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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과 이재유(1903-1944)

새벽길 2022. 9. 11. 19:39

는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등을 통해 이재유를 알게 되었다. 대표적인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로 평가받는 이재유가 일제말기 옥사하지 않고 해방 이후에도 살아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나중에 김경일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푸른역사)도 읽어야겠다. 아래는 노동과 세계에 실린 박준성 님의 글과 나무위키에 나온 이재유의 생애를 담아온 것이다.
 
http://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500635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과 이재유(1903-1944) (노동과 세계,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2022.08.23 13:50)
예전에 학생들이 안중근과 유관순을 모른다고 시끌벅적한 적이 있다. 목소리 높여 꾸짖는 사람들에게 왜 알아야 하는지 묻고, 열 받는 당신들은 얼마나 잘 아는지 알려달라고 하고 싶었다. 강주룡이나 이재유는 아냐고 되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했다. 이재유는 일제 식민지 시기 ‘당대 최고의 혁명가’, ‘19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라는 표현처럼 굽히지 않는 사회주의 혁명가였으며, 손꼽히는 혁명적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였다. 18년 동안 사회주의운동에 앞장섰으며, 세 차례 일제의 감옥에 갇혀 12년 동안 전향하지 않고 끈질기게 옥중투쟁을 벌였다. <이재유 탈출기>를 쓴 금강산인은 이재유를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혁명투사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재유를 ‘반드시’, ‘꼭’ 알아야 하고 모르면 ‘절대로’ 안되는 인물이라고 강변하고 싶지는 않다.
1920년대 노동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발판으로 삼고 1930년대 노동자들의 계속되는 투쟁을 동력으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났다. 기업별 노동조합을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바꾸고, 생존권 투쟁은 물론 민족해방과 사회주의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운동이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이끌어 갔던 사람들은 그때까지 전향하지 않고 활동하던 1920년대 사회주의자, 코민테른과 이어져 국외에서 들어온 활동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활동하던 사회운동가, 노동조합운동의 간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노동운동을 하면서 커온 선진노동자들이었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공장 속으로!” 투신하여 노동운동에 뛰어든 학생운동가들도 주요한 역할을 했다.
혁명적 노동조합은 사업장 별로 2-3인으로 이루어진 ‘반’이나 ‘공장그룹’ 같은 세포조직을 기초로 분회를 설치하고, 그 위에 공장의 분회를 관리.지도하는 공장위원회를 기반으로 지역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든 뒤 전국을 아우르는 산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이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조선공산당 재건의 기반이었고,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 정치투쟁으로 나가는 근거지였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운동과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핵심이었다.
총독부가 만든 부정확한 통계를 보더라도 1931~35년 사이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검거된 건수가 70여 건이었으며, 1,759명이 감옥으로 잡혀갔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조직 결성 단계에 발각되거나, 선전 또는 파업투쟁을 통하여 조직 확대를 꾀하는 과정에서 탄압을 받아 와해 되었다. 내세웠던 목적을 끝내 달성하지 못하였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경험은 해방 후 변혁 주체의 형성과 조선노동조합평의회 같은 노동자 전국조직을 만들 수 있는 축적된 힘이 되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이재유는 1903년 3월 함경남도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 12월 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학자금이 없어 학업을 계속하지는 못했으나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이재유
1928년 7,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왔다. 1930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자본론, 사적유물론 같은 사회과학을 학습하면서 메이데이 기념투쟁, 석공파업투쟁 같은 옥중투쟁을 벌였다. 이때 감옥에서 노동자운동가 김삼룡, 농민운동가 이성출, 학생운동가 이현상을 만났다.
1932년 12월 감옥에서 풀려난 이재유는 서울·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혁명적노동조합운동, 혁명적농민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재유 그룹은 1933년부터 1936년 사이에 경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공장에서 노동자를 끌어들여 연대하여 공산주의적으로 훈련하고, 화학.섬유.금속 등 산업별로 나누어 혁명적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동대문과 서울의 공업 지대에서 산별 노동조합을 만드는 운동을 했다. 또한 여주.양평지역에서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을 지도했으며,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반제(反제국주의)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경성트로이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1934년 1년 22일 밤 이재유는 다시 서대문서에 잡혀들어갔다. 서대문서는 정보를 캐려고 온갖 악랄한 고문을 자행했다. 이재유는 죽을 각오로 자기의 신념과 조직을 지켰다. 1934년 2월 하순 밤, 간수가 조는 틈을 타서 서대문서를 탈출하였다. 곧 체포되어 ’제1차 서대문서 탈출사건‘은 실패하였다. 1934년 4월 14일 이재유는 천황제를 싫어하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 젊은 일인 경관의 도움으로 2차 탈출에 성공하였다. 서대문서를 탈출한 이재유는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의 집으로 피신했다. 마루 밑을 파서 만든 지하실에서 40여일 동안 숨어 지냈다. 그 와중에도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비밀리에 자기 그룹과 접촉하였다. 1934년 5월 중순 정태식, 권영태, 미야케 교수가 체포되었다. 미야케가 탈출할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이재유는 무사히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1935년 1월 서울 한남동에서 동거하던 박진홍이 이재유의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에도 이재유의 행방을 숨겼다. 이재유와 이관술은 일제의 검거망을 벗어나 양주에서 2년 동안 숨어 살았다. 오막살이 한 채를 직접 세우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야학을 열어 주민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숨어서 잠수만 탄 것이 아니라 조선공산당경성준비그룹(1936.10)을 조직하고 기관지 <적기>를 발간하면서 일상활동과 혁명운동을 계속하였다.
1936년 12월 25일 오전 11시 40분 쯤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재의 도봉구 창동) 부근 야산에서 이재유는 잠복 중이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재유를 검거한 후 ‘이제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면서 자축연을 열었다.

이재유의 체포 사실을 알리는 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
이재유는 1938년 7월에 징역 6년형을 선고 받은 뒤 공주감옥에서 형을 다 마쳤다. 그러나 그 뒤에도 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속 청주보호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일제 말기 많은 민족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 들이 전향하고 변절하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일제의 앞잡이 밀정 노릇을 했다. 그런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재유는 자신의 신념 양심, 혁명적 미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버텼다.
1944년 10월 26일 감옥에서도 옥중투쟁을 계속하던 이재유는 일제의 고문과 영양결핍으로 얻은 폐결핵, 각기병으로 41살 나이로 옥사하였다. 8.15 해방 10개월 전이었다. 이재유가 몇 년만 더 살았어도, 1945년 '8.15 해방' 이후 민족해방 노동해방의 새로운 사회, 통일된 사회를 이루려는 변혁운동에서 그가 맡은 몫은 누구보다 컸을 것이다. 이재유는 미 점령기에도 꼭 필요했던 혁명운동가였다. 먼저 떠난 아쉬움이 그만큼 더 크다. 관심이 있으면 이재유만큼은 ‘꼭’ 김경일 지음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푸른역사)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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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8월 28일 함경남도 삼수군 별해면 선소리(현 량강도 삼수군 번포리)의 화전민 가정에서 아버지 이강범(李玒範)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종운(李鍾運)의 딸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6살이 되던 1910년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후 아버지는 후실로 밀양 박씨 박주병(朴柱秉)의 딸을 들여 슬하에 이재록(李載祿), 이재표(李載杓) 등 두 명의 아들을 더 두었다.[6]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를 낼 수 없어 몇 개월도 안되어 자퇴했으며, 이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5년 '민족 차별 철폐를 위해서는 일제로부터 독립해야한다'는 것을 기치로 하는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부 카토츠카(下戶塚)에 거주하면서 니혼대학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퇴학당했고, 이후 일본노동조합평의회 계열의 합법적 노동조합인 동경합동노동조합(東京合同勞動組合)에 가입하고 노동운동을 시작하였다.

1927년 11월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후보위원이 되었으며, 1928년 4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 가입하고, 같은 해 5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선전부 책임을 맡았다. 그러다가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로 체포되어 경성부로 압송되었고,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미결구류 500일 통산)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2월 21일 만기출옥한 이재유는 경기도 경성부 수송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거주하였다. 그는 종래의 파벌에 의한 운동 방향을 배격하기로 결의하고 조선공산당 재건그룹을 지도하는 한편 1933년 7월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 트로이카'라 불리는 조직을 결성하여 조선일보사를 통한 언론활동, 공장 중심 노동조합 조직, 지방별 농민조합 조직 및 독서회를 통한 학생운동 지도 등 각 부문별 운동을 통해 반제국주의 독립의 기반을 조성하려고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렇듯 그는 당대 1급 불령선인으로 지목될 정도로 엄청난 공산주의자였다.

일본제국 경찰은 이재유를 체포하기 위해 엄청난 안간힘을 썼으나 번번히 놓쳤다. 그만큼 이재유는 일본제국 경찰로부터 검거망을 피하는 능력이 대단했었다. 당시 언론들[7]조차도 이재유를 굉장히 크게 다뤘다. 그만큼 이재유는 당시 검거망을 피하는데 있어서 신출귀몰했었다. 취조실에서 수갑을 풀고 탈출했다던가, 경찰서 건물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재유에 대해 굉장히 화제거리로 다루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이재유와 경성제대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와의 일화가 있다.

1934년 일본제국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가 있었을 때 이재유도 그해 1월 21일 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당하여 취조를 받고 있었는데, 같은 해 4월 14일 간수가 순시를 하던 틈을 이용해 탈옥에 성공하였다. 그는 곧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정학 제2강좌 교수이자 일본인 공산주의자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의 경성제국대학 관사 다다미 마룻바닥 밑에서 수 개월간 은신했으며, 이 도움으로 이재유는 일본제국 경찰의 감시망을 벗어나 무사히 도주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일본제국 경찰은 발칵 뒤집어졌으며, 미야케 교수는 이 사건으로 결국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석방 후 귀국해서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다시 교수직을 맡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미야케 교수가 이 사건으로 체포된 것이 아니라, 다른 공산당 관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재유의 행방을 묻는 고문 중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잡혀서 고문당하면서 '정신이 맑아진 후'에 진술서를 쓰겠다고 하여 그 사이 이재유가 도망칠 시간을 벌었던 것.

이후 이재유는 조선의 절대 독립 및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경성재건그룹을 재차 조직하고 끊임없이 조선공산당 재건 및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경성재건그룹 조직도. 맨 위에 박영출, 이관술, 이재유의 이름이 있다.


1934년 9월 중순 이순금의 노력으로 경성재건그룹의 지도부가 되는 이관술과 접촉한다. 이재유와 이관술은 장충단공원 뒤 <앵구> 약수터에서 암호에 의해서 서로 알아보고 손을 잡았다.
재유 동무와 나와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전우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재유 동무의 첫인상은 논리가 명철한 것 매사에 구체적이고 자세한 것 그러고 대단히 사무적인 것이 특색이었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재유는 출판, 이관술은 학생운동, 박영출은 노동운동 분야를 총괄했다.

조직의 정식명칙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이며 상당한 조직적 성과를 거둔다. 경성재건그룹의 목표는 연말연시를 기해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경성재건그룹은 학교와 공장에 독서회를 만들어 지도하고 여러 종류의 팸플릿을 발간해 경성과 인천 지역에 배포한다. 석 달 만에 조직원이 오십 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석 달 만인 1935년 1월 검거 선풍을 맞는다. 이재유는 이관술의 은신처로 피신했지만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이재유와 이관술은 비밀 서류들을 땅에 묻어 두고 목적지를 정하지도 못한 채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경기도 경계를 넘은 두 사람은 강원도 수성을 지나 홍천과 춘천까지 도보로 배회한다. 두 사람은 새로운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맞는 복장으로 변장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구실을 짜냈다. 이 때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변장법을 알려주었다.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식당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밥을 사먹는가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알려주었다.
나는 재유 동무로부터 그의 독특한 여러 가지 자세한 변장법과 생활구실(生活口實) 즉 여관에 드러가서는 어떻게 자고 주막에 가서는 무슨 핑계를 하고 자고 밥집에 가서는 무엇이라 하고 사먹고 하는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각종의 기술을 배웠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과 함께 살 당시 재미있고 애틋한 일화를 많이 만들었다. 김대성, 김소성 형제로 위장하여 사는데 나이가 많은 이관술이 형이었고, 이재유가 아우였다. 이름이 '대성'과 '소성'이니 '큰별, 작은별 형제'였던 셈이다. 지명수배자와 탈옥수 신세였던 이들은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재치있게 살았다.출처

어느 날에는 폭설이 산야를 뒤덮은 산중에 갇힌 이관술과 이재유는 꼼짝 못하고 눈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1월의 한파 속에 노숙을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두 사람은 옷을 몽땅 벗어 바닥에 깔고 알몸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서로의 온 몸을 손으로 문질러 열을 냈다고 한다. 알몸으로 부비기 사흘 만에야 마을을 만나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수해민 형제로 위장하고 버려진 임야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집을 지어 살았는데 나중에 이 곳을 방문한 기자에 따르면 그 좁은 방에서 어떻게 장정 둘이 지냈을까 놀랄 만큼 협착했다고 한다.
이재유와 이관술이 살았던 노해면(창동) 아지트, <매일신보> 1937.4.30.

이재유는 경성에 드나들며 조직 재건을 담당하고 이관술은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의 제작을 책임진다. 기관지 '적기'는 상당히 두꺼운 분량으로 이관술은 거의 모든 시간을 적기의 제작에 쏟았다.

적기 제1호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기관지부 명의로 1936년 10월 20일에 발행되었다. 안재성의 평에 따르면 "상당한 명문장으로 이루어졌다".

적기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이 현대적이다. 안재성의 평에 따르면 "오늘날까지도 다 이루지 못한 선진적인 구호들을 담고 있다".
① 노동자 파업투쟁의 자유, 즉 파업에 대한 경찰과 군대의 탄압 절대 반대
② 노동조합, 그 밖의 모든 노동자 조직의 자유
③ 노동자를 탄압하는 모든 악법 반대. 특히 치안유지법·출판법·폭력행위취체령, 제령 7호 반대
④ 모든 정치범 즉시 석방, 사형제도 반대
⑤ 노동자의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 정치적 집회·데모의 자유
⑥ 일체 경영위원회 창설의 자유, 프롤레타리아 자위단 창설의 자유
⑦ 노동자에 대한 일체의 봉건적·기숙사제적 속박 반대
⑧ 하루 7시간(1주 40시간) 노동제 획득
⑨ 야전적 노동강화, 대우 개악, 임금인하, 시간연장 등 부르주아적 산업합리화 절대 반대
⑩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제 획득
⑪ 부인·아동의 연기계약(年期契約)제와 매매제 절대 반대
⑫ 모든 노동자 조직 안에 좌익 결성
⑬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 강화
⑭ 경성을 아우르는 산업별 노동조합 촉성
⑮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 촉진

그리고 최저임금 확립, 실업보험·의료보험·재해보험·노약자보험·사망보험 등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를 주장했다.
  • <적기>를 소지한 채 경찰에 체포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일단 받으면 이전에 읽은 사람의 지문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으로 모든 면을 쓸어 자기 지문만 찍어놓을 것
  • 읽은 후에는 반드시 소각하고 적기를 들고 타인을 방문하거나 배회, 산책하지 않도록 할 것

<적기>의 보안 수칙

이들은 적기 제2호를 11월, 제3호를 12월에 완성했고 모두 두꺼운 분량이었다. 적기는 여러 운동가와 신문기자와 학생들에게 널리 배포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왔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이관술은 1936년 12월 24일까지 적기 인쇄를 계속했다.

1936년 12월 25일 성탄절 이재유는 집을 나서며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이관술에게 굳은 악수를 청했다. 이재유가 집을 나선 건 조직원 최호극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재유와 이관술은 몰랐지만 최호극은 이미 경찰에 잡혀 이재유와의 약속을 경찰에 말한 상태였다.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두 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체포된 것으로 알고 달아나라고 재차 확인한다. 그리고 이재유는 잡혔고 고함을 치며 이관술이 자신의 체포 사실을 소문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이재유라 체포당한 곳은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경춘선 신공덕역 근처이다. 이재유는 체포될 때 고함을 치며 이관술이 자신의 체포 사실을 소문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이후 이재유는 24시간 동안 고문을 버티며 아지트 위치를 말하지 않아 이관술이 도주할 시간을 충분히 벌어주었다.

이재유를 검거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형사만 60여 명. 어찌나 기뻤던지 이들은 잠복하면서 했던 복장을 갈아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궤멸되다
추격개시 이래 4년여, 원흉 이재유 드디어 잡혀 묶이다
일체의 국제 루트와의 절연, 붉은 독재자를 꿈꾼 암약
이재유 체포를 다뤘던 경성일보 기사. 당시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다뤘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재유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국내 독립운동의 마지막 희망 같은 존재였다.


이재유 체포 당시 일본제국 경찰들이 기념사진 찍은 모습. 앞줄 왼쪽에서 2번째로 두 손을 앞에 모은 인물이 체포된 이재유다. 일본 형사들은 체포 성공을 기념한다고 변장한 복장 그대로 기념촬영을 했다. 이재유를 체포했던 담당 경찰서였던 당시 서대문경찰서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당시 총독부 관제언론이었던 매일신보에서 하루 날짜 지면 전체가 '이재유 특집'으로 도배되었을 정도였다.
1937년 4월 30일자 1면
1937년 4월 30일자 2면
1937년 4월 30일자 3면
1937년 4월 30일자 4면

그는 1938년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미결구류 150일 통산)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9월 12일 형기가 다 채워졌음에도 이재유는 비전향자라는 이유로 출옥하지 못했고, 전향을 끝까지 거부하여 너무나도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8] 이렇게 되어 '비전향 장기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청주보호교도소로[9]옮겨져 지내게 되고, 혹독한 생활을 겪으면서 끝내 광복 10개월 전인 1944년 10월 26일 옥사했다. 묘는 고향인 량강도 삼수군 번포리에 있다.

이재유가 죽음을 앞둔 모습을 독립운동가 이병희가 봤다. 그녀는 남자 옥사 앞을 지나가다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수용실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봤다. 그런데 안면이 전혀 없는 그가 눈짓을 하며 “병희야, 나 이재유다”라고 하더란다. “이재유가 왜 그렇게 생겼느냐”고 물으니, 악랄한 고문에 얼굴이 퉁퉁 부었다며 "날 열 번은 죽였다가 살려놨다"고 했다고 한다. 동지도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변형될 때까지 잔혹한 고문을 당했단 것. "앉았다 일어난 자리에 핏물이 고일 정도로 고문을 당하고서도 유치장에 갇힌 동지들 이름을 부르며 격려했다"는 증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