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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길, 유럽의 길 (한겨레,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2022-01-28)

새벽길 2022. 2. 2. 20:17

 


[세상읽기] 일본의 길, 유럽의 길 (한겨레,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2022-01-27 18:03)
며칠 전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 언론인이 물었다. “‘코로나19’가 터지고 일본에서는 총리가 자조(自助)-공조(共助)-공조(公助)를 표방하면서 공(公)의 역할이 최하 순위로 밀렸는데, 한국 시민들은 공(公)의 역할을 계속 주장했고 정부도 이를 수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차이는 한국 사회의 어떤 특성에서 비롯되는가?”
그가 언급한 총리는 아베 정부에서 약 8년간 내각 관방장관을 지내다가 2020년 9월부터 1년 남짓 총리를 했던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를 말한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코로나19에 직면한 일본 사회가 ‘개인적 노력(自助)이 우선하고 지역사회 단위의 공조(共助), 정부 안전망(公助)의 적절한 조합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당시 입헌민주당 등 일본 야당들은, ‘정부 책임을 방기하고 팬데믹에서의 생존을 온전히 개인에게 떠넘기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원래 일본에서 공조(共助)라는 말은 시민사회의 협동과 연대라는 의미로 폭넓게 쓰였다. 그런데 1980년대 일본 사회의 고령화가 본격화되면서 복지부담 축소에 방점을 둔 이들이 개인과 가족의 ‘자조’(自助)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1994년 후생노동성이 내놓은 정책문서에서, 앞서 언급한 ‘삼조의 적절한 조합’이라는 표현이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당시만 해도 ‘적절한 조합’에 우선순위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2001년 출범한 고이즈미 정부와 1차 아베 정부를 거치면서 자조 우선의 주장이 정부 정책기조로 자리를 잡았다. 2010년 일본 자민당은 새 강령을 발표했는데, ‘자립, 자조하는 개인을 존중하고, 그 조건을 정비함과 함께 ‘공조(共助)·공조(公助)’하는 시스템을 충실하게 한다’고 명시하여 자조 우선 원칙을 공식화했다. 이런 흐름 위에 스가 총리의 정책 기조가 놓였던 것이다.
‘코로나19’ 검사비를 공공재정으로 해결하는 한국과 개인이 모두 감당하는 일본의 모습은 확실히 대조를 이룬다. 현재 일본 사회의 시선에서, 무료검사를 정부 방역정책의 기본으로 만든 한국 시민사회의 어떤 특성이 궁금했을 수 있겠다. 그런데 과연 한국 시민사회는 충분히 강한 것일까?
지난해 말 국제통화기금(IMF) 발표에 따르면, 선진 35개국 평균 정부 채무 비율은 121.6%였고 우리나라 정부 부채는 그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51.3%였다. 선진국 정부들이 전례 없는 빚을 내어 가계의 어려움을 덜었던 반면, 우리는 반대로 갔다. 덕분에 정부 채무는 양호한 대신 가계부채가 급증했다. 각자도생, 스가 총리의 언어로는 ‘자조(自助) 우선’ 사회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
‘코로나19’를 대면하는 동시간대 또 다른 모델은 유럽이다. 2021년 11월부터 유럽의회는 유럽연합 전 국가를 대상으로 한 ‘공정한 최저임금’ 논의를 본격화했다. ‘공정한 최저임금’이란 2017년 유럽연합 이사회, 집행위원회, 유럽의회가 함께 채택한 ‘유럽 사회권 규약’(European Pillar of Social Rights)에 근거를 둔 것으로,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 아닌 ‘존엄한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임금’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규약’은 ‘공정하며 잘 작동하는 노동시장’을 목표로 유럽연합 각국 정부들이 보장해야 하는 시민들의 사회적 권리를 20개 원칙으로 명시했다. 2021년 5월에는 유럽연합 정상들이 모여 기후위기, 팬데믹, 인구감소, 산업구조의 디지털화가 야기하는 위기에 맞서 ‘규약’의 이행을 강제할 ‘행동계획’을 채택했다.
대전환의 위기에 대응하는 유럽연합의 목표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강한 사회적 유럽’이다. 정부가 제도와 재정으로 급변하는 노동시장 내 시민적 권리를 강화하여 새로운 노동시장 규범을 확립하고 변화된 노동시장에 부합하는 복지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시민들 스스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강한 사회적 인프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공조(公助)가 후순위로 밀린 공조(共助)가 아니라, 정부와 정치가 변화하는 시장에 맞는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주체가 되겠다는 것이다.
사회는 저절로 강해지지 않는다. 변화를 추구하는 시민과 이를 제도, 사업, 재정으로 변환해낼 수 있는 정치가 조응할 때 비로소 강해질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