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좌왕 행정 정책/참여예산제,시민참여,거버넌스,NGO
안병진(2006).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서울: 아르케.
새벽길
2007. 3. 26. 03:29
안병진(2006). 역동적 갈등과 사회적 책임의 정치. 참여정부 3주년 기념 심포지엄(2006. 2. 22) “민주주의 선진한국, 국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자료집.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이 글은 주성수, 정상호 편저,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아르케, 2006)에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보완되어 실려 있다.
글의 문제의식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참여정부의 성과와 한계를 지적하고있는 시론적 성격의 글이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추구한 전자의 역동적 갈등(주로 임기 초,중반)과 후자의 사회적 책임 담론(주로 중반 이후)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전자는 비록 아래로부터의 시민적 힘의 투여가 암묵적으로 배제되어 있지만 정치를 역동적 갈등의 구현이라는 측면을 여전히 견지한다는 점에서는 정치적 철학을 가지는 담론이다. 하지만 후자는 비록 사회적 세력들의 대타협이라는 문제의식이 보이듯이 전자의 담론 보다 시민적 힘의 투여를 강조하지만 역동적 갈등의 문제의식이 희석화되고 합의주의적 탈정치관이 두드러진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울리히 벡 등 서구의 탈정치론 논자들에 대한 무페나 지젝의 비판적 평가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에 따르면 최근 서구에서는 대화적 민주주의, 거버넌스, 지구적 시민사회론 등 정치에서 적대적 힘들간의 경쟁을 부정하고 합의와 타협을 신격화하는 탈정치적 관점들이 유행처럼 등장했다고 지적한다(Moufee 2005, 2). 이러한 관점은 그 근저에 정치에 대한 서구적인 합리주의적 믿음이 강하게 깔려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이성주의적인 정치 패러다임의 주창자로서 하버마스를 들 수 있으며 울리히 벡, 앤써니 기든즈 등은 그러한 서구적 합리주의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반면에 이들은 정치가 시민들의 욕망과 적대적 열정을 표출하는 장이라는 것을 애써 부정하고자 한다. 이들 탈정치적 관점은 이러한 적대적 힘들을 건강한 방식으로 표출시킬 통로를 제시하기 보다는 합의주의적 외관하에 회피하고 억눌러 결과적으로는 의도와 정반대로 다양한 근본주의적 정체성의 정치를 강화시키고 있다고 무페는 그 부작용을 지적하고 있다. 현재 서구에서 예외라기보다는 보편적 현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의 만연을 그 대표적 징후로 그는 예로 들고 있다(ibid., 4-5). 우익 포퓰리즘은 동구의 철학자 지젝의 표현처럼 단조롭고 무기력한 합의주의적 자유주의 정치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향락'(jouissance)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록 뒤틀린 형태이지만 어쨌든 정치의 본래적 힘을 잘 이해하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Zizek 2004).
물론 무페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심의적 정치나 사회적 타협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모든 합의는 반드시 무언의 배제를 전제한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키고자 한다(Moufee 2005, 11). 이러한 견지에 입각하게 되면 사회의 적대적 갈등들을 단지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기제를 통해 표출시키고, 이를 통해 부단히 다수의 합의를 창출해내는 구성적 정치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의 공통 선(common goods)들간의 경쟁을 통해 현재적 공통선을 부단히 만들어 가는 현대적 공화주의의 문제의식과도 수렴된다.
마찬가지로 현 참여정부의 사회적 합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역동적 갈등과 별개가 아니라 부단히 투쟁을 통해 새로이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구성적 관점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사학법 개정 이슈에서 과거 구기득권의 강한 반발이 드러났듯이 부동산, 교육 의료, 조세 문제 등은 기존 기득권의 강고한 헤게모니가 유지되고 있는 분야들이다. 이 이슈들에서 기존의 담론의 질서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며 사회적 열정을 동원해내고 새로이 공통 선을 창출해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부동산 문제는 자산, 교육, 문화 양극화 및 저출산 등 당면 핵심 현안 해결의 중심고리와도 같은 중차대한 성격의 이슈이다. 하지만 마치 무페가 합의주의 정치의 부작용으로 우익적 포퓰리즘의 등장을 지적하였듯이 그간 정부의 애매모호한 합의주의적 태도는 주요 보수적 일간지 논설들이 서민의 이름으로 시장주의적 부동산정책을 주장하거나 홍준표 의원의 아파트 반값 공약 같은 한국적인 우익 포퓰리즘을 발호시키고 있다. 정부의 애매모호한 태도의 대표적인 사례가 탄핵 정국으로 형성된 의회 과반수 하에서 쉽게 분양가 원가 공개의 원칙을 양보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그 자체 논리의 타당성을 떠나 참여정부의 기득권과의 대결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의심하게 하는 것으로 시민사회에서 받아들여졌으며 스스로 열정의 동원을 침식시킨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헌법적 수준으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이후에도 최소한 판교 등지에서의 정부 주도의 영구 임대 주택 건설 정책을 통해 새로운 갈등의 균열선을 창출하지 않고 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참여정부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그 지반을 침식하고 있다. 향후 참여 정부가 부동산 문제에서 새로이 공통선을 강고하게 사회적으로 형성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이후 선거 국면에서의 경기부양론의 등장 및 대선 국면에서의 우익 포퓰리즘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새로이 들어서는 정부는 사회적으로 강고한 대안 담론이 형성되어 있지 못한 속에서 쉽게 시장주의적 정책으로 선회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 자유주의론의 한계: 탈정치론의 변종
그간 지나치게 개인주의화를 강화시킨 자유주의의 주류적 경향은 공동체주의와 논쟁을 진행하며 현재 상호 침투 중이다.
하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은 그간 전통적 가치나 민족 국가의 배타적 경계 등 공동체의 기존 합의된 공공선을 무비판적으로 순응해왔고, 또한 기존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의 헤게모니에의 도전이나 제도적 변혁등의 정치가 생략된 도덕주의적 담론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Miller 2000, 109). 이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사회경제적 부작용을 단지 완화하여 사회통합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부드러운 통제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 클린턴 전 행정부에 공동체주의를 전파했던 에치오니 등의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들은 중산층 양성 부부의 핵가족 모델을 이상화한 담론인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범죄 등 각종 사회적 병리 현상을 유발하는 정치, 경제적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보다는 이러한 전통적 가족의 가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호소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에치오니 스스로도 공동체주의 운동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안병진, 2006: 89).
“ 공동체주의 경제 아젠다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짧은 대답은 (그러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Miller, 2000: 109).
하지만 보다 더 정확하기 말한다면 공동체주의 경제 아젠다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를 적당히 현상 유지하고자 하는, 숨겨진 경제 아젠다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가장 첨예한 경제적 균열구조의 문제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탈정치적 정치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박세일 전의원등이 주창하는 공동체 자유주의 이론에의 관심은 그간 신자유주의적 질서로 급격히 변해오며 가족이 해체되고 원자화된 개인주의의 폐해가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부작용이 사회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자율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기존의 강한 공동체주의에서 개인의 자율과 공공성이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사회경제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를 공동체주의로 보완하는 위상을 지닌다. 다시 말해 과거의 권위주의적 공동체주의 국가에서 자율과 공공성이 조화를 이룬 민주 공화국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헤게모니를 부드럽게 실현하는 기업국가로 이행하고자 한다. 현재 기업국가에 가까운 개념으로 삼성공화국이란 말이 대중적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용어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일개 기업인 삼성의 지배와 공공성을 표현하는 공화국이란 개념 사이에는 심연의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은 공화국이란 담론의 의미를 단지 무의미한 접미사로 전락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사실 박세일 전의원은 그의 신간에서 기업국가에의 부드러운 보완의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신빈곤층의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면 그 해결책은 당연 기업과 산업의 구조조정 강화라는 발전주의적 해결책을 찾게된다”(2006,36) 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한국에서 공동체주의 운동의 새로운 대두는 비단 박세일 의원같은 선구적 지식인들만의 운동은 아니다. 흔히 그 의미를 잘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주요 보수적 일간지들이 주도하는 위스타트 운동 등은 주목할만한 공동체주의적 캠페인이다. 이 운동은 저소득층에게 교육, 문화등을 자원봉사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민관 협치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전적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이 전제하고 있는 자원봉사주의는 사실상 위 영역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책임 보다는 기업등의 주도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말하자면 국가의 적극적 역할 담론과의 헤게모니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이는 국가를 부단히 보조적 역할로 축소시켜나가고, 반대로 그간 천민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변신해가는 한국의 기업들의 대내외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시켜 사회적인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것에 기여할 것이다. 현재 한국은 교육부가 자연스럽게 전경련이라는 이익집단에게 교과서 내용 집필에 참가하게끔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시장주의적 헤게모니의 강화는 이후 위스타트 운동 등의 성공에 힘입어 더욱 급속히 사회 각 영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한국의 공동체 자유주의 진영이 기존 개발주의 시대의 공동체주의와 질적 차별성을 보이고 또한 정치 문제를 애매하게 회피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려면 보다 선명하게 기존의 발전주의적 질서와 맞서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애국주의적인 공동체주의 보수정치인이라 할 수 있으며 유력한 소위 대권 예비주자인 맥케인 상원 의원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는 보수주의 정치인이지만 여야를 넘어 기존 기득권 금권 정치에 날카롭게 각을 세우며 정치자금법의 개혁을 선구적으로 이루어 내었다. 그가 이러한 개혁에 뛰어든 것은 기존의 금권 정치가 건강한 보수주의적인 정치 질서를 만들 기보다는 사회적 통합을 해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의 보수주의 정치는 애매모호한 합의주의 레토릭 대신에 이러한 날카로운 정치적 관점을 가지고 애국과 통합의 공동체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하지만 박세일 전의원의 신간은 그 문제의식의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구기득권 구조의 핵심을 이루고 사회통합을 해치는 부동산, 조세, 기업 개혁 등의 문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그는 포퓰리즘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대의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과거 정치개혁 아젠다 실현에서 박세일 의원이 주도한 범국민특위의 긍정적 성과이다. 이 특위는 소위 ‘포퓰리즘적인 여론’을 등에 없고 의회를 일정정도 압박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긍정적 성과를 더 과감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로 상승시키기 보다는 대의민주주의 하에서의 법치, 합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이는 공동체자유주의가 가진 탈정치론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여야를 떠나 탈정치적 경향이 득세하는 가운데 그 틈새를 비집고 홍준표의원은 우익 포퓰리즘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사실 아예 터무니없는 논리가 아닌 아파트 반값 공약을 내세우고 있는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여야의 싸늘한 반응은 현재 한국 정치 지형의 낙후함을 보여주는 상징적 징후라 할 수있다.
향후 고민해야할 담론: 공화주의적 문제의식
“정치 공동체 차원에서 제기되는 공적인 사안에 관해 공적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관점에서 단지 통치자뿐만 아니라 피통치자인 정치 공동체 구성원까지 그 결정과정에 참여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을 정치적 의사형성과 권력 행사의 토대현장으로 운영하는 체제를 가리킨다”(홍윤기, 2004: 14).
공화주의에서는 정치의 자율성과 긍정적 기능을 높이 평가한다. 정치적 참여 자체를 지고의 선으로 보느냐(존재론적 공화주의) 아니면 정치적 참여라는 도구를 통해 시민적 덕성의 실현을 강조하느냐(도구론적 공화주의)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정치적 인간관이라는 점에서는 공화주의 제반 조류는 일치한다. 이러한 정치관에서 정치적 갈등은 부정적인 것이기는커녕 인간사회를 타락시키지 않고 혁신하는 원동력이다. 다원주의의 갈등에 대한 두려움과 타협에 대한 지나친 선호에 비해 훨씬 더 활력과 열정을 가진 정치를 조직할 수 있다.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고 열정을 기피하는 정치는 다원주의의 선한 의도와 달리 오히려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기피를 불러오고 이는 보다 강렬한 향락(enjoyment)을 제공하는 파시즘적 정치에 필연적으로 정치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Mouffe, 2005: 28). 반면에 공화주의는 갈등을 긍정하며 이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로 관심을 집중한다. 공화주의 정치 형태에 독특한 입법, 사법, 행정간 갈등과 균형의 혼합 정부 원리는 바로 이러한 특정한 정치관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다(안병진, 2006: 89-90).
하지만 고전적 공화주의 전통이나 이후 이태리에서 꽃핀 시민적 공화주의 흐름은 여전히 공동체주의의 결함처럼 선험적이거나 공유된 가치의 우선성을 강조하고 개인의 자율과 다양성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넘어 생태계 등을 포괄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의 철학을 구현하고 있지 못하다. 과거 동양의 인(仁) 이란 개념에 담긴, 단지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을 포함한 타자에 대한 책임의 문제의식이 부재한 것이다. 반면에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나 최근 신보수주의의 덕성론처럼 매우 남성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 덕성에 기초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아렌트와 같은 공화주의의 진보적 혁신을 이룩한 근대적 공화주의도 여전히 타자에 대한 공감의 철학을 분명히 지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는 남성주의적 철학으로부터 분명히 단절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기존의 주권국가의 틀을 넘어 지구적 통합이 가속화되며 상호의존성이 강조되는 현실과 21세기 시민들이 가지는 다양한 존재 형태를 고려할 때 과거 이러한 고전적 공화주의의 한계는 새로운 이론적 도전의 과제에 직면하고 있는 셈이다(안병진, 2006: 91).
최근 현대적 공화주의의 부활적인 흐름 중 과거 고전 공화주의나 이태리 시민적 공화주의의 억압성을 극복하기위해 심의적 민주주의를 보다 강조하는 ‘심의적’(deliberative) 공화주의의 새로운 경향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선험적인 합의 보다는 심의적으로 구성된 민주주의적인 합의와 열린 상호의존적 공동체를 강조한다(Honohan 2002). 아래에서는 현대 공화주의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선스타인의 4가지 특징에 대한 분석을 부분적으로 활용하여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정리하고자 한다(Sunstein, 1988). 선스타인은 현대적 공화주의 일반의 특징을 심의민주주의(deliberation in politics), 보편성(universality), 정치적 평등(political equality), 시민권(citizenship)의 4가지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정의중 보편성은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단일한 합의를 표현하는 개념에 가까우므로 이 글은 대신에 ‘공통 선들(common goods)에 대한 구성적(constitutive) 접근'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또한 시민권에 대한 그의 정의가 사회에 대한 상호의존적 관계론이라는 최근 공화주의의 새로운 이론적 기여를 분명히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이 글은 대안으로 ‘상호의존성 인식에 기반한 시민권'이라고 부분적으로 수정된 정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시민적 덕성에 의한 심의적 민주주의
현대적 공화주의는 우선 정치의 핵심을 단지 타협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의적(deliberative)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와 크게 다르다. 여기서 심의란 단순히 기존의 정치적 관습이나 기호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거리를 두고 이를 성찰하는 것을 말한다(Sunstein, 1988: 1549). 선스타인에 따르면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비롯되어 특히 미국 공화주의 전통에서 크게 꽃핀 개념이다. 사실 미국 건국의 시조인 제퍼슨이나 이후 아렌트 등은 일반 시민들의 풀뿌리 차원의 심의적 정치를 이론화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예를 들어, 그들은 각 지역의 ‘기초화정’(an elementary republics)같은 흥미로운 지역 심의 조직의 창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Arendt, 1963: 254). 비록 그들의 정치관은 현대 사회에서 고스란히 수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치에의 참여 의무를 지우고 있기는 하지만 심의 민주주의적 기관의 확대의 필요성은 많은 현대 이론가들도 새로이 주창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피시킨 등이 주장하는 심의적 여론 조사(deliberative poll)는 현대 서구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적극적으로 실험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부분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서 헌법에 대한 해석을 다루는 사법 심사(judicial review)에서 시민들의 역할은 공화주의의 심의적 정치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다. 공화주의적 전통에서는 현재 미국이나 한국에서 일부 엘리트 법관들의 판단에 헌법해석을 위임하는 제왕적 사법주의와 달리 아래로부터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헌법에 대한 심의에 참여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꽃으로 예찬한다(Kramer, 2004).
제퍼슨이나 아렌트 등 미국 공화주의의 심의적 문제의식의 탁월함은 유럽의 루소와 같은 공화주의자들과 비교할 때 더욱 돋보인다. 루소는 다양한 시민들 간의 심의적 토의 보다는 그의 ‘일반의지’라는 개념이 시사하듯이 유기체적인 국민을 상정하고 있다(Hardt and Negri, 2000). 이미 유기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면 심의는 무의미해지고 이는 동일자들끼리의 동어 반복적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심의는 실제적으로 진행되기 보다는 단지 민주주의적인 위안을 제공하는 알리바이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는 전체주의적 단일성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다.
이러한 심의에 대한 강조는 공화주의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시민적 덕성(civic virtue)과 연결된다. 개인의 사적인 이해관계의 경합을 당연시하는 다원주의적 전통과 달리 공화주의는 이를 넘어서서 공적 이익을 항시 염두에 둔 개인을 중시한다. 각 개인이 자신들의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 생각하려면 이는 순간적 계산을 넘어 정의에 대한 숙고가 필요해진다. 특히 아렌트 등이 살았던 근대를 넘어 21세기의 현실에서 시민들의 심의적 기능의 회복은 더욱 더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인간복제, 지구온난화 등 현기증 나는 속도로 발전하는 현시대가 던져주는 새로운 복잡한 과제들은 이미 과부하가 지나치게 걸려있고 지역 주민들의 유동적 선호에 반응하기에도 바쁜 기존 대의 기관들의 엘리트들만이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공적 관념을 지향하는 시민들의 심의적 정치 추구는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기획이다.
2) 평등한 기회
공화주의는 시민적 덕성을 실현하기 위해 기존 권력관계를 기정사실화하는 경향이 있는 다원주의와 달리 정치적 기회구조의 평등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권력 관계가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사회에서 시민들이 공적인 질서 구축을 위해 열정을 가지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의 이러한 기회의 동등성에 대한 강조는 지나치게 정치주의적인 공동체주의와 달리 경제적 기회 평등의 조건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다시 말해 공화주의는 덕성을 가진 시민을 창출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경제적 공적 질서에도 강한 관심을 가진다. 한국의 헌법에 규정된 ‘사회적 시장 경제’는 그런 점에서 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병천 교수는 이러한 사회적 시장경제의 공화주의적 의미를 “시민자본주의는 시민적 능력 신장을 도모하고 거기에 기반한 참여적 통치를 지향하는 시민사회에 착근된 사회적 책임 자본주의”라고 적절히 정의하고 있다(이병천, 2004: 64).
이처럼 정치적, 경제적 동등한 기회구조의 창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맥킨타이어 등의 공동체주의가 공적 질서의 구현에서 국가의 역할을 경시하는 것과 상반된다.
3) 공통 선들(common goods)에 대한 구성적(constitutivie) 접근
현대 공화주의의 ‘공통선'(common goods)들은 복수형이 의미하듯이 공동체주의와 달리 단 하나의 것도 아니고 사전에 설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와 시각을 가지는 자율적 시민들의 상호 소통 속에서 정치적으로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적 공화주의는 전통적 공동체주의와 달리 과거의 전통적 가치의 공유 등 동질화 경향보다 열려있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선이 민주적 토론을 통해 부단히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낙관한다는 점에서는 다원주의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낙관적 믿음은 원자화된 개인이 아니라 상호 의존된 형태로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타인과 공감을 이룰 수 있다는 인간 관계론에서 비롯된다.
4) 상호의존성 인식에 기초한 시민권
현대 공화주의는 시민참여에 의한 전국적 제도들의 통제 및 지역적 자기 결정성(self-determination)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민참여를 통해 대의제 내부에 지나친 분파주의나 이기주의가 만연하는 것을 방지한다. 공화주의에서는 자율적 시민들이 다원주의처럼 단지 개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힘을 드러낼 수 있으며, 그러한 공화국은 건강한 역동성을 발휘한다고 본다. 우선 이 힘은 정당 및 다양한 매개를 통해 정치 제도 내로 투입되어 시민 주권의 원리를 구현한다. 예를 들어 헌법 해석에서 사법부 최종 심급제도에 위임하지 않고, 자율적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다원주의적 상상력을 구현한다.
시민참여는 또한 공적 질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통해 시민적 덕성을 양성해 나가는 중요한 방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민참여를 통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획득하고 시민들 간 상호 의존된 공통 운명체를 체감해 갈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기존 근대국가의 폐쇄적인 주권국가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현대적 공화주의는 민족주의나 인종적 공동체 같은 타자를 전제로 한 배타적 공동체보다는 상호의존성, 공통의 운명에 대한 인식에 기반한 열린 정치 공동체라는 점에서 지구적으로 통합되어가는 21세기의 특성에 잘 조응하기 때문이다. 호노한(2002: 267)은 이러한 상호의존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대학 동료’(colleague) 라는 예를 사용하기도 한다. 동료는 낯선 타인보다는 가깝고 친구보다는 덜 자발적이다. 그리고 가족보다는 덜 감정적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 이 동료 모델은 상호의존적이면서도 특정 가치에 의존할 필요 없이 덜 배타적이고 다양한 다른 정체성에도 열려 있어 주권국가를 넘어서는 지구적 네트워크에 잘 조응한다. 특히 한반도나 더 나아가 동아시아는 부단히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내부적 동질성을 강요하는 민족주의적 논리 보다는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할 때 보다 민주적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화주의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안병진, 2006: 92-95).
이러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원리의 제기에 대해서 다음의 몇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우선 고민해 볼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의 적실성의 여부이다. 어떤 이론을 수용할 때는 그 사회가 처한 역사적 맥락을 우선 고려하는 것이 우선시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서구의 첨단 이론들이 그 맥락을 사상한 채 한국 사회에 도입되면서 애초 의도한 결과와는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공적 질서를 강조하는 공화주의 원리의 도입이 그간 지나치게 개인의 자율을 억압하고 공동체의 단일한 목표만을 강조해온 한국 사회의 지형을 변화시키기보다는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간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등의 저서를 통해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를 대안적 이념으로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던 최장집 교수는 최근 개정판에서 공화주의가 지나치게 한국의 보수적인 지형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하여 이전의 주장을 철회한 바 있는데 이는 그러한 이유에서 기인한다(최장집, 2005).
하지만 여기서 최장집 교수 등이 이론적 수용에서 문제 삼고 있는 공화주의는 공화주의 전체 흐름 중 주로 이탈리아의 시민공화주의 전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의 지적처럼 이러한 흐름은 지나치게 기존 가치에의 순응과 시민적 덕성함양에 대한 교육 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최근 호노한 등이 주장하는 현대적 공화주의는 공동체주의의 도덕주의적 경향이나 공동체주의와 문제의식의 연속성을 가지는 이태리의 시민 공화주의와 달리 정치적 평등 등의 가치에 대한 강조를 통해 기존 제도적 틀을 변환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또한 기존 전통적 가치, 국수주의, 민족주의에 기반한 배타적 공동체 추구에 비판적이고 반면에 다양한 가치가 상호의존성의 운명을 인식한 자율적 시민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모델이라는 점에서 철저히 민주주의적이다.
또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심의적 민주주의적 요소가 공화주의의 민주적 잠재력을 살리기보다는 지나치게 엘리트들의 이성적 토론을 특권화한다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사실 최근 유행하는 심의민주주의 모델은 심의적 의사결정과정에서 지나치게 이성적 합의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이성주의 전통 하에서의 엘리트로 훈련받지 못한 층들의 문제의식과 욕망은 거칠고 불합리한 것으로 치부되고 배제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하층계급의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는 랩은 현실 시스템의 문제를 무엇보다도 예리하게 드러내지만 이는 정제된 언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쉽게 무시되곤 한다(린 샌더스, 2004: 164). 물론 현대적 공화주의는 심의 민주주의와 달리 이러한 편향, 배제 가능성에 대해 민감하다. 그러하기에 현대적 공화주의는 단지 논리적이고 절제된 토론 뿐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 사례를 고백하듯이 증언하는 방식 등 다양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에 대해 열려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적 공화주의가 단지 다양한 의사소통 기법에 대한 열린 자세를 넘어 서구적 이성주의 전통에 대해 어떻게 근본적으로 직면해나가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적 공화주의는 서구의 이성주의 전통에 대해서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던지고 있는 여성주의나 무페의 ‘열정의 정치'(politics of passion)등의 흐름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발전할 필요가 있다(안병진, 2006: 96-97).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방향에 대해 다양한 개혁안들이 제기되어 있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단임제에 의한 조기 레임 덕을 방지하고 보다 안정적으로 민주적 정부가 운영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중임제를 제기하고 있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현 단순 다수제 투표방식의 한계를 넘어 보다 많은 이들의 선호가 반영될 수 있게 하기 위해 결선 투표제까지 제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민주주의적 개혁은 중요하게 검토해 볼 사안들이다. 하지만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 민주주의 진전을 위해 보다 더 발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현 정치 제도의 부분적 개혁안을 넘어 지금까지 수십년간 모호한 규정으로 남아있는 민주공화국 개념의 철학적 기반에까지 고민을 심화시키고 있다. 마치 미국 건국의 시조들이 오랜 고민 끝에 ‘자유주의적 공화주의’라는 철학적 원리를 정립하였고 이를 통해 선진적 갈등 해결
구조를 정착시켰듯이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야를 제시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안병진, 2006: 97-98).
결 론
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의 정책적 구현은 시장주의 담론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공적 질서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현재 실현되는 정책보다는 훨씬 더 과감한 실험들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부동산 문제 등에서 국가의 주도적 역할하의 영구 임대주택 건설등을 즉각 추구하는 것은 공화국의 질서를 구축하는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임기가 중반을 지나고 사회적 지반이 많이 침식된 지금 모든 정책에서 과감한 전환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요한 몇몇 전선에서 새로운 공통선들을 창출하는 것과 동시에 공공성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비교적 실현이 용이한 작은 이슈들의 일관된 패키지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OECD 국가중 자살율 1위라는 충격적 통계가 말하듯이 신자유주의의 만연 이후 심각해진 정신 건강의 문제는 국가의 공공성을 강화함에 있어 작지만 의미 있는 해결책들을 모색할 수 있다. 흔히 합리주의적 정치관에 경도된 관점은 이러한 '정서적 정치'(affective politics)가 가지는 중요성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재 한국이 그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공공성의 정치의 작은 실험은 정부에 대한 신뢰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점에서 클린턴 전대통령의 95년 실험은 시사적이다. 그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속에서 일년간 ‘가치아젠다’라는 제목하에 작지만 중산층, 서민들의 삶의 고통을 완화하는 일련의 해결책들을 꾸준히 추구하였다(안병진, 2004). 이러한 작은 정책에 대해 회의하는 일부 비판자들의 목소리에 대해 당시 힐러리 대통령 부인은 시민들이 이러한 작은 정책의 일련의 체감을 통해 다시 정부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은 현 참여정부에서도 견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의 성공은 클린턴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일관성과 몇 년에 걸친 장기적 계획과 꾸준한 실천, 그리고 미디어 정치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반대로 한편으로 영리병원등의 공공성 강화의 관점과 배치되는 실험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작은 실천을 축적하는 것은 별반 효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향후 참여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어떠한 담론을 지향하고 이를 지혜롭게 정책적으로 배치하는 가는 참여정부 기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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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주성수, 정상호 편저,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아르케, 2006)에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보완되어 실려 있다.
안병진(2006).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서울: 아르케.
역동적 갈등과 사회적 책임의 정치
안병진 창원대 교수
요 약
안병진 창원대 교수
요 약
최근 ‘양극화’ 라는 담론은 한국 사회 모든 세력의 중심 화두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양극화 담론의 힘은 그간 한국 사회가 소위 IMF 위기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해 눈감아왔던 한계로부터 뒤늦게나마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전환에 동의하면서도 과연 이러한 전환이 정치의 본래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올바른 관점에 기초하고 있는 지를 묻고 있다. 특히 이 글은 현재 참여정부가 관심을 보였던 울리히 벡 등의 탈정치적 이론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기초하여 참여 정부의 성과와 한계를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이 글은 현재 보수주의 일각에서 제기하는 공동체 자유주의론 등도 넓게 보면 탈정치론의 흐름에 있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 향후 탈정치적 관점을 넘어서기 위해 현대적공화주의의 문제의식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를 제안하고 있으며 그 실천에서 유의해야 할 사항을 지적하고 있다.
글의 문제의식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전환에 동의하면서도 과연 이러한 전환이 정치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올바른 관점에 기초하고 있는 지를 묻고자 한다.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동반한 양극화 등 새로이 제기되는 과제를 기존의 낡은 근대적 정치 구도로 풀 수 없다는 점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는 긍정적인 관점이다. 하지만 울리히 벡의 관점은 무페, 지젝 등의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지나치게 정치를 합리적 주체들간의 합의주의적 과정으로만 이해하며 정치 본래의 역동적 갈등과 욕망을 폄하하는 탈정치적 경향이 있다(Moufee 2005). 현재 참여정부가 벡에 대해 가지는 관심과 그 사회경제적 문제의 해결 방식에서의 탈정치적 관점은 정확히 조응한다는 것이 필자의 문제의식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참여정부의 성과와 한계를 지적하고있는 시론적 성격의 글이다.
탈정치론 비판의 관점에서 본 참여정부의 성과와 한계
2005년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참여정부의 ‘선진 한국’ 담론은 갈등 시스템 구축과 함께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여기서 ‘선진 한국’ 담론이란 바로 현 정부가 후반기 역점 과제로 제시하는 미래비전과 이를 위해 기존 낡은 대립구도를 벗어나는 사회적 대타협의 ‘전환적 정치’를 말한다. 사회적 책임의 관점이란 정치가 단지 이익 집단들간의 타협이나 나눠먹기라는 다원주의적 관점을 벗어나 사회 전체의 공적 이익과 심지어 미래 세대에의 책임을 강조하는 담론을 말한다. 이러한 담론도 주체의 의도와 무관하게 정치를 공적 질서의 구축의 관점에서 주로 바라보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문제 설정과도 친화성을 지닌다.
2005년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참여정부의 ‘선진 한국’ 담론은 갈등 시스템 구축과 함께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여기서 ‘선진 한국’ 담론이란 바로 현 정부가 후반기 역점 과제로 제시하는 미래비전과 이를 위해 기존 낡은 대립구도를 벗어나는 사회적 대타협의 ‘전환적 정치’를 말한다. 사회적 책임의 관점이란 정치가 단지 이익 집단들간의 타협이나 나눠먹기라는 다원주의적 관점을 벗어나 사회 전체의 공적 이익과 심지어 미래 세대에의 책임을 강조하는 담론을 말한다. 이러한 담론도 주체의 의도와 무관하게 정치를 공적 질서의 구축의 관점에서 주로 바라보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문제 설정과도 친화성을 지닌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추구한 전자의 역동적 갈등(주로 임기 초,중반)과 후자의 사회적 책임 담론(주로 중반 이후)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전자는 비록 아래로부터의 시민적 힘의 투여가 암묵적으로 배제되어 있지만 정치를 역동적 갈등의 구현이라는 측면을 여전히 견지한다는 점에서는 정치적 철학을 가지는 담론이다. 하지만 후자는 비록 사회적 세력들의 대타협이라는 문제의식이 보이듯이 전자의 담론 보다 시민적 힘의 투여를 강조하지만 역동적 갈등의 문제의식이 희석화되고 합의주의적 탈정치관이 두드러진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울리히 벡 등 서구의 탈정치론 논자들에 대한 무페나 지젝의 비판적 평가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에 따르면 최근 서구에서는 대화적 민주주의, 거버넌스, 지구적 시민사회론 등 정치에서 적대적 힘들간의 경쟁을 부정하고 합의와 타협을 신격화하는 탈정치적 관점들이 유행처럼 등장했다고 지적한다(Moufee 2005, 2). 이러한 관점은 그 근저에 정치에 대한 서구적인 합리주의적 믿음이 강하게 깔려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이성주의적인 정치 패러다임의 주창자로서 하버마스를 들 수 있으며 울리히 벡, 앤써니 기든즈 등은 그러한 서구적 합리주의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반면에 이들은 정치가 시민들의 욕망과 적대적 열정을 표출하는 장이라는 것을 애써 부정하고자 한다. 이들 탈정치적 관점은 이러한 적대적 힘들을 건강한 방식으로 표출시킬 통로를 제시하기 보다는 합의주의적 외관하에 회피하고 억눌러 결과적으로는 의도와 정반대로 다양한 근본주의적 정체성의 정치를 강화시키고 있다고 무페는 그 부작용을 지적하고 있다. 현재 서구에서 예외라기보다는 보편적 현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의 만연을 그 대표적 징후로 그는 예로 들고 있다(ibid., 4-5). 우익 포퓰리즘은 동구의 철학자 지젝의 표현처럼 단조롭고 무기력한 합의주의적 자유주의 정치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향락'(jouissance)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록 뒤틀린 형태이지만 어쨌든 정치의 본래적 힘을 잘 이해하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Zizek 2004).
울리히 벡의 담론에 대한 청와대의 큰 관심이 시사하듯이 현재 선진한국 건설의 담론은 과거 초기의 역동적 갈등 담론이 가지는 정치적 성격에서 보다 후퇴한 합의주의적 탈 정치론의 흐름에 서 있다. 이는 바로 참여 정부의 탄생과 탄핵 정국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정치의 본래적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변모라 할 수 있다. 참여 정부가 탄생은 그간 억눌린 시민들의 공정한 정치에 대한 욕망과 기존 기득권 질서에 대한 적대적 열망이 역동적으로 분출된 공간에서 비로소 가능했다. 예를 들어 당시 소위 인사청문회 정국에서의 하늘을 찌를 듯했던 서민들의 반기득권 감정을 상기하지 않고 소위 노풍의 위력을 이해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탄핵 정국은 정부의 의도와 무관하게 공화주의에서 지적하는 아래로부터의 시민적 힘의 투입을 통한 역동적 정치의 구현의 원리를 잘 보여주었다.
물론 무페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심의적 정치나 사회적 타협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모든 합의는 반드시 무언의 배제를 전제한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키고자 한다(Moufee 2005, 11). 이러한 견지에 입각하게 되면 사회의 적대적 갈등들을 단지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기제를 통해 표출시키고, 이를 통해 부단히 다수의 합의를 창출해내는 구성적 정치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의 공통 선(common goods)들간의 경쟁을 통해 현재적 공통선을 부단히 만들어 가는 현대적 공화주의의 문제의식과도 수렴된다.
마찬가지로 현 참여정부의 사회적 합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역동적 갈등과 별개가 아니라 부단히 투쟁을 통해 새로이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구성적 관점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사학법 개정 이슈에서 과거 구기득권의 강한 반발이 드러났듯이 부동산, 교육 의료, 조세 문제 등은 기존 기득권의 강고한 헤게모니가 유지되고 있는 분야들이다. 이 이슈들에서 기존의 담론의 질서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며 사회적 열정을 동원해내고 새로이 공통 선을 창출해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부동산 문제는 자산, 교육, 문화 양극화 및 저출산 등 당면 핵심 현안 해결의 중심고리와도 같은 중차대한 성격의 이슈이다. 하지만 마치 무페가 합의주의 정치의 부작용으로 우익적 포퓰리즘의 등장을 지적하였듯이 그간 정부의 애매모호한 합의주의적 태도는 주요 보수적 일간지 논설들이 서민의 이름으로 시장주의적 부동산정책을 주장하거나 홍준표 의원의 아파트 반값 공약 같은 한국적인 우익 포퓰리즘을 발호시키고 있다. 정부의 애매모호한 태도의 대표적인 사례가 탄핵 정국으로 형성된 의회 과반수 하에서 쉽게 분양가 원가 공개의 원칙을 양보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그 자체 논리의 타당성을 떠나 참여정부의 기득권과의 대결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의심하게 하는 것으로 시민사회에서 받아들여졌으며 스스로 열정의 동원을 침식시킨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헌법적 수준으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이후에도 최소한 판교 등지에서의 정부 주도의 영구 임대 주택 건설 정책을 통해 새로운 갈등의 균열선을 창출하지 않고 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참여정부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그 지반을 침식하고 있다. 향후 참여 정부가 부동산 문제에서 새로이 공통선을 강고하게 사회적으로 형성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이후 선거 국면에서의 경기부양론의 등장 및 대선 국면에서의 우익 포퓰리즘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새로이 들어서는 정부는 사회적으로 강고한 대안 담론이 형성되어 있지 못한 속에서 쉽게 시장주의적 정책으로 선회할 수 있을 것이다.
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정치란 그 자체로 자율적인 영역으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고 각자의 자유로운 개성과 영혼을 표현하는 최고의 행위(action)이다. 따라서 이토록 정치 행위의 자율적이고 숭고한 가치를 존중하는 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 시민들의 실질적 정치활동이 보장되지 않는 체제는 전체주의적 요소를 이미 내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안병진, 2006: 83).
기존 민주주의론의 한계: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론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이론에서는 정치를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투쟁이라고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Dahl, 1956).
이 모델의 작동은 우선 타협이 중요한 덕목임을 전제한다.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사적 이해관계자들 간의 경합은 제로섬 게임으로 비화한다. 이러한 극단적 갈등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위에서의 이해의 양보와 타협이 중요해진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론은 정치가 단지 사적 이해관계자들 간의 타협을 넘어 공적인 질서 구축을 위한 민주적 토론의 과정(deliberation)과 이를 통한 기존 선호의 변화 가능성(transformation)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미약하다(Sunstein, 1988: 1542-1545).
게다가 이 이론들은 주로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불균등한 권력관계를 기정사실화하고 그 틀 속에서의 선호도간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에 제3당처럼 정치적 참여 기회의 동등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집단이나 개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Bachrach & Baratz, 1962: 56).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론은 시민들의 정치에서의 역할에 일정한 제한을 가한다. 오히려 전문성과 지혜를 가진 이성적 엘리트들 간의 경쟁에 지원을 보낼 뿐 스스로 엘리트의 역할을 떠맡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시민들의 제한적 정치 참여를 부정적 병리현상으로 보기보다는 현 정치질서가 바람직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긍정적 징후로 해석한다. 반면에 시민들의 과도한 정치에의 참여가 가져올 수 있는 정치의 과열과 비이성적 판단을 경계한다(Sunstein, 1988: 1546-1547).(안병진, 2006: 86-87)
공동체 자유주의론의 한계: 탈정치론의 변종
최근 참여정부가 울리히 벡 등의 탈정치론에 지나치게 경도된다면 보수적 시민사회 차원에서 힘을 얻어가는 공동체주의 이론과 그 실천은 또 다른 의미의 탈정치론으로 지적할 수 있다.
현대 사회로 진입할수록 전 지구적으로 개인주의화, 정치 신뢰 저하, 공동체 약화 등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면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이론 같은 기존 자유주의 주류이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이론들이 수십 년 전부터 서양 철학에서나 최근 한국에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다원주의의 소유적 개인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인간을 강조하는 공동체 이론이 그 중 하나이다(안병진, 2006: 88).
그간 지나치게 개인주의화를 강화시킨 자유주의의 주류적 경향은 공동체주의와 논쟁을 진행하며 현재 상호 침투 중이다.
하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은 그간 전통적 가치나 민족 국가의 배타적 경계 등 공동체의 기존 합의된 공공선을 무비판적으로 순응해왔고, 또한 기존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의 헤게모니에의 도전이나 제도적 변혁등의 정치가 생략된 도덕주의적 담론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Miller 2000, 109). 이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사회경제적 부작용을 단지 완화하여 사회통합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부드러운 통제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 클린턴 전 행정부에 공동체주의를 전파했던 에치오니 등의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들은 중산층 양성 부부의 핵가족 모델을 이상화한 담론인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범죄 등 각종 사회적 병리 현상을 유발하는 정치, 경제적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보다는 이러한 전통적 가족의 가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호소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에치오니 스스로도 공동체주의 운동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안병진, 2006: 89).
“ 공동체주의 경제 아젠다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짧은 대답은 (그러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Miller, 2000: 109).
하지만 보다 더 정확하기 말한다면 공동체주의 경제 아젠다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를 적당히 현상 유지하고자 하는, 숨겨진 경제 아젠다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가장 첨예한 경제적 균열구조의 문제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탈정치적 정치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박세일 전의원등이 주창하는 공동체 자유주의 이론에의 관심은 그간 신자유주의적 질서로 급격히 변해오며 가족이 해체되고 원자화된 개인주의의 폐해가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부작용이 사회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자율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기존의 강한 공동체주의에서 개인의 자율과 공공성이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사회경제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를 공동체주의로 보완하는 위상을 지닌다. 다시 말해 과거의 권위주의적 공동체주의 국가에서 자율과 공공성이 조화를 이룬 민주 공화국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헤게모니를 부드럽게 실현하는 기업국가로 이행하고자 한다. 현재 기업국가에 가까운 개념으로 삼성공화국이란 말이 대중적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용어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일개 기업인 삼성의 지배와 공공성을 표현하는 공화국이란 개념 사이에는 심연의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은 공화국이란 담론의 의미를 단지 무의미한 접미사로 전락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사실 박세일 전의원은 그의 신간에서 기업국가에의 부드러운 보완의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신빈곤층의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면 그 해결책은 당연 기업과 산업의 구조조정 강화라는 발전주의적 해결책을 찾게된다”(2006,36) 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한국에서 공동체주의 운동의 새로운 대두는 비단 박세일 의원같은 선구적 지식인들만의 운동은 아니다. 흔히 그 의미를 잘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주요 보수적 일간지들이 주도하는 위스타트 운동 등은 주목할만한 공동체주의적 캠페인이다. 이 운동은 저소득층에게 교육, 문화등을 자원봉사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민관 협치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전적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이 전제하고 있는 자원봉사주의는 사실상 위 영역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책임 보다는 기업등의 주도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말하자면 국가의 적극적 역할 담론과의 헤게모니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이는 국가를 부단히 보조적 역할로 축소시켜나가고, 반대로 그간 천민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변신해가는 한국의 기업들의 대내외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시켜 사회적인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것에 기여할 것이다. 현재 한국은 교육부가 자연스럽게 전경련이라는 이익집단에게 교과서 내용 집필에 참가하게끔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시장주의적 헤게모니의 강화는 이후 위스타트 운동 등의 성공에 힘입어 더욱 급속히 사회 각 영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한국의 공동체 자유주의 진영이 기존 개발주의 시대의 공동체주의와 질적 차별성을 보이고 또한 정치 문제를 애매하게 회피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려면 보다 선명하게 기존의 발전주의적 질서와 맞서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애국주의적인 공동체주의 보수정치인이라 할 수 있으며 유력한 소위 대권 예비주자인 맥케인 상원 의원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는 보수주의 정치인이지만 여야를 넘어 기존 기득권 금권 정치에 날카롭게 각을 세우며 정치자금법의 개혁을 선구적으로 이루어 내었다. 그가 이러한 개혁에 뛰어든 것은 기존의 금권 정치가 건강한 보수주의적인 정치 질서를 만들 기보다는 사회적 통합을 해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의 보수주의 정치는 애매모호한 합의주의 레토릭 대신에 이러한 날카로운 정치적 관점을 가지고 애국과 통합의 공동체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하지만 박세일 전의원의 신간은 그 문제의식의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구기득권 구조의 핵심을 이루고 사회통합을 해치는 부동산, 조세, 기업 개혁 등의 문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그는 포퓰리즘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대의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과거 정치개혁 아젠다 실현에서 박세일 의원이 주도한 범국민특위의 긍정적 성과이다. 이 특위는 소위 ‘포퓰리즘적인 여론’을 등에 없고 의회를 일정정도 압박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긍정적 성과를 더 과감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로 상승시키기 보다는 대의민주주의 하에서의 법치, 합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이는 공동체자유주의가 가진 탈정치론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여야를 떠나 탈정치적 경향이 득세하는 가운데 그 틈새를 비집고 홍준표의원은 우익 포퓰리즘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사실 아예 터무니없는 논리가 아닌 아파트 반값 공약을 내세우고 있는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여야의 싸늘한 반응은 현재 한국 정치 지형의 낙후함을 보여주는 상징적 징후라 할 수있다.
향후 고민해야할 담론: 공화주의적 문제의식
고전적 공화주의
현재 개인주의적 특성을 가진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그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면서 미국 등 서구 사회 일각에서는 공적 질서를 강조하는 흐름으로 공동체주의와 함께 공화주의에 새로이 주목해 왔다. 공화주의의 어원은 ‘res publica’ 로서 정치 공동체 구성원의 공적인 일을 가리킨다. 이 어원에 근거하여 홍윤기 교수는 한국 헌법 1조의 공화국이란 규정의 정치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정치 공동체 차원에서 제기되는 공적인 사안에 관해 공적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관점에서 단지 통치자뿐만 아니라 피통치자인 정치 공동체 구성원까지 그 결정과정에 참여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을 정치적 의사형성과 권력 행사의 토대현장으로 운영하는 체제를 가리킨다”(홍윤기, 2004: 14).
공화주의에서는 정치의 자율성과 긍정적 기능을 높이 평가한다. 정치적 참여 자체를 지고의 선으로 보느냐(존재론적 공화주의) 아니면 정치적 참여라는 도구를 통해 시민적 덕성의 실현을 강조하느냐(도구론적 공화주의)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정치적 인간관이라는 점에서는 공화주의 제반 조류는 일치한다. 이러한 정치관에서 정치적 갈등은 부정적인 것이기는커녕 인간사회를 타락시키지 않고 혁신하는 원동력이다. 다원주의의 갈등에 대한 두려움과 타협에 대한 지나친 선호에 비해 훨씬 더 활력과 열정을 가진 정치를 조직할 수 있다.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고 열정을 기피하는 정치는 다원주의의 선한 의도와 달리 오히려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기피를 불러오고 이는 보다 강렬한 향락(enjoyment)을 제공하는 파시즘적 정치에 필연적으로 정치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Mouffe, 2005: 28). 반면에 공화주의는 갈등을 긍정하며 이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로 관심을 집중한다. 공화주의 정치 형태에 독특한 입법, 사법, 행정간 갈등과 균형의 혼합 정부 원리는 바로 이러한 특정한 정치관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다(안병진, 2006: 89-90).
하지만 고전적 공화주의 전통이나 이후 이태리에서 꽃핀 시민적 공화주의 흐름은 여전히 공동체주의의 결함처럼 선험적이거나 공유된 가치의 우선성을 강조하고 개인의 자율과 다양성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넘어 생태계 등을 포괄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의 철학을 구현하고 있지 못하다. 과거 동양의 인(仁) 이란 개념에 담긴, 단지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을 포함한 타자에 대한 책임의 문제의식이 부재한 것이다. 반면에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나 최근 신보수주의의 덕성론처럼 매우 남성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 덕성에 기초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아렌트와 같은 공화주의의 진보적 혁신을 이룩한 근대적 공화주의도 여전히 타자에 대한 공감의 철학을 분명히 지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는 남성주의적 철학으로부터 분명히 단절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기존의 주권국가의 틀을 넘어 지구적 통합이 가속화되며 상호의존성이 강조되는 현실과 21세기 시민들이 가지는 다양한 존재 형태를 고려할 때 과거 이러한 고전적 공화주의의 한계는 새로운 이론적 도전의 과제에 직면하고 있는 셈이다(안병진, 2006: 91).
현대적 공화주의론
최근 현대적 공화주의의 부활적인 흐름 중 과거 고전 공화주의나 이태리 시민적 공화주의의 억압성을 극복하기위해 심의적 민주주의를 보다 강조하는 ‘심의적’(deliberative) 공화주의의 새로운 경향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선험적인 합의 보다는 심의적으로 구성된 민주주의적인 합의와 열린 상호의존적 공동체를 강조한다(Honohan 2002). 아래에서는 현대 공화주의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선스타인의 4가지 특징에 대한 분석을 부분적으로 활용하여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정리하고자 한다(Sunstein, 1988). 선스타인은 현대적 공화주의 일반의 특징을 심의민주주의(deliberation in politics), 보편성(universality), 정치적 평등(political equality), 시민권(citizenship)의 4가지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정의중 보편성은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단일한 합의를 표현하는 개념에 가까우므로 이 글은 대신에 ‘공통 선들(common goods)에 대한 구성적(constitutive) 접근'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또한 시민권에 대한 그의 정의가 사회에 대한 상호의존적 관계론이라는 최근 공화주의의 새로운 이론적 기여를 분명히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이 글은 대안으로 ‘상호의존성 인식에 기반한 시민권'이라고 부분적으로 수정된 정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시민적 덕성에 의한 심의적 민주주의
현대적 공화주의는 우선 정치의 핵심을 단지 타협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의적(deliberative)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와 크게 다르다. 여기서 심의란 단순히 기존의 정치적 관습이나 기호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거리를 두고 이를 성찰하는 것을 말한다(Sunstein, 1988: 1549). 선스타인에 따르면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비롯되어 특히 미국 공화주의 전통에서 크게 꽃핀 개념이다. 사실 미국 건국의 시조인 제퍼슨이나 이후 아렌트 등은 일반 시민들의 풀뿌리 차원의 심의적 정치를 이론화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예를 들어, 그들은 각 지역의 ‘기초화정’(an elementary republics)같은 흥미로운 지역 심의 조직의 창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Arendt, 1963: 254). 비록 그들의 정치관은 현대 사회에서 고스란히 수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치에의 참여 의무를 지우고 있기는 하지만 심의 민주주의적 기관의 확대의 필요성은 많은 현대 이론가들도 새로이 주창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피시킨 등이 주장하는 심의적 여론 조사(deliberative poll)는 현대 서구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적극적으로 실험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부분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서 헌법에 대한 해석을 다루는 사법 심사(judicial review)에서 시민들의 역할은 공화주의의 심의적 정치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다. 공화주의적 전통에서는 현재 미국이나 한국에서 일부 엘리트 법관들의 판단에 헌법해석을 위임하는 제왕적 사법주의와 달리 아래로부터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헌법에 대한 심의에 참여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꽃으로 예찬한다(Kramer, 2004).
제퍼슨이나 아렌트 등 미국 공화주의의 심의적 문제의식의 탁월함은 유럽의 루소와 같은 공화주의자들과 비교할 때 더욱 돋보인다. 루소는 다양한 시민들 간의 심의적 토의 보다는 그의 ‘일반의지’라는 개념이 시사하듯이 유기체적인 국민을 상정하고 있다(Hardt and Negri, 2000). 이미 유기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면 심의는 무의미해지고 이는 동일자들끼리의 동어 반복적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심의는 실제적으로 진행되기 보다는 단지 민주주의적인 위안을 제공하는 알리바이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는 전체주의적 단일성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다.
이러한 심의에 대한 강조는 공화주의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시민적 덕성(civic virtue)과 연결된다. 개인의 사적인 이해관계의 경합을 당연시하는 다원주의적 전통과 달리 공화주의는 이를 넘어서서 공적 이익을 항시 염두에 둔 개인을 중시한다. 각 개인이 자신들의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 생각하려면 이는 순간적 계산을 넘어 정의에 대한 숙고가 필요해진다. 특히 아렌트 등이 살았던 근대를 넘어 21세기의 현실에서 시민들의 심의적 기능의 회복은 더욱 더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인간복제, 지구온난화 등 현기증 나는 속도로 발전하는 현시대가 던져주는 새로운 복잡한 과제들은 이미 과부하가 지나치게 걸려있고 지역 주민들의 유동적 선호에 반응하기에도 바쁜 기존 대의 기관들의 엘리트들만이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공적 관념을 지향하는 시민들의 심의적 정치 추구는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기획이다.
2) 평등한 기회
공화주의는 시민적 덕성을 실현하기 위해 기존 권력관계를 기정사실화하는 경향이 있는 다원주의와 달리 정치적 기회구조의 평등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권력 관계가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사회에서 시민들이 공적인 질서 구축을 위해 열정을 가지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의 이러한 기회의 동등성에 대한 강조는 지나치게 정치주의적인 공동체주의와 달리 경제적 기회 평등의 조건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다시 말해 공화주의는 덕성을 가진 시민을 창출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경제적 공적 질서에도 강한 관심을 가진다. 한국의 헌법에 규정된 ‘사회적 시장 경제’는 그런 점에서 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병천 교수는 이러한 사회적 시장경제의 공화주의적 의미를 “시민자본주의는 시민적 능력 신장을 도모하고 거기에 기반한 참여적 통치를 지향하는 시민사회에 착근된 사회적 책임 자본주의”라고 적절히 정의하고 있다(이병천, 2004: 64).
이처럼 정치적, 경제적 동등한 기회구조의 창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맥킨타이어 등의 공동체주의가 공적 질서의 구현에서 국가의 역할을 경시하는 것과 상반된다.
3) 공통 선들(common goods)에 대한 구성적(constitutivie) 접근
현대 공화주의의 ‘공통선'(common goods)들은 복수형이 의미하듯이 공동체주의와 달리 단 하나의 것도 아니고 사전에 설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와 시각을 가지는 자율적 시민들의 상호 소통 속에서 정치적으로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적 공화주의는 전통적 공동체주의와 달리 과거의 전통적 가치의 공유 등 동질화 경향보다 열려있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선이 민주적 토론을 통해 부단히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낙관한다는 점에서는 다원주의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낙관적 믿음은 원자화된 개인이 아니라 상호 의존된 형태로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타인과 공감을 이룰 수 있다는 인간 관계론에서 비롯된다.
4) 상호의존성 인식에 기초한 시민권
현대 공화주의는 시민참여에 의한 전국적 제도들의 통제 및 지역적 자기 결정성(self-determination)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민참여를 통해 대의제 내부에 지나친 분파주의나 이기주의가 만연하는 것을 방지한다. 공화주의에서는 자율적 시민들이 다원주의처럼 단지 개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힘을 드러낼 수 있으며, 그러한 공화국은 건강한 역동성을 발휘한다고 본다. 우선 이 힘은 정당 및 다양한 매개를 통해 정치 제도 내로 투입되어 시민 주권의 원리를 구현한다. 예를 들어 헌법 해석에서 사법부 최종 심급제도에 위임하지 않고, 자율적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다원주의적 상상력을 구현한다.
시민참여는 또한 공적 질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통해 시민적 덕성을 양성해 나가는 중요한 방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민참여를 통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획득하고 시민들 간 상호 의존된 공통 운명체를 체감해 갈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기존 근대국가의 폐쇄적인 주권국가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현대적 공화주의는 민족주의나 인종적 공동체 같은 타자를 전제로 한 배타적 공동체보다는 상호의존성, 공통의 운명에 대한 인식에 기반한 열린 정치 공동체라는 점에서 지구적으로 통합되어가는 21세기의 특성에 잘 조응하기 때문이다. 호노한(2002: 267)은 이러한 상호의존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대학 동료’(colleague) 라는 예를 사용하기도 한다. 동료는 낯선 타인보다는 가깝고 친구보다는 덜 자발적이다. 그리고 가족보다는 덜 감정적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 이 동료 모델은 상호의존적이면서도 특정 가치에 의존할 필요 없이 덜 배타적이고 다양한 다른 정체성에도 열려 있어 주권국가를 넘어서는 지구적 네트워크에 잘 조응한다. 특히 한반도나 더 나아가 동아시아는 부단히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내부적 동질성을 강요하는 민족주의적 논리 보다는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할 때 보다 민주적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화주의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안병진, 2006: 92-95).
제기될 수 있는 반론과 전망
이러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원리의 제기에 대해서 다음의 몇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우선 고민해 볼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의 적실성의 여부이다. 어떤 이론을 수용할 때는 그 사회가 처한 역사적 맥락을 우선 고려하는 것이 우선시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서구의 첨단 이론들이 그 맥락을 사상한 채 한국 사회에 도입되면서 애초 의도한 결과와는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공적 질서를 강조하는 공화주의 원리의 도입이 그간 지나치게 개인의 자율을 억압하고 공동체의 단일한 목표만을 강조해온 한국 사회의 지형을 변화시키기보다는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간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등의 저서를 통해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를 대안적 이념으로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던 최장집 교수는 최근 개정판에서 공화주의가 지나치게 한국의 보수적인 지형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하여 이전의 주장을 철회한 바 있는데 이는 그러한 이유에서 기인한다(최장집, 2005).
하지만 여기서 최장집 교수 등이 이론적 수용에서 문제 삼고 있는 공화주의는 공화주의 전체 흐름 중 주로 이탈리아의 시민공화주의 전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의 지적처럼 이러한 흐름은 지나치게 기존 가치에의 순응과 시민적 덕성함양에 대한 교육 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최근 호노한 등이 주장하는 현대적 공화주의는 공동체주의의 도덕주의적 경향이나 공동체주의와 문제의식의 연속성을 가지는 이태리의 시민 공화주의와 달리 정치적 평등 등의 가치에 대한 강조를 통해 기존 제도적 틀을 변환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또한 기존 전통적 가치, 국수주의, 민족주의에 기반한 배타적 공동체 추구에 비판적이고 반면에 다양한 가치가 상호의존성의 운명을 인식한 자율적 시민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모델이라는 점에서 철저히 민주주의적이다.
또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심의적 민주주의적 요소가 공화주의의 민주적 잠재력을 살리기보다는 지나치게 엘리트들의 이성적 토론을 특권화한다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사실 최근 유행하는 심의민주주의 모델은 심의적 의사결정과정에서 지나치게 이성적 합의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이성주의 전통 하에서의 엘리트로 훈련받지 못한 층들의 문제의식과 욕망은 거칠고 불합리한 것으로 치부되고 배제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하층계급의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는 랩은 현실 시스템의 문제를 무엇보다도 예리하게 드러내지만 이는 정제된 언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쉽게 무시되곤 한다(린 샌더스, 2004: 164). 물론 현대적 공화주의는 심의 민주주의와 달리 이러한 편향, 배제 가능성에 대해 민감하다. 그러하기에 현대적 공화주의는 단지 논리적이고 절제된 토론 뿐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 사례를 고백하듯이 증언하는 방식 등 다양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에 대해 열려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적 공화주의가 단지 다양한 의사소통 기법에 대한 열린 자세를 넘어 서구적 이성주의 전통에 대해 어떻게 근본적으로 직면해나가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적 공화주의는 서구의 이성주의 전통에 대해서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던지고 있는 여성주의나 무페의 ‘열정의 정치'(politics of passion)등의 흐름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발전할 필요가 있다(안병진, 2006: 96-97).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방향에 대해 다양한 개혁안들이 제기되어 있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단임제에 의한 조기 레임 덕을 방지하고 보다 안정적으로 민주적 정부가 운영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중임제를 제기하고 있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현 단순 다수제 투표방식의 한계를 넘어 보다 많은 이들의 선호가 반영될 수 있게 하기 위해 결선 투표제까지 제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민주주의적 개혁은 중요하게 검토해 볼 사안들이다. 하지만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 민주주의 진전을 위해 보다 더 발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현 정치 제도의 부분적 개혁안을 넘어 지금까지 수십년간 모호한 규정으로 남아있는 민주공화국 개념의 철학적 기반에까지 고민을 심화시키고 있다. 마치 미국 건국의 시조들이 오랜 고민 끝에 ‘자유주의적 공화주의’라는 철학적 원리를 정립하였고 이를 통해 선진적 갈등 해결
구조를 정착시켰듯이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야를 제시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안병진, 2006: 97-98).
결 론
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의 정책적 구현은 시장주의 담론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공적 질서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현재 실현되는 정책보다는 훨씬 더 과감한 실험들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부동산 문제 등에서 국가의 주도적 역할하의 영구 임대주택 건설등을 즉각 추구하는 것은 공화국의 질서를 구축하는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임기가 중반을 지나고 사회적 지반이 많이 침식된 지금 모든 정책에서 과감한 전환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요한 몇몇 전선에서 새로운 공통선들을 창출하는 것과 동시에 공공성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비교적 실현이 용이한 작은 이슈들의 일관된 패키지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OECD 국가중 자살율 1위라는 충격적 통계가 말하듯이 신자유주의의 만연 이후 심각해진 정신 건강의 문제는 국가의 공공성을 강화함에 있어 작지만 의미 있는 해결책들을 모색할 수 있다. 흔히 합리주의적 정치관에 경도된 관점은 이러한 '정서적 정치'(affective politics)가 가지는 중요성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재 한국이 그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공공성의 정치의 작은 실험은 정부에 대한 신뢰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점에서 클린턴 전대통령의 95년 실험은 시사적이다. 그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속에서 일년간 ‘가치아젠다’라는 제목하에 작지만 중산층, 서민들의 삶의 고통을 완화하는 일련의 해결책들을 꾸준히 추구하였다(안병진, 2004). 이러한 작은 정책에 대해 회의하는 일부 비판자들의 목소리에 대해 당시 힐러리 대통령 부인은 시민들이 이러한 작은 정책의 일련의 체감을 통해 다시 정부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은 현 참여정부에서도 견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의 성공은 클린턴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일관성과 몇 년에 걸친 장기적 계획과 꾸준한 실천, 그리고 미디어 정치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반대로 한편으로 영리병원등의 공공성 강화의 관점과 배치되는 실험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작은 실천을 축적하는 것은 별반 효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향후 참여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어떠한 담론을 지향하고 이를 지혜롭게 정책적으로 배치하는 가는 참여정부 기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칠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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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2005, “모두를 위한 나라는 어떻게 가능한가?: 공화국의 이념에 대한 철학적 성찰”, 해방 60년 기념 심포지움 발표문.
린 샌더스, 2004, “토의모델에 대한 반론”, 『정치비평』 통권 제 13호.
박세일, 2006,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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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글안병진(2006).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서울: 아르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