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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차라리 의사에게 파격 혜택을 (오찬호, 2021.03.08)

새벽길 2021. 3. 8. 19:55


오찬호의 글은 공정성, 능력주의 등이 공공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잘 드러낸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3080300045&code=990100
[시선]차라리 의사에게 파격 혜택을 (경향,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2021.03.08 03:04)

병원의 대기실에는 전공의 진료거부 당시의 유인물이 여전히 붙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서울에 와서 진료가 가능한데, 지역에 근무할 의사를 배출할 공공의대가 왜 필요하냐는 내용을 보면서 작년의 불쾌감이 다시 떠올랐다. 오죽했으면 마음까지 먹고 서울로 가야만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사회현상을 이토록 오만하게 해석하기도 쉽지 않다. 대형병원에서 전국에서 몰려든 환자를 마주할 때 들어야 하는 생각은 ‘여기로 오지 못하는 사람은 괜찮을까?’가 상식인데, 그 똑똑한 사람들의 눈에 세상의 불평등 따윈 보이진 않나 보다. 그러니 ‘아플 때 치료 못 받은 적 있나요?’라는 거만한 문구를 적은 팻말을 들었던 것 아니겠는가. 의사를 만나면 절부터 하라는 메시지로 대중의 호응을 바라다니, 이렇게 똑똑하지 못한 투쟁을 본 적이 없다.


당시 의사들의 소통은 경악할 수준이었다. 공공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공공을 조롱하는 뻔뻔함은, 이들이 평소에도 그렇게 대화를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공공의대가 공공의료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타인을 설득시킬 생각은 없고, 본디 공공이란 천한 것이니 고귀한 자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준 차이가 난다는 식의 혐오를 뱉으면서 여론이 동정적이고 우호적이길 기대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래도 된다고 보고 자랐을 거다. 장담컨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계층 간 이동과 구성원들끼리의 계층 차이가 거의 없는 집단이 의사 아니겠는가.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세대 간, 세대 내 모두 일치하니 자신들의 의견이 집단지성이라고 여기고 공공이란 말만 들어도 포퓰리즘 운운하며 빈정거리는 걸 정의라고 우긴다.


여기에 ‘공부한다고 죽는 줄 알았다’라는 유사한 과거인식은 자신들 너머의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게끔 한다. 의사가 되는 과정이 힘들다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도, 이들은 자꾸만 자신들의 입으로 말하고 인정받으려 한다. 피똥 쌌다는 말을 할수록, 공동체를 자신들과 자신들보다 공부를 못한 이들로 수직 구분하는 편협성은 커진다. 시야가 위아래로만 형성되니, 자신들의 영역이 수정되어 사회가 보다 평등해지려는 정책을 역차별이라면서 발끈한다. 똑똑하지 않은 자는 지혜롭지 않다고 굳게 믿으며, 똑똑한 게 지혜로움을 뜻하진 않음을 몸소 증명했다고나 할까.


밑도 끝도 없이 자신들 고생한 이야기부터 하려는 이들의 강박을 마주할 때마다, 그 고충을 획기적으로 줄일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장학금이니, 국립대니, 공공의료 의무복무자니 등 여러 갈래를 만들어 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입학전형이 무엇이든, 사립대든 아니든 의사를 꿈꾸는 자를 풀코스로 사회가 책임지면 좋겠다. 교육 비용만이 아니라, 생활비도 전문의 될 때까지 팍팍 지원해주고 전공의들의 노동환경도 모든 걸 동원해서 확 달라지도록 해야 한다.


황당한가? 대중을 상대로 의료를 행하는 사람들이 ‘뼈 빠지게 고생한 나는 너희와 달라!’라고 생각할수록 세상은 황당해진다. 인류가 기득권에 맞선 투쟁을 통해 정립한 공공(公共)의 개념을 조롱하는 의사 집단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제어할 방법은 ‘내가 잘나서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니지’라고 자신의 과거를 해석하게끔 유도하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