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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선생의 즉문즉설

새벽길 2008. 11. 26. 17:52
이 기사도 종이신문으로 한겨레를 보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기사이다. 발췌하려 했는데, 이 기사는 담는 것을 막아놓았기에 꼼수를 부렸다. 블로그로 스크랩하여 거기에서 퍼온 것이다.
 
인터넷상으로 읽어보니 종이신문보다 훨씬 내용이 많다. 김종철 선생이 하고 싶어 했던 얘기들을 풀어놓아서인지 생각할 꺼리가 많다.
 
[녹색평론]에 실린 글들은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글이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쪽에 속한다. 그리고 전반적인 논지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지점까지 파고 들어가면 아직 김종철 선생과 [녹색평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소화하지는 못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김종철 선생은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없는게 미전향의 사상"이라고 하면서 절체절명에 직면해 보면 전향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이를 '그럭저럭주의'라고 할 만도 한데, 나에게 [녹색평론]은 이와는 반대로 근본주의적으로 느껴져서 부담이 된다. 나는 최근에 '근본적'이라는 개념에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과 진보를 고려한 상태에서 생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난한 삶을 견딜 수 있지만, 그게 과연 윤택한 삶인지에 대해선 자신하지 못한다. 얼마 전에 보았던 SF소설 [키리냐가]를 보면서 거기에 담긴 문제의식에 공감했던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아무튼 이 부분은 어렵다.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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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의 길 묻다④ 김종철 선생 즉문즉설 (한겨레, 조현 종교전문기자, 2008-11-26)
“요즘 덮어놓고 생명, 생명…말의 타락 극한”
경제발전으로 근본 잃어, 진보 아닌 벼랑끝 향해
대안학교 다녀 농촌 살게 하고 대학 보내지 마라

 
스님, 목사, 신부들이 직접 거리에 나와 생명운동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있느냐? 없지 싶다. 그 분들의 방식으로 운동을 하니 세속인들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지율 스님이 단식을 한참 할 때 맨날 잔소리했다. 빨리 쓰러지라고. 단식이 그렇게 50일, 60일 넘어가면 앞으로는 한국에선 단식할 사람이 없다고 그랬다.
 
권정생 선생이 쓴 <우리들의 하느님>은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쉽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그런데 나는 안 된다. 권 선생은 국민학교 나왔는데 나는 대학원 나오지 않았느냐. 더구나 30년 동안을 대학에서 가르치고, 영어를 우리말처럼 썼다. 내 삶이 대중들하고 같이 있어봤느냐. 아무리 의식이 날카로워도 대학 선생일 뿐 대중들 속에 뿌리가 없다.
 
성공 여부를 처음부터 생각하면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할 것이고, 백전백패할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리에서 이걸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녹색평론> 안하면 미칠 것 같아서 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국가 권력을 뺏을려고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의 권력을 뺄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으로 성공 여부를 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관되게 성실하게 나아가는 것, 그 자체가 성공이다. 녹색 운동, 생태주의 운동, 생명 살리자는 운동은 솔직히 꼭 성공을 기약 못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성공하지 못할 일이라도 할 수 있다. 각자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 효과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가는 게 좋다.
 
돈을 벌려는 산업과 생명이란 말이 함께 붙어서는 안된다. 말의 타락이 극한에 이르고 있다. 황우석 사태가 대표적이다. 생명을 살린다고만 하면 앞뒤 따지지 않고 지고의 선으로 여기는데, 무조건 생명을 연장하며, 인간의 한계를 무너뜨리는게 생명 존중인가? 불교 스님과 신자들이 왜 그렇게 황우석을 옹호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된다. 생명이란 말을 좀 아껴야한다. 좋은 말도 너무 많이 쓰면 본래 맛이 없어져 버린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이미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이게 길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산력의 발전을 지향하는 것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매한가지인데 발전이란 이름으로 이렇게 가는 것은 사는 길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자본주의를 그대로 두고는 아무 것도 안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갈수록 많이 어려워질 것이다. 근본적인 딜레마가 지금과 같은 경기후퇴다. 나는 몇년전부터 이런 사태가 올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태가 올 때마다 없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니, 그런 점에선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일단 다른 문제는 접어놓고 일차원 적으로 생각하면 자원 파괴, 환경 파괴는 줄어들 것이다. 이런 현상을 잘 활용해 많은 사람들이 자립적으로, 협동적으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이제 조금이라도 체계적으로 이런 시기에 비자본주의적으로 사는 방법을 개척해야 한다.
 
우리 부모들은 근본적으로 강인하기도 하고, 어떤 선은 지켜야 한다고 했고, 자신은 돈이 없어도 당장 굶어죽는 사람은 도와야 한다고 했고,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도왔다. 그것이 마을의 힘이다. 모든 문제가 마을을 잃어버린 데서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신경질이 가득 찼다. 남에게든 자기에게든 화가 잔뜩 나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너무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보여줘도 안된다.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속으로는 행복해도.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들은 자식들을 대안학교 보내는 분들과 자기 자식 대학 안 보내는 사람들이다. <녹색평론>은 내년부터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일 것이다. 농민들이 자식을 도시학교 보내고, 대학 보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노예가 된다. 자식들을 도시 학교 안 보낸다면 편하다. 농민들이 자식 대학 안 보내고, 도시 학교 안 보낸다는 각오를 하고 살면 농촌이 좀 더 윤택해질 것이다.
 
문제는 그만한 용기가 있느냐, 사람답게 살 것이냐다. 이제 도시에서 대학 나오고 박사 받고도 무능력자가 많다. 한국에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볼모 잡혀 있나.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국제중 얘기에 흥분하는 이유가 뭐냐. 내가 초연하면 미친 놈들이 국제중을 하든 말든 상관할 필요 없다. 저 사람들 설득해서 같이 갈 수는 없다.
 
우리끼리 행복하게 사는 것, 그중의 하나가 대안학교 보내는 것이다. 대안학교가 모자라면 만들면 된다.
 
노동운동은 갈수록 벽에 부닥칠 것이다. 농촌이라는 근거지가 어느 정도 살아있을 때 자본가들이 노동운동에 겁을 낸다. 노동자들이 돌아갈 데가 없다면 막 대한다. 영국 노동운동을 공부해보니, 산업혁명 초기에 제일 활발했다. ... 우리나라 비정규직 절대 해결 안 된다. 서비스직에서 그만큼 직장이 나온다면 지구로선 더 비극이다.
 
동아시아에선 소농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게 진보다. 서구와 다르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길을 생각해야지. 농촌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농촌을 어떻게 살리느냐가 문제다.
 
의료 생협이 전국적으로 있다. 광주에서도 계획하고 있다. 꼭 의사가 참여 안해도 된다. 부황, 침, 뜸으로 치료된다. 그런 걸로 치료 안 되면 죽으면 되잖은가. 억지로 살려고 하는 데서 모든 게 뒤틀어진다. 장기이식이 그렇다. 장기이식을 해서 생명을 5년간 연장하는 대가로 들어간 돈이 15억원이다. 그건 의술이라고 할 수 없다. 특수한 귀족의 사치품이다. 그것까지 우리가 나눌 수가 없지 않은가. 민간의료에 의존해야 삶의 질이 달라진다.
 
농촌생활을 하면 사람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끊임 없이 배워가지 않을 수 없다. 우주에서 한계를 가진 게 인간이라는 것을 일년 사시사철 깨우쳐준다. 그런데도 근본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무시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이발사 하고 국수 장사하더라도 동네에서 신망 받고 좋은 인간관계 유지하면서 민주시민으로 살면 엘리트다. 이런 식으로 엘리트들이 넓혀질 수 있는 것이다. 충분히 대안학교 엘리트 교육이 가능하다. 요즘은 엘리트들이 더 자기밖에 모른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재산은 타자다. 우리 부모는 딴 사람에게 절대 가혹하게 하지 마라, 원망 살 일은 하지 마라고 했다. 타자를 왜 만나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만난다. 그래서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니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라는 추상적 논리는 의미 없다. 그렇다고 자살폭탄을 긍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 3자가 겪어보지도 않고 얘기할 수는 없다. 근대 일본의 양심적 지성 중 스루미 순스케가 있다. 그가 전후에 한 것이 2차대전 말기 전향자들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나서 그는 전향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한다고 했다. 절체절명에 직면해 보지 않고 전향을 무조건 욕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용서 할 수 없다고 했다. 절벽을 맞닥뜨리지 않고 어떻게 쉽게 말할 수 있는가.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없는게 미전향의 사상이다.
 
타자들의 극한적 상황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불합리하다. 자살폭탄에 대해서도 절대적으로 규정 지을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