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는 재미/사람들도 만나고

박래군 인권운동가 인터뷰 (한겨레, 22.5.14)

새벽길 2022. 5. 15. 18:32

른바 운동권들은 회전문이란 게 거의 없다. 일단 어공이 되거나 제도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 다시 운동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이다. 설사 운동을 하게 되더라도 변질되거나 운동에 해악을 끼치곤 한다. 그런 점에서 박래군 샘은 약간 예외라고도 볼 수 있는데, 직함이 다양한 연대조직의 고문이거나 공동집행위원장인, 그런 사람은 아니다. 나 또한 운동 사회도 혁신과 물갈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김종철 기자의 말처럼 열악한 운동 현실에서 박래군 샘에게 여전히 뒤에서 지원하는 것 이상의 역할이 있다고 본다.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후배들이 일할 수 있게 물러나는 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과 역할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rights/1042823.html
“6월항쟁 영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586들, 다 밀어줘도 남 탓” (한겨레, 안산/김종철 선임기자, 2022-05-14 09:08)
[한겨레 S] 김종철의 여기
인권운동의 맏형 박래군
숱한 제도권 유혹 뿌리친 채 34년간 인권운동가 한길
“시대 변하면 사람도 바꿔야…586은 지원 역할로 후퇴를”
시민사회 강한 압박에 불발됐지만 은퇴 꿈꾸는 활동가

“어서 오세요. 커피나 차 한잔하실래요?” 농부처럼 얼굴이 검게 탄 박래군(61·이하 호칭 생략) 4·16재단 상임이사가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커피를 주문하자, 그는 사무실 바깥 간이 부엌에 가서 커피 두잔을 내려 왔다. 이 정도야 <한겨레> 편집국장도 늘 하는 일이니 인권운동가로서야 당연하지라고 생각하면서 인터뷰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의 방이 좁아 사진을 찍을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사진기자가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다가 마침 비어 있는 2층 회의실을 발견하고는 장소를 옮기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박래군은 “사용해도 괜찮은지 물어봐야 한다”면서 직원들 사무실로 직접 가서 확인하고 돌아왔다. 탈권위의 리더라면 요즈음 어느 분야에서든 이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2층 회의실로 이동할 때였다. 기자가 노트북 등 장비를 챙기는 동안 그는 빈 커피잔을 챙겼다. 개수대로 가져가서는 잔을 깨끗이 씻은 뒤 제자리에 뒀다. 다른 조직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을뿐더러 이곳에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다. “매번 그렇게 하나요?”라고 물었다. “아뇨. 그냥 둬도 되는데, 가급적 제가 사용한 것은 제가 정리하려고 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인권 행동’이 몸에 밴 운동가와의 만남은 지난달 27일 오후 경기도 안산의 4·16재단에서 이렇게 시작됐다.
동생 박래전의 분신이 이끈 인권운동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를 조용히 관두고 지난해 5월부터 4·16재단에서 일하는데, 어때요?
“얼마 전 세월호 참사 8주기였고, 내후년 10주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생명안전공원을 올 하반기에는 착공을 해야 하고요,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 6월에 종료된 뒤 진상규명 등 후속 작업을 어떻게 할지도 고민입니다. 또, 피해자 지원 및 안전문화 사업도 해야 돼요.”
세월호 피해자가 가장 많은 단원고 가까이에 있는 4·16재단은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출연으로 2018년 5월 출범했다. 2대 상임이사를 맡은 박래군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시민대책위원회 구성을 주도하는 등 세월호 진상규명 등에 앞장서왔다.
―어떻게 해서 이 일을 맡게 됐어요?
“재단법인을 만들 때 저는 아무것도 안 맡을 거라는 약속을 받았어요. 그런데 유가족들이 ‘만들어만 놓고 빠지면 되느냐, 이거 안정될 때까지는 해야 된다’고 압박해서 어쩔 수 없이 맡게 됐어요.(웃음) 10주년을 앞두고 저로서도 책임감을 느꼈고요. 이건 공개적으로는 처음 얘기하는데, 음력으로 쇠는 제 생일이 세월호 사고가 난 날이었어요. 저도 몰랐다가 2년 전에 <우리에게 아직 기억할 게 있다>는 책을 낸 뒤 단원고 2학년 3반 기억교실에 있는 그해 4월16일 달력을 보고 알았어요. 운명인가 보다고 생각했죠.(웃음)”
경기도 화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박래군은 대학교(연세대 국문과)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원고지를 늘 옆구리에 끼고 다녔을 정도로 문학 열정이 가득한 문학청년이었다. 교내 문학상 모집에 단편소설이 당선되기도 했던 그의 목표는 소설가였다. 하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은 불의한 시대는 81학번, 61년생인 한 평범한 대학생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2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에 나섰던 가슴 뜨거운 청년은 1983년 봄 학내 시위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강원도 양구 최전방 부대로 강제징집을 당했다. 1985년 여름, 제대 뒤에는 복학 대신에 아예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위장 취업한 인천의 목장갑 공장에서 같은 운동권이자 대학 동기인 송영길을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1986년 5월 서울 영등포 한미은행 점거 농성으로 구속됐던 박래군은 이듬해 6월항쟁으로 1987년 7월 가석방됐다. 여기까지는 586세대 학생운동가들이 걸은 전형적인 길이다. 그러나 박래군은 1988년 당시로서는 운동의 중심이나 주력이 아닌 인권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동생 박래전의 죽음이 계기였다. 두살 위의 박래군을 유난히 따랐던 박래전은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있던 1988년 6월4일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 있다! 군부 파쇼 타도하자”고 외친 뒤 분신했다.
―동생이 숨지기 전까지는 노동운동가가 되려고 했다고요?
“네, 그때 저의 소박한 꿈이 뭐냐 하면 노조위원장이 되는 것이었어요.(웃음)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노동 현장으로 바로 가려고 했죠. 감옥에서 다친 허리 때문에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해 할 수 없이 복학해서 잠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동생이 그렇게 되다 보니까 갑자기 유가족이 됐잖아요. 동생을 떠나보내고 방황하고 있을 때 전태일 열사의 모친인 이소선 어머니가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나오라고 권했어요. 가 보니까 활동가가 한명뿐이어서 일손을 보태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더구나 그해 10월 유가족들이 종로5가에 있는 기독교회관에서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농성을 시작했는데, 그 일을 돕게 되면서 발목이 단단히 잡힌 거죠.(웃음)”
―인권운동도 치열한 삶이지만,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과는 달랐을 것 같아요.
“혁명을 포기한 거죠. 당시에는 많은 운동가들이 5년 안에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혁명이 올 거라고 생각했고, 저도 그랬죠. 그런데 혁명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점점 알게 되면서 민주주의라도 제대로 만들자는 쪽으로 바뀌었죠.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하고 이러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속에서 생활해가니까 현실적으로 적응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10배 많은 월급이 두려웠던 까닭
유가협 활동을 하면서부터 박래군이 딛는 발걸음은 대한민국 인권운동의 역사가 됐다. 의문사와 고문 피해 등 직접적인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 시작해 장애인 복지시설의 비리와 성소수자, 비정규직 해고 문제 등 사회적 인권으로 활동의 폭을 넓혔으며, 용산 참사(2009년)와 세월호 참사(2014년) 때부터는 인권의 근원적 사안인 생명과 안전 문제까지 시선을 확장했다. 고문 피해자의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에 대해서도 국가배상을 최초로 받아낸 것,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시절 ‘인권하루소식’을 통해 각종 인권침해를 감시했던 일, 비리로 얼룩졌던 장애인 복지시설인 에바다복지회(경기 평택)와 양지마을(충남 연기)을 정상화한 일 등은 인권운동가로서 박래군이 이룬 구체적인 성과들이었다.
―인권운동가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일은 뭔가요?
“199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엔 세계인권대회였어요. 비정부기구(NGO) 참가단의 한명으로 참석했는데 거기서 제가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깨달았죠. 제일 큰 충격은 성소수자 문제였어요. 그때까지 인권을 양심수 문제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성소수자들이 노출이 심한 옷차림을 한 채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는 것을 보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어요. 또, 우리는 자기 국민을 잔인하게 죽이는 등 개인에 대한 물리적 폭력만 국가폭력이라고 생각했는데, 모욕을 주는 것도 국가폭력 범죄라는 것을 알았고요. 우리의 의문사 규모보다 훨씬 큰 인종 청소나 실종 상황 등 다른 나라의 문제를 보면서 인권 문제가 전세계적으로 상당히 중요하고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양지마을 사건도 제게 큰 교훈을 줬어요.”
―교훈이라고요?
“네. 1998년 양지마을의 쇠창살을 뜯고 거기에 짧게는 수년, 길게는 20년 가까이 갇혀 있던 300명 가운데, 퇴소를 원하는 대부분의 사람을 나오게 한 적이 있어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우리가 데리고 나왔던 사람들이 하나둘 연락이 안 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갈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귀가하는 전철에서 양지마을 출신을 한명 만났어요. 그분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박 국장님은 우리 때문에 유명해졌지만, 노숙생활 하고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우리는 뭐냐’고요. 내가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건방지고 잘못된 거라는 것을 깨달았죠. 그 후로 늘 겸허하려고 노력했어요.”
박래군은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출범과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 창립 등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 마련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의문사위원회에서 8개월 일한 것을 빼고는 늘 춥고 배고픈 현장에 머물러왔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함께 활동했던 유해정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는 “박 상임이사는 시민단체보다 10배가 많은 월급을 보고는 달콤한 유혹에 젖을까 무섭다면서 의문사위원회를 그만뒀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됐다가 시민단체로 다시 돌아온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의문사 문제 해결에 앞장선 당사자여서 의문사위원회에 가장 필요한 인물이었을 텐데 왜 그만뒀어요?
“어휴, 저는 체질적으로 공무원이 안 맞더라고요. 의문사 유가족들이 인권운동사랑방까지 찾아와서 조사3과장을 제가 맡아야 한다고 농성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활동 종료를 몇달 안 남겨둔 상태에서 들어가긴 했는데 1기가 끝나면 돌아간다는 약속을 받고 갔어요.”
―2기(2003~2004년) 때 계속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렇긴 하죠. 의문사위원회에 들어갔던 많은 사람들이 그 뒤 과거사 조사기구들이 생길 때마다 쭉 갔죠. 그런데 대부분은 결국 운동으로 못 돌아오더라고요. 시민운동 활동비보다 그런 곳의 월급이 10배쯤 높았으니까, 후진해서 되돌아오기가 힘든 것 같더라고요. 생활인인데 저에게도 여러 유혹이 있을 수 있잖아요. 국가기관이나 정치권, 여러 조건을 제시하는 기업 등에서 솔깃한 말을 많이 들었죠. 그러나 저는 동생을 떠나보내면서 했던 약속이 있거든요. 동생이 염원했던 ‘민중의 새 세상’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다짐을 지키려고 했어요. 그게 저로서는 인권운동인데,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기관 등에 들어가서 일하다 보면 활동가의 길을 걷는 것과 다른 모습이 될 것 같더라고요.”
―정치권의 영입 제안도 많았을 텐데요.
“늘 집행유예 상태여서 그런 요구를 거절하기가 쉬웠는데, 제 입장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소는 누가 키우냐는 거였어요. 정치하는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사회가 발전하려면 시민사회도 같이 성장하고 풍부해져야 하는데, 선거 때마다 시민사회 사람들이 쭉쭉 빠져나가면 안 되잖아요.”
문재인 정부엔 실망, 윤석열 정부엔 우려
그의 요즈음 최대 관심사는 차별금지법 제정이다. 시간이 나는 대로 이종걸, 미류 두 활동가의 국회 앞 단식농성장을 찾고 있다. 같은 세대 정치인이 많은 그의 임무는 정치권 설득이다. 차별금지법에 대해 정치권이 미적거리는 데 대해 그는 “정말 화가 난다”고 말했다. 지난 3월에는 역사적 인권 현장 답사기인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를 출간했다.
―박 이사님이야말로 정치를 했으면 잘했을 것 같아요.(웃음) 문재인 정부가 끝났는데, 어떻게 보세요?
“촛불집회 때 첫번째 구호가 적폐청산이었는데, 실패했죠. 그것은 셀프 개혁이었기 때문이에요. 정부 부처마다 민관 합동의 무슨 개혁위원회를 만들어놓고는 알아서 하라고 맡겨놓았거든요. 이게 합리적인 것 같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생각하면 잘못된 판단이죠. 또 하나는 문 대통령은 제왕적이긴커녕 자기가 쓸 수 있는 권한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은데도 진짜로 안 했어요.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 같은 경우도 정부 부처들이 협조하게끔 챙겨줬어야 하는데, 사참위니 검찰 특수단이니 특검이니 하면서 기다리기만 했어요. 대통령으로서는 무책임한 거였고, 더불어민주당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죠. 민주당은 정말 오만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점에서요?
“제 또래인 586들이 당의 중심이잖아요. 세상은 엄청 바뀌었고 자신들에게 다른 걸 요구하는데, 이들은 아직도 6월항쟁의 영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과거의 진보성이나 이런 것들을 다 탈각한 채 기득권화돼서 시민들이 내로남불이라고 비판하는데도 자기들만 모르고 있어요. 지난 5년간 대통령선거부터 지방선거, 총선까지 국민들이 다 밀어줬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남 탓만 하고 있잖아요.”
―같은 세대로서 586 정치인에 대해서는 마음이 더 착잡한 것 같군요.
“제가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거 되게 자제하는데, 말을 해야겠어요.(웃음) 586들이 과거에 목숨 걸고 독재와 싸웠고, 그래서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뤘다는 것은 혼자 자랑거리로 갖고 있으면 되지, 그걸 내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80년대 운동을 자산으로 삼아서 정치적 지위를 확보했음에도 크게 바꾼 게 없잖아요. 불평등은 심화됐고, 혐오와 차별도 늘었고, 정치 수준은 떨어졌죠. 차별금지법만 해도 지역의 목사들만 의식하지 지난번 대선 막판에 결집했던 20대 여성들은 보지 못하고 있어요.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고 봐요. 586 정치인 중 한명인 김영춘 전 의원이 물러난 게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후배들이 일할 수 있게 물러나 주는 게 맞죠.”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요?
“정말로 검찰공화국으로 갈까 걱정스러운 측면들이 있죠. 근데 그동안 국민들의 인권의식이 높아져서 강압적인 힘으로 지금까지 성취된 것을 되돌리려고 하면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가 증명하잖아요. 촛불이 재연되리라고 쉽게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방식이든 저항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불행해지는 상황이 올 수 있죠.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 가진 사람들 편드는 정치를 할까 걱정이죠.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공약이나 정책이 잘 안 보이거든요. 더 걱정스러운 것은 사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같은 정치인들이죠. 대놓고 혐오 정치를 하는 건데, 저게 왜 가장 큰 문제인가 하면, 혐오에 용기를 주는 거거든요.”
‘래군 형’의 기약 없는 진짜 꿈
그는 아직도 인권운동 쪽에서는 “래군 형”이라고 불린다. 늘 낮고 힘든 현장에 머무는 운동의 맏형을 향한 존경이 담긴 호칭이다. 그의 소망은 ‘활동가 은퇴, 소설가 시작’이다.
―오래전부터 나이 60이 되면 운동 일선에서 은퇴하겠다고 얘기했는데, 결국 은퇴를 못 했군요.
“제가 약속을 또 못 지킨 거죠. 지난해 6월 진짜로 은퇴하고 후배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려고 했는데, 또 잡혀오고 말았어요. 지금 일이 정리는커녕 늘고 있어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와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 가해지는 손배·가압류 문제를 풀려는 ‘손잡고’ 상임대표, ‘열린군대를 위한 시민연대’ 공동대표 등 너무 많아요.(웃음)”
―요즘 기준으로는 아직 젊은데, 왜 은퇴하려고 해요?
“운동 사회도 혁신과 물갈이가 필요하거든요. 나름 시대정신을 업그레이드해왔지만, 변화를 못 좇아가는 것 같아요. 우리 세대가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제 중심을 옮겨줘야 해요. 후배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주고 지원 역할을 해야지, 우리가 앞장서서 끌고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가 뭔지는 알지만, 그런 문제를 풀어갈 전략이나 방도에 대해서는 고민만 많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바뀌어야죠. 그래야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운동도 새로워질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어느 산골짜기에 가서 텃밭 가꾸면서 그동안 못 했던 글쓰기를 하고 싶고요.”
공감하면서도, 열악한 운동 현실이 떠올라 그의 꿈 실현에 선뜻 손들어 주지 못했다. 이달 말 정년을 앞두고, ‘래군 형’에게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 고잔역으로 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