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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오월광대 박효선

새벽길 2022. 5. 31. 00:25

2004년 5월 15일에 쓴 글이다. 네이버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것을 옮겨왔다. 18년 전에 쓴 글을 다시 옮겨온 이유는 돌규가 전남대에 갔다가 금남로에 들렸을 때 극단 토박이가 <금희의 오월>을 상연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그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거기서 박효선 샘이 생각나서다. "금희의 오월을 박효선 샘이 각본썼기 땜에... 개인적으로 재수할 때 그분에게 국어수업을 들었고, 백기완샘을 알게 되었는데..."라고만 댓글을 달았지만, 1988년에 나온 <금희의 오월> 포스터를 보고 내가 이걸 언제 봤는지 되짚어보다가 이전에 박효선 샘에 대해 쓴 글에서 나는 서울에서 이 연극을 봤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서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글을 옮겨오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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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에 어제 밤에 KBS에서 방영되었던 인물현대사, 영원한 오월광대 -박효선(연출-김창범PD)을 보았다. 어제 티비로 보려고 했는데, 민지네(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네티즌) 모임이 있어서 보지 못하고 오늘 시간을 내서 보게 된 것이다.
 
처음에 오월의 노래(꽃잎처럼~이 아니라 노찾사2집에 실린 서정적인 노래이다)가 깔리면서 박효선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이 프로는 박효선의 삶과 박효선이 만들었던 연극 [금희의 오월]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나는 이 금희의 오월을 1988년에 학교 문화관에서 보았다. 다시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5월 대동제 기간 중 광주의 극단 '토박이'가 서울에 올라와 상연을 한 것이다. 이 금희의 오월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인 88년 4월 초 서울에서 올려져, 고향이 광주라 그 실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나와는 달리, 광주의 진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서울시민들과 대학 새내기들에게는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금희의 오월은 오월항쟁 당시 계엄군 총에 사망한 전남대 재학생 이정연의 여동생 금희의 눈을 통해 본 오월 광주의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연극으로 전한 최초의 작품으로, 이 연극을 만든 사람이 박효선이다.
 
광주항쟁 당시 박효선은 시민들을 이끈 강경파지도부의 홍보부장이었다. 그는 민주화운동 초기부터 ‘문화선전대’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시민들을 참여하게 하는 홍보활동과 군중집회를 주도하는 인물이었다. 5월 광주의 마지막 날인 27일 새벽 1시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민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새벽 2시경 박효선은 죽어가던 동료들을 뒤로 한 채 두려움에 떨면서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1998년 9월 마흔네살의 짦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 빚으로 남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연극으로 오월광주의 정신을 형상화하고자 했던 '오월광대'였다. 다른 이들이 연설로서, 글로서 광주의 진실을 전할 때 문화가 가진 진실전달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의 화두는 언제나 80년 오월 광주였고, 이를 통해 광주의 동료들에게 졌던 자신의 빚을 갚으려 했다.
 
나에게 그는 개인적으로 색다른 추억으로 다가온다. 6월 항쟁으로 전두환 군사독재가 물러나고 3김에 의한 정권다툼이 치열하게 펼쳐지던 87년. 그해에 박효선은 내가 재수하던 학원의 국어강사였다. 문화운동을 하던 짬짬히 강사로서 생계를 유지하려 했던 것 같다. 그는 각 단원의 핵심을 짚어주면서도, 학생들이 지루해하면 재미있는 유머로 몸과 마음을 풀어주던 유능한 강사였다. 당시에는 문병란 조선대 교수(시인)도 같은 학원강사였다.
 
87년 겨울 대선이 막바지로 치닫을 무렵 나는 김대중 후보가 조선대 대운동장에서 집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의를 마치자마자 떨쳐나섰다. 그리고 조선대 대운동장에 운집한 수십만의 인파 속에서 묻혀 있다가 바로 5미터 앞에서 김대중 선생을 보고서는 그 감격에 눈물을 흘렸다.(나에게 그런 때도 있었다. ㅠㅠ) 그렇게 김대중 선생은 5월 광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이었다. 그 날의 감동이 유지되던 며칠 후 국어시간, 박효선 선생은 화술 얘기를 하면서 대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분, 김대중 후보의 유세를 들어보셨나요?"
"예"
"얘기 잘 하던가요?"
"예"
"여러분은 민주화운동 하면 김대중, 연설 잘하는 사람 하면 김대중을 떠올리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말을 설득력 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 때 그 사람이 티비유세를 하니까 지켜보세요."
 
그렇게 소개되었던 사람이 바로 백기완 선생이다. 검은 색 도포 자락과 흰 머리칼을 휘날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전두환을 감옥에 쳐넣고 이제는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포효를 하지 않는가? 게다가 정해진 연설시간에 맞추어 읊어주는 마무리 시 한 수. 나는 민중후보 백기완을 주목했고, 이는 나중에 내가 비판적 지지가 아니라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길로 나서도록 하는데 조그마한 힘이 되었다.
 
박효선 선생은 광주의 그 획일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어린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학원강사인 민지네 회원들은 명심할지어다. 나는 박효선 선생의 그런 입장이 자신의 광주항쟁 경험에서 나왔다고 본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활동가의 삶은 아니었고, 그냥 평범한 시민이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평등과 해방의 세상을 꿈꾸는 것은 오월 광주의 기억이 남아있고, 박효선 선생의 그 치열함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효선 선생은 "역사란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였다. 오월 광주를 우리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보수정치꾼들에게 넘길 때 오월 광주는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한다. 인물현대사 영원한 오월광대 박효선은 [민들레처럼]과 함께 자막이 올라가면서 끝난다. 탁월한 선택.
 
금희의 오월에 나오는 대사 한 토막은 금희의 목소리를 통해 이정연 등 광주의 열사들과 박효선 선생이 평생 이루고자 했던 바를 보여준다.   
“지금은 망월동 차디찬 땅에 누워있지만 오빠는 우리 가슴마다에 진달래 꽃불이 되어 살아계세요! 오빠 우리는 꼭 이길 거예요!”  
박효선 선생도 망월동에 묻혀 영원히 내 가슴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꽃다지 1집 - 민들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