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이 새롭게 나왔나 보다.
이 평전이 처음에 나왔던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만큼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사람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다를테니 좋은 쪽으로 바뀌었기를 바란다.
관련해서 네이버블로그에 썼던 <전태일 평전> 관련글들도 담아놓았다.
---------------------------------------------------------- "전태일, 이제 그의 죽음보다 삶을 먼저 읽자" (프레시안, 여정민 기자, 2009-04-17 오전 10:40:00) [화제의 책] '삶과 사랑'에 초점 맞춘 <전태일 평전> 신판 발행
<전태일 평전>이 새로 나왔다. 출판사 돌배개로부터 판권을 넘겨받은 전태일기념사업회(이사장 장기표)가 일부 내용을 고치고 다듬어 다시 내놓은 새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 아름다운전태일 펴냄)이다. 1983년 암울한 시대 상황으로 저자를 밝히지도 못한 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온 지 25년만이다.
새 <전태일 평전>은 "세상에 충격을 주었고, 마침내 얼음처럼 굳고 차디찬 현실을 뚫는 불꽃이 된" 그의 죽음을 넘어 그의 삶과 사랑에 무게를 더 실었다. 기존 평전에서 300여 차례 등장하던 '죽음'이라는 단어를 30회 수준으로 낮춘 것도 그런 이유다. 덧붙여 잘못된 사실은 일부 수정하고, 문어체의 문장은 구어체로 바꿔 읽기 쉽게 만들었다.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고 있는가?"
▲ 25년만에 새로 나온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 아름다운전태일 펴냄)ⓒ프레시안
이 작업은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전태일을 횃불이었다.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얼굴을 들추어 낸 횃불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횃불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있고 있는가?" 저마다의 작은 욕망을 위해 읽고 있지는 않은가? <전태일 평전>은 우리가 전태일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지시한다.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 속에 점철되어 있는 고뇌와 사랑을 읽어야 한다. 이 평전의 필자인 조영래 변호사의 삶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고 전태일을 우리들의 가슴 속으로 옮겨와야 한다. 이것이 전태일을 밝은 얼굴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죽음 그 자체보다 '살아있는 전태일'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 기념사업회 측의 설명이다. 평화시장 어린 시다들을 위해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고 "노임을 결정하는 협의를 할 때 약한 직공들 편에 서서 정당한 타협을 하기" 위해 재단사가 됐던 '아름다운' 그의 삶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기존 평전의 서문을 부록으로 빼고 새로 서문을 쓴 것도 그런 이유였다. 책임편집자였던 오도엽 작가는 "당시에는 분신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려 했던 것이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례가 아니었다"며 "1974년 조영래 변호사가 평전을 집필할 당시 죽음을 어떻게 미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오 작가는 "통계를 내보니 평전을 읽는 독자의 70~80%가 청소년인데 그들이 전태일의 삶을 보기 전에 죽음부터 보는 것은 기념사업회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제는 죽음 그 자체보다 삶과 그의 정신을 기억해야 할 때 아니냐는 얘기다.
"이제 전태일은 여러분에게로 간다"
새로 쓰인 서문도 '살아 있는 전태일'을 보여주는데 충실하다.
"오늘 전태일은 어디서 불타고 있는가? 전태일은 이 시각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대답은 이렇다.
전태일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속으로 되돌아가 그 안에 살아 있다. 아들이 죽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세월을 하루같이 병약한 체구를 이끌고 노동자들의 선두에 서서, 모든 잔학한 탄압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 이소선 씨. 이분은 후일 역사에 반드시 기록될 것이다.
또 전태일은 더욱더 심해지고 있는 억압 아래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는 민중의 숨결 속에 눈물 속에 죽음 속에 살아 있으며, 역경 가운데서도 생존권과 인간다운 노동을 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우리 노동자들의 뜨거운 가슴속에 살아 있다.
전태일은 부패와 특권과 빈곤과 폭압이 없는 내일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청년학생들을 비롯하여 자유와 정의와 진리와 평화와 통일의 새 역사를 창조해가고 있는 모든 이들의 손길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전태일은 여러분에게로 간다."
'투쟁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부도 분량을 대폭 줄이고 제목도 '1970년 11월 13일'로 바꿨다.
장기표 "시대가 바뀌었다…운동권의 전태일로 매몰되선 안 돼"
"사실은 내가 평전을 쓰다가 조영래에게 작업을 넘겨줬다"고 밝힌 장기표 이사장은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전태일은 너무 운동권의 전태일로 매몰된 측면이 있다"고 신판 개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누가 잘못했다기보다는 시대 상황이 그랬다. 이제는 시대도 바뀌었기 때문에 진짜 전태일의 진면목이 드러나야 한다. 전태일은 그 투쟁성도 뛰어났지만 밑바닥에 있는 인간의 성품이 너무나 자랑스러운 사람이다. 특히 전태일의 삶과 사랑은 청소년에게 굉장한 교훈 줄 수 있다."
장 이사장은 "새 책에서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더 큰 사랑과 지혜를 얻고 높은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돈도 학벌도 백도 없음에도 마침내 자기 뜻을 이뤄낸 성공담, 인간 승리의 내용을 부각시키려 했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잘못된 사회 문제와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필독서였던 <전태일 평전>을 '우리 시대 최고의 고전'으로 바꾸려 애썼다는 얘기다. 그는 "죽은 조영래 변호사도 죽기 전에 책이 너무 투쟁 중심이라며 나에게 고민을 자주 털어놨다"고 덧붙였다.
"분신 당시 스스로 라이타로 불 붙여"…일부 서술 고쳐
기존 평전에서 잘못 다뤄진 일부 사실도 바로 잡았다. 오도엽 작가는 "분신 당시 김계남이라는 가명의 친구가 라이타로 불을 붙여준 것으로 돼 있는데 확인 결과 이는 잘못된 것"이라며 "현장의 여러 진술로 전태일 스스로 불을 붙인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 고쳤다"고 밝혔다. 삼동회 친구들이 던져 준 것으로 기록된 근로기준법전도 본인이 직접 들고 나온 것으로 바로 잡았다. 기념사업회는 "새롭게 태어난 <전태일 평전>은 청소년들에게 더욱 친숙하고 정감 넘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내년이면 그의 죽음이 꼭 40년을 맞는다. 기념사업회는 '전태일의 삶'을 알리기 위해 '사상 연구 발표회' 등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장기표 이사장은 "청계 5가의 전태일 거리 및 다리 조성 사업과 함께 청소년에게 <전태일 평전>을 보급하는 사업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다시 태어나는 <전태일 평전>이 경쟁으로 내몰리는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꿈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 전태일을 다시 생각하며 2004/11/15 01:01
아래 퍼온 글은 4년이 넘은 글입니다. 당시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이었던 황광우님이 쓴 것이죠.
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읽었을 당시에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그걸 보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도 책꽂이에 꽂혀 있는 그 책을 훑어보면 무엇인가 벅차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벌써 열사가 죽은지 34년입니다. 열사의 기일이 우연히 제 양력생일하고 겹쳐서 항상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태일 열사가 묻혀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더랬습니다. 광주가 집이라서 5.18 망월동 묘지는 최소한 일년에 한두번은 가는데 말이죠. 그러다가 처음으로 올해 1월 제 학부 때 지도교수였던 김진균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처음으로 모란공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의 묘지도 볼 수 있었구요.
거기에 제가 아는 많은 분들이 묻혀있더군요. [감색운동화 한 켤레]라는 소설에서도 모란공원에 참배하러 온 내용이 나옵니다. 이제 수도권에서 모란공원은 거의 망월동 묘지와 같은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지는 않은지...
얼마전 신문에서 전태일이야말로 현대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서 누구에게든지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글을 봤는데,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 듯 여느 때보다 추모열기가 높은 듯 합니다.
어제 노동자대회 전야제 때에는 여는 노래로 '전태일, 민중의 나라'를 부르더군요. 설대 메아리에서 활동했던 변계원님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던 분입니다. 이 노래의 대중적 인기를 업고서 '전태일, 민중의 나라'를 만들었지요. - 이 만든 노래라서 노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그 노래가 나온 것이 조금은 신기했습니다. 그 노래조차 벌써 10년이 넘은 노래군요. 아래 노래는 메아리가 1992년 신입생환영제를 할 때 불렀던 것입니다. 출처도 메아리 홈페이지( www.meari.or.kr )입니다.
메아리 - 전태일, 민중의 나라
너의 죽음으로 더욱 아름다워진
저 푸른 하늘을 보아라 가슴벅찬 세상 보아라
너의 불타는 넋이 누리에 살아숨쉬니
역사의 새장을 열고서 그날을 맞이하리라
이제는 너의 이름 말하라 찬란한 민중의 나라
온세상 산천초목 짓푸른 투쟁과 노동의 깃발
드높이 드높이 높이 솟아
맞이하리라 민중의 나라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노래로는 '전태일 추모가'가 있습니다. 요새 정서에 맞지 않지요. 그래서 아는 사람은 많지만 잘 부르지 않는 노래입니다. 너무 처량하달까요.
------------------------------------------ 다시 읽는 전태일 일기
큰 산은 다가서 있는 지점에 따라 모습을 다르게 보여준다. 광주의 무등산은 가까이서 보면 봉우리와 능선으로 이루어진 보통의 산이지만, 조금 멀리서 보면 큰바위 얼굴처럼 그 잘 생긴 모습을 드러내다가, 아주 멀리서 보면 주변의 작은 산들을 치맛자락처럼 거느리며, 저 혼자 하늘 높이 치솟아 그 전모를 드러내준다. 훌륭한 책 역시 읽는 사람의 세상살이에 비례하여 독자에게 펼쳐 보여주는 넓이를 달리하는 것인가. 불혹의 나이에 접한 전태일 일기는 스무 살 때 읽었던 일기와도 다르고 서른 살 때 읽었던 일기와도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1, 전태일 일기와의 첫 만남
내가 전태일의 일기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 1학년이었던 1977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선배가 비밀리에 입수해온 전태일 일기의 복사본. 학회의 소모임에서 누군가의 독송을 들으면서 희미한 글자들을 따라 읽어 나갔던 전태일 일기는 우리에게 경악과 공포 그 자체였다. 학회에 남아 공부하는 것은 언젠가 선배의 길을 따라 데모를 하고 감옥에 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한 속내를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았던 우리 1학년들은 학회에 남느냐, 무슨 핑계를 대고 떠나느냐 속없이 고민하던 터, 자신의 몸을 불사른 한 노동자의 일기는 그 자체 우리에게 경악이었다. 우리는 신음하였다. "대학은 졸업하면 안 되는 것이고, 감옥을 나와 노동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 비밀 써클의 불문율이었던 까닭에 전태일 일기는 먼저 우리에게 무거운 중압감, 아니 압박감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스무살 나이의 대학 1학년생에게 전태일 일기는 소화불량의 문건이었다. 후배들의 안이한 생활 태도를 꾸짖고,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선배들이 욕심내어 선택한 것은 아니었는지. 하지만 이후 우리는 이른바 "쁘띠부르주아지적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민중과 더불어" 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였다. 77년 한 겨울, 투쟁 중인 동일방직 노동조합의 누이들을 만나기도 하였고, 가구 공장에 취업해 직접 힘든 노동도 해보았고, 80년도엔 사북에 가 광부들의 폭동을 취재하기도 하였고, 그리고 청계피복 노동조합에 들러 형들과 라면 먹으며 노동 현실을 배워 나갔다.
2, 삼십대 읽었던 전태일 일기
내가 전태일 일기를 두 번째 만난 것은 1980년대 중반,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된 <전태일 평전>을 통해서였다. 인천의 경동산업에 취업함으로써 그 오랜, 그 힘든 <노동 현장 속으로의 진입>에 성공한 나는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글로 옮길 것인가 고민하던 차, <전태일 일기>에 기록된 모든 문자들은 살아 일어나 노동자의 비애를 샅샅이 드러내고 있었다.
"이 밀폐된 닭장 속에 갇혀서, 끊임없이 재봉틀의 소음 속에서 그녀는 하루 종일 햇빛 한번 보지 못하고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노동을 한다. 작업 도중에 일어나 변소 한번 가려고 해도 주인 아저씨와 미싱사 언니들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녀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고된 것은 다리미질이다. 겨우 열서너 살짜리 소녀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을 훅훅 뿜어내는 그 무거운 다리미를 들고 눌지 않도록 온 신경을 써가면서 다리미질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나 두 번 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온종일 끝도 없이 되풀이 하는 것이 그뿐인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위험한 사다리를 타고 다락방을 오르내리며 공장 안의 크고 작은 온갖 심부름을 해야 한다."
이러한 노동현장의 열악한 근로조건에 대한 폭로를 넘어, 전태일은 남한의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모순을 극명하게 규탄하고 있었던 점이 나에게는 참 마음이 들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정말 그렇다. 이 분노는 식자들이 흔히 말하는, 책상 위의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끝없는 소외된 노동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였다. "어지럽게 들려오는 쇠금속 소리, 짜증 섞인 미싱사들의 언성, 무엇이 현재의 실재인지를 분간 못하면서 그 속에서 나도 부지런히 그들과 같이 해나갔다. 무의미하게, 내가 아는 방법 그대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이외에는 무아지경이다. 아니 내가 하고 있는 일 자체도 순서대로, 지금 이 순간에 해야 될 행동만이 질서정연하게 자동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실재의 나는 일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내 육신이 일을 하고,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때까지의 육감과 이 소란스런 분위기가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 긋고 나라시가 되고, 다 되면 또 재단기계를 잡고 그은 금대로 자르는 것이다. 누가 잘랐을까? 이렇게 생각이 갈 때에는 역시 내가 잘랐다.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렴풋이 생각이 확실해질 때는 퇴근 시간이 다 될 때이다." 하루 12시간을 똑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일해 본 노동자들은 누구나 겪는 체험이자, 노동자의 가장 근본적인 불행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태일은 소외된 노동을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 소외된 노동이 어떻게 인간의 삶 전체를 소외시키는지까지 밝혀내는 대목에서 우리는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맑스의 사상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젊은 노동자가 이렇게 <소외된 노동>의 개념을 정확히 서술할 수 있단 말인가? 전태일은 저주받을 소외된 노동자의 삶을 이렇게 시적 언어로 묘사하였다.
"얼굴은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꼭 마도로스가 지평선을 바라보는 그런 표정일세. 그저 무의미하게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사는 사람 같았네. 삽질을 하나 점심을 먹으나 시종 무표정일세. 만약에 그 기름에 절은 운전수 모자를 벗겨 버린다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바보가 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네. 그만큼 그 모자는 그 사람을, 그 돌부처 같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전체를 육체의 맨 꼭대기인 머리 위에 서서 감독하면서 그를 속세의 사람과 같이 만들어버리고 있었네. 지금 현재 삽질을 하고 있으니 말일세.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걸세. 얼마나 불쌍한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그렇다! 저주받아야할 불합리한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이다! 쪽박을 쓰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부서지지 않게 잘 쓰든지 아니면 아예 쓰지를 말든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저 무자비하게 사회는 자기 하나를 위해 이 어질고 착한 반항하지 못하는, 마도로스 모자를 쓴 한 인간을, 아니 저희들의 전체의 일부를 메마른 길바닥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렸다."
3, 불혹의 나이에 스무살의 전태일을 보다
돌이켜 보면 삼십대의 내가 주로 전태일의 일기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대목은, 자본주의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구절이었던 것 같다.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빈부격차, 노동자의 노예화, 열악한 노동 조건, 소외된 노동 등등 말이다. 그런데 이제 불혹의 나이에 들어서 전태일 일기를 읽노라니 내 체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가 다가왔다. 전에는 전태일을 열사요, 선배요, 스승으로 바라 보았다면, 이참에는 <스무살의 앳된 청년 전태일>을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전태일에게는 선배도 스승도 없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삶을 끌어오기까지 우리를 이끌어준 선배나 존경하는 스승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가난한 전태일에게는 운동권 대학생도 없었고, 그에게 <의식>을 고취시키는 책도 없었다. 따라서 자신을 분신하게 되기까지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에게 가혹한 채찍질을 해나가는 전태일의 정신은, 도대체 무엇으로 해명해야 하느냐 하는 의문이 발생한다. 예수도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게 되기까지 깊은 고뇌에 젖은 것으로 안다. 허나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33살이면 인생에 대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나이이다. 그런데 나이 스무 두살이란, 너무나 어리고, 너무나 앳된 나이가 아닌가? 나이 스무 두 살은 이제 인생에 대해 갓 눈을 뜨는 시기요, 수많은 낭만적인 꿈을 갖고 열정적으로 인생을 열어나가야 할 나이 아닌가!!! 얼마나 고뇌가 치열하였길래, 얼마나 자기에 대한 학대가 끔찍했길래, 자신의 몸을 불사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까지 도달하였을까?
이참에 다시 읽는 전태일 일기에서 내가 품었던 의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일기장을 이곳 저곳 뒤적여 나갔다. 전태일의 분신은 그가 거친 가난한 환경 때문이었을까?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했고, 밥이 없어 굶주려야 했고, 한 끼 먹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문을 팔아야 했고, 남대문 시장에서 리어카 뒷밀이를 해야 했던 전태일의 어린 시절은, 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전태일만의 고난이 아니었던 것으로 나는 안다. 아버지가 사업하다 사기꾼에게 잘못 걸려 패가망신하고, 술주정꾼으로 타락하고, 어머니는 식모로 나가고, 쌀 한 톨 없는 어두운 집구석에서 동생들과 궁핍의 세월을 견뎌야했던 경우가 어찌 전태일 뿐이었던가?
대개의 경우 모진 삶은 사람의 마음을 모질게 만든다. 196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악독한 사회는, 오히려 악독한 인간형을 대량으로 만들었지 않았는가? 자기 것을 챙기지 않으면 굶주려야 하는 사회, 오직 자기만을 위해 몸부려쳐야 겨우 생존의 조건들을 손에 쥐는 사회, 강자에게는 온갖 굴종과 아첨을 떨고 약자에게는 오만과 폭력으로 대하는 것이 처세술로 통용되는 이 사회, 친구의 피를 뽑아 병원에다 내다 팔아먹은 깡패 녀석들이 이후 떼부자가 되는 이 사회, 부모형제, 친인척의 돈들은 물론 은행의 공금을 모조리 긁어다 훔쳐 먹어야 성공하는 사장님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사회에서 우리는 대체로 <인간의 순결한 마음>을 잊은 지 오래다.
4, 이웃이 겪는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
그런데 전태일은 특이하다. 남아있는 일기장을 뒤적여 보면 모질게도 고생만 해온 전태일의 마음은 순결하기 그지없다. "나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그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려운 이웃이 겪는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 어려운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맞이하는 전태일. 이 마음이 전태일의 신화를 만든 동력이 아니겠는가?
1960년대와 2000년대를 비교하자면 가장 극명한 차이는 일인당 지엔피의 차이일 것이다. 일인당 지엔피 300달러가 되지 않던 1960년대와 일인당 지엔피가 1만달러를 넘긴 2000년대의 차이는 물질의 소비량일 것이다. 그 시대를 겪어본 이는 알겠지만, 1960년대에는 끼니를 굶는 날이 밥 먹는 날보다 많았다. 적어도 도시 빈민들에게는. 하지만 요즈음 밥 굶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1960년대에 승용차를 굴리는 자는 모두 부르주아지였다. 요즈음은 직장인이나 백수들이니 너나 없이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 이 물질의 풍요를 구가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자연 환경의 파괴 보다 더 안타까운 우리의 상실은, 바로 <인간의 마음>이 아닐지.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했던 전태일의 순수를 우리는 잊은 지 오래이지 않는가?
"오다 파출소에서 자고 왔어요. 어머니가 나 집 나올 때 차비 30원을 주잖아요. 시다들이 밤잠을 제대로 못자서 낮이면 꾸벅꾸벅 졸고, 일은 해야 하는데 점심까지 쫄쫄 굶길래 보다못해 그 돈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여섯 사람한테 나눠주었더니 한 시간 반쯤은 견디고 일해요. 그래서 집에 올 때 걸어왔더니 오다가 시간이 늦어서 파출소에 붙잡혔어요."
청량리에서 도봉산 수유리까지 얼마나 머나먼 길인지, 시골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족히 세 시간은 걸어야 되는 이 머나먼 길을 어린 시다들의 배고픈 배를 달래 주기 위해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었다는 전태일의 행적이야말로, 평전을 읽을 때마다,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누가 보아주는 일도 아니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주머니가 풍족해서도 아니었다. 자신 역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무려 세 시간을 걸어야 함에도, 핏기없는 굶주린 어린 여공들을 보노라면, 그냥 버스비를 털 수밖에 없었던 전태일.
수유리의 판자집에 살면서, 아버지는 실직자인 집안을 이끌면서 전태일 역시 돈문제로부터 초연할 수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28일까지 방을 비우라니 정말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운명이다. 이제 겨우 정신 좀 차리려고 하니까 또 고난이 온다. ... 오늘도 예나 다름없이 이불 속은 차갑구나" 방값이 없어 쪼들리고, 연탄 땔 돈이 없어, 늘 겨울을 찬 방에서 떨며 지내야 했던 전태일. 왜 돈의 처절함을 몰랐을 것인가?
"2백원을 가지고 벌써 80원을 썼으니 아무리 절약을 해도 19일까지밖에 못 가겠구나. 20일 날 인덕상회 98호집에 작업복 일을 임시 하러 가기로 했지만 민생고 해결 때문에 고민이구나. 일은 하러 가리고 했지만 먹을 게 있어야 하지." 호주머니에 딸랑거리는 동전 몇 푼밖에 없을 때, 사람은 쓸쓸해진다.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 하나. 자존심을 팔 것인가, 굶주릴 것인가 사이에서 번민해 본 이들은 돈이 소중하기 보다 돈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안다. 전태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일기를 남긴 적도 있다.
"내가 직장 생활 근 3년 고생해서 얻은 건, 인격과 경제는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3년 동안의 고생과 14년 동안의 고역이 나를 경제 문제 계산기로 만든 것이다. 언제나 식생활 문제로 골치를 아파온 소년 시절이 아니던가?" 그렇게 고생을 하며 살아온 그가 어린 여공들의 핏기없는 얼굴을 보며, 자신의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었다고 하는, 비밀은,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고귀한 가르침이 아닌가 한다.
5, 더 낮은 곳을 향하여
전태일의 일기를 읽노라면 참 이상한 대목이 나온다. 3년 동안 고생해서 올라간 <재단사>의 지위에 대해 전태일은 끔찍하게 자학하였던 것 같다. 밖에서 보자면 다 똑같은 공돌이들인데, 모두 다 먼지 풀풀 나는 작업장에서 모두 다 하루 14시간씩 장시간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인데, 월급 좀 많이 받는 재단사가 된 후, 전태일은 자기 보다 더 낮은 곳에서 일을 하는 미싱공이며, 시다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넘어, 자신의 고급스런 지위에 대해 끝없는 자학을 하였던 것 같다.
친구 원섭이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자. "종업원 대부분이 여자로서 평균 연령 19-20세 정도가 미싱을 하는 사람들이고, 14-18세가 시다를 하는 삶들일세. 보통 아침 출근은 8시 반 정도. 퇴근은 오후 10시부터 11시반 사이일세. 어떤가? 너무 지루하다고 생가하지 않나. 여기에 문제가 있네. 시간을 따져 보세. 하루에 몇 시간인가? 1일 14시간일세. 어떻게 어린 시다공들이 이런 장시간을 견뎌내겠는가? 연령이 많은 미싱공들도 마찬가지일세. 남자들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이, 더구나 재봉일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고된 노동일세. 정신과 육체를 조금이라도 분리시키면 작업이 안되네. 공사판 인부들은 육체적 힘을 요구하고 사무원은 정신적 노동을 요구하지만 재봉사들은 양자를 요구하거든. 그 많은 먼지 속에서 하루 14시간의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롭네. 부잣집 자녀들 같으면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한창 재롱이나 떨 나이에 생존경쟁이라는 없어도 될 악마는 이 어린 동심에게 너무나 가혹한 매질을 하고 있네." 자신도 노동자이면서 어린 시다들과 미싱공들의 힘든 노동조건에 대해 이토록 연민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지위에 대한 자학이 깊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여 전태일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에 이렇게 쓰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이 사회는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이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착하디 착한 깨끗한 동심을 좀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서는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 못합니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서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서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별로 높은 지위도 아닌 재단사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자기 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노동자들을 향해 나아가고 고민하는 전태일.
노동조합 위원장이 된 뒤로는 현장의 힘든 사정을 잊어버리기 쉬운 오늘 우리들의 세태, 같은 현장에서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비정규직 노동 형제들에 대해, 그들의 어려운 근로조건에 대해 냉담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의 세태를 바라 볼 때, 겨우 재단사의 지위에 올라서조차 자신의 고급스런 지위를 자학하는 전태일의 마음은, 오늘을 반성케하는 거울임이 분명하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으로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라는 일기를 남기고, 몸에 불을 당그며 한 젊음을 역사에 바친 전태일. 그가 마지막 외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이미 실현된 구호이지만,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남긴 마지막 말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전태일의 일기를 읽는 우리들이 가장 충격을 받는 장면은 역시 분신으로 가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충격의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가 듣지 못하는 전태일의 외침이 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인간을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것, 인간을 일하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것, 인간의 인간됨을 죽이고 있다는 그의 고발이다.
나는 이 고발을 철학자들의 고결한 언어로 바꿀 생각이 없다. 바로 이것, 전태일을 근본적으로 괴롭힌 것은 바로 노동자를 철저히 쓰레기 취급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노동자들은 전태일보다야 양호한 노동조건 위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전태일이 그렇게도 거부한 이 <소외된 노동의 본질>이 조금이라도 바뀌었는가? 두 달이 지나면 21세기를 맞이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전태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까?
열린우리당이 국가인권위의 비정규법안에 관한 의견표명과는 관계없이 정부안을 밀어부치겠다고 하였다 한다. 게다가 이목희 열우당 의원은 이런 인권위의 결정이 황당무계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과연 그는 이전에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이 맞는가? 그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아래 내용은 이목희 의원 브리핑 내용 중 일부.
이 부분이 인권위의 업무 영역인지 의아하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 부분과 관련해서 의견 표명을 하지 않는다. ... 정치적 인권과 달리 경제적 인권을 고려할 때 수많은 요소를 봐야 한다.
--> 인권에도 영역이 있는건가? 세계 어느 나라도 이에 대해 의견 표명을 하지 않는다고? 우리나라만큼 비정규직의 차별이 있는 곳이 있었나?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누구는 배이상의 보수를 받는 것, 그게 정상적인가? 그런 나라가 존재하는가? 경제적 인권을 고려할 때는 수많은 요소를 봐야 한다고? 그럼 인권위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결정을 했다는 건가? 2년 동안 뭐했을까?
인권위 권고는 국민경제 전체적 관점과 경영관점의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인권위 자료를 보면 매우 황당한 결정을 했다. 고용안정은 인권위 판단사항이 아니다. 비정규직이 과반수를 넘는다고 했는데, 아무런 기준도 없고 언급이 없다.
--> 고용문제가 바로 한 사람, 한 가족의 생계와 관련된 것인 만큼 가장 중요한 인권영역이라는 사실을 모르는지... 그런데 왜 인권위의 판단사항이 아니라는 건가. 국민경제 전체적 관점은 도대체 누구의 관점일까? 그 국민경제에서 비정규직은 제외되는 걸까. 비정규직이 어느 정도인지는 왠만한 사람은 다 아는 건데, 노동운동했다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말하면 되나.
포지티브는 당정협의회에서 확정한 바 있다 이 또한 정책의 문제이지 인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국가인권위 의견표명과 관련, 우리당은 인권위와 관련 없이 국회의 길을 가겠다. ... 인권위의 의견은 수많은 의견 중에 하나로 간주하겠다. 그리고 우리 갈 길을 가겠다.
--> 포지티브는 정책의 문제일 뿐이라고? 정책과 인권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네거티브로 하겠다는 그 정책이 바로 인권침해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인권위와 관련 없이 국회의 길을 간다면 말리지 않는다. 당신들이 가는 길이 바로 어떤 길이라는 것은 역사가 알려줄 것이다.
이목희 의원에게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어보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사설이 길었다. 아래 글은 박준성 님이 노동과세계에 연재글로 쓴 것이다. 이와 함께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과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에게도 진정 전태일의 길을 가고 있는지 되새겨보기를 충고한다.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40분쯤.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한 재단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하였다. 그는 불붙은 몸을 다시 일으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다. 22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었다.
열 걸음 앞서간 불멸의 이름 전태일 열사가 태어난 해가 1948년이니 아직 살아 있다면 57살,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다. 그가 한 점 불꽃으로 스러지고 3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여 식민지로 지배한 기간 만한 세월이 지났다. 1970년 이후 태어난 사람들이 이제는 현장의 중심이 될 나이가 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남긴 유서에 이런 말이 들어있다.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는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그가 남긴 '굴려야 할 덩이'를 그 동안 얼마나 굴려왔을까.
'한 사람이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이 한 걸음을!'. '대중성'의 핵심이다. 함께 가지 않으면 힘이 없다. 사람들과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 그러나 열 걸음 먼저 걸어가는 사람이 없으면 열 사람이 한 걸음도 나가기 힘들다. 누군가 앞서가는 사람이 있어 함께 그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길이 된다. 전태일 열사는 열 걸음 앞서 걸었던 사람이다.
전태일 열사는 지금까지의 끝이며 지금부터의 시작인 '지금여기'서 언제나 나를 다시 추스르며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선배노동자다. 그의 삶과 투쟁은 한편으로는 후배들의 투쟁으로 계승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구성된 기록으로 전해져 왔다. <전태일 평전>이라는 불멸의 기록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들이 얼마나 전태일을 '전태일'로 기억할 수 있었을까.
그는 3,4년 동안이나 청계천6가에서 도봉산 아래 창동까지 두 세 시간 걸어 다니면서 아낀 버스비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곤 했다. 두 번이나 해고되어 떠났던 평화시장을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초등학교도 다 다니지 못하고 청옥고등공민학교도 다니다만 학력으로, 피곤한 몸을 일으켜가며 깨알같은 한자투성이의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옥편을 뒤져가며 공부했다. 바보회 삼동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평화시장 노동자 실태를 조사하고, 고발하고 투쟁하다 끝내 목숨까지 던졌다. 전태일 열사에게 '여전히' 배워야할 핵심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강한 '동지애', '학습'하고 '조직'하고 '실천'했던 삶과 투쟁이다. 그러나 이 몇 줄 가지고는 도저히 전태일 열사를 제대로 알고 느낄 수 없다.
전태일에 대해 다들 잘 아는 것 같지만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는 젊은 노동자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전태일 열사와 노동열사들이 묻혀 있는 마석 모란공원을 가 본 사람은 더욱 드물다. <전태일 평전> 한 번 읽어보고, 모란공원 한 번 찾아보면서 '새롭게' 배우는 일은 열사가 분신한 뒤 태어난 젊은 노동자의 몫이다.
읽어봤단 젊은 노동자 보기 어려워
처음부터 '전태일 평전'은 아니었다. 1983년 6월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제목이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조차 밝히기 힘든 상황이었다. 광주를 군화발로 짓밟고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의 폭압정치가 계속되던 때였다. '판매금지' 조치를 뚫고 나온 이 책은 저들에게는 '금서'이지만 역사의 진보와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에게는 '필독서'이었다.
1991년 1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개정판이 <전태일 평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다. 지은이도 '조영래 변호사'라는 걸 밝혔다. 그러나 조영래 변호사는 개정판이 나오기 바로 전, 자기가 쓴 책이 자신의 이름을 달고 나온 것도 모른 채 1990년 12월12일 폐암으로 숨을 거뒀다. 그의 주검도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무덤 저쪽에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