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대안사회, 대안이론

이행전략과 대안체제에 대한 고민의 중간 보고 (장석준, 2006. 9)

새벽길 2007. 3. 24. 18:31
장석준 동지가 쓴 글 중에서 주요한 부분만 옮겼다.
  
이행전략과 대안체제에 대한 고민의 중간 보고

200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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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다음의 글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글에 대한 요약 발제문입니다.
- 「최근의 사회화 정책 논의와 한국 사회에서의 그 적실성」, 연세대 사회학 석사 논문, 2001.
- 「국가」, <전진>(준) 창립 1주년 기념 심포지엄 발표, 2005.
- 「민주주의」, 위와 같음.
- 「21세기의 현실 대안 - 사회주의」, 미발표, 2006.
    
1. 이행전략․대안체제 논의에서 주체 형성 전략의 중요성 (석사논문)
  
○ 발표자가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한 것은 1970년대 스웨덴의 임노동자기금안(보다 정확히 말하면 ‘마이드너안’이라고 불리는 그 원안)과 영국 노동당의 ‘대안경제전략’(AES)의 일부였던 국민기업위원회(NEB)안이었다. 특히 집중적으로 논의한 것은 후자였다. NEB는 전통적 국유화 방식의 한 변종이기 때문에 이제는 낡은 유산이 아니냐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NEB의 실현을 강력하게 주장한 당시 영국 노동당 내 좌파(Bennite Left)는, 이와 함께, ‘국가의 변형(transformation)’에 대한 문제의식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낡은’ 국유화론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말 일은 아니다. 국가를 여전히 중요한 이행의 진지로 보되, 최소한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의 국가론(국가‘장악’론)은 넘어섰던 것이다. Bennite Left의 국가론은 동시대의 좌파 유로코뮤니스트들(N. 풀란차스 등)의 국가론과 맥이 닿는다.
   
마이드너안과 NEB안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두 방안 모두 주체 형성 전략의 문제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이었다. 마이드너안에서 그것은, 제조업에서 90% 가량의 높은 조직률을 보이면서 스웨덴형 계급타협 체제(렌-마이드너 모델)의 모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던 노동조합운동(LO)을 임노동자기금 소유와 운영의 주체로 상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LO가 소유와 운영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노동조합 간부들이 좌지우지한다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개별 기업의 LO 조합원들이 해당 기업 내에서 주식 지분을 활용해 경영에 주도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NEB안의 경우에 주체 형성 전략은 국가기구 바깥에 주된 진지를 구축하면서 또한 국가기구 안팎에 걸쳐 투쟁하는 사회운동 세력들로 나타난다. 이른바 ‘in and against’ 전략이다. 윌슨-캘러헌 노동당 정부에서는 이 구상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1980년대의 노동당 좌파 런던광역시정부에서는 상당한 실제 사례들(GLEB의 설립과 활동, 민중 참여 도시 계획 등)을 보여주기도 했다.
   
○ 분명히 단언한 것은 주체 형성 전략을 그 핵심적 구성 요소로 포함하지 않는 대안체제․이행전략 논의는 불구의 논의에 불과하다는 ‘강한’ 주장이었다. (이것은 뢰머 류의 시장사회주의 구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주식 투자의 권리를 민주화하라고 요구하는 모종의 ‘사회주의’가 과연 대안적 정치 이념으로 실체화할 수 있을까?)
  
2. 가장 최근의 고민들 (2006년 미발표 논문)
    
1) 역사유물론의 재구성
   
○ 석사학위논문에서 주체 형성 전략의 고민이 사회주의의 모든 이론 체계 안에 전면화돼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Socialist Register 편집진(L. 파니치, G. 앨보, S. 긴딘 등)이 제시하는 ‘능력’(capacities 혹은 capabilities) 개념에 주목하였다.
  
○ 이러한 문제의식을 새로운 사회주의 이행 이론에 완전히 포섭해야 한다.
  
“이제 ‘생산력’ 개념은 주인공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보다 더 넓은 맥락의 ‘사회적 능력들’(social capabilities)에 대해 사고해야 한다. 사회적 능력들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란 생산력의 경우에 비해 그렇게 쉽지 않다. 서로 장르를 달리 하는 다양한 능력들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좁은 의미의 생산력을 비롯해서, 조직화의 능력, 지식 생산과 소통 능력, 윤리적 능력 등등이 포함된다. 말하자면 그간 시민사회론의 관심 대상이 되었던 영역들을 적극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 ‘사회적 능력’의 문제설정에 대한 또 다른 자극은 A. 센의 발전 이론에서 비롯된다. 그는 롤스 등의 분배 중심의 평등론에 대해 능력(abilities) 중심의 평등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민중의 능력들을 최대한 함양한다는 관점에서 ‘사회 발전’을 바라본다. A. 캘리니코스를 비롯해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센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데, 사실 이러한 우호적 대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애당초 맑스의 윤리학의 핵심에 이러한 능력 중심의 관점(아리스토텔레스주의)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능력’의 문제설정이 이행전략․대안체제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창조적 논의의 가능성들을 열어준다.
  
“사회적 능력들에 대한 주목은 사회주의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여 풍요롭게 만든다. 한 번의 정치권력 획득이나 경제성과의 극대화 과정이 곧 대안 사회의 건설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진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민중들의 역량이 새로이 그리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어떠한 혁신적인 민주주의 장치도, 어떤 사회주의 경제 모델도 작동할 수 없다.
    
우리는 사회적 능력들이 단순히 누적적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 사회적 능력들의 상당한 부분은 세대마다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각각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민중들의 역량을 깨워낼 끊임없는 정치적 시도들이 필요하다. 숙명론이든 낙관주의든 진화주의가 끼어 들 여지는 없다.
    
더구나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민중들의 역량을 해체하려 한다. 신자유주의는 그 최악의 형태다. 신자유주의는 노동계급이 확보한 능력들의 사회적 토대(진보적 계급타협 체제, 보편적 복지제도 등등)를 허물어뜨린다. 그리고 대중들 사이의 윤리적 능력을 파괴한다(농촌 공동체의 최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열,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개심 등등). 사회주의운동은 자본주의로부터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인수하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공격으로부터 희망의 씨앗들을 살려내는 데 우선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결국 이러한 논의는 우리를 ‘개혁’과 ‘혁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이끈다. 이제 개혁은 자본주의의 성장의 과실을 노동자․민중의 것으로 전취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일상 속에서 자본주의에 대항해 민중들의 역량을 복원하고 재형성하며 새로운 사회적 능력들로 접합하려는 시도들이어야 한다.
  
또한 혁명은 일회적 권력 장악을 뛰어넘는 훨씬 복잡한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핵심은 사회적 능력들의 놀라운 성장 과정이다. 사회적 능력들의 발전에는 비약이 있을 수 없지만, 그 ‘점진적’ 발전의 속도가 얼마나 ‘급진적’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낡은 사회를 지탱하던 결정적인 고삐들이 풀리면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21세기에도 혁명은 여전히 현안이다.”
    
2) 21세기형 보편적 복지
○ 이행전략․대안체제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은 예나 지금이나 ‘보편적 복지’의 구축에 있다고 본다. 또한 그래서 현재 한국의 좌파 정치에서 사회민주주의(‘복지국가 세우기’라는 그 좁은 의미에서)와 사회주의의 중첩이 정세적으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 기존의 복지국가들에서 계승할 부분은 계승해야 한다. 그 핵심이 기본적 사회서비스의 탈상품화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의료․교육․주택이 뜨거운 현안이다.
    
○ 문제는 연금․실업보험 등의 복지제도에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구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제도는 항상 임노동 관계의 보완으로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었고 존립할 수 있었다. 즉 ‘복지’는 ‘(임)노동’의 잔여였다.
    
○ ‘기본 소득’ 구상에 주목하고 동의하는 기본적 이유는 바로 위의 문제의식에 있다. 어떻게 ‘잔여로서의’ 복지를 넘어서 그야말로 ‘보편적인’ 복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시민들의 소득을 피고용 노동의 결박으로부터 떼어내 다양한 시민 활동들과 연동시키는 ‘기본 소득’ 구상이 그 대략의 방향을 보여준다.
   
“우리는 보편적 복지를 구축할 새로운 제도적 틀로서 ‘기본소득’(Basic Income) 구상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기본소득이란, 모든 성인 시민들에게 소득의 주요 구성 부분으로서 일정액의 현금을 지급하자는 제안이다. 공적 부조와 사회보험으로 이원화된 기존의 복지체계와는 달리 기본소득제도는 전체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일원적 복지체계다. 또한 누구나 임노동관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일정한 소득을 확보하게 되기 때문에 고용과 복지 사이의 강한 연계가 해체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짜 점심’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의 수혜는 일정한 사회적 활동의 수행과 연동된다. 여기에는 고용 노동 외에, 공적 인정을 받는 다양한 시민적 활동들, 즉 이윤 창출보다는 공동체 기여에 초점을 맞춘 사회적 기업 활동, 지역사회에 필요한 돌봄 노동, 창작과 학습 활동 등이 포함될 것이다.”
    
○ ‘기본 소득’ 제도를 통해 피고용 노동 외의 다양한 시민 활동들이 자립적 기반을 갖게 된다면 이는 공식 경제와는 구분되는 또 다른 생활권(圈)의 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LETS 등을 예로 들기는 했지만, 핵심은 코뮌주의의 단초가 등장한다는 데 있다. 이런 식으로 아나키즘과 자율주의, 생태주의의 문제의식을 포섭할 필요가 있다. 자율주의 등의 문제점은 자본주의 전반의 이행 가능성과 전망을 시야에서 지운 채 코뮌주의적 주체의 형성만을 주장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바로 지금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코뮌주의의 맹아를 북돋워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경청할만하다. 이런 문제의식이 대안체제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통합되어야 한다.
    
3) 시장을 넘어 - 참여 계획
K. 폴라니의 고전적인 지적처럼 시장은 어쨌든 사회 전체의 틀에 끼워 맞춰져야 한다. 자본주의의 극복은 시장이 사회의 부속품 중 하나로 그 제 자리를 찾는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영국의 좌파 경제학자 P. 데바인이 제시하는 ‘참여 계획’ 모델이다. 참여형 계획경제의 기본 발상은 명령형 계획경제과는 ‘다른’ 계획경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모델에서는 시장이나 명령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의 참여와 협상을 통해 집중적 경제 결정과 분권적 경제 결정 사이의 균형을 달성한다.
    
한편 데바인은 ‘시장강제’(market forces, ‘시장제력’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다)와 ‘시장교환’(market exchange)을 구분한다. 상품의 단순한 판매 및 구매 행위는 시장교환에 해당한다. 반면 시장강제는 생산 및 투자 결정이 사후에 원자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의 이 두 가지 차원 중에서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낳고 사회의 다른 부분들로 하여금 시장에 종속되게 만드는 것은 시장강제다. 참여 계획 모델에서는 시장교환은 잔존하지만 시장강제는 새로운 사회 관계들로 대체된다.
   
경제 활동의 주요 단위는 각급 계획위원회와 협상조정기구 그리고 생산단위들이다. 그런데 이 기구들은 모두 동일한 구성 원리를 갖는다. 그것은 해당 기구로부터 영향을 받는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이 기구의 결정 구조에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권역별 계획위원회를 예로 들어보면, 권역 자치단체의 대표자뿐만 아니라 중앙 계획위원회의 대표자, 권역 내 생산단위들의 대표자, 협상조정기구의 대표자, 이해당사자 집단들의 대표자 등이 참여한다는 식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에 해당하는 각 생산단위(Production Unit)도 마찬가지다. 생산단위의 소유 형태는 일단 사적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소유다. 그런데 그 지배구조는 과거의 사회주의 공기업처럼 단순하지 않다. 생산단위의 지배구조는 일반 이익을 대변할 계획위원회나 협상조정기구의 대표자, 지역사회의 이해를 대변할 이해당사자 집단의 대표자, 소비자․서비스 사용자들을 대변할 소비자연합이나 유관 생산단위․협상조정기구의 대표자, 그리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생산 단위 내 노동자의 대표자와 초기업단위 노동조합의 대표자, 이 4가지 요소로 복잡하게 구성된다. 각 생산단위의 생산 활동의 기본 목표는 바로 이 지배구조를 통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된 목표들의 구체적 실행 과정에서 노동자 자주관리가 이뤄진다.
  
경제계획의 대강을 수립하는 것은 각급 계획위원회(Planning Commission)의 몫이다. 중앙 계획위원회는 일국 차원의 자원 배분의 총계획을 짠다. 여기에는 주요 신규 투자의 결정이 포함된다. 가격 지표가 사용되지만, 이것은 더 이상 시장가격이 아니다. 중앙 계획위원회가 비용에 기반해서 1차재의 가격을 결정하면 여기에 중간재들의 가격을 더한 게 최종재의 가격이 된다. 중앙 계획위원회의 계획 수립은 권역별․지역별 계획위원회의 참여와 각급 계획위원회들 사이의 조정을 통해 보다 세밀하게 보완된다.
  
하지만 이 모델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협상조정기구(Negotiated Coordination Body)다. 참여 계획 모델에서는 시장교환이 잔존한다. 소비재 시장이 작동하며 소비자의 선택권이 존재한다. 생산단위 간의 경쟁도 존재한다. 따라서 소비재 시장의 수요 변화나 생산단위 사이의 효율성 차이에 따른 생산 조정이 필요하다. 생산단위들의 대표자와 각급 계획위원회의 대표자, 지역 이해당사자 및 노동자․소비자의 대표자 등이 협상조정기구를 구성해서 서로 간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바로 이 조정 기능을 수행한다. 즉, 자본주의에서 시장강제로 해결되던 것이 이제는 협상조정기구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또한 협상조정기구는 명령형 계획경제에서 불가능하던, 경제 활동의 역동적 조절을 가능하게 만든다. 현실사회주의에서는 중앙 관료들의 계획 목표 설정이 대중의 실제 욕구들(needs)을 반영해야 할 필연적 이유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공급 측면의 독재였다. 그러나 참여형 계획경제는 그렇지 않다. 시장경제만큼이나 역동적으로 수요에 따른 조정이 이뤄진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비해 소비자의 권한이 확대된다. 소비재 시장에서 선택권을 행사해 양적 정보를 제공하는 외에도 각종 경제 결정 단위의 참여를 통해 질적 정보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바인의 참여 계획 모델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그 정치학이다. 대안적 경제체제는 그에 걸맞는 새로운 행위 양식의 확산과 정착을 요구한다. 새로운 사회를 운영할 사회적 능력들이 형성돼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대안체제 모델은 대안적인 행위 양식이 민중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만들 계기를 모델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명령형 계획경제는 이것을 결여하고 있었다. 반면 참여 계획 모델에서는 민중들이 협상조정을 비롯한 분권적인 결정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새로운 행위 양식을 발전시킨다. 제도의 이행과 주체의 변화, 사회 관계의 변화와 사회적 능력들의 형성이 함께 이뤄지는 것이다.
   
많은 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데바인은 “사회적 위기조차 학습의 과정”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시장 중심의 행위 양식은 결국 새로운 민주주의의 행위 양식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 데바인의 ‘참여 계획’ 모델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대안체제 모델 안에 주체 형성 전략의 고민이 전면적으로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데바인은 이를 ‘이행의’(transformatory) 정치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참여 계획 모델에도 난점이 있다. 협상조정 행위에 처음부터 자본주의 시장의 모든 기능을 떠맡길 수 있겠냐는 의문이 그것이다. (R. 블랙번은 참여 계획 모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 점을 의문으로 제시한다. R. Blackburn, “Fin de Siécle: Socialism after the Crash”, New Left Review, no. 195, 1991[국역: 「동구권 몰락 이후의 사회주의」, R. 블랙번 편, 몰락 이후, 김영희 외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4].)
 
아마도 참여 계획 모델로 이행하기 이전에 이미 참여와 협상을 통해 경제 활동을 통제하는 전통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어야 모델이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D. 엘슨의 ‘시장의 사회화’ 모델을 참여 계획으로 나아가는 과도기 전략으로 고려할 수 있다. 이 모델에서는 가격임금위원회(Price and Wage Commission)라는 기구가 시장을 통제하여 가격 및 임금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공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 공유의 바탕 위에서 다수의 경제적 결정이 사회적 협상 과정의 성격을 띠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과도적 조치를 통해 협상조정의 사회적 능력들을 배양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 이행 경로
자본주의 내의 구조개혁 투쟁 → 결정적 단절 국면 → 낮은 단계: 엘슨의 ‘시장의 사회화’ 모델과 같은 → 높은 단계: 데바인의 ‘참여 계획’ 같은 (→ 더 높은 단계?: 마이클 앨버트의 PARECON 같은?)  
  
참여형 계획경제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당면 실천 과제들
첫째, 금융의 공공성 강화가 시급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첨병인 금융자본부터 굴복시켜야만 경제활동 전반에 대한 사회적 통제 능력을 형성할 수 있다. 은행 중심의 금융제도를 정착시켜야 하고, ‘신용관리위원회’ 같은 공적 통제 기구를 설립해야 한다.
  
둘째, 이해당사자 기업 모델을 확산해야 한다. 기업의 지배구조에 노동자․소비자․연관업체․지역사회 등 이해당사자들(stakeholders)이 참여해야 한다. 이해당사자 기업은 참여 계획 모델에서 지향하는 사회적 기업의 맹아적 형태가 될 것이다.
    
셋째, 경제 활동 전반에서 노동자․민중의 참여를 북돋고 협상을 통한 결정을 확대해야 한다. 자본 소유자와 엘리트들의 ‘전제 왕국’으로 남아 있는 수많은 영역들이 사회에 개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당면 과제들은 소위 ‘라인형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우는 세력과도 만나는 부분이 많다. 이들과 사회주의운동 사이의 정책적 연대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 Stakeholder Economy론의 ‘이해당사자 기업’이나 민주노동당 강령의 “민주적 참여기업”은 ‘참여 계획’ 모델에서의 ‘사회적 소유 기업’의 맹아적․과도적 형태로서 일정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4) 변혁의 정치적 전망
  
○ 이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자원들이 무엇인지 밝힌다면,
- 제2인터내셔널 내의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 논의들:
개혁주의의 입장에서의 접근 - J. 조레스
혁명주의의 입장에서의 접근 - 로자 룩셈부르크
- 코민테른 내의 선진국 혁명론의 고민들: 
V. I.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 - 하나의 유치한 혼란
초기 코민테른과 L. 트로츠키의 ‘과도 강령’ 개념
A. 그람시의 옥중수고
- 좌파 유로코뮤니즘:
이탈리아 공산당의 잉그라오 좌파, <선언> 그룹
N. 풀란차스의 만년의 국가론(국가, 권력, 사회주의)
  
- 1970년대 신우파․신좌파 격돌 시기의 사례들:
영국 노동당의 벤 좌파 
칠레 아옌데 인민연합 정부
  
- 1980년대․90년대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제한적 실험들:
영국 런던광역시정부(GLC)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
인도 케랄라의 참여분권 실험
  
- 라틴아메리카의 최근 사례들: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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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현실 대안 - 사회주의
1. 들어가며
  
이 글에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 사회 혹은 그것을 추구하는 이념․운동’이라는 좀 느슨한 의미로 쓰일 것이다. 즉, 자본주의의 잠정적․부분적 개선에 치중하는 시도들과는 달리 탈자본주의의 전망을 분명히 하는 대안들을 뜻한다.
 
2. 왜 지금 사회주의인가?
첫째, 자본주의의 외적 확장은 곧 그 내적인 긴장과 갈등을 무시하고 방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본주의 중심부에서부터 대규모의 프롤레타리아화 경향이 작동하게 만들고, 계급투쟁을 격화시킨다. 
 
둘째, 폭력적인 외적 확장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경계선에서 격렬한 저항을 낳는다. 저임금 착취 지역, 자원 약탈 지역 그리고 아예 문명의 바깥 혹은 타자로 배제되는 지역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단순히 인간들만이 저항하는 게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가장 거대한 수탈의 대상인 지구 생태계의 저항이다.
 
셋째, 중심부 자본의 경쟁적인 확장 과정은 중심부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군사적 긴장으로 이어진다. 급기야 몇 개의 지역(regional) 블록들이 등장하고 블록간의 경제적 마찰은 쉽게 전쟁 상황으로 비화할 수 있다. 그것이 반드시 지난 세기처럼 열강 사이의 세계전쟁일 필요는 없다. 인간의 자기파괴 방식은 무궁무진할 정도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가장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위기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금융자본 운동의 모순이 폭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위기는 미국이 갖고 있던 그 나마의 주도권마저 붕괴시켜 열강간의 긴장을 전례 없이 강화할 것이다. 다수의 하위국가들이 생존의 위협에 처하고 세계 곳곳에서 파시즘과 같은 극단적인 정치적 선택들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이런 와중에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 이상 기후 같은 생태계 재앙이 폭발하는 것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불러오는 ‘역풍’은 이번에는 인류에게 새로운 선택의 기회마저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3. 새로운 사회주의 대안의 밑그림
  
1) 역사유물론의 재구성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다음의 글에 표현된 M. 뢰비의 구상과 가깝다. M. Lövy, “The Centrality of Self-Emancipation. For a Critical Marxism”, Against the Current 1997 Nov/Dec[국역: 「비판적 맑스주의에서 자기해방의 중심성」, <읽을꺼리> 3호, 카피레프트모임, 1998(http://copyleft.jinbo.net)].
     
이제 ‘생산력’ 개념은 주인공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보다 더 넓은 맥락의 ‘사회적 능력들’(social capabilities)에 대해 사고해야 한다. (‘능력들’(capacities)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기한 것은 캐나다의 좌파 연간지 Socialist Register의 편집자들인 L. 파니치, S. 긴딘, G. 앨보 등이다. L. Panitch and S. Gindin, “Transcending Pessimism: Rekindling Socialist Imagination”, Socialist Register 2000: Necessary and Unnecessary Utopias, Merlin Press, 2000; S. Gindin, “Socialism ‘With Sober Sense’: Developing Workers' Capacities”, Socialist Register 1998: The Communist Manifesto Now, Merlin Press, 1998[국역: 「‘냉정한 의식’을 지닌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능력을 발전시키자」, B. 까갈리쯔끼 외, 선언 150년 이후, 카피레프트모임 옮김, 이후, 1998]) 사회적 능력들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란 쉽지 않지만, 여기에는 좁은 의미의 생산력을 비롯해서, 조직화의 능력, 지식 생산과 소통 능력, 윤리적 능력 등등이 포함된다.
  
사회적 능력들에 대한 주목은 사회주의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여 풍요롭게 만든다. 한 번의 정치권력 획득이나 경제성과의 극대화 과정이 곧 대안 사회의 건설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진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민중들의 역량이 새로이 그리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어떠한 혁신적인 민주주의 장치도, 어떤 사회주의 경제 모델도 작동할 수 없다. 
   
사회적 능력들의 상당한 부분은 세대마다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각각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민중들의 역량을 깨워낼 끊임없는 정치적 시도들이 필요하다.
   
더구나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민중들의 역량을 해체하려 한다. 신자유주의는 그 최악의 형태다. 신자유주의는 노동계급이 확보한 능력들의 사회적 토대(진보적 계급타협 체제, 보편적 복지제도 등등)를 허물어뜨린다. 그리고 대중들 사이의 윤리적 능력을 파괴한다(농촌 공동체의 최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열,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개심 등등). 사회주의운동은 자본주의로부터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인수하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공격으로부터 희망의 씨앗들을 살려내는 데 우선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결국 이러한 논의는 우리를 ‘개혁’과 ‘혁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이끈다. 이제 개혁은 자본주의의 성장의 과실을 노동자․민중의 것으로 전취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일상 속에서 자본주의에 대항해 민중들의 역량을 복원하고 재형성하며 새로운 사회적 능력들로 접합하려는 시도들이어야 한다.  
  
또한 혁명은 일회적 권력 장악을 뛰어넘는 훨씬 복잡한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핵심은 사회적 능력들의 놀라운 성장 과정이다. 사회적 능력들의 발전에는 비약이 있을 수 없지만, 그 ‘점진적’ 발전의 속도가 얼마나 ‘급진적’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낡은 사회를 지탱하던 결정적인 고삐들이 풀리면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21세기에도 혁명은 여전히 현안이다.
    
2) 21세기형 보편적 복지
  
사회주의운동의 첫 번째 과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것은 민중의 생존권 확보다. 한 사회의 집합적 능력을 평가하는 기다란 목록에서 가장 첫 번째는 역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다.
      
기존의 복지국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어받아야 할 것은 기본적 사회서비스의 탈상품화다. 의료, 보육, 교육 등의 공적 관리와 무상 공급은 결코 후퇴할 수 없는 원칙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주택 공급 체계의 혁명적 재편이다. 부동산 시장은 과감히 축소해야 하고, 신규 건설을 통해서든 공공 매입을 통해서든 공공임대주택이 대폭 늘어나야 한다. 
  
서유럽 복지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전개한 것은 S. 드 브뤼노프. S. de Brunhoff, The State, Capital and Economic Policy, Pluto Press, 1978[국역: 국가와 자본, 신현준 옮김, 새길, 1992].
      
그런데 이제 상황이 복잡해졌다.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실업이 증가하자 고용과 복지 사이의 연계가 더욱 노골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른바 ‘근로복지’(work-fare)의 등장이다. 근로복지론자들은 공적 부조 대상자들을 주된 공격 대상으로 삼아 이들이 불안정 노동시장의 바다에 뛰어들도록 등을 떠민다. 한데, 문제는 불안정 노동시장이 확대되면 될수록 고용과 소득 보장 사이의 관계는 약해진다는 것이다. 임노동의 속박은 강화되는 반면, 소득은 더욱 불안해진다. 임노동관계에 종속된 복지체계로는 생존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보편적 복지를 구축할 새로운 제도적 틀로서 ‘기본소득’(Basic Income) (혹은 Guaranteed Income, Citizen's Income이라고도 한다. 기본소득에 대한 토론으로는, E. O. Wright(ed.), P. van Prijs et al. Redesigning Distribution: Basic Income and Stakeholder Grants as Alternative Cornerstones for a More Egalitarian Capitalism (The Real Utopia Project, Vol. 5), Verso, 2006; J. Cohen and J. Rogers(eds.), P. van Parijs et al. What's Wrong with a Free Lunch?, Beacon Press, 2000 등이 있다. 국내의 논의로는, 성은미, 「새로운 사회적 권리로서의 기본소득」, <사회복지와 노동> 5호, 2002;  윤정향, 기본소득의 도입 가능성 연구,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2002 등이 있다.) 구상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기본소득이란, 모든 성인 시민들에게 소득의 주요 구성 부분으로서 일정액의 현금을 지급하자는 제안이다. 공적 부조와 사회보험으로 이원화된 기존의 복지체계와는 달리 기본소득제도는 전체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일원적 복지체계다. 또한 누구나 임노동관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일정한 소득을 확보하게 되기 때문에 고용과 복지 사이의 강한 연계가 해체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짜 점심’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의 수혜는 일정한 사회적 활동의 수행과 연동된다. 여기에는 고용 노동 외에, 공적 인정을 받는 다양한 시민적 활동들, 즉 이윤 창출보다는 공동체 기여에 초점을 맞춘 사회적 기업 활동, 지역사회에 필요한 돌봄 노동, 창작과 학습 활동 등이 포함될 것이다.  
  
이는 역으로 공식 경제와는 구분되는 또 다른 생활권(圈)으로서 ‘연대 경제’(Solidarity Economy 혹은 Solidarity Economic Sector)가 등장하게 만든다. 연대 경제는 공식 경제가 어떤 식으로든 물려받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부채들(자연의 수탈, 인간의 소외 등)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역이다. 여기서는 맑스가 이야기한 ‘자유의 영역’(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시간)이 공동체적 인간 관계와 서로 만난다. 또한 자본이나 관료기구의 매개에 의존하지 않고 민중 자치가 가장 직접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연대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공식 화폐와는 구별되는 지역적 교환체계의 실험들(예를 들어, LETS)을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제도가 시행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규모의 재정이 필요하다. 결국 그 재원은 고율의 누진과세로 충당하는 수밖에 없다. 즉, 공적인 조세 능력의 확대와 보편적 수당의 지급을 통해 새로운 분배 통로가 열리는 것이다. 그 재분배 규모는 이제까지의 그 어느 복지국가도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일 것이다.
    
자본가․부유층으로서는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과거의 복지체계를 유지하는 대신 불안정 고용을 축소․폐지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의 유연화를 고수하는 대신 기본소득 같은 구상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남는 것은 노동자 가구의 소득 하락과 끊임없는 생활 불안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다수 민중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길이다. ― 바로 이러한 선택의 상황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정치적 쟁점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 이것이 21세기 사회주의자들의 가장 긴급한 과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기본소득형 복지체계를 정착시키는 계기로 연금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의 ‘수정’적립방식의 국민연금을 부과 방식으로 바꾸고 모든 은퇴 후 시민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 수당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성은미, 「연금개혁 : 노령수당 도입 검토 필요」, 진보정치연구소 홈페이지(www.ppi.re.kr), 2006. 그래서 이를 기본소득제도로 나아가는 첫 단계로 삼아야 한다.
    
3) 시장을 넘어 - 참여 계획
   
4) 변혁의 전망
   
일단 집권 자체는 선거를 통해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전투는 오히려 집권 이후에 시작된다. 새 정부의 급진 개혁 정책은 한편에서는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중들의 전례 없는 자각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기득권층과 민중운동의 대결은 국가기구의 여러 부분들 사이의 마찰과 충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변혁 세력은 국가기구 내의 주도권을 둘러싼 이 투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국가는 ‘변형’되어야 한다.
 
이 투쟁의 승리의 열쇠는 민중운동을 통해 등장할 다양한 민중 자치의 진지들이 쥐고 있다. 민중 자치의 거점들이 굳건한 연결망을 형성해서 민중 권력의 토대로 부상해야 한다. 민중 권력이 새로운 국가권력의 구심이 될 때 국가의 변형 과정은 한 매듭을 짓게 된다.    
    
이러한 변혁 과정이 성공하려면 집권 이전부터 노동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성장해 있어야 한다. 또한 좌파정당(들)이 강력한 대중 기반을 지닐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과 긴밀한 연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일국적 변혁의 성공을 뒷받침할 국제적 상황의 변화를 함께 추진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요건들을 구비하는 게 지금부터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주된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결론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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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현실 대안 - 사회주의」(장석준)에 대한 논평 
곽노완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1. 총평
   
「21세기의 현실 대안 - 사회주의」는 장석준 연구기획국장의 석사논문 「최근의 사회화 정책 논의와 한국사회에서의 그 적실성」(2001)에 비해 ‘사회주의적 사회화’에 관하여 보다 진전되고 구체화된 지점들을 보여준다.
    
‘생산력’ 개념을 ‘사회적 능력들’로 확장‧재구성하는 시도가 그렇고, 전체 시민의 ‘보편적 복지’ 내지 ‘기본소득’을 사회적 활동과 연동하여 ‘연대 경제’를 구상하는 시도도 마찬가지다.  ‘참여 계획’이라는 데바인의 모델을 수용하여 ‘시장’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는 특히 돋보인다. 이는 주체의 변화, 사회적 능력들의 형성과 재생산이라는 측면이 결부되어 있는 기획이다(9쪽 참조). 이는 장석준 기획국장의 다른 글 「민주주의」에서도 확인되는 문제의식이다. 그곳에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니는 하나의 ‘체제’(system)로서 작동할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다”(장석준, 「민주주의」, 23쪽)라고 쓰여 있다. 더구나 그는 이러한 대안사회의 민주주의와 주체형성 시스템은 단지 ‘집권’ 또는 ‘변혁’이후의 과제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훈련되어야 할 과제로 본다(같은 곳 참조). ‘지금 여기’란 당과 노동조합, 지방자치제를 비롯한 민주적 제도라고 한다(같은 곳 참조). 이는 “당과 대중운동이 그 안에 대안 사회의 모습을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한다”(같은 곳)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곧 이행 이후의 시스템이 이미 ‘이행과정 내지 이행 준비과정’에 미리 훈련되고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미 석사논문에도 깔려 있었다. 석사논문에서는 오히려 그런 문제의식의 과잉으로 인해, ‘짧은 시일 내 실행가능성’이 주체와 사회주의를 재생산하는 사회주의적 사회화 시스템에 대한 고려를 유보시키거나 미루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의 글 「21세기의 현실 대안 -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국가」는 이행 이후의 사회주의적 사회화 시스템과 이행기 전략이 통합되어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 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진전을 감안할 때, 2주전에 논평자가 장석준 기획국장의 석사논문과 그 전의 글 「보다 건설적인 사회화 방안 논의를 위하여 - 기금을 통한 사회화 안의 비판적 검토」(김성구 편저, 사회화와 이행의 경제전략, 2000, 이후)에 대해 한 비판은 상당부분 시효 말소되었다. 그곳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장석준의 제안의 핵심은 “민주적 공공부문론의 정책들을 중심에 두면서 연금기금 사회화론의 중요한 정책적 함의를 가미하는 것”(장석준 2001, 113)이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조돈문이 제안한 우리사주조합 중앙기금 또한 노동자계급 내 사회주의적 사회화의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장석준 2001, 115 참조). 여기서 민주적 공공부문론이란 노동자들이 기업의 경영을 주도하면서 이용자 조직 등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자는 것이다(장석준 2001, 114 참조).
하지만 한국에서 지방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지방 ‘공기업’이 얼마나 되고 또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감안하면, 실현가능하더라도 극히 제한된 효과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의 글은 전체적으로 거대담론에서 시작하여 국지적이고 미시적인 대안으로 축소되는 경향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첫 번째 문제점이 있다. 사회화론의 담론은 당장의 실현가능성을 감안한 정책대안이라는 측면도 중요하지만,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에게 진보정치의 중장기 전망을 제시하고 그럼으로써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의 주체형성과 정치적 연대를 촉진하는 요소도 있는 것이다. 이는 특히 진보정당이 주체역량을 고려한 제한된 당장의 개혁정책에 매몰되지 않고, 중장기 전망을 개발하고 선전해야 함을 함축한다. 그럼으로써 주체역량자체도 증대하는 것이다.
   
둘째의 문제는 그의 연기금 사회화론 자체에서 발견된다. 그는 노조가 자신의 산업정책을 갖고, 노조 전국조직이 연기금을 통제할 주체로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앞의 책, 99-100). 그리고 그렇게 되면 연기금 사회화의 충분조건이 되는 양 견해를 피력한다. 하지만 이는 실현되더라도 노조상층간부가 주도하는 주식투자와 경영자임명의 범위를 넘어서기 힘들 것이다. 만약 노조상층간부가 관료화되어 있거나 보수화되어 있을 경우 사회주의 이행전략의 일부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역효과가 더 클 것이다. 연기금 사회화의 중점은 오히려 연기금이 대주주를 차지하는 기업들의 노동자에게 경영자 선출권을 부여하며 연기금이 대주주인 기업들의 노동자들이 연대할 수 있는 제도와 기제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연기금이 대주주인 기업들의 이윤 전액을 연기금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다시 블랙번이 말하는 노동자와 민중을 위한 보편수당(장석준 2001, 77 참조), 투자기금, 사업성과에 따른 노동자별 분배기금으로 분할하는 제도와 기제의 창출 등이 그것이다. 이는 연기금이 대주주인 기업들의 사적 주주들에 돌아가던 이윤배당을 박탈하여 노동자들과 민중들에게 분할하는 기제를 통해 노동자들이 제한적이나마 하나의 통일된 생산자연합체의 성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제는 노동자계급과 사회전체성원들의 민주주의와 연대를 촉진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기제는 주식회사제도를 최대로 이용하면서 자본주의 내에서 사회화를 극대로 확장하여 사회주의적 사회화로의 이행을 위한 시초축적의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기제가 제도화되면 연기금통제의 주체가 누가 되더라도 연기금 사회화와 기업경영의 민주화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의 사회주의적 사회화로의 발전경향을 가로막기 힘들 것이다.
    
국가별로 약간의 차별성은 있지만 자본주의적 연기금 납입은 노동자와 기업 내지 국가가 각각 노동자별 소득의 일정비율을 분담하는 체계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소득이 높을수록 퇴직 후 받게 되는 연금의 액수도 비례해서 커진다. 이는 소득이 높은 노동자일수록 그만큼 기업과 국가로부터 많은 복지혜택을 받으면서 사회성원들의 불평등이 확대되는 역복지의 전형적인 제도인 것이다. 사회주의적 사회화의 시초계기로서 연기금 사회화는 이러한 역복지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마땅히 포함해야 할 것이다. 연기금 사회화는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전체사회성원의 연대를 최대한 촉진하는 기제로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관련된 영역이 있다. 네그리 등 후기 자율주의자들이 제창하는 보편수당제도(그들의 용어로는 무조건적 보장소득)는 “필요에 따른 분배”의 원리가 꼬뮨주의의 고차적 단계에서 만이 아니라 1 단계에서도 사회주의적 사회화의 원리의 한 축을 형성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자본주의에서조차 이는 분배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생산에의 기여라는 측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전병권, 「인지자본주의의 문제설정」, <진보평론> 27호, 2006 참조).
보편수당제도는 프랑스 등에서는 부분적으로 실행되고 있고, 독일에서는 최근 주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도 수년 내 사회적 의제로 떠오를 수 있다. 블랙번이 지적한 바 있는 보편수당제도는 연기금과 결합된 것이지만, 사회주의적 사회화는 퇴직자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성원이 균등하게 보편수당을 받는 체제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는 연기금이 보편수당제도로 통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금 사회화 단계에서 연기금의 분배문제는 점차 보편수당을 지향하는 형태로 해결되어야 하고 이는 연기금 사회화론에서 누락되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2. 비판의 지점들
1) ‘기본소득’과 ‘연대 경제’ 구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독립된 화폐들을 갖추고 자기완결적인 지역 공동체들이 전체사회의 연대로 발전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보장할 수 없는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지 않을까? 사회주의는 휴머니즘을 포함하지만 동시에 휴머니즘을 넘어서야만 재생산되고 확대될 수 있다. Croall의 ‘지역교환거래체계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LETS’는 “인간의 얼굴을 한 돈의 세계” 곧 휴머니즘의 세계로 그려지고 있다(7쪽 주10) 참조). 휴머니즘으로 축소된다면 사회주의는 그저 비현실적인 ‘바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다양하고 완결된 소규모 지역 공동체들’이 전체 사회적인 ‘사회주의’로 확장되는 것은 너무나 아득한 길이고 그 자체마저도 만성적인 재생산의 위기에 처하기 십상일 것이다. 만약 이행전략의 차원에 국한하여 LETS가 기획된다하더라도 다양한 지역 공동체들은 상이한 원리와 상이한 화폐들을 갖춘 자기완결적 공동체들이 아니라 동일한 교환수단과 재생산 시스템을 갖춤으로써 공동체들의 연결망이 확장될 때만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제도가 사회주의적 사회화의 계기가 되려면, 그 경제적 원천은 전체 사회의 직접 경제성과의 일정비율이 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제도는, 각자가 자신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사회전체의 능력을 제고하는 성과에 따른 보상과 경제적 투자와 성과의 사회화를 동시적으로 발전시키는 전사회적 축적기금의 시스템을 통해서만 유지되고 확대재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곧 사회적 소유에 기초하여 기업의 투자뿐만 아니라 성과도 단일하게 ‘사회적 축적기금’으로 통합하고, 사회의 여러 공제기금을 제외한 다음 기업성과의 일정비율은 전체사회성원의 기본소득으로 그리고 일정비율은 축적과 투자기금으로 또 다른 일정비율은 성과에 따른 노동보상금로 분할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누진과세를 통한 사회민주주의적인 소득재분배정책과 다른 것이다. 곧 사후적 직접세를 원천으로 하는 기본소득제도가 아니라 사전적 기본소득권을 확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생존권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이미 사회전체성원이 직간접적으로 생산에 기여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기본권이다. 따라서 세금을 통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노동소득과 동등한 권리의 관점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고, 이는 경제적 성과의 일정비율이라는 지속적인 원천에 기초할 때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소득은 사업성과에 따른 소득과 각각 일정비율로 분할되기 때문에 각자 사업성과에 따른 소득을 제고하려는 노력이 결과적으로 사회전체성원의 기본소득을 제고하게 되는 시스템이다.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부유층의 조세저항과 반발을 초래하지도 않게 된다. 나아가 보수정권이 들어서도 쉽게 폐기시킬 수 없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행기에는 아직 사적인 자본주의적 기업들이 존재할 것이지만, 연기금과 금융자본‧공기업 등을 사회적 축적기금으로 통합함으로써 기본소득제도를 시작하고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행기에는 사적 자본의 금융부채를 출자로 전환시키는 방식을 통해서 사적인 자본의 사회적 소유로의 전환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며, 대주주로 등장한 사회적 축적기금의 ‘자본주의적’ 권한을 통해 해당 기업의 노동자경영권을 제도화하고 사회적 축적기금의 체계로 완전히 통합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석준 연구기획국장의 기본소득제도 구상은, 소득재분배 정책이 아니라 이러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일부로 자리매김 될 때만 사회주의적 사회화의 재생산과 확장에 기여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2) 참여 계획의 문제점
장석준 연구기획국장의 ‘참여 계획’ 구상은, 적어도 사회적 소유로 전환된 모든 기업들의 생산과 투자를 사전에 ‘계획’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계획’, ‘자본주의=시장’이라는 고전적 대당을 전제하는 구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적어도 기업단위에서 ‘계획’을 내포할 수밖에 없고, 자본주의 국가도 ‘계획’을 필수적인 요소로 할 수밖에 없다는 흔한 비판은 섣부른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사회화된 부분에 대한 전반적인 ‘참여 계획’이 갖게 될 문제점에 국한된 비판이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이는 지배적인 생산관계와 경제적 조정시스템으로서 ‘시장’과 ‘계획’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사회화의 중심적인 시스템이 되어서는 안되고 새로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사회화의 시스템’으로 대체되며 그 시스템의 종속적인 영역으로 제한되어야 함을 뜻한다.
 
‘참여계획’이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중심 ‘원리’ 또는 ‘시스템’이 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고 힘든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기업별 계획과 사회전체의 계획 간의 불일치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것이다. 장석준 연구기획국장은 데바인에 따라 각급 계획단위와 중앙계획단위 소비자 등등을 포함한 협상조정기구을 통한 조정을 답으로 제시한다(8-9쪽). 기업의 대표뿐만 아니라 사회성원전체는 해당기업에서도 기업을 벗어나는 범위에서도, 전국을 망라하는 협상조정기구에서도 ‘계획’을 위한 회의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계획’을 위한 회의는 인터넷을 통한 화상회의라고 해도 1년에 한번씩 만이 아니라 경제여건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곧 계획을 위해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할애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노동시간을 초과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 하더라도 조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곧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통해 사회능력을 고양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각종 계획의 입안‧조정‧수정에 개인을 옭아매는 사회주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구상으로 인해 실제로는 현실사회주의의 명령적 계획경제가 일반화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물론 ‘참여 계획’에 대한 구상은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만사에 대한 전체 사회성원의 ‘계획’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전체 사회성원의 ‘참여 계획’은 교육, 의료 등 공적 영역, 생태계의 재생산 등 전체사회적인 문제에 국한될 때 효과도 극대화되며 사회의 연대성을 높이고 사회성원의 민주적 능력을 제고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참여는 의무가 아니라 권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각 기업별 생산과 투자는 협상조정기구에 의해 조정될 필요 없이 해당 기업의 노동자들과 이해당사자들에게 위임되는 시스템이 나을 것이다. 물론 기업이 사회적 소유이며 투자와 사업성과가 전체사회의 축적기금에 기인하고 귀속하는 한에서, 연성예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일정기간 지속적으로 사업성과가 마이너스를 기록하면 사업철수나 사업축소 등 사후적 조정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지만. 이러한 조정시스템은 굳이 협상조정기구나 계획을 위한 전체사회성원의 회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정시스템이 제도화되면 충분할 것이다. 여기에 기업별로 사업성과에 대한 일정비율의 보상이 추가되면 자본주의적 기업보다 오히려 경제적 창의성과 혁신을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사회적 소유가 아닌 기업도 점차 사회적 소유로 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아가 경영자를 해당기업의 노동자들과 이해당사자들이 직접 선출하고 소환하는 시스템을 제도화한다면 생산의 정치‧민주화도 극대화되는 효과를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사회적 소유 기업에서는 이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착취는 폐절된다. 대주주인 전사회적 축적기금이 주식회사의 권한을 이용해 배당을 0으로 만들고 임금과 이윤을 모두 축적기금에 귀속시킨 다음 이중에서 일정비율만큼 성과에 따른 노동보상으로 지불할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이윤과 임금은 모두 사라지고 착취는 소멸한다. 더구나 이는 이행 이후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집권하게 되면 헌법개정 없이도 실현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신용이 사라지고 개별기업의 투자가 전사회적 축적기금으로부터의 공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업의 손실은 있을지언정 파산과 연쇄부도사태는 소멸되어 신용에 입각한 사회적 재생산의 급격한 중단 곧 ‘공황’도 사라진다. 이러한 시스템은 기업간 교환과 거래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비자시장을 남겨둔다는 점에서 시장을 지속적으로 잔존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시장은 축소될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시장의 지배적 특성은 소멸된다. 우선 무엇보다도 노동력이 더 이상 상품이 아니고 시장을 통해 거래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채용은 각 기업에 일임되지만, 기업이 문을 닫게 될 경우 해당기업의 노동자는 필요할 경우 직업훈련을 이수하여 다른 기업에 배치된다. 한편 자본주의사회에 고유한 그리고 1970년대 초중반 이래 신자유주의적으로 확장된 사적소유의 자본영역은, 그것이 사회전체성원의 기본적인 필요의 영역이면 거래와 교환의 영역이 아닌 무상공여의 영역으로 전환시킨다. 여기에는 교육, 의료, 건강, 통신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은 특정 사적 자본이 전사회적 부를 독점하는 시스템인 주식회사제도와 신용제도 등 금융시장이 폐기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시장의 영역이 대폭 축소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사회적 소유 기업간 거래는 사업성과를 측정하기 위해서 유지하지만 단일한 사회적 축적기금내부의 거래이므로 자본주의적 시장과는 달리 이윤획득의 수단이기를 그친 새로운 ‘사회적 시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장은 축소되고 성격이 변화된 채로 ‘사회주의적인 사회적 생산과 유통시스템’에 종속된 부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되는 것을 함의한다.
    
이렇게 되면 시장이 두려워 ‘계획’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계획’도 자본주의나 현실사회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중앙집권적 명령경제의 성격을 탈각하고 바뀐 채로 곧 ‘참여 계획’으로 유지되면서, ‘사회적 축적기금 시스템’과 나란히 그리고 그것을 보완하고 촉진하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사회화의 한축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여 계획’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전일적이고 지배적인 원리가 된다면, 이는 ‘연대와 창의성’이라는 사회주의의 기획을 억압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인터넷 등 통신수단이 기술적으로 아무리 발전하여 계획을 위한 시간이 획기적으로 감소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참여 계획’을 통해 창의성과 혁신을 보장할(잘 될 수도 있지만) 시스템은 확보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전일적인 ‘참여 계획’을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지배적인 원리로 간주하는 장석준 연구기획국장의 구상은 많은 시사점을 주지만, 민주적인 ‘참여 계획’이 모든 경제적 문제를 최선의 결정으로 이끌게 되리라는 보장되지 않은 ‘믿음’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3) 조직과 운동의 대표자들에 의한 통제 vs. 생산의 정치
  
사회주의 또는 이행기의 경제 전략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주체형성과 주체의 사회적 능력을 재생산하는 장이기도 해야 하기 때문에, ‘참여 계획’이 아니더라도 사회주의 또는 이행기의 경제전략이라면 ‘생산의 정치‧민주주의’라는 차원에서 반드시 제기되어야 하는 논점이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장석준 연구기획국장의 논의는 모순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계획의 주체는 노동자들과 민중 전체가 아니라 ‘각종 조직과 운동의 대표자들’로 국한되고 있기 때문이다(8-9쪽). 예를 들면 노조 전국조직의 대표자의 연기금 관리위원회에의 참가나 이를 통한 연기금 소유기업 통제 등등에서 드러나듯이(「최근의 사회화 정책 논의와 한국 사회에서의 그 적실성」, 99쪽 등 참조). 개별적인 대표자들의 능력과 가용시간을 과도하게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비현실성뿐만 아니라, 이러한 구상은 민중들 주체의 변화와 사회적 능력 형성이라는 자신의 문제의식과도(9쪽) 상충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연기금이 대주주로 있는 기업의 경영자는 누가 선출하는가? 노조 전국조직 대표 등이 참가한 연기금 관리위원회에서 임명하는 것을 구상하는 것인가? 아니면 연기금이 해당 기업의 노동자들에게 경영자 선출권을 위임하는 시스템인가? 또 각종 각급의 대표자들만이 참가하는 계획조정기관은 각급 조직의 대표자들만의 폐쇄된 밀실회합이 되는 것을 방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터넷 등을 통한 여론형성과 수렴이라는 현대의 자본주의적 조건에도 못 미치는 대표자들만의 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 노동자들을 포함한 대중들의 민주적 사회 능력의 형성과 향상이라는 문제의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구상이다.
   
회의와 조정은 최선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소수의 대표자 회의라도 과연 합의를 이룰 수 있을까? 이는 하버마스처럼 민주적 토론이 합의를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맑스(주의)적 관점은 오히려 아무리 해방된 사회주의 사회라도 루만식의 타협조차 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은 이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통한 설득과 다수결 의사결정이 가능한 것을 함의한다. 하지만 이도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사결정을 위한 시한이나 권위가 강제되지 않는 한 그리고 다수결 결정이 아닌 한 토론은 어떠한 결정도 못 내리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전일적 ‘참여 계획’을 힘겹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지점은, 대표자들의 회의를 통한 ‘참여 계획’은 대중의 주체형성이나 사회적 능력의 향상에 거의 영향을 못 미치는 구상이라는 점이다. 대표자들에 의한 통제는 오히려 새로운 관료화의 가능성으로 통하기 십상이다. 자본주의적 관료화와 다른 점은 단지 관료적 주체가 자본가계급이나 전문 정치꾼‧행정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나 민중들의 상층 대표권자라는 점만 다를 것이다. 그러한 계획은, 대표자들을 비록 노동자들이나 민중들이 선출하고 소환한다고 해도 대중의 사회적 능력을 향상하는 데는 제한된 역할만을 할 것이다. 오히려 모든 대표자들을 해당 조직의 성원들이 직접 선출‧소환할 뿐만 아니라 결정권을 해당자들 전체에게 상당부분 이양하고 나아가 시스템에 맡기는 것이 대표자들의 자의적 영역을 줄이고 사회전체성원들의 능력과 사회적 시스템의 강화를 동시에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참여 계획’은 따라서 전체사회적인 영역을 제한하면서, 대표자들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성원이 참여하는 개방된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결정방식은 토론과 논쟁에 이은 다수결방식일 수밖에 없다. 생산의 정치는 노조 전국대표에 의해 각 기업의 대표자가 임명되는 방식이 아니라, 각 기업의 노동자들이 해당대표자를 선출‧소환하고 스스로 경영자이자 노동자이며 전체사회적 생산을 결정하는 주체가 되는 사회주의적 생산자로서의 영역을 확장하는 시스템을 통해서만 달성될 것이다. 
  
3. 마치며
  
이상의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장석준 연구기획국장의 사회주의 연구성과는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경제전략에 대한 논의를 원리적인 수준에서부터 현실적인 출발점까지 결합시켜 내고, 노동자계급과 다중의 연대를 강화시킬 기본소득제도와 그 외에도 노조의 지역사회와의 연대 등의 구상을 정식화해내며 경제전략을 주체형성과 재생산의 정치와 결합시킨 점은 국내외 연구성과를 높은 수준에서 총괄적으로 소화하고 재구성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