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민주주의, 국가론

서구 민주주의 한계를 뛰어넘는 '촛불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 (새사연 새로운 시선 이슈 종합, 2008-08-12 ㅣ 김종철/요크대 박사과정)

새벽길 2008. 8. 14. 07:38
일단 담아놓는다. 아직까지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최장집 교수의 논리에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의민주주의와 결부하여 정당이 가진 이익집약의 기능을 무시할 수는 없을 듯하다. 아래 글에서는 이러한 측면이 간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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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민주주의 한계를 뛰어넘는 '촛불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 (새사연 새로운 시선 이슈 종합, 2008-08-12 ㅣ 김종철/요크대 박사과정)
대의제-촛불집회의 충돌과 한국식 민주주의 
 
캐나다 요크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김종철씨가 보내온 보고서를 1/4 분량으로 요약한 글이다.
 
촛불집회의 정권퇴진 구호에,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많은 지식인 혹은 정치가들은 비판적이다. 그들은 촛불집회가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예를 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촛불집회의 "정권퇴진" 구호가 한국의 헌정질서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보 지식인인 최장집도 촛불집회가 "대의제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 또는 ‘대통령소환제’의 요구와 같은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코자 하는 논리나 정조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최장집,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중에서, 3쪽). 신임 국회의장 한나라당 김형오의원은 6월 30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 위기를 얘기한다. 민주주의 위기가 선출된 권력이 대중에 의해 꼼짝 못할 때 일어난다면서, 지금이 그런 경우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KBS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통합민주당이 촛불집회에 참여하여 대의민주주의체제를 흔들었다고 비난한다.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의 촛불집회에 대한 부정적 태도, 그로 인한 대중과의 괴리는 우리 사회가 걸린 의사소통장애라는 심각한 병의 원인 중 하나다. 몸에 비유하면, 사회가 동맥경화증 같은 병에 걸려 피돌기에 장애가 생기고 혈압이 높아져 언제 졸도할 지 모르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지식인, 정치가들이 촛불집회에 대해 갖는 부정적 태도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이 글에서는 이런 태도가 정당하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이들 지식인에게는, 서유럽 특히 영미문화권에서 발생한 특정한 민주주의 형태를, 왜 우리 사회가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없다. 그들에게 대의민주주의는 보편적 정치체제이다. 즉, 민주주의는 곧 대의민주주의이고, 그래야 한다.
 
"운동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성격으로부터 나온다. 무엇보다도 현대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스스로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여 그에게 통치를 위임함으로써 대표로 하여금 통치토록 하는 체제이다"(같은 글, 2쪽).
 
"(현대)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러한 등식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래서 대의민주주의제도와 상충되는 촛불집회의 요소는 억제되어야 하는가? 대의민주주의는 매우 특수한 형태의 민주주의에 불과하며, 특수한 문화 혹은 문명사적 배경을 필요로 한다. 영미권과는 다른 문화 혹은 문명사적 배경을 갖는 한국의 경우, 대의민주주의가 보편적 대안으로 선험적으로 제시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에 맞는 나름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촛불집회를 대의민주주의의 실패의 결과로 보거나, 대의민주주의 발전의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거나, 혹은 대의민주주의와 상충되는 요소는 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우리 문화에 적합한 특수한 민주주의적 의사표현 양식으로 긍정적으로 수용하여야 하지 않을까?
 
대의민주주의란,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국민의 의지를 ‘재현’하는 것?
"대의(Representation)" 개념에 대해서는 현재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대의 개념이 다양한 사회에 수입되면서 그 사회에 맞게 재해석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특수한 문화 혹은 문명사적 배경을 살피기 위해서는, 대의 개념이 처음으로 민주주의 개념과 만나 발전한 영국으로 돌아가봐야 한다. 영국 근대민주주의 사상의 대표적 이론가인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사상을 중심으로 대의 개념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번역어 "대의(代議)"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의논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신 논한다"라는 의미는 영어 Representation의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가장 원 뜻에 가까운 번역어는 "재현(再現)"일 것이다. 그래서 "대의민주주의"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재현민주주의"라고 번역해야 좀더 원래 뜻에 가깝다. 대의민주주의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재현(대의)민주주의가 무엇을 재현하는 것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키너에 따르면, 기원 후 4세기경 라틴어 repraesentare의 의미가 확장되는데,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말하거나 행동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기존에는 다른 물체의 외양을 재현하는 것에 머물렀는데, 이 경우는 다른 사람의 인격(person) 즉,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타인을 통해 재현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스키너는 Representation이 정치적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 근대초의 영국이라고 말한다. 의회파는 국회가 국민(the people)의 인격(person)을 재현(represent)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정치교과서에서는 "국민의 인격을 재현한다"는 말을 흔히 "국민의 의지(public will)를 재현한다"고 표현하는데, 같은 말이다. 왜냐면 인격체(person)만이 의지(will)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재현민주주의 혹은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의 시작이다.
 
대의(혹은 재현)민주주의는, 국회가 가지는 통치권이, 독립된 인격성을 갖는 국민(the people)으로부터 위임(trust 혹은 transfer) 받은 것으로 여기는 제도를 말한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재현되는 "공공의 의지" 혹은 "국민의 인격"(국민을 일컬을 때 영어로 people이라 쓰지 않고 the people이라 쓴다. People은 다수의 모임을 일컫지만, the people은 추상적으로 독립된 개체로서의 국민을 말한다)은 법인(corporation) 개념과 비슷하다. 현대 사회에서 기업은 법적 인격체로서, 구성원들의 책임과 의무와 독립된 자기 자신만의 책임과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
 
이러한 국가 혹은 국민의 독립된 인격체는 구성원들과 공동체의 "계약 관계"를 가능케 한다. 국가의 개개 성원은 추상적 인격성을 갖는 국가(the state) 혹은 국민(the people) 혹은 공동체(the community)와 계약관계를 맺는 것이다.
 
촛불은 ‘국민의 의지’가 아닌 국민 ‘다수의 요구’를 비춘 것
다음은 "위임(trust 혹은 transfer)"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로크는 신탁(信託, trust)이라는 개념으로 위임을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두 번의 신탁이 발생하는데, 첫째는 각 개인이 자신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한 개인적인 권리를, 추상적 인격성을 갖는 공동체(the community) 혹은 국민(the people)에게 신탁(trust)한다. 둘째는, 공동체(the community) 혹은 국민(the people)은 국회(representatives)에게 국가를 통치할 권력을 신탁한다. 로크에 따르면, 이 두 번의 신탁 행위는 동시에 발생하는데, 투표 행위를 통해 대표자(representatives)를 선출하여 국회를 구성할 때이다.
 
지금까지 "공동체 혹은 국민의 인격성"과 "위임"이라는 개념이 "Representation(대의 혹은 재현)"의 개념의 핵심임을 살펴보았다. 앞서 말했듯이 Representative Democracy(재현민주의의)란, 추상적 인격성을 갖는 국민(the people) 의지(will)를 정부와 국회라는 대표자(Representatives)가 재현(represent)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현은 위임(Trust)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촛불집회에서 얘기되는 민주주의는 이러한 재현민주주의와는 다르다. 촛불집회에서 대중은, 자신의 요구가 국민 "다수"의 요구임을 강조한다. 즉, 촛불집회의 대중은, 정부가 재현해야 할 것이 국민 "다수"의 요구라고 생각하지, 추상적 인격성을 갖는 국민(the people) 혹은 공동체(the community)의 요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촛불집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촛불집회에서 대중은 정부의 권력이 "위임"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정부는 "대리인(代理人)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법적 용어로서, 위임(委任, trust)과 대리(代理)는 매우 상이한 개념이다. 경제적 대리 행위를 예로 들면, 경제적 대리행위에서는 법적 소유권이 대리인에게 이전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산의 처분 권한이 본인과 대리인 모두에게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 본인이 대리인을 통하지 않고 자산을 처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부(政府)를 대리인(代理人)으로 이해했을 때는, 정부의 정책 결정이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될 때 국민 다수가, 출판 및 결사의 자유를 통한 비판을 넘어, 정부 정책을 수정할 것을 명하거나, 필요한 경우 위임을 철회할 수 있다.
 
대의의 문제점, 과연 공공의 의지는 존재하는가
재현민주주의 혹은 대의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앞에 설명한 두 핵심 개념들과 관련된다. 우선 공공의 의지(Public Will)가 진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바꾸어 말하면, 추상적 인격성을 가진 공동체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유일한 형태가 아니다. 즉, 민주주의가 반드시 공동체의 "단일한 의지" 혹은 "공공의 의지"에 기초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정의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공의 의지(public will)를 얘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민주주의란 "다수에 의한" 통치였다. 다수가 통치하고 그것에 스스로 책임지는 통치체제였다. 여기에는 대의민주주의와는 달리, 행(行)하는 자와 의지(意志)하는 자의 구분(혹은 권력의 행사자와 권력의 주체의 구분)이 없고, 단일한 의지를 갖는 국민(the People)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는 다양성의 모임이기 때문에 단일한 의지와 욕구를 가질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근대 서구의 민주주의가 똑같이 "민주주의"라고 불릴 수 없는 매우 상이한 정치체제다. 왜냐하면, 두 민주주의에서 "민(民)"이 의미하는 것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표자가 결정한 것이 과연 공공의 의지(public will)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국가(the state) 혹은 국민 (the state)의 의지라는 것이, 실은 지배 엘리트가 자신의 의지대로 대중을 통치하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래서 대의민주주의의 공공의 의지라는 개념은 책임소재를 불명확하게 한다.
 
대의민주주의 혹은 재현민주주의의 또 다른 근본적 문제는 "위임"과 관련된다. 다수결 투표라는 대의민주주의의 위임 방식은, 다수의 의지가 공공의 의지이기 때문에 채택된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공공의 의지란 다수의 의지와는 다른 무엇이기 때문이다. 다수결 투표는 불가능한 "위임"을 가능하게 하려고 고안된 변통수일 뿐이다. 다수결 투표 후에 대표자(Representatives)는 무기속위임(無羈束委任)원칙에 따라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단한 의지를 공공의 의지(public will)로 국민에게 강제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 정치학자 루소(1712~78)의 다음과 같은 "대의"제 비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국의 국민은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중대한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대표를 선거하는 동안뿐이며, 대표가 일단 선출되면 영국인은 다시 노예로 돌아가 버린다."
 
촛불집회를 긍정하며 우리만의 민주주의를 만들어가야 할 때
한국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은 대의민주주의 혹은 재현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사유방식과는 크게 다르다. "나"라는 고유한 실체란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와 관계성만이 실재한다고 믿었던 공동체 의식은, "나"의 권리를 먼저 찾는 권리 의식과는 매우 다르다.
 
또한 "대리"라는 사유는 영미문화의 "위임"이라는 독특한 사유와는 매우 다르다. 지금껏 우리는 "대리(代理)"라는 사유에 익숙해왔다. 하지만, 자본주의 금융과 서구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발전은 우리에게 "위임(委任, trust)"의 사유에 익숙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중은 행하는 자와 의지하는 자가 구분될 수 있다는 사유에 익숙해질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합법적 위임행위인 투표를 통해 권력을 위정자에게 "위임"했으니, 비록 국민 다수의 의지에 반해 위정자가 행동하더라도, 촛불집회에서 정권퇴진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요구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얘기된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사유 방식 모두 안에서 살고 있다. 이중생활이다. 위정자의 이중생활을 보자. 위정자는 한편으로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서구적 사유 속에서 산다. 대중이 촛불집회에서 정권퇴진 요구를 하면 "위임"의 원칙을 얘기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비난한다. 위정자는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사유 속에서 산다. 서구적인 대의민주주의 사유방식에서 기본전제가 되는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공동체의 이름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집회와 대의민주주의의 대립은 우리의 모순된 이중생활을 드러내고 있다. 이중생활을 덮고 과감히 본연의 내가 되려 할 때, 즉 촛불집회를 본연의 우리를 자연스럽게 드러낸 것으로 긍정하고 우리의 독특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려고 할 때, 지금까지의 괴로움(苦)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