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민주주의, 국가론

경향신문 시리즈 '흑백 민주주의'

새벽길 2021. 3. 21. 19:48


경향신문의 흑백 민주주의 시리즈가 끝났다. 처음부터 잘 보긴 했는데, 마지막으로 갈수록 조금 애매한 느낌이고, 종합이 되지 않아서 아쉬운 시리즈다. 마지막에 전체 시리즈를 종합 논의하는 좌담회 같은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 물론 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여 평할 수 있는 전문가가 있진 않을 듯 하지만서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01060001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①]흑과 백 사이, 여백 없는 사회…공존을 찾아서 (경향, 백승찬·김지원 기자, 2021.01.01 06:00)

정치적 피아 구분이 뚜렷한 이슈, 특정 집단의 관심을 받는 이슈, 다수 유권자의 표를 모을 수 있는 이슈, 대중의 공분을 자극하는 이슈는 두드러진다. 반면 트레이너, 쇠약한 노인, 종합부동산세를 낼 일 없는 지방 소도시 세입자, 기후변화로 황폐해진 바다에서 물질하는 제주 해녀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서울 등 대도시 중상층의 의견이 공통감각인 것처럼 과잉대표돼 있다”고 말했다. 한숭희 서울대 교수는 “ ‘의제’란 자신의 입장에서의 유불리를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을 분석하고 해결점을 모색하는 과정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모든 문제가 정치적 승패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경향신문이 공공의창, 피플네트웍스 리서치와 함께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97.2%의 한국인들은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민들 비율 역시 48.5%에 달했다. 두 비율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촛불 이후 민주주의’의 과제다.

코로나19의 확산은 정부의 빠르고 정확한 대응을 넘어, 공동체의 연대와 신뢰가 재난을 극복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다시 확인시켰다. 다가올 코로나19 이후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다양한 목소리를 고르게 존중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01060010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①]공생과 동떨어진 공론장, 절박한 삶은 ‘편’싸움에 밀려나 (경향, 김지원·윤승민·조문희 기자, 2021.01.01 06:00)

전문가들이 말하는 ‘위기의 민주주의’

‘코로나’라는 재난, 약자 먼저 쓰러뜨려

이전부터 소리 없이 곪고 있던 문제들

삶 안정시킬 수 있는 큰 비전이 필요 

■“한국 사회 근본부터 성찰해야”

사회적으로 테두리 지어지지 않는 특고·청년 등 ‘삶의 붕괴’에 대해선 대변되는 이야기도, 대책도 없어 

코로나19 사태는 노동, 교육 방식부터 사람들 사이 관계 맺음, 사회의 작동 구조까지 바꿔놓고 있다. 인터뷰에 응답한 이들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사회 계약을 ‘새로 쓰는 수준’의 거시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주거, 교육, 생계 등 여러가지 면에서, 어떤 방향에서든 삶에 대한 공격이 올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며 “위험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위험요소를 줄이고 삶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큰 비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장은 “시위를 막기 위해 세워진 광화문 차벽, 방역과정의 인권침해 등 익숙하지 않은 ‘예외상태’에서 벌어진 문제를 어떤 틀로 다룰지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포스트 코로나 국면에서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더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생업에 바쁘고 자신을 대변할 정당·직능단체가 없어 홀로 불합리함을 감당해야 하는 ‘6411번 버스’ 사람들은 코로나 시대에 한층 취약하다. 전문가들이 꼽은 대표적인 이들은 청소업, 미용업 등 비조직 취약노동자군과 노인, 실업청년, 이주노동자 등이었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는 ‘평범한 다수’의 목소리가 배제되고 있다고 봤다. 그는 “지방대생, 중소기업 취업자, 지방 거주 여성 등 기성 언론에서 대변되지 않는 목소리들이 많다”며 “(과대대표되는 집단 외의 이들은) 신문에 사건·사고나 산재 때만 드러나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엄기호 사회학자는 “세신사, 특수고용직 등 사회적으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사람의 삶의 붕괴에 대해선 대책, 이야기가 없다”며 “그들을 적극적으로 공론장에서 대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문제들이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차별, 혐오, 불평등 등을 비롯해 장애인·노인을 시설에 수용하는, 기존엔 당연하게 여겨져온 관행 등에 대해서도 재고와 반성이 요청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는 “비포(Before) 코로나에 대한 더 많은 성찰, 논의를 통해 포스트 코로나를 고민해야지, 새로운 곳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현재를 외부적으로 관찰하는 기회가 생겼는데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임에도 비대면으로 대체될 수 없는 돌봄, 의료, 택배 등 필수노동의 가치도 재평가되고 있다. 권김현영 여성학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논하기 위해서는 돌봄노동, 배달노동 등 필수노동자 의제를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안효상 기본소득네트워크 상임이사는 돌봄 노동과 ‘의료 공공성 문제’를 연결하면서 “겉으로는 별문제 없어보이나 밑으로 곪고 있는, 누군가의 희생에서 유지되는 것들이 피로도가 높아지면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소득 재분배, 경제 민주화 등 코로나19 이후 한층 심화할 양극화에 대비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금현섭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뉴노멀로서의 저성장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활동가는 “상위 10%는 소득이 느는데, 하위 50%는 정체되거나 축소되는 등 코로나 위기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편’으로 갈라진 공론장의 희생자는

SNS·유튜브 등 ‘공론장 과잉’이지만 평범한 다수의 목소리는 통로서 막혀

지금이 ‘사회적 계약’ 새로 써야 할 때

많은 시민들이 정치·사회·경제 이슈를 습득하는 장이 된 유튜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인터넷 공론장은 ‘내 편·네 편이 확연히 갈라진 운동장’이 된 지 오래다. 전문가들은 SNS나 시사·정치 유튜브 등에서의 편향이 심각하다고 지적하면서 그 책임은 현재 공론장의 작동 방식이나 적절한 의제를 제시·선도해야 할 책무가 있는 기성 언론과 정치권에 있다고 지적했다.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인터넷 공론장의 과격화는) 사회적 갈등이 분출되고 수렴, 논의되는 장이 없는 탓에 갈등이 개인화되면서 주목받으려는 노력이 그렇게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 ‘갈등의 사회화’ 과정을 겪지 못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의제에 대한 이야기가 공론장에 적은 점도 문제로 지목됐다. 김공회 경상대 교수는 “공론장에 의제가 너무 많은 것보다도, 실제 자신의 삶과 밀접한 의제가 없는 게 문제”라며 “지방 청년들은 지방 청년 실업률은 모르면서도 자기와 관계 없는 이슈들에 폭발하는 상황이다. 시민의 삶을 아우르는 사회경제적 상황과 관계된 의제들이 많이 올라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삶의 질과 직장 민주주의가 개선되지 않으면 진전됐던 정치적 민주주의마저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며 삶에 밀착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를 결집하기 좋은 이슈, 자극적인 언사만 부각되는 상황도 문제다. 진영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상황 탓에 다루기 복잡한 사안들은 중요한 의제라도 아예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여러 집단이 머리를 맞대 의견을 교환하고 합리적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협치 과정들이 굉장히 약해졌다”고 지적했다.

기본소득이나 전국민고용보험 등도 마찬가지다. 복지 혹은 노동·생산·분배 체계의 근본적 변화 대신 손쉽게 ‘눈에 보이는’ 대안만 가져오려다보니 정작 문제의 핵심이 되는 논의는 지지부진하고 의미 없는 단어만 공론장에 오간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공의료위원장은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유지 차원에서 복지국가의 재분배 모델들이 큰 그림에서 설정돼야 하는데 이념, 어젠다 방향 자체가 뚜렷하지 않아 (의미가) 혼란스럽고 허황된 상황”이라며 “포괄적 복지국가로의 담론적 합의와 공공의료 강화 등의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01060006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①]국민 48.5% “한국 민주주의 제대로 작동 안 한다” (경향, 조문희 기자, 2021.01.01 06:00)

‘소외’되는 사람들

http://img.khan.co.kr/news/2021/01/01/khan_YmozSI.jpg

문재인 정부의 3년6개월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실험이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촛불집회, 댓글, 정책 제안 등을 직접민주주의의 예시로 거론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서 20만명 이상 동의를 얻은 청원에는 정부 관계자가 직접 답했다.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여부는 공론화위원회에 맡겨졌다.

정작 묻지 않은 질문들이 있다. 시민은 오늘 민주주의가 돌아가는 방식에 만족하는가. 시민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코로나19 확산 후 이 물음들은 더 절실해졌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에 따라 재난에 대한 대응의 효율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2021년을 앞둔 지난 12월,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1021명을 설문조사했다. 비영리 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과 설문을 공동 기획하고, 피플네트웍스 리서치가 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에서 총 24개 문항을 제시했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과 평가, 코로나19 확산 이후 불편과 정책적 대응에 대한 만족도 등의 문항으로 설문을 꾸렸다.

응답자의 대다수인 97.2%는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봤다. 과반수인 51.5%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답변을 내놨다. 이는 나머지 48.5%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는 뜻이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민주주의 현실에 부정적

48.5%가 제대로 작동 안 된다 응답

취약계층일수록 부정적 평가 높아

“목소리 내도 정책 반영 안 돼”42.4%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데는 대다수 시민이 동의했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시민의 의견을 고루 반영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왔다. 본인이 가진 문제가 사회 이슈로서 잘 다뤄지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목소리를 내긴 하지만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다’(42.4%)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생업에 바빠서 시간이 없다’(20.0%), ‘목소리를 낼 창구가 없다’(15.5%)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정부와 정치권이 시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넘어, 목소리를 낼 기회 자체가 없다고 인식하는 시민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터 등 일상에서 부당한 일을 겪을 때 어디서 도움을 받느냐’는 질문에도 공식 기관을 외면한 시민이 많았다. 28.1%의 응답자가 ‘경찰·검찰·노동청·인권위 등 국가기관’을 거론했지만, ‘가족’이라는 답변이 23.0%, ‘없다’도 14.4%였다.

스스로를 취약계층이라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전체 응답자의 37.3%가 자신을 취약계층으로 봤다. ‘한국 사회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들 중 55.7%가 ‘매우·대체로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취약계층이 아니라고 답한 이들은 반대로, 55.8%가 한국 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http://img.khan.co.kr/news/2021/01/01/l_2021010101000006400314882.jpg

■민주주의에 대한 두 가지 시선

긍정 평가 첫 이유 ‘개인 권리 보장’

부정 평가 39%는 “사회 갈등 증폭”

‘시민 참여·행동’ 중요한 요소로 꼽아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긍정 평가한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기 때문’(30.9%)이었다. ‘부당한 권력을 감시·제어할 수 있기 때문’(26.9%), ‘다수가 원하는 의견이 반영되기 때문’(20.2%) 등의 선택지도 다수 표를 받았다.

다만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봤다. ‘사회 갈등이 오히려 증폭돼서’(39.5%), ‘결정에 시간이 오래 걸려서’(20.0%)가 답변 1·2위를 차지했다. ‘내 삶이 나아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16.9%)라는 답변도 많았다.

민주주의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가장 많은 응답자들이 ‘시민의 직접 참여와 행동’(30.0%)을 꼽았다. ‘사회적 갈등·균열을 대표하는 정당 등 대의기구’를 답한 경우는 7.3%에 그쳤다. 해당 선택지는 통상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대의제)에 대한 설명으로 분류된다.

중요시하는 민주주의 요소에 따라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가 달랐다. ‘시민의 직접 참여와 행동’을 고른 응답자 3명 중 2명(67.2%)은 현재의 민주주의에 만족했다. ‘사회적 갈등·균열을 대표하는 정당 등 대의기구’를 고른 응답자들은 반대로 3명 중 2명(67.3%)이 민주주의 작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직접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시민 다수가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긍정 평가한 반면, 대의 기능을 중시하는 시민들은 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http://img.khan.co.kr/news/2021/01/01/l_2021010101000006400314883.jpg

■코로나19 이후…감염보다 가난이 두렵다

코로나19 이후…“가난이 더 두렵다”

취약계층선 감염보다 경제난 우려

72%가 정부·정치권의 대응에 불만

시민들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가장 힘든 점으로 경제적 어려움(36.6%)을 꼽았다. 감염에 대한 두려움(34.8%)도 그 못지않게 큰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가장 어려운 점에 대한 인식도 계층에 따라 달랐다. 취약계층에선 52.2%가 경제난을 이야기한 반면, 취약계층이 아닌 시민들은 27.3%만이 경제적 어려움을 거론했다. 후자에선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38.7%로 경제적 곤궁보다 더 컸다. 17.9%는 관계 단절을 어려움으로 꼽았다. 감염 두려움 28.3%, 관계 단절 9.7%인 취약계층 응답과 대비되는 수치다.

코로나19를 비롯한 위기·재난 상황 극복을 위해 시민들은 정부·정치권의 적절한 대처(39.7%)가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공동체의 연대와 단결(26.1%), 개인의 노력(21.8%)이란 응답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 이후의 사회적 어려움을 정치권이 잘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응답이 두드러졌다. ‘매우 그렇지 않다’ 34.4%, ‘대체로 그렇지 않다’ 30.2%로 3분의 2 이상이 정치권의 대응에 불만족을 표했다.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로 인식할수록 불만족도가 높았다. 취약계층이라고 답한 응답자 중 42.9%가 자신의 어려움을 정치권이 ‘매우’ 잘 다루지 못한다고 답했다. 대체로 잘못 다룬다는 답을 합하면 71.9%에 달한다. 반면 취약계층이 아니라고 답한 응답자 중에서 정치권의 대응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답한 비율은 29.4%에 그쳤다.

상황 인식에선 차이를 보였지만 동료 시민에 대한 연대·배려의 마음은 컸다. ‘방역을 위해 개인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문항에 시민 5명 중 3명이 ‘내가 방역에 협조하지 않으면 다른 시민이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58.2%)이라고 답했다.

‘내가 희생한 만큼 결국 나에게도 이득이 될 것이기 때문’(31.6%)이란 응답도 많았다. ‘정부나 기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법적 처벌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4.2%)이나, ‘다른 사람이 비난하기 때문’(3.1%) 등 처분·시선에 대한 두려움은 큰 이유가 되지 않았다. ‘불편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고 응답한 시민은 2.9%에 불과했다.

‘공공의창’은 리얼미터, 지방자치데이터연구소 등 14개 여론조사 및 데이터 기관이 2016년 비영리 공공조사가 필요하다는 뜻을 모아 출범한 단체로, 정부나 기업의 의뢰를 받지 않고 비용을 자체 조달해 공공조사를 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01060005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①]현재 가장 중요 사안 1위 ‘부동산’…과잉 논의된 사안 1위 ‘검찰개혁’ (경향, 조문희 기자, 2021.01.01 06:00)

논의해야 할 의제로 무얼 꼽았나

http://img.khan.co.kr/news/2021/01/01/l_2021010101000006600314871.jpg

검찰개혁 꼽은 4050 “부풀려져”역시 1위

20대 11%만 “중요”…세대별 인식차 뚜렷

노동·기후·평화 이슈는 한 자릿수에 그쳐

“공정 가치” 20대 가장 낮아…평등·자유 순

시민들은 현재 한국 사회가 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부동산 문제를 꼽았다. ‘검찰개혁’은 40~50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꼽혔으나, 동시에 모든 응답자를 통틀어 ‘중요성에 비해 과도하게 논의된 사안’으로도 지목됐다. 경향신문이 공공의창, 피플네트웍스 리서치의 도움으로 지난 12월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21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7.7%가 부동산 문제를 꼽았다. 검찰개혁(21.5%), 경제적 양극화 해소와 복지(12.5%)가 뒤를 이었다. 시민들은 노동, 지역, 여성·장애인 등 약자 보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감했다. 산업재해 등 노동권을 중요 이슈로 꼽은 시민은 6.8%, 여성·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 신장과 차별 금지를 거론한 시민은 5.5%에 그쳤다. 지방분권은 2.1%로 관심에서 밀렸다.

검찰개혁 의제의 중요도는 세대별로 다르게 인식됐다. 40대는 30.2%, 50대는 27.3%가 검찰개혁을 가장 중요한 의제로 봤다. 반면 20대(18·19세 포함)는 11.2%만이 검찰개혁을 중요 의제라 답했다. 60대, 30대 역시 각기 16.8%, 23.8%로 40대·50대 대비 검찰개혁의 중요도를 낮게 평가했다. 특히 20대는 부동산 문제 다음으로 경제적 양극화와 복지를 중요 이슈로 거론했다. 대부분의 세대에서 검찰개혁은 부동산 이슈 다음 순위를 차지했다.

전 지구적으로 중요한 문제지만 당장 시민들 삶에서 체감되지 않는 이슈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기후위기라는 응답은 1.8%였고, 한반도 평화는 1.2%로 가장 낮은 응답률을 보였다. 이는 경향신문이 지난 11~12월 두 달 동안 전문가 62명을 인터뷰한 내용과 배치된다. 기후위기는 전문가 7명에게 중요한 이슈로, 11명에게서 외면받은 의제로 거론됐다. 산재 등 노동문제 해결, 복지 및 사회안전망 확충 등 다양한 이슈가 고르게 지적됐다.

‘실질적 중요성에 비해 과도하게 논의된 사안’으로는 검찰개혁(33.9%)이 첫손에 꼽혔다. 부동산 문제가 26.6%로 뒤를 이었고, 여성·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 신장과 차별 금지가 11.9%로 다음 순위를 차지했다. 경제적 양극화 해소와 복지가 과도하게 논의됐다는 의견은 4.3%에 불과했다. 전문가들도 검찰개혁을 과잉 논의된 주제로 가장 많이 거론했다. 60대(40.2%)가 검찰개혁을 과도하게 논의된 이슈로 가장 많이 답했다. 40대(37.2%)·50대(37.2%)도 검찰개혁을 가장 부풀려진 이슈로 봤다. 40·50대는 검찰개혁을 가장 중요한 의제로 거론했던 집단이기도 하다. 다른 세대와 달리 20대는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 신장과 차별 금지’(26.2%)가 검찰개혁(21%) 이상으로 부풀려진 의제라고 인식했다.

‘한반도 평화’가 과도하게 논의된 주제인지에 대해선 세대별 판단이 갈렸다. 20대는 9.7%, 30대는 8.6%가 실제 중요성보다 부풀려진 이슈라고 본 반면, 50대는 2.6%, 60대는 2.7%만이 과잉 논의됐다고 답했다. 30대는 4.8%로 2030과 5060 사이에 자리했다.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는 공정(40.7%)을 거론한 시민이 가장 많았다. 평등(14.0%), 자유(13.3%), 협력(13.1%), 성장(10.9%) 등의 가치는 고르게 낮은 표를 받았다. 평화(8.0%)를 거론한 시민의 수가 가장 적었다. 특히 30대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 문항에서 ‘평화’를 압도적으로 낮게 응답(2.9%)했다. 이들은 ‘공정’을 가장 많이 응답(48%)한 집단이기도 했다. 흔히 20대는 공정을 중시하는 세대로 여겨지지만, 조사 결과 공정을 거론한 비율은 30.5%로 전 세대에서 가장 낮았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06060000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②]통과 쉬운 ‘비쟁점’ 법안 양산…상임위 넘어도 ‘옥상옥’ 법사위 (경향, 윤승민·조문희 기자, 2021.01.06 06:00)

입법은 어떻게 좌절되는가

http://img.khan.co.kr/news/2021/01/06/l_2021010601000451400040061.jpg

지난 연말, 산업재해 유가족들이 국회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연내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을 이어갔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연내 제정’을 목표로 세웠지만 실패했다. 해가 바뀐 지금도 단식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법 제정 논의가 여론의 관심 속에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조금 나은 경우일지도 모른다.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의 권리, 저소득층이 양질의 공공의료 혜택을 받을 권리, 성소수자들도 차별 없이 살아갈 권리…. 국회 밖에서의 외침은 늘 이어지지만 문턱을 넘어 논의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시민들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들이 뒤엉키고 고성이 오가는 ‘동물 국회’를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 주권자의 입법 요구가 실현되기는커녕 좀체 본회의장까지도 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 헌법상 국회에 대한 첫 조항 40조는 국회를 ‘입법기관’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국회의 입법 기능, 즉 입법 민주주의는 현재 부분적으로만 작동한다. 입법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정치권과 관료, 경제권력 중 반대하는 사람이 적은 속칭 ‘비쟁점 법안’, 그리고 ‘쟁점 법안’ 중 정치권의 선택을 받은 일부 법안 정도가 입법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입법 단계를 따라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민주주의의 한 축인 ‘입법부’의 입법 편향성을 들여다봤다.

그 많던 발의안은 어디로 갔을까

20대 국회 발의 법안 2만4141건

역대 최다지만 입법은 3195건뿐

의원들 ‘평가 의식’ 건수만 늘려

공무원인 전문위원 영향력 커져

식품 내 유전자변형작물(GMO) 함유 여부를 표시해야 한다는 ‘GMO 완전표시제’를 담은 식품위생법 개정안은 2016년 20대 국회 개원과 거의 동시에 발의됐다. 지금은 GMO를 원료로 쓴 식품에서 유전자 변형 단백질 등이 검출되지 않으면 GMO 원료 사용 여부를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 GMO를 원료로 쓰지 않은 상품에 ‘Non GMO’를 표시하는 것도 불법이다.

식품업계는 “‘Non GMO’ 표시가 없는 식품이 유해한 식품으로 매도당할 수 있고, ‘Non GMO’ 표시 식품에 프리미엄이 붙으면 생활 물가도 오른다”며 반대한다. GMO의 유해성이 과장됐다는 논란도 있다. 하지만 소비자의 알 권리를 위해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며 ‘완전표시제’는 호응을 받았다.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에 모두 21만명이 참여했다.

20대 국회에서 4차례 발의된 GMO 완전표시제 관련 법안이 상임위원회인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논의된 적은 법안별로 한차례씩뿐이었다. 2017년부터는 찬반 의견이 국회에서 논의될 기회조차 없었고, 법안들은 지난해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한 법안을 대표발의한 김현권 전 민주당 의원은 “다른 상임위 소속이었는데도 복지위에서 법안 도입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그 이후 법안이 왜 논의가 안 됐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당시 복지위 소속으로 법안을 발의한 윤소하 의원실의 박선민 보좌관(현 이은주 정의당 의원실)도 “현 정부 출범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긍정 검토하는 듯 했으나 어느 순간 논의가 멈췄다”며 “논의가 멈춘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고 했다.

폭력 없는 스토킹을 경범죄로 처벌하는 현행법을 넘어 강력범죄로 처벌하자는 ‘스토킹방지법’ 제정안은 20대 국회에서 5건 발의됐으나 3건만 해당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에서 한차례씩 논의되다 폐기됐다. 기초연금을 받은 65세 이상의 기초생활수급자가 다음달 기초생활급여를 받을 때 기초연금액수만큼 차감되는 ‘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도 2016년 10월 총 3건이 복지위에 상정된 뒤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운명도 비슷했다. 당시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2017년 4월 ‘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책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발의했으나 같은 해 9월 법사위에서 한차례 안건으로 상정된 뒤 폐기됐다.

국회에서 법안은 의원과 정부의 발의를 통해 탄생한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만 총 2만4141건이었다. 이 중 실제 입법된 경우는 3195건이다. 내용이 비슷해 다른 법과 합쳐진 ‘대안반영폐기’ 법안은 5563건이며, 임기 만료를 이유로 자동 폐기된 법안이 1만5002건으로 가장 많다. 대부분의 법안들은 상임위에서 계류되다가 폐기되는 운명을 맞는다. 상임위에 상정됐다가 이견이 있다며 산하 소위원회(소위)로 빠지고, 소위에서 제대로 논의도 못한 채 사라지는 경우가 가장 많다.

쟁점·비쟁점… 법안에도 ‘신분’이 있다

국회 입법에서 가장 흔하게 거론되는 문제는 지나친 ‘입법 경쟁’이다. 어떤 입법을 하느냐보다, 얼마나 많이 입법하느냐에 의원들이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대 국회의 법안 발의 건수는 역대 최다다. 국회 미래연구원의 지난해 10월 보고서를 보면, 발의 건수(2만4141건)는 19대(1만7822건)의 1.3배, 18대(1만3913건)의 1.7배 수준이다. 국회의원 300명이 4년 임기 동안 평균 80.5건을 발의하는 꼴이다. 이는 영국(0.88건)이나 일본(1.3건)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고, 미국(40.6건)의 2배다.

국회 보좌진들은 “의원이 얼마나 많은 법을 발의했는지가 언론과 시민사회의 평가대상이 된 이후 이런 경향이 뚜렷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실의 홍지웅 보좌관은 “지역구 의원들은 지역 언론에서 법안 발의 건수를 평가할 때 특히 예민하다”며 “의원의 지시가 없이도 보좌진들이 ‘입법 성과가 적은 의원으로 평가받을까’ 두려워 ‘쉬운 법안’을 양산한다”고 말했다.

‘쉬운 법안’이란 거세게 반대하는 이해 당사자가 없고, 조문이나 숫자를 고치는 정도로 조금만 공을 들이면 통과시킬 수 있는 법안이다. 국회에서는 이를 ‘비쟁점 법안’이라 부른다. 이들 ‘쉬운 법안’은 의원의 발의 건수와 통과 건수를 늘린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사실 미미하다.

반면 ‘쟁점 법안’들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고 협의도 많이 필요해 입법에 시간이 걸린다. 사회적 영향이나 파급효과는 크지만 정부나 기득권의 반대, 혹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큰 법안이라, 동료 의원들과 정부 및 관련 기관들을 모두 설득해야 한다. 정부가 ‘예산 문제’를 들면 법안은 일단 큰 장벽을 마주하게 된다. ‘검찰개혁’이나 ‘공정경제 3법’ 등 언론의 주목을 받는 법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조직화되지 못한 시민, 소수자와 약자들의 법안은 상임위 등에 상정되기만 할 뿐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입법 경쟁의 또 다른 폐해는 상임위 전문위원들의 입김이 세졌다는 점이다. 전문위원들은 입법활동 지원을 위해 국회사무처에서 각 상임위에 배정한 입법공무원일 뿐이다. 하지만 상임위 안건으로 오르는 법안이 너무 많아지고 의원들이 법안을 자세히 보기 어렵게 되자, 전문위원들이 쓰는 검토보고서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다.

검토보고서에는 법안의 법리적 문제와 정부 입장이 적혀 있다. ‘쟁점·비쟁점’ 법안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상임위의 각 당 간사들은 이를 토대로 비쟁점 법안부터 통과시키려 한다. 검토보고서가 이처럼 가이드라인 역할을 해, 국민을 대의해 선출된 의원들보다 공무원인 전문위원의 입법 영향력이 더 커진다. 의원들이 도리어 전문위원을 찾아가 ‘법안을 잘 봐달라’며 읍소하는 광경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법사위라는 ‘문고리 권력’

이해관계 큰 쟁점 법안 열쇠 쥔

‘상원’ 법사위 자체가 정쟁 도구

소수자·약자들 법안 상정돼도

논의도 못하고 사라지기 일쑤

상임위 통과 법안은 법사위에서 체계자구심사를 받는다. 법안이 헌법조항을 위배하지 않는지, 다른 법률과 충돌하지 않는지 등을 살피는 절차다. 원칙적으로는 법리적 문제가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지만, 법사위원들이 조문 하나를 문제 삼아 법안 통과를 막을 수도 있다. 반대로 법사위원장이 법안 통과를 강행한 전례도 있다.

상임위를 통과한 ‘쟁점 법안’ 중 법사위에서 소리 없이 논의가 막히는 것들도 있다. 2018년 9월 복지위를 통과했던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이 단적인 예다. 지방자치단체가 ‘금주구역’을 조례로 지정하도록 근거를 만들고, 청소인력의 간접흡연을 막기 위해 금연구역 청소시간을 규정하자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 법안은 법사위 소위에서 두 차례 체계자구심사만 하다 결국 폐기됐다. 담배 성분공개에 대한 법안 내용을 보건복지부 소관으로 둘지, 기획재정부 소관으로 둘지가 논란거리였다. 박선민 보좌관은 “당시 복지위 위원들이 ‘해당 부분은 기재부 소관으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연서를 냈는데도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면서 “이 역시 왜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는지 의문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체계자구심사는 필요하지만, 그 권한을 사실상 넘어 법사위가 ‘상원’ 노릇을 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다. 법사위원장을 차지하기 위한 여야의 정쟁만이 문제가 아니다. 법사위 개최 여부가 정쟁 수단으로 쓰이면서 법안 통과를 막으려고 회의를 열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그 때문에 함께 법사위에 상정된 다른 법안들도 논의 기회를 잃거나, 부실하게 논의된다. 민주당 한 보좌관은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은 그만큼 반대를 뚫고 입법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정쟁 탓에 법사위원장이 회의 자체를 안 열어버리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정부가 상임위·법사위에서 실질적으로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하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정부는 상임위나 법사위에서 법안을 논의할 때 모두 참여해 의견을 낼 수 있다. 반면 상임위에서 법안을 통과시킨 의원이 다시 법사위에서 논의 진행 상황을 일일이 확인하고 직접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다.

‘어차피 법사위에서 엎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역으로 상임위에서의 논의를 부실하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법사위원이 다른 상임위의 법안까지 들여다보면서 피로감을 느끼는 문제도 있다. 대안으로 체계자구심사 기구를 법사위 외에 별도로 두거나, 상임위 내에 소위를 만들어 체계자구심사까지 마치고 법안을 본회의로 바로 회부하도록 하자는 의견도 제기된다.

좌표 찍힐라, ‘인권’ 들어가면 철회·폐기

정치 세력 다양화, 거대 양당 ‘비례 정략’에 막혀

‘인권’ 들어가면 ‘철회’되는 법안

어떤 법안들은 이런 지지부진한 과정조차 밟지 못한다. 대표적인 법안이 ‘차별금지법’이다. 19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은 두차례 발의됐다가 얼마 못가 폐기됐다. 공동발의한 의원들에게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결국 한두 명이 철회를 요청하면서 공동발의 최소 요건(10명)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

‘인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법안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2019년 2월 말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성차별·성희롱 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안’은 성차별 개념을 법으로 정의한다는 조문을 담고 있었다. 반동성애 세력은 “‘성’의 범위를 ‘양성’으로 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성애 차별금지’가 될 수 있다”며 반대 운동을 벌였다. 2018년 8월 정성호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인권교육지원법안’은 초·중학교와 군대에서 지속적으로 인권교육을 시행하는 것이 골자였으나, 반동성애 세력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두 법안 모두 한달여 만에 철회됐다.

입법 과정에서 집단행동은 더욱 일상화되고 정교해지고 있다. 특히 20대 국회 들어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고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의원실 전화번호와 질문을 공유해 한 의원실이 서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다. 의원실의 응답은 커뮤니티에 동시에 공유되고, 응대를 잘 못하는 의원실이 생기면 ‘좌표’가 찍힌다.

김현권 전 의원은 “시민의 정치 참여 과정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지만, 정치인을 자유롭게 둘 때 더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라진 정책 조정…정당도 역할 해야

국회를 둘러싼 환경이 입법활동을 위축시키기도 하지만, 의원과 정당들도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민의당 비례대표로 20대 국회에 입문했던 채이배 전 의원은 “지역구 의원들에게는 입법활동보다 유권자들을 위한 사업이나 예산을 하나 더 따오는 것이 재선에 더 중요하다”며 “입법에 전혀 신경 안 쓰고도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역구 주민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것 또한 국회의원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 때문에 다양한 분야, 특히 소수자들을 대변할 비례대표나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국회 진출 기회를 늘리는 것이 대안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런 취지로 2019년 12월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며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거대 양당의 정략적 ‘총선용 비례정당’의 등장과 함께 누더기가 됐다.

거대 양당의 대립적 국회 독점의 폐해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정당은 정책조정 기능과 능력을 상당수 잃었다. 채 전 의원은 “20대 국회 전반기만 해도 거대 양당과 3당이던 국민의당 간 원내대표뿐 아니라 수석부대표, 정책위의장 간 회동이 많았다. (하지만) 패스트트랙 국면부터는 원내대표 간 담판으로 조정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에는 본회의에서 부결됐던 법안과 큰 차이 없는 법안이 다시 본회의에 상정돼 가결되는 전례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KT 특혜법’이라고도 불린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운영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었다.

인터넷은행 대주주 심사자격에서 ‘공정거래법 위반 기업’을 빼자는 내용으로, 담합으로 공정거래법 위반 전력이 있는 KT가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의 대주주가 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법이었다. 3월 376회 국회 본회의에서 반대토론 끝에 부결됐으나, 미래통합당에서 ‘민주당이 합의를 깼다’며 반발했다.

결국 공정거래법 중 ‘불공정거래행위 및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한 이익제공’을 하지 않으면 대주주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의 법안이 4월29일 377회 국회 본회의에 상정돼 통과됐다.

당시 채 전 의원은 반대토론에서 “오늘 찬성한다면 ‘법도 모르고 투표했다’고 자인하는 꼴”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3월 ‘반대’표를 던진 수십명의 민주당 의원들이 한달 만에 찬성으로 돌아섰다.

채 전 의원은 “금융당국 주도로 낸 법안을 민주당은 야당일 때 반대했으나, 여당이 되자 반대하던 논리와 들었던 문제점을 다 잊고 ‘우리 법안’이라며 통과시켰다”며 “이런 상황을 맞은 법안들은 아무도 제어하지 않고 통과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06060001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②]4년 동안 하나 통과시키더라도…삶 바꿀 ‘의미 있는’ 법안 다뤄야 (경향, 조문희·윤승민 기자, 2021.01.06 06:00)

http://img.khan.co.kr/news/2021/01/06/l_2021010601000451700038932.jpg

“이렇게 또 한 걸음 나아갑니다.”

지난해 12월2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 일부다. 오후 11시쯤 ‘장애인 활동지원에 관한 법률’(장애인활동지원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만 65세를 넘은 장애인들이 노인장기요양 수급자로 전환되면서 기존에 받던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대신 그만큼 활동지원을 보전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21대 국회에 입성한 장 의원의 1호 대표발의 법안이었다.

21대 ‘한 걸음’, 어떻게 내디뎠나

큰 공감대 밀고 작은 이견엔 양보

장혜영 의원 ‘한 걸음’ 전략으로

장애인활동지원법 본회의 통과

예상 밖의 성과였다. 직전까지 장애인들은 만 65세가 되는 순간부터 활동지원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였다. 한 달 480시간에 달하던 활동지원서비스가 하루 최대 4시간으로 확 줄었다. 누워서 생활하는 와상 장애인, 발달 지체장애인 등에겐 치명적이었다. ‘현대판 고려장’이란 비판도 나왔다.

상황 변화는 요원했다. 20대 국회도 같은 내용의 법안을 수차례 다뤘지만 성과는 없었다. 예산 문제가 컸다. 보건복지부는 장애인 활동지원 급여 수급자가 65세 이후에도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할 경우 2021년 기준 약 600억원의 예산이 추가로 들어갈 것으로 추산했다.

상황이 달라진 건 21대 국회 첫 국정감사 직후인 지난해 10월 말,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면서다. 김 의원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여당 간사다. 장혜영 의원실 조현수 비서관이 말했다. “그쪽에서 내놓는 법안이라면 사실상 정부안이거든요. 이번 정기국회 때 통과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11월24일 열린 복지위 제2법안심사소위 회의록을 보면 복지부도 ‘65세 사각지대’를 인식하고 있었다. 정충현 복지부 장애인정책국장은 “현행 장애인활동지원법상 (활동지원서비스) 신청 자격기준은 노인장기요양보험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며 “이 조항을 바꾸지 않고서는 65세 이후의 급여 감소자에게 활동지원을 할 수가 없다”고 법 개정 필요성을 말했다.

의원들만 의견일치를 볼 수 있다면 법안 통과도 가능했다. ‘65세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법안을 제출한 의원은 총 6명. 정춘숙 민주당 의원은 65세 조항뿐 아니라 활동지원과 관련된 다른 부분도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 최혜영 민주당 의원은 장애인들이 만 65세가 되기 전과 똑같이 활동지원서비스를 지원받든, 노인장기요양보험상 서비스를 받든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고 봤다.

조현수 비서관은 “근본적 대안이긴 한데, 자칫 법안이 계류될 위험이 있었다”며 “일단 법이 통과돼야 당장 피해입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중증장애인들이 최소한의 조치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우리 입장이었다. 나머지는 후속과제로 미루더라도”라고 말했다. 두 걸음 뛰려다 자칫 제자리걸음하기보다는 당장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 게 우선이라는 취지다.

법안이 통과되던 날, ‘근본적 대책’을 주문하며 각을 세웠던 의원들 중 반대나 기권 의견을 낸 사람은 없었다. 다만 부대의견이 더해졌다. “부대의견으로, 장기적 관점에서는 급여량 감소 문제 해소를 위한 보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할 것으로 보아 보건복지부가 2021년까지 대안을 도출하여 장애인 활동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성공 법안의 공식 = ‘한 걸음’ 위한 긴 준비

통과 가능성 낮은 쟁점법안은

물밑협상 등 지난한 ‘설득 작업’

쟁점법안을 다루는 건 의원 개인에게 ‘비합리적’ 선택이다. 비쟁점법안 대비 법안 통과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의원실 실적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럼에도 일부 의원·보좌진은 관행에 맞서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17대 국회부터 보좌진으로 일한 박선민 보좌관(현 이은주 정의당 의원실)의 말이다. “보면 알아요. ‘이 법은 통과되겠다’ ‘안 되겠다’. 그런데 많이 통과시킨다고 그게 꼭 사회의 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4년 동안 단 한 건만 통과시키더라도, 큰 갈등을 다룬다면 의미가 있는 거죠.”

쟁점법안 통과를 위한 노력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먼저 시민단체를 상대로 의견을 수렴하고 설득에 나선다. 여야 간 갈등이 예상되는 쟁점이 있을 땐 법안 발의 전부터 사전 조정했다. 발의 과정에선 시민단체 및 부처 관계자를 불러 여야 합동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내용을 가다듬었다. 여야 보좌진이 모이는 등 공동 논의 과정을 밟았다. 발의 의원이 직접 관심을 갖고 전화를 돌리고 다른 당 의원을 설득하기 위해 나섰다.

박 보좌관은 2011년 통과된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 지원에 관한 법률’(노숙인지원법)을 의미 있는 법안으로 꼽았다. “뜻밖에도 처음 노숙인지원법을 반대한 건 노숙인 당사자들이었어요. ‘왜 우리가 낸 세금으로 노숙인을 지원하느냐’는 시선을 받을까봐 두려워했죠.” 박 보좌관은 당사자인 노숙인과 관련 단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홈리스 1000명 서명운동’을 벌이며 노숙인의 의견을 수렴했다. 당사자를 설득하는 작업은 그들의 조직된 의사를 입법 과정에 들여오는 일이기도 했다. 노숙인 등 총 1531명의 뜻을 모아 그해 2월 국회에 청원을 냈다.

16대 국회 때부터 일한 김명신 보좌관(현 김상희 민주당 의원실)은 2007년 제정된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을 말했다. “장애인 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던 장향숙 의원(열린우리당 비례대표)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당은 ‘장애 당사자가 국회의원이 됐으면 된 것 아니냐’는 입장이고, 장애인단체는 장애인이 겪는 문제를 진보를 표방한 정당이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지금이야 롯데마트가 안내견 입장을 반대했다가 여론의 눈총을 받는 상황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다. 각당에서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필요성에 의문을 표했다. 장 의원은 당시 김한길 원내대표와 농성 중이던 장애단체 사람들 간 만남을 주선했다. 법안소위에서 논의가 이뤄지기 전 여야 보좌진이 먼저 모여 논의를 했다. 장애인단체 사람들과 간담회도 열었다. 법안소위에서 의원들이 법안을 볼 때쯤엔 까다로운 쟁점 몇가지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내용이 합의됐다.

20대 국회에서 활동한 채이배 전 의원은 2017년 개정된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을 거론했다. 개정 외감법은 2015년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 사건을 계기로 마련됐다.

상장기업에 대해 6년간 외부감사를 자유수임한 뒤 3년 동안 금융당국이 지정한 회계법인을 외부감사인으로 선임하도록 규정했다. 기업이 회계법인을 자유롭게 지정한 이전까지의 자유수임보다 까다로운 방식이었다.

“기업 입장에선 외부감사를 더 세게 받게 됐으니 재계,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등에서 반대 목소리를 냈죠. 그런 의견을 듣고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법안에 반대했는데, 제가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설득했어요. 법안소위 들어오는 분들은 다 찾아갔던 것 같아요. 한 사람을 세 번 찾아가기도 하고…. 회계란 뭔지, 분식회계가 왜 문제인지 아주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을 했죠.”

물밑 협상, 타협, 조정 등 노력의 열매는 작지 않다. 김 보좌관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의 성과를 이렇게 말했다. “장애인들이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고, 이 법을 근거로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어요. 법 활용이 늘어나고 언론에 보도되니 국민들도 ‘이런 것도 차별이구나’ 인식하게 됐죠. 그때 법이 없었다면 지금 ‘롯데마트 안내견’ 사건도 없었을 겁니다.”

국민의힘 의원실 홍지웅 보좌관도 말했다. “중요한 법안은 의무를 부과하고 규제를 만들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기업 등 어떤 집단은 손해를 보고, 누군가는 이득을 봅니다. 반대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런 법안을 내고, 갈등을 잘 조율하는 의원이 더 잘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130600035&code=910100

[흑백 민주주의]③보수와 친여 채널 사이에 ‘교집합’은 없다…‘아시타비’는 돈이 되니까 (경향, 김지원·윤승민 기자, 2021.01.13 06:00)

중립지대 없는 공론장

http://img.khan.co.kr/news/2021/01/13/l_2021011301001163600110151.jpg

我是他非 :‘내로남불’을 한자로 옮긴 신조어

“현재의 정치는 각자가 링(무대)을 갖고 있고 그 안에서 지지자들이 호응을 하고 유튜버는 돈을 버는 구조다. 링이 가운데 있고 밖에서 얘기하다가도 논의할 의제가 있으면 중앙에서 풀어야 하는데, 두 링에 선 사람은 각자 만날 일이 없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한국 사회 공론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갈라진 공론장’. 현재의 유튜브 등 뉴미디어 공론장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다. 지난해 한국언론진흥재단과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가 발표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0 한국>에 따르면 한국 응답자의 44%가 자신과 관점이 같은 뉴스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이는 40개국 평균인 28%보다 16%포인트 높고, 조사 대상 40개국 중 터키·멕시코·필리핀 등에 이은 4위였다. 반면 나와 반대되는 관점의 뉴스를 선호한다는 응답은 4%에 불과해 조사 대상국 중 가장 양극화된 뉴스 소비 성향을 보였다.

정치권은 이 같은 현상을 이용했다. 갈등을 봉합하고 공동의 의제를 생산하기보다는 유튜브 등을 활용해 든든한 ‘내 편’을 만드는 데 주력해왔다. 유튜브뿐 아니라 기성 언론 역시 양극단 사이 중심을 잡기보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거름망 없이 옮기며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일조했다. 갈라진 공론장 속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이들의 목소리는 쉽게 지워졌다.

같은 나라, 다른 세계

“검사(수)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데 (확진자 수를) 1000명 이하로 유지를 한다는 건 굉장한 성과다.”(‘K방역, 또 저력을 보여줬다’ 2020년 12월18일 새날TV)

“문재인 정권, K방역이다 뭐다 하면서 천문학적인 예산까지 들여서 홍보질 열심히 하더니 이거 뒤통수 세게 맞았다. 그 K가 알고 보니까 KILL 킬이었다.”(‘속보!!! 코로나 역대 최다 1078명 3단계 가나’ 2020년 12월15일 신의한수)

코로나 확진 수 놓고 평가 극과 극

“K방역의 성과” “그 K가 KILL”

같은 확진자 수를 두고도 채널 성격에 따라 전혀 다르게 평가한다. 한국 뉴미디어 공론장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향신문이 지난해 11월7일부터 한 달간 친여·보수 성향 정치·시사 유튜브 구독자 수 상위 5곳의 패널(고정 출연, 게스트 포함)을 분석한 결과 두 진영에 공통으로 등장한 인물은 없었다. 등장인물 지형 분석을 위해 고정 출연자 이외의 게스트가 존재하지 않는 1인 방송이나 탐사, 보도영상 위주 채널은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다.

해당 기간 친여 성향 유튜브엔 더불어민주당, 열린민주당 등 범여권 전·현직 정치인이 총 33명 출연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물론 정의당, 녹색당 등 여타 당의 관계자들은 한 명도 출연하지 않았다.

보수 성향의 유튜브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같은 기간 조사 대상 유튜브 출연자 중 보수야당 전·현직 국회의원, 당직자 등은 총 27명으로 집계됐다. 심재철·이상일 전 미래통합당 의원 등 전직 의원 및 현직 관계자도 다수 출연했다. 분석 기간 출연한 박형준 전 한나라당 의원, 이언주·김선동 전 통합당 의원 등은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 후보자로 나서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양 진영 간 겹치는 출연자는 ‘0’

의제 토론에 ‘반대’ 의견은 없어

양 진영 채널들 간 교집합은 ‘제로’지만, 친여·보수 채널들 내부 ‘겹치기’ 출연은 다수 눈에 띄었다. 조사 기간 친여 채널 5곳 가운데 3채널 이상 중복 출연한 인물은 김한메 사법정의바로세우기시민행동대표 등 3명이었다. 장기표 당협위원장도 보수 채널 5곳 중 3채널 이상 중복 출연했다. 같은 인물이 채널 2곳에 중복 출연한 경우는 친여·보수 채널이 각 9명이었다.

진영에 따라 다루는 주제도 갈렸다. 친여 유튜브 5곳에선 해당 기간 제목을 중심으로 산출한 전체 키워드(353건) 가운데 검찰개혁 관련 키워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69.4%(245건)에 달했다.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23건·6.5%)와 조국 전 법무부 장관(20건·5.7%) 관련 키워드가 뒤를 이었다. 지난해 11월이 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인 만큼 검찰개혁 관련 키워드는 보수 유튜브에서도 전체 키워드(509건) 중 35.0%(178건)로 1위를 차지했다. 다만 그 비중은 친여 채널의 약 절반 수준이었고 다루는 방식도 친여 채널이 주로 윤 총장을 타깃으로 했다면, 보수 측은 추 장관의 영상이 주를 이뤄 정반대 양상을 보였다. 코로나19 관련 영상은 친여·보수 채널에서 각 8건(2.3%), 28건(5.5%) 등장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로 친여 채널에선 ‘K방역’ 성과 등이 주를 이뤘다면, 보수 채널에선 방역 난맥상을 다루는 등 정반대 프레임으로 사안을 다뤘다.

유튜브 공론장이 정치 성향에 따라 나뉘다보니 대부분은 사안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동의를 전제로 한 해설, 전달이 주를 이뤘다. 다수의 패널이 존재함에도 이들 가운데 ‘반대’ 의견을 가진 출연자는 없었다.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은 정치인들에게도 매력적이다. 2018년부터 유튜브 채널 ‘홍카콜라’를 운영해온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채널 개설 당시 유튜브 시작 이유에 대해 “언론은 팩트 보도보다 경향성 보도라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며 “대국민 소통 수단으로 유튜브라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더불어민주당은 예능 등을 포함한 당 차원의 ‘민주 종편’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기존 당 유튜브 채널인 ‘씀TV’를 ‘델리민주’로 확대 개편했다.

종편 규제와 풍선효과

구독자 10만명을 넘어서는 일부 정치·시사토크 유튜브들은 ‘내 편 방송’ ‘편파 방송’ 등을 아예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다. 추천 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치·시사 유튜브의 ‘가두리 생태계’에서 편파성은 적극적인 세일즈포인트가 된다. 이는 그간 종합편성채널(종편)이 정치·시사토크 프로그램들의 편파성(공정성 실천 미흡) 등을 지적당해 수차례 재승인 취소 도마에 올랐던 것과 대비된다.

비슷한 포맷에 비슷한 내용을 방송하더라도 종편 등 방송에선 문제가 되지만 유튜브에선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방송통신심의규정(방심규정) 적용 여부의 차이다. 종편을 비롯한 지상파 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등은 방심규정의 적용을 받지만 유튜브 콘텐츠는 방송법이 정하는 방송에 해당하지 않아 이 규정에서 자유롭다.

실제 2019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5·18 북한군 개입 의혹을 제기한 프리덤뉴스 등 유튜브 채널 20곳을 심의 대상에 올렸을 때 당시 대상이 된 유튜브 채널은 “(방심위는) 민간인이 구글서비스를 이용한 유튜브 계정에 업로드한 콘텐츠에 대한 심의, 규제 권한이 법률상 전혀 없다”는 요지의 의견진술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방심규정 9조 공정성 항목에 따르면 “방송은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다룰 때에는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여야 하고 관련 당사자의 의견을 균형 있게 반영해야” 한다. 2014년 방심위 심의사례집에 따르면 MBN <뉴스공감>은 유시민 전 의원의 발언,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행보 등을 거론한 이슈 대담 과정에서 보수적 시각을 가진 출연자의 입장만을 전달하는 등 편향적 대담을 방송했다는 이유로 방심규정 9조 위반에 따른 권고 조치를 받았다.

종편 정치·시사 대담 프로그램은 지금도 공정성 지적을 받고 있지만, 방심위에서 지적받은 프로그램의 패널을 변경하거나 포맷을 변경하는 등 최소한의 자정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방심위 규제에 채널의 명운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규제는 풍선효과를 낳았다. 종편에서 ‘이름을 날리던’ 변희재, 민영삼씨 등 주요 시사토크 패널들은 방심위 제재 이후 출연하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해 보수 유튜브로 대거 이동했다.

돈이 되는 극단주의…플랫폼 규제해야

정파적·극단적인 주장은 유튜브에서 돈으로 돌아온다. 유튜브 수익 분석 사이트 플레이보드에 따르면 지난 한 해 국내 유튜브 슈퍼챗(Super chat·유튜브 생방송 중 시청자가 일정 금액을 후원 가능토록 한 기능) 수익 상위 채널 10개 가운데 6곳이 정치·시사 평론 관련 유튜브다. 해외 유튜브의 경우 슈퍼챗 수익 상위 채널이 대부분 게임·예능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인 것과 대조적이다. 1위를 차지한 가로세로연구소는 슈퍼챗으로만 2020년 한 해 7억3000여만원을 벌어들였다. 종편들이 개국 초기 정치·시사 대담 프로그램들을 쏟아낸 것 역시 수익성 차원이었다. 제작비, 품은 적게 들고 목표 시청층이 명확하다보니 일정 수준의 시청률을 보장받을 수 있다.

정치·시사 유튜브, 수익 상위 포진

편파성이 적극적 세일즈포인트

기성 언론 역시 정파적 보도와 그것이 약속하는 상업적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지난 수년간 종편에 따라잡힌 시청률을 극복하기 위해 지상파 방송 등도 2018년 이후 기존 뉴스 프로그램에 정치·시사 유튜브의 대담 프로그램 포맷을 적극 차용하기 시작했다. KBS 1TV의 <오늘밤 김제동>과 <저널리즘 토크쇼 J>,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등이 대표적이다. 지상파 방송이 팟캐스트, 유튜브 세대에 익숙한 포맷과 함께 ‘제도권 밖’ 스타들을 적극 영입하면서 보수야당에선 지상파 시사 프로그램의 편향성을 지적했다.

2019년 12월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조국 사태 국면 4개월간(2019년 7~10월) MBC와 TV조선의 시청자 수는 각각 41만1000명에서 48만5000명(18.0%)으로, 23만6000명에서 37만4000명(58.4%)으로 대폭 늘었다. TV조선은 해당 기간 조국 전 장관 측을 비판하는 리포트들을 집중적으로 쏟아냈고, MBC는 검찰개혁을 외치며 서초동에 모인 인파를 드론으로 촬영해 호응을 얻었다. 양측 목소리를 다루는 중립적인 보도보다는 세 규합에 용이한 보도가 시청률로 이어진 것이다.

‘극단주의=돈’…플랫폼 규제해야

공영 방송 등 상위 공론장 역할 필요

전문가들은 사회가 당면한 주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최소한의 공동 공론장 기반을 형성하고, 이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하위 공론장(유튜브 등)에서 사람들은 종교, 관심사 등에 따라 자기와 성향이 맞는 이들끼리 어울려 콘텐츠를 흡수하고 소통을 연습하는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하위 공론장의 극단화 현상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서도 “다만 이들이 서로 필요한 경우엔 다른 의견끼리 맞붙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하위 공론장에서의)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검증될 수 있는 상위 공론장이 부재한 상황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공영 방송을 중심으로 다양한 의견이 맞부딪치고 교류될 수 있는 상위 공론장이 형성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국 성균관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 곳곳의 가장 취약한 부분들이 먼저 부서져나가고 불평등 문제 등이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며 “하지만 이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논의 대신 정파적인 이슈가 사람들 머릿속을 지배하면서 (정작 중요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해온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편향적인 뉴스에 대해) 정부가 무조건 규제를 할 순 없지만 해외의 경우 SNS 등을 통해 퍼지는 일부 혐오·차별 관련 게시물, 치명적인 가짜뉴스 등에 대해선 규제를 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자정 가능한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2018년 유럽연합은 허위조작정보에 대한 실천강령을 발표했고, 구글·페이스북·트위터 등 주요 글로벌 플랫폼 사업자들이 이런 자정 시스템 구축 노력에 동참하겠다고 서명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일 연설에서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싸우라. 지옥같이 싸우지 않으면 나라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조 바이든 당선 확정 절차를 막으려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를 습격해 다섯 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중상을 입었다. 지난 4년간 트럼프의 극단주의적 발언을 제한하지 않은 플랫폼에 대한 규제 목소리도 높아졌다. 트위터는 트럼프의 계정을 영구 정지 조치했으며, ‘극우주의 트위터’라고 불리는 팔러 애플리케이션 역시 양대 스토어에서 다운로드가 금지된 상태다. 트위터는 “트럼프 대통령 계정의 최근 트윗들과 이를 둘러싼 맥락, 특히 이들이 트위터 안팎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해석되는지를 면밀히 검토, 추가적인 폭력 선동의 위험성 때문에 이 계정을 영구 정지시켰다”고 밝혔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130600055&code=910100

[흑백 민주주의]③시민 참여 길목 된 국민청원, 상소의 장이 정치 세 대결장 변질 (경향, 윤승민·김지원 기자, 2021.01.13 06:00)

윤창호법·민식이법 등 대책 마련 성과

20만 이상 64%, 특정인 처벌·해임 요구

시급한 정책·행정 개선에 초점 맞춰야

국민청원의 명과 암

직접 민주주의 학습 vs 대의제 형해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130600045&code=910100

[흑백 민주주의]③갈등 해결 새 통로 공론화위, 제대로 된 의견 수렴에는 물음표 (경향, 윤승민·김지원 기자, 2021.01.13 06:00)

박근혜 정부에는 ‘불통’이라는 수식어가 끊이지 않았다. 국회나 정부 등 현존하는 대의민주주의 기구에 대한 불신도 오래됐다.

문재인 정부는 ‘소통’을 앞세우며 시민이 직접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었다. 청와대 국민청원과 ‘신고리 5·6호기’ ‘대입제도 개편’ 등 정부 정책에 대한 공론화위원회는 그렇게 등장했다. 시민이 직접 행정부에 정책을 제안하고, 시민참여단이 공론조사로 정한 권고안이 정책에 반영됐다.

두 제도는 그간 기술적 한계 때문에 현실화하기 어려웠던 ‘직접민주주의’의 형태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을 대안이라는 기대도 받았다. 그 기대는 문 대통령 집권 5년차에도 유효할까. 두 제도의 명과 암을 들여다봤다.

‘2022 대입제도’ ‘신고리 원전’에 적용

숙의민주주의 기반, 책임 소재는 갸웃

의제·자료 불명확에 공론조사 ‘삐걱’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재개 여부’와 2018년 ‘2022학년도 대학입학제도’를 공론화위원회가 실시하는 공론조사를 통해 결정했다. 시민들 의견이 정책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가 공론조사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은 신선했다. 하지만 공론조사의 설계 및 운영 과정에서 문제점도 노출했다. 특히 대입제도 공론화 과정은 의제와 자료가 명료하지 않았다는 점, 그로 인해 구체적 대안이 마련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정부가 책임지고 결정할 일을 시민에게 미루는 식으로 악용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내용 어렵고 시간 부족했던 대입제도 공론조사

공론조사는 시민들을 무작위로 선발한 뒤 주제에 맞는 자료를 제공하고, 시민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고민한 뒤 각자 의견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숙의’한다는 점에서 여론조사와는 차이가 있다. 신고리 5·6호기는 공론화위 권고에 따라 공사가 재개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공사 백지화’와는 다른 결론이었다. 공론화위가 원자력발전을 축소하라고 권고하자, 정부는 이를 구체화해 신규 원전 건설계획 및 월성 1호기 가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대입제도 공론화위도 2022학년도 대입 때 수능 위주 전형을 확대하고 제2외국어·한문을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등의 권고안을 냈고 교육부가 이를 받아들였다. ‘단기적으로는 수능 비중을 확대하되 중장기적으로는 수능 절대평가를 준비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역시 문 대통령의 공약인 ‘수능 전 과목 절대평가’에서는 한 걸음 물러선 결과다.

두 공론화위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의 권고는 한국 사회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는 “정부가 대선 공약이라고 무조건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을 밀어붙였으면 사회적 불만과 갈등이 상당했을 것”이라며 “정보와 자료들이 투명하게 공개돼 모두가 접근할 수 있었기에 수용성도 높았다”고 말했다. 반면 대입제도의 경우 공론화위 권고에도 비판이 적잖았다. 대입 문제의 이해관계가 첨예한 탓도 있지만 공론조사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여럿 발견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공론조사가 가능한 영역에 대한 공통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의제의 쟁점이 명확해야 하고, 충분하고 공정한 정보가 시민들에게 제공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입제도 공론조사 과정에서는 이를 충족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의제의 경우, 공론화위가 처음 ‘학생부 위주 전형과 수능 위주 전형의 비중’ ‘수능 최저학력 기준 활용 여부’ ‘수능 절대평가 전환 여부’ 등 3가지를 논의한다고 밝혔으나, 실제 시민참여단이 논의한 안은 3가지를 조합한 4개 시나리오였다.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 소장은 2018년 대입제도 공론화 평가 토론회에서 “교육 전문가들조차 각 시나리오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시민참여단에 주어진 400쪽 분량의 자료집은 언론기사나 논문을 엮어놓은 것이었으며, 이를 숙의할 시간이 16일밖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였다. 숙의 후 조사에서 4가지 시나리오 중 2가지에 대한 지지도 차이가 4.4%포인트(52.5%-48.1%)에 머물자, 한 가지 시나리오를 대입제도 개편안으로 내지 못한 공론화위는 중장기 대입정책에 대한 부가적인 조사 결과를 권고안에 포함시켰다. ‘단기에 수능 확대-중장기적으로 수능 절대평가화’라는 결론은 주된 논의가 아닌 부가조사에서 도출됐으며, 발표 후 모순적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대입제도 공론화 과정에도 ‘시민의 참여기회를 제공했고 숙의민주주의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있었다. 공론화위가 시민참여단을 대상으로 측정한 수용도(‘나와 의견이 달라도 존중하겠다’는 응답률) 또한 93.0%로 높았다. 그러나 단국대 김학린·전형준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논문은 “공론화 참여자들이 숙의를 통해 사안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대립적인 주장에 대한 선호도가 뚜렷해졌다”며 “의견이 수렴되지 못하고 양극화된 채 마무리됐는데도 이를 성공적인 공론화로 간주한 것”이라고 밝혔다.

신고리 공론조사도 한계…바람직한 공론조사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 비슷한 한계가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은 “문 대통령이 탈원전을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탈원전에 대한 찬반이 팽팽한 것처럼 비쳤지만 사실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에 대한 여론이 다수였다”며 “공론화 수용도가 높았던 것은 다수의견을 채택했기 때문일 수 있다. 다른 공론화 때 소수의견이 채택돼도 수용도가 높고, 갈등해결 모델이 될 수 있을지도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민이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부가 공론화위 결정을 그대로 정책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전문성을 갖고 논의해야 할 주제에 공론화가 참고자료가 될 수는 있지만 정책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며 “결정을 시민들에게 맡기기보다는 정치 지도자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공론조사가 정교하게 설계되면 대의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은 유효하다. 박태순 소장은 “난민 문제·낙태죄 유지 여부 등 시대가 바뀌어 새로 제기된 문제들, 선거제도·공무원 호봉제 등 국민을 대의하는 집단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들, 국민의 생존과 재산에 영향을 끼치지만 국민투표까지 부칠 정도가 아닌 군가산점 도입 같은 사안들은 충분히 공론화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방자치단체 중심으로 소규모로 운영된 공론화위는 성공적인 결론을 도출했다”고 말했다. 실제 대구 신청사 건립 부지 선정, 부산 중앙버스전용차로제 도입이 공론조사를 통해 결정되는 등 지자체 차원의 공론화위는 활발해지고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21060002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④]출발선만 같으면 된다? ‘각자도생’ 사회의 이상한 ‘공정’ (경향, 조문희 기자, 2021.01.21 06:00)

실체 없는 ‘공정’

100m 달리기 경주가 시작된다. 출발선 앞, 선수들 면면은 다양하다. 국가대표 육상선수, 아마추어 동호인, 고교 선수, 휠체어 장애인이 저마다 트랙 위에서 몸을 푼다. 같은 성인이라도 영양상태가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 어제까지 밥도 잘 못 먹은 채 훈련에 임한 선수도 있다. 전문 경주화를 신은 사람 옆에는 샌들을 신은 선수가 섰다. 이 경기가 ‘공정하다’고 말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공정은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 올림픽 여자하키 남북단일팀 논란, 조국 사태,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국면마다 공정성 시비와 맞닥뜨렸다. 경향신문이 진행한 신년 설문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4명(40.7%)이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공정을 꼽았다. 평등, 자유, 협력, 성장, 평화 등 다양한 선택지의 비중은 각기 10% 남짓이었다.

공정이 거론된 배경은 달랐지만 뜻하는 바는 같았다. 공정은 주로 출발선의 위치 같은 경쟁의 규칙을 묻는 데 쓰였다. 공정한 경기라면 능력 있는 사람만이 이길 것이라고 봤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은 ‘공정하지 않다’는 반발에 부딪혔다. 장애인, 지방학생 등 소수자를 배려한 입시 전형에 대한 반대는 일부 수험생에게서 매년 나타난다.

오늘 한국 사회의 공정 주장은 ‘스냅 사진’ 같다. 경기가 열리는 순간만을 ‘찰칵’ 조명한다는 뜻이다. 공정을 주장한 이들은 경기 전 선수들이 처한 불평등한 상황엔 관심이 없다. 경기 후 승자와 패자에게 얼마만큼의 자원이 분배돼야 하는지도 논의하지 않았다.

http://img.khan.co.kr/news/2021/01/21/l_2021012101001998300194062.jpg

각자도생 사회의 공정론

‘각자도생’. “제각기 살아 나갈 방법을 꾀함”(표준국어대사전)이란 뜻이다. 이원재 LAB2050 대표는 ‘한국 사회의 공정성’이 “각자도생 사회에서 떠오른 잘못된 담론”이라고 답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논문에서 1997년과 2008년을 각자도생 사회의 배경으로 지목했다. 각기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친 해였다. 그는 “두 차례의 경제위기를 거치는 동안 별다른 국가적 보호기제 없이 시장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면서 ‘시장화된 개인화’라는 용어를 썼다. 국가가 실업급여 등 사회안전망을 두껍게 마련한 유럽 복지국가의 ‘제도화된 개인화’와 대비된다는 취지다.

대다수 연구자는 외환위기를 노동 불안정 심화의 계기로 본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박과 ‘사회적 대타협’으로 정리해고가 늘고 파견노동이 법제화됐다. 1997년 말 2.6% 수준이던 실업률은 1999년 2월 8.6%로 올랐다. 임시·일용직 비중도 같은 기간 45.9%에서 52.2%로 6.3%포인트 증가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이 다를 때가 많았다. 2000년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은 53.7%였다. ‘오른쪽 바퀴는 정규직이, 왼쪽 바퀴는 비정규직이 끼우는데 임금이 다르다’는 농담이 통용된다. 시간 외 수당, 유급휴일 등 근로복지 수혜와 고용·건강보험 등 사회보험 가입률, 노동조합 가입 여부도 다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동시장에서 대기업 정규직 등 조직 내부자와 외부자의 간극이 크다”며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선 내부시장으로의 진입을 지향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세습 중산층 사회>의 저자 조귀동씨는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한번 대기업 정규직, 전문직, 공무원이라는 ‘내부자’가 되면 웬만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내부자로 남는다. 반면 중소기업 정규직, 대기업 비정규직, 기타 비정규직·일용직 등이 되면 끝까지 ‘외부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http://img.khan.co.kr/news/2021/01/21/l_2021012101001998300194063.jpg

같은 출발선에 세우면 그뿐

경기 전의 불평등한 상황과 경기 후의 분배에는 무관심

외환위기·코로나 같은 외풍에 국가는 보호막이 돼주었나

바깥의 찬바람에도 국가는 보호막을 주지 않았다. 외환위기 당시 해고된 노동자 중 실업급여를 받은 사람은 4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지금도 한국의 사회안전망은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들에 견줘 보장 범위와 수준이 낮다. 특수고용 노동자,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이지만 고용보험 의무가입에서 배제돼 실업급여를 받기 어렵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외환위기 이후의 실업·빈곤 증대를 계기로 도입됐지만 부양의무자가 없어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고 지급액이 낮아 매년 논란거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외환위기 발생 20주년인 2017년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인식조사한 결과, 외환위기가 현재 한국에 끼친 영향(복수 선택)으로 응답자의 88.8%가 비정규직 문제 증가를 꼽았다. 공무원·교사 등 안정적인 직업 선호 경향을 낳았다(86.0%)는 반응도 높았다. 같은 해 한국노동연구원이 내놓은 ‘가구소득계층별 미취업 청년 특성’ 보고서는 2016년 대학교를 졸업한 15~29세 청년 미취업자 가운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이들(공시생)의 비율이 68.7%에 달했다고 분석했다.

불평등·세습에 눈감은 ‘그 공정성’

대부분 연구자들은 최근의 공정 담론을 ‘게임의 규칙’이 편파적이어선 안 된다는 요구로 이해한다. 입학시험, 입사시험 등 희소한 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질 때 공정성을 따진다는 것이다. 흔히 공정하다고 인식하는 게임의 규칙은 ‘능력주의’다. 학력이나 학벌, 연고 따위와 관계없이 본인 능력만을 기준으로 평가가 이뤄지고 사회적 지위, 권력 등 재화가 분배돼야 한다는 철학이다.

교육학자인 한숭희 서울대 교수는 “공정이란 불평등한 사회를 전제로 한 개념”이라며 “불평등이 심할수록 소수의 제한된 기회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비정규직·프리랜서와 정규직이 평등하다면, 선발이 지금처럼 경쟁적이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시·수시·학종 등 입시 공정성을 둘러싼 민감한 반응도 각자도생 사회 탓이 크다. 어떤 대학을 가느냐가 어떤 직업을 얻고 얼마나 많은 소득을 거둘지 결정한다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사회학자 엄기호씨는 이런 공정 담론에 긍정적 역할이 있다고 말했다. “특권이 개입하고 권력이 남용되기 때문에 절차적 정의, 과정적 정의로서의 공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공정 주장은 숙명여고 입시비리, 은행권 채용비리를 규탄하는 주된 근거였다. 최서원씨 딸 정유라씨의 입시비리와 학점 특혜는 2016년 촛불집회를 일으킨 한 계기가 됐다.

하지만 비판도 만만찮다. 신경아 교수는 최근의 공정 담론이 ‘가짜 공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 ‘눈앞의 기회가 고르게 주어지는가’에만 관심을 갖고 장기적으로 형성된 격차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다면, 출발선이 같다고 해도 기회의 공정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 후 등굣길이 막히면서 불평등한 교육환경이 논란이 됐다.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은 “시험공부를 위한 노력도 기본적인 환경이 뒷받침돼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정한 경쟁’ 이전에 ‘공정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 세대의 경쟁 조건은 이전 세대의 경쟁 결과에서 비롯했다. 주병기 서울대 교수는 개천용불평등지수를 분석한 논문에서 2014년 최저환경에서 성공 잠재력을 지녔던 10명 중 4명이 최상위 소득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썼다. 같은 조건에서 2001년에는 1~2명만이 기회불평등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가난한 가정 자녀가 신분 상승할 가능성이 날이 갈수록 차단됐다는 것이다. 직업·소득을 얻은 후에도 부모의 영향은 지속된다. 개천용이 된들 집값을 감당해야 하는 청년은 저축을 해낼 수 없다. 반면 부모가 일찍 주거 문제를 해결해준 청년은 상대적으로 유동 가능한 자원이 많다. 금수저, 흙수저로 상징되는 ‘수저계급론’이 등장한 이유다.

한국의 대입시험과 공채는 세습에 영향받는 불평등 구조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정규직 등 희소한 보호막을 누릴 ‘자격’으로만 쓰였다. 자격 없는 자의 권리 요구는 ‘무임승차’로 비판받았다. 김영민 청년유니온 사무처장은 “인국공 사태에서 정규직, 취준생들은 ‘너는 시험에서 떨어졌으니 받아들여라’라는 말로 차별을 정당화했다”며 능력주의가 불공정한 결과에 침묵하고 외려 용인하는 논리가 됐다고 지적했다.

공정 막는 ‘공정의 역설’

‘부모의 수저가 자식의 수저를 결정한다’는 체념적 인식과 ‘시험 봐서 정하자’는 공정성 주장이 동시에 제기되는 건 독특한 현상이다. 능력이 부모 등의 영향에 기인한다면, 시험을 치러보지 않아도 결과는 예측 가능하다. 공정성 연구자인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금수저론은 ‘우리의 출발점은 동등하지 않다. 능력주의는 허구다’를 보여주는 통속이론인데, 이상하게도 박탈감을 말할 때만 쓰이고 능력주의와는 연관지어서 얘기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대치동처럼 어느 동네에서 살고 있는지가 교육 수준에 영향을 미치잖아요. 자식의 거주지는 부모의 영향을 받고, 사교육비도 다르죠.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그래서 ‘보정 작업’을 합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의 말이다. 현세대 개인의 경제력 격차에 부모 세대의 영향이 있다면, 이를 보정해줘야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도 “능력을 획득하는 과정이나 자원조차 불평등한 사회라면, 공정은 ‘소수자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로 해석돼야 한다”고 말했다.

차별 없는 일자리, 균등한 교육 여건 등 ‘공정한 조건’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있었다. 문제는 그때마다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는 점이다. 복지를 확대하거나 재교육 예산을 투입하려 하면 당장 ‘역차별’ 논란이 일어나곤 한다. 소수자 우대 전형은 늘 ‘악용’이란 프레임에 시달린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최근의 공정 논란에서는 약자들이 정당한 권리를 획득하도록 하는 조치가 불공정하다는 주장이 많다”고 말했다.

공정을 말해야 할 약자·소수자는 정작 잊혔다. ‘조국 딸 입시비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도 의제는 오직 입시였다. 고졸 청년이 마주한 노동조건 등을 공정과 정의의 잣대로 보아 개선하자는 목소리는 적었다. 집회를 주도한 측도 주로 서울 소재 유명대학 학생들이었다. 하헌기 소장은 “상위 20% 관문을 어떻게 만들든 계층은 생긴다. 20%가 있으면 80%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20%로 진입하는 관문이 얼마나 공정한가를 떠나 평범한 80%의 삶이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한 조건 갖기 어려운데 정규직 요구 ‘무임승차’ 비판

소수자 우대 등 대안 만들면 역차별 논란 일거나 악용

형식 아닌 진짜 공정은 없나

‘공정의 역설’을 멈출 수 있을까. ‘IMF 세대’에 비유해 ‘코로나 세대’라는 말이 나온다.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가 서울 거주 19~34세 청년 2011명을 조사한 결과, 29.9%가 ‘2020년 2월 이후 실업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고용 형태가 불안정하거나 소속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더 고통받았다. 프리랜서나 특수고용직 노동자는 51.3%가, 5인 미만 사업장 소속원은 42.4%가 수입원을 잃었다고 했다. 정규직 노동자 중 실업을 응답한 사람은 16.4%였다. 협소한 공정에의 집착이 외려 강화될 수 있는 배경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정치권을 비롯한 소위 엘리트들이 공정 담론을 제대로 다뤄야 한다고 봤다. 시민들은 엘리트의 입장과 근거를 토대로 특정 의제를 판단하는데, 정치권에서 그간 무엇이 지금 한국 사회에 공정인지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정희원 교수는 “시민들이 공정을 열망하는 것 같으니 정치인들이 ‘공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은 했다. 하지만 정작 공정이 무엇인지는 정의하지 않은 채 앵무새처럼 단어만 반복했다”며 “정책 결정자가 정의의 원칙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정 잣대의 쓰임새를 달리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김공회 경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의 공정’을 말했다. 김 교수는 “예컨대 의료서비스를 받을 기회가 지금은 지역에 따라 편차를 보인다. 의제로서 논의될 기회도 불공정하다”며 “지방대 졸업생이나 고졸 청년의 취업 등 삶의 국면은 서울권 대졸자에 비해 의제로서 덜 다뤄진다”고 말했다.

한숭희 교수는 정부의 역할이 공정 잣대를 들이대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정한 선발은 진보 정부의 어젠다가 아닙니다. 정부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21060003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④]무엇이 ‘공정한’ 백신 접종일까? (경향, 백승찬 기자, 2021.01.21 06:00)

코로나19 백신의 효과가 좋아 인간을 감염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고 가정해보자. 전 국민이 동시에 접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상상하자.

이 경우에도 ‘공정’의 문제가 대두된다. 문제는 공정에 여러 개의 얼굴이 있다는 점이다. 이 상황에서 공정한 기준이 다른 상황에선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김도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분배정의의 몇 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이를 토대로 백신 접종에 대한 ‘사고실험’을 해보자.

왜 노인들이 먼저 맞을까…필요원칙

필요원칙, 객관성 가졌는지 문제

사회마다 있는 인간다운 삶의 기준

역시 기본적 필요의 범주에 넣어야

필요원칙은 필요에 따라 배분한다는 원칙이다. 가족, 친족, 종교단체 등 유대가 강한 공동체에서는 각자 필요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곤 한다. 아픈 사람에게 우선 의료진을 투입한다거나,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도 필요원칙에 따른 배분이다.

현실에서 백신 우선접종 순위 역시 필요원칙에 따른다. 정부가 다음달부터 실시하기로 한 백신 우선접종 권장 대상은 의료기관 종사자, 집단시설 생활자 및 종사자, 65세 이상 노인 등이다. 감염 위험에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돼 있거나, 감염 시 중증으로 발전할 위험이 높은 이들이다. 해외에서도 이 기준은 대동소이하다.

문제는 개인의 ‘필요’가 주관적 욕구를 넘어 사회정의의 기준으로 합의될 만한 객관성을 가졌는지 여부다. 예를 들어 빈곤층 아동이 점심을 사먹는 것은 누구나 ‘기본적 필요’라고 인식하겠지만, 이 아동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태권도장에 다니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기본적 필요란 생명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대와 사회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이 있고, 이 역시 기본적 필요의 범주에 해당한다.

아마르티아 센, 마사 누스바움 등은 개인이 기본적 필요를 넘어 각자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역량 계발 기회까지 제공받아야 정의롭다고 본다.

의인이 먼저 맞아야 할까…응분원칙

원형적 도덕관념인 응분원칙

모든 상황에 적용하기는 어려워

재능 계발 기회 공정해야 정당화

성실하게 노력해 성과를 낸 사람에게는 상응하는 포상을 주고, 악행을 저지른 사람에겐 벌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응분원칙에 해당한다. 응분의 몫은 ‘노력×기여’로 도식화할 수 있다. 아무리 노력을 했더라도 사회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면 아무런 몫을 받지 못한다. 예를 들어 며칠에 걸쳐 잔디밭의 풀잎 개수를 모두 센 사람이라 하더라도 칭찬이나 보상금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응분원칙을 백신 접종에 적용한다면 어떨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공동체의 자긍심을 높여준 운동선수,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한 의인, 밤낮을 가리지 않는 연구로 세계적인 성과를 낸 학자가 우선접종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반면 성범죄자, 살인범, 대형 경제사범 등은 백신을 맞지 못할 수도 있다.

응분원칙은 원형적인 도덕관념이지만 모든 상황에 적용하기엔 어렵다. 개인의 업적을 계산하는 데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른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21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 하더라도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수 있다. 존 롤스는 업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재능, 근면 같은 품성 역시 온전히 개인의 몫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자연의 선물’, 즉 운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응분원칙의 작동이 정당화되기 위해선 재능 계발의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져야 한다. 현재의 성과와 업적만 보고 적용된 응분원칙은 경제적·사회적 양극화를 정당화해 불평등을 고착화할 수 있다.

정부의 ‘백신 통제’는 정의에 반하나…계약자유원칙

계약자유원칙에 근거해 내린 선택

진정 자율적이었다 인정받으려면

충분히 좋은 조건이었는지 살펴야

로버트 노직은 소유 과정이 정당했고 자발적 교환이나 이전이 이뤄졌으면 그 결과는 정의롭다고 본다. 계약자유원칙은 법학에서는 ‘사적 자치의 원칙’, 경제학에서는 ‘시장원칙’이라 불린다.

계약자유원칙은 선택의 자유에 근거한다. 선택의 자유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으며, 각자 최선의 선택을 내려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생각을 배경에 둔다. 민법학자들은 “당사자가 스스로 선택하여 내리는 결정은 인격의 발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격 존엄의 가치를 계약자유의 기초”로 보기도 한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자기결정권은 최고 가치 중 하나다.

계약자유원칙에 따라 백신을 접종하기로 한 공동체를 가정해보자. 부유층은 화이자, 모더나 등 백신 개발사와 개별 접촉해 거액을 주고 집에서 주사를 맞을 수 있다. 의료진과 접종자 모두 자유의사에 따른 행위이므로 문제가 없다. 고위 정치인이나 관료들도 국내에 들여온 백신을 우선 맞으려 할 수 있다.

계약자유원칙이 언제나 정의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궁박한 처지의 여성이 성을 매매하는 경우, 누군가의 강제가 없었다 해도 이를 진정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선택이 자율적이라고 인정받기 위해선, 선택이 ‘충분히 좋은 조건’에서 내려졌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김도균 교수는 “정의의 원칙들은 맥락에 따라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적용할 때 어떤 원칙을 우선할지 정해야 한다”며 “시민들의 지위가 동등하게 유지되고 복원되는 방식으로 정의원칙의 우선순위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20211500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④]“협소한 공정 논란 벗어나려면, 모두가 모두를 돕는 '관계적 존재론' 발전시켜야” (경향, 백승찬·조문희 기자, 2021.01.20 21:15)

‘우리 시대의 공정론’ 연구하는 애리조나주립대 김정희원 교수

지난해 대한전공의협의회는 공공의대 설립, 의대정원 확대 등에 반대하며 정부의 의료정책 추진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논란까지 언급하며 “모든 청년들과 연대하려 한다”고도 했다.

정부가 당시 의사 국가고시를 거부한 의대생들을 위해 이달 중 추가 국시를 실시하겠다고 하자 반대 여론이 일었다. 보건의료노조는 성명에서 “공정과 형평이라는 원칙을 훼손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정’이라는 가치가 전혀 다른 맥락에서 만능열쇠처럼 사용된다. 공정이 무엇이기에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됐을까. 공정 개념을 연구해온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를 지난 6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김정희원 교수는 “공정 개념이 왜곡돼 사용되고 있지만, 단지 ‘20대의 공정성 감각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이 인기를 끌면서 거시적·구조적 분석이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의협의 의사국시 논란에서 양측 모두 공정의 가치 내세웠지만

결국 정부가 순응하며 목표를 접어

조율 과정에서 ‘물밑작업’도 문제

- 의사국시 논란의 양측에서 모두 ‘공정’을 주요 가치로 내세웠다.

“갈등관리 측면에서 정부가 명백히 자충수를 뒀다. X축을 관계, Y축을 목표라고 해보자. 목표가 중요하면 싸워 이겨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상대에게 맞춰주면 된다. 의대생 추가 국시는 정부가 관계를 위해 목표를 접은 것이다. 이는 강자에게 순응(accomodation)한 결과다. 이론적으로 볼 때 정부가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고 의대생은 시험으로 자격증을 얻어야 하는 전문가 집단에 불과한데, 반대로 정부가 진 상황이다. 외교든 내치든 정부의 갈등해소 방식은 관계와 목표의 중간지대여야 한다. 어느 쪽도 원하는 걸 다 갖지는 못하면서 조금씩은 챙겨가는 것이다. 코로나19 국면이고 의료계가 피로를 호소하니, 추가 국시도 명분이 없지 않았다. 시험 보지 않은 의대생 중 비수도권 지역이나 공공병원에 지원할 사람에게 다시 국시 응시 기회를 준다거나 하는 전략적 사고를 했으면 어땠을까. 정부가 의사협회와 조율하는 과정을 ‘물밑작업’했다는 점도 문제다. 절차의 공정성 못지않게 공정한 절차를 만드는 과정을 알리는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다.”

한국인의 자생적 이론 ‘금수저론’

불평등에 대한 탁월한 관점 보여

현대사회에 퍼져있는 ‘능력주의’

평가 방식 자체가 기울어져 무효

- 입시나 병역 비리 등에 민감한 한국인의 공정 감각이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볼 수 있지도 않을까.

“미국에 살다보니 사회 구조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이 탁월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선명한 사례는 ‘금수저론’이다. 각자 출발점이 동등하지 않고, 부와 불평등이 세습되고, 노력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낸 자생적 이론 아닌가. 미국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깊은 신념이 있는 나라다. 학생들에게 ‘자유의지로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나’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그렇다’고 답한다.”

- 마이클 샌델 역시 최근작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능력주의’를 비판했다. 능력주의는 불가능할뿐더러, 하층계급에게 더욱 큰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능력주의적 세계관은 워낙 보편적으로 퍼져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학자의 성취를 측정하는 방식은 순수하게 능력주의적으로 보인다. 논문 개수, 피인용 횟수, 논문이 게재된 저널의 영향력 등에 따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실제로는 능력주의가 아니다. ‘팬데믹 상황에서의 재택근무 도입과 효과적 협업 방식’ ‘팬데믹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의 회복탄력성’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고 치자. 내가 후자에 훨씬 공을 들여 좋은 논문을 썼다 하더라도, 많이 인용되고 펀딩도 받을 수 있는 논문은 전자다. 학계 이외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능력을 평가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기울어져 있다.”

- 의사, 공기업 정규직 등이 공정성을 빌미로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려는 움직임을 ‘담론의 무기화’라고 비판했다. 반대로 소수자들이 담론을 무기로 삼을 가능성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

“소수자의 경우 ‘무기’라는 전쟁 관련 비유보다는 ‘담론의 권력화’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한다. 권력화 측면에서는 관점이론(standpoint theory)이 먼저 떠오른다. 관점이론의 핵심은 주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 입장만 알지만, 비주류는 주류와 비주류의 삶을 모두 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지배관념 대신 ‘파편적 관념’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비주류가 주류에게 ‘너는 주류고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만, 그건 파편적이다. 내가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전환이 주는 힘이 있다고 본다.”

- 한국 사회에서는 청년, 그리고 남성이 ‘공정’에 더욱 민감한 것으로 보인다. 이유가 있을까.

“박탈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상대적 박탈감이다. 빈자가 부자를 보고 느끼는 종류다. 또 하나는 사회학자 마이클 킴멜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남성을 분석하면서 제시한 ‘어그리브드 인타이틀먼트’(aggrieved entitlement·빼앗긴 자격)다. 이 감정은 빈곤층이 아니라 전통적인 기득권층에서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 정도로 노력했으면 부와 명예를 누렸는데, 왜 지금은 그렇지 못할까’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박탈감이다. 대졸 남성이 예전처럼 쉽게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자 여성이나 소수자를 향해 화풀이하는 것이다.”

김정 교수는 협소한 공정 논란을 벗어나기 위해선 ‘개별주의적 존재론’을 벗어나 ‘관계적 존재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본다. 전자가 각자도생 원리에 충실해 경쟁을 촉발시킨다면, 후자는 “관계가 먼저 존재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신자유주의로 득세한 ‘개별주의’

지구적 재난 상황서 통하지 않아

상호부조 강조하는 관계적 존재론

미국선 ‘뮤추얼 에이드’로 구체화

- 관계적 존재론이 사회 속에서 실천적으로 활용될 수 있나.

“개별주의적 존재론이 득세한 것은 신자유주의 이후다. 전 지구적 재난 상황에서 각자도생 원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관계적 존재론의 핵심은 단순히 ‘우리가 연결돼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 ‘나는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 있다’ ‘모두가 모두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미국에선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의원이 ‘뮤추얼 에이드’ 조직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해 사회에 널리 퍼지고 있다. 일종의 상호부조 네트워크다. 각자 힘들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즉 가족이나 친구, 사회복지사 등을 떠올려 네트워크를 만들고 이걸 공통의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확대하는 것이다. 간단하게는 ‘내가 오늘 빙판길에 넘어져서 나갈 수가 없는데, 누가 감기약 사다줄 수 있어?’ 하면, 네트워크 안의 한 사람이 ‘퇴근길에 들러 사줄게’ 하고 답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계속하다보면 도움, 참여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는 것이 오카시오코르테스의 주장이다. 한국에서는 ‘오늘 LG트윈타워 로비에서 농성 중인 청소노동자에게 음식 가져갈 사람’을 모으는 식이다. 존재론적 위계를 상정하는 ‘자선’보다는 ‘연대’가 필요하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270600025&code=910100

[흑백 민주주의⑤]죄다 남성·대졸·50대 이상…과연 이들이 당신의 입장에 서줄까 (경향, 김지원 기자, 2021.01.27 06:00)

당신은 ‘대의’되고 있습니까

데이비드 J 스미스의 책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은 세계 인구를 100명으로 축소했을 때 어떤 지형 속에서, 어떤 이들이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한국 의회가 사회 구성을 얼마나 비례적으로 반영하는지 살펴보는 방법으로 활용하면, 한국엔 남자 90명, 여자 10명이 살고 있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5명뿐이며, 50대가 절반이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13대 총선 이래 국회의원 당선자 구성비를 따른 것이다.

국회 내 대표자의 당사자성은 중요한 화두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민주주의 3.0>에서 “국회의원의 구성이 인구 구성 중에서 특정 집단에 편중되어서는 안 된다”며 “공정한 정치적 대표성을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과소 대표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국민의 대표자가 특정 계층에 몰려 있을 경우 대의되지 않는 소수자들에게 절박한 정책들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의회 다양성을 위해선 지역적 기반 없이도 계급, 정체성을 대표하면서 국회에 입성하는 비례대표가 늘어나야 한다. 하지만 현재 전체 의석수 300석 가운데 비례대표 의석은 약 15% 수준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소선거구제하에 지역구 의석을 독식하고 있는 거대 양당이 비례대표 의석의 상당수까지 차지하면서 제3정당이 설 기반조차 흔들리고 있다.

■국회의원 중 남성 90%·대졸 이상 95%

특정 세대와 성별 과잉 대표

21대 여성의원 수 19% 불과

1987년 민주화 후에도 국회 구성은 특정 세대와 성별에 몰려 있었다. 경향신문은 13~21대 국회의원 당선자의 특성을 분석, 국회의원이 얼마나 인구비례적으로 국민을 대표하고 있는지 조사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당선인 통계 자료를 활용했고, 13~16대까지는 지역구 당선인만을 분석 대상에 포함시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통계시스템에 따르면 13~21대 국회 총 당선자 2439명 가운데 여성은 242명으로 9.9%에 불과하다. 국회의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해방 이후 최초로 10%를 넘어선 것은 2004년 치러진 17대 총선이었다.

1987년 헌법 개정 이후 치러진 13~14대 국회엔 여성 당선인이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15~16대에도 여성 당선인은 각각 2명(0.8%), 5명(2.2%)으로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17대부터 비례대표 후보 여성할당제 의무화 등의 영향으로 여성 비율이 늘긴 했으나 21대 국회 기준으로도 여전히 여성 의원은 전체의 19.0%(57명)에 불과하다.

연령대로 보면 13~21대 국회 총 당선자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연령대는 50대(1226명·50.3%)였다. 지난해 통계청 인구 조사에 따르면 50대는 전체 인구의 16.6%다. 전체 당선자 가운데 50대 이상의 비율은 13대 132명(58.9%)에서 18대 204명(68.2%)을 거쳐 21대 249명(83.0%)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반면 청년은 과소 대표되고 있다. 20대 국회에는 국민의당 김수민 의원이 유일한 20대였다. 21대에도 나이가 20대인 의원은 류호정·전용기 의원 2명에 불과하다.

학력을 기준으로 봐도 대졸 이상 쏠림 현상이 13대 이후 꾸준히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13대 국회도 전체의 96.0%(215명)가 대졸 이상이었지만, 21대 국회에는 전문대 출신 비례대표 1명 이외엔 지역구·비례대표 모두 100% 대졸 이상으로 구성됐다. 대졸 이상 가운데서도 대학원 출신(재학, 수료, 졸업 등)의 비중은 13대(99명·44.2%) 이후 꾸준히 늘어 21대엔 전체의 61.0%(183명)를 차지하면서 학력 상향 현상이 강화됐다. 문제는 ‘대졸, 50대 이상, 남성’이 과잉 대표되는 가운데, 국회에서 과소 대표되거나 아예 존재 자체가 드러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계층은 과잉 대표자들의 반대항인 저학력자, 청년 혹은 노인, 여성이다. 이주민, 성소수자, 플랫폼노동자 문제 등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의제이지만 이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소수자 대표들에게 역시 국회의 문턱은 높다.

■적대적 공생하는 거대 양당

거대 정당에 유리한 선거제도

승자독식 소선거구제 방식에

21대 총선 사표 43.7% 달해

그간 국회에서 특정 계층 및 정당이 과대 대표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의 ‘판’을 짜는 기본 원칙인 선거제도가 거대 양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21대 총선을 앞둔 선거제도 개혁 과정에서도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2019년 12월 자유한국당(이듬해 2월 미래통합당으로 합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위시한 선거제도 개혁 움직임에 반발해 “이 법(공직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비례대표 정당을 결성할 것”이라며 위성정당 카드를 꺼내들었고, 실제로 이듬해 2월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을 출범시켰다.

“후안무치한 정치 행위”(이재정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라고 비판했던 여권도 이에 똑같은 수로 응수하면서 문제는 더욱 커졌다. 정봉주 전 통합민주당 의원은 열린민주당 창당을 알리며 “많은 분들이 우려도 했지만 우리가 꼭 가야 할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최배근 전 더불어시민당 공동대표는 창당 선언식에서 “(창당은) 보수 양당의 위성정당이 탈취하고자 하는 소수의 목소리, 시민의 권리를 지키려는 정당방위”라고 말했다.

요는 의석이다. 미래통합당만 비례위성 정당을 만들어 21대 총선을 치를 경우 민주당은 6~7석의 비례의석만 얻는 반면, 미래통합당은 약 25석을 얻을 것으로 점쳐졌다. 이 밖에도 구체적인 논의 과정에서 절반만 연동형 원리를 적용하고, 비례의석 확대 없이 30석 상한선(‘캡’ 조항)을 거는 등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요소들은 모두 거대 양당의 기득권 싸움 가운데 원안에서 어그러졌다.

선거제도 개혁은 ‘87년 체제’ 이후 30년이 흐른 ‘촛불 체제’의 시대적 목소리였다. 2019년 1월 본격적인 선거제도 개편 착수를 앞두고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는 “이제 민주화 30년을 보내면서 보다 나은 민주주의, 한단계 더 성숙된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며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투표가치가 보다 공정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우선 비례대표 비율이 지나치게 낮아 소수자 대표성이 떨어지는 게 문제다. 21대 국회 기준으로도 전체 의석 300석 가운데 지역구 의원은 253석(84.3%)으로 비례대표(47석·15.7%) 의석을 압도한다. 국제의원연맹(IPU)에 따르면 혼합형 선거제 국가들 중 비례대표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아르메니아(68.7%)다. 독일(50.0%), 일본(37.5%) 등의 비례대표 비율도 한국에 비해 훨씬 높다.

자금력이나 인적 네트워크, 당의 지원이 부족한 사회적 약자들은 기성 정당의 지역구 공천 과정을 통과하기 힘들뿐더러 지역을 기반으로 한 투표에서 당선되기도 힘들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 비례대표제다. 비례대표의 대표적인 효과 중 하나는 성별 보정이다. 21대 총선 기준으로도 지역구 당선 여성 의원은 29명에 그쳤지만, 비례대표를 통한 보정 효과로 19.0%(57명)의 의석을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또 비례대표 제도는 그간 청년, 이주민, 장애인 등 기존 정치권에 편입되기 힘들었던 소수자들을 국민의 대표로 세우는 효과를 낳았다.

1등만 살아남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 선거 방식도 국회의 다양성을 해치는 요소다. 현행 선거에서 A후보가 48%를 얻고 차순위인 B후보가 47%를 얻는 경우 B후보가 얻은 표는 그대로 사표가 된다. 이런 구조에선 거대 양당 체제 밖의 제3정당이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가 지난해 5월 발표한 ‘21대 총선, 유권자 지지와 국회 의석 배분 현황’ 리포트에 따르면 21대 총선에서 의석에 반영되지 않은 사표는 43.7%로 총 1256만여표에 이른다.

기존 병립형 비례대표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뀌며 원취지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정당 득표에 따라 소수정당에 더 많은 의석이 돌아갈 수 있었다. 병립형은 정당 득표수에 따라 의석을 단순비례로 배분하지만, 연동형은 각 정당이 보유한 지역구 의석수를 고려해 ‘보정’ 과정을 거친다. 이는 지역구 의원이 많은 거대 양당보다 소수정당에 유리하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선거제도 개혁 요구는 산산이 부서졌다. 거대 양당이 비례대표 의석 47석 가운데 36석을 차지하고, 여당은 민주화 이후 최대 의석인 약 180석을 얻어내면서 ‘쏠림’ 현상은 심화됐다.

■양당의 기득권을 포기시키려면

21대 총선 땐 ‘위성정당’ 꼼수

“양극단 정치 피해자는 시민들”

‘득표율=의석수’ 비례 확대 등

소수자 대표들에 문턱 낮춰야

결국 문제는 제도 개혁의 본취지를 어기고 위성정당을 내세워서라도 기득권을 지키려 한 거대 양당의 ‘꼼수’였다. 다시 본취지를 살린 선거제 개혁 논의가 힘을 받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당파를 초월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수다. 정치권에만 선거제도 개혁을 맡길 경우 또다시 거대 양당이 나눠먹는 21대 총선 결과가 반복할 수 있다. 양당은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1위 대표제에서 혼합형 비례대표제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뉴질랜드의 경우 국민적 공감대를 기본으로 한 수차례의 국민투표가 개혁의 관건이 됐다.

비례대표 비율 확대를 위해선 현실적으로 의원정수 확대 논의도 병행해야 한다. 이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높은 상황이라 국민을 설득하기 위한 정치권, 범시민사회단체 등의 노력도 필요하다.

강원택 교수는 “국민 모두가 현재의 양극적인 한국 정치 구도로 인한 피해자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큰 틀에서 한국 정치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며 “왜 (선거제도 개혁을) 해야 하고, 왜 그것이 우리 삶에 중요한지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민선영 간사는 “(선거)제도적 차원의 개혁안은 국회에서 만들지만, 선거제도 개혁에 따라 내 삶의 정치가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는지 등에 대해서도 시민들 사이에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음 선거 때 거대 양당의 비례위성 정당 문제가 똑같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구체적으론 ‘꼼수’가 불가능한 제도를 다시 구상하는 것도 중요하다.

권역별 비례대표, 개방명부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개방명부 비례대표제’를 제안한 하승수 전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정치권은 선거 개혁 논의가 잠잠해질 때쯤 과거(병립형)로 회귀하려고 할 것”이라며 “복잡한 제도를 만들수록 꼼수가 등장하기 쉬워지기 때문에, 선거제 개혁의 본의를 살리되 (위성정당 등의) 꼼수를 최대한 없앨 수 있는 단순한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비례제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당의 비례대표 후보 구성 및 공천 방식을 어떻게 할지도 중요한 문제다. 현행 정당 내부의 ‘밀실’ 공천 방식으론 수뇌부의 권한만 키울 가능성이 있다. 실제 19대 총선 당시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 비리, 통합진보당 경선 비리 등 비례대표 공천을 둘러싼 잡음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하 전 대표는 “한국에선 정당이 자체적으로 공천 개혁을 하긴 어렵다. 상향식 공천 기준 등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다 해봤다고 봐야 한다”며 “현재 차선 혹은 차악에 투표하는 유권자들이 많은 상황에서 (유권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개방명부 도입 등이 국회의원 선거뿐 아니라 지방선거에서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270600001&code=910100

[흑백 민주주의⑤]레비츠키 “민주주의 지키려면, 정치인들이 지지기반에 맞설 줄도 알아야” (경향, 조문희 기자, 2021.01.27 06:00)

“트럼프에게 4년의 시간만이 주어졌던 것은 민주주의자로서 다행이었다.”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레비츠키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국가 간 정당·정치제도의 차이를 연구하는 정치학자다. 트럼프 당선 직후인 2016년 12월16일 ‘트럼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해 화제가 됐다. 이 칼럼을 기초로 동료 학자 대니얼 지블렛과 저술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한국에도 번역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레비츠키가 보는 민주주의는 언제나 무너질 수 있는 약한 체제다. 권위주의자가 힘을 가지면 민주적 체제는 공격 받는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선출 과정에서 배제하는 건 민주주의 정신에 반한다. 선출될 권리는 보장하되, 반민주적 인물은 걸러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유권자들은 양극화됐고,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극단적 목소리를 걸러내긴커녕 정당의 지지기반으로 이용한다. 지난달 21일 화상회의 플랫폼에서 레비츠키와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책에서 “민주주의는 투표장에서 죽는다”는 표현을 썼다. 통상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하지 않나.

“예전엔 군사 쿠데타가 민주주의를 뒤엎었다. 이집트, 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긴 했지만, 오늘날 대부분 국가에서는 선출된 지도자가 민주주의를 붕괴시킨다. 선출된 총리나 대통령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합법적인, 혹은 반쯤 합법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전복시킨다. 국민투표, 개헌을 이용하거나 의회, 법원을 동원한다. 러시아, 베네수엘라, 터키, 필리핀, 헝가리, 폴란드에서 그랬다.”

-미국에서는 어땠나.

“미국도 여러 면에서 비슷한 경로를 따랐다. 미국 시민들은 2016년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규칙에 헌신하지 않는 정치 지도자를 선출했다. 프리덤하우스는 미국에 기반한 비정부기구임에도 미국을 칠레나 체코, 코스타리카보다 덜 민주적이며, 크로아티아, 몽골, 파나마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선거제도의 신뢰성이 파괴되고, 국가기관이 무력화됐다. 연방수사국(FBI)이나 법무부 같이 중립적이었던 국가기구가 정적을 향한 무기로 사용되는 상황을 겪었다.

민주주의 지지자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트럼프의 시간은 4년이었다. 그런 인물은 더 오래 재임할수록 더 많은 해악을 끼친다. 베네수엘라, 터키에서 민주주의가 허물어지는 데는 십수년이 걸렸다. 헝가리, 폴란드에선 민주주의가 느린 속도로 파괴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서서히 부식되는 것이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터키의 정의개발당(AKP)과 에르도안은 20년 안팎 권력을 쥔 채 큰 해악을 미쳤다. 미국의 정치 제도는 상당히 탄탄하고, 야당 역시 구조적·재정적으로 강하다. 경쟁력있는 선거를 치를 수 있다.”

-선출 전 그런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있나. 트럼프가 명시적으로 민주주의에 반하는 면모를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잘 관찰하면 권위주의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책에서 ‘잠재적인 독재자를 감별할 수 있는 네 가지 신호’(잠재적 독재자 감별법)를 제시했다. 시민, 언론인, 정치인들에게 선거 전, 입후보 전 정치인의 권위주의적 요소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 위험하잖아. 뽑으면 안되겠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페론, 에르도안, 두테르테, 보우소나르, 트럼프…. 누구에게도 적용되는 기준이다. 이들 대부분은 권력을 갖기 전 권위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히틀러처럼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등 독재적 징후가 뚜렷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인물은 식별이 쉽지 않다. 레비츠키가 잠재적 독재자 감별법을 제시한 이유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거나, 정치적 경쟁자의 존재나 가치를 부정하거나, 폭력을 조장 혹은 묵인하거나, 언론의 자유를 포함해 정치적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행태로 이를 정리한다.

레비츠키는 위험한 인물을 걸러내는 주체로 정당을 꼽는다. 일반 시민이 잠재적 독재자를 지지하는 것과 정당의 공식 지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반민주적 인물을 민주적 질서와 가치에 헌신하는 ‘정상적인’ 정치인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레비츠키는 당이 선거기간 공천 배제 등 방법으로 극단주의자를 고립시켜야 한다고 본다. 평소엔 조직 기반으로 극단주의자를 들이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내각 구성 등 현실적 이유로 유혹이 있을지언정 반민주적인 정당·후보자와 손을 잡아선 안된다. 입장이 다른 정당이라도 협력해 반민주주의 세력과 싸울 수 있다. 레비츠키는 미국 기성 정당이 이런 ‘문지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말한다. 2016년까지는 말이다.

-정당이 제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정당은 지난 50년간 미디어, 이익집단, 노조, 기업, 등 기구들과 함께 약화됐다. 전세계적 현상이다. 정당 내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움직임, 정치 지도자의 힘을 약화하고 유권자와 활동가의 힘을 강화하는 예비선거 등이 한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발흥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한다. 정보를 얻기 위해 기존의 제도들을 우회하고, 제도 바깥에서 자금을 모으고, 정당 바깥에서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게 됐다. 1960~70년대 미국, 유럽을 돌아보자. 그때 제도권 바깥에서 출마하려는 후보자들은 사실상 황야에 있는 것과 같았다. 자원, 미디어, 유권자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개별 정치인, 개별 정치 결사체, 기성 정당 내의 정치적 기구들 사이 역학 구도가 변했다. 이제 정치인들은 기성 제도들을 신경쓰지 않고 유권자에게 호소할 수 있다.”

-대선 후 트럼프는 선거 불신을 표명했다. 정치인이 아닌 지지자, 일반 시민도 개표 결과를 의심하고 음모론을 내놓는다.

“위험한 일이다. 수십년 전을 돌아보면 절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선거과정을 믿었고, 믿어야 했다. 선거에 심각한 부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거제도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사기로 얼룩진 적도 없다. 지금 문제는 우리가 매우 양극화됐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대단히 효과적으로 포퓰리즘을 전개해 미국에서 35% 정도의 지지층을 확보했다. 트럼프가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말하자 지지자들은 그대로 믿었다. 여론조사 결과 75%의 공화당원, 80%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믿는다. 이는 꽤 많은 미국 유권자들이 조 바이든은 정당한 대통령이 아니라고, 우리 선거제도가 민주적이지 않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기성 언론의 비판 보도를 ‘가짜뉴스’라 매도하기도 한다.

“‘가짜 뉴스’ 같은 용어를 쓰는 건 정치적 전략이다. 그건 마치 남미에서 ‘너 공산주의자 싫어하지’ 하면서 사람들을 골라내는 것과 같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양극단적인 견해를 갖고 있을 때 이것이 효과를 보인다는 점이다. 트럼프 역시 미국인의 30~35%가 ‘뉴욕타임스가 거짓말한다’고 믿고 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의 정도가 높아졌다. 마치 기성 정당과 정치인이 불신받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사회가 양극화되고 기성제도가 약해진 결과다.”

양극화는 레비츠키가 꼽는 현대 민주주의의 위험 요소다. 그는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정당들 간의 경쟁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는 체제라고 본다. 한 집단이 권력을 가졌다고 상대를 멸절시키면 경쟁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레비츠키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선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중요하다고 썼다. 관용은 정치적 상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적’이 아닌 ‘경쟁자’로서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다. 자제는 집권 세력이 권력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두 규범은 상호작용한다. 상대를 적으로 본다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상대를 제거하려 든다.

문제는 양극화된 현실에서 관용과 자제가 쉽사리 무너진다는 것이다. 레비츠키는 인터뷰에서 책에서 밝힌 입장을 바꿔, 명시적 규정이 중요한 때도 있다고 말했다.

-양극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유권자가 정당을 양극화했는지, 아니면 정치 지도자들이 이러한 현상을 추동했는지에 대해 정치학자들 사이에도 논쟁이 있다. 나는 ‘상향식’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극단화된 지지층이 공화당을 극우로 몰고갔다고 본다.

다만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을 때 지도자들이 제도, 지지자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지지기반에 맞서 싸우고, 위험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한다. 2016년 공화당 지도부가 ‘힐러리 클린턴을 좋아하지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위험천만한 선동가입니다. 우리의 지지자들이 클린턴에게 투표하라고 호소합니다’라고 말했으면 어떨까. 공화당 유권자 일부가 클린턴에게 투표해 클린턴이 이겼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공화당원으로서의 경력이 희생됐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주의는 피할 수 있었다. 우리의 민주주의와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팬데믹과 그에 대한 정부의 대처방식을 볼 때, 나는 그렇게 했어야 한다고 본다.”

-정당 간 대립도 심각한 것 같다. 정부나 집권당의 정책에 야당이 사사건건 반대하는 현상(비토크라시)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

“극단적인 양극화 상황에서는 견제와 균형, 삼권 분립의 원리 같은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식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은 정당에 대한 고려 없이 디자인됐다. 미국 시스템은 정당들이 다원적이고 느슨하고 실용적이며 이념적이지 않기 때문에 200년간 작동했다. 그래서 합의 아래 일할 수 있었다. 반면 남미에서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현상이 자주 나타났다.

미국의 극단적인 양극화는 현재 출구가 없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한 정당이 모든 제도적 기구를 장악하면 거버넌스가 작동하겠지만, 그 역시 위험한 일이다. 집권당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진다는 뜻 아닌가. 특히 한국, 미국처럼 대통령제를 채택한 국가에서 양극화 문제는 더 심각하다. 양극화로 다수세력을 차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면 견제와 균형이 무너진다.”

-유권자들의 이념적 양극화에 맞서 정치인들이 할 역할이 있나.

“유권자들이 양극화되고 있음을 정치인들은 감지한다. 그들에게 호소한다. 양방향에서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다른 정치인들과 경쟁하면서 극단화되고,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유권자들을 충동할 수 있다. 1990년대 공화당에서 뉴트 깅그리치는 현대적 극단주의의 아버지였다. 깅그리치가 극단주의를 발명하진 않았지만, 공화당 지지기반이 극단화되고 있음을 영리하게 알아채고 이러한 극단화를 부추기는 아이디어들을 개발했다. 극단화를 강화시킨 것이다. 정치인들은 수동적으로 표를 얻지 않는다. 그들은 유권자를 변화시킨다.”

-책에서 ‘제도적 자제’를 강조했다.

“미국 헌법은 매우 한정적인 내용의 문서다. 딱 4쪽이며,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1951년까지 대통령 재선에 대한 내용은 헌법에 없었다. 차베스처럼 미국 대통령 역시 평생 선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조지 워싱턴이 재선하고 물러난 뒤, 150년간 누구도 삼선에 도전하지 않았다. 시스템이 자제에 기반한 형식적인 제약에 의해 작동한 경우다. 영국의 정치 시스템도 수백년 간 자제에 기반했고, 여전히 그렇게 작동한다.”

-하지만 자제는 정치인 개인의 양심에 크게 좌우되는 것 같다. 법으로 명문화하는 게 낫지 않을까.

“명문화되지 않은 규범과 자제가 무너졌을 때는 분명 법적·제도적 권한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3선을 마치고 1944년 4선에 성공한 뒤 사망했을 때, 양대 정당은 함께 개헌해 명문화된 규칙을 만들었다. 이제 3선 금지는 명문화된 조항이 됐다. 또 다른 예로, 미국에는 대통령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는 법적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그래도 트럼프 이전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젠하워, 케네디, 닉슨 레이건, 클린턴, 오바마 등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는 있지만, 이들 중 누구도 대통령직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닉슨처럼 법을 어기는 이는 있었지만 돈을 벌려고 대통령이 된 사람은 없었다. 트럼프는 규칙을 깨트리고 규범을 어겼다. 트럼프 이후 우리는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이용해 돈을 벌지 못한다’는 규범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규범이 존재하지 않거나 무너졌을 때, 명문화된 규정은 가장 효과적인 대체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270600035&code=910402

[흑백 민주주의⑤]한국서 ‘제3당’ 성공하려면…거대 양당 불만을 넘어 이념·정책 차별화해야 (경향, 백승찬 기자, 2021.01.27 06:00)

국민의당 등 인물 중심의 제3당

기성정당의 문제점 못 넘어서며

선거 결과에 따라 이합집산 거듭

한국 의회 구조에서 제3당은 국민의당 등 인물중심 정당, 정의당 등 이념중심 정당으로 나뉜다. 양극화를 가속화하는 거대 양당 체제에 대한 반발이 있지만, 제3당은 정당 내외의 문제 때문에 좀처럼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안철수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의당은 21대 총선에서 6.79%의 정당득표율로 비례대표 3명을 배출했다. 이 같은 인물중심 제3당은 과거에도 정주영·정몽준씨 등 대선후보를 중심으로 결성됐다. 문제는 이 같은 정당들이 선거 결과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한다는 점이다. 선거를 앞두고 급하게 만들어졌기에 탄탄한 조직을 갖추지 못했고 이념적 지향점도 모호했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는 논문 ‘한국에서 제3정당의 실패요인’에서 안철수 대표를 내세운 새정치연합의 실패 사례를 분석했다. 그는 제3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성정당에 대한 단순한 불만을 넘어 선거를 치를 만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봤다. 새정치연합은 기성정당과 차별화되는 이념적 위치 선정에 실패했고, 지역주의·이념적 양극화 등 기성정당의 문제점을 넘어서지도 못했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21대 국회에서 정의당은 6석을 확보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수혜를 입어 의석수를 크게 늘릴 것으로 기대됐으나, 거대 양당이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를 쓰면서 20대 국회와 똑같은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이념정당에도 ‘정치적 정체성’은 중요하다. 논문 ‘한국 정치의 유권자 지형: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와 다당제의 가능성을 중심으로’(김기동·이재묵)는 21대 총선 결과를 분석하며 진보정당들에 진보적 유권자를 포섭할 만한 이념적 토대가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저자들은 한국 사회에 다당제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진보정당이 복지·여성·환경 등 분야에서 기성정당과 다른 정책적 이슈를 선점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최근 차별화 전략 부각하던 정의당

당 대표 성추행 사태로 최대 위기

녹색당 역시 성폭력 사태로 논란

젠더 이슈 강력히 내세운 여성의당

지난 총선에서의 성과 주목할 만해

정의당은 최근 보편증세나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조하는 등 기성정당과의 차별화 전략을 부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종철 대표의 성추행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창당 9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2012년 창당된 녹색당에도 당내 성폭력 사태가 있었다. 전 당직자가 신지예 전 공동위원장에게 성폭력을 행사해 1심에서 징역 3년6개월형을 받은 것이다. 녹색당은 선고 뒤 “피해자의 회복과 가해자의 엄벌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점에서 원외인 여성의당의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여성의당은 지난 총선 때 창당 38일 만에 20만표를 얻는 성과를 올렸다. 디지털성범죄 등 기성정당이 간과해온 젠더 이슈를 강력하게 부각한 결과다. 여성의당은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위한 후보자 경선을 진행 중이다.

채이배 전 의원은 “해방 이후 ‘독재 대 민주’의 구도가 2000년대 들어 ‘진보 대 보수’의 구도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20년간 심화된 정치 양극화, 극단적 갈등을 넘는 제3지대에 대한 열망이 국민들 사이에 잠재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204060000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⑥]‘공공이 안녕’하면 ‘개인의 권리’는 묻혀도 되는가 (경향, 윤승민·조문희 기자, 2021.02.04 06:00)

코로나가 던진 ‘질문’

■잠시, ‘방역’이 있겠습니다…‘공정’은 잠깐 넣어두세요

2020년 코로나19는 한국 사회의 많은 부분을 바꿔 놓았다. 자영업자들의 수입이 줄고 문을 닫는 가게들 또한 늘어났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확진자의 개인정보와 동선을 공개한 데 이어 시민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했다. 전염병 확산이 생태·기후변화에서 비롯됐다는 인식이 생겼고, 정부와 기업들의 기후위기 대응도 구체화됐다. 산업구조 변화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일련의 변화는 논란을 낳았다. 방역 때문에 입는 피해가 대기업보다 소상공인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면서, 수도권 소상공인들은 지난 2일 방역당국이 내건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 영업제한 시간인 오후 9시 이후에도 영업을 이어가는 ‘오픈 시위’에 나섰다. 더 급진적인 탄소중립을 주장하는 환경운동단체와 탄소배출 산업의 일자리를 지키려는 노동운동단체가 기자회견장에서 충돌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는 방역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문제에 대해 충분한 논의를 하지 못했다. 양극단의 목소리, 정치적 이슈가 될 수 있는 사안만이 과도하게 논의되는 ‘흑백 민주주의’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소장은 “군사적 위협에 대응한다며 주민들을 내쫓고, 경영상의 긴급한 필요 때문에 노동자를 대량 해고하는 등 한국 사회 어딜 가나 ‘위기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한다”고 지적했다.

이지언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전례 없던 위기에서 급한 불을 끄는 식으로 방역이 진행됐다”며 “장기적으로 개인의 권리와 방역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탄소중립 시대에서 환경·노동운동이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지 논의의 장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스페인 정부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거부한 사람들 명단을 작성해 유럽연합(EU)과 공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수집된 개인정보를 비공개할 것이라 했지만, 개인정보가 수집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악용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컸다. 프랑스 정부는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사람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법을 만들려다 반발이 계속되자 취소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속도가 빠르다는 이스라엘은 백신을 대거 공급한 다국적 제약회사 화이자에 코로나19 관련 데이터를 넘겨주기로 했다. 코로나19 백신의 원활한 접종을 위해 백신 거부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개인정보를 수집·처리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서구에서 논란이 된 것이다.

지난달 유명순 서울대 교수팀이 한국의 성인 109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인식 조사에서 ‘절대 백신을 접종하지 않겠다’고 답한 응답자는 1.8%에 그쳤다. 그러나 백신 접종시기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67.7%는 ‘어느 정도 지켜보다 맞겠다’고 답했다. 한국에서도 백신 부작용과 백신 거부 움직임이 생기면 서구에서와 같은 논란이 일 수 있다.

■공공의 안녕 vs 개인의 권리

방역 개인정보 처리 두고 논란

한국도 확진자 동선 공개 ‘와글’

정부 “정보수집 불가피” 논리

공공의 안녕을 위해 정부가 개인의 권리를 어디까지 제한하고, 개인정보를 수집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지난해 국내에서도 논쟁거리였다. 지난해 2월 ‘신천지 관련 확산’ 전후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을 공개했다.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확산 당시 방역당국의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동선 공개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취지에서 시행됐지만, 공개하는 개인정보량이 과도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지난해 10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확진자의 성별·나이·국적·거주지 등 상세정보를 공개하지 말라는 권고안이 나온 뒤에야 개선됐다.

지난해 5월 ‘이태원 클럽 관련 확산’ 이후에는 정부의 개인정보 수집이 화두가 됐다. 7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은 정부와 서울시·경찰이 이태원 방문자 1만여명의 휴대전화기지국 접속정보를 수집·처리한 것이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 행위”라며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집회·결사의 자유도 논쟁 무대에 올랐다. 보수단체가 개천절·한글날 집회 계획을 밝히자 서울 광화문광장을 경찰버스가 에워싸는 ‘차벽’이 다시 등장하면서였다. 헌법재판소는 2011년 차벽을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사회적 논의는 부족했다. 방역조치로 영업을 못하는 자영업자 등 생존과 직결되는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방역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명분이 힘을 얻었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공의료위원장은 “집회·결사의 자유는 찬성하지만, 광복절 집회 주최자들은 방역을 위협하고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사회적 불안과 분란을 일으켰다”면서 “그들의 집회를 막은 것이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는 “서구는 개인주의가 과잉된 측면이 있다”며 “어떻게 보면 봉건적일 수 있는 한국의 집단주의가 코로나19 방역과 잘 맞았고 장점이 됐다”고 말했다.

역학조사관들은 정부의 개인정보 수집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를 공표하는 데에는 부정적이었다. 유명순 교수팀은 지난해 11월 경기도 역학조사관 20명을 면접한 연구를 통해 “조사관들에게는 코로나19 확진자 접촉자 추적에 GPS, 신용카드 사용 내역 분석 등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컸다”면서도 “확진자의 동선이 사회에 알려지는 것은 실효성이 없고,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할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 동선 공개를 하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태원 클럽 동선 공개는 확진자가 ‘성소수자가 다니는 클럽’에서 나왔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성소수자들이 역학조사에 응하지 않고 숨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예외상태’의 조건은 법으로 규정돼야

‘예외의 일상화’ 뉴노멀 우려

발동서 종료까지 법 규정 시급

안전과 기본권 조화 모색해야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지적한 ‘예외상태의 일상화’가 코로나19 국면에서 ‘뉴노멀’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하다. 국가권력이 법질서의 통제를 받지 않는 ‘예외상태’가 팬데믹 이후 ‘정상적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01년 9·11테러를 당한 미국, 2015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를 겪은 프랑스에서 예외상태는 공식적으로 발동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는 예외상태의 발동 조건이나 종료 시한이 법으로 규정돼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를 상세히 규정한 법이 없다. 코로나19 확산 국면에서도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적은 없다.

예외상태의 일상화가 차별과 배제로 연결돼서는 안 된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소장은 “한국 사회에서는 ‘위기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했다. 예외상태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한국 사회가 잘 모른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확진자들은 사회적 낙인찍기를 당한 반면 그들의 목소리는 배제됐다. 코로나19 확진이 개인 책임인 것처럼 몰아간 측면도 있다”며 “안전과 국민 기본권이 조화를 이룰 때 K방역의 성과가 의미 있다”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2040600015&code=940702

[흑백 민주주의⑥]‘탄소중립’으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게…‘정의로운 전환’ 할 수 있나 (경향, 윤승민 기자, 2021.02.04 06:00)

화력발전 줄이고 재생에너지로

산업구조·일자리 변화 불가피

‘기후위기 대응’ 공감 커졌지만

노동자는 불안할 수밖에 없어

‘녹색 일자리’ 구체적 대안 필요

지난해 9월17일 문재인 대통령은 원전 건설을 주력으로 하다가 해상풍력 등 ‘그린뉴딜’로 사업 분야를 옮기고 있는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을 격려차 방문했다. 환경단체들은 이날 두산중공업에서 문 대통령을 향해 “탈석탄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라”는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두산중공업 노동조합이 이를 제지했다. 노조는 “탈석탄·탈원전 때문에 조합원들이 명예퇴직하고 가족들은 힘들어하고 있다”며 “탈원전 정책 속도를 조절하고 신한울 3·4호기 원전 건설을 재개하라”고 주장했다.

전 세계적인 이상기후, 코로나19 등 기후위기 위험성이 현실화하고 있다. 정부는 탄소중립을 강조하고 개별 시민들의 각성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친환경 재생에너지 발전이 보편화되는 동시에 화력발전 규모를 줄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산업구조와 일자리 변화가 불가피하다. 기후위기 대응을 요구하는 시민으로서의 지위와 일자리를 지키려는 노동자로서의 지위는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탄소중립과 ‘정의로운 전환’

2050년까지 대기상의 탄소 증가량을 ‘0’으로 만드는 ‘탄소중립’은 거스를 수 없는 과제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0일 ‘2050년 대한민국 탄소중립 비전’ 선언의 3대 목표 중 하나로 ‘소외 계층·지역이 없는 공정한 전환’을 제시했다. ‘공정한 전환’은 친환경적으로 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실업과 지역경제 쇠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정의로운 전환’과 유사한 개념이다.

‘정의로운 전환’은 친환경적 산업구조 변환의 해결책으로 주목받았다. 1960년대 미국에서 제조업 노동자의 유독물질 노출 사례가 빈발하자,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문제 해결 실마리를 함께 찾는 동맹관계를 맺은 것이 ‘정의로운 전환’ 개념의 출발점이다.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은 탄소중립 속도를 높이려는 환경운동과 일자리를 지키려는 노동운동이 충돌한 사례다. 반면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산업구조 변화와 그에 따른 일자리 확보·교육훈련 등 ‘정의로운 전환’ 대책은 환경·노동운동이 협력해 기업과 정부에 요구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국제노총도 ‘정의로운 전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2015년 채택된 파리협정 전문에 상징적으로나마 ‘정의로운 전환’이 명시된 것은 국제노총이 수년간 이를 주장해온 결과다. 민주노총도 지난해 기후위기 대응 네트워크를 꾸렸다. 산업별 정책 담당자와 기후활동가들이 수차례 회의를 했고, 내부에 기후위기 특위를 만드는 방안도 논의했다.

그러나 특위가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김석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지난해 민주노총이 위원장 사퇴 이후 비대위 체제로 운영하느라 특위를 꾸리기 어려웠다”며 “지난해 말 선출된 새 집행부는 아직 사업계획을 구체화하지는 못했지만, 2월 초 대의원대회 때 기후위기 대응 특별결의문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네트워크에 참여했던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은 “노조 지도부도 ‘기후위기 대응’ 필요성에 공감하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이 많다”고 말했다.

집행부 입장에서는 조합원의 급여, 복지 등을 개선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는 것이 기후위기 대응 등 장기적 과제보다 지지를 얻기가 쉽다. 집행부가 ‘기후위기 대응’을 천명하면 일자리 감축에 노조가 동의하는 모양새로 비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녹색일자리’ 가능할까

노동운동의 기후위기 대응은 불가능한 것일까. 독일 사례를 참고해볼 만하다. 지난해 7월 독일 연방의회는 2038년까지 국내 석탄화력발전소를 모두 폐쇄한다는 ‘탈석탄법’을 통과시켰다. 탈석탄위원회에는 환경단체와 노조, 에너지기업과 주요 정당까지 함께 참여했다.

독일은 1999년 노조가 환경단체 및 정부·산업계와 제휴 협력해 ‘노동과 환경 동맹’을 결성했다. 이들은 2001~2006년 건물에서 발생하는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을 2% 줄이면서도 일자리 2만5000개를 추가로 만들었다.

석탄발전 비중이 높았던 독일에서 이런 협력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녹색일자리’였다. 녹색일자리가 늘어나고 취업자들이 노조에 가입하면서 노조도 자연스레 친환경 행보에 동참한 것이다. 김현우 위원은 “독일 금속노조가 탈핵운동에 더욱 동조하게 된 것은, 전통적인 전력 부문보다 재생에너지 부문이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하고 성장세도 가팔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지난해 7월 내놓은 그린뉴딜 계획에는 65만9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목표만 있을 뿐 구체적 계획이 없다는 평가가 많다. 전문가들은 노동계가 탄소중립에 호응할 수 있는 세밀한 일자리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지언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현재 화석연료 발전 산업 일자리는 고임금에 안정적이지만 재생에너지 산업 일자리는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며 “재생에너지 일자리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정부가 화력발전에 대한 강력한 규제와 퇴출을 천명하고 일자리 전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우 위원은 “정부가 그린뉴딜 일자리 정책을 구체화하고, 일자리 대책에 노동자들을 참여해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동·환경운동 진영에서 구체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정부·기업의 구조조정 요구에 맞서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현우 위원은 “5~10년 후 산업구조 변화에 따라 없어질 수 있는 일자리들이 본사 및 협력업체 단위까지 얼마나 있는지 노동계가 파악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석 국장은 “고탄소 배출 산업별 노조에서는 기후위기 대응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204060002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⑥]자영업자가 ‘독박’ 쓴 고통 비용, 공정한 분담은 가능할까 (경향, 조문희 기자, 2021.02.04 06:00)

영업제한 조치 받은 자영업자들

휴업으로 인한 피해 떠안았지만

건물주가 받는 임대료 차이 없어

“다 같이 이겨내자고 거리 두기에 동참한 건데 피해는 왜 저희만 본 것 같죠?”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이화연씨(40)가 말했다. 카페에서 일한 지 7년째인 그는 지난달 18일 대략 두 달 만에 출근했다. 지난해 11월 정부의 영업제한 조치 이후 일을 쉬었다.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지침에 따라 테이크아웃 방식으로는 영업이 가능했지만 그가 일하는 카페는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건물 8층에 위치해 포장 손님이 거의 없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가게가 쉬어도 임대료와 관리비는 고정비용이었다. 이씨를 포함해 직원 4명, 아르바이트생 3명의 인건비라도 아끼는 게 가게 입장에선 나았다. 직원들도 가게가 일단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업 기간의 고통은 각자의 몫이었다.

방역은 중요하다. 감염이 줄면 모든 사람이 이익을 본다. 개인적으론 건강을 지키고, 사회적으론 감염 이전 상태를 지향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일부가 유독 큰 희생을 치렀다는 점이다. 자영업자들은 영업이익이 줄었지만 임대료는 그대로 냈다. 건물주가 받는 임대료는 감염병 확산 전후로 차이가 없었다.

■‘이익공유제’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낙연 ‘이익공유제’ 화두 던지며

‘코로나 특수’ 기업 자발 참여 거론

실효성 공방·책임회피 논란도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코로나19로 많은 이득을 얻는 계층이나 업종이 이익 일부를 사회에 기여해 피해가 큰 쪽을 돕는 다양한 방식”을 언급하며 ‘코로나19 이익공유제’ 화두를 던졌다. ‘코로나 특수’를 입은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등 플랫폼 기업, IT·게임업계가 참여 대상으로 거론됐다.

이익공유 모델의 전제는 기업의 자발적 참여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익공유제를 두고 “민간 경제계에서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운동이 전개되고, 또 거기 참여하는 기업에 대해선 국가가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권장해나가는 방식이 바람직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기업에 제공할 인센티브는 세제혜택, 국민연금 등 연기금 투자 유치 시 가점 부여 등이 논의되고 있다.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민주당 이상민 의원은 “취지는 공감하지만 자발적 참여는 실효성 담보가 안 된다”며 ‘부유세’나 ‘사회적연대세’처럼 목적세를 신설하는 정공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주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 ‘기업의 성장·혁신 유인을 약화한다’며 반발했다. 코로나19 이후 일부 기업이 얻은 이익이 감염병에 기인하는지, 서비스의 질 등 다른 요인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정부의 방역 조치로 생긴 피해를 민간의 자발적 참여로 해결한다는 발상이 책임회피란 지적도 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모든 국민의 안전을 위해 시민의 삶을 강력히 통제해왔던 여권이 건물주와 기업주 앞에서는 왜 갑자기 읍소모드로 바뀌었나”라면서 “피해 시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민생 회복을 위한 ‘책임 있는 통치권 행사’”라고 말했다.

■‘자영업자 손실보상제’ 가능할까

정치권 ‘자영업 손실보상제’ 논의

지급 대상·손실액수 산정 등 난제

재원 문제로 소급보상도 어려워

심 의원이 언급한 ‘피해 시민’의 대표적 사례는 자영업자다. 특히 PC방, 카페, 음식점, 헬스장 등 일부 업종은 지난해 8월과 12월 영업제한 조치를 받았다. 때로 영업정지 상황도 감당했다. 이동주 민주당 의원실이 공개한 한국신용데이터 자료에 따르면 정부의 집합금지·제한 조치를 받은 소상공인·자영업자의 지난해 매출은 업종별로 전년(2019년) 대비 최대 42%까지 줄어들었다. 중점관리시설로 분류된 유흥주점, 노래연습장 등의 피해가 극히 심했다.

정치권에서 논의된 ‘자영업자 손실보상제’는 영업제한으로 피해입은 자영업자에겐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공감대에서 나왔다. 문 대통령도 “정부 방역조치에 따라 영업이 제한되거나 금지되는 소상공인·자영업자에 대해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일정 범위에서 손실보상을 제도화할 방안을 중소벤처기업부 등 부처와 당정이 검토해달라”고 지시했다. 재원 마련이 문제였다.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를 묻는 이익공유제와 달리 손실보상제는 ‘누가 피해를 입었나’에 집중한다. 하지만 지급 대상을 영업제한 업종에 한정할지, 집합금지 조치로 간접적으로나마 손해를 입은 업종도 포함할지 논란이다. 지급 대상 범위를 넓힐수록 정부 부담이 커진다. 얼마씩 줄 것인지도 난제다. 민병덕 민주당 의원실에서는 매출 손실의 50∼70%를 보상할 경우 매월 25조원가량이 소요된다고 관측했다. 기준을 영업이익으로 할지 매출액으로 잡을지 등의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손실액수를 산정하는 작업 자체도 쉽지가 않다.

이미 발생한 피해는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다. 정세균 총리는 “(손실보상) 제도를 잘 설계해 앞으로는 정부가 책임지고 보상하겠다는 취지로, 소급적용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이후 소상공인연합회는 “영업손실 보상안에 희망과 기대를 품었으나 소급적용은 안 된다는 (정 총리 등의) 발언은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4차 재난지원금 지급으로 소급 보상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 역시 재원 문제가 있다.

■공정하게 고통을 분담하려면

소상공인들 ‘임대료 멈춤법’ 제안

공평한 부담 위한 제도 설계 주장

일부에 집중된 고통 분담 논의

사회 전방위로 넓히자는 주장도

방역에 따른 피해를 공정하게 분담하자는 주장도 있다. 피해 발생 이후의 보상도 중요하지만, 피해 발생 시점에서 부담을 공평하게 지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상공인, 영세자영업자들 사이에서 거론된 ‘임대료 멈춤법’이 그 예다. 해당 법안은 집합금지 또는 집합제한 대상 업종 임차인의 임대료를 감면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박지호 맘편히 장사하고픈 상인모임 사무국장은 지난해 12월 ‘코로나19 공정 임대료를 위한 긴급 토론회’에 참석해 “임차상인은 이미 재산권을 침해당했고 생존권까지 위협받고 있다. 국가 위기 상태에서 정부가 내린 행정명령을 수용한 결과”라며 “임대료 멈춤법이 재산권 침해로 집행이 어렵다면 임차상인에게 내려진 행정명령도 철회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대료 멈춤법이 ‘임대인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반발에 공정 잣대로 응수한 것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에서 산업·유통 분야를 주로 담당해 온 양창영 변호사는 임대소득과 사업소득은 원천만 다를 뿐 소득이란 점에서 동일하므로 사회적 책임도 같이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 입법조사처의 ‘코로나19 임대료 정책 해외 사례’ 보고서를 보면, 일부 유럽·북미 국가들은 코로나19 확산 초기였던 지난해 3월부터 자영업자의 손실 보상을 위한 법률 등을 제정했다. 스위스는 방역 조치로 자영업자가 입은 소득 손실의 80%까지 보상한다. 일본은 긴급사태 선언 지역에서 오후 8시까지 단축영업을 하는 식당 등에 대해 하루 6만엔(약 64만원)의 지원금을 주기로 했다. 독일은 매출이 준 기업과 자영업자를 상대로 임대료 포함 고정비용의 최대 90%까지 지원한다. 호주에선 임대료를 감면한 임대인에게 세제혜택을 주는 안이 도입됐다. 이제 막 논의가 본격화된 한국과 달리, 다양한 각도에서 빠르게 대응한 것이다.

고통 분담 논의를 사회 전방위로 넓히자는 주장도 있다. 경기 후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에 악영향을 줬고 청년 구직자의 채용은 얼어붙었다. 반면 정규직 노동자는 경제적 피해가 크지 않았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지난해 8월 공무원 월급을 감축해 재난지원금 예산으로 쓰자고 제안하면서 ‘위험에 대한 격차’라는 단어를 썼다. 고용 안정성 등 상황과 지위에 따라 재난의 영향을 불평등하게 받는다는 것이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코로나19 이후 이익을 얻은 기업·개인에게 특별재난연대세를 걷자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한국 사회가 감염병과의 전쟁에서 일부의 희생에 빚을 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떤 정책이 입안돼 어떻게 조합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정부 돈을 더 쓰자는 논의는 기획재정부·야당의 반대를 넘기 어렵고, 증세에는 시민의 반감이 따른다. 이익공유제는 기업, 임대료 멈춤법은 임대인에게 재산권 침해라는 반발을 산다. 재난 이후 불평등이 커지면 사회통합에 해가 될 거란 지적이 이미 오래전부터 나왔다. 불평등 완화는커녕, 한국 사회는 눈에 보이는 피해를 보상하거나 나누자는 주장에도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K방역의 성공을 자찬하기 전에, 재난 대응 과정에서 시민들 희생은 공정·평등한지 질문할 때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204060003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⑥]‘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서 시민의 삶은 밝아지지 않았다 (경향, 백승찬·윤승민·조문희 기자, 2021.02.04 06:00)

문화·인권적 측면은 진보했지만 경제에 대한 총체적 시각이 부족

적폐청산 등 굵직한 의제에 가려

소득주도 성장·비정규직 문제 등 성과 없이 존재감 잃은 정책 많아

구호는 근사했지만 내실은 부족했다. 경향신문은 신년기획 ‘흑백 민주주의’를 위해 각 분야 전문가·학자·활동가 62명에게 집권 5년차를 맞은 문재인 정권을 평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적폐청산, 남북정상회담 등 굵직한 의제들이 많았으나, 실질적으로 삶의 질이 나아지는 데 이르지는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소득주도성장, 부동산 등 경제 분야 정책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소외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포용성을 강조한 것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면서도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경제의 원리·원칙에 대해 전문가적 식견과 처방이 부족했다는 비판에 대해 열린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는 “문재인 정권이 갑작스럽게 출발했기 때문인지 경제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비정규직 정규직화도 캐치프레이즈로서는 좋았지만, 사회안전망 확대와 연동돼야 했다”고 말했다.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말하는 임금주도성장은 임금을 올리되 그 방법으로 법제도 정비, 노조 조직률 제고 등 노동의 힘을 강화하는 패키지를 고려한다”며 “한국에서는 이 내용이 소득주도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최저임금 인상에만 집중됐다”고 말했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보유세를 강화하거나 투기적 과수요를 잡는 정책을 내놓으면 결과적으로 잡히는 게 부동산 가격”이라며 “‘집값을 잡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잡겠다’는 방법이 빠졌다. 앞뒤가 뒤바뀐 대처였다”고 말했다.

거대 의제에 가려져 시민 삶에 실질적 영향을 주는 정책에는 미진했다는 평가도 많았다. 한숭희 서울대 교수는 “남북관계, 검찰개혁, 에너지 정책 등은 나름의 성과를 냈다”면서도 “교육개혁, 노동, 지방균형, 군개혁, 청년일자리 등 존재감을 잃어버린 정책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미투 운동, n번방 폭로 등은 모두 시민들이 주도한 변화”라며 “여성정책 측면에서 정부는 별로 한 것이 없다”고 했다. 김영민 청년유니온 사무처장은 “이전 정권에서 잘못됐던 걸 바로잡는 부분에서는 성과가 있었지만, 어떤 사회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그림은 부족했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집권 이후 그 힘들을 모으는 사회통합에는 실패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는 “촛불혁명의 정치연합을 개혁연대로 만들었으면 더 좋은 성과를 냈을 것”이라며 “촛불이라는 상징 자산을 독점했기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도 “사회약자 보호, 권리 신장 등 목표 달성을 위한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지 못했다”며 “열성 지지층에만 의존했다”고 말했다.

개혁은 정부의 몫만이 아니기에, 꾸준한 공론화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가현 관악구 노동복지센터 조직팀장은 “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크다’는 생각과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생각이 모두 든다”고 말했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는 “노동, 부동산, 증세 등의 정책이 어정쩡했지만 문화, 인권 측면에선 많은 진보가 있었다”며 “수십년간 굳어온 사회현실을 5년의 기간 동안 바꾸긴 쉽지 않다. 인내심과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2230600005&code=610102

[흑백 민주주의⑦]오늘도 42도, 쌀은 품절이다…45세가 된 준혁씨의 2050년 (경향, 조문희 기자, 2021.02.23 10:13)

농산물 수출입 제한…쌀 자급률 47%

온난화로 벼 생산량 줄어 ‘귀한 몸’ 돼

영주 사과는 옛말, 식탁 위엔 파파야가

집중호우 잦지만 씻고 마실 물은 부족

수몰돼 사라진 방콕·호찌민, 남일 아냐

뉴욕 매거진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월리스웰스는 2050년 세계 약 50억명이 물부족 위기에 직면한다는 등 내용을 담아 <2050 거주불능 지구>를 썼다. 2050년이면 먼 미래가 아니다. 현재 10대는 40대가, 10세 미만은 30대가 되는 시점이다. 그때 한반도 상황은 어떨까. 최근까지 기후위기에 대한 국내외 연구를 종합해 2021년 10대인 가상의 인물 이준혁씨가 2050년 맞는 미래를 그려봤다.

비싼 감자 대신 카사바로

2050년, 한국은 ‘더운 나라’다. 국토의 상당 지역이 아열대성 기후를 보인다. 사과·복숭아·포도가 생산되는 지역도 크게 줄었다. ‘영주 사과’는 옛말이 됐다. 얼마 뒤면 한국엔 ‘백두대간 사과’만 남는다고 한다. 식탁 위에 놓인 망고, 파파야가 한국을 대표하는 과일이 됐다.

먹거리만 바뀐 게 아니다. “서울 낮 최고기온 42도, 대구 40도…. 폭염 피해가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셔야 하겠습니다.” 일기예보에선 걸핏하면 주의·경보 안내가 나왔다. 어릴 땐 ‘폭염’이라 부를 만큼 더운 날이 한 해 열흘 남짓이었는데, 지금은 해마다 50여일에 달한다. 날씨 때문에 죽거나 아픈 사람이 많아졌다. 한 해 약 250명이 폭염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더위의 간접적 영향까지 고려하면 준혁씨가 사는 서울에서만 10만명당 230명이 죽는다. 뎅기열·지카바이러스를 전파하는 흰줄숲모기가 국내에 자리 잡은 것도 위협 요소다.

한국의 스키장엔 더 이상 눈이 없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2230600015&code=610103

[흑백 민주주의⑦]어른들, 추상적이고 먼 목표에만 합의…가까운 실천에는 왜 머뭇대죠? (경향, 조문희 기자, 2021.02.23 11:50)

청소년기후행동 활동가들 ‘우리가 나서는 이유’

“기후위기는 우리 일상이 무너지는 일”

목소리 내면 인식·정책 바뀔 거라 생각

현실은 투표권 없어 국회에 압박 안 돼

“온실가스 감축 방기한 정부 책임져야”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2102250600005&code=920100

[흑백 민주주의⑧]코로나가 쏘아올린 기본소득, 불확실한 내 삶 지켜줄까 (경향, 김지원 기자, 2021.02.25 06:00)

ㆍ기본소득, ‘복지’를 묻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 경험이 마중물로

모두에 무조건…정치권서 뜨거운 이유

단순 분배보다 복지 체계로 접근 필요

재난으로 예측 불가한 위험에 처할 때

공공부조 형식으로 ‘안전망’ 기능해야

코로나19 확산은 기존 사회복지의 울타리가 지켜내지 못하는 자영업자 및 불안정 노동자들을 낭떠러지로 밀어내고 있다. 소상공인진흥공단의 전국상가데이터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지난해 4분기에 문 닫은 상가 점포는 총 14만3403곳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엔 23만여점포가 사라졌다. 통계청 지난해 연간 고용동향에 따르면 20대 청년의 체감 실업률은 25.1%로 역대 최고였다.

대선 국면을 앞두고 복지 체계 개편 논의가 정치판을 달구고 있다. 코로나19 쓰나미가 서민들을 휩쓸면서 기존 정규직, 근속 노동자 위주로 짜인 사회보장 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더 이상 ‘급진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특히 기본소득의 경우 지난해 전 국민 재난지원금의 지급·사용 경험이 마중물이 돼 단연 관심의 대상이다.

기본소득이 뭐길래

“엄마가 난생처음으로 동네 빵집에서 5000원이 넘는 마카롱 세트를 사왔어요. 평소엔 단팥빵도 꼭 떨이 시간에만 사오던 엄마가요.” 이선영씨(31)는 지난해 5월 무렵 재난지원금을 받았을 당시를 즐겁게 회상한다. 정기적 지급도 아니고, 생활비를 전부 댈 만큼 큰돈도 아니었지만 얼마간의 현금은 힘들어진 가계와 자영업계에는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다. 지난해 12월 한국개발연구원은 긴급재난지원금 효과로 인해 신용·체크카드 소비가 약 4조원이 늘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민간 소비 회복에 기여했다고 발표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BIKN) 정관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공유부(common-wealth)에 대한 모든 사회구성원의 권리에 기초한 몫으로서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개별적으로, 정기적으로, 현금으로 지급되는 소득”(제2조)을 뜻한다. ‘공유부’란 빅데이터나 축적된 지식, 자연환경 등과 같이 개인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없는 자원을 의미하고, 이에 대한 개개인의 정당한 몫을 주장하는 것이 기본소득론의 출발점이다. 정관에 포함된 기본소득의 5대 조건이 모두 충족된 형태로 현실에 구현되긴 어렵지만, 전문가들은 무조건성·보편성 등을 기본소득의 핵심 가치로 꼽고 있다.

기본소득이 정치판에서 ‘뜨거운’ 이유는 명확성 때문이다. 고용보험 등 사회보장체계는 일반인들이 절차나 자격조건 등을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지만 기본소득은 명료하다. 전 국민 지급을 원칙으로 하기에 자격 조건이 따로 없고, 현금을 지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현실적 문턱인 ‘자격 조건’이 사라지면서 모든 유권자들이 정책 당사자가 된다. 시민들은 지난해 재난기본소득, 재난지원금 등의 이름으로 한 차례 혹은 그 이상 유사 기본소득을 받은 경험이 있다. 중산층에 소구하는 드문 복지정책이라는 점도 대선 주자들의 구미를 당긴다. 그간 중산층들은 의료보험 등 넓은 의미의 사회보장체제 테두리 안에 있긴 했지만, 직접적 지원 등에선 상대적으로 소외됐다. 재난지원금은 납세자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던 중산층들을 복지 제도의 ‘직접적’ 수혜자로 만들었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지속되고 있지만, 문제는 기본소득 본뜻이나 복지 체계 전체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보다는 단발적 공방만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2016년 성남시장 시절 최초로 ‘청년배당’을 시행하고, 2017년 대선 공약으로 기본소득을 내거는 등 그간 꾸준히 기본소득 모델을 실험하고 주장해왔다. 경기도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2차 재난기본소득(인당 10만원) 실시를 확정, 지난 1일부터 신청을 받고 있다. 경기도는 기존 공공임대주택에 기본소득 개념을 더한 ‘기본주택(30년 이상 장기임대주택)’ 모델도 주장한다. 반면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2일 “알래스카 빼고 하는 곳 없다”며 기본소득에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지난 10일 CBS라디오에 출연해 “차라리 허경영처럼 1억원을 주겠다고 하라”고 힐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전 국민 위로금’ 지급을 거론한 것에 대해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22일 “대통령이 국민에게 지원금을 주겠다는 선심성 이야기를 하는 예를 어느 나라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욕구와 문제의식들이 있는데 이를 적절히 담아낼 수 있는 사회적 의제, 언어가 없다보니 기본소득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며 “기본소득이 복지 논의를 납작하게 만드는 단어가 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적) 성숙도에 따라 기본소득이 작동하는 맥락이 다를 듯한데 우리는 아직 분배에 대한 생각도 잡히지 않은 사회”라며 “세금을 쓰는 방향 등의 논의가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이뤄지다보니 자칫 현금성에 집중해 분배율을 더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든다”고 말했다.

재원은 어디서

기본소득이 도입될 경우 재원 부족으로 기존 사회복지 체계가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국가 복지예산 역시 한정된 재원 내에서 꾸려가야 하는데 국민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할 경우 적은 액수라도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해온 이원재 LAB2050 대표는 재정에 대한 우려가 ‘만들어진 공포’일 수 있다고 한다. 이 대표는 “ ‘복지병’을 내세우며 복지예산을 줄였던 마거릿 대처는 ‘국가 경제도 가정 경제와 같아서 아껴쓰지 않으면 파산할 수 있다’고 했다”면서 “돈이 없어서 (복지 정책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강남훈, 남기업, 금민 등 기본소득을 주장해온 학자들은 시민기본소득세, 토지보유세, 탄소세 및 빅데이터세 등의 공유부 추징을 통한 증세안 마련을 주장하고 있다.

일각에서 기본소득은 마치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를 모두 타파할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코로나19 이전부터 기본소득을 주장해온 전문가, 학자들은 기본소득을 만능 대안으로 여기는 것에 비판적이다. 단번에 이상적인 형태의 기본소득을 구현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뿐더러, 사회복지 체계 전반에 대한 논의 과정도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백승호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기존 복지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건 이미 10~20년 전부터였지만, 그 한계를 어떻게 돌파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다”며 “지금 상황은 기존 복지 체계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 이를 (기본소득을 통해) 각자의 이야기로 발화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기본소득론

코로나19 이후를 사는 이들에게 기본소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김만권 참여연대 참여정치연구소장은 정기적으로 소액을 분배하는 기본소득 모델 대신 생애주기별 많은 금액을 지급하는 기초자산제를 주장해왔다. 김 소장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 중심적 분배의 근간이 된 ‘능력주의’는 최근 외려 불평등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며 “(기본소득과 기초자산의 공통적인) 핵심은 노동 중심적인 부의 배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전부터 한국의 중산층조차도 자신들 지위의 안전함, 전망에 대해 불안해했다”며 “과거엔 많은 이들이 사회복지가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보호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누구나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누구나 일시에 생계가 어려워질 수 있고, 부의 분배는 노동의 대가가 아닌 분배 정의와 권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맥락이다.

서정희 군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기본소득 도입이 ‘사회 복지망을 더 촘촘히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서 교수는 “통상 개인이 감당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사회적 위험을 공공 차원에서 부조하는 것을 ‘사회보험’이라고 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 ‘계산 불가능한 위험’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게 됐다”며 “불확실한 위험에 대처하는 기본소득을 1차, 소득 비례 방식의 기존 사회보험을 2차로 한다면, 기본소득과 기존 사회보장제도가 함께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 실험,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기본소득과 관련된 국가 차원의 정책 혹은 실험은 전 세계적으로 진행돼 왔다. 각 사례들은 기간이나 금액, 대상 선정 과정에서 차이가 존재하고, 아직까지 이론적으로 완벽한 의미의 기본소득은 존재하지 않는다.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2103020600015&code=920202

[흑백 민주주의]⑨서울 하늘 아래 ‘내 집’이 없다는 게 ‘부의 불평등’을 각오해야 하는 일일까 (경향, 윤승민 기자, 2021.03.02 06:02)

ㆍ정책 ‘목표’로만 남는 ‘주거안정’

집 소유 여부, 계층 간 불평등 ‘페달’로

정치권, 세입자 불만 ‘문구’로만 이용

정작 귀 기울이는 건 집주인들 목소리

집이 자산 증식 수단 안 되게 하려면

중장기적 철학 담은 정책 만들어내야

문재인 정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정권은 ‘주거 안정’을 정책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목표가 이뤄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집은 거주 수단이자 자산 증식 수단으로 작용했고, 서울에 집을 가진 이들이 집값 상승의 혜택을 누리는 사이 그렇지 못한 이들의 ‘서울 집’ 소유는 더 멀어졌다. 그 와중에 집 소유 여력이 없는 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힘을 잃어간다.

http://img.khan.co.kr/news/2021/03/02/l_2021030201000076800008642.jpg

‘집’으로 갈린 중산층과 저소득층

한국의 주거정책은 1970년대 수도권 인구 집중과 함께 시작됐다. 일자리를 찾아 인구는 수도권으로 몰려들지만 주택은 충분치 않았다. 주택을 대량 공급할 재원이 없던 정부는 민간 건설사업자들에 의존했다. 이후 정부 주도 아래 주택공사 등 공공기관이 택지를 조성한 뒤, 건설사업자들은 이를 사들여 대규모 주거지를 형성했다. 사업자들이 사업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저렴한 소형 주택 대신 비싼 중·대형 아파트들을 양산하는 것을 정부는 막지 못했다.

1970년대엔 세금도 낮췄다. 김명수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교수는 책 <내 집에 갇힌 사회>에서 “1971년 조세 개편이 ‘자본 동원’ 대신 민간투자와 자본축적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이뤄졌고, 자산 소유계층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차원에서 보유세는 낮게 책정됐다. 양도소득세의 실효세율도 낮았다”고 지적했다. 중산층이 주택을 소유한 뒤 시세 차익을 늘릴 여지는 커졌다. 반면 저소득층에게 주거비 상승은 악재였다. 대규모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이 주거권을 보장하라며 저항했다. 철거민 중 일부는 신규주택 입주 신청권을 받았지만 이를 사들일 여력은 없었다. 분양가와 주택 시가 간 차익(프리미엄)은 중산층 이상 소득집단에 돌아갔다.

자가소유 가구 간에도 계층 간 불평등은 가속화됐다. 김명수 교수가 통계청 자료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수도권 부채보유 자가소유 가구 중 최하 소득계층인 1분위의 처분가능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2016년 975%에 이르렀고, 순자산은 2010년 4억8600만원에서 2016년 2억7500만원으로 감소했다. 반면 최상 소득계층인 5분위의 순자산은 같은 기간 8억8000만원에서 10억800만원으로 증가했다. 김 교수는 “중상층 이상 소득집단은 자가소유권을 자산 극대화 추구 수단으로 삼았으나, 저소득층은 부족한 노동소득을 자가소유권에 의존하게 됐다”고 말했다.

주택금융이 발달하지 못한 1990년대 이전에도 집주인들은 전세보증금을 지렛대 삼아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 반면 저소득층은 신용도도 높지 않고 중·고가 주택이라는 담보물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주택금융이 발달한 후에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집값이 오르다보니 투자보다는 안정적인 거주를 염두에 뒀던 가구마저 투자에 열을 올리지 않으면 집을 못 사는 상황이 벌어졌다.

목소리 커진 집주인, 조용한 세입자

자가소유에 대한 갈망은 전 세대·계층에 걸쳐 있으나 자가소유자가 크게 늘어나지는 않았다.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를 보면 조사를 시작한 2006년부터 2019년까지 국내 자가보유율은 58.0~61.2% 수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자가에서 거주하는 가구 비율인 자가점유율도 53.6%에서 58.0% 사이를 오간다. 주거난이 심한 수도권의 경우 같은 기간 자가보유율(51.4~56.8%)과 자가점유율(45.7~50.7%)이 더 떨어진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사실상 자가를 보유할 수 있는 계층이 고착화된 상태”라고 말했다.

수도권 택지개발이 본격화되고 철거민 문제가 잦아들면서 벌어진 현상 중 하나는 세입자들의 분화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결집하는 철거민들은 흩어지고, 오히려 집주인들의 단체행동이 늘어났다. 차익을 얻을 수 있는 대형 재개발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집의 노후함’을 증명하고, 같은 단지에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주택이 거래되지 않도록 하는 담합도 벌어졌다. 반면 세입자들은 분화됐다. 전세살이를 ‘수도권 내 더 좋은 집·교육 환경을 얻기 위해’ 하는 가구와 ‘도저히 집을 살 여력이 없어서’ 하는 가구의 요구는 같을 수 없었다. 김명수 교수는 “한국의 주택 갈등은 무주택 세입자들의 불만을 밑바탕으로 삼지만, 갈등을 빚는 상대는 다주택 소유자, 개발·건설업자, 정부 등으로 다양하다”며 “갈등의 초점도 세금제도, 분양제도, 주택금융제도 등을 광범위하게 아우른다”고 말했다. 박동수 서울세입자협회 대표는 “한국에서는 자산소득이 노동소득보다 상승률이 높았고, 앞으로도 그러리란 기대치가 크다”며 “세입자도 ‘자가소유’라는 목표에 포획된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세입자들의 불만을 정치적 수사로 이용하면서도 세입자보다 집주인의 이해관계에 귀 기울였다. 박동수 대표는 “현재 소선거구제 아래에서는 집값에 따라 언제든 밀려날 수 있는 세입자보다 지역에 오래 거주해온 집주인·땅주인들의 의견을 듣는다”고 지적했다. 국토부 주거실태조사를 보면 자가가구의 평균 거주기간은 10년을 넘는 반면 임차가구의 거주기간은 3년 안팎이다.

피해를 본 것은 청년·저소득층 등 주택 구매 여력이 적은 세입자들이다. 이들을 위한 임대주택 및 기숙사는 정치권의 협의와 의지가 있어야 조성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고, 지역구 의원들은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 결과 주거약자들을 위한 공공주택은 크게 늘지 못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문재인 정부 출범 3년간 공공임대주택이 32만8000가구 늘었지만 20년 이상 거주할 수 있는 임대주택은 15%뿐”이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공공임대주택 수에 포함한 매입·전세임대주택 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거주기간이 짧고 비용이 높아 공공임대 기능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주택 철학’부터 합의해야

문재인 정부도 여느 정부처럼 ‘주거 안정’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현실화하지는 못했다. 집값을 잡으려 규제 지역을 지정했지만 비규제 지역 집값이 오르는 ‘풍선 효과’만 일으켰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지난해까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단기 시장조절 정책에 머물렀다. 가격은 지표일 뿐 가격조정 자체가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선진국처럼 세금 및 금융규제를 일률적으로 적용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대책이 땜질식으로 나와 효과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보다 근본적인 주거 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강남 집값을 잡지 못하면, 서울 밖 거주자들의 주거조건을 최적화하는 식의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강수 교수도 “주거 정책에 대한 정부의 철학이 없는 게 큰 문제”라고 했다.

주거 문제는 저출생 및 세대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논의가 시급하기도 하다. 최은영 소장은 “50·60대가 갖고 있는 집을 20·30대에게 사라고 부추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영끌’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실제 집을 살 수 있는 청년들은 한정돼 있다”며 “집값은 계속 오르는데 인구가 줄어들면 청년들이 무리해서 샀던 집을 높은 가격에 되살 사람이 장기적으로 없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공공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이 내 집에 대한 대중의 욕구와 배치되는 측면은 있다. 김명수 교수는 “공공주택 확충이든, 분양주택 확충이든 주택 정책의 중장기 철학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최은영 소장도 “자가에 사느냐, 세입자로 사느냐에 따라 자신이 처한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한국 사회에서, 중장기적 주택 정책 철학에 대한 공론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2103020600025&code=920202

[흑백 민주주의]⑨“가만히 있으면 ‘벼락거지’ 된다”…언론의 무심한 받아쓰기에 주거약자는 두 번 운다 (경향, 윤승민 기자, 2021.03.02 06:02)

ㆍ투자할 여력 있는 수도권 중산층 대변

ㆍ임대차 3법 보도, 갈등 부추기기 다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떠돌던 ‘벼락거지’라는 말은 지난해 11월부터 기사에 인용됐다. 짧은 시간에 파급효과는 컸다. 각종 기사와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됐다. 벼락거지라는 표현은 자신이 갑작스레 ‘거지’가 됐다는 식으로 쓰인다. 그러나 이는 집값이나 보유주식의 액면 가치가 폭락했다거나 사기를 당해 자산을 잃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주식·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버는 동안 자신의 소득과 자산은 늘지 않아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꼈다는 뜻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수도권 중산층이 느낄 법한 이야기를 언론이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은 “한국 사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계층은 수도권 혹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고학력 자가소유자인데 정치권뿐 아니라 언론도 그들을 대변하고 가시화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언론이 ‘자가 소유’나 ‘개발 이득’ 욕망을 부추기고 주거 약자보다 주택 소유자 입장을 대변한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지난해 ‘6·17 부동산 대책’과 ‘7월30일 임대차 3법 국회 본회의 통과’와 관련된 7개 일간지의 보도 309건을 분석했다.

민언련은 “정부와 여당 의원이 무능한 가운데 독주하고 있다는 ‘당정 무능론’ 그리고 ‘시장경제 파괴론’과 ‘갈등 부추기기’ 프레이밍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시장경제 파괴론은 ‘6·17 대책과 임대차 3법이 시장경제를 파괴하고 기존 부동산시장 경제를 흔들었다’는 식 내용이고, ‘갈등 부추기기’는 부동산대책이 세입자에게 불리할 것이며 주거비·세금이 올라 서민들 부담이 커지고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 집주인들이 전세를 월세로 돌리면서 전셋값이 올라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태경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은 지난해 말 민언련 기고문에 “전세 임대인들의 월세 전환은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리란 예측, 전세 매물이 줄어든 것은 다주택자들이 세금을 피해 자가를 가족에게 증여한 것과도 관련돼있다”며 “세입자들이 계약갱신청구권을 이용해 거주 기간 2년을 늘려 전세 거래가 줄어든 측면도 있는데, 이런 요인은 다루지 않고 임대차 3법 탓만 하는 언론의 태도는 곡학아세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박동수 서울세입자협회 대표는 “법이 통과되는 과정에서 세입자들의 권리가 침해받는 사각지대가 생겼는데 이 점은 잘 다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3040600005&code=940100

[흑백 민주주의⑩]누가 나를 들여다보라 하였는가 (경향, 백승찬 기자, 2021.03.04 06:00)

개인정보, 소유권을 묻다

지난해 국내에서 시행된 데이터3법 중 하나인 신용정보법 시행령 개정안은 비금융 개인정보를 활용한 신용평가를 허용했다. 금융이력이 부족한 서민이 사금융 대신 제도권 금융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대학원 교수는 <디지털의 배신>에서 소셜미디어에 남긴 가족 이야기, 돈 이야기, 습관, 성격 등의 데이터 부스러기들을 알고리즘으로 분석해 신용을 평가하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예견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기업과 국가는 시민이 살면서 곳곳에 흘리는 개인정보 조각들을 모은다. 시민의 동의를 받지 않았거나, 받았다 해도 형식적일 때가 많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들로 기업은 큰 이윤을 얻고, 국가는 쉽게 시민을 통제한다. 효율적이고 편리해 보이지만,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인가.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사냥꾼, 목동, 비평가>에서 “(실리콘밸리의 과점기업들은) 우리의 사회적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부드러운 방식으로 무력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루다’는 어떻게 내 카톡을 알았나

‘로그인함으로써 정보처리 동의’

8000자 분량 약관 읽기 어렵고

서비스 이용하려면 누를 수밖에

직장인 A씨는 정보유출 피해자다. 인공지능(AI) 챗봇 이루다에 이름, 남편 직업, 아이 어린이집의 위치까지 유출됐다.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현재도 AI와 딥러닝 관련 일을 하는 A씨는 동종업계 기업으로부터 피해를 입을지는 상상조차 못했다고 한다. A씨는 “미국기업과 비교할 때 한국기업은 이용자 정보를 관리하고 처리하는 데 미흡하다고 생각해왔다”며 “앱이나 인터넷 서비스를 접할 때 개인정보 활용 동의를 하지 않으면 아예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대학생 B씨는 4년 전쯤 나눈 것으로 추정되는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 가공 흔적 없이 이루다에 그대로 활용됐음을 확인했을 때 처음에는 황당했고 나중에는 두려웠다고 한다. B씨는 “내 사적인 대화가 회원 가입 동의 약관으로 ‘퉁’치고 수집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냐”고 물었다. 정보유출 피해를 입은 사용자 400여명은 이루다 개발사 스캐터랩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스캐터랩은 자사의 앱 ‘연애의 과학’을 통해 수집한 실제 연인의 카톡 대화 약 100억건 중 1억건을 사용해 이루다를 개발했다. 스캐터랩은 개인정보의 수집·이용에 대해 이용자 동의를 받았으며, 실제로 국내외 서비스들이 이 같은 방식으로 이용자 정보를 수집해 합법적이라고 밝혔다. 정보수집이 합법적이었다는 스캐터랩 주장의 근거는 “로그인함으로써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에 동의합니다”라는 연애의 과학 초기화면 문구다.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이라는 부분을 터치하면 장문의 문서가 나오는데, 스캐터랩은 수집된 정보가 신규 서비스 개발 및 마케팅에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 이곳에 명시됐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이용자가 이 같은 약관을 쉽게 숙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스캐터랩의 이용약관과 개인정보처리방침만 해도 각 원고지 40장, 33장 분량이다. 법률용어로 빼곡하게 채워진 약관은 오히려 기업들의 면책 수단이 되기 쉽다. 이지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간사는 “너무 많은 곳에서 개인정보 활용동의를 요구해 소비자들이 실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며 “소비자들의 주의력 한계를 이용하는 기업들이 문제”라고 말했다.

개인정보보호법 22조2항은 개인정보의 수집·이용 목적·항목 등을 “명확히 표시하여 알아보기 쉽게 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는 “법, 고시에 약관 표기에 대한 기준이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절대적이지는 않고, 어겼다고 단속하는 일도 드물다”며 “기업들이 약관을 구구절절 제시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내용은 더 잘 설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에선 기업의 개인정보 도용에 철퇴를 내린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는 페이스북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심리검사 퀴즈 앱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대선 캠페인에 활용했다. 27만명이 이 앱을 설치했으며, 이들의 페이스북 친구의 정보까지 수집돼 총 8000만명의 개인정보가 빠져나갔다. ‘제3자가 만든 앱에 접속할 때 정보제공에 동의한다’는 문구 하나로 개인정보가 통째로 유출됐다. 사건이 알려진 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는 파산했다. 2019년 미 연방거래위원회는 페이스북에 사상 최대 규모인 50억달러 벌금을 매겼다.

반면 한국에서 대규모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일으킨 농협카드와 국민카드, 롯데카드가 확정받은 벌금은 각각 1500만원, 1000만원이었다. 해킹으로 개인정보 유출 피해를 입은 인터파크 회원 2403명이 받은 손해배상 액수는 1인당 10만원이었다.

지난해 시행된 데이터3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은 기업의 개인정보 활용에 물꼬를 텄다. 데이터3법 중 기업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법에 도입된 ‘가명정보’다. 가명정보란 개인정보 일부를 삭제하거나 변경해 추가조치를 하지 않으면 개인을 특정할 수 없는 정보다. 가명정보는 통계 작성, 과학적 연구, 공익적 기록 보존을 위해서는 동의 없이 활용할 수 있다. 산업적 연구까지 ‘과학적 연구’로 해석되기에 기업이 개인의 동의 없이도 개인정보를 활용할 길이 열린 것이다.

지난해 11월 참여연대는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이 훼손됐다는 이유로 개인정보보호법과 신용정보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시민단체들은 개인정보처리자의 책임성을 강화하고, 정보유출 피해자들을 위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등을 적용할 수 있도록 개인정보보호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국가에 내 정보를 맡겨도 될까

데이터3법, 기업에 정보 활용 물꼬

감염법예방법도 사생활 침해 소지

“기본권 제한 정당화에 입법 활용”

C씨는 지난해 4월 말 친구들과 함께 이태원 인근 식당을 방문했다. 그다음 달인 5월18일 C씨는 서울시로부터 코로나19 검사를 권고하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이태원 클럽 관련 코로나19가 광범위하게 확산된 시기였다. C씨가 방문했던 식당은 클럽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C씨가 확진자와 접촉한 적도 없었다. C씨는 서울시와 보건복지부 등에 이태원 방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문의했다. 해당 기관들은 감염병 의심자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감염병예방법을 근거로 들었다. 당시 서울시는 이동통신 3사를 통해 이태원 클럽 주변 기지국 접속자 중 30분 이상 체류한 사람들의 통신정보를 모았다. 이렇게 수집된 명단은 1만여명에 달했다.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사생활의 자유 등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한 C씨는 감염병예방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정부는 지난해 감염병예방법을 잇달아 개정해 지방자치단체장의 권한을 확대하고, 전자출입명부와 자가격리 위반자에 대한 안심밴드 도입을 차례로 합법화했다. 정보인권연구소가 펴낸 ‘코로나19와 정보인권’은 “기본권에 대한 제한을 정당화하기 위해 입법이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권침해적 정책이 도입된 이후 사회적 비판이 제기되면 이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충분한 사회적 논의도 없이 법이 개정된다는 것이다.

수사기관의 정보수집 역시 논란거리다. 현 개인정보보호법은 수사기관이 요청할 경우 특별한 요건이나 절차 없이 공공기관이 보유한 개인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한다. ‘수사목적’이라는 포괄적인 근거로 개인정보를 쉽게 수집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경찰은 2013년 철도파업을 주도한 김명환 전 철도노조위원장 등을 검거하기 위해 건강보험공단에 요양급여내역 등의 제공을 요청했다. 이들이 언제, 어떤 이유로 병원에 갔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김 전 위원장 등은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침해 등의 이유로 헌법소원을 냈고, 헌법재판소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경찰에 수사 대상자의 요양급여내역을 제공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 1월 개인정보보호법 2차 개정 방향에 대한 의견서에서 “범죄수사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수사의 필요성 여부에 대한 엄격한 요건과 제공 범위의 최소화와 관련된 구체적 범위를 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보인권연구소는 지난해 11월 국가인권위에 ‘유럽연합 개인정보 보호규정 등 국제인권기준에 따른 개인정보 보호 법제도 개선방안 연구’를 제출했다. 이들은 법령적 근거 없이 개인정보 파일을 다루는 경찰 개인정보 처리시스템에 대한 법률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정보보호 인권위’ 역할…개인정보보호위원회, 독립성이 관건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역할에 대해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기존 개인정보 보호체계는 행정안전부, 방송통신위원회, 금융위원회, 대통령 소속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데이터3법 시행과 함께 지난해 8월 국무총리 소속 중앙행정기관으로 출범한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개인정보 보호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다. 새로 출범한 개인정보위는 개인정보 보호체계 일원화 측면에서 이전보다 진일보한 기구다. 개인정보위는 행정안전부의 법령, 인사, 예산 권한으로부터도 독립돼 있다.

하지만 개인정보위가 ‘정보보호의 국가인권위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개인정보위는 대통령 소속에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변경되면서 기관의 위상이 낮아진 측면이 있다. 국무총리는 개인정보위의 일부 사무, 심의에 대해 감독권을 갖고 있다. 국가기관이 또 다른 국가기관의 정보인권 침해를 제대로 조사할 수 있을지도 성패의 관건이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는 “개인정보위 위원장, 부위원장이 모두 관료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개인정보위의 독립성에 대해 의구심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금융회사 등의 개인신용정보 보호는 여전히 금융위원회가 감독한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이지은 참여연대 간사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신용정보는 가장 사적이고 예민한 정보”라며 “금융산업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진 금융위가 신용정보 보호에 얼마나 힘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윤종인 개인정보위 위원장은 취임사에서 “개인정보 보호와 활용 간 균형 달성”을 언급했다. 개인정보위는 지난해 당사자 동의 없이 다른 사업자에게 개인정보를 제공한 페이스북에 67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고, 올해 초엔 이루다 정보유출 사건 조사에도 착수했다. 의료와 인구 정보를 결합해 암 환자의 합병증을 예측한다거나 금융과 보훈 정보를 결합해 국가보훈대상자의 신용실태를 파악하는 등 가명정보 결합 성과를 내는 데도 주력할 예정이다.

개인정보위는 올해 안으로 유럽연합의 일반개인정보보호규정(GDPR) 적정성 통과도 기대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개인정보 보호기구의 독립성 부재를 이유로 한국을 GDPR 심사에서 두 차례 탈락시켰다. 국가 차원에서 GDPR이 통과되면, 국내 기업들은 별도 절차 없이 유럽연합 기업들의 개인정보를 국내로 이전해 활용할 수 있다. 개인정보위 관계자는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고유 업무는 국무총리 감독을 받지 않는다”며 기관의 독립성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3082142005&code=620100

[흑백 민주주의]⑪‘죽어도 서울’서 ‘곳곳이 중심’으로…지역 도시들이 뭉치는 이유 (경향, 조문희 기자, 2021.03.08 22:55)

메가시티, ‘균형발전’ 답일까

지난해 9월10일 광주시청. 이용섭 광주시장이 깜짝 발언을 했다. “지금처럼 사안마다 각자도생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하면 공멸뿐이다. 광주·전남의 행정통합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나흘 뒤인 9월14일 대구시 온라인 확대간부회의. 권영진 대구시장이 대구경북 행정통합공론화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말했다. “지난 40년간 행정이 나뉘어 있었지만 대구와 경북의 시·도, 군·구가 따로따로 해서는 희망이 없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광역경제권으로의 통합이 시대적 추세이고 소명이다.”

‘메가시티’가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화두다. 메가시티는 ‘인구 1000만 이상의 매우 큰 도시’를 이르는 말이다. 국내에선 행정적으로는 구분되나 경제활동이나 일상생활이 연계된 복수의 도시 권역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행정구역 통합도 함께 논의된다. 지난달 25일 문재인 대통령의 가덕도 방문으로 ‘동남권 메가시티’가 주목을 받았지만 부·울·경 외 대구·경북, 광주·전남, 대전·충청 지역에도 메가시티 논의가 있다.

각 지자체는 메가시티가 지역 경쟁력을 확보하고 지역균형발전을 이룰 전략이라고 본다. 지방에 거대도시를 만들어 수도권과 맞서도록 한다는 것이다. 모든 지역을 고르게 발전시킨다는 기존 균형발전 방식과는 배치된다. 왜 지역은 메가시티를 이야기하는가.

지방소멸은 한국공멸…메가시티 논의의 뿌리

역대 정부 노력에도 지방 위기 심각

‘소멸 위험’ 시·군·구 105곳 달해

“시·도 단위 균형발전 전략으로는 이제 힘들겠다는 걸 모두가 피부로 느낀 것 같다.” 지난 3일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경남연구원에서 열린 ‘국가균형발전과 초광역협력 실행 전략 토론회’에 참석해 한 말이다. 역대 정부가 지방을 살리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지만 성과가 제한적이었다는 취지다. 그는 2019년 가을부터 메가시티 구상을 언급해 왔다.

노무현 정부는 균형발전 정책에서 앞선 행보를 보였다고 평가받는다. 이른바 국토균형발전 3대 특별법을 입법했고, 행정중심복합도시(1곳), 혁신도시(10곳), 기업도시(6곳) 등 설립과 공공기관 이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2011년엔 8000명이 수도권을 떠나 지방을 향했으나 지난해엔 8만8000명이 수도권으로 들어왔다. 국책기관인 국토연구원은 2019년 보고서에서 노무현 정부 정책에 대해 “한시적으로 수도권 인구분산 효과를 가져오긴 하였으나 그 규모가 크지 않고, 2019년 공공기관 지방이전이 마무리됨으로써 그 효용이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특정 도시 단위를 넘어서는 구상도 있었다. 가장 적극적인 광역협력 시도로는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5+2 광역경제권 사업이 꼽힌다. 5+2는 인구 500만명 이상인 수도권·충청·호남·대경(대구·경북)·동남권과 인구 500만명 미만인 강원·제주 권역을 묶어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지방정부 간 연계·협력은 쉽지 않았다. 오히려 각 지자체는 정부 예산을 ‘n분의 1’로 끌어오는 데 매진하는 등 이기적 행태를 보였다. 강현수 국토연구원장은 지난해 7월 발간한 리포트에서 ‘정책 및 사업 공간 단위와 행정구역 불일치 문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 거버넌스 구축 실패’를 역대 정부의 광역 단위 협력 사업의 한계로 지적했다.

그동안 지방의 위기는 심각해졌다. 한국고용정보원 자료를 보면 2020년 기준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소멸위험 지역은 105곳으로 절반에 육박한다. 이 중 97곳(92.4%)이 비수도권이다. 2014년 79곳, 2018년 89곳에서 꾸준히 증가했다. 소멸위험은 20~39세 젊은 여성 인구가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절반에 못 미칠 때를 기준으로 판단했다. 통계청 자료를 봐도 지방을 떠난 인구 대다수는 2030 청년층에 해당한다.

<지방소멸>의 저자 마스다 히로야는 지방소멸의 결과가 지방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도쿄도 축소되고, 일본은 파멸한다”는 문장이 그의 결론이다. 도쿄 같은 대도시엔 젊은이가 몰리지만, 집값이 비싸고 생활비가 높아 아이를 낳지 않는다. 반면 지방은 출생률은 높지만 청년들이 떠나는 탓에 출산 가능한 인구의 절대적 숫자가 많지 않다. 서울도 다르지 않다. 통계청은 2020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84로 통계 작성 이래 최저치라고 발표했다. “수도권 과밀은 심각한 저출산과 인구 감소의 원인이 되고 있다. 국가균형발전은 우리 국민 모두의 삶의 질 향상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가 됐다”는 25일 문 대통령 발언은 이 같은 인식을 공유한다.

메가시티, 빛과 그림자

산업 생태계 구축해 일자리 창출로

권역 내 협력 있어야 성공 가능

지역 간 불균형·토건개발 우려에도

균형발전 위한 새 패러다임 될 듯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메가시티가 기존과 다른 결과를 가져올 걸로 기대한다. 무엇보다 ‘산업 생태계’ 구축 전략이라는 점에서 지방 일자리 창출에 강점이 있다고 본다. 보통 기업의 연구·개발(R&D)이나 디자인 분야, 스타트업은 대도시에 입주한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는 베드타운이나 제조업 단지가 자리 잡는다. 메가시티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특정 경제권에서 대도시를 중심축으로 집중 육성할 수 있다고 마 교수는 말한다. 대신 대도시는 인근 지역에 제조를 맡기는 등 방식으로 산업적 연계를 맺도록 하자는 것이다. 도시 간 거리는 교통 인프라를 구축해 압축한다.혁신 대도시를 품은 거대도시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기존 균형발전 주장에선 잘 논의되지 않았던 방안이다. 다른 지역의 배후로 만족하는 지자체는 없다. 현실적으로 규모가 뒷받침되지 않을 뿐 가능하다면 많은 예산을 확보하고 독자적인 산업을 유치하고자 한다. 2018년 도시재생 뉴딜사업엔 전국 264곳이 신청했다. 시·도 단위로 신청을 받은 2019년 스타트업 파크 조성 공모사업엔 1곳 선정에 전남·광주·울산을 제외한 모두(14개)가 손을 들었다. 이대로라면 모두 망한다고 마 교수는 역설한다. 고만고만한 지방 여럿이 덩치를 키워도, 거대한 수도권과 같은 링에 올라서면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의 저자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도 지역균형발전의 중요성을 일자리에서 찾았다. 그동안 울산·포항·거제 등의 지역에서 위기감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은 제조업 단지가 ‘좋은 일자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기반 산업이 중시되는 등 산업구조가 변동하면서 그 수가 줄었다. 비중이 늘어난 사무직, 엔지니어, 기술직 고용 기업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매출 1000억원 이상 벤처기업의 62.2%가 수도권에 입지한다.

기업 입장에서도 서울 등지에 있어야 고용하기 용이하다. 2017년 기준 전국 연구·개발 인력 69만1000명 중 42만7000명(61.8%)이 수도권에 있다. SK하이닉스가 2019년 구미가 아닌 용인에 부지를 선정한 이유도 “국내외 우수 인재들이 선호하는 수도권에 위치”했다는 것이었다. 일정 수준 규모와 집중이 있어야 혁신도, 일자리 창출도 가능하다. 수도권이 서울을 중심으로 성장했듯, 지역에도 거점 대도시를 앞장세워 ‘제2의 수도권’을 만들자는 것이 메가시티 구상이다.

이명박 정부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협력과 합의를 이뤄내지 못하면 성공하기 어려운 전략이다. 강현수 국토연구원장은 행정통합을 규정한 지방자치법 개정을 과거 정책과 차별화된 요소로 꼽는다. 현재 대구·경북은 행정통합을, 부산은 행정구역을 합치진 않되 광역특별연합이란 이름의 지자체 간 연대체 구축을 지향하고 있다. 마 교수는 “잘게 쪼개진 현 행정단위에선 어떤 도시를 거점으로 할지, 지역 간 분배 전략은 어떻게 구상할지 논의하기 어렵다”며 행정구역 통합·개편 의의를 설명했다. 지역에서 먼저 필요를 느껴 상향식으로 추진된다는 점도 메가시티의 성공 가능성으로 거론된다. 다만 연합 등의 운영 재정은 중앙정부 지원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우려는 있다. 정의당은 동남권 메가시티 첫 단추인 가덕도신공항이 과거 정부가 추진했던 ‘토건개발’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한다. 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도 탄소중립과 항공 부문 온실가스 감축에 역행하는 결정이라고 본다. 지역 거점도시를 중점 육성하다 보면 지역 내 대도시와 군소도시 사이 불균형이 커질 수 있어 메가시티가 균형발전에 외려 역행한다는 주장도 있다.

강 원장은 “지방분권 관점에서는 행정구역 개편 시 기존 시·도 단위 행정기관과 사무, 권한이 겹치는 등 복잡한 해결과제가 남는다”며 “각론으로 보면 매 건에 갈등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메가시티는 기존 균형발전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시발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면제·면제…제도 자체를 개선해야

“수도권 일극체제에 대응해 국토균형발전을 이룰 것”(박수영 의원·부산 남구갑) “선거를 앞두고 후세대에 막대한 부담을 줄 법안”(곽상도 의원·대구 남구중구).

‘가덕도신공항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 부쳐진 지난달 26일 야당인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 사이에서 나온 엇갈린 반응이다. 법안은 통과됐지만 질문은 남았다. 국가균형발전과 국가경쟁력 확보를 위한 조치라는 주장과 졸속 입법, 경제성 미비라는 주장이 대립한다. 특히 특별법의 ‘필요시 예비타당성 조사(예타)를 면제할 수 있다’는 조항을 두고 판단이 엇갈렸다.

예타는 사회간접자본 등 대규모 정부 재정 투입이 예상되는 신규 사업에 대해 경제성과 재원조달 방법 등을 검토해 사업성을 판단하는 절차다. 총 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면서 국가 재정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건설사업, 정보화사업, 국가연구개발사업 등을 대상으로 한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선심성 사업 등으로 인한 세금 낭비를 막고자 도입됐다.

도입 취지가 무색하게도 정치권은 종종 예타를 ‘패싱’했다. 주된 이유는 균형발전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예타 면제 사업 규모는 지난해까지 88조원에 달했다. 이명박 정부(60조원), 박근혜 정부(24조원) 때보다도 높은 수치다. 2019년 1월 ‘지역균형발전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총 24조원 규모의 전국 23개 사업을 예타 면제 대상으로 정했다.

비수도권 지역일수록 예타 통과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실이 직전 5년 동안 종합평가(AHP) 0.5 미만으로 예타를 통과하지 못한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27건을 분석한 결과 수도권 사업은 82.4%의 통과율을 보인 반면 비수도권은 69.6%의 통과율에 그쳤다.예타가 지역균형을 고려하지 못하는 건 경제성을 무엇보다 중시하기 때문이다. 예타는 경제성 분석, 정책성 분석, 지역 균형발전 분석으로 이뤄진다. 이 중 B/C(비용 대비 편익)라고도 불리는 경제성 분석이 핵심이다. B/C가 1을 넘지 못하면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경제성이 떨어져도 정책성·균형발전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해 예타를 통과하는 사업이 없지는 않지만, 이 경우에도 일정 수준의 경제성은 있어야 한다. 전북연구원은 2019년 연구에서 2016~2018년 비수도권 예타사업 중 정책성 및 지역균형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통과한 사업이 18건으로 이들 사업의 평균 B/C 값은 0.93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예타 ‘패싱’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전례가 쌓이면 면제 남발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여연대는 지난달 24일 논평을 통해 “(가덕도신공항특별법이) 선거 때마다 대규모 국책 사업을 검증 없이 추진하는 전례가 될 수 있음을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당장 인천에서는 인천공항행 GTX의 예타 면제 요구가 나왔다.

지역균형을 더 고려하도록 예타 제도를 개선할 수도 있다. 실제 도입 당시 B/C 분석만 존재했던 예타는 2003년 지역균형발전 항목을 포함한 정책성 분석을 평가에 넣었다. 지역균형발전 항목은 2006년 별도 평가 항목으로 분리돼 15~25%의 가중치를, 2019년엔 비수도권에서 30~40% 가중치를 갖도록 꾸준히 비중이 커졌다.

김태일 좋은예산센터 소장은 “인구나 인프라가 이미 일정 수준 규모를 갖췄다면 사업의 편익이 높이 평가될 수 있지만, 낙후된 지역은 (B/C) 1을 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1차적으로 예타를 진행하되, 균형발전이나 현재 기준으로 경제성이 낮지만 미래 가치를 적극 고려해야 할 사업에 대해선 지역 공청회 등 별도 절차를 추가로 두는 방법도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