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좌왕 행정 정책/참여예산제,시민참여,거버넌스,NGO
새사연의 국민직접참여모델
김문주 외(2006).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 서울: 시대의창.
참여를 넘어 '국민직접정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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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개혁세력이 독자적인 힘으로 수구보수세력과 대결하여 승리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김문주 외, 2006: 269). 참여정부가 민주주의를 일정하게 진전시켰다고 평가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분권화’를 거론하기도 한다. 물론, 민주주의가 발전해나가면서 분권화가 촉진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미미하기는 하지만 검찰개혁이나 국가정보원 개혁에서 볼 수 있듯이 분권화를 통해 권위주의적 요소를 약화시키는 성과를 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통령으로 권한이 집중된 권력기관에 대한 고삐를 놓고 분권화를 촉진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노 정권의 분권화 정책에는 근본적인 함정이 있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힘에 기초해서 권위주의적 국가기관을 개혁하거나 그에 따른 입법과정 없이 분권화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분권화, 권력 분립은 권력 난립일 뿐이다(김문주 외, 2006: 270-272).
참여정부의 정치 노선은 ‘정치적 신자유주의’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국가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능과 지도력이 많이 축소되었다. 작은 정부를 넘어 ‘무권력 정부’에 가까운 상태로 전락했다. 국가 기관이 국민의 힘에 기초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권력을 남발하며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양상이 줄이어 나타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정권의 분권화는 권력을 국민에게 돌린 것이 아니다. 형식적 분권화에 멈춘 채 혼란을 가중시키며 민주주의의 후퇴를 초래했을 뿐이다(김문주 외, 2006: 272-273).
그런 면에서 노 정권의 노선은 ‘정치적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다. 미국이 세계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 있다. 경제 질서이자 정치 질서이며 더 나아가 사상문화 조류이기도 하다. 경제 질서로서 신자유주의는 시장 지상주의이자 주주자본주의이고, 정치적으로는 국민 사이의 연대감을 해체하는 수준의 자유주의로 나타난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경제라는 하부구조의 변화만이 아니라 정치, 사상,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의 변질까지 강요하는 총체적인 지배체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김문주 외, 2006: 273).
형식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는 착각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제 한국 민주주의의 형식은 완결되었고, 다만 내용의 민주화가 정착이 안 되었다는 주장이 많다. 하지만 내용이 갖춰지지 않았는데 형식이 완결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6월 항쟁으로 만든 민주주의 형식으로는 현 시기 우리 국민들의 민주적 욕구를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분석하면서 형식과 내용을 나누는 규정 자체가 문제다. 이를테면 형식이 민주화되었다는 표현은 이미 현재의 민주정치체계가 형식적으로는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 정치제도가 국민의 의식 수준과 요구에 부합하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김문주 외, 2006: 276-277). 민주화의 내용은 구세력의 청산만으로 진전되지 되는 것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그런 논리는 현재 정치제도나 민주주의의 내용적 성숙이 지연되고 있는 책임을 수구세력에게 돌려버림으로써 정작 문제의 본질을 놓친다. 개혁세력의 단독집권을 이룬 노무현 정부 하에서 민주주의 발전이 지체되는 책임을 수구세력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변명일 뿐이다(김문주 외, 2006: 278).
실제로 참여정부는 형식도 내용도 6월 항쟁 ‘버전’으로는 다 갖추어낸 정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듯이 노무현 정권 아래서도 정치 불안은 지속되고 있다. 여전히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촛불을 들고 있다. 촛불만이 아니다. 노동자 농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심지어 평생 흙과 더불어 살아온 농민이 아스팔트에서 ‘공권력’이 휘두른 폭력에 맞아 죽는 참극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노동자와 농민들의 절규와 몸부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무현 정권 아래서 정치적 불신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심지어 개혁세력에 실망한 국민들의 지지가 오히려 일부나마 한나라당과 같은 수구세력에게 돌아가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동시에 지지정당이 없는 정치 혐오층이 점차로 증가하고 있는 사실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김문주 외, 2006: 278-279)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면 안 된다는 명제가 많은 걸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기존의 담론에서 형식적 또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내용적,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분한 데에는 여러 고려사항이 있었던 것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가령 자유민주주의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그를 넘어선 사회적 민주주의를 실질적 민주주의로 표현하는 것에는 민주주의를 논의하는 데 변혁성을 중시하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고 본다. 결국 형식을 제대로 갖춘, 국민의 요구를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구현해 나갈 필요가 있다(김문주 외, 2006: 280). 노무현 정권 아래 한국의 정치 현실을 단적으로 규정하자면 ‘국민의 요구가 정치제도를 통하여 체계적으로 반영되지 못하고 왜곡, 변질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민 사이에 엄연히 이견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 갈등을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통합해낼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당장 한국 정치를 살펴보면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정치제도가 많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2004년 봄, 임기를 불과 한 달 정도 남겨둔 국회가 막 임기 1년을 보낸 대통령을 탄핵하는 상황은 단순히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국회의원의 문제를 넘어 현행 국회 제도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국민의 뜻이 반영되지 않는 헌법재판소도 문제가 크다. 6월 항쟁 뒤 개정한 헌법에 헌법재판소 규정을 만들 때, 그것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리라는 기대가 많았지만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켜주진 못했던 게 사실이다. 오히려 헌법재판소가 국민 위에 존재하는 마지막 주권기구, 최고의 의사결정기관처럼 자리 잡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현행 헌법에 따를 경우, 만약 국민들 절대 다수가 원하는 사안도 헌법재판소가 위헌판결을 내리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 국민들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하는 최고 결정권한이 국민들이 아닌 헌법재판소에 있다는 것도 민주주의 원칙에는 맞지 않는다(김문주 외, 2006: 281).
마찬가지로 이라크 파병이나 자유무역협정 체결처럼 아주 중요한 국가적 사안들을 국민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국회가 자의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결국 국론이 분열되는 사안을 국민의 민주적 의사를 통해 검증받으면서 결정할 수 있는 정치제도가 없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현재의 민주 정치제도는 87년 6월 항쟁의 성과를 당시 정치 세력들이 적절히 자신들의 잇속에 맞게 변질시킨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 형식으로는 국민의 민주적 열망을 담아낼 수도, 소화할 수도 없다는 것이 특히 참여정부를 통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가 국회나 헌법재판소 무용론으로 비쳐질 수 있으나, 가장 큰 문제는 현재의 시스템을 고정불변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이다. 기존의 제도가 변화된 현실에 조응하지 못할 때에는 주권자인 국민들이 스스로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김문주 외, 2006: 281-282).
나아가 민주주의를 단순히 ‘다수의 지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제도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치’의 원리에 기초해야 본연의 의미가 살아난다. 제도를 주어진 것으로 놓고 투표행위를 통해서 단지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국회나 헌법재판소의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국민들의 민주적 의식 수준에 맞게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김문주 외, 2006: 282-283).
대통령제의 민주화를 넘어 대의제의 민주화로
총선을 통해 국회가 구성된다는 점에서 국회는 민의를 일정 정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 2004년 탄핵반대의 열풍을 타고 극소수 여당에 불과했던 열린우리당이 국민들의 민의에 의해 다수당이 된 것이 단적인 사례다.
그러나 문제는 투표와 국회의 일상적 활동 사이에 놓인 간극이다. 국민들의 직접선거를 통해 입법부를 구성하는 경우에도 입법부가 민의를 자동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문제가 종종 발생한다는 점이다.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들 앞에 고개를 숙이며 서민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 헤매던 국회의원 후보들이 막상 당선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국민의 일상생활로부터 멀어진다. 정확히 말해 국민들의 의사와 욕구가 일상적으로 국회의원에게 전달되는 통로 자체가 부재한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 가장 불신 받는 정치기관은 대의기관인 국회가 되었다. 2005년 12월에 한국정당학회가 실시한 국민의식조사에 따르면, 한국 민주주의에 가장 부정적인 역할을 한 국가기관으로 국회 39.8%, 정당 28.3%, 행정부와 대통령 20.8%, 시민단체 3.7%의 순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신의 최고점에 있는 국회가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집단이다(김문주 외, 2006: 284-287).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우리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를 쟁취함으로써 대통령제에 대해서는 큰 교정을 가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두 군사 독재자를 거치면서 대통령이 지닌 과도한 권한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 반작용으로 6월 항쟁 뒤 만들어진 직선제 헌법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견제권한을 국회에 과도하게 주었다. 결국 현행 헌법상 국회는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국회를 견제하거나 통제하는 기관이나 절차가 존재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습게도 국민들에게 가장 혐오의 대상이 되는 정치기관이 가장 강력한 권력기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중심제를 택한 한국에서 국회가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고 보는 것은 아니며, 논의의 핵심은 아니다. 87년 헌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고, 이제는 국민들의 이해와 욕구를 국회가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재 보자는 것이다(김문주 외, 2006: 287-288).
국민 직접정치가 가능한 시대
민주주의란 단순히 투표하고 대표자를 선택하는 체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제도를 건설하는 정치공동체 구성원의 활동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한국 정치에서 민주적 제도 건설의 기준은 무엇보다도 권력의 중심을 국민 대중에게 확고히 이동시킴으로써 민의를 역행하는 정치적 결정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정치구조를 만드는 것이다(김문주 외, 2006: 290).
현재 정치권을 중심으로 대통령 4년 중임제니 선거구제 개편이니 하는 논의가 아무리 진행된다 해도 한국정치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를 넘어설 수는 없다. 정치가 완벽하게 복원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첫째, 국민이 정치 자체에 풍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둘째, 국민의 뜻이 정치에 역동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여기서 첫 번째 문제는 두 번째 문제의 해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정치적 무관심은 국민들의 의사가 정치구조에 제대로 미치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민주정치체제를 건설하는 문제는 결국 국민의 의사가 왜곡되지 않고 정치에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 때 가능하다.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정확히 표현하자면 정치자체가 국민에 의하여 통제되고 조절되고 강제되는 구조를 확고하게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국민직접정치’로 이름 붙였다(김문주 외, 2006: 290-291).
직접 민주주의는 오랜 세월 전부터 정치의 이상이었지만 사회가 커져가면서 시간상, 공간상으로 효율성이 떨어지게 되자 오늘날에는 대의제가 민주주의의 유일한 형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직접민주제를 제약하는 시공간상의 제약이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급격하게 제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통신기술의 발달은 이제 전국에서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가능한 정도에 이르렀다. 더불어 다중접속이 가능한 인터넷 매체의 특성은 수백만 명의 의사를 단시간 내에 모으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시공간적인 제약을 모두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다양하게 도입되고 있는 인터넷 투표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스위스에서 진행된 인터넷 국민투표는 국가적 단위에서도 빠르고 효율적으로 국민의사를 집결해 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김문주 외, 2006: 291-292).
사회주의 국가에서 채택된 대의제는 직접민주제적 요소가 강하기는 했지만 일당독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소비에트,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같은 대의제는 형식적으로 직접민주제적 요소가 강했으면서도 일당제적 특성으로 정치적 다원성을 보장하지 못했다. 그 결과 직접민주제로의 발전도 보장하지 못했고, 인민의 실질적 지배도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반면에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전된 대의제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압력에 기초한 다원적 정치구조를 어느 정도 구축하여 정치적 경합을 보장하는 역동성은 있었으나, 대의제의 한계를 돌파하지는 못했다. 소수의 대리자들에게 사실상 모든 권한이 위임되었고, 다당제에 기초한 대의제는 민주적 선거의 이름으로 소수 엘리트의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기제로 활용될 뿐이었다. 대의제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기보다는 거꾸로 국민의 정치참여를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김문주 외, 2006: 292-293).
대의제, 특히 미국식 대의제가 만능이라는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경험된 다양한 대의제의 운영방식 중 장점을 취하여 한국적인 토양에 맞게 대의제를 수술해야 한다. 정치제도를 결정하는 데서 핵심은 기술적인 조건이 허락하는 한 직접민주제적 요소를 대폭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에 기초하여 직접민주제를 보완하는 형식으로 대의제를 변화시킬 때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김문주 외, 2006: 293).
1990년대를 관통했던 아젠다는 ‘참여’였다. 노무현 정권이 참여정부를 자처하는 데까지 왔다. 하지만 참여라는 아젠다는 이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참여는 말 자체에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 정치에서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주체가 만들어놓은 아젠다에 객체로 참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권력을 가진 집단들이 어디까지나 주체이며, 이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부차적인 활동에 나서자는 것이 참여의 본질이다.
참여는 현재의 왜곡된 권력구조를 전제로 하여 제기되는 아젠다이기에 긍정적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한계가 있다. 이제는 참여가 아니라 ‘직접정치’로 시대정신을 재설정해야 할 때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슈나 쟁점들에 국민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독려할 수는 있을 것이나, 그 뿐이다. 정치가 국민 생활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참여를 독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가 국민의 의사에 의해 움직이고 통제될 수 있는 시스템을 정착시킬 때 비로소 가능하다(김문주 외, 2006: 300-301).
정치가 국민의 의사에 의하여 움직이고 통제될 수 있는 시스템을 정착시킬 때 참여가 일상화될 것이다. 국민이 국회의원을 선출할 권리만이 아니라 감시하고 어렵지 않게 탄핵할 권리까지 확보해야 하며, 국민 의사에 반하는 의회의 결정을 국민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형식이 만들어져야 한다. 또한 말도 안 되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국민들이 뒤집어 낼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쥐고 있어야 한다.
이렇듯 국민으로부터 강력히 통제되는 정치구조를 지닐 때 국민에게 정치는 비로소 참여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 자체가 국민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정치 현실을 일궈낸다면 그것이 지닌 변혁적 의미는 상당히 크다. 국민이 정치를 통제해나가는 상황, 그런 정치를 우리는 완전한 직접민주제는 아니지만 직접민주제의 정신을 살렸다는 의미에서 직접정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김문주 외, 2006: 298-299).
국민 직접정치를 새로운 헌법에 담아야
새로운 정치 체제를 법과 제도로 구현하려면 헌법을 개정하는 과제가 남는다. 마침 정가 안팎에서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제기되고 있다. 현재의 정치체제, 곧 87년 6월 항쟁으로 출범한 6공화국 헌법에 기초해 구성되는 정치체제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 점에서 개헌론이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하지만 지금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개헌론은 대통령 중임제를 도입하고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맞추는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물론, 대통령 5년 단임 제도는 여러모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개정할 필요가 있지만 권력구조 개편이나 권력 나누어먹기 식으로 개헌논의가 진행 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백년대계를 새롭게 그려내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담아낼 수 있는 개헌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다.
진정으로 우리 토양에 맞는 민주정치체제를 만드는 것은 정쟁을 종식시키고 국민적 단결을 보장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광범하며 활력 있는 정치참여에 기초하여 높은 국민적 단결을 보장하는 민주정치체제야말로 국가적인 도약과 발전을 보장하는 전제다. 국가의 도약과 발전에 선도력을 가지는 것은 언제나 정치가 되어야 한다. 개헌 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될 때에만 유의미성을 지닐 수 있다(김문주 외, 2006: 302-303).
혹자는 문제는 헌법이 아니라 정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현재 헌법의 틀 안에서도 잘만하면 훌륭한 정치가 가능하다는 논리이거나 혹은 헌법 개정과 같은 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칫 정치적 혼란을 조장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물론 지금의 정치인들이 현재 헌법의 내용만이라도 잘 지킨다면 좀 더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헌법이 국회의원의 권한을 절대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치인들이 헌법의 정신을 지키도록 강제할 수단이 거의 없다. 헌법상 임기 4년이 보장되어 있으며, 의원직이 상실되는 유일한 방법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이다. 결국 한번 당선된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현재 국회의원들의 행태로 볼 때 헌법 개정 없이 정치가 잘 굴러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중요한 것은 개헌의 필요성과 당위성, 개헌의 범위에 대해 탄탄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헌법을 국민직접정치가 가능하도록 바꾸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주장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국민들에게 이렇게 헌법을 바꾸면 국민직접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는 수준의 헌법개정안이 제출되어야 한다. 헌법 개정의 필요성과 수준에 대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했으니, 구체적인 안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연구과제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김문주 외, 2006: 30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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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직접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 과제
국민투표 권한의 대폭확대
국민직접정치를 제도화할 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 국민투표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것이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국민의 결정이 여과 없이 정책에 반영되는 국민투표야 말로 민주주의의 꽃이다. 국민의 갈라진 의견을 투표를 통해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기도 하다. 따라서 직접정치가 구현된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국민총투표에서 시작되고 국민총투표에서 끝나도록 설계 되어야 한다. 현행 헌법에서는 헌법 개정을 제외하고는 국민투표의 권한이 사실상 없다.
우선,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안’을 구체화하고 그 결정을 국민총투표의 권한으로 돌려놓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가의 운명과 관계된 주요 조약에 대한 인준권이나 외교 안보상의 주요 결정권 등이 이에 해당된다. 국회가 국민을 대표하여 의결하는 권한 중 중요 권한을 축소시켜 국민투표로 권한을 이양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대통령 탄핵 문제, 이라크 파병 문제, 농수산물 개방 문제, FTA 문제, 수도 이전 문제 등과 같이 국가의 장기적 운명과 직접 관련된 문제는 국민총투표로 결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김문주 외, 2006: 306-308).
국민의 이해가 심각하게 충돌하는 정책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는 당연히 국민투표로 결정해야 한다.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국민들 전체가 참여하는 투표 결과에 의해 권위가 부여된 사안은 오히려 정쟁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국민통합을 효과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
국민투표의 권한을 확대하자면 현실적으로 국민투표를 효율적이고 속도 있게 치러낼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인터넷 투표제가 결합되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 인터넷 투표가 과연 오류 없이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민투표의 방향이 설정되고 그것을 법제화하기로 합의한다면, 투표를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방식과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 등 기술적인 문제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가령 스위스에서는 2003년 1월 제네바 칸톤의 한 소규모 선거구에서 주민 1,162명이 참여하는 전자투표가 진행된 바 있으며 미국과 영국에서도 소규모의 전자투표를 실험적으로 진행했다. 개표에 걸린 시간도 아주 짧았다. 스위스의 사례는 법적 구속력을 지니는 투표이기에 더욱 뜻 깊다.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셈이다.
국민투표의 방향이 설정되고 그것을 법제화하기로 합의한다면, 투표를 효율적으로 진행할 방법 등 기술적인 문제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기술적인 문제를 이유로 국민투표의 시행을 유보하려는 시도는 기존 정치엘리트들이 국민투표로 인해 자신들의 권한이 침해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의식이 제도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제도가 의식을 규정한다. 국민투표제가 강화되고 그것이 제도화된다면, 그에 맞춰 국민적 토론이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 인터넷의 발달은 그 가능성을 이미 보여주었다. 물론 토론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겠지만 국민투표제가 정착되기 시작하면 우리 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은 빠르게 높아질 것이다.
국민소환권, 발안권의 현실화
사회구성원의 학습과 토론으로 갈등을 풀어간다면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 이뤄질 것은 분명하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 집단의 숙의가 최종적 수준의 민주주의라고 보는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참여와 토론을 통해 도출된 판단을 정책결정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이론이다 - 개념도 그런 의미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내오는 과제는 생각보다 어렵다. 국민투표의 강화와 더불어 직접정치의 제도화에 필요한 과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국민에게 소환권이 주어지지 않은 현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2006년 5월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통해 가까스로 주민소환제가 법제화되긴 했지만 국회의원에 대한 소환은 포함되지 않았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는 절대 권력을 누린다. 국회의원은 여전히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소환권이 존재하지 않으면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출된 의원의 손끝에서 나오게 된다.
루소는 “영국의 인민들은 의원을 뽑는 동안에만 자유롭고 선거가 끝난 직후에는 다시 노예로 돌아가 버린다”면서 대의제의 한계를 신랄히 비판했다. 대의제도의 허구성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루소의 그런 비판이 있었기에 “주권이 인민의 것이라면, 인민의 이익을 배반한 수탁자(의원)를 소환하여 책임을 추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논리가 프랑스에서 이어질 수 있었다. 국민소환권을 구체화한 계기는 1871년의 '파리코뮌'이었다. 입법, 행정, 사법 모든 분야의 공직자를 선출하고 그들을 소환,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기본권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국민소환권이 민주주의의 여러 제도 가운데 가장 잊혀진 권리로 남아있다. 국민소환제가 남용될 우려가 있다는 것도 현재 국민들의 정치적 의식 수준을 너무 낮게 보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자들의 편견에 불과하다.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소환권에 그쳐서도 안 된다. 소환권은 엄밀하게 말해서 수동적 권리이므로 소환권과 더불어 국민이 직접 정책을 제안할 수 있는 국민 발안권이 적극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청원권도 더 구체화되어야 한다.
일부 자치단체 차원의 청원권이 주민투표제 형식으로 도입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 전국적, 국가정책적 차원에서의 청원권, 입법 발의권을 도입해야 한다. 국민은 대의 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직접 나서서 대의제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직접정치의 효율적인 수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제도가 구태 정치를 넘어서는 정치행보를 가능케 하며, 비로소 살아있는 역동적 민주제를 뿌리 내리게 할 것이다(김문주 외, 2006: 312-317).
국민직접정치의 기초, 생활정치
한국의 정치 현실은 국민의 일상적 삶과 분리된 상태, 즉 엘리트 정치로 전락했다. 이제는 정치와 국민의 일상생활을 일치시키는 생활정치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대다수 국민이 경제생활에만 매몰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 무관심은 국민들 개개인을 위해서도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다. 몇 년에 한 번씩 투표를 했다는 것만으로 정치 행위를 다했다거나, 정치는 출세주의적 정치인들이 직업적으로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정치가 우리의 사회적 삶과 결코 무관할 수 없기에 나온 말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들의 일상에서 경제생활은 과잉한 데 비해 정치생활이 얼마나 빈곤한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국민 개개인의 삶에서 정치생활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배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치생활과 경제생활을 분리시키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지배세력이 원하는 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우리 경제생활의 양상을 규정하고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가 아닌가. 그런 점에 주목한다면, 정치생활이 곧 경제생활이라는 명제는 타당하다.
정치생활을 낯설게 여기는 분위기는 상당 부분 현재의 선거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정치가 생활단위와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행의 선거제도, 특히 선거구제가 구조적인 정치 소외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직장인들의 주된 생활공간은 소속된 직장, 즉 일터와 관련된 공간이다. 정치적인 의견 교환과 정치적 의지 표현도 주로 직장을 단위로 한 생활공간에서 활성화되기 마련이다. 반면 거주 지역은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 ‘베드타운’일 뿐이다. 그런 여건에서 일하는 직업인, 생활인은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구 정치에서는 정보가 제한적일 뿐 아니라 정치행동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것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현재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선거구제는 일하는 국민들 즉 직장인, 노동자, 생활인들을 정치로부터 원천적으로 소외시키는 정치제도다.
반면에 자신의 생활과 정치활동이 분리되지 않는 사람들, 즉 경제 활동이 미약한 전업주부와 실업노년층 그리고 지역경제권 내에서 활동하는 중소자영업자 등은 거주지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소화하기에 거주지역의 정치적 사안에 밝고 거주지 중심의 지역구 정치에 접근성이 높다. 그런 이유로 현행 지역구 선출방식은 동네에서 아주머니, 상인, 노인들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선거구도로 나타난다. 전업주부와 자영업자들이 선거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대부분의 일터에서 일하는 생활인은 피동적 입장에 빠질 수밖에 없는 선거구도인 셈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를 직접정치로, 생활정치로 전환시키려 한다면 정치단위와 생활단위를 접근시키는 방식으로 선출단위를 전면 재조정해야 한다. 생활정치를 근간으로 할 때 직접정치는 더욱 위력을 가지게 되며, 정치인에 대한 정당한 평가 역시 비로소 가능하다. 생활과 분리된 정치인의 허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의 실제 사안에 대한 접근 태도를 구체적 생활 속에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를 위해 현재 주민등록상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거구는 직업 활동지역을 우선시하고, 거주 지역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직장인, 학생, 군인 등은 자신이 속한 직장과 학교, 군대가 자리한 지역구에 편재되는 것이 옳다(김문주 외, 2006: 318-320).
생활정치의 활성화는 국민소환권이나 국민투표 확대와도 이어지는 과제다.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구조적으로 제고할 수 있을 때 정치적 권한 행사의 정당성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의제도, 국민의회
생활정치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국회를 구성하자면, 무엇보다 현재의 국회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의회 제도를 수립해야 한다. 기성의 국회가 국민의 대표성보다는 국가의 회의라는 권위적 성격에 치중해 왔기에, 이에 대한 대항용어로 국민의 직접대표로 구성된 의회라는 뜻으로 ‘국민의회’라는 새로운 대의제를 제안한다(김문주 외, 2006: 321).
국민이 소환하는 직접정치가 가능하려면, 대의제의 선거구가 유권자에 의해 견제 가능한 규모여야 한다. 다시 말해 소환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지역구를 재편해야 한다. 새로운 의회제도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령 국민 2~3만 명 정도의 규모라면 충분히 그들이 선출한 의원에 대한 소환을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 그 수치가 적절하다는 데 잠정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면, 선거구를 그 규모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국민의회 의원은 현재 299명의 다섯 배 수준인 1,500명 안팎으로 확대된다.
2~3만 명 당 1인의 의원이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국민이 직접 대의원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선출단위가 가능한 축소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재와 같이 20만 명 안팎의 단위에서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되면 국민이 직접 국회의원을 견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단위를 소규모로 할수록 소환권은 대단히 강력한 견제권으로 기능할 것이며 국민의 뜻에 따른 의정활동을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선거구 축소는 국민소환제를 명실상부한 제도로 만드는 획기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둘째, 의원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국민에 대한 대표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이다.
현재 주민등록상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거구는 직업 활동 지역을 우선시하고, 거주 지역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앞서 제안한 정치단위와 생활단위를 접근시키는 방식을 도입하면 선거구는 지역주민과 해당지역 경제활동인구의 종합적 요구를 표현해내는 곳이 된다. 이를 2~3만 명 당 한명이라는 소수화된 선거구론과 결합하여 모델링하면 다양한 성격의 지역구가 만들어지게 된다.
예컨대 대공장 지역과 대학생 밀집지역, 대규모 군인들이 모인 지역은 실지로는 해당공장의 노동자들과 학생, 군인들이 선거구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정치적 주도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대의제가 계급적, 계층별 국민적 의지를 보다 명확히 반영하게 된다. 또한 대부분의 도시지역은 노동자들과 중간층이 연대한 성격의 선거구가 다수 등장하게 되고 이를 통해 모든 지역이 정치를 통하여 연계․연대되는 기초를 가지게 될 것이다.
생활정치를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선거구의 계급적 성격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현재 비례대표를 통해 이루어지는 직능별 선출은 제대로 된 직업별, 직능별 안배를 해내고 있지 못하다. 그 예로 현재 국회의원 중에 가장 많은 직업군이 변호사인데 이들은 전체 1만 명 미만의 직업군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재력이 있고 정치활동에 나설 여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의구조를 왜곡시키는 의원 분포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
이러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선거구를 생활단위인 직업 단위로 재편해 노동, 농민, 군인, 학생, 각 전문인 단위로 의원 선출권을 부여해야 한다. 이렇게 직업 단위로 편재된 의원을 70% 가량 선출하고, 직업 단위로 편재 불가능한 주부, 청년, 노인, 소상인을 대상으로 30% 가량을 현행 지역구에서 선출하는 방식이 가능하며, 이 경우 큰 대학의 학생과 공장 노동자는 자체로 의원을 1~2인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
의원 후보자의 피선거권 요건도 엄격히 강화해야 한다. 현재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지역 내에서 갖는 피선거권은 국적과 연령 말고는 어떠한 제한도 없다. 그로 인해 정치적 명망성이 있는 자들은 지역구를 바꾸어 가며 출마하고 있다.
생활정치를 한다는 것은 대의제의 대표를 생활적으로 검증하는 시스템도 포함하고 있다. 해당지역에서 2~3년 이상 실제로 거주하거나 직업 활동을 한 국민에게만 피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역주민과 국회의원 사이의 유대가 실질적 유대로 발전할 수 있으며 생활정치로 승화될 수 있다.
의원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발생하는 과다한 의정활동 비용과 전문성 약화 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또한, 기초단체의원과 선출규모가 겹치는 문제도 예상 가능하다. 하지만 전문성과 비용의 문제는 상임위원회를 상설화하는 것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상임위원이 아닌 대부분의 의원들은 정기회의 때에 의결을 위한 의정활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는, 일종의 양원제 구조인 셈이다. 마지막 기초단체의원과의 중복 문제는 국민의회와 기초단체의 의정활동을 겸직하는 방안 등을 고려해 볼 수 있으나 보다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다.
현 단계에서는 국민직접정치의 큰 틀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며 그에 따른 기술적인 문제는 보다 합리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제도화시켜 낼 수 있을 것이다(김문주 외, 2006: 322-327).
특권 없는 정당, 시민감사제와 청빈관료제
한국 정치가 미숙한 가장 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정당정치의 낙후성을 꼽는다. 민주노동당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한국 정당들은 이념과 정책에 의한 결사로 보기 어렵다. 정당 자체가 지닌 특권을 탐내거나 이용하기 위해 정당을 세우는 풍토가 만연하다.
현재 정당에 주어지는 구체적인 특혜는 비례대표의원 선출권과 정당에 대한 국가보조금 등이다. 정당에 주어지는 이러한 특권 때문에 정치를 꿈꾸는 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결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감정에 기대고 정당의 추천에 따라 의원이 되어 볼 요량으로 이합집산하는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렇듯 왜곡된 정당 정치 제도를 혁파하고 직접정치 시대에 맞는 정당정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정당의 특권을 모두 폐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 첫 출발은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폐지하는 것이다. 한국의 기성 정당은 의석수만 확보하면 당원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할 이유가 없으며 이는 곧 정당 내 민주주의를 실현할 유인기제가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당은 오로지 진성당원들의 당비에 의해서만 운영되도록 해야 한다. 정당은 이념적 결사체여야 하며 자신들의 정치활동을 통해 생존해야 한다. 당원 중심의 정당이 될 때에만 한국의 정당은 비로소 자신의 이념에 따라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이념정당, 정책정당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당 자체에 제공되는 일체의 특혜를 폐기해야 정당은 순수하게 진성 당원에 의해 운영되는 정책정당이 될 수 있다(김문주 외, 2006: 328-330).
직접정치를 구현하는 데 있어 국회개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관료제다. 정치가 기본적으로 관료를 통해 집행된다는 점에서 관료제가 지닌 문제는 그대로 정치 집행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시민사회는 사회구성원의 자발적 결사체들을 집합적으로 지칭하며, 그 성격에 따라 기득권세력의 결사체로부터 변혁적 세력까지 광범위하게 포함될 수 있다. 관료에 대한 시민사회의 통제라고 할 때의 시민사회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기능적인 결사체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혁신적 관료제로서 ‘청빈관료제’를 제안한다. 고급 관료로 임명된 이후 기본수당 이외에는 일체의 물질적 혜택이 없도록 하는 제도다. 관료는 명예로 하는 것이지 이익을 탐하는 자리가 아님을 천명하자는 뜻이다. 가령, 2급 이상 공무원에게는 자신과 가족의 모든 재산에 대해 장기신탁제도를 실행함으로써 부를 늘리는 경제 활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하는 식이다. 오직 자신이 받을 급여와 연금만으로 생활하도록 해야 하며 기존 재산은 신탁을 통해 발생하는 은행금리 수준의 이자수입만을 보장해야 한다. 대신 고위관료의 치부를 막기 위해 본인과 자녀까지 완전 무상의료와 완전무상교육을 보장하고 본인은 퇴직 후 노후보장을 해줘야 한다(김문주 외, 2006: 332-335).
엘리트 정치를 넘어서
직접정치의 대의는 인정하지만, 그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표하는 견해가 종종 있다. 그 우려의 내용이란 대중이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대중의 실질적 참여가 보장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구심의 바탕에는 대중의 정치능력에 대한 불신과 함께 엘리트주의 정치관의 영향이 깔려 있다.
하지만 오히려 엘리트라고 불리는 정치인들이 엘리트적 자질을 지니고 있는지 의문이다. 국민들의 민주적 의식은 끊임없이 상승해 가는 데 반해, 국회의원들의 자질은 더욱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정책도, 원칙도 없는 현재의 정치인보다는 국민 일반의 자질이 더욱 높을 수 있다.
보수정당의 나눠먹기식 야합정치가 일반화되는 90년대에는 투표를 통해 민의를 반영하려는 열기가 점차로 약화되었고, 그에 따라 참여율도 떨어졌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참여가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현실판단이 서면 아직도 거대한 참여율로 응답한다. 지자체 선거보다 국회의원 선거가, 국회의원 선거보다 대통령 선거가 투표율이 높게 나타나는 것처럼, 자신의 투표행위가 실제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투표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다르다.
결국 엘리트주의적 정치체제를 근절하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권이 국민들에게 있는 직접정치 체제에서 국민들의 정치참여 동력이 훨씬 더 풍부해질 것이다. 자신의 운명과 관련된 내용의 선택권을 국민 개개인이 갖는다면 당연히 정치참여율이 폭발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직접정치를 하는 데 있어 높은 참여율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자면 그런 시간, 공간상의 제약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제약 없이 정치참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적 개혁이 당연히 동반되어야 한다. 엄청난 부재자 투표를 부르는 거주지 위주 투표가 아니라 직장 소재지 위주의 선거구 투표의 원칙이 적용된다든지 참여의 수고를 줄이기 위해 인터넷 투표를 병행한다든지 하는 직접정치에 맞는 제도적 개혁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김문주 외, 2006: 336-339).
87년 이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는 것만으로 행정부가 민주화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오랫동안 과두적 지배를 해온 국회가 탄핵 사태등과 관련해서 가장 피부에 와닿는 문제였기 때문에 비판의 주대상이 된 것뿐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적 속성이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치에서 사법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다룰 필요가 있다.
직접정치 체제를 실행하기 위해선 선거법이나 국회법 등과 같은 부분적인 법 개정으로는 불가능하며, 전면적인 개헌이 요구된다. 그런데 현행법상 개헌에 나설 수 있는 주체는 변혁의 일차적 대상인 현존하는 국회인데, 국회가 자신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직접정치 체제로의 개헌을 시도할 리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직접정치 체제를 실현시키는 현실적 방법은 현존하는 국회를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대의체계를 세우기 위한 국민적 운동이다. 결국 국민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나서도록 독려하는 것이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다.
직접정치를 실현시킬 가장 빠른 방법은 민주노동당이 새로운 정강정책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며, 그에 기초하여 현행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국민의회를 건설하는 국민적 운동을 시작해 가는 것이다(김문주 외, 2006: 34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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