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를 거치고, 최장집 교수가 퇴임을 하면서 나온 최장집 교수의 일련의 발언들은 생각할 꺼리를 많이 만들어준다. 그의 주장은 한결같다. 좋은 정치, 좋은 정당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맑스주의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베버리안이라는 그의 고백은 정당을 중시하는 그의 입장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시간 여유가 나면 이전의 최장집 교수 관련글들을 정리해봐야겠다. 그러고 보면 그가 쓴 책이나 논문, 인터뷰기사를 많이 읽었던 듯 싶은데, 그 중에 받아들일 만한 것도 많이 있지만, 여전히 동의하기 힘든 내용들도 많다. 우선은 레디앙에 최장집 교수와 관련된 글이 올라온 김에 촛불집회와 관련된 경향신문의 시국대토론회 개회사 이후의 관련글들을 모아보았다.
------------------------------------------------------------ *최장집. 2008.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경향신문 주최 “촛불집회와 한국민주주의” 긴급 시국대토론회 개회사 (2008. 6.16)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최장집 (고려대 교수) 1.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민들의 대규모 촛불집회는 한국민주주의발전에 있어 21년 전 6월 민주항쟁에 비견될 만한 또 하나의 이정표적 사건이라 하겠다. 먼저 오늘의 대규모시위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보다 한국의 시민들의 의식은 광범하고도 깊숙이 민주적 가치와 규범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 민주화는 시민의식에 있어서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동시에 체제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대통령과 보수정부는 국가권력의 운영방식과 정책결정방식에 있어 과거 권위주의적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우리는 민주화이후 깊숙이 변화된 사회를 한편으로 하고, 보수적 리더십이 갖는 민주주의에 대한 협애한 이해와 구시대적 통치방식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자 사이에는 위태로울 만치 커다란 간극을 보게 된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를 국민을 통치할 전권을 위임받은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민주주의의 원리와 제도적 실천과는 크게 다르다. 대통령은 좁게는 자신을 통치자로 만들어준 지지자들을 넓게는 국민전체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통치자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대의제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가운데, 대표의 선출과 통치의 위임을 내용으로 하는 “대표”의 원리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수준은 높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현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대표의 역할이 책임을 수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이해의 정도가 얕다. 책임의 원리는 그가 통치자가 된 선거와 다음 선거사이, 즉 평상시에도 항상적으로 이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상시 통치의 방법과 정책결정에 대한 민주적과정의 실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정책내용에 대해서도 상시적으로 국민의 여론과 의사에 반응해야 함을 의미한다. 만약 책임을 수반하지 않는 통치행위, 권력행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군주나 독재자를 선출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누구로부터 견제 받지 않는 무책임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오늘의 촛불정국의 직접적 원인이라 하겠다. 또 그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학자들이 그들의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위임민주주의” (delegative democracy)와 유사한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의회를 우회하고, 민주주의의 제도적 과정을 뛰어넘으며, 투표자들의 의사와 요구를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대통령 명령에 의존해 통치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촛불집회 정국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한국에서의 대통령은 집권과 더불어 국익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스스로의 결정을 실제의 정책으로 만들고, 강력한 국가기구와 강력한 여론매체를 동원하여 이를 홍보하고 집행하는, 상명하달식의 일방주의적, 권위주의적 결정방식을 당연시 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정부와 집권여당은 민주화된 사회에서 이러한 방식의 정책결정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본 강연자는 오늘의 촛불집회는 한마디로 민주화이후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의 결과이고, 그러한 현상을 표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한 원인으로, 강력한 국가와 제도적으로 강력한 대통령이 허약한 입법부-허약한 정당 (역시 권력에 대해 자율성이 약한 허약한 사법부는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갖는 어떤 구조적 특성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정당-의회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집행부에 아무런 견제력을 갖지 못하고, 정책결정의 이니셔티브를 포함하여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즉 국가기구 내지는 정부구조 내에서 이른바 삼권분립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정부 밖에 존재하며 사회경제적 균열과 갈등으로부터 발생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사회경제적 이익과 가치, 요구와 의사들을 조직하고 대표하는, 이익집단을 포함하는 자율적 결사체들의 발전수준 역시 매우 허약하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이들 자율적 결사체 가운데서도 시민사회의 의사를 조직하여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정당의 역할은 민주주의 정치과정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조건이 정부 밖 시민사회가 강력한 국가를 관장하는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지는 시민다수의 의사 및 이익에 반하는 권위주의적 정책결정들에 대해 견제력을 행사하고, 대안적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정부 내에서 그리고 시민사회에서 견제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정책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못하는 조건은 사실상의 권위주의를 의미한다. 오늘의 촛불집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선출된 통치자가 스스로의 공적행위에 대해 시민에 대해 책임지도록 강제 내지는 압박하는 반대와 견제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촛불집회가 한국민주주의 발전에 확실하게 기여한 부분은 제도권정치와 정당이 무력화 되었을 때 시민사회의 의사를 결집하고 항의를 조직함으로써, 권위주의적 권력행사와 정책결정에 결정적 제약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과 대부분의 언론들은 대통령이 촛불집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대통령의 의사가 바뀌고 있는지 아닌지, 혹은 대통령의 심기가 어떤지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곤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마음의 향방이나 심기를 살피는 것은 민주주의의 작동의 문제를 구시대적이며, 권위주의적 문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을 민주주의 제도의 틀 속에 위치시켜, 독단적, 권위주의적인 정책결정과 권력행사를 제약하고 견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촛불집회는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무기력하고, 작동하지 않고, 그 중심적 메커니즘으로서의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그 자리를 대신한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이점에서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본 강연자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운동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성격으로부터 나온다. 무엇보다도 현대민주주의는 대의제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스스로 직접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여 그에게 통치를 위임함으로써, 대표로 하여금 통치토록 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그 통치가 주권자로서의 시민의 의사와 요구에 봉사하도록 하기위해서는 시민들의 정치참여는 최대한 광범해야 하고, 이들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이익과 요구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결사체들을 통해 최대한 광범하게 정책과정에 투입되어야한다. 민주주의는 제도 내에서 사회적 갈등이 처리되고, 문제가 타협되고 결정에 이를 수 있는 제도를 허용한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운동에 대한 필요는 그 만큼 적어진다 하겠다. 한국의 조건에서 운동이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과 그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① 운동은 광범한 대중들의 의사의 분출과 강렬한 에너지를 동원을 통해서, 강력한 권위주의적 권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 조직을 가능하게 한다. 반면은 그것은 찬반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해결에 필요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형성하거나,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여러 대안들을 조정하여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는 지난한 것이며, 따라서 조야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② 운동은 강력한 에너지의 동원을 통해 단일의 목표와 이슈를 다루고 성취하는 데는 유효한 반면에, 여러 이슈들이 다투는 과정에서 각 이슈들 간의 중요성의 우선순위를 위계적으로 배열하고, 이에 기초해 정책의 추구를 일상화하는 것이 어렵다. ③ 하나의 정책이슈를 운동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때, 쇠고기수입협상문제가 끝나면, 민영화, 교육 등, 이슈가 출현할 때마다 시민들은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고,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로 일관하게 된다. ④ 운동은 강렬한 열정이 장기간 유지되기 어렵고, 그 참여가 많은 열정과 비용을 수반하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계층적 범위를 한정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렵다. ⑤ 운동은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고 강화하는 동안, 하나의 시민사회가 다른 시민사회의 동원을 불러들이는, “시민사회 對 시민사회”의 상황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운동이 헤게모니를 불러들이게 될 때, 그것은 위험스러운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구한 미국의 정치학자 세리 베르만이 지적하듯이, 운동이 자율적결사체를 통해 사민사회를 활성화하는데 몰두하는 반면, 제도정치 내에서 정당을 강화하는데 무관심했던 결과, 반대편에서의 파시즘을 불러드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은 촛불집회가 시위 또는 운동을 통해 정치체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정치관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운동이 낭만주의적 정치관의 확산을 통해 반정치주의적 정치관 내지 정조를 강화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운동과 더불어 유발될 수 있는 정치관은 민주주의가 대의제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 또는 “대통령소환제”의 요구와 같은 현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코자하는 논리나 정조를 만들어낸다. 문제는 이런 방법이 민주주의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19세기말 서구에서 보통선거권이 확대되고 대중정당이 발전할 때, 정치이론가들은 투표권을 “종이돌” (paper stone)에 비유했다. 지난날에 혁명과 무력사용을 통해 사회적 갈등과 문제를 해결했던 방법이, 종이로 된 투표권의 행사로 대체되면서 평화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사회적 갈등을 처리하게 된 것을 압축한 표현이다. 오늘의 촛불집회는 민주화이후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는 평화적 제도로서의 종이돌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사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촛불집회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민주주의제도를 넘어서는 어떤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그 제도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3. 결국 문제의 핵심은 촛불집회에서 발현된 긍정적 힘과 요소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그 힘이 정당, 자율적 결사체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대표체계를 강화, 발전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이다. 앞에서 본 강연자는 촛불집회를 민주주의제도의 허약한 발전 내지는 실패의 결과로 보았다. 그것의 핵심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폭넓게 대표되지 못하고, 참여기반이 협애한 정치적 대표의 체제 즉 정당체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촛불집회는 촛불이 꺼지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참여의 기반을 확대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정치적 참여의 폭과 성격은 곧 한 사회 내 존재하는 사회경제적 이익갈등의 해결의 내용과 직결된다. 이는 한국사회의 최상층의 의사와 이익을 대변하는 현 이명박 정부의 인적구성이 한국사회에서 폭넓은 사회경제적요구와 공익성을 대표할 수 없는가를 아울러 설명한다. 이번 촛불집회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시민들이 민주화라는 큰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요한 전환이다. 민주화이후 한국의 정당들은 그것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그 이념적 호칭과는 별개로, 시민들의 실생활문제와 직결되고 그에 기초한 대안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갖지 못했다. 참여의 기반을 확대한다는 것은 그동안 참여로부터 소외된 사회세력의 대표성을 넓히고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여의 폭의 변화는 정책의 내용과 결과를 바꾸는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참여의 폭을 넓히고 이를 통해 제도의 변화를 가져왔어야 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앞선 6월항쟁이 남긴 유산은 그렇게 성공적인 것이라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는 오늘의 촛불집회가 참고해야할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촛불집회가 참여의 폭을 확대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21년전 6월항쟁이 남긴 긍정적 유산의 목록에 더해질 것이다.
----------------------------------------------------- “지금은 계속 운동이다” (레디앙, 2008년 06월 19일 (목) 07:33:31 이재영 기획위원) [최장집 비판] 진보정당이 거리에 남아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
16일 시국토론회에서 최장집 교수가 발표한 세 쪽 반짜리 글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촛불집회에 대한 진단 뿐 아니라, 1987년 이래의 민주주의를 평가하고 미래 한국 사회를 여는 데 귀중한 가르침이다. “이번 촛불집회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시민들이 민주화라는 큰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라는 최 교수의 진단은 지금까지 나온 학자들의 촛불 인식 중 가장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운동이 자율적 결사체를 통해 시민사회를 활성화하는 데 몰두하는 반면, 제도정치 내에서 정당을 강화하는 데 무관심했던 결과 …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는 최 교수의 주장은 한국 진보정치의 발전 과정에서 경험적으로 확인된 진실로서, 반정치적 역량 소진에 몰두해온 가두분자들과 조합주의자들이 경청해야 한다.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이익과 요구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 결사체들을 통해 최대한 광범하게 정책과정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촛불집회 이전이든 이후든 올바른 정치관일 것이다.
1. 촛불을 대의정치가 받아 안을 수 있는가? 최장집 교수는 “무엇보다도 현대민주주의는 대의제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며 ‘제도’에 대립되는 ‘운동’의 한계를 다섯 가지나 제기한다. 운동의 다섯 한계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나의 정책이슈를 운동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때, 쇠고기수입협상 문제가 끝나면, 민영화, 교육 등 이슈가 출현할 때마다 시민들은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고,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로 일관하게 된다.”
이슈 때마다 거리로 나오는 것은 참 괴로운 노릇이다. 하지만 민영화나 교육 이슈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을 방법도 없고, 나오라거나 나오지 말라거나 사람들은 거리로 나올 것이 너무도 뻔하다. 위 인용문의 핵심은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 부분으로 읽힌다.
그런데 촛불이 꺼지든 말든 이명박 정부의 위기는 계속될 것 같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의 안정화를 기하자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최장집 교수의 목소리는 운동의 제약으로써만 실천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최장집 교수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새삼스러운 ‘제도정치’ 강조는 어떻게 에두르든 “슬슬 정리되고 있는 거 아닌가? 이제 정치권이 받아 안도록 하자”는 메시지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진의가 무엇이든 그런 해석이나 수용이, 공적 장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커뮤니케이션의 상례다.
2. 진보정당이 촛불운동의 대안인가? 지금 제도정치를 강조하는 진보학자들은 대개 진보정당을 촛불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진보정당 강화론에는 ‘누가, 언제, 어떻게’와 같은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나는 아래 다섯 가지 이유로, 현 정국에서 운동에 반정립되는 진보정당을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 어떤 제도, 누구의 대의정치인가?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제도와 한나라당, 민주당의 대의정치임이 너무도 명약관화하고 전혀 불변임에도 그리로 가자고 제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게는 돌아갈 대의정치 같은 게 아예 없지 않은가? 지금 진보정치세력은 그들의 고향이었던 거리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국회가 아니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거리에 국민의 눈길이 모이고 있다. 이 상황에서 ‘대의정치’는 유리한 싸움터를 버리고 불리한 싸움터로 들어서는 어리석은 짓이다.
둘째, 결국 제도정치로 다시 수렴된다 할지라도 왜 하필 지금인가? 6월 10일 이후 촛불집회가 교착이나 하강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진보정당이 조직적 수습에 들어갈 만한 시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거리로 나서게 한 원인들, 거리운동의 동인이 의연히 남아 있으므로 언제 더 큰 불길로 치솟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제도정치에서의 일탈이 10년이나 20년마다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평론가들의 분석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후적 정리는 일주일이나 한 분기를 주기로 정세를 예측하고 개입해야 하는 실천가들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진보정치세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촛불집회와 같은 현상은 예측할 수 없는 부정기적 일탈이다. 지난 40여 일을 꿈도 꾸지 못했던, 우매한 진보정치세력에게는 늦게까지 남는 것이 가장 일찍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셋째, 촛불집회와 같은 대규모의 사회운동이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론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작더라도 만질 수 있는 구체화된 성취가 있어야 군중은 낙담하지 않는다. 이 측면에서 지금은 진보정치세력의 몇 되지 않는 장기인 용의주도함, 집중력과 촛불집회의 결합이 더욱 필요한 시기이다.
넷째, 진보정치세력의 성장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촛불집회에 가장 많은 그리고 진보정치세력에게 개방적인 사람들이 있다. 이런 기회를 빌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사실은 진보정치세력이 촛불시위자들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촛불집회는 진보정당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이 의석 이전의 문제, 촛불시위자들이 가지고 있는 판단력과 용기라는 것을 보여줬다.
다섯째, 늦게 들어간 사람이 늦게 나오는 게 세상 사는 도리다. 이리 재고 저리 살피느라 선두 역할을 못한 진보정치세력은 이제라도 끝까지 남아 후방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최 교수의 말마따나 촛불집회가 그리고 진보정당이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면, 진보정당이 촛불을 지키는 것 역시 의미 있는 공적 과업이다.
3. 시대에 편승하라 정당들은 언제나 혼란을 두려워한다. 조직적 이성이고자 하는 정당은 당연하게도 논리적으로 해명되지 않는 문제, 자신이 계획하거나 주도하지 않는 상황을 꺼려한다. 그런데 모든 혁명은 준비되고 추진되는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아노미다. 촛불집회 역시 생활과 문화에서 연성 혁명이면서, 동시에 정치에서의 연성 아노미다.
풋내기 진보정당인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촛불집회를 ‘지도’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도능력이 없다면 1848년과 1871년에 지혜로운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에게 편승하면 된다. 촛불의 내일에 노심초사하지 말자. 가라앉는 것을 두려워 말자. 이기지 못해 안달하지도 말자. 당장 이길 힘이 없으면 상대를 흔들어 놓는 것도 훌륭한 방책이다. 모든 것을 가진 이명박 정부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진보정당이 충돌했을 때, 잃는 쪽은 언제나 이명박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정치 시위를 ‘직접민주주의’라고 아전인수로 평하는 것은 지식인 관념의 넋두리이고, 이번 기회에 현재의 민주주의를 넘는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정국에 강령을 갖다붙이는 운동권의 버릇이다. 한편, ‘제도정치가 중요하다.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단순 반복은 구체적 정세와 현실 주체를 묻어버린 일반론일 뿐이다.
현실에서 ‘제도’와 ‘운동’이 다른 영역에서 현상하므로 양자를 나누는 패러다임을 쓰는 것은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제도는 운동의 귀착이거나 중간점이고, 운동은 제도의 생산자이며 동시에 파괴자이다. 정치는 제도를 지향하는 운동이고, 운동하는 제도이다. 나는 으레껏 거의 폭력적으로 진보정당을 되뇌어 왔다. 그리고 여전히 ‘결론은 정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진보정치의 제도화를 위한 ‘계속 운동’을 주장한다.
----------------------------------------------- 최장집 “운동의 힘 제도화 하는 ‘좋은 정당’ 필요” (한겨레, 글 안수찬 기자, 사진 신소영 기자, 2008-06-20 오후 12:00:52) 정년퇴임 앞둔 최 교수 인터뷰 운동-정당, 서로 보완해야 새로운 지배 질서 형성 갈등 기반한 시민사회 힘 수용해야 민주주의 발전
최 교수는 사회 갈등에 뿌리 내린 좋은 정당이 서로 경쟁하는 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가 보는 오늘의 한국 정치는 좋은 정당이 없는 체제다. 시민사회의 갈등 역시 제도정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허약한 정당 구조 때문에 운동이 정당의 역할을 대행하는 한국의 독특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운동의 정치만으로는 실질적인 사회변화를 이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운동’이 갖는 독특한 역할이 있다. 정당의 역할을 (시민사회의) 운동이 대행하고 있다. 운동이 없다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도 있다. 2008년 현재의 시점에서 운동의 역할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운동에 의존할 것인가. 운동이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은 민주화 이후 운동의 힘이 제도화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시민사회의 요구를 조직하는 정당이 제자리를 잡지 못한 결과다. 지금은 정당과 운동이 서로 분리되어 각각 재생산을 하는 구조다. 이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운동에 대한 비판이 촛불집회 등에서 드러난 시민의 에너지를 자칫 약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의 핵심원리는 대의민주주의다. 선거에서 다수를 점해야 집권할 수 있다.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도 선거에서 패배하면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 운동에 나서는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불만스럽다. 운동은 제도화를 지향하고, 정당은 운동을 기반으로 삼으려는 변화가 필요하다. 강력한 국가권력, 보수적 헤게모니(주도권), 재벌 지배구조 등이 버티고 있는 한국에서 이런 노력 없이는 보수적 지배질서를 바꾸기 힘들다. 촛불집회를 포함해 운동이 갖는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아무리 운동이 활성화된다 해도 시간이 지난 뒤에 실제 사회변화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는 회의적이다.”
-현재의 의회구조는 보수정당이 과점을 이루고 있다. 운동의 에너지를 제도화하려 해도 적절한 방도가 없지 않은가? “정부 정책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운동의 역할은 항상 필요하다. 다만 운동이 제도를 대체하려는 성급함이 보인다. 민주주의는 정당이 중심이 되는 구조다. 운동의 힘을 정당과 연계해 제도 내부로 인입시키는 구조다. 이를 단번에 뛰어넘으려는 성급함이 (최근 촛불집회에) 있다. 급하다고 당장 그 구조를 엎을 수는 없다. 앞으로 4~5년 동안 좋은 정당을 만들어 내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국민투표제나 국민발의제 같은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자는 움직임은 그리 현명하지 않다고 본다. 이는 정치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선거 승리를 강조하는데, 지난 대선 직전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괜찮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는데.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정부가 교체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평결이 내려진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져도 좋다, 지면 안 된다 등의 가치가 개입된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민주대연합을 하자는 주장에 반대했던 것은 분명하다. 민주파를 대표했던 기존 정부의 실패로부터 배워 새로운 기초 위에서 새로운 사회경제적 정책 대안을 조직하는 게 필요했다.”
“좋은 정당이란 게 특정한 이념 지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정당만이 좋은 정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반한나라’만을 내건 지금의 민주당은 좋은 정당과 거리가 있다. 노동 문제를 포함해 한국 사회 갈등구조에 기반을 두고 시민사회의 힘을 수용하는 정당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정당 구조는 ‘2.5당 체제’ 정도가 아닐까 한다. 기존 보수정당 외에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정당이 두 축을 이루면서 노동 문제와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이 병립하는 것이다.
"대통령중심제 한계…의회중심제 개헌" 1인 권력집중 부작용·정치권 편의적 발상 비판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개헌의 필요성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최근 출간된 계간 <비평>에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현행 대통령제의 부정적 효과가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썼다. 의회중심제 또는 혼합형 프랑스식 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했는데. “민주화 이후 여러 정권이 들어섰는데, 그동안 대통령중심제의 문제가 분명히 드러났다. 이제 개헌이 필요하다. 개헌의 핵심은 기존 대통령중심제를 바꾸는 것이다. 대통령 1인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된 반면, 이를 견제할 힘은 약하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권력구조인데도 대통령이 정치발전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대선에서 패배하면 정당의 역할도 그것으로 끝나 버린다. 이는 이명박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 패턴이 되풀이될 것이다. 지금까진 권력 제도 문제에 신중하게 접근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적절한 시기에 개헌을 논의해 기존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이 정치적 국면 전환을 위해 개헌을 제기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 제도를 깊고 넓게 논의할 수 없다. 관심의 내용도 틀렸다. 4년 중임제 도입과 총선·대선 시기 일치 등은 대통령제를 강화·확대하는 방향이다. 사실상 8년짜리 대통령이 탄생할 것이다.”
“프랑스식 준대통령제는 의회중심제의 요소와 대통령제의 요소를 혼합한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 직선으로 뽑고, 의회 다수당이 총리를 맡아 대통령을 견제한다. 이런 제도에서는 정당의 역할이 커진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의회중심제가 가장 좋다. 정당이 너무 허약하긴 하지만, 의회중심제를 통해 오히려 정당을 강화한다는 차원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어떤 제도가 정당 발전의 기반을 제공할지에 초점을 둬야 한다. 의회중심제는 사회와 밀착한 정당이 제대로 발전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지금 정치권에서도 개헌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은 정치적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는 의도가 강하다. 정치적 편의가 만들어낸 문제제기다. 제도의 문제를 논의할 때는 광범위한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대통령제를 강화하는 방향의 개헌은 막아야 한다.”
-------------------------------------------------------------------------------- 최장집 "나는 급진주의자 아닌 회의주의자" (프레시안, 양진비/기자, 2008-06-21 오후 12:50:30) "민주주의 개혁 한계 있어…그 이상은 '불가능'"
“카리스마적 리더를 기다린다” (레디앙, 2008년 06월 21일 (토) 08:24:30 이재영 기획위원) [최장집 교수 퇴임강연] 청객 1,000여 명 몰려…“촛불, 빨리 제도로 수용돼야”
최장집 교수는 “마키아벨리가 토스카나에 기반했던 것처럼 나의 정치학은 서울에서 시작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정치를 이해하고, 현실을 말하고, 대면하는 창(窓)이 바로 서울”이며,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변방의 정치학도”라고 규정했다.
최장집 교수는 자신을 급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 오해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적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것은 수긍하지만 급진적이라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운동의 정치학'은 나의 학문적 정향과 맞지 않는다"며 "민주화 그리고 이후 과정에서 운동을 강조하고 열정을 부추기는 것은 내 기질에 맞지 않고 내가 할 역할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나의 정치학은 어떤 제도, 어떤 제도적 실천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를 묻는 ‘레짐의 정치학’”이라고 자기 정의했다.
같은 맥락에서 최 교수는 “국민 말을 듣지 않는 이명박 정권도 잘못이지만, 정권 퇴진을 외치는 진보파 운동도 잘못이다. 빨리 제도 안으로 수용돼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촛불집회가 정당정치의 실패로부터 일어난 것인데, “정권 퇴진을 외치는 거리운동이 낭만적 정치관을 부추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에서 인민은 절반의 주권자라는 것이 현실적 진실”이라며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운동론적 민주주의관은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이어서 민주주의에 기여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이어 “한국의 진보 개혁파들은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 즉 민주주의란 선거를 통해 다수를 획득한 집단에 통치를 위임하는 체제라는 사실을 수용하기를 주저하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자신이 이런 사고를 하게 된 학문적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독일 관념론과 영미 경험론, 자유주의가 내게 영향을 준 철학적 기반”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세속종교로 변질된 마르크스 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나는 베버리안(베버주의자)”이라고 고백했다. 최 교수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의 조건에 사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이를 수용하든 아니든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이론"이라고 평했다. 그는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민주주의, 정치와 같은 인간 행위의 자율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서 최 교수는 마르크스보다는 베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고백했다. 그는 "베버는 근대화가 자본주의 발전을 매개로 한 합리적-법적 권위의 발전이고 이같은 지배적 과정에 저항하는 힘이 바로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라고 말했다"며 "정치의 리더십이 시장경제의 합리화의 압박에 대항하는 새로운 힘을 제공한다는 점을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최장집 교수는 자신을 '실질적 민주주의자'라고 규정하는 데 대해서도 반론을 펼쳤다. 그는 "노동자, 농민 같은 사회의 소외계층이 정치의 중심적 행위자가 되고 평등과 사회복지가 실현되는 상황에서만 민주주의라고 정의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는 규범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는다"며 "실질적 민주주의는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낙관적이어서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민주주의를 절차적, 최소주의적 수준에서 정의하고 민주주의가 부여하는 제도를 통해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내용의 공간을 열고 이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나의 민주주의론이다"라고 밝혔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그 내용까지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형식과 내용 사이의 괴리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결과에 관심을 두겠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민주주의가 완벽한 정치체제여서가 아니라 인간이 현실에서 민주주의 이상의 체제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라며 "민주주의가 성취할 수 있는 개혁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고 또 그러한 과도한 개혁이 반드시 좋은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라고 밝혔다. 최 교수는 이어서 "민주주의의 발전이 온건한 형태로 이뤄져야 한다"며 "경쟁하고 투쟁하는 집단들 사이의 갈등이 민주주의의 전제지만 이들 사이의 타협과 협력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나는 온건 개혁적 취향이다"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시장과 사회의 자율성이 강조되는 독일 모델(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최 교수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유럽의 문제아였던 독일이 통일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현재는 세계 최대의 수출국이며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산업 생산, 그리고 사실상 완전 고용에 가까운 고용을 실현하고 있다"며 "메르켈 수상은 최근 이러한 독일의 성취가 사회적 시장경제에 힘입은 것임을 분명하게 말했다"고 전했다. 최 교수는 “유럽이나 북구 국가들과 같은 사민주의 체제보다는 시장과 사회의 자율성이 더 강조되는 사회적 자유시장모델을 대안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독일 모델을 염두에 두고) 노동이 정치 과정과 노사관계에 참여하고 중산층과 노동의 이해관계가 병행할 수 있는 생산-분배 구조의 발전이 한국의 발전 경로"라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이런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대학에 어떤 역할도 기대하기 어렵다"며 "대학이야말로 오늘날 모든 문제의 출발"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대학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추동하는 본산이자 동시에 그 세계화의 부정적 결과가 그대로 집중되는 곳"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어서 "생존 경쟁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현실적 제약을 이해한다"며 "대학생에게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다만, 문제의식과 관점을 넓게 갖기를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최 교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좋은 정당과 정치 리더의 출현을 강조했다. 그는 "좋은 정당의 출현과 그곳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출현을 기대한다. 좋은 정당이 중요한 것은 좋은 리더를 훈련하고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정치(정당)가 신자유주의 시장에 대해 정치적 제약을 부과할 수 있을 때 그 자유의 공간에서 여러 가지 인간적, 사회적 가치들이 다시 강조되고 발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의 소망을 말했다.
------------------------------------------------ 지식인은 촛불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가? (레디앙, 2008년 06월 24일 (화) 14:02:07 오창은 /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문학평론가) [김우창, 최장집 비판] 합리주의에 갇혀 자발적 정치 참여 억압
국가기구는 가치중립적이지도, 원천적으로 공익적이지도 않다. 어떤 권력(주권)이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국가기구에 자본의 이익이 작동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지금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 간 이익의 손익계산 차원에서 한미 FTA와 쇠고기 협상이 이뤄졌다고 보지 않는다. 한미 양국의 정부는 특정 자본의 이익과 밀착된 상황에서 자국 자본의 이익을 계산하며 협상에 임하고 있다. 그 자본의 싸움 와중에는 ‘생명과 건강’이 희생되기도 하는 무자비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는 끊임없이 공공성을 희생하는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우창 교수는 단지 국가의 협상과 협정으로 사태를 바라보면서 너무도 안이한 태도로 ‘쇠고기 협상’을 이해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6월 17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라는 글에서 “무책임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촛불정국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현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최장집 교수의 논의는 ‘촛불집회를 비정상 상태’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정상적인 상태는 대의민주주의에 기반해 ‘대표의 선출과 통치의 위임’이 이뤄지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선출된 대표가 ‘책임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을 지칭한다.
촛불집회 이후를 생각하는 최장집 교수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현대민주주의가 대의제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면서 그는 “시민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이익 요구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 결사체들을 통해 최대한 광범하게 정책 과정에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정당정치로 인해 파생된 문제를 정당정치로 수렴하고 해결하자는 것과 같다.
최장집 교수의 주장은 ‘제도정치’에만 갇혀 있기에 문제가 있다. 최장집 교수는 “사회적 갈등이 처리되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운동에 대한 필요는 그만큼 적어진다”고 본다. 즉, 대의민주주의 제도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촛불집회와 같은 사회운동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가 ‘대의민주주의 제도’만이 최선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제도는 끊임없는 대중의 요구와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어 왔다. 완전한 제도는 없으며, 항상 불완전한 제도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주권자들의 요구 속에서 변경되어 왔을 뿐이다.
현재, ‘미친소 사건’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정당제도와 같은 제도정치 속에서 해결될 수 없었기에 광장의 정치가 이뤄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광장의 정치가 요구하는 제도의 변화를 주목하지 않은 채 제도정치로의 수렴의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다. 오히려 정치학자는 ‘광장의 정치인 촛불 집회’의 요구를 수용할 만한 새로운 제도의 변화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 올바르다.
다음으로, ‘촛불집회’로 일컬어지는 사회운동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시선은 보수적 면모를 내비치고 있어 위태롭다. 최장집 교수는 ‘촛불집회’와 같은 운동이 1) 대안 형성이 어렵고, 2) 이슈의 위계질서를 세워 일상적으로 정책을 추구하기 힘들며, 3) 정책 이슈 때마다 거리 시위에 나설 수 없는 일이고, 4) 장기적 유지될 수 없고, 5) 시민사회 내 갈등을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분석으로서는 올바를 수 있으나, 대의정치로의 수렴을 주장하는 근거로서는 정당하지 않은 논거들이다. 이는 현재의 상태를 ‘정상에서의 일시적 일탈’이냐, 아니면 ‘비상사태’로 보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시각 차이이기도 하다.
정당질서와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비상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다. 군주제 시절에도 시민의 동의는 실질적이든, 형식적이든 요구되었다. 국가는 시민의 동의 없이 운영될 수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적 질서 속에서 시민의 동의가 이뤄지지 않은 정책이 강압적으로 추진되고 있고, 시민의 저항에도 무심할 뿐이니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동의의 원칙’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의 복원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최장집 교수의 태도는 ‘교과서적 강박’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최장집 교수의 시각이 현 상황을 오로지 정치영역 만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는 정치질서에 대한 반대의사 표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를 중시하는 일상인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검역주권을 포함해, 건강권 생명권을 요구하는 시민의 저항을 단지 ‘정치 투쟁’으로만 수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범위한 영역에서 생명의 정치, 일상의 정치, 광장의 문화정치가 싹트고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가능성을 제도정치라는 온실 속으로만 옮기려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 반성해야 한다.
최근 지식인 사회에서 촛불집회의 의미를 과장하지 말자는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중산층 엘리트 지식인 사이에서 촛불시위의 새로움을 과장하고 있다’(박상훈)는 의견도 있고, ‘촛불집회는 자연발생적으로 태동한 현상인 만큼 자연스럽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정해구)의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지식인들은 촛불집회를 통해 일상의 생활정치가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성찰하고(김원), 제도정치의 종언을 통한 삶의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며(이명원),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탐색’의 필요성(하승우)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진취적인 면모는 김우창, 최장집 교수의 일면 보수적인 태도와 대비된다.
촛불집회는 ‘정치적 저항’이라기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시민 연대’이다. 이 고귀한 실천 행위가 단지 이성적 질서로 귀환하지 않는, ‘감성의 교감과 연대’로 이어질 때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민주적 질서가 창출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현재, 촛불 집회의 현장에서 구현되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실험들은 제도정치가 ‘새로운 제도로 변신’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 *이재영. 2008. 고도는 오지 않는다 : 최장집 퇴임강연 비평. 베버, 칸트 그러나 니체. 「텍스트」2008년 9월호.
고도는 오지 않는다 (레디앙, 2008년 08월 18일 (월) 17:04:32 이재영 기획위원) [최장집 퇴임강연 비평] 베버, 칸트 그러나 니체
1. 최장집과 베버 최장집 교수는 퇴임강연에서 “좋은 정당과 카리스마적 리더의 출현을 기대한다. 좋은 정당이 중요한 것은 좋은 리더십을 훈련하고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 글은 퇴임강연에서 밝힌 최장집 교수의 정당, 정치인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다. 그의 퇴임강연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만을 놓고 보자면, 베버리안이라는 고백은 매우 진실돼 보인다.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은 베버의 퇴임강연 격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최장집이 바치는 오마주다.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에서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쓰인 관점과 용어가 텍스트 패러디된다.
“정치 현상은 … ‘양날의 칼’과 같은 극히 위험스런 병기”라는 최장집의 규정은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은 …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라는 베버의 인식, 정치를 ‘필요악’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같다. “‘운동의 정치학’은 나의 학문적 정향과 맞지 않아. 민주화 그리고 이후 과정에서 운동을 강조하고, 열정을 부추기는 것은 내 기질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할 역할도 아니라 생각 … 나의 관심은 ‘레짐의 정치학’”이라는 최장집의 태도는 베버가 든 정치가의 세 가지 자질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중 열정에 대한 비판 부분 - “‘혁명’이라는 자랑스런 이름으로 장식하고 있는 카니발 … ‘지적으로 흥미로운 것에 대한 낭만주의’ …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 … 정치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 다른 신체기관이나 심정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을 따른 것이다.
최장집이 “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라며 “직접 민주주의/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를 비판한 것은 베버가 미국 정치를 “국민투표제적 당-기계의 엽관체제”라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최장집이 “출로는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나? …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출현을 기대한다”고 자문자답한 것은 베버가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라 강조한 “비범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거한 권위”와 같은 염원이다.
2. 베버의 ‘세 유형론’과 최장집의 ‘레짐론’ 베버는 그의 퇴임강연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지배 정당성의 근거를 ‘전통적’, ‘카리스마적’, 그리고 “근대적 ‘공무원’을 비롯하여 공무원과 유사한 모든 권력자가 행사하는 지배”인 ‘합법적’인 세 유형으로 나눈다. “가산제 군주가 행사하는 전통적 지배”인 중세 왕정들의 경우에도 오랜 과거, 개국(開國)의 때에는 예외없이 “카리스마적” 지배 정당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던가? 또한, “합법적”이라는 세 번째 유형은 전통적이든 카리스마적이든 모든 지배에 부속하는 일상화된 지배시스템이 아닌가?
현재(現在)의 시점(時點)에서 정치를 사고하는 베버의 ‘지배 정당성 유형론’과 같은 것이 최장집의 ‘레짐의 정치학’이다. “나의 관심은 ‘레짐의 정치학’이라 부를 만한 것에 집중돼. 즉 어떤 제도와 제도적 실천이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가 … 나는 기본적으로 운동을 민주화 이후 제도적 실패 즉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제도적 장치들, 즉, 선거, 정당, 자율적 결사체, 참여, 대표-책임 원리 등의 실패의 결과로 이해 …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 이를 통해 운동의 역할을 축소하는 문제에 관심”
여기서 최장집은 “운동을 … 제도적 실패의 결과로 이해”한다. 즉, ‘운동’을 비정상적 특수태로 규정한다. 그런데 최장집의 ‘민주주의’에서 언제나 반복되는 1987년 체제는 1987년의 전제도(前制度) 운동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닌가? 즉, ‘운동’은 제도 발생의 정상적 일반태가 아닌가?
최장집이 ‘제도’에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발전시킬” 임무를 부여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그가 바라는 이상적 ‘제도’는 무엇인가를 이끌고 조장하는 선도(先導) 제도로 읽힌다. 그리고 현실의 ‘실패한 제도’는 무엇인가에 뒤처지고 위협받는 지체(遲滯) 제도다. 즉, 제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선도하거나 지체될 수 있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고, 최장집이 ‘운동’이라 일컫는 것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 실패에서 “낭만주의적 / 이상주의적 정치학 관점”에 의한 제도화 병목이 책임질 몫은 매우 작다. 민주노동당 등의 진보정치세력이 상당한 지지세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그에 비례하는 제도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다수대표 선거제, 1987년 헌법 대통령제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고, 이는 진보정당 이전 제도의 포화라 할 수 있다.
또,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다양한 요구와 주장들은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제도 지체의 표상이다. 즉, 만약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제도의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민주주의 실패는 제도 실패 + 제도화 병목 + 제도 포화 + 제도 지체의 복합적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제도’를 이야기하자면 구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또는 어떤 방법을 통해 어떤 신제도를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는데, 최장집의 제도론에는 이 제도 형성론이 빠져 있다. 제도는 설계보다는 힘의 산물이고, 결국 운동이다. 그런데 최장집은 ‘운동’과 ‘제도’를 일부러 떼어놓으려는 정태(靜態, static)의 관점에 서기 때문에 정치의 일면 만을 말한다.
3. 의회주의, 정당, 카리스마 베버는 가톨릭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이 의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두 당이 의회 밖에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하찮은 운명에 처하게 되고, 지도자들 대신 노조관료와 당서기들이 당을 지배한다고 개탄한다. 최장집은 “정당정치의 복원 내지는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를 주창하며, “좋은 정당과 카리스마적 리더의 출현을 기대한다. 좋은 정당이 중요한 것은 좋은 리더십을 훈련하고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이런 진술에 비추어 베버에게 있어 각각의 정치 기구들은 당〈의회〈지도자의 순서대로 경중(輕重)하거나 앞의 것이 뒤의 것에 대한 도구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며, 최장집에게 있어서는 당≤의회〈지도자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베버의, 의회주의를 통한 지도자 출현 주장은 지극히 특수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베버의 인식 세계 속에 있던 중앙당과 사민당의 초기 모습으로부터 의회주의를 거쳐야 지도자가 나타난다는 주장은 증명될 수 없으며, 일반화될 수 없다. 한국에 정당과 의회가 없다시피 했고 그런 정황이 민주주의 정체의 가장 큰 장애였으므로, 정당과 의회를 강조하는 최장집의 기존 주장은 일상정치의 차원에서 옳다. 그런데 그가 퇴임강연에서 새롭게 제기한 ‘카리스마적 리더’와 만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박정희, 김대중 같은 ‘카리스마적 리더’가 정당과 의회의 대체물로 기능해온 것이 현재까지의 한국 정치사이므로, 최장집의 ‘카리스마적 리더’ 주장은 기존 주장에서의 후퇴일 수 있다.
어쩌면, 정당과 의회, 언론이 순기능하는 현대 정상정치, 최장집이 바라는 합리적 온건 정치에서는 더 이상 카리스마적 리더가 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또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일시적 출현은 가능하겠지만, 민주적 동질화에 기초한 지속적 통치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카리스마적 모습을 어느 정도 보였던 지도자들 - 부시, 고이즈미, 노무현, 이명박, 사르코지는 권좌에 오르는 과정과 그 이후의 몰락 내지 좌절에서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일련의 정치인 현상에는 하나의 법칙이 작용한다. 이들 모두는 탈정치 탈정당 기류에 개인을 내세워 영합했고, 개인 카리스마를 조작하기 위한 이미지 중심 선거전략을 통해 성공했다. 이에 힘입어 집권 초기 이들은 정당과 의회를 대신하는 카리스마적 이니셔티브를 행사하지만, 곧 정상정치의 기능에 의해 지지세력의 조기 이탈을 겪으며, 개인숭배자, 종교인, 대기업, 정치엘리트 등 소수 지지자에의 ‘관료적’ 의존이 심화된다.
즉, 현대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정당의 후퇴에 의해 일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으나, 정당은 가지고 정치인은 가질 수 없는 것 - 안정된 지지세력, 일관성 있는 이념과 정책, 권위 손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복원력의 부재로 실패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 정당은 자당 정치인을 구원해줄 만큼 강하지 못하다. 요컨대, 현대 정치에서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란 정당 약화의 퇴행적 현상이고, 그들의 일시적 성공 요인인 정당 약화는 그들의 구조적 실패 요인이기도 하다.
4. 베버, 칸트 그러나 니체 베버가 신칸트주의 서남학파를 자처했던 것처럼 최장집은 자신이 “독일의 관념론 철학으로부터 강한 영향. 특히 신칸트학파”라고 술회한다. 그런데 철학은 모르겠으나 정치학으로 따지자면 최장집의 주장에서는 칸트보다는 니체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느껴진다. 최장집은 베버에 의해 니체로 인도된다. 최장집은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에 이르러 그동안은 불가능했던 의회주의와 정당정치를 실현할 주체, ‘출로’로 ‘카리스마적 리더’를 고대한다. 이에 따라 ‘좋은 정당’은 ‘카리스마적 리더’를 위한 배출구로 위치하게 된다. “혁명은 나폴레옹을 가능케 하였다. 그것이 혁명의 합리화이다(『권력의지』)”라는 니체의 관점과 같은 것이다.
니체는 파리코뮌을 격렬히 비난하고, 베버는 뮌헨대학에서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강연에서 1919년 혁명을 무시하고, 최장집은 촛불시위의 물결 가운데에서 의회주의를 주창한다. 최장집은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에 대해 평등의 가치를 통한 분배의 효과를 부과하는 기능 … 정치의 역할은 경제적 관료적 합리화에 대한 견제력을 부과하는 것 … 정치는 신자유주의 시장에 대해 정치적 제약을 부과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의 정치는 경제성장, 경제적 관료적 합리화, 신자유주의 시장이라는 비가역적 물리에 제한적 효과를 더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해서 초인적 신탁(神託)인 카리스마는 자본주의 경제운동의 하위 보조자로 물러앉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Godot)는 오지 않았다. 박정희 비서실과 김대중 정부에서 일하고, 노회찬을 지지하는 최장집에게도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사천(四川)의 신들은 선인(善人)을 버리고 떠났다. 최장집은, 맑스를 인용하며 세속 대중정당을 기다리는 후학들로부터 벗어나 베버와 니체의 비범함을 맞이하러 떠났다. 퇴임이 최장집의 펜을 꺾지는 못하겠지만, 우리는 많이 외로울 것이다.
------------------------------------------ 민주주의 전선의 재구성 (한겨레, 고명섭 책·지성팀장, 2008-09-16 오후 07:37:05)
참여정부 말기에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한나라당도 집권할 수 있어야 하며, 그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경향신문> 2006년 9월28일치)라고 말했다. 중량 있는 학자의 그 발언은 민주·진보파 진영에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치학자 손호철 교수는 몇 달 뒤 “한나라당에 정권이 넘어가면 한국 정치가 중장기적으로 오히려 발전할 수 있다”(<레디앙> 2007년 1월31일치)라고 한발 더 나아갔다. 이들의 주장에 민주·진보파 안에서도 상당수가 공감했고, 결과는 한나라당의 집권이었다.
이런 발언들은 한국 민주주의가 지난 10년의 민주파 집권으로 어느 정도 토대를 굳혔다는 판단에 입각한 것이었다. 한나라당에 정권이 넘어가더라도 민주주의의 기초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몇 달의 한국 정치 경험은 우리 민주주의가 생각만큼 굳건하지 못하다는 뼈아픈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최 교수나 손 교수나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실패한 데서 참여정부의 근본적 패인을 찾았다. 복지·노동·분배·교육의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이 민주정부의 과제인데, 이 지점에서 야당과 정책 차이가 크지 않다면 정권이 바뀐들 대수로울 것이 없다는 진단이었다. 작금의 상황은 이런 진단이 냉철한 현실인식 위에 선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민주파든 반대파든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 원칙만큼은 공유하고 있다고 본 것인데, 그런 판단에 착오가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해 당사자들이 ‘민주주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할 때에만 원리대로 작동한다. 이때 민주주의 규칙은 단순히 제도나 절차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의 심성과 에토스로 존재한다. 제도와 절차가 마련돼 있다 하더라도 행위자가 민주주의를 내면화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규칙 준수자를 파트너로 삼는다. 한나라당 집권 반 년 만에 한국 민주주의는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회·경제적 민주화 과제가 철거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집회·사상·양심의 자유와 같은 헌법적 기본권마저 심대하게 위협받고 있다. 미라가 된 줄 알았던 국가보안법이 백주에 으르렁거리며 날뛴다. 검찰·경찰의 행태는 과거 공안정권의 수족을 닮아가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임기 말 노무현 정권의 일탈적 행보를 두고 ‘사이비 민주주의’에 견주었다. 최 교수의 논법을 빌리면 지금 정권은 ‘사이비 민주주의’ 정도가 아니라 ‘반민주주의’라고 해야 할 판이다. 돌이켜보면,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 정치를 규정한 기본적 틀은 ‘민주 대 반민주’ 구도였다. 그 구도가 낡았다고 부정하고서 사태를 ‘좌파 대 우파’로 재규정한 것은 한나라당과 그들의 대변자들이었다. ‘좌파가 망친 경제, 우파로 되살리자’가 한나라당의 구호였고, 그 구호가 먹혀들었다. 그러나 그 구호야말로 가짜 구호다. 열린우리당더러 좌파라고 하면, 서구 좌파들이 황당해할 일이다. 민주주의 역량의 미달과 부실이 문제였을 뿐이다. 민주파가 실망스럽다고 해서 반대파에게 권력을 넘겨준 재앙적 결과를 지금 우리는 겪고 있다. 경제 위기가 심해지고 남북 긴장이 격화하면, 경제 우선이니 안보 우선이니 하며 민주주의 남은 원칙마저 내다버릴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더 붕괴하지 않도록, 민주주의 전선을 재구성해야 할 상황이다. 시민 중심이냐 의회 중심이냐 하는 것은 둘째 문제다. 민주주의의 생환이 중요하다.
------------------------------------ 촛불보다 투표가 중요하다 (레디앙, 2008년 09월 17일 (수) 19:30:37 정상근 기자) [최장집] "노동-계급 이해 방식 마르크시즘에서 분리 필요"
최장집 민주주의 교육연구센터 소장은 17일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학생회가 주최한 ‘최장집과 한국정치’ 초청강연회에서 “민주주의의 질적 향상은 민중적 삶의 현실 개선에 대해 천착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발생되는 갈등과 경쟁을 정당정치 속으로 끌어들여 활성화할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정치와 민주주의; 이해, 오해 그리고 과제'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날 강연회에서 그는 “진보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스스로가 누군가를 대표하고, 그들의 삶에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하려 해야 하며 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정치가 지속적으로 폄하되고 약화되었다는 것”이라며 “이는 민주정치에서 갈등을 이해하지 않거나 못한 결과로, 이러한 갈등이 ‘공익’에 반대되는 ‘사익’, ‘집단이기주의’로 이해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갈등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전체주의 사회에 가까운 것”이라며 “민주주의는 제도화된 틀 내에서의 갈등과 타협의 과정이며 갈등 없는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민주주의 실천과정에서 3가지 오해가 있는데 첫 번째로 최근 촛불집회 과정에서 불거진 직접민주주의나 직접행동이 인민주권이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는 체제로 상정되고 민주주의의 이상으로 생각되는 경향”이라며 “참여의 확대가 참여의 평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경험적으로 미루어 정치적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중산층 이상으로 노동자와 소외계층의 정치참여 채널은 드물다”며 “이들을 대변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한 참여의 방법은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정당에 대한 투표로서, 가장 허약한 시민들의 투표 한 장이 효능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정치와 메커니즘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두 번째 오해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분짓는 것으로 이는 민주주의 혼란의 원천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정부 형태로서 이해하는 것만이 아닌 도덕적 가치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도 관련된다”며 “이런 인식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 운동의 전통이 강한 한국 진보파들의 급진적이고 이상주의적 비전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이해 방식은 민주주의를 너무 이상적이고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거를 통한 정부의 선출을 핵심으로 하는 체제로서 민주주의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 오히려 등한히 하거나 무관심하게 된다”며 “이러한 구분보다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화함으로서 그 결과로 실질적 민주주의를 가져온다는, 후자가 전자의 효과라는 현실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 번째 오해로 최 소장은 “위와 같은 민주주의 이상화를 근거로 시민사회 일각은 민주주의를 시위를 통한 직접행동과 참여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들며 “중요한 것은 참여의 확대가 아니라 진보세력이 집권세력으로서 정부 운영 능력을 배양하는 정치적 공급 측면”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진보파들은 직접행동과 직접민주주의의 강화를 강조할 뿐 정치적 공급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최 소장은 “이는 민주화 이후 '국가'에 대한 이해와 정부 운영 능력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며 “민주화된 현재 사회에서 이제 학자들은 국가이론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이어 “촛불집회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아무리 집회를 가져도 선거를 통해 뽑은 정부는 굴러가는 만큼, 이 국가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소장은 “이와 함께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재구성하기 위해선 시민들에 대해 과거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와 같이 도덕적 역할과 책임을 요구하는, 지나친 도덕주의적인 시민의 모습을 기대하기보다 현실의 보통시민으로서 민중에 대한 관점을 가져야 하며 이들이 투표를 행사하는 '절반의 주권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민주정치 하에서 노동과 사회소외세력들의 정치참여 문제를 위해 한국 보수파의 친북좌경 프레임에 의해 조성된 어려운 조건들을 벗어나기 위해 노동과 계급을 이해하는 방법을 마르크시즘과 분리할 필요가 있다”며 “사회현상의 서술적, 분석적으로서 계급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이를 마르크시즘으로부터 떼어내 민주주의 과정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 소장은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질적 향상을 위해 우리는 민주주의를 추상화, 물신화, 도덕화 하는 것에서 벗어나 현실적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문제에 천착해야 하며 갈등과 경쟁을 인정하고 리더십과 조직이 그 중심적 요소로 구성되는 정치를 활성화 할 때 민주주의는 작동하고 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 소장의 강연에 이어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엄관용씨와 석사 이관후씨의 최장집 비평이 이어졌다. 엄씨는 최 소장의 6권의 저서를 분석한 결과 정치 결정론에 대한 천착과 경제 결정론을 거부하는 것에 아쉬움을 나타냈고 이씨는 최 소장의 '정당민주주의론의 조건'에서 다루지 않은 언론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발표했다.
--------------------------------------- 민노당 전망 없어…분당엔 회의적 (레디앙, 2008년 09월 18일 (목) 10:03:43 정상근 기자) [질의 응답] "촛불은 시민들의 몸부림…심상정, 노회찬 유망 정치인"
-정당정치에 의한 대의정치를 강조하고 있는데 소외된 계층의 의사도 대의정치를 통해 대변될 수 있는가? 또 대표되지 않은 집단이 또 다른 정치조직으로서 스스로 대표성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가? =이는 정치적 조직자들의 문제이다. 대중들이 스스로 조직할 수는 없다. 대중의 마음을 읽고 생활의 조건을 읽어야 하고 이를 정치적 리더가 될 사람이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런 정치적 자원들을 조직할 수 있는 리더십이 부족하다. 소외된 계층을 조직해 독자적인 정당으로 만들 수도 있고 진보적 정당을 구성할 수도 있으며 안 된다면 미국처럼 하나의 블록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국회의원이 대표가 되었지만 그 대표가 개개인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당론과 자신의 지역구 여론이 배치될 경우에는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개인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어떤 법칙은 없다.
-시민운동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말하고 있다. 시민운동이 나가야 할 방향은? =정당은 현실타협적인 측면이 많기 때문에 개혁적 이슈를 조직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때문에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제도화된 정치기구가 다루지 못하는 이슈에 대해 제기하고 이를 정치적 의제로 끌어올려서 정치적 힘으로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운동은 정치의 전사(前史)’라고 한다. 독일 녹색당, 사민당도 마찬가지로 기존 질서가 제시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나는 시민운동이 투자된 노력에 비해 나타나는 현상을 따져볼 때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8년 촛불정국 이후 나타난 것과 같은, 정당과는 다른 속성을 가진 정치집단을 인정할 수 없는가? 또 2008년을 민주주의사에 전환점으로 볼 수 있는가? =촛불집회와 관련된 질문은 많은 궁금증을 부르는 주제이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작’, ‘직접민주주의’, ‘촛불민주주의’ 등 일각의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서 의미있게 제시되고 있는데 나는 이를 ‘중요한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촛불집회 참여 여부는 이슈가 될 수 없다. 촛불집회가 생긴 것이 이명박 정부가 정책을 잘못했고, 보수적 정책을 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항하는 것이란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그 의미를 과대 부여해 촛불시위야 말로 새로운 민주주의의 전환점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즉 2007년 12월 대선이 보다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지고 2008년 총선이 제도화된 상황 속에서 치러졌으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촛불집회는 한가지 이슈에 대한 문제가 나쁘게 전개된 것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대응이었다.
나는 이로 인한 휴우증을 더 부정적으로 본다. 많은 에너지가 투여돼 굉장한 기대를 갖게 만들었었는데 오늘의 시점에서 촛불이 만든 결과는 너무 허망하다. 오히려 정부는 더 자신감을 얻고 강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촛불집회는 ‘2008년의 전환점’이 아닌 ‘2008년은 안티 크라이막스’의 마지막 국면에서 나타난 어쩔 수 없는 시민들의 몸부림이라고 본다.
-현재 존재하는 진보정당의 역량에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독일의 녹색당, 사민당 식으로 오히려 운동을 통해 역량을 축적하고 제도권으로 진입하는 시기가 있었으면 지금보다 더 낫지 않았을까? 또 민주노동당의 분당사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첫 번째 질문은 수긍할만한 의견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서구 선진민주주의 국가는 길게 보면 150~200년 짧게 봐도 5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몇 세대의 경험을 통해 민주화가 되었기 때문에 학습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또 사회적 보수성도 강고하게 제도화되거나 힘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화가 근대화와 어울리는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민주화가 더 늦게 되다 보니, 정당체제가 새롭게 재편성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엊그제까지 운동하다가 갑자기 냉철한 이성을 가지려면 쉽게 안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주의가 들어서고 진보정당이 들어오니 진보정당이 집권하더라도 정부를 운영할 수 없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거꾸로 경험하고 있다. 정부를 운영하는 방법부터 배워야한다. 그런 측면에서 지적한 대로 진보정당이 서서히 운동으로 무르익어 정당으로 발전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는 있겠다.
민주노동당으로는 전망이 없다고 본다. 무비판적으로 대북문제를 받아들이고 남북관계를 민주노동당처럼 생각하는 것은 한국 현실에서 수용될 수 없다. 왜 민주노동당이 남북냉전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려 하고 남북평화 문제까지 앞장서서 나서려고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노동당'이란 이름이라면 노동자 생활현실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데, 민주노동당의 루트는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보여진다. 그러나 분열 결과 어느 당도 중요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분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실천적인 입장에서 대학생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조언을 한다면? =지금 학생들은 우리 세대하고 다르다. 우리는 여유 있는 젊은 시절을 보냈고 대학에서도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 세대한테 그런 여유 있는 말을 했다간 혼나기 십상이다. 대학 가기도 어렵고, 들어와서도 영어, 취직시험 공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과 투쟁해야 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회정의를 고민하라, 폭넓게 독서하라고 한다는 것이 무리한 부탁 같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만 살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인생은 빨리 지나간다. 젊었을 때는 머리가 좋기 때문에 공부한 것을 잘 잊어먹지 않는다. 젊었을 때 신나게 노는 것도 좋은데 조금 덜 놀고 공부를 좀 많이 했으면 좋겠다. 학교 공부보다 소설책을 많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시간이 있으면 고전 같은 큰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거기서 우리가 고민하지 않았던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또 외국어로 영어를 공부하는데 기왕에 요구하자면 영어 말고 다른 외국어도 했으면 좋겠다. 세계화는 세계를 향해 나가야 하는데 정작 내용은 미국화, 영국화이다. 다른 외국어도 1~2개 더 공부했으면 좋겠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만 얘기하고 싶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이나 현재 유망하다고 보는 정치인이 있는가? =한국에서 좋은 대통령이 누구냐는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다. 처칠은 민주주의를 “지금껏 경험한 모든 정치체제를 제외하고 가장 나쁜 체제”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민주주의가 허점도 많고 문제도 있지만 그나마 제일 나은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봐도 꼽을만한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유망한 정치인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사실 난 정치인을 많이 모르고 있어 꼭 집어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아는 범위 내에서 말해보자면, 지난 총선과정에서 심상정씨가 잘 되어서 새로운 시대 소외계층을 대변해주길 기대했다. 노회찬씨도 그렇고. 그 밖에 새로 시작된 18대 국회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국회가 끝나야 알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