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정치과정,의회정치,법제도

헌법재판소 설립 20돌, 헌법과 헌정구조를 다시 생각한다

새벽길 2008. 9. 1. 15:03
오늘로 헌법재판소가 설립 20돌을 맞았다고 한다. 이에 한겨레신문에 그 성과와 과제를 짚는 기사가 올라왔다. 공무원시험 때문에 헌법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를 했던 9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헌법재판소의 의미에 대해 상당히 높게 평가했던 것 같다. 정치적 사법이라고 하여 대법원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하지만 대통령탄핵사건과 신행정수도 사건을 거치면서 헌법재판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헌재만이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국정운영을 좌우한다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최장집 교수의 일련의 글들에 영향을 받은 바 크다. 사실 헌재 재판관들도 일종의 관료들 아닌가. 관료들의 판단이 민중의 의사 내지 그 대의기구의 결정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대의기구 위에 선 그 사법관료들이 언제나 불편부당하다고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불편부당하다고 하더라도 그보다는 정치가 우선이어야 한다. 물론 정치가 부정적으로 읽혀지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이 또한 못마땅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관련하여 과거에 헌법 및 헌법재판소와 관련하여 담아놓았던 글들을 함께 옮겨놓는다. 대의에 대해, 법치에 대해, 헌법 및 헌정구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스무살 헌재 `기본권 억압하는 가짜법치’ 견제할 때 (한겨레, 김남일 기자, 2008-08-31 오후 10:16:06)
[헌법재판소 설립 20돌] 성과와 과제
 
헌법 수호와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라는 소임을 맡은 헌법재판소(소장 이강국)가 1일 설립 20돌을 맞았다. 헌재를 두고 헌법전에만 존재하던 기본권의 의미를 되살리고 그 폭을 넓혔다는 찬사와, 보수성 강한 결정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헌법 가치 실현에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모두 나온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법치주의’를 앞세운 공권력에 의해 집회·표현·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이 무시되고 기득권만이 강조되는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어느 때보다 헌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 세상을 바꾼 결정 헌재의 이력은 ‘민주화 이후 20년’과 겹친다. 이제까지 헌재에 접수된 사건은 헌법소원심판 1만5782건, 위헌법률심판 586건 등 1만6417건(7월 말 기준)에 이른다. 이 가운데 214개 법률에 대해 위헌, 138개 법률에 헌법불합치, 한정위헌, 한정합헌 결정 등을 내렸다.
 
이제는 그 중요성이 널리 알려졌지만, 헌재는 기대보다 우려를 안고 출발했다. 변정수 초대 헌법재판관은 “문을 열 때만 해도 예전 헌법위원회처럼 ‘휴면기관’이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컸다”고 회고했다. 이런 부정적 전망과 달리, 헌재는 4개월여 만에 ‘위헌 결정’으로 존재를 알렸고, 반민주 악법 철폐와 개정을 바라는 열망이 헌재로 향하기 시작했다.
 
헌재는 100시간이 넘는 평의 끝에 재범 개연성과 관계없이 감호처분을 받게 하는 보호감호제도에 위헌을 선고했다. 5공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만든 법률에 대한 첫 제동이었다. 또 국가보안법 7조 찬양·고무죄 규정에 대해 엄격하게 축소적용될 때만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한정합헌’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해당사자들의 반발과 인습적 사고를 극복하고 제대군인 가산점제, 동성동본 금혼, 호주제 등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의 길을 텄다. 영화 사전심의 등을 위헌으로 판정해 표현의 자유 확장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 보수적 한계 그러나 노동권 등 사회적 기본권 신장에는 내내 어깃장을 놓아왔다. 대표적 노동악법인 노동쟁의조정법의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이 합헌이라 하고, 교사의 노조 활동을 막은 사립학교법 조항, 필수공익사업장 노동쟁의에 대한 직권중재 등에도 합헌의 날개를 달아줬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법학)는 “기본권에도 등급이 있다”고 말한다. “표현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와 같은 정신적 자유권의 제한은 재산권 등 경제적 기본권 제한보다 훨씬 더 엄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헌재의 결정은 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시민사회의 끈질긴 개폐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은 4차례나 합헌 결정을 받았다. 양심범의 준법서약서 작성,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도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판단을 받았다.
 
반면 투기를 막으려는 토지초과이득세법에는 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재산권에 민감한 헌재의 경향성을 보여줬다. 위헌 결정이 난 법률의 상당수가 재산권 행사를 규제하는 상속세법, 법인세법, 국세기본법, 지방세법, 소득세법 등이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적 보수성도 끊임없이 도마에 오른다. 1992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연기에 대한 헌법소원은 2년 넘게 끌다가 해당 재판부의 마지막 결정 선고에서 “심판의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됐다. 12·12와 5·18 사건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 처분도 합헌 결정을 받았다. 국회법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건을 각하하지 않고 본안심사를 한 것이나, 관습헌법을 위헌의 유일한 근거로 삼은 신행정수도 사건은 정치의 사법화, 헌재의 권력화 논란을 촉발시켰다.
 
■ 부당한 공권력 행사 견제해야 헌재의 위상이 부풀려졌다는 냉정한 평가도 있다. 위헌 결정은 주목 받지만, 수많은 합헌 결정은 묻힌 탓이다. 법학자들 사이에서는 “헌재가 헌법 가치를 균형있게 구현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승환 전북대 교수(헌법학)는 “재판관들이 헌법재판의 외피를 두르고 정치를 해버린다”며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안고 있는 법률을 다룰 때는 보수 편을 드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국순옥 인하대 명예교수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헌재가 잘못 운영될 경우 형식적 민주주의까지 사문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국 교수는 “지난 정권부터 정치화되기 시작한 헌재가 이번 정권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떤 나쁜 선례를 남길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공권력의 기본권 침해를 견제하며 존재가치를 뚜렷이 새길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은 “검찰까지 정부와 코드를 맞춰 인권을 후퇴시키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기댈 곳은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며 “헌재가 제 구실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헌법에 바탕한 ‘진짜 법치주의’를 보고 싶다는 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