 공식적 정치와 관료적 개입의 영역이자 강한 규제력을 지닌 제도적 장이다. 다른 하나는 ‘공(公)’으로서 공공복지의 합법적 공간이다. 이 두 영역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열려있고 공명정대하다. 마지막으로는 ‘사(私)’이다. 이는 사사로우며 불공평하고 간사하며 은밀한 사리사욕의 영역이다.
이 분류법에서 사적 개인들의 영역을 기본적으로 왜곡되고 편향적인 것으로 보는 한, 그곳으로부터 ‘공공성’이 우러나올 리 없다. ‘사’는 제멋대로의 난장으로서 단지 불법적으로 공공영역을 교란시키는 개인적 이해관계의 발로일 뿐이다. 그렇다면 공공성을 ‘관’과 ‘공’의 영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오직 이 두 영역이 중첩되는 곳에서만 정치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공’, 곧 ‘사림(士林)’의 ‘청의(淸議)’는 독자적인 규정성을 가질 수 없다. 더욱이 ‘사’가 근원적으로 해방되지 못하고 독자적인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상황에서 ‘관’을 구성하는 관리들은 결코 유교의 도덕주의가 표방하는 ‘군자’에 이를 수 없다.
전통 유럽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동아시아에 비해 상당 기간 뒤쳐져 있었다. 유럽은 지중해문명으로부터 공공성에 관한 두 가지 전통을 이어받았다. 하나는 그리스의 전통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공동체 자체를 공공성의 구현체로 보았다. 모든 시민들에 의한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작은 규모의 정치체에서만 가능하였고, 그것도 시민보다 더 많은 수의 생산계급을 정치생활로부터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사실상 이 생산계급의 존재야말로 시민단의 활발한 정치성의 토대였으며, 이 점에서 플라톤이 정치계급의 구성원들에게 사적 소유를 사전에 차단시켰음은 의미심장하다. 폴리스의 공공성에 ‘사’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공성의 이념은 중세에 들어서서 중부 프랑크 왕국의 경계지대(이른바 ‘도시지대the urban belt’)에서 살아남았지만, 미래를 담보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로마의 전통이다. ‘만인의 것(Res publica)’인 국가는 이제 ‘공공성’의 구현자가 되었다. 아울러 로마법은 ‘사’에 독자적인 정당성을 제공해 줄 수도 있는 사적 소유권의 관념을 실체화하였다.
전통 유럽이 로마적 국가관을 실질적으로 복원시키는 데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새로운 지배층이 된 게르만족은 가산제(家産制)적인 국가관을 갖고 있어서, 유한적인 육신과 결코 사멸하지 않는 신비한 존재라는 국왕의 이중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만도 5세기에 달하는 시일을 필요로 했다.
근대 초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여러 영방국가들에서 공공성의 표상을 둘러싼 신분제의회와 군주제의 갈등 속에서 마침내 로마적 국가관이 실체화하였다. ‘국가이성’이라는 근대적인 이념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 와서야 유럽은 선진했던 동아시아의 정치적 발전에 상응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군주와 신분의회간의 싸움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하나는 폴란드형으로서 신분제의회가 승리를 거두었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형으로서 군주제가 신분제의회를 물리치고 절대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마지막 하나는 영국형으로서 군주제와 신분제의회가 절묘한 타협을 통해 정치적 축적의 누적적인 상승효과를 만들어냈다. 16-18세기에 프랑스형이 선진적인 경로로 보였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당시에 전형으로 간주되었던 프랑스 절대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공공성을 구현한다고 표상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문제는 국가가 공공성을 구현했다고 표출할 수 있는 방안으로 (신분)의회와 같은 어떤 전국적인 차원의 정치체가 없는 상황에서 특정 개인, 곧 국왕에 의존하는 길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다. 국가는 한 개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법인으로서 그 개인의 운명과는 다른 독자성과 영속성을 갖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국왕이 특정인과 법인의 두 가지 자질을 공유한다고 상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왕은 그야말로 온몸으로 국가의 심오한 의지를 표현해야 했고, 그의 유한한 육신은 영원한 공공성의 일시적인 거소가 되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심지어는 성행위까지도 공개되어야 하고 공중 앞에서 펼쳐져야 했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과시적 공공성(repräsentative Öffentlichkeit)’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러한 공공성은 1670년대에 들어 루이14세를 통해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이제까지 국왕은 유한한 육체와 불멸의 존재라는 이중성을 지녔지만, 그가 성년기에 들어서면서 “짐이 곧 국가”라는 유명한 (그러나 출처가 불분명한) 구절이 보여주듯이 군주의 육신과 그것이 상징하는 정치체의 구분은 사라지고 국왕의 신체 자체가 국가의 상징물, 곧 공공성의 구현자가 되었다. 이렇듯 국왕은 국가의 공공성을 독점적으로 구현하는 존재였으며, 예컨대 대안적인 정치과정이 부재한 상황에서 설사 임꺽정이 ‘개벽’을 꿈꾸며 한양으로 쳐들어가 궁궐을 장악했다손 치더라도 그 스스로 임금이 되는 길 이외에 다른 방안이 없었을 것이다. 상상력의 부족이 아니라 기대지평 자체가 차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3. 공공영역과 시민사회적 공공성
하지만 절대군주제의 덮개 아래서 대안적인 정치관을 배태한 새로운 사회적 공간, 곧 ‘공공영역’이 자라고 있었다.
먼저 살펴볼 것은 ‘공공영역’의 특수한 성격이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드러난다. 하나는 그것이 ‘공공성’을 형성해낸다는 점에서 하나의 규범적 틀이자, 구체적인 구성원들과 인적‧물적 교류망을 지녔다는 점에서 특정한 사회공간이라는 점이다. 공공영역은 정치체에 의해 해결되어야만 하는 문제들을 감지하는 공명판이요, 특정 문제에 관한 견해와 내용들이 교환되는 언어적 의사소통의 그물망이자, 문제해결의 합리적 방안을 제시하는 성찰적 이성의 저장소이다. 즉 그것은 ‘사’의 영역에 속하는 사회문제를 공공의 쟁점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공공성이 무엇보다도 절차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사적 개인들의 이성적 토론을 통해 합리적 해결이 가능하다는 믿음, 이것이 유럽이 만들어낸 근대적 ‘공공성’을 떠받치고 있는 대전제요 대의적 민주주의를 위한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자못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기획은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유럽 특유의 사적 영역이라는 맥락을 지녔다. 시민사회(civilis societas)는 중세 말인 1400년경에 교회에 맞서 ‘세속사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주창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였다.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와 사회가 미분화되었던 당시에 시민사회란 개별 정치공동체만이 아니라 문명화된 정치적 삶의 여러 특징들, 예컨대 도회성, 예의범절과 세련미, 시민법(ius civile)의 지배, 수공업‧상업적 기예 등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시민사회를 정치공동체와 동일시하는 전통은 로크(John Locke)의 시대에까지 살아남아 예컨대 그는 『통치론(The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에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를 같은 의미로 무차별적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가부장적 권위와 자연상태에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화폐경제, 교환체계, 기술적 발전, 합법적인 정치질서가 문명화된 삶의 구성요소임을 함축하였다.
하버마스가 ‘공공영역’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는 가운데 도달한 곳은 바로 이 지점, 즉 ‘계몽사상의 기획’의 본고장인 18세기이다. 그는 현실의 변화와 인식의 변화 사이의 시간지체에 주목하면서 ‘공공영역’의 등장시기를 영국에서는 17세기말-18세기초, 프랑스에서는 1750년대, 독일에서는 18세기말로 설정하였다. 이는 하버마스가 ‘공공영역’을 하나의 특수한 역사적 개념으로 파악했음을 보여준다. 즉 그것은 18세기라는 특정 시기에 유럽이 근대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독특한 역사적 현상이지, 유사한 역사적 발전과정이 나타나는 모든 곳에서 일어남직한 보편적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특수성은 ‘공공영역’이 사적 영역의 대응물이 아니라 그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정치권력의 영역으로서의 ‘공적 영역’과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으로서의 ‘사적 영역’이라는 전통적인 구분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구분을 무너뜨림으로써 하버마스는 ‘공공영역’의 진정한 성격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가르는 전통적인 구분법은 유럽에서는 고전적인 공화주의의 이념에 근거한 것으로서 이는 일차적으로 18세기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역사적 특수성에 의해 부정된다. 그가 말하는 ‘공공영역’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적 세계의 공공영역인데, 이는 그 구성원들이 논쟁과 토론의 대상으로 삼는 소재에 따라, 또는 특히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공적’이거나 ‘사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유동적인 영역이며, 역사적으로 문학적 공공영역에서 정치적 공공영역으로 전화한 장이었다. 사적 영역이 공권력으로부터 명확하게 분리되고 과세나 소유권의 문제와 같이 삶의 재생산이 가족의 틀을 넘어 공적 관심사로 고양되었기 때문에 국가와 사적 영역 사이에 “이성을 활용하는 공중의 비판적 판단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에서” “비판지대”(24)가 형성되며, 이것이 바로 ‘공공영역’인 것이다.
* 하버마스의 ‘공공영역’에 관한 연구가 나온 이래 특히 영‧미권에서 ‘공공영역’은 역사학, 사회학, 문학비평, 언론학, 여성학, 비판이론 등의 분야에서 단골주제가 되었다. 하버마스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일련의 연구성과에 관한 소개로는 Craig Calhoun, ed., Habermas and the public Sphere (Cambridge, Mass.: MIT Press, 1992)가 특히 유용하다.
중요한 것은 이 부르주아 공공영역에서 ‘공적’과 ‘사적’이라는 용어의 의미 도치현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즉 사적 영역이 근대국가 강화 그 자체의 결과이지만 역으로 사적 영역은 국가가 장악하고 독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공적 영역을 낳았던 것이다. 그것은 사적인 개인들에 의한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토대로 하였다. 이 공적 영역은 점차 국가의 권위 자체에 관한 토론과 비판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공공영역’의 참여자들은 모두가 사회적 지위를 초월하여 서로의 동등성을 인정하고 그때까지는 공개적인 논의에서 배제되어온 성역에까지 이성적 비판을 확대시키고 군주정에 대항하는 가운데 ‘여론’의 대변인으로 자처하는 지적 유대의 형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여기에 18세기적 개념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 속에서 의사소통적 이성이 구현되는 이상으로서 ‘공중(public/public/Publikum)'이 출현한다. 여기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라 함은 정치적 의지를 공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광장에 모여들었던 고대의 정치적 집합체로서의 시민이 아니라, 비판적 공적 토론에 참여하는 한 사회의 분산된 구성원들을 의미한다. 이것이 18세기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또 다른 역사적 특수성인 것이다. ‘공공영역’의 구성원들의 집합적 견해가 곧 여론을 형성하며, 여론은 이 새로운 ‘공공영역’의 궁극적인 원천을 이룬다. 이 점에서 그것은 ‘시민사회적’ 공공성의 구현물이요 그 운반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공공영역을 구성하는 사적 개인들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버마스는 사적 개인들의 주체성이 부르주아 가정이라는 ‘친밀한 영역’(‘내밀성’)에 토대를 두었던 것으로 본다. 즉 상품 교환과 사회적 노동의 영역인 시민사회가 부르주아 가정이라는 개별적인 공간들로 재구성됨에 따라 그러한 공간들의 ‘주권자’로서 사적 개인들의 위상이 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제활동으로부터 해방된 사적 개인들은 스스로를 ‘순수하게 인간적인’ 관계의 주체로 보았고,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적 상호주체성의 실체를 이루게 된다. 그는 문필적 공공영역을 부르주아적 상호주체성의 초기 형태이자 대표적인 작동방식으로 파악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주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토론에 국한하였던 문필적 공공영역이 점차로 정치적인 소재를 흡수하면서 그 성격 또한 정치적인 것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게 부르주아 공공영역이란 이데올로기적 허구이자 ‘공공성’을 일정 정도 역사상 구현한 사회적 형태이며, 이 점에서 마르크스(Karl Marx)가 「유태인문제」(1843년)에서 지녔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다. 즉 재산소유자의 역할과 보편적 인간의 역할을 동일시하였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허구임과 동시에 그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인정하고 있듯이 분명 계급적 이해관계는 부르주아 여론의 기반을 이루었다. 하지만 부르주아 여론이 기존의 절대주의체제로부터 시민사회를 해방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한 그것은 부르주아들이 스스로 선언했던 것처럼 보편적 이해관계를, 곧 ‘공공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 계급에 대한 다른 계급의 지배를 은폐하는 한에서 부르주아 ‘여론’이 허구임은 분명하나, 공개된 토론과 논쟁의 장치를 통해 도달한 합의에 입각한 이성의 통치라는 규범적 이상을 내세움으로써 시민사회의 해방을 주장한 부르주아 여론은 적극적인 역사적 과정으로 실재했기 때문이다.
‘공공영역’의 등장과 그로 말미암아 기존의 공권력이나 정치적 표상체계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공공성’의 구현 가능성은 의회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질서, 심지어는 그것을 넘어서는 대안적 전망을 제시하였다. 이제 통치의 대상이 정치적 삶, 더 나아가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인식지평이 생겨났다. 새로운 공공성은 근대 민주주의가 작은 정치공동체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영토와 주민을 아우르는 영방국가의 틀 속에서도 가능하다는 정당성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공공영역’의 위치설정이 국가주의의 제약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 긴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치국가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치국가는 권력의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부는 입법‧행정‧사법의 국가기구로 규정되고, 주변부는 공공영역과 시민사회로 구분된다. 위에서 보았듯이 여론취합기능을 가진 언론매체 및 각종 이익을 대변하는 준공식적 압력단체들이 공공영역에 속한다면, 현안에 따라 결집되는 비공식적 결사체나 비제도적 시민‧대중운동, 일상생활권, 즉 자발적인 욕구가 광범위하지만 산발적으로 분출되는 일상적인 생활세계 전체는 시민사회라는 범주로 포괄된다. 따라서 시민사회→공공영역→국가기구라는 배출체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제도에 의해 정당한 결정권을 가진 핵심정치권력의 취급절차를 통해서만이 법규범의 일반의지가 합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공영역’이 주창하는 해방이란 국가 일반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맥락에서 절대주의체제라는 특정 국가, 즉 자의적인 통치질서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제한적인 의미를 지닌 뿐이다. 이는 근대세계가 국민국가라는 복수적인 정치적 단위로 구성된 데 따른 숙명적인 결과가 아닌가 한다.
4. 공공영역의 역사적 토대
‘공공영역’은 역사적 형성물이다. 이것이 등장하려면 먼저 ‘공’과 ‘사’의 명확한 구분이 나타나고, 이어서 ‘사’가 고유한 정당성을 확보 받고, 궁극적으로 근대적 주체의 관념이 출현해야 했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유럽이 ‘근대성’을 획득해 가는 복합적인 과정의 일환으로서 그 자체가 그것의 주요한 요소를 이룬다.
1) ‘영방국가’의 등장
‘공공영역’은 “공적인 사적 영역”을 말한다. 즉 그것은 ‘시민사회의 공적 영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이 등장하려면 먼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뒤섞여 있는 중세적 공간이 해체되어야 한다. 중세 말기 이후 영방군주는 스스로를 특수한 의지를 초월해 있는 공정한 존재로 제시하였고 실제로 근대 초기의 행정군주제는 궁정과 관료제라는 이중적인 장치를 통해 그것을 현실화하였다. 그러기에 ‘국가’는 ‘공유물(res publica; commonwealth)'로 간주되었고, 그것을 체현하는 국왕은 그야말로 ‘공적인 존재’로서 그의 모든 행위, 심지어 왕비의 출산이나 왕의 성생활까지도 공개되어야 했다. 홉스(Thomas Hobbes)는 그 근대국가가 얼마나 엄청난 힘을 가진 ’괴물‘인가를 명확히 깨달았다. 특히 그것은 치열한 국제적 각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세국가‘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고, 이리하여 사적 영역 위에 군림하면서 그 영역에 개입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자의식을 일깨웠다.
2) ‘이해관계’의 해방
16세기말에 ‘물욕’은 ‘열정’의 범주에서 빠져 나와 ‘interest'란 새로운 명칭을 부여받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그것을 ‘이해관계’라고 옮겨 경제적 이익의 측면을 특화시키기는 하지만, 당시에 그것은 ‘관심’, 더 나아가 인간의 총체적 열망을 뜻하면서도 그 열망을 추구하는 방식에 대한 숙고와 계산이라는 면모를 아울러 함축하였다. 즉 ‘물욕’은 ’이해관계‘라는 정당성을 보장받음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교란할 지도 모를 충동과 열정이 아니라 그 충동을 달래고 올바른 인간행위를 이룩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새로운 지도원리로 부상했던 것이다.
이해관계의 해방은 단순히 그것이 생활세계에서 각 개인을 자기 삶의 주체로 인정받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이 등장하는 시민사회에 각별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사적이고 개인적 차원에 불과한 이해관계에서 그야말로 보편적인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정치질서에 관한 전망을 열어주었다. 이리하여 18세기에 이르면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세계는 투명성과 항상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국가의 개입 없이도 공공선에 이를 수 있다는 정치교리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uart), 존 밀러(John Millar)가 대표적인 예이고 중농주의자들과 아담 스미스(Adam Smirh)는 그 절정이자 그것의 쇠퇴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 Albert O. Hirschman, Passions and the Interests (Princeton, N. J.: Princeton Univ. Press, 1977.
3) 사생활의 등장
‘공공영역’ 등장의 또 다른 요인은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사생활’이라는 새로운 연구주제가 제공하고 있다.
17세기말에서 18세기초에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공적인 것은 더 이상 사적인 재산이나 이해관계와 혼동되지 않았고, 사적인 공간은 공공업무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거의 폐쇄적인 공간처럼 기능하게 되었다. 자율적인 이 공간은 가정에 의해 메워질 것이었지만, 이 사적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공적인 생활에 참여하지 못하여 좌절을 겪으면서 정치적 성찰과 요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생활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근대에서 사생활의 문제가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임을 강조한다. 하나는 공적 인물과 사적 개인의 대립, 즉 국가의 영역과 마침내 가정의 공간이 될 영역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성(la sociabilité)의 측면으로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개념이 혼동되는 중세 말의 익명의 사회성으로부터 파편화된 사회성으로의 이행이라는 측면이다.
4) 자율적 주체로서의 개인관의 형성
시민사회가 여론을 통해 공공성을 지닌 실체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공’과 ‘사’의 구분이나 사생활의 등장만으로 불충분하다. 시민사회의 주인공인 사적 개인들이 도덕적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보편적인 자연권이나 인권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과 인격에 대한 존중을 자율성의 개념과 결합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존중을 세워주고 보장하는 적극적인 협력자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이제는 진부한 지적이 되겠지만, 당시 이 근대적 주체성은 모든 부류의 인간들에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과 교양을 지닌 성년 남자, 곧 흔히 말하는 부르주아들에게만 타당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잠재적인 차별성은 적어도 프랑스혁명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1789년의 ‘인권선언’이 설정했던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의 괴리는 인식되지 못했고 양자는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혁명을 통한 “정치적 해방은 인간을 한편으로는 시민사회의 구성원, 이기적인 독립적 개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 즉 도덕적 인격으로 환원시”켰지만, 공공영역의 여명기에 사적 개인의 이성적 성찰은 공공성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5. 프랑스혁명과 공공성
공공영역과 프랑스혁명과의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 연구자들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견해의 일치를 보고 있다. 하나는 적어도 1791-92년까지는 혁명은 대연맹제나 각종 선거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냈고, 특히 공공영역을 크게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후자의 증거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① 신문의 폭발적인 증가: 1789년초만하더라도 5-6개에 불과하던 파리의 정치적인 성격의 신문이 그 해 말에는 140개에 달했으며, 국민의회의 개회기에 파리의 가판대에서 팔린 신문의 수는 총 400종이 넘었다. 이런 현상은 정도는 약하지만 지방에서도 재현되어 혁명기의 10년 동안에 약 600종의 지방신문이 창간했고 1790년에만 90종이 넘는 신문이 출현했다. 혁명기의 언론은 지방지조차도 지역적 문제가 아니라 국민적 관심사를 주로 다루었다.
② 정치 결사 및 집회의 급증과 활성화: 구체제 말기에 ‘자유석공회’의 지부들이 활발한 공공영역의 존재를 입증했지만 혁명은 구체제의 제도적 제약을 분쇄하였다. 혁명 직전의 50여 개 아카데미, 약 100개의 문학협회, 800개 정도의 자유석공회 지부에 대신하여 1789-94년의 기간에 6천 개가 넘는 정치 클럽이 들어섰다. 모든 도와 군이 최소한 1개 이상의 클럽을 지녔고 면 소재지의 60%에 클럽이 들어섰다. 이는 3만 5천 개가 넘는 프랑스의 코뮌 가운데 14%가 집단적인 정치적 삶을 경험했음을 말한다. 민중이 혁명정치에 가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디었고, ‘민중협회’는 1791년에야 본격적으로 출현했다. 파리의 민중협회는 1789-94년에 100개를 넘어섰고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코르들리에 클럽’이다. 이외에도 혁명 초부터 반혁명적이거나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클럽들도 있었다.
③ 새로운 정치계급의 형성: 과연 혁명기의 정치문화는 새로운 정치계급을 배태했는가? 대체적으로 연구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엘리트가 사회적으로 또렷한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었다는 유보조건 하에서 혁명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혁명의회의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지방정치의 담당자들을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부유한 농민, 활동적인 장인층과 소상점주 등과 함께 법률가들, 부르주아 지주, 상인-공장주 등이 정치계급을 형성하였고, 그것에 진입하려는 성직자나 일부 귀족 또는 조세청부업의 관리자와 같은 이들의 시도는 대개 단명하거나 실패로 끝났다. 이들을 ‘혁명적 부르주아지’로 부르기에는 다소간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들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부르주아 공공영역’의 정서를 지녔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하나는 퓌레(François Furet)를 위시로 하는 이른바 ‘수정주의자들’이 혁명기의 공공영역을 특히 초기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반자유주의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혁명의 부정적인 역할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버마스가 혁명이 전체적으로 부르주아적 공공영역을 함양했다고 보면서 반자유주의적인 ‘민중적(plebeian)' 공공영역이 출현했던 공포정치기만을 일시적인 일탈기로 파악했던 것과는 달리, 수정사가들은 혁명의 전 과정을 통해 공포정치를 자코뱅주의의 정수요, “절대적이고 불가분의 여론”을 구현하려는 시도의 논리적 절정으로 본다. “가시적인 중심”인 국왕이 단두대에서 처형된 이후 통합과 권위의 원리가 더욱 두드러졌지만, 그 경향은 이미 “단일하고 불가분의 통일체”로서의 국민관을 지녔던 혁명 초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혁명은 초기부터 일상생활을 정치화함으로써 ‘공공영역’의 전제인 공적/사적 영역의 경계를 잠식하였다. 정치적 충성의 표현으로서 의상, 외관, 언어가 갖는 중요성은 사적 영역이 허물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것은 대중이 권위 및 충성을 과시하려고 했다는 의미에서 전도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과시적’ 공공영역으로의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혁명은 공적/사적 영역의 경계를 교란시키고 국가권력을 통해 사적 영역에 개입함으로써 끝내 ‘공공영역’의 범위와 활력을 축소시키는 한편, 추상적인 개인들의 가상적인 ‘공중’이라는 인위적인 틀에 끼워 맞추기 위하여 일련의 가혹한 배제와 추방을 통해 사회를 새롭게 주조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혁명에서 진정한 공공성의 발현은 찾아보기 힘들고, 오직 ‘인민의 동의의 생산’이라는 조작적인 정치적 과정이 있을 뿐이다. 대내외적인 적대세력의 배제가 ‘공공선’을 확립하는 장치로서 비판적 토론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공공영역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가능성이 차단되고 성찰적 이성이 거소를 빼앗긴 상황에서, 통일된 권위주의적 여론이라는 미명 아래 익명의 과두제가 합의를 조작하고 강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혁명기에 부르주아 공공영역이 특히 공포정치기에 크게 축소되었음을 확인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요인을 인민의 절대적인 동의라는 이상화된 전망과 공적 논쟁이라는 실제 정치적 과정 사이의 모순과 괴리 그리고 양자간의 변증법, 곧 혁명적 과정의 논리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호소력을 갖는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공공성과 혁명의 의미에 관한 편협하고 제한적인 견해에 입각해 있다. 먼저 지적할 것은 그것이 부르주아 공공영역과 ‘민중적’ 공공영역을 상반되는 현상으로 파악하고 전자에 대해서만 공공성에 이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하버마스가 명확히 했듯이 ‘민중적’ 공공영역은 자유주의적 공공영역의 한 변종이지 대립물이 아니다. 즉 그것은 후자가 억압을 받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후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하버마스는 그것이 “부르주아 공공영역의 의도를 향해 있다”(저자 서문, xviii)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적 공공영역은 비록 부르주아 공공영역과 정치적 관행의 측면에서는 사뭇 다르고 또 보다 넓은 사회층을 포괄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공공성의 이념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부르주아 공공영역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환경을 이룩하기 위한 정지작업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혁명기의 10년을 넘어 19세기에 이르는 장기적인 전망에서 볼 때, ‘민중혁명’은 부르주아 공공영역의 형성을 위해 꼭 필요한, 구체제에 대한 일종의 청소작업을 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프랑스혁명은 격렬한 유위전변을 통해 공공영역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혁명은 국왕을 통해 공공성이 투영되던 전통적인 표상체계를 대신할만한 근대적인 표상체계를 만들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웅변하다. 그러기에 혁명은 일련의 우화적 여신상을 통해 새로운 ‘가시적 중심’을 빚어냈으며 다양하고 풍부한 상징체계와 문화행위를 산출하였다. 혁명가들은 전통적인 시‧공간의 개념을 새로운 4차원의 세계로 바꾸기 위해 혁명력과 신 도량형제도를 도입하고 전 국토를 새로운 행정체제로 구획했다. 혁명의회는 일련의 헌법과 입법행위를 통해 근대국가와 근대사회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역동적인 정치관은 국가와 공공영역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였다. 부르주아 공공영역이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여론과 공공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국가기구, 특히 의회를 통해 입법화하는 정태적인 절차적 과정을 전제한다면, 혁명의회와 정부는 그 과정을 뒤집어서 공공영역이 닻줄을 내리고 있는 사적 영역의 근저, 곧 소유권의 문제에까지 다가가려고 했던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집단적 노력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새로운 정치관은 혁명의 격동을 통해 시민사회적 공공성을 뛰어넘어 민중적 공공성에 입각한 사회민주주의, 더 나아가 소유제의 폐지를 통한 근본적인 변혁의 전망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6. 결론: 공공성과 근대성
어떻게 해서 유럽은 전통적인 공공성의 이념을 넘어서서 시민사회적 공공성, 곧 통치의 대상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근대적인 공공성의 이념을 빚어낼 수 있었을까?
먼저 지적할 것은 정치적 축적이라는 점에서 유럽이 근대 초까지도 적어도 동아시아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후진적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정치적 축적이라 함은 꽤 광범위한 영역에서 지방적인 수준에까지 침투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중앙적인 정치적 명령체계가 존재함을 말한다. 이러한 수준의 정치적 축적 여부의 가장 확실한 지표는 중앙권력이 전국적인 차원에서 조세를 수취해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유럽의 군주들은 근대 초까지도 과세권을 신민들에게 부과하는데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결국 중세의 오랜 진화과정을 통해 나타난 국가란 신민들의 소유권을 침해할만한 역량(곧 자의성)을 갖지는 못한 채 그들을 꽤 넓은 영역에서 조직할 수는 있는 능력을 가진 국가, 곧 ‘유기적 국가(the organic state)'였던 것이다.
이 유기적 국가가 당장에는 동아시아의 관료적 집권국가에 비해 여러 가지 점에서 뒤쳐졌지만, 바로 그 상대적 후진성으로 말미암아 시민사회가 나타날 수 있는 일정한 여건을 잠재적인 형태로 갖출 수 있었다. 근대 초의 말기에 유럽에서 새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강력해진 절대주의 국가에 맞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호받으려고 했을 때, 그들이 동원했던 수단들은 대부분이 중세 말에 형성된 것이었다. 소유권, ‘시민사회’, 기독교라는 규범적 토대, 가족구조, 지주-농민관계, 도시입헌주의, 법률가들의 중요성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동아시아와 비교하여 다른 차이점은 유럽국제질서의 독특한 성격이다. 유럽은 정치계급의 경제적 잉여수취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한 관계로 끝내 중국이 건설했던 것과 같은 거대제국을 유럽적인 수준에서 이룩해내지 못했다. 정치적 미성숙이 중세 유럽을 수천의 정치적 단위들로 이루어진 촘촘한 그물망의 형상으로 만들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체의 숫자는 줄어들어 갔지만 17세기에 이르러 복수적인 정치적 단위로 이루어진 다극체제라는 독특한 ‘국가간체제(inter-state system)’로 귀착되었다. 그 결과 유럽에 거의 비등한 힘을 가진 10개 내외의 강대국과 그들 사이의 힘의 균형의 틈새에서 살아남은 수십-수백개의 나라들로 이루어진 경쟁적인 국가체제가 나타났다. 이들 사이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격렬한 군사적인 경쟁이 벌어졌으며, 놀랍게도 근대 초의 유럽은 만성적인 전국상태 속에서도 국가간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자본, 인간, 사상에게 유동성을 보장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것들에 도피처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대외적인 군사화와 대내적인 평화화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이렇게 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시민사회 탄생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결코 국가권력 자체에는 맞서지 않았다. 오히려 패배가 곧 망국으로 직결되는 냉엄한 국제현실에서 시민사회 주인공들의 이해관계는 국가이성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보다 강력한 국가의 요청은 보다 광범위한 사회층의 정치적 참여를 뜻하는 것이었고, 시민사회는 이를 위한 운반체의 역할을 하였다. 공공영역이 탄생한 것이었다. 급기야 그것은 군주제의 표상체계를 넘어서 근대적인 공공성을 이룩했으며, 그리하여 이제껏 통치의 대상에 불과하던 신민들이 나라의 주인인 시민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이 근대국민국가는 과연 홉스의 예언대로 거대 중국을 집어삼킬 정도의 ‘괴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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