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민주주의, 국가론
촛불에 대한 평가
지금 촛불집회의 의미를 얘기하는 게 조금 뻘쭘하지만, 그래도 그 동안 나왔던 논의는 정리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관련 기사와 관련 글들을 담아온다.
여기에 내 의견을 추가하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어서리, 내가 동의하거나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밑줄을 긋는다. 김강기명과 윤여일의 글은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촛불이 가져다 준 무형의 성과를 잊어서는 안된다. 이는 제도정치로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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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만능 정치가 각자의 삶 위협한다는 자각” (경향, 김종목·이지선·임지선기자, 2008년 06월 17일 18:45:20)
토론주제1 - 촛불집회의 소감과 주목할 점
“지난 5월2일 청계광장에 나갔을 때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500회 정도 기고·강연 등을 하면서 그때마다 광우병 얘기를 했는데도 전혀 씨알이 먹히지 않았는데 단숨에 여중생에 의해 돌파된 게 놀라웠다.”
정태인 교수는 이날 토론회에서 촛불집회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정 교수는 “그 다음 발전 과정은 더 놀라운데, 대운하, 민영화, KBS지키기까지 의제가 확장됐다”면서 “시장 만능의 정치가 자기의 삶, 아이들의 삶을 해칠 수 있다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촛불) 축제는 2006년에도 반복된 월드컵 축제(10~30대)와 6월항쟁(40~60대)의 기억이 절묘하게 결합된 것”이라며 “노태우 집권이라는 항쟁의 결과와 인권운동가들로부터 집단주의 비판을 받았던 월드컵 축제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었고, ‘민주주의적 동원’의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조국 교수는 “촛불집회에서 국가 폭력이 진행됐다. TV 현장에서 볼 때 옛날(1980년대) 생각하니까 그 폭력이 별거 아닌 거 같았다”며 “하지만 87년 이후 시대를 살았던 학생·시민들은 내 생각으로는 충분히 수용 가능한 폭력을 절대 용인하지 못했다. 그 점에서 87년의 성과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속속 들어와 있나를 느꼈다”고 밝혔다.
하승우 교수는 “촛불집회는 다시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청소년, 여성 등 기존 정치에서 배제됐던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냈고, 이들이 제기했던 게 특정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의 문제로 인정된 게 의미 있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촛불집회는 목적을 실현하고 과정을 통해 자기가 시민으로 거듭나고 또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세 가지 참여의 층위를 다 가지고 있다”면서 “기존의 이론 틀과 우리가 가진 감성과 이성을 해체해서 재구성해야 하는 계기”라고 말했다.
토론주제2 - 정당정치의 부재에서 촛불은 무엇을 해야 하나
촛불‘대안적 제도화’ 필요
앞으로 촛불집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그 향배를 두고 다양한 의견이 분출했다. 조국 교수는 “촛불시위를 계속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말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진보정치에 대중적 열기를 지도할 리더십이 있는지, 능력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진보정당의 성찰을 요구했다.
조 교수는 이어 “운동이 정치화되고, 정치가 정책으로 갈 때 성격이 달라지고 정책이 막판으로 가면 결국 인물로 간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정당”이라고 강조했다. 즉, “‘한·미 FTA’하면 ‘정태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하면 ‘강기갑’ 등 최종단계에서 사람으로 일치되듯 연상되는 무엇이 떠오를 수 있도록 진보정치운동이 커야 한다”는 얘기다.
조 교수는 촛불집회 이후의 방향에 대한 방청석 질문에 대해서도 “촛불집회에는 수많은 사람의 꿈과 고통, 욕망이 있다”며 “운동세력이 포착하지 못한 이런 욕망으로 당장 달려가서 어떻게 바꿀지 논의하고 싸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태인 교수는 “쇠고기 문제 하면 재협상이라는 대안을 내놓았듯이 각각의 의제에 대한 간단한 대안을 만들어 가치를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비용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촛불집회를 무한히 이어갈 수 없다. 우리가 이번에 촛불을 통해 요구했던 것들을 어떻게 제도로 만들지 생각해야 한다”며 ‘개헌론을 내놓기도 했다.
박상훈 대표는 “촛불집회는 자유로운 의견과 항의의 표출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며 “정부의 일방적인 통치행위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대안적 정치세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승우 교수는 “정권 퇴진 운동을 한다면 퇴진도 어렵지만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오는 불신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며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시민불복종 운동을 더욱 강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주제3 - 운동정치와 정당정치
최장집 교수 주장은 위험
촛불집회를 통해 주목받은 것은 ‘운동정치’의 가능성이다. 촛불집회라는 운동·저항을 통해 참여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히면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박상훈 대표의 경우 운동정치에 대해 비판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박 대표는 특히 정권 퇴진 운동과 관련, “민주주의 체제에서 운동을 통해 민주적 선거의 결과로 선출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경우 이에 대한 반작용이 매우 클 수 있다”며 “운동은 자발적 항의의 표출이고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활력 있게 만들 수는 있지만, 정치체제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국민적 위임의 절차적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이어 “정부의 일방적인 통치행위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하고, 대안적 정치세력을 키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끊임없이 운동하더라도 성과가 제대로 나타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박 대표의 이런 문제의식은 최장집 교수의 정당 강화를 바탕으로 한 ‘정당정치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정태인 교수는 최 교수의 정당정치론과 관련, “광장의 직접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는 위험하다”며 “촛불로 드러난 온라인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가능성을 넷-정당의 형태로 정당정치에 접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승우 교수는 “진보정당이 운동정치를 표방한다고 그게 운동정치인가”라며 “독일 녹색당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현할지를 명시했고 따랐기에 운동정치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실제로 운동정치를 얘기하려면 정당이 풀뿌리와 어떤 연계를 맺느냐, 정당이 또 지역사회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석준 팀장은 “과연 정당이 여론의 독점적 대변자 역할을 하던 기존 대의민주주의 구조를 그대로 견지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있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정당 무용론에 빠져서도 안 될 것”이라며 “정당의 내부에서부터, 그리고 정당의 일상 활동에서부터 대중참여형 숙의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토론주제4 - 한국 정당정치와 진보정당
진보당, 대중 따라가기 급급
진보정당이 촛불집회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대중을 좇기에 급급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진보정당의 ‘대안 부재’가 우선 거론된다.
정태인 교수는 “지난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통합민주당과 의제27 등 시민단체가 중도를 외치며 오른쪽으로 이동했고,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도 믿음직한 정당이 아니었다”며 “이런 공백은 좌우 이념의 공백이 아니라 대안 제시의 공백이기 때문에 (쇠고기 수입을) 막으러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진보정당의 과제로 풀뿌리정치를 강조하며 “중앙당의 상근자들이 지방에 내려가 지구당을 하나씩 꿰차고 해야 풀뿌리정치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진보정당도 권력 의지, 집권 의지를 분명히 가져야 한다”고도 했다.
조국 교수는 “87년에도 6월항쟁이 있었지만 직선제 쟁취 뒤 뚝 떨어지면서 노태우가 당선되고, 발랄한 탄핵 반대 운동이 있었지만 순식간에 뚝 떨어진 적이 있다”며 “이런 열기와 집단 의식·의지를 어떻게 정치로 수렴하느냐에 진보정당의 역할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 그는 “촛불집회를 찬양하고 중요한 의미를 찾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며 “진보정당의 역할은 진보적 가치를 국민적 가치로 바꾸는 것이며 우리 사회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진보의 가치를 갖고 어떤 제도를 요구하고 만들어야 할지를 정말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석준 팀장은 “구세대의 자발적 결사체, 성공적으로 일상화된 새세대의 자발적 결사체 등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를 발전시키는 일이 진보정당의 사활을 건 과제”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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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지나치게 신화화” “참여의 즐거움 보여줘” (경향, 손제민·이지선·임지선기자, 2008년 06월 17일 18:45:42)
박상훈-하승우 박사의 ‘촛불집회’ 논쟁
박상훈-하승우 박사가 보는 ‘촛불집회’
이날 토론 가운데 하승우 한양대 연구교수와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사이의 논쟁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 모두 정치학 박사이지만, 민주주의를 보는 견해의 차이로 첨예한 논쟁점이 형성됐다.
박상훈 대표는 촛불집회에 대한 해석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신화화됐다는 얘기로 시작했다. 그는 “여러 시위 아이디어들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 속에서 발전해왔고 이번 시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며 “이번 시위의 새로움을 과장하는 해석은 그간 사회운동의 다양한 시도와 발전에 대해 접촉의 기회를 갖지 못한 중산층 엘리트 지식인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그는 “촛불집회에 많이 참여하게 하기 위해 온건하고 평온한 논의를 많이 했는데, 그 논의들이 다소 실제 현상들을 과장하게 하고 한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가 하는 논의는 실종된 게 아닌가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촛불의 위대함만 얘기할 경우 우리가 개선해야 할 여러 과제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억압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촛불집회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나머지 ‘조·중·동의 시각에서 공격의 빌미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억압자의 시선과 검열 권력이 전도된 형태로 재생산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이에 하승우 교수는 “단지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서가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가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분명히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성인 남성에 밀려 국가적인 사안에서 정치적인 주체가 되지 못했던 여성과 청소년이 “주체로 나서 ‘시민되기’를 체험했고, 능동적인 참여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도 깨달아 이제 사람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쇠고기 이슈가 대운하, 민영화, 공영방송 등으로 확산되는 것은 “사람들이 학습을 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는 “그 학습이 어디까지 진행될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으며 그것은 ‘신자유주의 그 너머’일 수도 있다”고 했다. “촛불집회는 목적을 실현하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가 시민으로 거듭나고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스스로 결정해보겠다고 하는 3가지 ‘참여’의 층위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차이는 두 사람의 민주주의 이해의 다름에서 왔다. 박 대표는 “실망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라고 말했다. “촛불집회에서 얘기되는 ‘새로운 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 등은 현실이 될 수 없는 ‘낭만적 정치관’ ‘복고주의’에 기초한다”고 봤다. 그는 “레닌이 구상한 사회주의 정체 역시 대의민주주의였고, 실제 실현된 소비에트 역시 발칸 문제에서 인종, 민족, 언어, 종교적 대표성을 해결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구상에 기반했다”며 “현실의 민주주의는 모두 대표를 뽑고 그에게 책임을 묻는 대의민주주의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또 “시민의 위대성을 수백만번 말해도 현실의 정치적 대표체제가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제대로 대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지금같이 하층배제적이고 상층편향적인 민주주의는 개선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촛불집회에 나타난 민주적 열망을 어떻게 정당체제를 변화시키는 에너지로 확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하 교수는 ‘직접’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반박했다.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늘 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직접은 은유적 표현이다. 결정이 내려질 때 누군가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관심있으면 나도 가서 말해야겠다는 것이지 모든 사람을 불러모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그런 결정들에 대해 내가 복종하지 않을 수 있고 권력의 문제가 드러나면 언제라도 바꿀 수 있으며, 설령 문제가 없다 해도 그 권력이 순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부에서 우리가 권력을 받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정부에 권력을 주는 것”이라며 “우리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부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직접민주주의”라고 덧붙였다.
이에 박 대표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 채 강제력으로 유지되는 권위주의에서 정권퇴진 운동이 갖는 정당성과는 달리, 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주적 선거의 결과로 선출된 대통령을 운동을 통해 물러나게 할 경우 이에 대한 반작용은 매우 클 수 있다”며 “운동은 자발적 항의의 표출이고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활력있게 만들 수는 있지만, 정치체제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국민적 위임의 절차적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논쟁은 한국 민주주의를 보는 눈으로 이어졌다. 박 대표는 촛불집회로 한국 사회 내의 구조와 제도로서 정치의 보수성이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1990년과 91년의 5월 정국, 97년 총파업, 2000년 촛불정국, 2004년 탄핵정국 등 대규모 운동의 개입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정치의 세계는 계속해서 보수적 독점체제의 지속으로 나타난 것을 예로 들었다. 박 대표는 이를 “광범한 대중적 참여와 운동의 시기에는 어떤 변화라도 가능할 것 같은 집합적 열망의 분출이 일순간 국면을 휩쓸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은 종결되고 탈동원화와 일상화의 주기로 돌아가 버린다”고 해석했다. 결국 “반정치적 열정과 도덕적 호소로 운동의 지속만 강조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론과 생활정치를 개념적으로 불러들인다 해도” 그 열기가 정당체제로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이미 그 판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 독점체제는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는 “민주주의의 핵심은 정당을 잘 만들어 촛불집회에조차 못나오는 비정규직 등 사회 소외계층이 정당에 들어와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이 과정이 너무 지난하기 때문에 운동처럼 화끈하게 할 수는 없지만 일단 민주화가 진행되면 이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하 교수는 “서구 민주주의 이론을 우리 사회에 단순 대입할 필요가 없다”며 “촛불집회라는 특이한 현상을 경험한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정당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당정치가 민주주의의 목표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정치에서 정당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면, 그건 몇몇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정치 자체에 대해 새롭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촛불의 앞날에 대한 해답도 달랐다. 박 대표는 “지금 사태가 어디로 귀착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 그리고 민주주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할 방도를 찾기 어렵게 된 것은 제대로 된 야당 하나, 책임감 있는 정치지도자 한 명 없기 때문”이라며 “현실의 정당과 정치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대안 제출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시민의 권리”라고 말했다. 반면 하 교수는 “국민투표나 등원정치는 그 전제가 적절한 타협에 있는 만큼 촛불집회의 잠재력을 갉아먹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진보진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번 집회에서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음이 드러났다”며 “기본적으로 대중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떤 가치를 공유할 건지 이제는 진보진영도 학습을 좀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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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의지 버리고 집권의지 가져라" (레디앙, 2008년 06월 17일 (화) 19:39:39 이재영 기획위원)
주기적 분출, 보수독점과 동전 양면
[시국토론] "운동 vs 정치, 초등수준 논쟁…가난한 사람 참여도 못해"
장석준은 양쪽 끝에 ‘정당정치’와 ‘운동정치’가 위치하고, 박상훈, 조국, 정태인, 하승우가 순서대로 죽 늘어선 도식을 발표했는데, 토론자들은 장석준이 정리한 그대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토론 주제가 ‘촛불 집회와 진보정당’인 만큼 “진보정당이 중요하다, 잘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수렴되기는 했지만, 어디에 강조점을 두는가에 있어 토론자들의 주장이나 제안은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목소리 만큼이나 큰 스펙트럼을 보였다. 촛불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단 문제에서는 네 토론자들이 본 바, 촛불집회의 이런저런 측면을 이야기하였다.
“경찰폭력 별 거 아닌데…?”
정태인은 첫 집회에 나가봤을 때 충격을 받았다며, 촛불집회가 “87년 과 2002년 월드컵 합쳐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정태인은 “스위스에서는 유전자변형생물(LMO)에 대해 국민투표했고, 영국에서는 선거할 때 사람만 뽑는 게 아니라 지역 사안에 대해서도 투표한다. 우리도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국은 “촛불집회에 대한 경찰의 대응을 보고 ‘별 것 아니네’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절대 용납지 않더라. 민주주의 이전의 옛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경찰폭력에 둔감하지만, 그 별 것 아닌 경찰폭력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할 만큼 87년의 성과가 굉장하다”고 말했다. 이어 조국은 “촛불은 진보정치세력의 지도력 부재가 드러난 사태다. 하지만 대중 찬양만 하고 있다 보면 대안을 낼 수 없고, 대중은 다시 보수로 회귀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하승우는 집단경험이나 ‘교육’의 측면을 강조했다. “이번 촛불집회는 ‘시민되기’ 과정, 능동적 정치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촛불집회가 교착 상태로 가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치 않다. 그 과정에서의 학습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승우는 “이미 제기돼 있는 의제를 촛불에 결합시키는 방식은 긍정적이지 않다. 대변기능을 하던 기존의 사회운동은 역할이 변해야 한다. 정당정치와 대중운동의 관계에 대해서도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 속에서 이론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상훈은 “베버는 ‘정치는 위험한 것’이라 말했는데, 오늘 위험한 이야기를 좀 하겠다. 촛불 현상을 지나치게 신화화하는 해석은 위험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박상훈은 “요즘 촛불집회를 누가 더 높게 평가할 수 있는지 경쟁하고 있다. ‘위대한 시민’과 ‘대중의 놀라운 창발성’을 거론하는 사람 중에는 때에 따라 말을 바꾸던 사람도 있고, 이번 시위의 새로움을 과장하는 해석은 대부분 사회운동과 접촉하지 못한 중산층 엘리트 지식인들이 내놓는다”고 가혹하게 평했다. 이어 박상훈은 “대의민주제, 제도정치, 정당정치를 부정하는 반정치적이고 낭만적 경향은 매우 큰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퇴진시키고 뭐 할 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네 토론자의 의견은 “제도화가 꼭 무엇인가를 보장하는 게 아니고,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대동소이했다. ‘이명박 퇴진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이 등장했다.
조국 교수는 “개헌 논의는 법률주의적 시각”이라며, “대통령 소환제는 어느 정권이든 중간에 끝장낼 수 있는 양날의 칼날이다. 제도화는 칼날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고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 또 조국은 “‘이명박 퇴진’을 주장하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권력 쥐고 뭘 할 건지, 대중이 그런 주장을 믿을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정권이 진보정당에게 오겠는가? 안 온다”고 주장했다. 이어 조국은 “퇴진운동은 다른 파국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보다는 촛불시위자들의 꿈과 희망을 받아안는 데 주력하자. 학교체벌이나 청소년 아르바이트 문제 같은 걸 제기하자”고 제안했다.
박상훈도 촛불집회의 제도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견이었다. “소환제가 되려면 스위스처럼 합의제여야 한다. 한국 같은 경쟁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 대통령 중간평가나 신임투표 때마다 집권세력이 승리했던 것도 잘 지켜봐야 한다.” 박상훈은 91년 5월 정국, 97년 총파업, 02년 촛불, 04년 탄핵 정국 때 대규모 운동이 있었지만 보수적 정치독점이 지속됐다며, “한국정치에서 주기적 운동의 분출은 보수독점적 정당체제의 다른 얼굴”이라고 파악했다. 박상훈은 “촛불의 핵심은 항의의 표출이다. 이 항의를 모을 수 있는, 조직노동에 바탕을 둔 진보정당을 대안 정치세력으로 등장시켜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주기적 운동 분출은 보수독점정치의 다른 얼굴”
하승우는 “퇴진운동으로는 정치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 하는데, 말릴 것 없다. 강력한 시민불복종운동을 제대로 해보자. 시민들이 정부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제안했다.
마지막 주제인 진보정당 문제에서는 네 토론자가 진보신당에 여러 제안과 조언을 하였다. 하승우는 “진보정당은 국민투표를 이야기하기 전에 지구당 문제를 먼저 고민하라. 촛불은 대중과 정당의 신뢰관계 상실이다. 대중과 대화에 나서야겠지만, 정당 내부에서 직접민주적인 구조와 소통구조를 어떻게 만들가를 고민하라”고 제안했다.
정태인은 “진보정당 사람들은 집권이 어렵고 무섭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집권하지 않으려 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어 정태인은 “진보신당은 변혁의지를 버리고 집권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런 혁명상황에서도 아무 프로그램을 못 만들면서 무슨 변혁인가? 국민들이 받아들일 현실정치라도 만들 수 있는가? 아고라에서는 진보신당이 여당인데, 이를 어떻게 할 건가?”라고 물었다.
“집권이 두려운 진보정당”
박상훈은 “운동이냐 정당이냐, 직접민주주의냐 간접민주주의냐는 식의 개념 대립은 정치학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나오는 것”이라고 최근의 논쟁구도를 혹평했다. “진보신당이 촛불 정국에 개입했으면서도 정당으로 인식되지 않은 것은 정치적 권위체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 내일 아침에 일찍 출근해야 하는 비정규직은 시위에 나오기 어렵다. 그들은 전에 믿었던 정당에게 계속 투표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정치다. 촛불 에너지가 좋은 정치로 바뀌지 않으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박상훈은 주장했다.
조국은 냉정한 현실주의 정치를 강조했다. “탈정치적 시민운동이나 민중운동이 좋다는 인식을 깨야 한다. 정치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인식을 퍼뜨려야 한다. 이번 촛불시위를 통해 민주당의 한계가 확인됐다. 그 지지가 어디로 갈 것인가? 한나라당 아니면 민주당이라는 믿음이 깨졌다. 촛불시위의 마무리는 누가 가져갈 것인가의 경쟁이다.” 조국은 ‘사람’을 특히 강조했다. “왜 박근혜에게 사람들이 눈물 흘리며 몰려드는가? 그걸 알아야 대중정치를 할 수 있다. 진보운동과 진보정치의 목표는 이런 인격적 일체화이고, 그런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보라. 투표율이 30%가 되지 않을 것으로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반드시 이를 정당이 개입하는 선거와 등치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 중에 좋은 정치가 없어서 그렇게 투표율이 낮은 걸까. 아니 30%에 육박하는 투표율을 기록한다면 그것 또한 촛불의 영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진지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을 정당과 선거로 가두어서는 안된다.
진보신당은 변혁의지를 버리고 집권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그렇게 얻는 집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집권을 할 역량도 안되지만,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설겆이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노무현 정권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진보운동과 진보정치의 목표가 인격적 일체화이고, 그런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는 조국 교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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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시장독재 맞선 제2의 민주혁명 (2008년 06월 17일 (화) 16:29:52 레디앙 기자)
촛불의 결실은 '좋은 정치'로…유토피아적 관념 벗고 '생활진보'
심상정 진보신당 상임공동대표는 "2008년에 타오르는 촛불은 시장 독재에 맞서 국민의 생존권과 생명권을 되찾기 위한 제2의 민주혁명"이라고 말했다. 심 대표는 17일 진보신당과 경향신문이 공동주최로 '촛불집회와 진보정당의 과제'를 주제로 가진 긴급시국대토론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21년 전 민주혁명은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시민권을 되돌려 받기 위한 투쟁"이었으나 "군사독재정권을 대체한 것은 우리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이 아니라 시장권력"이었다고 말했다.
심 대표는 "40여일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고 있는 촛불 그 자체도 놀랄만한 일"이지만 "그 촛불의 도전이 우리 사회에 총체적인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촛불이 정치에 준 충격이 크다"고 말했다. 심 대표는 이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비즈니스코리아’"라며 "우리 국민은 대한민국을 기업으로 만드는 정치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더불어 잘 사는 공동체로 만드는 정치를 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심 대표는 "따라서 촛불민심은 기존의 보수정당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고 있으며, ‘비즈니스코리아’를 거부하고 ‘소셜코리아’를 만들어달라는 촛불의 바람을 의미있는 결실로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좋은정치’일 것"이라며 진보정당이 바로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 대표는 또 "우리의 진보정치는 대한민국의 공동체 비전과 프로그램, 그리고 실천적 모범을 통해 촛불민심 정치를 승화시켜야 한다"며 "편협하고 무기력한 유토피아적인 관념성에서 벗어나 ‘생활 속 진보’를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고, 바로 그 길이 80%의 민심과 손을 맞잡는 진보정치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 생활진보라 15년 전에 생활진보를 주장했던 관악자주파 얘들이 생각난다. 심상정이 말하는 생활 속 진보가 유시민의 유연한 진보나 손학규의 생활진보와 어떻게 다른 걸까. 실천으로 얘기하자고? 그렇다면 수사를 가지고 좌파에 대해 유토피아적인 관념성 운운해선 안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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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퇴진에서 '이후 대안' 만들기로 (레디앙, 2008년 06월 17일 (화) 12:52:39 장석준 / 진보신당 정책팀장)
새로운 좌파, 생활정치-평등주의 접목
[촛불과 진보정당 과제] "새로운 정치 주체와 생활정치 등장했다"
진보신당과 경향신문이 공동주최한 제2차 긴급시국대토론회가 '촛불집회와 진보정당의 과제'를 주제로 17일 여의도 진보신당 중앙당 회의실에서 열린다. 이날 토론회는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팀장의 발제와 박상훈(후마니타스 대표), 정태인(성공회대 겸임교수), 조국(서울대 교수), 하승우(한양대 연구교수)의 토론으로 진행되며 사회는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가 맡았다. 다음은 장석준 팀장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1. 촛불 집회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① 보수 우파의 헤게모니가 취약함을 드러냈다 : 2006년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성장주의를 토대로 한 보수 우파의 헤게모니가 구축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총선이 끝나자마자 곧 보수 우파 헤게모니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생각보다 그 빈틈이 컸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② 한국 사회의 민주 역량 발전을 확인했다 : 20년간의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축적된 민주 역량(capacities)이 만만치 않음을, 아니 상당히 풍부함을 확인했다. 조직과 지식, 윤리 모든 면에서 발전이 있었다. 이것은 선거로써만은 측정하기 힘든 것이었고, 그래서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생생히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③ 새로운 민주적 소통 문화가 등장했다 : 발전된 민주 역량과 21세기 통신 역량(인터넷 토론, 인터넷 방송, 휴대전화 등, 그리고 이들과 결합된 신문, TV 등 기존 매체의 새로운 역할)이 서로 결합하여 전례 없는 상호 소통 문화를 낳았다. 이것은 이명박 정권과 보수 우파의 권위주의 행태와 충돌할 뿐만 아니라 전통 좌파의 계몽주의적 태도와도 배치된다.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 집단 전체가 이 새로운 문화에 적응을 요구받고 있다.
④ 새로운 정치 주체가 등장했다 : 민주화 이후 기존 정치 구도에서 배제되어온 사회 세력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세대별로는 10대, 20대가, 성별로는 여성이 그 주역이다. 특히 10대가 자신의 존재와 중요성, 그 새로움을 알린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⑤ 새로운 정치적 관심이 등장했다 :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안전의 문제이자 생명의 문제다. 한국의 정치 체계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문제들이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험을 통해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됐다.
그 동안 일부 지식인들의 담론으로만 존재하던 ‘생활 정치’가 이제 실제 대중 정치로서 당당히 등장했다. 이제 한국의 시민들은 신자유주의의 폐해(경쟁 위주 교육, 공공부문 민영화, 사회복지 축소, 건설산업 중심 성장주의 등)에 대해서도 생활의 문제로서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한다.
⑥ 세계화에 대한 공포를 넘어섰다 :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그 상흔이 한국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공포와 굴종이 대중의 정서를 지배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이번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 대해 다수의 시민들은 세계화에 대한 (공포에 기반한) 찬성/반대를 넘어서 당당한 한 협상자로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대처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이명박 정권과 촛불 집회 대중의, 미국에 대한 입장차(“재협상은 불가능하다” ↔ “재협상은 가능하다”)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⑦ 세대를 뛰어넘는 역사적 합류가 나타났다 : 386세대, 88만원 세대, 웹2.0 세대가 한 자리에 모였다. 1987년 6월 항쟁의 기억, 2002년 월드컵 축제의 기억, 2004년 탄핵 반대 운동의 기억이 한 물줄기로 합류했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커다란 장애물 역할을 하리라 생각되던 세대 간 장벽은 결코 극복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2. 앞으로 촛불 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촛불 운동 참가자들 사이에는 향후의 전개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존재한다(혹은 존재할 수 있다). 아래의 내용은 이념형적인 것으로서, 실제 논자들의 주장이 이 중 어느 한 입장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몇 개의 입장을 서로 종합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실제로도 그런 양상을 보인다.
① 제도 정치로 중심이 이전되어야 한다 : 촛불 정국이 계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이 입장에서는 촛불 집회는 제도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한 데 따른 예외적이며 일시적인 현상이 된다. 따라서 이제는 국회 등 제도 정치 공간으로 중심이 옮아가야 한다.
발제자가 보기에, 지금 상황에서 이런 입장은 촛불 운동 참가자 대다수가 바라지 않는 낮은 수준의 타협책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경향신문> 6월 16일자 대담에서 강원택 교수)
② 제도 정치의 재편을 추진해야 한다 : 촛불 운동의 의의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제도 정치의 성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87년 6월 항쟁으로 등장한 권력 구조(대통령 중심제)와 보수 독점 정당체계를 혁파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는 정당 지도자들(리더십)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의 단기적 해결 방안으로서는 구체성이 떨어지지만, 2008년 6월이 1987년 6월을 반복해선 안 된다는, 즉 거대한 대중운동이 제도 정치의 앙상한 변화로 이어지는 일이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는 지적은 굉장히 중요하다.(6월 16일 <경향신문> 주최 긴급 시국토론회에서 최장집 교수)
③ 제도 정치와 촛불 운동의 요구를 결합할 제도적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 촛불 운동의 발전 과정 속에서 촛불 운동과 제도 정치를 이을 지름길을 고민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 제도적 방안으로서 대통령 국민소환제 등을 주장한다.
그러나 국민소환제의 실효성과 그 역기능 가능성 등에 대해서는 많은 반론도 존재한다. 촛불 집회에 참가한 다수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의견이 나타난다.(6월 16일 <경향신문> 대담에서 한홍구 교수)
④ 촛불 운동을 정권 퇴진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 역시 촛불 운동의 발전 과정 속에서 그 다음 단계를 고민하는 입장이다. 재협상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지금으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대한 고민 속에서 나온 주장이다. 이 또한 촛불 집회에 참가한 다수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사실 이것은 민주화 이후의 정권들(노태우부터 노무현까지)에서 대중 저항이 전개되는 가운데 매번 반복되었던 패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 특이한 점은 대통령 취임 100일만에 이런 양상이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실제 대통령 지지율이 거의 한 자리 수에 가깝다는 것이다. 정권 퇴진 투쟁론에 대해서도 역시 상당한 반론이 존재한다.
⑤ 촛불 운동의 일상화를 추구해야 한다 : 광우병 쇠고기 문제의 단기적 해결 여부와 상관없이 촛불 운동이 새로운 정치 문화로서 일상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촛불 집회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 생명 정치, 대중의 직접 참여 정치가 한국 사회의 미래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프레시안>에 서평 형태로 발표된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의 글)
3. 촛불을 통해 본 정당 정치와 운동 정치의 관계
지금까지 제출된 입장들을 보면, 정당 정치와 운동 정치, 둘 중 어느 쪽에 더 강조점을 두는지 여부에 따라 구별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적어도 진보 논자들의 경우에는) 어느 한 쪽만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조야하게 도식화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강원택 최장집/박상훈 조국 정태인 이진경/박승옥/하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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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정치 운동 정치
그럼 정당 정치와 운동 정치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① 정당체계의 개편이 중요하다 : 21세기의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당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자면 현재의 보수 독점 정당체계를 대신할 역량 있는 진보정당이 출현해야 한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정당 리더십이다.
사회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대한 해결 비전을 갖고 있으며 그 비전을 관철할 능력과 책임감을 갖춘 리더십이 구축되어야 한다. 최장집, 박상훈 등이 이런 입장에 가깝다. 최근에 최장집 교수는 정당 정치의 발전에 좀 더 적합한 형태로 권력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원집정부제)을 이에 덧붙인다.
[또 다른 논점] 현재 보수 세력 일각에서도 18대 국회에서 권력 구조를 개편하는 것(=개헌)으로 위기를 돌파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보수 세력의 권력 구조 개편 움직임과 구별되는 민주적 권력 구조 개편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그것은 과연 가능한 작업인가?
② 정당 자체가 새로운 조건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 직접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현상 앞에서 대의민주주의만을 강조하는 것은 일면적이라 본다. 이제는 정당 자체가 직접민주주의를 내면화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정태인 본부장이 이런 맥락에서 가장 앞선 주장을 제시했다.
촛불 운동으로 드러난 온라인 숙의(熟議)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가능성을 넷(net)-정당의 형태로 정당 정치에 접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대안 정부’도 야당의 기능으로만 볼 게 아니라 넷-의회/정부의 형태로 구현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③ 풀뿌리 운동에 복무하는 새로운 정당이 필요하다 : 위 ②의 입장과 통하는 데가 있지만 좀 더 운동 정치 쪽을 강조하는 입장들이 있다. 정당 정치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촛불 운동을 대변할 새로운 정당의 구성(‘촛불 정당’ - 박승옥)을 주장한다. 하지만 강조점은 정당 정치보다는 촛불 운동을 풀뿌리 운동으로 지속, 발전시키는 데 있다. 좀 더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정당 정치의 역할은 이제 이러한 시민 자치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보조자의 역할로 종속화 혹은 주변화되어야 한다.
○ 정당 정치-운동 정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사실 지금의 우리에게만 유별나게 제기되는 특이한 쟁점은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심심치 않게 반복되어온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촛불 운동으로 드러난 현재 우리의 조건의 ‘새로움’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다수 대중이 다양한 매체들에 자유로이 접근하여 그 정보들을 취사선택하고 전국 단위에서(인터넷을 통해) 활발한 토론을 벌이는 최근의 양상은 숙의 민주주의가 대의제의 틀을 넘어서 작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건에서 과연 정당이 여론의 독점적 대변자 역할을 하던 기존 대의 민주주의 구조를 그대로 견지할 수 있겠는가? 그게 민주주의의 발전에 과연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 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정당 무용론에 빠져서도 안 될 것이다. 그랬다가는, 대의민주주의의 의의를 강조하는 논자들이 잘 지적하는 것처럼, 시민 자치에 처음부터 너무 거대한 짐을 떠넘김으로써 참여의 비용을 증대시키는 우를 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 새로운 숙의민주주의의 가능성이라는 전반적 조건 안에서 정당 정치와 시민 자치의 위상과 역할을 재배열하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그러자면 시민 자치와의 관계 속에서 정당 정치의 내부 구조와 동학 역시 바뀌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 첫 번째 발걸음은, 정태인 본부장의 제안처럼, 정당 내부에서부터, 그리고 정당의 일상 활동에서부터 대중참여형 숙의민주주의의 구조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키는 일일 것이다.
4. 진보정당의 과제는?
진보정당의 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기존 정당 구조가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보인 무능의 원인들을 좀 더 따져보아야 한다. ‘비대한 보수’와 ‘무능한 중도’, ‘약한 진보’라는 정당체계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은 지적들이 있었지만 아래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① 세계화와 정당 정치의 관계 : 한국의 정당들이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국내 문제가 아니라 국제 문제, 통상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계화에서 비롯된 문제이기 때문에 세계화된 행위 능력을 갖춰야 의제 발견, 전개, 관철 혹은 타협 등 제반 정치 과정을 작동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이것은 사실 한국 정당들만의 약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 세계적으로 정당 회의론의 한 토대가 되는 근본 문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부 기구가 통상 과정 전반에서 유례없는 창구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다들 이명박 정권의 재협상 결단 여부를 둘러싸고 움직이는 것 외에는 다른 책략(maneuver)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조건 속에서 진보정당이 이에 대응하려면 세계화된 행위 능력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② 생태 위기, 생명 정치와 정당 정치의 관계 : 현재의 유가 인상, 곡물가격 인상은 화석 에너지 고갈로 인한 생태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도 공장형 축산업으로 인한 전반적인 생명 위험(risk) 증대로 인한 일종의 생태 위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촛불 운동(그리고 대운하 반대 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생태 위기를 쟁점으로 불붙은 최초의 거대한 전국적 대중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전통적 여야 정당들은 부적응 양상을 보였다. 80년대의 NL-PD 노선에 뿌리를 둔 진보정당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민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생명 정치, 생활 정치의 새로운 관심을 기존의 평등주의 전통과 접목하여 새로운 좌파 담론과 실천 방식을 만들어낼 과제가 진보정당 앞에 놓여 있다.
③ 진보정당과 자발적 결사체의 변증법 : 진보정당으로서 특히 주목해야 할 문제는 진보정당 발전의 토대가 되는 자발적 결사체(최장집 교수의 표현. 발제자는 ‘연대 조직’organizations of solidarity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의 세대 교체, 혹은 세대 교체의 정체 상태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자발적 결사체로는 노동조합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촛불 운동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회 조직들 중 하나였다. 대신에 전혀 예기치 않은 새로운 세대의 자발적 결사체들(혹은 그 맹아?)이 전면에 나섰는데, 바로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들이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이것을 자발적 결사체의 세대 교체라고 결론내릴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기에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의 일상 정치 능력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아마도 온라인 커뮤니티들의 장점들(수평적 소통, 자발적 참여, 생활의 의제 등등)을 지역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구현하는 또 다른 새로운 세대의 자발적 결사체들(촛불 운동의 중요한 주체 중 하나인 생활협동조합운동이 그 가능성을 일정하게 보여준다)이 성장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노동조합 등 기존의 자발적 결사체들도 새로운 자발적 결사체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기 혁신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보정당 성장의 사회적 토대가 마련될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들을 복합적으로 발전시키는 일(‘혁신된’ 구 세대의 자발적 결사체 + ‘성공적으로 일상화된’ 새 세대의 자발적 결사체)은 진보정당의 사활을 건 과제(‘넓은 의미의’ 정치) 중 하나이기도 하다.
○ 진보신당은 원외정당으로서 특히 ‘이명박 정권 퇴진’ 요구로 나타나는 대중의 분노와 열망을 좀 더 장기적인 진지전으로 발전시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불신임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놓되, 이명박 ‘이후’의 대안을 준비하지 않고서는 제2, 제3의 이명박을 반복할 수밖에 없음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 퇴진 운동’을 ‘이명박 이후 대안 만들기 운동’으로 확산, 발전시켜야 한다. 18대 국회가 갖는 괴리, 즉 시민들은 촛불 이후의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는 데 반해 18대 국회는 촛불 이전의 시간대를 반영한다는 점, 더구나 이 괴리가 4년 동안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서 일종의 대안 의회 역할을 할 장들을 만드는 것이 그 한 실천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당 정치와 운동 정치의 새로운 관계도 추상적인 논의가 아니라 구체적 사물로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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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칼럼]촛불의 제도화, 가능한가? (경향, 김상조 | 한성대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2008년 06월 17일 18:08:57)
한국 사회가 격동하고 있다. 40여일째 계속되는 촛불시위 앞에서 이명박 정부의 그 의기양양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모든 지식인과 언론이 연일 이 ‘촛불 현상’의 경이로움에 주석달기를 하고 있으니, 필자가 어쭙잖게 나설 이유는 없겠다. 그런데 촛불을 바라보는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이 무슨 망발이냐고? 필자가 감히 촛불 현상에 불안감이라는 불손한 단어를 갖다 붙인 것은 과거 두 번의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1987년 6월의 민주화운동과 96년 말의 정치총파업이 그것이다. 그 때에도 지금의 촛불 현상만큼이나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끓어 넘치는 에너지에 전율을 느꼈다. 그러나 그 두 번의 사회 변화 시도는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니 참담한 실패였다.
물론 지금 촛불 속에서 타오르는 힘은 87년과 96년에 한국 사회가 경험했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더 현명한 학자들’의 해석에 희망을 걸어본다. 그러나 촛불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 과연 역사의 수레바퀴가 진보를 향해 굴러갈지, 필자는 여전히 불안하다.
‘촛불의 배후’를 캐는 동안 이명박 정부는 실패의 외길 수순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제도화되지 않은 촛불의 힘 앞에서는 어떤 정권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진보정권이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사회세력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헤게모니를 갖지는 못한 반면, 상대방의 의도는 언제든지 좌절시킬 수 있는 비토권(veto power)만 난무하는 상황에서, 촛불만으로는 한국 사회의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
촛불의 제도화? 자칫 촛불이 가지는 역동성을 소진시키는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그러나 또 다시 죽 쒀서 개 주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끙끙거려 본다. 촛불의 역동성을 사회 시스템으로 전화하는 길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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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左派)가 좌파(座派)로 남지 않으려면 (참세상, 이득재(논설위원) / 2008년06월19일 1시10분)
[논설] 촛불은 블랙홀이다
두 달 남짓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4월 말인가 5월 초인가 청계 광장에 시민들이 촛불 점화식을 할 때만 해도 촛불이 이렇게 활활 타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촛불 집회 초반부에 필자는 다음 아고라와 이명박 탄핵본부 인터넷 카페에 가입하며 댓글을 올렸다. 촛불이 점화될 때부터 나온 시민들의 구호는 미국산 소고기 반대가 대세였지만 의료민영화 반대, 0교시 자율화 반대도 자유발언에서 많이 나왔다. 옆의 사람 촛불에 촛불을 옮기던 집회가 불길을 확 댕긴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데이비드 캠프에 가서 보인 행태와 3조 6천억에 해당하는 미국산 소고기 시장을 완전히 열어준 5월 이후였다. 그 후 촛불은 마치 횃불로 진화한 듯한 느낌이었다. 19세기 말 동학군이 부정부패에 저항해 높이 들었던 횃불을 본 것 같았다.
그 후 두 달 남짓 흐르던 동안 미국산 소고기 문제는 공영방송 지키기, 한반도대운하 반대, 의료민영화 반대, 0교시 자율화 반대 등으로 확산 진화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노도 같은 횃불로 진화한 촛불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인가? 김진홍, 최시중, 서경석, 고엽제 전우회 등 보수단체, 조중동, 이문열 등 보수우익들이 맞불을 지르는데 혈안이 되어 있고 민주당, 자유선진당은 시민들이 애써 키워 온 촛불 물타기를 시도하면서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대의제 운운하며 촛불이 거둔 민주주의의 성과를 국회에 밀수하려 하고 있다.
현재 촛불은 대단히 민감한 상황에 놓여 있다. 애초부터 시민들의 ‘원초적 이기주의’에 호소한 것이 촛불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 이기주의의 고지를 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강남 아줌마가 촛불 집회에 참여한 것은 결국 자기 가족을 미국산 소고기 인간 광우병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발로다. 만일 현재 이명박 정부가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종부세 완화 정책이 튀어 나온다면 강남 아줌마는 다시 강남으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촛불은 현재 복잡계 그 자체다. 계층, 지역별로 이해관계가 얽히고 섞여 있기 때문이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닫힌 군중이 열린 군중으로 진화 성장하려면 ‘방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방전은 독일어로 Entladung인데, 방전은 일종의 ‘짐 벗어던지기’에 해당한다. 충전되었던 전기가 방전되어 못쓰게 되는 것이 방전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기의 삶을 짓누르고 있던 짐을 훌훌 벗어던지는 것,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고 만끽하는 것이 방전이다.
카네티는 닫힌 군중이 열린 군중으로 진화하는 것을 두고 ‘분출’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분출 현상은 지난 6·10에서 나타났다. 문제는 군중의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욕구를 어떻게 방전시킬까 하는 것이다. 방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카네티가 말하는 대로 군중은 그 안에서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촛불이 블랙홀처럼 온갖 이슈를 끌어들이고 있고 이명박 탄핵 카페에서도 공영방송지키기, 의료민영화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군중이 보기에 이러한 이슈들은 ‘낯선’ 것들이다. 카네티는 군중은 낯선 것에 대한 공포를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군중 안에 끼어 밀리고 밀리면서 그 공포심을 해소한다고 말한다. 군중 안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군중 내부의 적 탓에 방전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군중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촛불은 든 자는 시민이자 인간이다. 촛불은 애초부터 ‘원초적 이기주의’에서 시작했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그 이기주의를 건드린 문제다. 자기의 생명을 바로 죽일 수 있는 이슈에 대해서는 지역, 계층, 계급을 초월해 즉각 반응한다. 죽은 개구리의 얼굴이 아니라 미국산 소고기로 죽을지도 모르는 자기 자식들의 얼굴 때문에 촛불은 지난 두 달 동안 꾸역꾸역 모여들었던 것이다. 한반도 대운하 문제는 바로 혹은 조만간 내가 죽을 공포의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낯설다. 쓰나미처럼 해변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밀려들어올 문제이지만 내 생명을 직접, 바로 문 닫게 하는 이슈는 아니다.
촛불이 조중동에 타격을 주고 82쿡 닷 컴(http://www.82cook.com/)이 조선일보에 지면 축소 등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것은 촛불의 큰 성과다. 대한민국에서 8백만 가구 이상이 보고 있는 조선일보만 문을 닫게 해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최시중이 발 벗고 나서서 방송통제를 하며 현재 촛불들의 행보에 맞불을 놓고 있다. 하지만 카네티가 말한 ‘이중 군중’처럼 군중 옆에서 맞불을 놓는 또 다른 보수우익군중들은 닫힌 군중을 열린 군중으로 분출하게 만드는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82쿡닷컴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촛불들의 ‘원초적인 이기주의’를 더 물고 늘어져야 한다.
촛불은 현재 방향이 없다. 촛불의 방향을 놓고 많은 토론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미 촛불들조차도 다 알고 있는 내용으로는 촛불을 ‘방전’시킬 수 없다. 촛불들의 ‘원초적인 이기주의’를 더 물고 늘어져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명박 탄핵 카페, 다음 아고라에도 이미 자료가 다 올라와 있는 ‘유전자조작 옥수수’ 문제가 왜 이슈화되지 않는지, 촛불이라는 블랙홀에 왜 이 이슈가 빠져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의료민영화, 한반도대운하, 0교시 자율화 문제, 물/가스/전기/철도 등 대중적으로 선전 선동되지 않은 이슈들도 많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시민촛불들에게 아직 낯선 것들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푹 익혀지지 않아서 낯설다는 것이 아니다. 시민촛불들의 생명을 즉각 위협하는 문제들이 아니기 때문에 낯설고 날 거라는 말이다.
미국산 쇠고기도 이미 들어와 유통되고 있고 유전자조작 옥수수도 이미 들어와 유통되고 있는데, 불매운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민들 자기 가족들의 생명에 직접 타격을 가할 문제보다 쓰나미로 머물고 있는 문제들이 먼저 더 부각되고 있고 부각되어 나간다면, 촛불에 위기가 다가올 것이다. 원초적인 이기주의에 호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친숙한 것보다는 낯선 것들을 먼저 이슈로 들고 나오면 군중은 공포를 느끼고 그 공포는 금방 해소되지 않는다. 낯선 것이 친숙한 것은 먹물들의 엘리트적인 느낌일 뿐이다. 이러한 엘리트적인 감정이 한껏 더 나아가면 ‘디지털 게릴라’ 라는 형상을 환상 수준으로 증폭시킨다. 물론 온라인이 오프라인의 촛불에 불을 댕긴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는 그 이상 그 이하로 볼 문제가 아니다.
대학이 기업화하는 시대에 교수들은 아직도 자기가 노동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기가 교수라는 관념은 친숙하지만 노동자라는 관념은 낯설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라는 관념은 ‘낯설게 하기 기법’에 사로잡혀 왔다.
국가와 자본이 노동자라는 관념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낯선 것으로 조작해왔기 때문에, 촛불은 노동자라는 관념에 대해 낯선 감정을 느낀다. 항간에서는 한 편에서는 촛불의 날개로, 다른 한 편에서는 민노총의 날개로 양면 작전을 불사한다지만 이 작전은 촛불들 안으로 파고 들어가 촛불 안에서 벌이는 작업이 아니다. 촛불 외부에서 하는 작업은 촛불의 성장 진화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 촛불은 촛불대로 자라나야 하고 진화해야 한다. 촛불의 기원인 ‘원초적인 이기주의’에 호소하고 그 호소로 촛불의 불씨를 장기적으로 키워나가며 촛불 안에서 촛불의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좌파(左派)가 좌파(座派)로 남지 않으려면 촛불의 심지에서부터 촛불의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나머지는 모두 촛불의 외부에 서서 외부 나름으로 일을 해 나가야 한다. 촛불이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횃불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 촛불 외부의 투쟁은 투쟁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두 가지의 융합은 인위적으로 촛불의 정세에 개입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국산 쇠고기라는 우발 점을 만나 촛불에 불길이 댕겨졌듯이 그 두 가지의 시너지 효과 또한 우발성으로 촉진될 것이다. 촛불은 지금 그 임계점에 도달해 있다. 팔팔 끓었던 라면 국물은 식을 것인가, 다시 데워질 것인가? 아뿔싸, 미국산 쇠고기 뼛가루 들어간 라면 수프를 라면에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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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과거가 되어버린 촛불의 시간을 살기 위하여 (참세상, 김강기명, 2008년06월20일 9시44분)
[기고] 할 일은 많다. 상상력과 체력만 있다면!
사건
이 한 달여의 경험 속에서 수도 없는 "누가 변혁의 주체인가?"라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랑시에르적 의미에서의 "정치의 주체"론에서부터 네그리의 다중론까지, 혹은 웹 2.0이라는 틀로 분석한 세대론적 고찰까지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질문으로는 전망과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지언정 변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인들은 질문을 바꿔야 한다. "변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변혁은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 질문 위에서 다시 "누가 변혁의 주체인가?" 이 사건에 참여하는 너, 나, 우리 모두가 변혁의 주체일 것이다. 사건이 존재에 우선한다.
물론,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사건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사건이란 말하자면 이전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연예인이나 쫓아다니고 PC방에서 게임이나 하는" 청소년들이 광장에 갑자기 모일 때(5/2), 공연이나 보고 자유발언이나 듣는 "촛불문화제"가 몇 주씩 이어지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광화문 네거리로 쏟아져 나갔을 때(5/24), 시민들을 보호하는(혹은 그랬다고 생각했던) 경찰이 시민들을 공격할 때(5/25), 물대포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이들에게 물대포가 쏟아질 때(5/31), 닭장차에 끌려가야 할 시민들이 스스로 닭장차에 오를 때, 며칠 째 시위대를 가로막은 차벽과 컨테이너 앞에서 장시간의 논쟁을 거쳐 스티로폼을 쌓고 올라가 권력을 조롱할 때(6/10) 그것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이 하나씩 벌어질 때마다 국면은 전환되었고, 권력자들을 공포로 몰고 가는 시위대의 힘은 커져 갔다.
대규모 집회가 있었던 6월 10일을 전후하여 "촛불 이후"를 걱정하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이들이 언젠가는 이 촛불은 잦아들 것이고, 그렇다면 이렇게 분출된 힘을 담아낼 정치적/정책적 기구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내고 있다. 최장집 같은 이는 속히 정당정치를 복원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나는 한홍구의 말을 따라 "국회에 맡기느니 차라리 천일기도를 하겠다." 사건들은 좀 더 많이 일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건들을 창조할 상상력과, 그것을 실천할 강철의 체력이다. 이미 대중은 청와대로의 행진이 막힌 곳에서 머물기를 거부하고 전선을 넓히고 있다.
전위
전위란 이런 상상력과 체력의 주체다. 즉 전위는 대중을 결집하여 이끄는 주권적 명령형식이 아니라 대중의 흐름이 몰화되지 않도록 분열을 조장하는 자, 대중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거기에 '여러 방향'을 제시하는 자, 곧 '소수적 흐름'을 창조하는 자들이다. 놀랍게도 이번 시위에서 대중들은 어떤 이들이 전위인지를, 그리고 어떤 이들이 전위가 아닌지를 명확하게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은 무엇보다 "다함께 사태"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다함께> 비토 사태의 본질은 이들의 지도에 대한 대중의 거부에 있다. 다만 그 방법이 아직은 세련되지 못한 방법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대중의 <다함께> 경험은 기타의 다른 모든 운동조직의 권위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시민들의 자유발언대가 열리기만 하면 대책위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이들이 운영하는 방송차가 대중을 청중으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이 가장 컸다. 이번 시위에 나타난 대중들의 표현욕구와 그 능력은 그야말로 거대했다. 기존의 조직된 운동권이 가진 조직론과 시위에 관한 관성은 끊임없이 대중과의 불화를 겪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중은 소위 "운동권"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시위가 교착상태에 다다르자 "대학생들은 뭐하는가?", "노동자들은 총파업이라도 해야 할 때가 아닌가?"하는 요구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지도"를 원한다기보다는 전술한 의미에서의 "전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교착상태를 돌파하여 사건을 만들어줄 전위에 관한 한 대중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화물연대 총파업에 보내는 "성원"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촛불집회가 이어질수록 운동권과 일반 시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노동조합이 조끼를 벗고 일러스트가 그려진 귀여운 깃발을 들고 시위에 참가하는 한편, 아고라를 중심을 모인 네티즌들이 마치 '운동권'처럼 조직을 구성하고 커다란 깃발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그러면 또 "아고라가 권력화되었다"라는 비판이 나온다.) 권위가 사라진 지점에서 오히려 기존의 운동권과 그 바깥에 있던 시민들의 "연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연대는 결코 부드럽고 평화롭지 않다. 집회 현장에서는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진다. 예비군 논쟁이나 비폭력 논쟁 등의 이러한 논쟁은 단순히 이론적 차원의 논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신체의 변환을 요구하는 논쟁이다. 이 과정에서 대중도 변하고, 지식인-운동권도 변한다.
즉, 지금의 촛불집회 국면에서는 그 어떤 정치조직도 대중의 지도부를 자임할 수가 없다. 대책위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몇몇 정치조직들의 헤게모니 싸움은 대책위 바깥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필요한 것은 지도부가 아니라 그야말로 '전위'(아방가르드)다. 전선은 더 넓어지고, 이슈는 더 다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반복되지 않는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중이 요구하는 '전위'는 바로 그 사건의 주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운동조직들의, 혹은 대중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정치
이번 촛불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는 "대한민국 헌법 1조"다. 이것은 많은 지식인들이 주목하는 것처럼 이번 시위가 "공화주의의 회복" 혹은 "발견"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대중의 요구를 수렴할 어떤 "정치적인 것"(공화주의적이고 대의적인)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까?
대중의 공화주의적 요구의 이면에는 자신들이 의도하거나 결정한 바 없이 진행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흐름에 대한 공포와 훼손당한 자존심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정부나 축산자본이 반복적으로 "촛불집회는 한국의 국내문제"라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문제가 결코 일국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력은 지속적으로 쇠퇴해 왔다. 이명박의 당선은 정치가 보수화되고 있는 증거라기보다는 정치의 행정화, 혹은 행정권력이 정치권력에 대해 거둔 최종적 승리의 증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전지구적 질서 속에서 대부분의 국민국가는 세계 경제체제, 세계 주권체제에 포섭되어 있으며 따라서 밖으로는 한 없이 약하고, 안으로는 한 없이 강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경찰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명령은 정치적인 것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대중의 삶에 부과된다.
따라서 대중의 저항은 그것이 일국적 요구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즉각적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공격한다. 또한 공화주의적 정서의 표출 역시 국가주의라기보다는 대안적인 삶의 조직화에 대한 갈망에 더 가깝다. 내 삶을 내가 직접, 그리고 내 이웃과 더불어 직접 꾸려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공화주의적 정서의 표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위 현장이 이미 수십만 명이 모여도 생수와 김밥이 모자라지 않는 "작은 꼬뮨"이 되어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촛불이 꺼질 것을 염려하는 비관적 전망 속에서 "정상적 국민국가"를 무덤으로부터 다시 소환하는 일이 아니다. 정치의 장소가 정치적인 것 바깥의 삶 그 자체라면,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정치는 너무도 무궁무진하다. 며칠 전에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인권침해를 고발하며 전교생이 수업거부에 들어간 사건이나 시위대가 한강을 넘어 공영방송 수호를 외치며 여의도로 행진한 사건은 촛불이 진화해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우리의 삶의 모든 요구가 촛불이 되어야 할 시점이다. 착취가 일어나는 모든 장소에서, 억압이 벌어지는 모든 장소에서 촛불이 켜지는 것이 먼저이다.
결국 근본적인 대안은 쉽사리 개헌이나 대의제 민주주의의 변화를 통해 대중의 분출을 봉합/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지속적으로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일이며, 더 나아가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전지구적 수준에서 대중의 연대를 이뤄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 좀 더 우리의 활력을 이어갈 수 있는 네트워크들을, 또 운동단위들을 만들고 키워가는 일이다. 제헌의회든, 국민정당의 건설이든, 이 모든 "정치적인 것"들은 분출한 대중의 에너지의 총체가 아니라 잉여로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항상, "제헌된 권력"보다 "제헌하는 역능"이 우선한다.
촛불은 미래였던 것을 과거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특히 지식인들이 할 일은 좀 더 과감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과감히 68년과 87년을 망각하는 것이다. 더 많은 상상력으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 무언가가 사실은 예전에도 있었던 것이라 해도 그것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결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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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자신과의 승부로 접어들다 (레디앙, 2008년 06월 21일 (토) 15:41:38 윤여일 / 연구공간 '수유+너머')
[기고] 무형의 성과들 돌아봐야 …'제도정치' 강조의 허전함
이렇게 오래 가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하지만 예견이 빗나갔다면, 그것은 예견한 자들의 몫일 따름이다(나도 그 안에 포함된다). 이제 촛불시위는 2개월 만에 43회에 이르렀다. 이틀 꼴로 한 번씩, 아니 그보다 더 자주 타올라 이제 6월 20일을 맞이했다. 네티즌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정권 퇴진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예고한 날이다.
1. 촛불의 성격?
지난 16일 <경향신문>과 참여사회연구소 등이 공동으로 주최하여 ‘촛불집회와 한국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몇 가지 보도 자료를 보면 다음의 세 가지 쟁점이 토론회의 기본적인 골격을 이루었던 듯하다.
첫째, 참여민주주의(거리의 정치)와 대의민주주의(제도정치)는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하는가. 둘째, 현재의 촛불 정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가령 87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것인가, 질적인 비약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셋째, 촛불 시위는 정권 퇴진 운동으로 번져나가야 하는가.
주무르다가 말아버린 토론회
무엇보다 저 토론회가 현재의 운동에 어떤 효과를 안길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물론, 지식계가 현실운동을 지도하거나 현실운동에 무기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론적인 논의는 대개의 경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직접 적용될 수 없으며, 왕왕 지식계와 현실운동은 공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 저 토론회는 분명 현실운동을 분석하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꾸려졌다. 그럼에도 활로를 모색했다기보다는 현실운동을 주무르다가 만 인상을 받은 것이다.
그 까닭은 토론회의 문제설정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저 논의에서 둘째, 셋째 쟁점은 첫째 쟁점에서 파생되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로 가른다면 나오는 선택지는 양자가 병행해서 발전해야 한다는 뻔한 답 아니면, 협력하되 긴장관계를 유지하든가(국회 견제), 후자가 전자의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는(새로운 정당 창출) 것이겠다.
그리고 여기에는 촛불의 정치는 제도정치와 다르며 대신할 수도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리하여 촛불의 성과는 평가하되 그 평가는 늘 ‘제한’적이며, 제한적인만큼 제도정치의 유효성이 증명된다. 촛불은 제도정치가 무능했기 때문에 등장했지만, 매듭짓는 일은 역시 제도정치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분명 학문적으로는 타당하겠다. 하지만 지금의 촛불을 이해하는 데는 어떠한 허전함이 남는다.
촛불의 성격을 규정하는 논의도 그렇다. 87년 체제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도 ‘민주화운동과 대의정치의 발전’이라는 정통성 속에 지금의 촛불을 담으려는 데서 기인하겠다. 물론 토론회에서는 여러 반대의견이 엿보인다.
분석의 화려함과 처방의 초라함
‘유연자발집단’이니 ‘좌파 자유지상주의자’니 ‘제4의 결사체’니 지금의 운동주체를 기존의 운동세력과 구분하는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 경우도 발언을 쫓아가면, 결론은 예정된 것 마냥 참여민주주의의 확장으로 귀결되고 있어, 분석의 화려함과 처방의 초라함이 대비되었다.
한편 촛불 시위는 정권 퇴진 운동으로 번져도 되는가라는 물음에도, 거리의 정치가 ‘어디까지’ 나아가도 되는가라는 ‘한계’의 문제가 설정되어 있다. 그 너머는 응당 ‘제도 정치’에서 해결할 영역인 셈이다. 물론 정권 퇴진 운동을 신중히 검토하자는 지적에는 고심이 묻어난다.
거리의 운동이 장기간 지속되기 어렵고,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일이 자칫 제도정치의 기능을 마비시켜 결국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가 깔려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촛불이 정권 퇴진 운동에 발을 들여놓아선 안된다라는 신중한 판단은 '명박퇴진'이란 표제 아래 생산되는 감상적인 글보다 리얼리티가 덜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리의 정치는 제도정치로는 가늠할 수 없고, 촛불시위가 낳은 성과는 정책의 변화로만 잴 수 없기 때문이다. 토론회의 보도기사를 보건대, 이 결정적인 한 곳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2. 상황은 예견과 분석을 앞질렀다.
이번 촛불 시위는 여러 면에서 특징적이다. 정권이 경찰력뿐만 아니라 교육청이나 지방기관 등 정부조직을 총동원하고 언론을 통제해도 좀처럼 누그러뜨리지 못한다. 운동의 중심체가 부재하여 단적으로 <조선일보>가 상황을 쥐지 못한 채 끌려 다닌다. 한편, 좌파 운동세력이나 노동조합도 운동을 주도하지 못한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에서 지식계나 사상계는, 사태의 초기 광우병 위험과 관련하여 정보 제공자 역할을 맡았던 것을 제외한다면, 운동에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 지식계와 사상계에 요구되는 역할은 상황을 앞서 판단하고 선도하는 일도, 상황에 적당한 이름을 붙이거나 해석틀을 가져와 상황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일도 아닐 것이다. 인식하고 판단하는 일이라면, 매일의 논의 속에서 대중들이 소화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할 수는 있겠다. 그러면 대중은 그것을 쫓아가기보다 그조차도 자기표현의 밑거름으로 삼으리라.
하지만 지금 대중들은 자신들의 흔적과 일궈놓은 성과들을 되돌아보기에는 너무도 바쁘다. 그렇다면, 현재 지식계와 사상계에서는 오히려 약간 처진 걸음으로 운동이 지나가고 난 자리를 훑으며, 거기서 사고의 자원을 길어 올리고 우리의 유산으로 삼을만한 요소를 착실히 모아가는 역할을 맡아야 할지 모르겠다.
상황은 이처럼 예견과 분석을 앞질렀다. 지난 40차례의 촛불집회는 마흔 번의 반복이 아니었다. 매번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매번 문제를 조금씩 풀어갔다. 물론 그 때마다 우리에게는 불안한 예감이 있었다.
40여 차례 촛불집회는 매번 성장해나갔다
정부의 정치적인 제스처를 보이자 운동의 성장이 멈춰버리는 것은 아닌지, 초기 소고기 공방의 국면을 넘기자 운동의 불쏘시개가 될 만한 특종들이 생산되지 않아 운동의 동력이 저하되는 것은 아닌지, 폭력사태가 터지자 그 공포로 운동이 쪼개지거나 아니면 촛불이 순수성을 잃었다며 운동을 버리는 것은 아닌지. 또 탄핵 요구가 나오자 이를 입에 담기 주저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떠나지 않을지, 무엇보다 ‘개인’과 ‘가족’의 건강권과 직결된 소고기 문제를 넘어 다른 사안으로 촛불이 번져갈 수 있는지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이 분노를 간직할 수 있는지.
하지만 지난 2개월간 촛불은 그런 우려들을 하나씩 떨쳐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성과를 하나하나씩 우리 감각에 새겨 자신의 자신감으로 길러왔다. 가령 처음에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드문드문 터져 나오던 ‘탄핵 요구’가 이제는 차분한 판단 끝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되었다. 탄핵을 내놓든 그렇지 않든 탄핵이 실현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정치권에 대한 우리의 자신감은 커졌고 행동반경은 늘어났다.
또 한 가지. 현재의 사태를 대하는 감수성이 풍부해졌다. 광우병에 대한 공포로 시작되었던 운동이 이후 이명박 정권의 행태에 따라 분노를 머금고, 지금은 이만큼이나 운동을 이끌어왔다는 자신감과 서로가 만들어낸 소소한 이야기들 덕택에 흥겨움이 더해졌다.
이제 우리에게는 여유도 유머도 있다. 마음속에 오직 공포와 분노만이 들어차 있다면, 절규가 터져 나오나 그 절규는 외치는 자에게도 너무 버겁다. 하지만 이제 다양한 감성에서 풍부한 표현이 나오고 있다. 한동안 잠잠해질 수 있을지언정 그만큼 운동은 호흡이 길어졌다. 상황은 불안한 예견들과 섣부른 판단들을 뒤로 하고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
3. 무형의 성과
그 2개월 동안 우리에게는 많은 성과가 있었다. 우선 6월 10일에는 전국에서 100만 명이 모였다. 16일 <내일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은 드디어 한자리 수로 진입했다. 우리가 끌어내린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앞으로도 정부를 압박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기능하리라.
물론 그 상징들은 역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100만이란 수치는 자칫 1만 개의 촛불을 평범하게 만들 수 있으며, 7.4% 지지율은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 하지만 저 상징에 데는 쪽은 우리가 아닌 이명박 정권이리라. 저 2개월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수치로 담기지 않는 운동의 방법을 터득했으니 말이다. 또한 정부에서도 몇 가지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 역시 모두 정치적인 제스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의구심을 가진 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촛불이 타오르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변화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진정한 성과는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여기에 굳이 며칠 전 토론회를 들먹이며 글을 시작한 이유가 있다. 이번 2개월을 통해 얻은 보다 큰 성과는 지지율과 같은 수치로도 좀처럼 표현되지 않고, 정치권의 역학관계로도 환원되지 않는 무형의 것이다.
양비론을 걷어내다
감각상의 성과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운동의 성과인 동시에 동력이자 성패를 가늠하는 한 가지 척도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을 짚어두기로 하자.
첫째, 어떤 이는 ‘국민공교육’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국민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 삼아 학습을 하고 있다. 아고라를 보라. 읽고 자료를 찾고, 무엇보다 쓴다. 비평하는 훈련을 서로에게 하고 시키고 있다. 2개월이 지나는 동안 아고라에서는 역할 분담이 생겨 자유게시판은 속보란 노릇을 하고 있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분석력과 깊이를 갖춘 글들이 속속들이 쏟아지고 있다.
둘째, 정치감각이 바뀌고 있다. 정치적 체념의 다른 표현이었던 양비론을 걷어내고(지난 대선과 총선은 그 결정판이었다), 스스로 선택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반대와 찬성 사이의 공백지대에서도 생산적인 논점을 찾는 시도가 생기고 있다.
정치적인 선택에서 동기만이 아니라 효과도 고려하고 있으며, 시각을 넓혀서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있는 권력관계를 전방위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그리하여 뉴라이트, 조중동, 고엽제 전우회, 그리고 개신교 권력집단은 커밍아웃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갖가지 정책들을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연관지어서 읽어내고 있다. 지금 이 시각에는 정부의 언론탄압에 맞서 시민들이 KBS와 MBC를 사수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아는데, 그들은 우리를 모른다
셋째, 역사의 움직임에 참가한다는 감각이 생겼다. ‘친북좌파세력의 음모’라는 말은 낡았지만, 시위현장과 인터넷을 채우고 있는 시민들의 수사는 새롭기 그지없다. 보수언론과 기득권 세력이 점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낡은 말에 매달리고, 우리는 재기발랄한 표현방식을 만들어낼 때, 그리하여 그들은 알만한 존재가 되고 우리는 그들에게 알 수 없는 존재가 될 때, 더욱 새로우며 역사를 움직이는 쪽은 우리라는 자신감이 붙는다.
시위에 나선 이들은 자신의 소박한 행동이 장엄한 촛불과 한 몸이라는 사실을 참여자이자 관찰자로서 경험하고 있다. 이번 촛불시위는 87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도, 전혀 새로울 수도 있겠다. 세대마다 해석의 지평은 갈라지겠다. 하지만 해석의 차이는 분열을 뜻하지 않는다. 그 모든 해석을 어우를 만큼 이번 운동은 품이 넓다. 모두들 앞을 향해서, 자신의 역사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자긍심을 갖기 때문이다.
넷째, 사회적 연대감이 형성되고 있다. 여중생들은 교복을 입고 직장인은 양복을 입고 예비군은 군복을 입고 어머니는 유모차를 끌고 광화문에 온다. 그들이 섞이면 그곳이 그대로 작은 사회를 이룬다. 그리고 그 곳에서 큰 사회를 읽어내는 감수성도 움튼다.
소소한 이야기들을 먹고 자라온 촛불
2개월 간 촛불은 이렇듯 소소한 이야기들을 먹고 자라왔다. 함께 살아가고 싸운다는 이 소박한 감각이야말로 이번 운동이 낳은 너무도 중요한 성과이다. 이 성과는 이번에 화물노조의 파업에 대한 지지로 표현되었다.
아마도 <조선일보>의 위기가 이상의 내용을 웅변하고 있지 않을까. 현재 <조선일보> 반대운동이 벌어져 이 신문은 구독률이 떨어지고 광고수익도 엄청난 손해를 봤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위기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오고 있다. 현재의 사태는 <조선일보>가 쥘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다. 촛불의 행방과 <조선일보>의 판단력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또한 이념적인 성향은 차치하더라도, 이 신문은 수동적이고 무자각적인 독자를 필요로 한다.
운동의 땔감된 조선일보의 진짜 위기
이제껏 위기론으로 이쪽에서 콕 찌르면 저리로 펄쩍 뛰는 독자를 만들고자 분주히 노력해왔다. 그리하여 <조선일보>는 대중예찬론 속에 대중을 노예로 삼는 논리를 끼워 팔아왔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사회 안에 여러 분단선을 그려 개인을 1차 집단 안에 묶어두려 했다. 그래야 사회적 연대감을 상실한 개인은 무력해지고, 이 신문의 논조는 먹혀들어간다.
하지만 현재 <조선일보>는 운동의 땔감이 되고 말았다. 매일 매일 네티즌들은 스스로에게 ‘숙제’를 부과한다. <조선일보> 기사를 비평적으로 분석하고, 이 신문에 광고를 낸 기업에게 전화를 걸어 이 신문의 폐해를 설명하며 광고 중단을 요청한다. 이번 촛불은 쉽게 꺼질 수가 없다. <조선일보>가 있으니 말이다. <조선일보>는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이처럼 길게 적어본 까닭은 이것이다. 이러한 무형의 성과를 대의민주주의나 제도정치로 잴 수 있는가? 정치적 해결로 얻어낼 수 있는가? 저 토론회의 많은 발언자는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서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제도정치로 얻어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말해야 할 때이지 않은가.
거리의 정치(만약 인터넷도 학교도 회사도 집도 경우에 따라서 거리라고 한다면)는 제도정치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맥이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자기 밑천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거리의 정치의 궁극적인 표현은 법조문이나 협상안이 아닌 곳에 담길 수도 있다.
4. 정권 퇴진 요구는 기로인가?
하지만 기로에 왔는지도 모른다. 우선 정부는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대부분 내놓았다. 소고기 추가협상, 민영화 포기, 대운하 사업단 해체, 대국민 사과까지. 하지만 반쪽짜리 협상이고 시간지연책들인 것 같아 아직도 국민들은 못미덥다. 고민이 깊다. 그리고 예고했던 20일이 다가왔다. 이제 정권 퇴진을 요구해야 하는가. 역시, 판단은 대중의 몫이다.
잠시 우회하자. 이번 정권 퇴진 운동을 두고 정책상의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자충수가 되어 오히려 지배세력이 결집한 빌미가 되어 역습의 기회를 내어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는데, 이는 현실적인 판단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고기 재협상은 온건론, 정권 퇴진 운동은 강경론이라거나, 정권 퇴진 요구는 소고기 재협상 요구보다 수위가 높은 강력한 카드라는 발상에는 동의할 수 없다.
강경 vs 온건론 구분법의 문제
소고기 재협상과 정권 퇴진은 단계론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촛불의 힘은 물리력의 산술적인 조합이 아니다. 정권 퇴진 요구에 사람들이 적게 참가하고 지지여론이 낮으면 정권 퇴진 요구는 접고 소고기 재협상을 요구하고, 사람들이 많이 참가하고 지지여론이 높으면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중이 통일된 한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 퇴진 요구는 ‘도 아니면 모’가 되기 십상이라는 진단은 상황 바깥에서 내놓은 것일 따름이다.
물론 우리는 지금 산적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슈들 사이에 중요성을 따지고 차분하게 우선순위를 만드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 전에 혹은 그와 동시에 마음에 진 응어리를 한껏 풀어내야 한다. 만약 “이명박 물러가라”라는 말이 “소고기 재협상”보다 더욱 속 시원하다면 외쳐야 한다.
그것을 누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밖에도 다른 여러 목소리가 이제껏 마냥 갖가지 방식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이처럼 정권 퇴진 요구가 섞여 앞으로 터져 나올 여러 목소리를 분열의 징후가 아니라 힘의 충만함으로 읽어내려면, 읽어내는 측의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첫째, 상황을 소고기 국면에서 각종 정책을 반대하는 국면을 거쳐 정권 퇴진 국면으로 나아가는 단계론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場) 안에서 각각의 요구들이 서로 기능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파악해야 한다. 둘째,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과를 읽어낼 수 있는 여러 잣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운동의 성패 여부를 정권 교체나 정책 변경으로 고정시켜놓아서는 안 된다.
5. 촛불, 자신과의 승부
그리고 이제 상황을 읽어내는 측만이 아니라 촛불을 든 대중 자신에게도 시련이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물어보자. 만약 우리의 운동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 계기는 어디서 찾아올까. 아마도 우리는 정부의 물리력에 쉽사리 굴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2개월이 증명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정부가 언론을 활용하여 어물쩡 넘기려 해도 간단히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역시 지난 2개월이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무너진다면, 오히려 그 계기는 안에서 찾아올지 모른다.
만약 현재의 숱한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정부가 미봉책으로 일관하여 결국 국민과의 전면전으로 접어든다면,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그 희생의 무게를 모두의 몫으로 조금씩 나눠 갖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 그 희생당하는 이는 물리적인 탄압으로 상처 입은 자들만이 아니라 내부고발자나 언론사 등도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어려움은 역시 안에서 찾아올 것이다. 전면전에 나서는 경우 촛불은 필시 진보정당이나 노동조합을 포함한 기존의 운동조직과 맺어져야 한다. 그 경우 의사조율에 성공할 수 있을까. 더욱이 지금도 아고라에 들어가면, 최근 이명박 정부가 꺼내든 카드나 촛불의 향방에 대한 입장이 갈라지고 있다. 상황이 며칠 사이 미묘하게 전개된 만큼, 그 논의에는 정권 퇴진 운동에 나서자/말자만이 아닌 그 사이에서 보다 복잡한 시각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이들은 이명박 정권의 정책에 반대하지만 정권 퇴진 요구는 이르다거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이들과 어떻게 기능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스스로 만들어놓은 금기
물론 이 역시 활발한 논의를 통해 문제를 조금씩 풀어가고 있지만, 혹여나 전면전의 단계로 들어선다면 촛불이 받아들이는 품은 갑자기 좁아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기성의 운동조직에게 촛불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될 것이며, 승리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전면전이 되었을 때 대중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금기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비폭력주의 말이다. 지금까지 비폭력주의는 정권에 대한 도덕성의 우위를 뜻했고, 그 자체가 운동의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져 운동이 발전하는 데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시민이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비폭력주의가 유지된 까닭이다. 문제는 비폭력주의가 ‘순수성’에 갇혀버리는 경우다.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 반(反)폭력으로 자신을 지켜야 할 경우, 혹은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경우도 순수에서의 변질로 간주되어 버린다. 이는 촛불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불순’이라는 무기를 상대에게 내어주는 꼴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금기를 유연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
이제 촛불은 자신과의 승부에 직면해야 하는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다. 자신과의 승부에 맞닥뜨리는 것은 그만큼 촛불이 성장한 까닭이다. 그 시련을 버텨내기 위해서도 우리가 거둬온 무형의 성과를 스스로 되새기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동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과의 승부에 나설 채비를 이제껏 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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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광장을 대중적 정치주체 탄생의 공간으로 (참세상, 백승욱(중앙대) / 2008년06월24일 17시48분)
[기고] 촛불집회에서 넘어서야 할 수많은 경계
현 정세를 규정하는 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신자유주의하에서 ‘안전’의 총체적 붕괴에 대한 심각한 우려이고, 다른 하나는 ‘헌정적 위기’ 요소들의 확산이다.
미국 소고기 수입 협상 문제로 시작한 현재 저항의 배경에는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문제라는 좁은 의미의 먹거리의 안전성 문제만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광우병 문제로 터져 나온 것은 광우병이 가장 직접적/가시적이며, 또한 ‘국가’의 ‘임무방기’의 가장 적나라한 측면을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전 문제는 고용, 물가, 교육, 부동산 등등 생활 전반으로 확산되어 있는데, 이 모든 문제들은 사실 사회적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것들을 방기한 결과 등장한 것들로, 이는 신자유주의하에서 국가의 존재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안전이라는 문제는 광우병으로 시작한 문제가 신자유주의 전반으로 확대될 수 있는 중요한 핵심 고리가 된다. 안전은 상이한 조건에 처해있는 대중들이 서로 교통을 확대할 수 있는 고리이며, 이를 통해 연대가 가능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연대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는 쟁점이다.
현 상황에서 헌정적 위기의 요소들이 확산된다는 것은 그 쟁점이 1987년의 연장선 속에 있고, ‘1987년 정세의 자유주의적 포섭과 그 균열’이라는 문제가 다시 터져 나온 정세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87년의 정세는 ‘대중들의 해방은 대중 스스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대중들의 정치를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린 계기였고, 그런 점에서 1980년의 연장이었다. 물론 실제적 과정은 그 ‘자유주의적 포섭’이라 할만한 ‘대의제’로, 즉 ‘대중들 스스로’의 의미가 대중들의 투표를 통해서,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것이 부족하다면, 일부 NGO적 매개를 통해서라는 방식으로 협소하게 해석되면서 그 더 폭넓은 가능성이 봉쇄되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2008년 촛불시위는 인민주권이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2008년은 유예된 1987년의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총체적 무능력을 노정하고 있고, 그러다가 정말로 이 정권이 무너지고 대통령이 하야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대중들의 ‘공포’를 배경으로 하여, 더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뒤를 돌아보면, 야당이라고는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사기꾼들 뿐이고, 진보적 정당은 사분오열되어 있고, 아직도 ‘대중들의 정당’이라고 여겨질 수는 없는 상황에서 이 문제가 등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로는 더 이상의 진전을 주저하지만, 그럼에도 이와 동시에 주권적 계기라 할 몇몇 제도의 도입으로 한정되지 않을 만큼 대중들은 이미 훨씬 더 앞서나가고 있는 측면도 나타난다.
따라서 문제는 이런 계기를 어떻게 더 전진적으로 추동할 수 있는가, 헌정적 위기에 대한 민중적 대안 모색에 어떻게 나설 것인가 하는 더욱 근본적인 부분에 있다. ‘우리는 어떻게 주권자일 수 있고, 우리는 어떻게 시민일 수 있는가?’, 현재와 같은 국가의 헌정적 위기의 확산 속에서.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보편적 정치이념을 확대해 나갈 수 있을까? 문제는 단순히 대안적 집권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가 집권하던 후퇴시킬 수 없는 대중들의 민주주의의 최저선을 확보하는 것이고, 그로부터 더 많은 민주주의를 작동시켜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앞서 말한 ‘불안전성’의 해결과도 뗄 수 없는 것이다.
헌정적 위기의 요소들과 삶의 현장에서의 투쟁을 결합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그러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을까? 우리는 2008년 상황과 1987년 상황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1987년은 각종 조직화가 시작되는 기점, 또는 이미 시작된 조직화의 노력이 분출하는 계기였다. 학생은 학생대로, 각종 직장은 직장대로, 지역은 지역대로, 조직화가 시작되었고, 1987년 정세는 각자의 공간에서 조직화의 성과가 광장으로, 다시 광장의 집회에서 촉발된 고양된 정치적 열기가 자신 공간에서의 새로운 조직화와 영향력의 확대로 이어진 바 있다. 그러나 2008년의 정세는 아직까지 광장의 열기는 광장에 남아있고, 삶의 각종 공간은 이 광장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의 소통만으로는 실질적으로 서로 다른 조건에 처해있는 ‘운동들의 운동’이 되지는 못한다.
1987년은 특히 7,8,9 투쟁의 결과가 보여주었듯이, 대중적 고양의 정세가 일정한 ‘조직적, 제도적’ 실천의 형태들을 낳았는데, 그 핵심적 특징은 대중들 자신의 주체화 조건의 근본적 전화를 개시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주체화 조건의 재생산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시작점에 운동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광장과 생활공간은 서로 괴리된 것이 아니다. 광장이 소통과 연대, 그리고 정세적 집중점의 장소라면, 삶의 공간은 그 정세의 과잉결정 하에서 작동하는 구체적 변혁의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한데, 실제로 대중들의 재생산 조건이 변화하는 곳은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광장의 모임의 집중성을 흩뜨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공간에서의 조직화와 재생산 조건의 변화의 시도가 광장의 모임과 결합될 때 촛불집회의 파괴력과 집중력이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포스트-1968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바리케이트는 다수로 존재하고, 그것은 특히 삶의 공간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것은 교육제도에, 작업장에, 그리고 가족제도에 있다. 그리고 그것의 변혁은 대중들이 스스로 해방적 주체가 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물론 그러나 바리케이트들은 단순히 분산되어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다. 동시에 이렇게 분산된 바리케이트는 국가를 매개로 강력하게 집중된 효과를 발휘한다. 삶의 공간에서의 변혁을 위한 노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조건들이 없이는 곤란함을 겪을 것이며, 그럼에도 이런 삶의 공간들 속에서의 변혁을 위한 시도가 없다면 대중들을 정치의 주체로 만들려는 인민주권의 시도의 내용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헌정적 위기의 요소들과 삶의 현장에서의 투쟁을 결합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우리는 더욱 많이 고민해야 하는데, 그것은 적어도 세 가지 요소들을 담아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즉 첫째로 법이데올로기를 의문시하는 효과를 가져야 한다는 점, 둘째로 ‘노동자 시민’이라는 계기를 활성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 셋째로 사상적 자기검열의 벽을 허무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촛불집회는 아직 넘어서야할 수많은 경계들이 있고, 이 경계들을 넘어설 때 비로소 연대의 조건을, 그리고 해방적 주체의 탄생이 가능한 조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대중들이 느끼는 분할선이 ‘안전’ 대 ‘불안전’이라면, 거기에 연대하기 시작하는 고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불안전한’ 지위에 놓인 사람들이 누구인가. 비정규직, 그리고 그만큼 또는 그보다 더한 정도로 이주노동자이다. 그럼 촛불집회의 목표는 그 참석자들이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라고 선언할 때, 그리고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이 우리는 ‘노동자-시민이다’라고 선언할 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자신이 처한 삶의 불안전함에서 출발하여 연대하여 공동의 싸움을 해나가지 않을 때 자신이 거리에 나온 이유인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전함도 극복될 수 없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해방의 조건이 자신의 해방의 조건이 된다는 오래된 평범한 구호를 여기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경계를 넘어서려는 고민스러움이 없는 단순한 축제에 머물려 할 때, 해방의 계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해방의 계기는 고통스러운 자기 전화의 과정이고,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인 당연스러움의 경계를 뒤흔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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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인권선언'이 필요하다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인권오름 제 109 호 2008년 06월 25일 5:31:57)
[인권을 꿰고 깨고] 세계인권선언 제28조를 되새기며
다양한 정체성이 어우러질 때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있다 (승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인권오름 제 109 호 2008년 06월 25일 5:25:25)
[벼리 2] 촛불집회에 투사된 차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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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뒷북, 노조 운동성 부재 반영” (레디앙, 2008년 06월 26일 (목) 08:34:16 변혁산별)
[인터뷰-홍세화 기획위원] "반노동자 의식 벗어날 학습-토론 절실"
- 5.2 촛불시위가 발발한 이후 지금까지 50일이 넘도록 노동운동이 쇠고기협상 무효 파업을 벌이지 못하고 있다.
= 특히 6월 10일 국민항쟁의 날에 민주노총이 파업투쟁에 나서지 못하고, 7월 2일로 넘어간 것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 6.10은 역사적인 날이었고 항쟁의 분수령이었는데 민주노총이 파업이라는 수단으로 동참할 수 없었던 게 민주노총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민주노총이 관료화되지 않고 운동성이 살아있다면 상상력을 동원하고 조직하여 촛불 국면에 결합시켜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런 문제제기를 정파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라는데, ‘촛불 뒷북’은 민주노총이 ‘종이호랑이’일 뿐, 실력이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고 본다.
그동안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철폐하자” 등 목소리만 크고 명분에 찬 얘기를 많이 했지만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실력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하여 촛불이 정부와 자본을 비출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의 정규직 노동자들도 비췄으면 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자의식은 거의 의식적인 것으로서 일시적, 계기적인데 반해 일상에선 소시민으로 살면서 스스로 중산층으로 착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다. 자본이 들씌운 욕망체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면서 어떻게 자본과 싸우겠는가?
- 노동운동이 시대의 부름에 나서지 못하고, 사회적 약자에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
= 노동운동이 소시민화된 것이다. 욕망을 부추기는 한국 자본주의의 관철형태에 대해 꾸준한 긴장관계를 만들고 이에 대한 학습을 노동조합 내부에서 활성화되어야 하는데, 적잖은 조합원들이 주식투자하고, 재테크하고, 부동산투기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자본의 욕망체계에 완전히 동화되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 촛불투쟁이 기로와 전환점인 것 같은데 어떻게 전망하고 있나?
= 앞으로 어차피 이명박 정부가 있는 동안 계속 사그러 들었다가 피어나고, 이걸 반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이 극소수 가진 자들을 위한 정부이기 때문에 정책을 추진하면서 반민중적 반시민적 성격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시민으로서 민중으로서 촛불을 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문제든 사기업화든 의료사유화든 대운하든 국가가 존재 이유인 공공성을 거부하고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된 것이고, 촛불저항은 공공성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흐름 속에서 노동운동이 어떻게 준비하고 학습하고 어떻게 토론하고 연대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 이번 촛불항쟁이 권위적이며 군사문화적인 노동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 같다.
= 프랑스는 68혁명이 있기 전인 50년대만 하더라도 여성이 취업하려면 남편의 허가서를 제출했어야 했다. 남자가 부인이 일해도 좋다고 허락해야 일할 수 있을 정도로 가부장적, 반여성적인 사회였다. 68혁명이 정치혁명으로는 실패했다고 하지만 사회문화혁명에서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일터, 배움터 등 인간관계가 이뤄지는 모든 곳에 엄청난 민주화를 가져왔다.
촛불도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소통의 환경에서 피어난 것이다. 앞으로 관계 자체의 설정이 권위적이고 획일적이고 상명하복의 문화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도 상부에서 모든 게 결정되고 내려가는 권위주의적 방식에서 스스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새로운 사회에 조응할 수 없을 것이다.
- 금속노조 활동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는?
= 산별노조의 방향도 옳고 지역의 민중들, 특히 비정규직을 어떻게 결합시켜낼까도 대단히 중요하다. 역시 산별노조도 명분이 아니라 실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조합원들의 의식이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욕망체계로부터 조합원이 긴장하고 저항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인 토대가 있지 않고서는 계급의식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조합원들의 생활, 일상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목소리만 높여서는 그 간극을 메울 방법이 없다. 어떻게 지역에 밀착하고, 구성원들의 일상 자체에 대한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 공동의 과제인 것이다.
노조가 조합원 교육에 정말 신경을 써야 한다. 프랑스는 초등학교 때 노동의 가치에 관한 교육을 받고, 중학교 때 노사로 나눠 모의 교섭을 하며, 고등학교 2학년 때 ‘노동조합이 민주주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놓고 토론을 벌인다. 국가주의 국가경쟁력 이데올로기밖에 갖고 있지 못한 우리는 노동자의식은커녕 반노동자의식을 갖고 사회에 나가 자본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노조에서 학습하고 교육하고 토론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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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정국의 방향은? ‘정당 정치’ vs ‘거리 정치’ (새사연 이슈 종합, 2008-06-26 ㅣ 손우정/새사연 연구원)
최장집 교수의 ‘대의 민주주의론’ 비판
이런 가운데 학자들도 촛불시위를 분석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학자들은 대체로 촛불시위에서 보여진 거리시위가 한국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긍정적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한국 민주주의 발전 전망을 둘러싼 입장에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취약해진 원인을 ‘허약한 정당체제’에서 찾고, 대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한 ‘제도적 실천’을 강조해왔다. 보수학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촛불시위의 긍정성을 인정하면서 이를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고민하는 데 비해, 최장집 교수는 촛불의 근본적 한계를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제도적 실천’, 지금은 정당체계를 바로잡을 때?
우선 최장집 교수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를 ‘대의제 민주주의’로 규정한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스스로 직접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여 그에게 통치를 위임함으로써, 대표로 하여금 통치토록 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적 의미는 “인민의 자기통치”, 즉 어떤 결정으로 인해 영향 받는 사람들이 그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통치자와 피통치자를 일치시키는 통치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 교수는 이런 치자와 피치자가 일치하는 ‘인민주권’원리는 선험적 지식일 뿐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인민에게 완전한 주권을 부여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제도화한 가운데, 인민주권이라는 가치를 끊임없이 지향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은 사회 내에 존재하는 갈등을 공식적인 대표 체계 내에 포함시켜 갈등을 제도화하는 ‘제도적 실천’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한국 정당체제는 사회의 부분적 갈등만을 포함하고 있는 ‘허약한 체제’다. 따라서 사회적 갈등이 제도화될 수 있는 정당체계를 바로 잡지 않고서, 비제도적 방식인 운동에만 의존하는 것은 민주주의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촛불시위는 선발투수가 될 수 없는 ‘구원투수’일 뿐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
그러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최 교수가 주장하는 대의 민주주의론과 가장 큰 대척점에 있는 민주주의론은 직접민주주의다. 직접민주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이론적 경향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인민의 자기 지배’를 민주주의 원칙으로 이해한다. 즉 최교수와 같은 진보적 대의민주주의론자들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인민주권 가치를 지향하는데 머물지만,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은 인민주권적 가치를 최대한 구현하기 위한 목적 하에서 대표제, 혹은 대리제를 받아들인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대표자를 통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혹은 인민. people)의 직접 정치다.
물론 어느 입장에 서 있느냐와 상관없이 의제의 복잡성·다양성과 규모의 확대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불가피한 위임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표는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유권자의 의사에서 자유로운 반면, 직접 민주주의 시각에서 대리자는 항상 유권자의 의사에 종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의제 민주주의 시각에서는 국민투표나 국민소환에 부정적이지만, 직접 민주주의 시각에서는 선출된 대표에 대한 국민 통제를 중요시 여긴다. 최장집 교수가 대통령 소환제를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의 대의 민주주의론에서 기인하는 시각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완전한가? ‘선거 실패’의 가능성
최장집 교수는 “촛불집회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민주주의제도를 넘어서는 어떤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그 제도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를 대의제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를 넘어서는 “대통령 소환제의 도입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국민은 선거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반영하는 정당을 강화하고 발전시켜 해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선거 실패’다. 보통선거권의 확대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괄목할만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거제도 자체는 민주주의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선거는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민주주의와 멀어진다.
첫 번째, 선거는 지배받는 사람이 지배해야 한다는 원칙, 즉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일치해야 한다는 동일성의 원칙과 어긋난다. 선거는 항상 보통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을 뽑는데 이용됐다. 오늘날 그것은 조직력을 보유한 자, 선거자금을 감당할 수 있는 자, 언론의 주목을 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로 제한될 수 있다. 뽑는 사람은 민주화되었으되, 뽑히는 사람은 아직까지 ‘특별한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대의제는 민주정과 귀족정에 한 발씩 걸치고 있다.
원로 헌법학자인 국순옥 교수가 대의제를 “지배와 피지배를 계급적 수준에서 재생산하는, 즉 사회적 다수파를 정치적 소수파로, 그리고 사회적 소수파를 정치적 다수파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사회적 다수파에 대한 사회적 소수파의 정치적 지배를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라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제한된 선거기간 동안 후보자의 정치견해와 능력을 제대로 검증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공약을 제시하고 검증할 수 있는 메니페스토 운동이 전개되고 있지만, 당선자가 선거 시기에 제출한 공약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어떤 제재가 가해지는 것도 아니며, 공약하지 않은 정책을 추진한다고 해서 제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 총선에서 쇠고기 수입과 경부운하 공약이 한나라당에서 빠져 있지만, 이를 통해 어떤 제재도 가해지지 않는 상황이 잘 보여준다. 따라서 유권자가 선택한 후보가, 사실은 그들이 기대했던 후보가 아니었을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선거 실패’다. 그러나 국민에겐 실패한 선거를 사후에 교정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없다. 소비자가 상품을 잘못 구입했을 때, 즉 ‘소비 실패’ 시에는 교환과 환불, 혹은 리콜(recall)의 권리가 있지만, 잘못 선택한 정치인에 대해서는 어떤 권한도 없다.
‘선거 실패’를 교정하기 위한 국민소환제(recall)와 같은 최소한의 보완장치를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는 최 교수가, 인민 주권적 가치를 어떻게 지향하겠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선출된 대표자의 ‘책임의 원리’인데, 이는 그가 강조하는 ‘제도적 실천’이라기보다 확인하기 모호한 ‘지도자의 자세’ 같은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여론과 의사’에 지도자가 책임을 갖고 반응해야 한다면, 그 국민의 여론과 의사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국민의사가 투입될 경로를 차단한 채,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인 결사체’에만 의존하는 것은 ‘선거실패’로 창출된 의회권력만 중요시하고, ‘조직되지 않은’ 일반 국민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지금처럼 특정 정치세력이 압도적 비중으로 구성되어 있는 의회체계 아래에서 ‘정당정치’, ‘제도적 실천’만을 강조해서는 현 상황에 대한 어떤 대안도 제시할 수 없다. 최 교수가 정당의 발전과 강화라는 원론적 입장 이외에 다른 현실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프레임에 철저히 갇혀 있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사에서도 증명되듯이, 정당과 의회체계의 발전은 항상 거리정치, 비제도적인 국민의사가 분출된 결과로서 강제된 것이지 그 역은 아니었다. 거리정치를 ‘낭만주의적 정치관’을 확산시켜 ‘반정치주의적 정치관’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최 교수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지금 촛불을 든 시민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정치관은 낭만적이라기보다 참여적이며,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현실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하는 의지의 표명이다.
운동정치의 한계는 대의제의 한계
최 교수는 최근 운동정치의 한계로 다섯 가지를 지적했다. 첫 째는 찬반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해결에 필요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형성하거나,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여러 대안들을 조정하여 결정을 끌어내는 데 지난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도 이와 유사한데, 운동은 여러 이슈를 다투는 과정에서 각 이슈들 간 중요성의 우선순위를 위계적으로 배열하고, 이에 기초해 정책 추구를 일상화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이제까지 경험에 비추어 보면 타당한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최 교수가 ‘정당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당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지금 그 역할을 할 정당이 누구인지에 대해 답해야 한다. 혹여, 그런 정당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과연 운동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막연히 좋은 정당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가?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는 것은 최장집 교수나 촛불시위 참가자나 마찬가지다. 운동이 문제해결의 몫까지 떠안으려 하는 것은, 그것이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방법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한계를 인정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하지 말아야 할까? 현재로서는 어렵지만 문제해결의 몫까지 최대한 시도해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최 교수가 지적한 운동의 세 번째 한계는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이 일상화된다는 문제고, 네 번째 한계는 운동의 강렬한 열정이 장기간 유지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두 가지 문제는 어찌 보면 상호 모순적이다. 장기 지속할 수 없는 운동이 이명박 정부의 임기 내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쨌든,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이 일상화된다는 문제를 운동의 한계로 돌릴 수는 없다. 최 교수의 주장처럼 정당체계가 하루아침에 발전되지 않는 한, 불가피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특정한 정치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18대 국회체제에서 이런 갈등은 일상화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운동의 한계라기보다 ‘선거 실패’의 한계, 대의제의 한계다.
진짜 문제는 운동이 장기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촛불 시위도 60일이 넘어서면서 육체적·정신적 피로감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역시 정당을 바로 세우면 해결될 문제지만, 그런 가능성이 최소 4년 이내에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결 방안은 촛불시위와 같은 거리정치의 가능성을 통치권자에게 인식시키는 것으로 해결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국가통치자의 자의적인 정치행위에 대해 언제든 지금과 같은 광범위한 국민저항이 일어날 것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강렬한 열정’이 사라지기 전에 분명한 성과를 남겨야 하며, 거리 시위의 부분적 제도화, 즉 국민투표나 소환제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멈춰서는 안 된다.
최 교수가 마지막으로 지적한 문제는 운동을 통해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의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며, 이는 현실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운동의 한계로 보기는 어렵다. 시민사회 간 갈등을 유도한 것은 운동이 아니라 정치권력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 보수언론은 국민에 반하는 정부라는 이미지를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을 조직해 냄으로써 ‘국민들 간의 갈등’으로 전환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정부가 이런 인식을 가졌다는 증거는 새로 신설된 시민사회비서관에 대표적인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인 홍진표를 내정하려 했던 것에서 드러났다. 비록 다양한 반발 속에 개혁적인 인물로 교체되었지만, ‘교육’을 통한 반북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인식해 대학생과 교사 조직화에 힘써 왔고, 다양한 사회 의제에 개입하는 이른바 ‘프레임 전쟁’에 적극 개입해 온 뉴라이트 사무총장을 시민사회비서관에 임명하려 했다는 시도만으로도 시민사회 내부의 갈등을 유도하고 있는 것은 비단 운동만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생명체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출산의 진통을 겪어야 하듯, 일시적인 사회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대의제의 한계 속에 주권의 원리를 가둬놓을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제도화된 권력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가능한 방법은 최 교수가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라 보았던 바로 그 제도들이다.
거리정치를 발전시킬 민주적 리더십 형성을 형성해야
운동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최대의 과제는 거리정치에 민주적 리더십을 구현하는 일일테다. 현재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리더십은 지도와 복종을 전제로 하는 전통적 리더십과는 전혀 다르다. 대중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수렴하고 조절하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리더십의 초기 형태다. 전통적으로 운동에서 리더십이 필요했던 이유는 참여자들이 행동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위계적인 지휘체계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일 운동을 이끄는 자가 모든 행위에 대해 일반 구성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면 엄청난 시간이 낭비라고 보았고, 미헬스의 주장처럼 민주주의는 여유 없이 투쟁하고 있는 조직에겐 사치인 것 같았다.
그러나 촛불시위에서 보여준 리더십은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정한 지도부가 구축되지 않으며, 새로운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지도부가 바뀐다. 시위에서 역할 조정은 순환적(rotate)이었고, 특정 이슈에 가장 적절한 조직이나 개인이 시위를 이끈다. 리더십이 점차 탈개인화되면서도 사안에 따라 전문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집단역학(Group Dynamic) 리더십에 가깝다. 리더 개인의 특성과 자질보다 참가자들의 요구를 가장 잘 충족시킬 수 있는 개인이나 조직이 리더로서 자격을 습득하는 것이다. 리더십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위 과정에서 창출된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은 정당 리더십 속에서 사라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당 리더십 형성을 위해 투입되어야 할 것들이다. 진보와 보수 정당을 막론하고 내부 민주주의의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 한국 정당체제는, 자신의 리더십을 촛불에 강요하기보다 촛불에서 드러난 역동적 리더십을 흡수하고 발전시켜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리더십이 아직까지 ‘저항의 동원’이라는 비교적 손쉬운 과정에서 효과를 발휘하고 있지만, 정체된 국가와의 대치국면을 돌파하는 데에도 적절한지는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다양한 다중 리더십을 적절하게 중재할 통합적 리더십의 부족은 지난 6월 10일 시위에서 소위 명박산성을 넘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논쟁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장기간의 토론과 합의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항의 표출만으로 상황이 바뀔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런 형태의 합의도출 과정이 적절한지는 심사숙고해야 할 지점이다. 합법과 불법, 폭력과 비폭력 같은 지루한 논쟁은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지만, 이 지점에만 한없이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리더십이 이런 ‘내부의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는 촛불이 풀어야할 과제다.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정당이 사회적 갈등 해결에 전혀 역할을 못하고 있는 지금 현실에서, 거리 정치는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마지막 저지선이다. 국민의 직접행동이 좋은 것이냐, 정당을 통해 매개되는 것이 좋은 것이냐의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민주주의 이상은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된 바 없으며, 그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대의제’를 기반으로 하는 철저한 위임 민주주의 체계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최 교수의 민주주의론은 87년 6월 항쟁의 거리에서는 시대를 적중했지만, 08년 6월의 거리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듯, 민주적 정당체계도 국민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결국 정당을 통한 제도적 실천은, 거리시위를 대체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거리시위의 결과물로서 나타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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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인권선언부터 개헌까지 (한겨레21 2008년07월17일 제719호, 이순혁 기자)
촛불의 진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둘러싼 논쟁에서 어떤 결실을 만들 것인가
촛불은 어디로 진화하는가?
아마도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언론도, 그 어떤 지식인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이 채 안 돼 여중·여고생들로부터 시작된 촛불로 인해 지지율 10% 미만이라는 위기에 봉착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가장 많은 수의 시민들이 (생활)정치적 이슈를 가지고 광장에 나오리라 누가 예측했겠는가. 따라서 촛불의 시작과 그 중흥을 예측 못한 언론과 지식인에게서 촛불 진화의 정확한 방향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촛불 이전과 이후의 국민은 같은 존재일 수 없다. 이제 ‘자각’으로 무장된 수많은 ‘촛불’들의 힘은 어디로 뻗어나갈 것인가? 이는 광우병에서 대운하와 의료산업화 등으로 의제를 다양화하는 ‘양적 확대’와는 다른,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냐는 의미에서 촛불의 ‘질적 확대’와 관련된 질문이기도 하다. 촛불이 승리를 선언한 지금, 그 앞에 던져진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질문은 바로 촛불의 향방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최장집 교수를 둘러싼 논쟁
이 논의는 촛불과 광장으로 상징되는 직접민주주의와 ‘먹통 국회’로 상징되는 대의민주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논쟁이 가장 먼제 제기된 것은 촛불이 일어난 이유가 다름 아닌 대의민주주주의의 무능이었기 때문이다.
논쟁의 출발점은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과)였다. 그는 지난 6월 참여사회연구소 등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제도들이 무기력하고 작동하지 않고 그 중심적 메커니즘으로서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그 자리를 대신한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며 “운동만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불충분하다”고 말했다. 이른바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며, 운동에 집중하느라 정당을 강화하는 데 무관심하면 반대편에서 파시즘을 불러들이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수진 이화여대 교수(정치외교학과)도 “촛불집회를 통해 발산되는 시민적 역동성은 한국 민주주의의 귀중한 자산이며 우리의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만들어주지만, 참여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최 교수의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일종의 대의민주주의 수렴론으로 받아들여졌고 많은 반론이 제기됐다. 특히 일부 젊은 지식인 그룹은 최 교수가 서양 이론에 함몰돼 있다는 원색적인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씨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에 올린 ‘이른바 최장집-박상훈 그룹의 제도 민주주의 학파가 한국 정치의 위기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양당체제의 복원이라는 대의제의 신화화에 구속되어 있다. 이들의 민주주의론은 내 판단에 이제는 ‘낡은 보수주의’다”라며 “그들은 광장에서 이론을 구성하지 않고, 이론에서 광장을 유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달 초 흥사단이 주최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가’라는 제목의 시민토론회에서는 아예 대의민주주의의 ‘대안’들에 대한 구체적 방안들이 논의됐다. 김종서 배제대 교수(법학과)는 “(현재 상황에서는) 국민주권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며 “국민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대리자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일을 그만두고 국민이 실질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제도, 새로운 헌정체제가 구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발안과 국민투표, 국민소환제도 등 구체적인 제도적 대안이 필요하고, 개헌과 상시적 광장의 제도화 등이 함께 고민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승우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위원 또한 “단순히 시민이 결정 권한을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은 낮다. 제도 자체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리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면서도 “대의정치를 직접정치로 전환시키는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손우정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상임연구원과 이지문 흥사단 투명운동본부 공익센터소장은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기 위해서는 (대표가 아닌) 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추첨제에 의한 위임권력 창출’이라는 좀더 근본적이고 실험적인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경합 관계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참여사회연구소 토론회에서 “정당민주주의의 정상화 필요성을 통감하며 그 새로운 발전이 요구된다는 데에 동의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반드시 생활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 광장의 풀뿌리 민주주의가 제도 민주주의와 함께 이중 민주주의의 전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한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무역학부)가 대표적이다. 정상호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직접민주주의 대 대의민주주의 논쟁은) 정확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지식인적 사고 같다”며 “정당정치와 운동정치 사이의 소통과 연계가 강화돼 민주주의가 한 단계 발전한다는 것이 보편적 패턴이다. 서유럽의 경우는 사회경제적 의제가 정당을 통해 관철되고, 생활정치나 지역정치를 통해 직접민주주의의 기제들이 일상에서 작동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장집 교수 쪽이 정치를 선거와 정당으로 너무 협소화시키고 운동을 정치의 부수 기제로만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그 반대편도 운동과 정당이 연계되지 않았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정치적 부작용에 대한 최 교수의 고민을 너무 쉽게 비난한다는 것이다.
‘직접’과 ‘대의’는 경합 관계인가
하지만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둘러싼 이런 논쟁에선 공허감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주민자치 차원에서 도입된 지방자치단체장 주민소환제와 사법부의 국민참여재판 등 참여민주주의적 소통 통로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인 점도 간과됐다. 또 아직 강력한 제도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모르쇠 정부’ 앞에서 새로운 제도적 대안을 얘기하는 것은 실효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국민발안이나 국민소환 같은 직접민주주의 기제들에 대해 “제안은 좋지만 그러려면 법을 바꾸고 개헌을 해야 하는데, 솔직히 이것을 지금의 시민 파워가 해낼 수 있겠냐”며 “현실성이 낮을뿐더러 광장이 헌법기관을 소환하는 것의 제도화는 너무 과격하고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또한 7월7일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올린 ‘촛불집회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 “촛불집회를 통해 확인된 시민의 힘을 이명박 정권이라는 시장주의 탈레반들과의 싸움에서 사회적 공공성을 수호가기 위한 저항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면서 “이번 기회에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민주노동당이든, 창조한국당이든, 아니면 진보신당이든, 자기의 정체성에 맞는 정당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면 한다. 정치에 대한 혐오증이 이명박이라는 혐오스러운 대통령을 낳았다는 점을 잊지 말자”라고 주장했다. “해결책은 어차피 정책이라는 형태로 수립되고, 법률이라는 형태로 고정돼야 한다. 따라서 정당 자체를 바로잡고 나아가 보수 일색의 정당 구조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정당정치에서건, 직접민주주의 통로인 광장에서건 촛불들이 계속적인 행동과 참여의 끈을 놓지 말자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를 ‘시민인권선언’이라는 열매로 갈무리하자는 제안도 있다.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가 제안한 ‘광장에서 만드는 시민인권선언’이 그것이다. 그는 최근 ‘인권오름’에 기고한 글에서 “광장의 정치는 지속되어야 하고 직접행동의 민주주의가 발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며 “이때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광장에서 제안되고, 토론되고, 합의되어서 만드는 시민인권선언 같은 구상”이라고 주장했다. “누군가 기초해서 서명하는 선언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과정이 되어서 광장에 제출됐던 과제들을 권리로 명제화하고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자는 데 합의하는 그런 선언”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보수 정치권 개헌 논의에 대응
시민인권선언은 촛불을 일회성 사건이나 행사로 흘려보낼 수 없다는 인권운동가들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발상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광장에서의 경험의 자연스러운 산물이기도 하다. 박래군 활동가는 “그동안 광장에서 백승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과 한상희 건국대 교수, 손우정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위원 등과 함께 4차례에 걸쳐 ‘헌법 1조’ 거리특강을 진행했는데, 시민들의 참여 열기가 뜨거워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촛불을 둘러싼 정국이 안정되는 대로 촛불에 참여했던 각종 카페에 함께 고민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아고라 토론방에도 제안을 띄워볼 계획이다.
시민인권선언이 더욱 주목받는 것은 현재 보수 정치권에서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는 개헌 움직임과 결부되면서다. 현재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유선진당 의원 100여 명은 미래한국헌법연구회를 발족하고 개헌 공론화를 시작했으며, 지난 7월10일 취임한 김형오 국회의장도 임기 내 개헌 추진을 공언한 상태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과 ‘공룡 여당’이 주도할 수밖에 없는 새 헌법 초안에는 국민의 기본권 등 분야에서 후퇴한 내용을 담을 가능성이 크다. 운동 또는 시민들 차원에서 헌법에 담을 기본 이념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인데, 시민인권선언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그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제헌절인 7월17일 논의를 시작해 세계인권선언 60돌 기념일인 12월10일 안을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박래군 활동가)는 바람이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소강상태로 접어든 촛불 국면에서, 자발적인 동력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사리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을 수도 없다. 촛불은 지금까지 일반적인 예측과는 다르게 움직이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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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직접 민주주의와 인권의 마주침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인권오름 제 113 호 [기사입력] 2008년 07월 22일 20:34:10)
많은 이들이 촛불집회에 주목하는 것은 비단 끈질김만은 아니다. 집회 곳곳에 나타난,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며 즐겁게 저항하는 ‘시위대들 간의 네트워크’식 거리행진, 그리고 광장과 온라인 공간에서 행해지는 ‘자발적인 직접행동’과 ‘직접 민주주의’가 많은 이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권리와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인간광우병을 불러올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게 되면, 가공식품과 음식산업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본인이 언제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는 채 병에 걸릴 수 있다. 시민들은 생명권, 식량권을 위협당해 거리로 나선 것이다. 물론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이미 선거 때 낮은 투표율로 나타났지만 낮은 투표율로 당선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많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지가 ‘광우병 의심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나자 불신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시민들이 광장에서 거리로 처음 나서면서 외친 구호는 ‘독재타도’였다. 민주적인 방식과 절차로 선출된 권력이라도 선출시킨 시민들의 의사에 반해 독선적이고 독단적으로 권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독재라는 것이다. ‘선출과정’만이 아니라 ‘권력행사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시민들은 그동안 민주주의를 협소하게 규정할 수밖에 없었던 ‘독재시기를 경과한 민주주의 규정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시민들은 직접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를 밝히며 거리로 나서 정부를 압박하는 정치적 효과를 기대했다. 손에 손을 잡고 광장에 모여 자기가 나온 이유를 시민들에게 말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혼자 인터넷을 보다, 텔레비전을 보다 홀로 나와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는 자유 발언을 하였다. ‘내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권력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자유발언은 시민인 ‘내’가 직접 광장에 나와 ‘정치적 입장과 정책’을 말하고 다른 시민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합의를 구하는 과정’인 민주주의의 구현이었다.
거리행진이 시작된 이후, 그리고 이른바 공안탄압이 시작된 현재까지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시민들의 토론이다. 처음 본 사람이라도 이후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토론하고 거리행진 방향을 어디로 하는 게 효과적인지를 토론한다. 토론은 거리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때로는 ‘토론’이 갈등을 드러내고 그 갈등은 가끔 물리적 폭력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갈등’을 두려워하기보다 갈등이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시민들은 토론을 선호한다. 그러하기에 서로를 설득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토론은 더욱 확대되어야 하는 직접민주주의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달이 넘게 수많은 시민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소리 높여 ‘고시철회’를 외치며 잘못된 이명박 정부 정책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정책변화는 이끌어내지 못하고 공안의 광풍이 일고 있다. 그러면 시민들은, 우리는 진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이겨가고 있다. 당장은 이기지 못했지만 우리 스스로, 시민들 스스로 직접행동과 직접 민주주의 경험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행동』의 저자 카터는 “직접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력화(empowerment) 효과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직접행동을 가담하는 이들이 공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냄으로써 자부심과 존엄감을 얻을 수 있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며 타인과 연대감을 고양시킨다”는 것이다. 시청광장을 빼앗긴 6월 29일 이후 시민들은 절망감에 빠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 행진의 직접행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스스로의 힘을 믿고 다른 이들, 시민들의 힘을 믿지 않으면 이어질 수 없는 촛불의 행렬이다. “5년 내내 촛불을 들겠다”는 어느 여성의 말처럼 촛불이 가진 힘은 당장 ‘정책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지라도 스스로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자신감이며 그게 거리에서 서로에게 확인되며 느끼는 연대의식이다.
기존 질서에 항의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은 새로운 민주주의 형태를 실험하는 자극이 된다는 점을 주목하자. 촛불 집회는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담은 넓은 자원’이다. 카터는 직접행동이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며 항의 행동이 집단적인 의사결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남아프리카 일부 타운십의 사례, 아르헨티나의 포르투알레그레의 지역사회 협의체의 예를 든다. 직접 행동을 하면서 체화된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직접행동이 의도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식으로 직접민주주의를 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은 광장이 되어버린 도로만이 아니라 생활 정치 곳곳에서 준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얼마 전 기자회견을 한 ‘주민소환운동’은 대의민주주의에서 최소한 보장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한 요소인 주민소환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칠 계획이라고 한다. 아직 우리 헌법이 국민소환까지 보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주민소환’운동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의 제도적 실험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직접민주주의가 한국사회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는 항상 정당한가?”라는 우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과 형태 때문에 제기된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나의 권리행사가 타인의 인권을 억압하지 않고,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어울려 평화롭게 돕는 공동체사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억압권력에 맞서 싸워야 하고 맞서 싸우기 전에, 또 맞서 싸우면서 논의하고 합의해야하는 민주주의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직접 민주주의이든, 간접민주주의이든 ‘다수가 사는 공동체 사회’를 염두에 둔다면 민주주의는 ‘인권’ 실현과정에서 건너야 하는 다리이다. 인권은 하늘에서 ‘개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실현해야 하는 ‘현실적이고 역사적, 맥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인권운동은 억압권력에 맞서는 대항권력을 조직하는 운동으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래서『인권의 풍경』의 저자 조효제 교수는 “인권은 이제 공평하고 좋은 세상의 상징적 등가물, 즉 ‘은유로서의 인권’이 되어” “민주주의 사상 자체와 비슷한 내용을 담기 시작”했다는 급진적 주장을 펴기도 한다. 조효제 교수도 말했듯이 이러한 주장은 그동안 인권운동이 가지고 있던 청구권적 성격, 의무주체와 권리주체의 이분화 등을 무너뜨리는 효과를 낳는다. 실제 인권이행 의무주체가 국가에서 기업으로, 비국가행위자에게까지 확장되고 있는 현실에서 눈여겨볼 주장임에 틀림없다.
다시 원래 물음으로 돌아오자. ‘우리가 지향하는 삶, 인권의 가치가 실현된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민들이 자력화되고 주체화되고 능동화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력화를 낳는 직접 민주주의가 인권의 가치 실현에 한 몫을 하리라는 기대는 헛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인간의 권리를 ‘누군가 주어서’ 보장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력화’에 기반을 둔 사회를 꿈꾸기에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기대, 촛불의 실험에 더욱 힘을 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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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민주주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참세상, 유영주 기자, 2008년07월22일 10시28분)
[기획 : 촛불에 미치다] 촛불과 민주주의
촛불은 아직 진행형. 언제 어떻게 끝날까. 청계광장이 열린 첫날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단정하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어떻게든 진화(鎭火)하려 한다. 무시하기도 하고 겁을 주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어떻게든 진화(進化)시키려 한다. 진단하기도 하고 기획하기도 하고 물 흐르듯 맡겨두기도 한다. 이렇게 촛불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 ‘촛불과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가 가능할까. 이 요란하고 역동적인 국면이 어떤 모양으로 일단락되느냐가 확인되지 않는 한 추정과 예측에, 주관적인 진단이 되기 십상 일지다. 그렇다고 정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는 촛불 이전부터, 그리고 촛불이 켜진 이후에도 한시도 관심 밖의 일이 아니었다. 정치에 대한 시민의 관심만큼 촛불과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지속했다. 이 주제를 놓고 관심을 피력했던 활동가와 연구자의 발언을 쫓아봤다. 정의라기보다는 정리에 가깝겠다.
‘촛불선언’(시민인권선언) 만들자?“광장과 거리에서는 직접민주주의 맹아들을 열심히 꽃피우고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새로운 시민혁명이 진행 중인 것 같다. 이 시민혁명은 권리의 혁명이기도 하다.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수렴될 수 없는 새로운 주권자가 광장에서 탄생하고 있다.” 박래군 인권활동가의 말이다. ‘직접민주주의의 맹아’라는 말 속에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일정한 불신과 이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뭔가의 희망사항이 포함돼 있다. 일단 ‘새로운 주권자’의 등장에 눈을 떼지 않는데.
박래군 활동가는 이 주권자들이 ‘시민인권선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래군 활동가는 “당장 제도정치로 수렴될 수 없는 급진적인 권리의 내용을 광장에서 서로 제안하고, 토론하고, 합의하여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인권으로 확고히 선언하자”고 주장한다. 인권활동가다운 고민과 실천이다.
촛불에서 확인된 민주주의를 둘러싼 쟁점과 논란, 요구들을 급진적으로 정리하되, 대중의 동의와 감성이 살아있는 ‘선언’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시민이 줄줄 외우는, 외우지 않아도 저절로 읊어지는 그런 짧고 간명한, 그러면서도 인민주권과 인민권력의 의지가 꼿꼿이 살아있는 선언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시민은 아직 6.29선언을 대체하는 선언을 갖고 있지 않다. 6.29선언에는 20년 전 6월 10일부터 18일간 ‘직선제’를 외쳤던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이 오롯이 반영됐다. 선언의 주체는 지배자였고, 지배자의 입을 통한 선언이었지만, 지배자는 대중의 요구를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혁명이었고, 동시에 미완의 혁명이었다.
지금 촛불은 6.29선언을 대체하는 ‘촛불선언’ 탄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촛불선언’이 만들어진다 해도 6.29선언을 획기적으로 넘을 것인지를 장담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6.29선언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되지도 않을 듯하다. 예상컨대 ‘촛불선언’이 만들어진다면 그건 대의제 민주주의의 밖에서 광장의 실천과 정신을 함축하는 방식이 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이걸 어디에다 써먹을까. 제대로만 만들어진다면, 그러니까 마치 헌법 제1조 처럼 줄줄 외울 수 있는, 광장에서 실천으로 의미가 공유된 그런 ‘촛불선언’이 만들어진다면,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와 공백을 들춰내며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의 그림을 그리는데 유용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2년 안에, 곧, 개헌이 추진되면 글자 한 자 밀어넣기 힘든 상황이 된다. 이럴 때 ‘시민인권선언’을 들이밀고 실갱이를 하고 힘겨루기를 하는 지렛대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신자유주의 권력이 시민의 삶에 위협을 가하는 요소요소마다 이 선언을 근간으로 해서 끈질긴 저항을 펼쳐나갈 수 있으면 된다.
‘절망의 민주주의’를 대체할 '직접민주주의'는 아직...‘시민권리선언’과 유사한 문제의식은 백승욱 교수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백승욱 교수는 “헌정적 위기의 요소들과 삶의 현장에서의 투쟁을 결합하는 방법”을 고민하되 적어도 세 가지 요소를 담아내야 한다며 “법이데올로기를 의문시하는 효과를 가져야 한다는 점, ‘노동자 시민’이라는 계기를 활성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 사상적 자기검열의 벽을 허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 등을 짚었다.
백승욱 교수는 이 세 가지 요소와 결합하는 가운데 “하나의 구호가 이 모든 효과들을 한꺼번에 담아낼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고 서로 다른 운동들이 결합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나는 이런 세상에 살고 싶다’ 선언자대회> 같은 운동이 아래로부터 조직되어 전국적 파장력을 갖게 되고, 그것이 ‘민중의 권리선언’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삶의 공간에서의 변혁을 위한 노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조건들이 없이는 곤란함을 겪을 것이며, 그럼에도 이런 삶의 공간들 속에서의 변혁을 위한 시도가 없다면 대중들을 정치의 주체로 만들려는 인민주권의 시도의 내용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백승욱 교수는 “어느 누가 집권하던 후퇴시킬 수 없는 대중들의 민주주의의 최저선을 확보하는 것, 그로부터 더 많은 민주주의를 작동시켜 가는 것”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렇다면 박래군 활동가의 고민이 멈춰 선 지점은 어딜까.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7.8월호에서 박래군 활동가는 “인권운동진영이 더 이상 담론에서 밀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변화의 열망을 권리선언이든 권리헌장이든 간에 담아내는 과정을 밟아야 하지 않을까요? 거리에서 경찰의 폭력을 감시하는 활동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직접민주주의, 주권자에 의한 직접 정치의 모델을 만드는 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촛불선언’을 만들고 주권자의 직접 정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아직 이 실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박래군 인권활동가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점이다. 직접 정치의 모델, 그것은 아직 추상이다. 시민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거리의정치가 열리는 것만으로 직접민주주의나 직접 정치가 환원될 수 없는 까닭이다. 때문에 촛불의 주체들은 직접민주주의의 구체적인 뭔가를 갈망하지만, 제도 권력과 대의 민주주의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급진적 인식과 실천이 조우하는 현실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가령 ‘민주주의는 장벽을 넘는다’는 실천은 곧 ‘장벽을 넘은 다음의 민주주의’의 질문 앞에 머뭇하게 된다. 거리의정치 내부의 장벽이라 할 비폭력 논란을 넘고 신자유주의 권력의 상징이라 할 명박산성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절망의 민주주의’를 대체할 ‘직접민주주의’의 실체가 확인된 건 아니다. 단정하자면 ‘거리의정치’에서 시민 참여의 직접성이 제도 권력과 대의 민주주의 안에서의 직접성과 연결되어 있지 않는데, 또 연결되지 않는 데 연유한다.
정당정치와 거리의정치에 대한 당연하고 한가한 조합 6월 10일을 경과하며 ‘촛불 이후’ 대안에 대한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정당정치와 거리의정치를 주제로 하는 의견이 봇물이 터지듯 하였다. 정당정치의 한계이므로 정당정치를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거나, 정당정치와 거리의 정치가 병행 발전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예상치 못한 대중행동(거리의정치)을 목도하면서, 과거 거리의정치가 어떻게 정당정치로, 또는 제도 권력 구조로 수렴되었는가를 비교하는 가운데 전망 논쟁이 펼쳐졌다.
가령 이남주 교수는 정당정치의 반성과 거리의정치의 ‘정당’화를 두고 선순환관계를 발전시킬 필요를 제기했다. 이남주 교수는 “거리의정치가 정치발전에 대한 긍정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이를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력구도 내로 흡수하기 보다는 제도정치, 정당정치와 병행하면서 정치와 민주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원천으로의 기능에 주목할 필요”를 말하고 “거리의정치가 갖는 해방적 기능을 더욱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정치행위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거리의정치를 생활정치로 설명하는 경우는 많으나 현재의 거리의정치가 구체적인 생활공간과의 결합 정도는 매우 낮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이남주 교수는 “현재 거리의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단위들 사이의 의제와 주체의 특성에 맞는 수평적 교류들의 활성화가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맥락이면 ‘불매운동’을 계기로 한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의 활약이나 소비자주권운동에 주목해볼 수도 있겠다. 언소주는 언론NGO 비영리단체(법인)화를 추진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강남의 학부모들이 지역에서 촛불을 밝히고 교육 문제를 토론하며 네트워크를 한다거나, 과천의 주민들이 광우병 쇠고기 반대 프랭카드 걸기 운동을 하며 지역 주민의 생활과 연결하는 활동 등 촛불의 효과는 분명 작지 않다. 하지만 촛불시위에서 분출된 요구를 5대 의제로 압축해서 본다면, 각 의제에 대한 대안적인 논의와 실천을 전개해온 ‘수평적 교류’ 즉, 의제별 연대활동은 촛불 이전부터 존재했고, 촛불 과정에서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설득력을 갖는 ‘활성화’ 프로젝트가 제시된다면 모를 일이나, 결합해야 한다는 당위 정도로는 이후 실천 동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소환제, 직접민주주의 희구 과잉의 산물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하자며 제기된 하나의 방안으로 ‘소환제’가 주목된다. 2004년 총선 당시 ‘더 많은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운동 진영 내부 논쟁이 벌어진 바 있었고, 주민소환제가 이미 법률적으로 도입되어 있지만 이번 촛불 국면에서 적극적인 대안으로 거론되지는 않는 분위기다. 다만 우석훈 교수가 '주민소환제를 국민소환제로, 주민투표를 국민투표로 강화하자'는 주장을 펴고, 일부 블로거와 네티즌들이 온라인 토론을 펼치면서 이목이 쏠렸다.
우석훈 교수는 오세훈 서울시장을 축으로 서울시 한나라당 구청장과 광역의원을 하나의 명부로 해서 소환 서명을 받자고 제안했다. 촛불 망언을 한 김문수를 축으로 경기지역의 한나라당 시장들과 경기 광역의원도 하나의 축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기구로는 부안 주민투표를 할 때 했던 기구와 비슷한 형태로 각 지역별 주민카페 같은 것이 결합되도록 하고... 우석훈 교수는 “이를 발의하는 것만으로도 한나라당의 힘 절반을 무너뜨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미 도입되어 있는 주민소환제와 주민투표를 국민소환제와 국민투표로 강화해서 국회와 대통령도 소환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 골자였다. 6.10을 앞두고 제기한 이 글에서 우석훈 교수는 “6.10 기념제는 이 사건이 워낙 시청에서 광화문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니까 전또깡을 내렸던 사건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시청이 맞을 것 같고, 그 다음에는 분산되어서 각 구청장이 있는 구청과 한나라당 당사로, 자신이 사는 동네로 확산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고 제언하기도 했다.
이 시나리오 대로라면 최소한 최근에 서울시의회 의원들의 최악의 뇌물 사건이 터진 데 대해 즉각 소환 운동이 펼쳐지고 있어야 한다. 오세훈 시장과 한나라당 전체에 대한 정치적이고 상징적인 소환보다 범죄가 뚜렷한 서울시의회 의원의 즉각 소환은 명분과 정당성 모두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이 주민소환 의지를 다소 정치적으로 선언한 것 외에 이렇다할 가시적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춧불집회에 나선 시민들이나 추진 주체 공히 ‘소환제’가 많은 비용을 들이고도 과정과 결론을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부담을 갖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다음카페 등에서 국민소환제 추진을 위한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옥선 대외협력팀장은 “시장은 서울시민의 10%가, 시의원은 20%가 발의해야 하므로, 쉽지 않은 일이나 법적 절차를 밟아가며 차근차근 준비중”이라고 말했다. 법적 요건을 갖추기 위한 준비와 국민소환제를 추진이 덩치가 큰 일인만큼 실제로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옥선 팀장은 “올해 안에는 발의하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덧붙였다. 꼭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누구나 힘을 실을 만한 일이다.
그런데 주민소환제든 국민소환제든 소환제가 주민(국민)이 참여하는 직접행동,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갖고 있지만,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내용은 아니다. 국민소환제가 5년단임 직선 대통령제라는 87년헌정체제의 권력제도의 일부를 보완하는 의미를 갖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 형식에 누가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그러니까 폄하할 일은 아니지만 국민소환제가 곧 직접민주주의인 것처럼 인지되는 것도 위험 요소가 있다는 이야기다.
직접민주주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일전에 젊은 블로거들과 좌담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는데, 이들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과대한 기대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토론을 펼쳐보였다.
한윤형 : 논점을 바꿀 필요가 있는데, 지지율이 떨어지면 뭔가 바뀌어야 정상인데 선거도 없고 할 게 없다.
김현진 : 교육감 선거!
한윤형 : 물가상승률 7%, 경제성장률 4%, 지지율 7%, 그래서 747이라고도 한다.
노정태 : 7.4% 지지율을 7월 안에 달성했다는 해석도 있다.
한윤형 : 이쯤 되면 방도가 있어야 하는데 청와대만 막겠다, 나머지는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김현진 : 세종로 니네 가져 이런 거지.
한윤형 : 그렇다고 혁명을 할 정국도 아니니 사람들한테 뭔가 요구하기도 그렇다. 제도적으로 어떻게 할 방법은 없고, 그래서 직접민주주의 이야기하는데, 근데 직접민주주의라는 말이 좋은 말인지 모르겠다.
김현진 :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한윤형 : 굉장히 아련한
노정태 : 꿈 속에 있는
한윤형 : 평생의 이상형 같은. 누군지 모르겠고, 걔가 쌍꺼풀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아련한. 대의민주주의가 안 굴러간다고 이야기하는 건 맞는데 어떻게 보완할까를 이야기해야.
완군 : 직접민주주의로 갈 거냐, 국민소환제냐, 대의민주주의냐 이야기하지만 이 에너지가 과연 형질 전환되는 에너지일까.
좌담에 참석한 블로거들은 최소한 촛불시위 현장에서 제기되는 ‘직접민주주의’의 거품을 걷어내는 공감대를 보여준다. 직접민주주의의 구호만 들고 촛불집회에 참석하느니 차라리 대중들이 ‘놀다 가도록’ 해야 한다는 맥락의 ‘습격과 놀이’를 언급하기도 했다. 추상의 직접민주주의 논란 대신 시청에서 비정규직 유인물 나눠주기 등 당장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대체하고 자치할 대안이 없는 민주주의는 무엇? 6월 말 경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해야 하고,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의제를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게 될 것이다. 국민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문제 제기해봐야 한다. 정치권력을 어떻게 선출해야 하는가, 정치권력을 어떻게 재편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짚은 바 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은 무력하고 신뢰받지도 못한다는 진단을 덧붙였다. 노회찬 대표는 이명박 정권 퇴진 슬로건에 대해서도 “‘정권 퇴진’이라는 표현을 구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으로 가져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다거나, 대안권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현 상황을 이끌고 갈 정치적 응집력이 없다는 점이 문제”라며 회의적이면서도 동시에 비교적 정확한 의견을 피력했다.
이명박 정부가 10% 안팎의 지지율 속에 산성을 쌓고 청와대에서 농성(?)을 하는 모양을 하면서도 ‘퇴진’당하지 않을 수 있는 건 5년 단임 권력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데 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잃어버린 10년의 찬탈자들은 행정권력과 의회권력 장악의 위력에 기대어 촛불 진화의 갖가지 수단을 펼쳐가는 것이다. 광우병 협상에 이은 방송통신심의위의 시사프로그램 '공정성' 심의, YTN 낙하산, KBS 장악, 검찰의 MBC 죽이기 등 언뜻 이해하기 힘든, 비상식적이고 황당하기까지 한 언론사유화 공작이 시사하는 바도 여기에 있다.
대체하고 자치할 대안이 없는 한 ‘민주주의’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얼마나 반동적일 수 있는 지는 현실에서 쉽게 확인된다. 87년헌정체제 안에 녹아있는 민주주의 지배 주체가 바뀌지 않는 한, 87년헌정체제를 바꿔낼 대안 정치가 출현하지 않는 한 ‘거리의정치’ 그 직접민주주의의 한계도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서울시교육감 선거가 절묘한 시점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번 선거 결과가 곧 촛불에서 만들어진 직접민주주의의 열망과 실체가 평가되는 바로미터라고 한다면 과연 오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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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임권력 견제장치 필요” “‘촛불 수용’ 대안세력 절실” (한겨레, 조혜정 송경화 기자, 2008-07-30 오전 12:15:52)
한겨레와 함께하는 시민포럼 ⑤ 촛불과 새로운 민주주의
‘촛불, 세상을 바꾸다-촛불의 힘과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색’을 주제로 열린 <한겨레>와 함께하는 5차 시민포럼에서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론’을 둘러싼 각종 진단과 해법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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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촛불,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 (한겨레, 송경화 기자, 2008-07-29 오후 08:39:32)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 “민영화 등 공공성 위협…대안은 분배”
“광우병이라는 공포는 어느덧 시장만능의 세계가 우리들의, 특히 아이들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해주었다. 시장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연결돼 있는가라는 어려운 문제에 도달한 것이다.”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29일 <한겨레> 5차 시민포럼에서 촛불시위의 의미를 이렇게 짚었다. 5월 초부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촛불집회에 나갔다는 정 교수는 ‘촛불과 이명박정부의 경제정책’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5월 2일 이래, 끈질기게 타오른 촛불은 시장만능주의의 위험에 대한 시민의 반응”이라고 평가했다. 촛불집회는 이명박정부 경제정책에 저항하는 시발점이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정 교수는 생명 문제에서 대운하 등 환경문제, 교육 시장화에 대한 문제 등으로 확장된 촛불시위의 의제를 관통하는 열쇳말로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꼽았다. 그는 “지난 10년간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졌는데, 이명박정부에서는 그걸 넘어서 사회 공공성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시민들이 느끼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시민들에게 위험을 느끼게 한 경제정책기조로 △전국의 투기장화와 수출지상주의 △민영화와 규제완화 △고삐 풀린 재벌규제 등을 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민영화 등을 통해 사회 공공성이 무너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지던 서비스가 없어지고, 시골로 가는 전기·가스 서비스가 없어지는 등 보통사람들이 당연히 누렸던 것들을 누릴 수 없게 될 것”이라며 “시장만능주의의 문제는, 쇠고기 때문에 아이들이 당장 위험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라고 경고했다.
지금은 현 정부가 촛불시위 때문에 주춤하고 있지만 곧 시장만능주의를 교과서대로 실행하면서 계속 밀고 나갈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정 교수는 소득세, 재산세 등의 ‘분배’를 제시하며, 진보 진영이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확실한 대안을 내놓을 것을 주문했다. 그는 “촛불의 흐름이 석 달에 걸쳐 끝없이 이어지는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이제 진보가 말을 할 때”라고 발제를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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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이후’ 거리 정치? 제도 정치? (한겨레, 안수찬 기자, 2008-07-30 오후 06:23:16)
민주화기념사업회 토론회
새 정치주체 탐색도 활발
지난 25일 오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소장 정해구)가 그 논쟁의 자리를 열었다. 서울 중구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회의실에 열린 토론회에서 정상호 한양대 교수는 최근 논쟁의 지형을 세 부류로 구분했다. 우선 지혜로운 대중의 집단지성에 주목하는 ‘직접 민주주의 강화론자’가 있다. 이들이 보기에 촛불집회는 위축된 직접 민주주의를 새롭게 발전시킬 계기다. 반면 정당·의회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하는 ‘진보적 제도주의자’도 있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대표적인데, 불안정한 광장의 정치를 정당정치 발전의 에너지로 제도화할 것을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전통적 보수주의자’는 집회 자체를 디지털 포퓰리즘에 의한 헌정 질서 위반이라고 비판한다.
정 교수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이미 ‘운동 사회’의 단계로 진입했다. 다양한 사회운동이 늘 일어나고 그것이 일상적 정치의 한 부분이 됐으므로, ‘정당은 제도 정치의 영역이고 운동은 거리 정치의 영역’이라고 기계적으로 구분짓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본다. 의회·정당과 마찬가지로 사회운동 역시 일상적 정치의 하나가 됐다면, 관건은 이를 수렴하는 경로의 개발이다. 정 교수는 "시민의 이해와 공적 이익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당과 시민사회운동의 연계를 강화”하고, “국민투표·국민소환·국민발안 등 중앙정부와 국회에서 작동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제도정치의 무능’에 강조점을 뒀다. 그는 “한나라당이 당·정·청 동맹을 이뤄 시민사회와 극한적으로 대결하고, 야당은 원내에서 이를 견제하지도 원외에서 시민사회를 이끌지도 못하고 있다”며 “불구적 제도정치로 인해 시민들의 저항행동이 일어났는데, ‘거리 정치’를 자제하고 ‘제도 정치’에 맡기라는 것은 문제의 인과관계를 전도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존 시민사회 단체의 한계도 언급했다. “민주 정부 시기 대규모화·전문화·제도화된 시민사회 단체에 대해 시민들이 ‘엘리트 집단’ 또는 ‘정치권력의 동맹자’로 오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시민들이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결정권의 일부를 국가권력과 나눠 갖길 원하게 됐고, 이것이 헌법 이념을 구현하려는 ‘헌정 애국주의’라는 새로운 시민 정체성을 형성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다수결 민주주의·선거 민주주의를 통해서는 앞으로도 ‘통치 불가능’의 문제가 계속 발생할 것”이라며 공공사안에 대해 이익집단·전문가·시민 등이 참가하여 갈등을 조정하는 ‘다차원적 협치(거버넌스)’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새로운 주체’에 대한 주목도 이어졌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엄숙했던 진보로부터 발랄한 ‘힙합 진보’로 경영권 승계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고,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촛불 시위에서 탈권력적 상상력이 발휘되긴 했지만, 권력 감각에 대한 계몽된 진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더 발랄하게 운동하되, 더 면밀하게 권력을 지향하는 새로운 정치 주체가 절실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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