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민주주의, 국가론

[정부수립 60주년]1부 현대사를 떠받친 민초 그들에게 국가는 뭔가 / 2부 국가 정체성을 묻는다 (경향신문)

새벽길 2008. 8. 4. 11:11
아래에 담은 정부수립 60주년 특집기획은 역시 경향신문다운 특집기사다.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의 준동에 맞서 이런 대응이 필요했다.
 
실린 글을 보면 예전에 샘이 깊은 물에서 발간했던 민중사 열전인가가 생각난다. 바로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이들이다. 이런 분들을 주위에서 보지 못하고 산다면 스스로 민중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좋다. 링크에 걸린 원문에는 더욱 자세한 글과 사진이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앞으로 관련기사를 추가로 링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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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60주년 특집]현대사를 떠받친 민초 그들에게 국가는 뭔가 (경향, 특별취재팀 | 손제민·선근형·이로사기자, 2008년 08월 03일 18:55:23)
중동 건설노동자·여공 등을 통해 본 60년
군림하는 ‘국가 시대’서 ‘시민주권 시대’로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아 등장한 이명박 정부에서 ‘대한민국 선진화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사업들이 여기저기서 목격되고 있다. 민관 할 것 없이 추진하는 ‘건국 60년 기념사업’이 그것이다. 이 사업에서 나오는 여러 주장 가운데 단연 우렁찬 것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세우자는 것과 8·15를 ‘건국절’로 제정하자는 목소리다. 뉴라이트가 주도해온 이 주장의 논리 구조는 이렇다. ‘미국의 비호 아래 반공을 기치로 내건 이승만 건국 세력이 있었기에 박정희의 산업화와 고도성장이 가능했고, 산업화 세력의 독재가 있었기에 세계가 칭송하는 민주화도 이룰 수 있었다. 이제는 민주화가 됐으니 선진화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갈등과 대결, 전쟁과 학살의 격동을 거쳐간 현대사 60년을 ‘승리의 역사’로 기술하려는 이들은 역사를 승자의 전리품, 승자의 사유물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다. 승리한 자들의 역사에는 현대사 60년의 수레바퀴를 끌고 그 수레바퀴에 치인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피와 땀의 기록이 없다. 성공하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고, 배제된 것은 잊어버리는 지배 엘리트 중심의 역사관이자 소외된 자를 역사에서 지우려는 위험한 정치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경향신문은 이 시점에서 국가가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국가는 과연 어떻게 세워졌으며, 누가 이끌어 왔는가. 국가는 시민의 삶과 행복을 보호했는가, 뺏었는가. 시민은 국가의 종속물인가, 주인인가. 그래서 경향신문은 오늘부터 7회에 걸쳐 게재할 ‘정부 수립 60주년 특집-국가를 묻는다’를 평범한 사람들의 얘기로 시작한다. ‘현대사 60년의 주인공들’로 소개될 6명의 사연은 특별하지 않다. 길 가다 마주친 노년의 한국인을 아무나 붙잡고 ‘당신이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십시오’라고 청하면 털어놓을 법한 그런 얘기다.
 
중동의 열사와 국내 공사현장을 누빈 남성 노동자의 고단한 한평생. 젊은 시절 식모와 행상을 전전하며 아들,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웠지만 외로운 말년을 보내고 있는 여성의 삶. 농지개혁·새마을운동 등 국가가 시키는 대로 평생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왔지만 이제는 선진화의 애물단지로 치부되는 농민의 삶. 집안을 먹여살리고 남동생 학비를 대기 위해 시골에서 도시로 일하러 간 우리의 누나 혹은 딸이었던 여공. 산업화의 일등공신인 ‘산업역군’ ‘산업전사’로 불렸지만, 정치 사회적으로 배제당했던 ‘공돌이’ ‘공순이’의 삶 등이 그들 자신의 생생한 육성으로 그려질 것이다.
 
국가는 시민 위에 군림하는 거대한 억압의 체계인가. 지난 60년 역사는 국가가 시민에게 강요해온 국가 중심의 시대였다. 국가는 시민에게 충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민이 자기를 위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배 엘리트가 일방적으로 설정한 국가 정체성을 새로 정의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맞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고 집권한 이명박 정권은 검찰·경찰·방송통제 등으로 떠나간 민심을 붙잡으려는 국가주의적 발상에 빠져들고 있다.
 
경향신문 특집은 국가정체성이 더 이상 위로부터 정해지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래로부터 만들어내는 다양한 목소리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국가를 그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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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60주년]2부 - 국가 정체성을 묻는다:(4)국가로부터의 탈퇴 - 변화하는 국가 정체성 (경향, 선근형기자, 2008년 08월 27일 18:03:16)
‘국가의 부속물’서 80년대 이후 ‘내가 곧 국가’ 자각
 
교과서를 포함한 발간되는 모든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 있던 ‘우리의 맹세’를 기계적으로 암기해야 했고, ‘국민교육헌장’을 다 외우지 못하면 선생님의 회초리를 맞아야 했다. 사회·윤리·역사 교과서에 적힌 대로 ‘국가’에 대해 알고 있지 않으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연스레 국가가 주입하는 국가관이 머릿속에 자리잡으며 ‘국가주의’의 틀 안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에 대한 도전과 질문은 ‘좌경용공’과 동일시됐으며 국가의 우월성에 의문을 품는 것도 금기사항이었다. 국민은 국가의 부속물로서의 의미만 가질 수 있었고, 국가라는 초월적 실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 이익 앞에서 개인은 실종됐다. 국가 정체성은 위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지 아래로부터 생성되는 게 아니었다. 서구 민주국가에서 시민사회 영역의 확산과 함께 국가는 자유로운 개인의 자발적 결사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60년 역사의 첫 단추를 끼운 이승만 정부 때부터 대한민국의 ‘국가주의’는 거부할 틈도 없이 시작됐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은 냉전 이데올로기를 국시(國是)로 삼고 ‘반공·멸공만이 살 길’이라는 이념을 전파했다. ‘빨갱이=비(非)단군혈통=비(非)국민’이라는 논리에 기초한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특히 한국전쟁의 경험과 그 이후의 준전시적 상황은 반공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의 초월적 정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배경으로 작용했고 북한 콤플렉스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시기 경제성장은 시장의 자율성은 배제된 채 철저한 국가 주도로 이뤄졌다. 박정희 정권에게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과 산업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업이었다. 우선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의 수립으로 인해 박정희는 민주주주의 원칙을 파기했기 때문에 경제성장이라는 업적을 통해 정당성의 근거를 찾지 않으면 안 됐다. 또 하나는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남북한 간 경제 발전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이다.
 
국가 주도의 정책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의 의식구조도 그들의 입맛대로 바꿔나가려는 작업을 병행했다. 이 시기에 시작되거나 공고화된 국민의례, 국기에 대한 맹세, 교련 교육, 주민등록제, 국가보안법, 국민교육헌장, 대한뉴스 등은 국가주의에 의해 동원된 국민을 재생산하는 데 효율적인 장치였다.
 
1980년대에 접어들자 1948년 정부수립 이후 30년 이상 지속돼 온 절대적 국가 권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분노가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국가 권력에 염증을 느낀 민중이 들풀같이 들고 일어났다. 열흘간의 짧은 광주항쟁의 기억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시간이 흘러도 결코 해소되기 어려운 ‘집단적 기억’을 각인시켜주었다. 이 기억은 신군부와 5·6공 정권에 대한 분노로 발전돼 87년 6월 항쟁에도 영향을 끼쳐 87년 국면에서 국가권력이 군대 동원이라는 조치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했다.
 
87년 체제는 대한민국 사회를 개발독재 시기에서 본격적인 민주화의 시기로 전환시킨 분기점 역할을 하며 민주개혁을 추동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상징된다. 특히 87년 체제가 설정해 놓은 ‘민주주의의 마지노선’은 국가권력이 시민들의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갈 경우 광범위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국가의 정체성도 단지 국가권력의 강요가 아니라 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2002년 월드컵 때 거리를 뒤엎은 응원단의 모습에서 확인됐다. 시민들이 즐거움의 에너지를 분출한 것이다. 월드컵으로 고양된 자존심은 이후 효순·미선이 추모 촛불집회로 연결됐다. 촛불집회의 성과는 미약했지만 여전히 ‘반미=친북좌파’라는 등식이 유효한 한국사회에서 ‘미국’이라는 금기의 권위에 국민적 도전이 감행됐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2008년 대대적으로 벌어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서 성가처럼 찬양된 노래는 ‘헌법 제1조’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부르며 시민들은 “내 안에 주권 있다”는 주문을 했다. 그 자각은 이 나라의 주인임을 인식하는 동시에, 당당한 주체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의 삶에 관한 결정을 국가의 자의적 권력에 맡기지 않겠다는 의미다. 2008년 8월. “내가 곧 국가이고 주인”이라고 자각하는 시민들과 국가주의로 되돌아가려는 이명박 정부의 맞대결이 우리를 또 어디로 이끌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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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60주년]‘2008촛불’엔 국익 보다 ‘개인 권리’가 앞섰다 (경향, 선근형기자, 2008년 08월 27일 18:04:56)
국가정체성의 새로운 움직임
 
정부수립 60년을 맞는 2008년의 한국에서는 위에서 강요돼 온 국가 정체성이 아래로부터 변화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2008 촛불’은 그런 변화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촛불을 통해 표출된 시민들의 의식이 전통적 국가에 대한 도전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뛰어든 다양한 계층들이 ‘나’를 위해 정치를 자기 삶의 문제로 끌어들였다. 촛불의 중심에는 애국심 대신 시민의 권리가 있었고, 국익 대신 개인의 이익이 들어앉았다.
 
시민들은 정부가 식량·검역주권을 포기하는 협정을 했고 그 건이 바로 나의 생명, 내 가족의 생명을 건드리는 일임을 자각했다. 그 순간 시민들의 비판의식을 무력하게 짓누르던 국익이란 이데올로기는 순식간에 길바닥에 내던져졌다. 개인의 건강과 권리가 국익을 압도했다. 87년 6월 항쟁이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대학생들의 민주주의 갈구였다면, 올해의 촛불집회는 민주주의가 체질화된 시민들이 자신의 삶과 이익을 파괴하려는 국가에 대항한 사건이다. 박영균 진보평론 편집위원은 “국가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유주의적 가치가 확산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2008 촛불’의 또 다른 특징은 시민들이 기존의 조직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여중·고생들의 집회로 시작된 이 저항은 어느 누구의 지도도 따르지 않았다. “고통받는 내가 직접 나가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라고 판단해 촛불을 든 것이다. 윤해동 교수(역사학)는 “우리 국민들은 여전히 국가를 지배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국가 정체성이 시민들의 자발성에 의해 구축돼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전통적 사고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승우 한양대 연구교수(정치학)는 “국가의 잘못에 대해 반응하고 저항만 할 게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새로운 의제를 설정하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수립에도 참여하는 등의 더욱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승창 시민사회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시민들의 다원화된 가치지향들이 한 가지 가치로 묶일 수는 없다”면서 “시민들과의 연대 또는 네트워크 형성에 주력해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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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60주년]“적극적인 국가는 동시에 폭력적일 수밖에” (경향, 2008년 08월 27일 18:06:51, 박근용 | 참여연대 사법감시팀장)
 
국가가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적극적이고 능동적 역할을 하는 순간 국가는 폭력성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국가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그들 스스로 형성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국가정체성을 해치는 구성원들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노력을 하지 않거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집단적 정체성과 안정감을 적극적으로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방어적 개념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다.
 
그러나 국가의 지배방식에 한계가 드러나거나 치명적 실수와 오류가 발생했을 경우 위로부터 부여된 국가정체성은 아래로부터 그 정당성을 의심받게 되며 기존의 정체성은 아래로부터의 문제제기와 담론 형성 등에 의해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존 지배계급이 강조하는 국가정체성은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거나 일시적으로나마 변화하게 된다고 보며 이것이 진보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는 기존 국가정체성의 문제점과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실험, 모색, 담론 형성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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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60주년]“국가는 다른 단체와 공존하는 非절대적 영역” (경향, 2008년 08월 27일 18:07:29, 김정명신 | 함께하는 교육시민모임 공동대표)
 
국가는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인간이 속한 여러 단체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주의가 강하다 보니 ‘국가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 것이 우리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국가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움직임은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촛불시위는 국가를 넘어서는 정체성 형성에 좋은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논의를 확산시켜 국민들이 생활현장에서도 촛불시위 하듯이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고, 집단적 의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노력들이 국가를 초월하는 하나의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국가의 영역으로 간주됐던 분야를 국가 영역 밖, 예컨대 지역공동체나 시민·사회단체 등에 위임해 국가와 서로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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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60주년]“국가보다 중요한건 내가 활기차게 사는 것” (경향, 2008년 08월 27일 18:08:09, 김디온 | 여성운동단체 ‘피자매연대’ 활동가)
 
촛불집회에서 아래로부터 구성되는 어떤 흐름은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롭게 구성되는 ‘국가정체성’은 없다. 뭔가 새로운 것을 구성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정체성이다. 국가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하고 국가를 변형하려는 기획들인 것이다. 나에겐 가족도, 국가도 있지만 사실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중요한 건 내가 활기차게 살아감으로써 내 친구들과 주변 공동체들이 건강해지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그래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정체성들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 전통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필요한 전통을 구축하라는 이야기다.
 
개인이 국가를 실감하는 것은 국가가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폭력을 행사한 이후 보상할 때, 공공복지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행동을 통제할 때가 아니던가. 국가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수많은 네트워크들 중 하나일 뿐이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돼 발 디딜 곳이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언제나 국가로 환원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공동체와 네트워크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곳에 이미 국가는 안중에 없다. 다만 국가가 이런 네트워크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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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60주년]“국가는 내가 속한 공동체중 하나일 뿐이다” (경향, 손제민기자, 2008년 08월 27일 18:09:52) 
현실과 너무나 다른 ‘헌법 속의 대한민국’ 
개헌때마다 서로 다른 국가정체성 ‘넣고, 빼기’ 투쟁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기구의 부정을 그 기본정신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소 황당하게 들리는 이 주장은 지난 18일 참여사회연구소(소장 이병천)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토론회에서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가 제기한 것이다. 김 교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하는 현행 헌법의 전문을 근거로 들었다. 3·1운동과 4·19혁명은 일제 식민지 정부와 이승만 독재라는 당시 현존했던 국가기구의 불의에 주권자들이 항거한 것이 그 본질이다.
 
최근 국회에서 초당파적으로 개헌 논의가 시작된 가운데 국가정체성 투쟁 마당으로서의 헌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국내에서는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인 119조 2항을 두고 일본의 평화 조항과 같은 구도가 연출될 가능성이 높다. 전경련을 비롯한 보수진영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조항의 폐지를 주장해왔다. 민경국 강원대 교수(경제학)와 전경련 한국경제연구원장을 지낸 좌승희 박사가 최근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경향신문의 최근 설문조사에서 드러났듯 국민여론은 이 조항을 ‘유지해야 한다’(73%)는 쪽이 ‘폐지해야 한다’(22%)는 쪽보다 훨씬 많은 상황이지만 일단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기업 프렌들리’를 외치는 정부와 거대여당의 밀어붙이기 속에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윤해동 성균관대 연구교수(한국사)는 “사회적 시장경제 관련 조항은 우리 헌법이 상당히 잘 규정하고 있는 반면 현실은 전혀 그런 규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만약 지금과 같은 힘 관계에서 개헌을 한다면 현실에 그 조항을 맞추자는 식으로 돼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시장중심주의로 바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도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전경련과 삼성을 중심으로 이 조항 폐지가 본격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4년 연임제냐, 내각제냐에 정신이 팔려 얼떨결에 개헌 논의에 올라타다 보면 결국 헌법 119조 2항 폐지운동의 길라잡이가 되고 말 것”이라며 “그 조항이 없어지면 이미 있는 많은 법령들은 물론이고 앞으로 미국의 뉴딜정책 때처럼 국민복지를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입법을 할 경우, 헌법재판소가 잇달아 위헌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경계했다.
 
국가정체성을 둘러싼 헌법 논쟁은 48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부 수립 과정에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이 철저히 배제됐지만 제헌헌법의 조문에는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사기업체의 이익분배 균점권’ 등 진보진영의 흔적이 남았다. 그러나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미래상은 당시의 힘 관계와 헌법 규정이 괴리를 보이면서 이러한 규정이 장식물처럼 여겨졌고, 54년, 62년 개헌을 거치며 그마저도 헌법에서 사라졌다. 87년 개헌 때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그걸 구현할 여건이 되지 않아 이 역시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한 영토조항부터, 권위주의 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실현돼본 적이 없는 민주공화국 조항까지 한국사회에서 헌법 그대로 작동했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면서 “헌법은 추상적이고 최소주의적으로 남아 있어야 정치가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며 개헌 논의에 반대했다. “헌법이 명료해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끝난다”는 것이다.
 
헌법은 과거나 지금이나 국가정체성 투쟁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지만, 국가정체성을 헌법이라는 법 조항에서 찾는 데는 한계가 있다. 헌법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위험한 국가주의 “개인과 시민을 국가의 부속품으로 동원하기 때문이다” (권혁범|대전대 교수·정치학)
 
“혼자 드는 게 아니다. 4800만이 함께 드는 것이다.” 역도선수 장미란씨가 금메달을 딴 후에 방송된 어떤 광고에 나온 말이다. 애국심을 강조하는 수사이지만 한 편으로는 섬뜩하다. 한 개인의 영예를 나라 전체로 확대하는 이 논리에는 전체주의, 국가·국민주의가 깔려 있다. ‘국민영웅 박태환’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띤다. (하지만 그가 시상식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가슴에 손을 얹지 않고 꽃다발을 들고 있었던 것은 매우 신선한 모습이었다.) 국가들 간의 경쟁과 친선을 동시에 도모하는 것으로 알려진 올림픽은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를 통해 개인을 국가로 수렴하는 의식이 되어버렸다. 상업주의와 내통하면서 국가주의는 국민을 재생산하고 국민을 국가의 소유물로 고정시킨다. ‘국부’ ‘국모’ ‘국민교육헌장’ ‘국운’에서 시작하여 ‘국사’ ‘국어’ ‘국위 선양’ ‘국립’ ‘국민의례’ ‘국익’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조회’ 등은 여전히 한국에서 국가가 사회와 개인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조직임을 드러낸다. 민주적 토대가 약할수록 국가는 강하고 사회는 국가에 지배된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 개인주의와 자유의 확대로 국가주의는 약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 힘과 정당성은 한국사회를 압도하고 있다.
 
한국에서 국가주의는 왜 이리 강할까? 그것은 무엇보다 식민지 35년의 경험을 통해 ‘나라 잃은 설움’을 처절히 깨달았고 분단체제 속에서 적대적 안보의식이 강화되면서 안보의 주체로 강력한 국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안보 없이 국가 없고 국가 없이 국민 없다”는 구호는 이런 의미를 적확하게 담고 있다. (또한 자생적 부르주아가 취약해 산업화의 동력이 시민사회가 아니라 국가에서 나온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반공독재시대에도 민주화세력은 정부를 비판하고 바꾸려 했지 국가 자체를 의문시하지 못했다.
 
근대국가는 행정·입법·사법부, 경찰 및 군대(합법적 폭력의 독점), 그리고 공기업을 포괄하며 특정한 영토와 주민에 대해 지배력과 주권을 행사하는 조직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국가=나라=사회=국민=시민=대기업이라는 잘못된 등식이 자리잡고 있다. 재벌총수는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으며 양궁 선수들은 ‘국위 선양’을 한 자랑스러운 ‘국민’이 되고 만다. 국가가 구성원 개인의 행복과 안전을 위한 수단이며 국가와 시민의 관계는 ‘계약’적이라는 의식이 약하다. 국가는 초월적이고 신성하며 선험적이다.
 
이런 국가주의가 위험한 것은 무엇보다 사회의 개별적 구성원을 국가의 부속품 및 수단으로 동원하기 때문이다. ‘국가경쟁력’이라는 개념은 이미 개인과 시민을 집단의 구성요소로 대상화하는 적절한 예다. ‘국민학교’는 사라졌지만 ‘국민’은 건재하다. 그것은 개별적·집단적 정체성 위에 군림하는 국가적 정체성 및 귀속성을 암시한다. ‘국민’은 국가가 부과하는 동질적 정체성 및 의무를 정당화하면서 국가와 긴장관계를 갖는 사회의 시민의식, 독립적인 개인의식을 억압하고 약화한다. 개인들·집단들 간의 복잡하고 세심한 차이, 자유, 인권, 다양성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국가가 부과하는 규범과 표준은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동성애자, 청소년 및 노인, 비정규직 노동자를 타자화하며 배제시킨다. 동시에 타민족 및 타국가는 ‘우리’가 아닌 ‘남’이 된다. 유사시에 이들 타자는 차별과 제노사이드(학살)의 근거가 된다.
 
국민국가의 틀을 벗어나려는 운동은 여성주의자, 생태주의자, 장애인에게서 선구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에게는 성별, 환경, 장애 여부가 국민적 정체성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시장근본주의에 맞서 민족국가를 강화하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부의 계급적·성별적 모순을 은폐하고 기득권 세력의 헤게모니를 되레 강화할 위험이 있다. 민주적 선거만으로는 국가의 본질적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 중단기적으로 국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여성화, 녹색화, 민주화, 복지화는 가능하고 필요하다.
 
국가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권화와 협치(governance)를 발전시키고 다중적 정체성 및 이해관계를 인정하며 크고 작은 다양한 공동체들을 만들어내고 개인들의 차이와 밀실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태극기가 난무했던 촛불집회는 기존의 국민·국가적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려는 소집단 및 개인의 다양한 몸부림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