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대안사회, 대안이론
새사연 - 노동 중심 통일 경제연방론 [사회개혁위기 대안모델 ②]
[사회개혁위기 대안모델을 찾는다 ②] 노동 중심 통일 경제연방론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07-03-05 오후 08:10:43)
경제성장의 동력 사람이 희망이다
» 손석춘 / 박세길 /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원장 손석춘·이하 새사연)의 박세길(새사연 부원장)·김병권(새사연 연구센터장)·정희용(새사연 미디어센터장)씨 등 연구자들이 내놓은 대안 모델은 ‘노동 중심 국민경제론’과 ‘통일 경제연방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줄여서 말하면 ‘노동 중심 통일 경제연방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학생운동 출신자로 사회단체에서 활동하거나 벤처기업 경영 경험 등을 쌓았다. 대학 석·박사 등의 제도권 교육보다는 집단 학습과 토론을 통해 나름의 대안을 마련했다.
자본에 떠밀리는 ‘노동력’ 생산활동 중심에 세워야, 남북 통일땐 완결성 갖춰
이들이 말하는 ‘노동 중심 경제’는 기존의 사회주의 경제와도 다르고 서구 사회민주주의 경제와도 다르다. 기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구 사회민주주의는 노동 주도권을 충분히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동 중심 경제론과 차이가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노동 중심 경제론은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지만 노동자가 생산활동에서 중심 구실을 하는 경제 시스템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새사연은 한국 경제가 1987년 이전 국가 주도형에서 1987년 이후 자본 주도형으로 이행했다고 본다. 박정희 체제로 대표되는 국가 주도형 경제체제에서 한국은 고도 성장을 이뤘지만, 그 원동력은 노동자에게 있었다는 것이 이들의 견해다.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가져온 요인이 교육받은 양질의 노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이 국가 주도형 모델이 더는 작동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자본 주도형으로 넘어간 것인데, 자본 주도형 경제에서 한국 경제의 성장 원동력이 깎여 나가고 있다고 이들은 진단한다. 따라서 대안은 노동 주도형 경제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동 중심 경제에서 말하는 노동은 자본소득이나 불로소득에 의존하지 않는 모든 근로 계층을 다 아우르는 말이다. 이들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며, 이들이 경제의 중심에 서야 한다. 노동의 발전이 경제의 성장을 이끈다는 것이 노동 중심 국민경제론의 핵심이다.
경제성장의 동력을 노동에서 찾는 이들은 유한킴벌리 사례를 중시한다. 유한킴벌리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이 유행할 때, 단 한 명의 직원도 줄이지 않고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인력을 더 늘리는 ‘뉴 패러다임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로 현장인력이 33% 늘어나고 일인당 작업일수는 연간 180일로 줄었지만, 인건비 증가를 뛰어넘는 높은 생산성 향상을 이루어냈다. 해고불안을 없애고 줄어든 노동시간을 직원 교육에 할애한 것이 더 큰 성과를 낸 것이다.
이들의 또다른 제안은 ‘통일 경제 연방론’에 있다. 노동 중심 국민경제가 통일 민족 경제를 이루어낼 때 완결성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각각 고립되어서는 최적의 상태를 이루어낼 수 없다고 이들은 말한다. 많은 비용을 강요하는 분단체제를 극복함으로써 한반도 경제권을 구축할 때 남과 북이 유기적 관계를 맺고 경제 활력을 키울 수 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내수 시장이 확대되며 자립 경제의 자원이 확보되고 남·북 기술 협력으로 경제 도약을 이룰 수 있다고 이들은 전망한다. 남북 경제 연방은 단순한 경제협력을 넘어 남과 북이 각각 장점을 결합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내고 더 나아가 중국·러시아를 포함한 북방경제블록을 주도적으로 창설할 수 있다. 남과 북이 경제 통합을 이루면 남쪽의 경제와 북쪽의 경제가 서로서로 블루오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노동의 창의성이 경제 발전을 주도하고 한반도 차원에서 경제 연방으로 경쟁력을 키우면 남과 북이 통일 강국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비전이다.
» 노동중심 통일 경제연방론
한계와 보완할 점
소유권 문제 모호…구체성도 결여, ‘통일 경제’ 북 붕괴로 이어질 수도
‘노동 중심 통일 경제연방론’은 새사연이 지난해 발간한 책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시대의창)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이 구상은 경제 발전 동력에서부터 남북 경제 공동체 전망까지 비교적 일관성 있게 설명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보완할 지점도 남아 있다.
김호균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새사연이 말하는 ‘노동 중심론’에 소유권에 대한 연구가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새사연의 노동 중심 경제론은 종업원 지주제 형태로 나타나는 노동자의 주주 참여를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은 채로 노동의 경영 참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렇게 소유권 문제가 모호해서는 노사의 대등한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종업원들이 지분을 충분히 확보할 때 능동적으로 경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통일 경제 연방론도 그 과정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독일 통일 경험으로 볼 때, 통일경제가 자칫 잘못하면 북한 경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 경제가 남한의 경제력에 압도당하지 않고 서로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안전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석훈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경제학 박사)은 노동자 중심으로 기술 혁신을 이룬다는 새사연의 노동 중심 모델에 ‘구체적 방법’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었다.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 때 등장한 벤처산업론을 확장한 것이어서 보편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또 통일 경제 연방론이 북한을 대등한 파트너로 일으켜세우기보다는 내부 식민지로 포섭할 가능성이 있음을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남·북의 평화라는 관점에서는 진보적인 내용이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북한을 노동과 시장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노동주도형 국민경제 모델
신자유주의가 앗아간 한국 경제 10년
본 연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하 새사연)의 경제 분야 대안 모델 ’노동중심 국민경제론’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인 대안 소개에 앞서 1997년 이후 지난 10년간 진행된 ’경제 개혁’ 과정을 돌아봄으로써 신자유주의 개혁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과 한국 경제의 현실을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모든 연재글은 <새로운사회를여는상상력>(손석춘 외, 2006.6)의 내용을 요약해 기사 형태로 재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대한민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와 제도적 개혁이 순식간에 추진되었다. 나라 전체가 국가 부도만은 넘겨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에 빠져있는 사이 정부와 관료 집단이 변화와 개혁의 방향을 정해 밀어붙인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IMF 이전과 이후의 경제 시스템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생겼다. 비단 경제 시스템만이 아니다. 경제 생활 패턴과 우리의 의식까지도 엄청나게 변했다. 단적인 예로 ‘평생직장’ 개념이 완벽하게 사라졌으며 국내 주식시장의 외국인 주식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1997년 말 14% 미만이던 국내 증시의 외국인 보유주식 비율이 2004년 말에는 40.1%로 대폭 늘어났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핀란드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개혁의 명분 아래 진행된 숱한 개혁에도 우리의 경제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아니, 오히려 기존의 문제점은 더욱 심화되고 전에는 없던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났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기준 아래 추진한 경제 개혁의 결과물이 아닌지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해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무너진 경제순환구조와 수출신화
한국경제는 IMF 이후 자본시장이 자유화되었고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사회적, 국가 산업적 기능을 포기한 채 자체 수익성만을 중시하는 시장적 경영으로 돌아섰다. 노동시장 자유화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많은 공기업들이 빠른 속도로 민영화되었다. 한 마디로 더 이상 비시장적으로 움직이는 부문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는 시장 질서에 따라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을까?
수치로 볼 때 수출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2005년 수출은 2,847억 달러를 기록함으로써,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고 전년 대비 수출 증가율은 2003년 19.3%, 2004년 31%에 이어 2005년 12.2%로 3년 연속 두 자릿수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수출의 증가가 곧 한국경제의 안정성과 건전성을 표현하는 절대적인 지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수출이 사상 최대라지만 내수는 계속 침체되어 있다. 고용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주로 대기업이 수출을 주도한다고 할 때, 수출 대기업과 연관 또는 협력 관계에 있는 중소기업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중소기업 경기는 매년 악화일로다. 수출과 국민경제는 연관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 경제는 자본과 기술, 시장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면서 자립적인 재생산 구조를 갖추는 데 많은 한계를 드러내 왔다. 그럼에도 수출이 전체 경제의 성장을 이끌었던 것은 순환 구조를 그런대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수출이 늘어나면 설비투자와 고용이 확대되고 일자리가 늘어나며 가계의 수입이 증대된다. 그리고 이는 다시 내수의 활성화로 이어진다. 또한 투자의 확대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가격 경쟁력은 다시금 수출을 증대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러한 ’선순환 구조’가 비교적 안정된 추세를 보였던 것은 1987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해외 기술 사용료의 급증은 국내 기업의 독자적 기술 개발을 촉진했으며 이는 중소기업의 부품 공급 능력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임금 소득이 상승하면서 내수 시장의 폭발적 확대로 이어졌는데 승용차가 일반화된 것이 그 대표적인 징표였다.
이런 식으로 수출과 내수의 선순환이 이어질 때에나 수출입국(輸出立國)이란 말이 의미를 가지고 또 그걸 내세워 경제적 안정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수출의 국민경제 파급 효과가 날로 떨어지는 중이다. 1990년에는 10억 원 어치를 수출하면 46명의 고용 효과가 있었지만, 2000년에는 16명으로 10년 새 3분의 1로 고용 효과가 줄었다. 생산 공장의 해외 이전이 늘어났고 공장 자동화가 진척되어 절대적 고용 숫자가 줄어들었으며, 산업별로는 수출 주력 업종이 과거 섬유나 의류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반도체나 휴대폰처럼 고용 효과가 작은 자본집약 산업으로 바뀌는 추세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 결과다.
산업은행이 3,175개의 국내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2004년 기업재무분석’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 국내 제조업의 전체 영업이익 중에서 매출액 상위 10대기업의 비중은 46.8%로 10대 기업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포스코, SK, 기아자동차, GS칼텍스정유, S-Oil, 현대중공업, LG필립스LCD 등이다. 결국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업들은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으로 후퇴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10대 기업이 국내 제조업 영업이익의 절반을 독차지하는 현상을 두고 세계화 시대의 자연스런 현상이라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즉,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지닌 이른바 초일류 기업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되는 것이 바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향해 가는 과정이라는 식의 논리다.
그러나 이런 식의 경제 시스템은 국민경제 전체의 종합적인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는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 문제다. 즉 개별 기업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그렇게 주장한다면 모를까 국가의 경제 정책 방향으로서는 부적합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아메리칸 스탠더드 또는 자본 이익에 모든 기준을 맞추는 캐피탈 스탠더드(Capital Standard)일 뿐이다. 실제로 전 세계 200여 나라 가운데 이러한 국제 질서에서 이익을 보는 나라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몇 나라뿐이며 이들 나라조차 내부는 20대 80 이상의 심각한 양극화를 보이고 있다.
한국경제를 장악한 ’주주자본주의’의 실체
’주주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기업 경영과 시장 경제 그리고 국민경제 전체를 포함한 모든 경제활동의 목표를 오직 주주(shareholder)의 이익 극대화에 맞추는 것이다.
주주자본주의에서는 엄밀히 말하면 국민경제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주주, 즉 대자본의 이해관계가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기업 경영의 패러다임이 기업 활동을 통해 순이익을 많이 남기는 것이었다면 주주자본주의에서는 주주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으로 바뀐다. 따라서 주주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 기형적으로 발전한다. 인건비를 줄이고 인수합병으로 주가를 끌어올린다. 대량 해고를 통해 비용을 줄이면 주주에 대한 배당금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경영으로 높은 배당금을 창출하는 경영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연봉이나 스톡옵션을 받게 된다.
주주자본주의 메카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실제로 외국 자본이 한국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를 조금 더 자세히 뜯어보기로 하자. 국제금융자본은 우선 집단 부실 상태에 놓여 있던 금융산업을 가볍게 장악하였다. 그에 따라 대부분의 주요 은행들이 외국자본에 의해 잠식되고 말았다. 2004년 말 현재 국민은행 77.8%, 신한은행, 64.3%, 하나은행 65.5% 등 국내 은행의 외국인투자자 주식 보유 비율이 대체로 50%를 넘어섰으며 제일은행, 한미은행, 외환은행 등은 아예 소유권이 외국인에게 넘어갔다.
자본주의에서 은행은 산업의 젖줄에 비유된다. 외국 자본이 국내 금융기관을 거의 삼켰다는 것은 한국경제의 명맥을 틀어쥐었다는 뜻이다.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조차 금융기관에 대해서만큼은 외국 자본의 진출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문을 다 열어준 셈이다.
이어 외국자본의 손길은 제조업과 공기업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종묘, 제지의 경우는 업종 자체가 외국자본의 독과점 지배로 넘어갔다. 대기업 중에서도 2004년 말 현재 삼성전자 주식의 58%, 현대자동차의 55%를 외국인이 소유하게 되었고, SK텔레콤, 만도기계, 한라공조 등의 최대주주 또한 외국자본이다. 공기업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예를 들면 대표적 우량 공기업인 포항제철은 외국인 지분이 70%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외국계 자본이 우리 경제의 중추를 장악함으로써 한국에서 생산된 국부가 국민경제의 각 부분에 재투자되지 않고 외국자본의 이윤 회수를 통해 해외로 송출되고 있는 것이다. 2004년 외국인의 전체 배당수익은 5조원을 돌파했는데 이는 1997년 전과 비교해 열배 가량 증가한 수치다. 이 가운데 약 3조원이 해외로 송금되었다.
주주자본주의의 문제는 국부의 해외 유출에 그치지 않는다. 주주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기업의 투자 부진과 고용 악화를 일으켜 내수 시장과 노동자의 삶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는 점이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다.
대표적으로 외국인 지분율 58.1%인 삼성전자는 2004년 한 해 동안 10조원의 순이익을 거두지만 이 가운데 외국인 주주들에 대한 배당으로 1조,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사주 매수에 3조 7,920억 원을 사용하는 등 기업 순이익의 절반 가까이를 생산 활동에 투입하지 못했다. 자사주 매수는 주가 상승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크게 보면 외국인 주주들에게 고스란히 이익을 안겨준 셈이다. 나머지 이익도 경영권 위협에 대비해 사내 유보금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금융권도 주주자본주의에 앞장서는 형국이다. 리스크가 따를 수 있는 기업대출을 회피하고 주택담보대출 등 가계대출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 단적인 예다. 결과적으로 은행권은 사상 최대의 수익을 거두었으나 경제 성장을 위한 ’투자자금 공급’이라는 은행 본연의 역할은 뒤로한 채 가계부채를 급증시키며 신용대란을 조장하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한 것이다. 국민은행의 강정원 행장조차도 이런 현상을 두고 ‘국민의 자본으로 국민을 상대로 장사를 해 얻은 수익이 외국인 주주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이상한 구조’라고 토로했을 정도다.
주가 차익 실현을 통해 단기에 자본이익의 회수를 도모하는 주주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기업 인수합병과 노동자 대량 감원 등을 통해 주가를 부양시키고 빠져나가는 투기적 행태를 동반한다. 뉴브리지 캐피탈은 제일은행을 인수 후 되팔면서 1조 5000억 원의 차익을 실현했고, 골드만삭스는 진로를 인수해 되팔아 3조원의 이익을 또한 소버린 자산운용은 ㈜SK와 경영권 분쟁을 일으켜 주가상승을 유도하여 8,000억 원의 주가 차익을 실현한 바 있다.
이런 투기 행위 때문에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도 안타까운 문제다. 주주자본주의가 단기 기업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파괴적인 노동시장 유연화에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대규모 구조조정과 감원, 해고, 비정규직의 대량 양산 등은 주주자본주의의 후폭풍이라고 할 수 있다.
저성장과 양극화의 동반 진행
몇 년 째 지속되고 있는 성장률 하락은 한국경제가 처한 총체적 상황을 반영하는 결과다. 일각에서는 한국경제가 이미 초기 고성장 국면을 넘어섰으므로 성장률 하락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아직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의 일인당 GDP는 2004년 1만 4,144달러로 OECD 30개 국가 가운데 24위로 그리스, 포르투갈에 못 미치고 1만 462달러인 체코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다. G7과 비교하자면 최하위인 이탈리아(2만 8,925달러)의 절반 수준이다. 그리고 그 격차는 25년으로 평가된다. 즉 한국의 1인당 GDP는 이탈리아의 1980년 수준이라는 이야기다.
지난해 정부는 2005년 실질 성장률이 3.8%로 당초 예상치인 4%대를 밑돌 전망이라고 발표했다. 이로써 우리 경제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경제 성장률이 3년 연속 잠재성장률 5%에 미달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다. 이는 현재의 저성장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 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양이 아닌 경제의 질, 삶의 질로 선진국과 비교하면 우리는 아직 청소년기 수준이다. 한창 자라서 건장한 청년으로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뤄야 할 때에 벌써부터 저성장이 당연하다는 주장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앞으로 10년간 우리 경제의 잠 성장률이 4% 미만에 머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 조사국에서 발표한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 약화 요인과 향후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까지 10년간 잠재성장률은 정부와 민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4.0~5.2% 범위에서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와 민간이 투자확대 등 성장 잠재력 확충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못할 경우에는 성장률이 4% 미만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전의 10년(1987~1996년) 동안 우리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이 8%대를 넘어섰던 것과 비교하면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주춤거리고 있는 사이, 우리 경제를 맹렬히 추격중인 중국이 연평균 9%대, 인도가 최근 3년(2006년 현재) 연속 7%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진보 일각에서는 경제 성장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를 혐오하는 시각이 엄연히 존재한다. 마치 보수 = 성장, 진보 = 분배 이런 등식이라도 존재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 역사가 발전의 길을 걸어온 것을 인정한다면 그 이면에는 결국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토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평등이나 인권, 자유 같은 소중한 가치들도 인간의 생산능력 증대와 함께 신장된 것이다.
따라서 성장 지상주의를 경계하는 것과 성장 자체에 대해 손을 놓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민중들이 피 흘려 찾은 권리와 가치들을 옹호하고 확산시키는 동시에 생산력을 발전시켜 사람들의 물적 생활토대를 개선하고 보다 더 인간적인 생활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드는 성장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진보가 빛을 발하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지점이 있다. 그것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사회 양극화, 흔히 말하는 20대 80의 사회 구조와 함께 병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저성장으로 나눌 게 없어서 양극화가 심화되는 게 아니라 경제의 저성장이 양극화와 동전의 앞뒤처럼 짝을 이뤄 진행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우리보다 10여년 일찍 주주자본주의를 강요받았던 남미 국가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저성장과 양극화의 동반 진행은 주주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장과 분배 어느 게 우선이냐 또는 더 중요하느냐는 논쟁은 핵심을 비껴간 것이다.
결국 신자유주의로 왜곡된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경제 성장도, 양극화 해소도 이루어질 수 없다.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모델과 동력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패러다임 전환, 노동이 생산을 주도한다
새사연의 대안 경제 모델인 ’노동중심 국민경제론’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에 앞서 지금까지 한국경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 모델을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성장 동력에 대한 시사점을 얻고자 함이다.
국가 주도형 모델과 자본 주도형 모델
196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온 모델은 크게 국가 주도형 모델과 자본 주도형 모델로 압축할 수 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때로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 경제는 국가가 전면에 나서서 생산 계획과 산업 정책을 수립하고 이에 필요한 요소인 자본, 노동, 사회 간접자본시설까지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동원, 배분해 내는 시스템이었다. 이처럼 경제 전략과 주도권이 국가에 있었기에 이를 ‘국가 주도 모델’로 규정할 수 있다.
반면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는 자본이 국가의 자리를 대체해온 과정이었다. 시장 주도 모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으나 자본이 스스로의 이익을 목적으로 생산과 산업 전반을 규정하고 주도하는 메커니즘임을 감안하면 이러한 모델은 ‘자본 주도 모델’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 경제는 국가 주도형 모델 아래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산업화에 성공했지만 1980년대 중후반을 거치는 동안 자본 주도형 모델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경제 운용 기조 자체가 철저히 대자본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국가 주도형 모델 아래서는 정권의 정통성을 얻기 위해서라도 국민경제라는 틀을 유지하며 경제의 외형적 성장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주도권이 자본으로 넘어온 상태에서는 국민경제 전반의 이익이라는 개념은 사라져 버렸다. 자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특정 기업과 산업 부문의 발전에 철저히 목표가 맞춰지는 것이다.
국가 주도형 경제 모델과 자본 중심 모델 모두 우리 경제를 성장시킬 유효한 모델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대안 모델을 찾아야 할까? 역설적이지만 그 해답은 한국 경제가 지나온 발자취에서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초반 경공업에서 시작해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1980년대에는 자동차 전자산업, 그리고 다시 1990년대에는 반도체와 IT산업에 이르기까지 고부가가치를 찾아서 산업 축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던 힘은 산업의 변화와 발전을 감당할 만큼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이 존재했던 데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력을 뒷받침한 것은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강한 우리 사회의 교육열이었다. 즉, 주도를 하고 전략을 짠 집단은 당시 국가 체제를 손에 쥔 권력집단이었으나 그 이면의 동력은 노동의 질에 있었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높은 저축률이다. 고도성장 기간 동안 전체 자본 중 외국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10%를 넘은 적이 거의 없다. 이러한 가운데 고도성장에 필요한 자본 조달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높은 저축률이었다. 1987년도 한국의 저축률은 국민총생산(GNP)의 37.0%였고 이것은 거의 20%에 가까운 국민들의 개인 순저축률에 힘입은 것이다.
만일 높은 저축률이 전제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자본투입을 통한 양적 팽창이 불가능했을 것이며 교육열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단기간에 높은 생산성과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국민이 저축을 통해 경제 성장을 위한 자본을 조달해주고 허리띠 졸라매면서도 자식 교육만큼은 이를 악물고 시킴으로써 고도 산업화에 필요한 인적 재원을 공급함으로써 숨 가쁜 산업구조의 변화를 감당하며 한강의 기적을 만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성장 원동력에서 강한 자생성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 한국경제의 중요한 속성이 밝혀진다. 즉 한국 경제는 지배 구조가 대외 의존적이고 재벌 위주로 기형화되었지만 성장 원동력에서는 국민의 힘에 기초한 강한 자생성을 가지고 있는 측면, 이 양자의 모순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 주도형 경제로의 이행
한국경제 성장의 원천 요인을 노동에서 찾았다면 자본 주도형 경제인 주주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 역시 노동의 발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경제가 지향해야 할 대안 경제 모델은 노동 주도형 경제가 되어야 한다.
’노동 주도형 경제 모델’은 국가 주도 - 자본 주도 - 노동 주도로 이어지는 한국경제 진화 과정의 일부분이다. 국민적 노동의 질과 창의성을 제고시킴으로써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경제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는 경제 모델이다.
우선 개념을 정리해보기로 하자. 여기서 말하는 ’노동’의 범위는 임노동자 또는 전통적인 노동 계급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국민 가운데 대자본가, 부동산이나 자본소득만으로 살아가는 극히 일부를 제외한 일하는 국민 전체가 수행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이렇게 전통적인 계급 개념과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주자본주의로 큰 이익을 얻는 소수의 주주들, 자본소득 계층이 아닌 모든 국민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자본 주도형 경제를 극복하는 데 이해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경제는 노동자, 농민 등 기층 계급만이 아니라 자영업자, 중소기업가 모두 발전은커녕 현상유지도 어려운 상황으로서 중산층이 거의 분해되어 저소득계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약 2,500만에 달하는 취업자, 이들의 가족까지 포함해 4,800만 국민 중 거의 대다수가 자본의 발전이 아니라 노동의 발전을 축으로 하는 경제 시스템에 찬성하고 이해를 같이하게 될 것이다.
둘째, 국민경제의 발전은 어느 특정 계급의 노동 발전만으로는 부족하다. 일하는 국민 전체의 노동 조건, 노동의 질과 창의성을 높이는 것이어야 국민경제가 세계화 시대에 강력한 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다.
노동 주도는 이처럼 자본 주도형 경제에 반대하고 한국경제 성장의 원천 동력인 노동의 발전에 동의하는 범국민적 아젠다, 그리고 이를 정치권력과 경제 운영 핵심부에 정확히 반영하는 정치적 동력을 통해 주도성을 쥐게 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새 대안 경제 모델은 자본주의의 골간을 이루는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부인하지 않으며, 그런 면에서는 엄연히 자본주의 단계이면서도 그 내부에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싹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개념 정리에 이어 생산 영역의 주도성이 노동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해명해보기로 하자. 이를 위해 산업혁명 이후 생산력 발전과 노동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겠다.
산업혁명 이후 20세기 중반의 소품종 대량생산 시대까지 생산성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였다. 노동자들의 자율성이나 두뇌 사용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생산성 향상에 부차적인 요소였을 뿐이다.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기계장비가 노동보다 우위에 섰던 시대의 상징이다.
이런 시기에는 자본이 생산을 좌우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은 희소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반해서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들은 넘쳐났으며 노동 과정은 극도로 단순화, 규격화되어 기업가들의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지 부품 교체하듯이 노동력을 교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 생산능력의 향상으로 물자가 풍요해지고 기업간 경쟁이 치열해지며 기업이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추어 가야 하는 다품종 소량 생산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본이 생산에서 절대적 주도성을 발휘하던 관성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다품종 소량 생산은 처음에는 생산재나 중간재 등 비소비재로부터 도입되기 시작했으나 점차 소비재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 이미 많은 소비재 부문에서 자동화 공정에 의한 대량생산보다 소비자의 요구를 빠르게 파악하고 이를 반영한 제품을 먼저 생산할 수 있는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자본주의 세계 시장은 제품의 차별화 및 다양화 즉 ‘창의성’과 제품 개발 및 생산 시간 즉 ‘속도’를 놓고 숨 막히는 전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즉, 창의성은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기계제 대공업 아래에서 중요성이 퇴화되었던 노동의 창의성이 20세기 후반부부터는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의 창의성이 결정적 요소가 되면서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도 변화를 겪는다. 생산 시스템을 혁신하고 생산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기계 장치에서 사람의 창의성으로 옮겨지게 됨으로써 창의적 노동이 생산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개별 노동자의 책임범위와 행동 양식의 변화를 넘어서 생산 라인 전체 그리고 기업 조직 전체로 파급되고 있다.
도요타의 린 생산시스템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린 생산방식은 수공업 생산 방식과 대량 생산 방식의 장점을 결합한 것으로서 수공업 생산방식에서 오는 원가상승 및 대량생산방식의 융통성 부족을 함께 극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린 생산방식에서는 조직의 모든 부분에서 여러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다능공(多能工) 팀을 편성하며 융통성 있는 자동화기기를 사용하여 매우 다양한 제품을 적정량씩 생산하게 된다. 노동자를 개별적으로 파편화해서 작업시키는 것보다 팀을 편성하고 자율성을 주어 생산 공정 전체에 대해 파악하고 창조적으로 작업을 시킴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지식과 노동의 결합으로 한층 증폭된다. 작업자가 처음부터 기획에 참여하고 작업을 설계할 수 있을 때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고 작업 시스템을 능동적으로 개선할 수 있으며 새로운 제품 생산을 빠르게 소화해낼 수 있다. 이를 구조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기존 기능 조직을 학습 조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기업 활동도 생산을 강조하던 것에서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고 창조하는 학습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식관리시스템(KMS, knowledge management system)의 등장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데, 이는 기업내 인적 자원이 보유한 노하우와 지식을 효율적으로 축적하고 활용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결국 양보다 질이 중요한 시대가 되면서 지식기술 노동과 육체노동의 융합으로 창의적 노동이 발전하기 시작하고 수평적 관계로 인간 관계가 재편됨으로써 팀제나 네트워크처럼 자율성에 기초한 연대와 협력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노동은 이처럼 창의성, 자율성, 협력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며 노동 주도형 국민경제 모델은 이 원천 성장동력을 구조적으로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경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과 자본의 새로운 관계 모색
이번에는 대안 시스템과 현실 경제 요소들과의 관계, 특히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자본이 생산 영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 중의 하나는 희소가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의 희소가치가 사라져 가고 있다. 총량적 관점에서 볼 때 세계적으로 자본은 과잉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2005년 기준으로 시중의 부동자금만 400조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본 부족 현상을 보이는 이유는 자본 흐름이 왜곡된 결과일 뿐이다.
희소가치가 사라진 자본은 평균 이상의 이윤을 얻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한다. 적절한 투자 기회가 생긴다면 오히려 자본이 줄을 서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사업 전망이 밝은 아이디어나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창조적인 노동자들이 그룹을 지어 또는 단독으로 새롭게 창업을 시도하면서 필요한 자본을 유치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벤처기업들이 주도한 코스닥 열풍이 대표적인 사례다.
20세기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가 생산을 지배했지만 오늘날의 지식경제 시대에는 지식 생산을 하는 사람 그 자체가 생산수단이며 생산력도 사람 속에 내재해 있다. 고도의 지적, 창조적 노동이 그 자체로 생산을 조직하고 지배하는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일방적으로 자본과 생산수단에 속박되기만 하던 존재조건도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가령 지식산업은 아직 전체 산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식산업은 창의적 노동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산업 부문일 뿐, 이러한 흐름은 결코 지식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미 구(舊)산업으로 분류되는 다른 산업들로 이 같은 확산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산업의 형태와 가치 체계까지 바꿔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령 1970년대 한국 수출의 주력 산업이던 섬유나 피혁, 신발 등의 구산업은 오늘날 사양산업으로 취급되지만 여기에 창의적 디자인과 인체공학이 더해지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 된다. 한발 더 나아가 바이오 기술, 나노 기술까지 어우러지면 신소재 산업으로서의 가능성도 충분하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이탈리아의 패션, 섬유 산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일하는 사람의 지식과 창의성이 자본보다 우위의 요소가 되는 것은 특정 산업만의 현상을 넘어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산업과 경제활동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창의성에 주목하며 이를 각종 경영기법으로 발빠르게 수렴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였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변화를 생산력 발전 요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체제를 유지해가고 있는 반면 구소련 등 사회주의 진영은 이런 부분에 실패했다.
자본은 노동의 변화에 따른 생산시스템의 유연적, 조직적, 수평적 변화를 단행했고 기업의 지식정보 인프라를 먼저 확충하면서 경쟁력을 높였다. 스톡옵션을 비롯해 강력한 인센티브제를 도입함으로써 창의성 높은 노동력을 기업 내의 자원으로 확보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도 이전과의 큰 차이점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창의적 노동의 성과를 기업 내로 흡수하기 위한 장치들이었다.
그러나 자본의 승리를 선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일단 시작된 노동의 변화는 가속화될 것이며 이 변화 속도가 임계치를 넘어서면 현재의 자본-노동 관계 안에서 수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자본 우위의 생산관계가 노동 창의성을 근간으로 하는 생산력 발전에 질곡이 될 것이다.
결정적인 요인은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의 근본 동인을 이루었던 노동 창의성이 소모되는 형태로 나가고 있는 점이다. 유연한 노동시장을 토대로 이윤을 창출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단기적으로 기업에 엄청난 효율을 창출하지만 결코 오래갈 수도, 사회적으로 확산될 수도 없다. 어디선가 그 필요한 인력을 끊임없이 준비해서 공급해 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바닥이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생산력을 발전시키기보다는 가로막는 역할을 하게 되는 이러한 생산관계는 이미 역사적으로 소임이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사회는 이미 수평적 관계로 자율과 창조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데, 더욱 소수집중화하고 노동 창의성을 고갈시키는 자본의 움직임을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 지점에서 자본과 노동은 갈등과 대립을 겪지만 주도성을 쥐고 있는 노동에 의해, 국민 다수의 민주적 의사에 의해 조율되고 공존할 수 있는 길로 점차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존을 지향하는 새로운 관계의 모색은 결국 생산성을 선도할 수 있는 집단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 정치경제적 구조를 형성해 나가는 일은 우리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면서 실제 삶의 현장에서 지식과 창의성을 통해 생산발전을 이끌어가는 일하는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될 수밖에 없다.
노동주도형 국민경제모델의 밑그림
노동주도형 경제 모델이 구상하는 기업 소유 및 지배구조, 노동 정책, 은행 공공화, 국가적 산업정책 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기업 소유/지배구조의 전면 개편
기업 소유/지배구조 개선의 핵심은 기업 경영에 있어 노동자의 참여 보장과 공공성 회복이다. 우선 노동자의 경영 참여라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노동주도형 국민경제모델의 핵심 동력이 노동의 질, 즉 노동 창의성에 있다는 점을 소개한 바 있다. 이러한 노동 창의성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율성과 책임성을 가지지 않는 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 창의성은 강요된 창의성, 경영적으로 유도되는 창의성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자발적 창의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에 종속된 존재로서의 노동자가 아닌, 기업을 운영해가는 또 하나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전면적인 노동자 경영 참여가 필요하다.
전면적인 노동자 경영 참여는 기존에 논의되어온 ‘노동자 경영 참여’와 의미가 다르다. 노동자의 해고나 인사상의 문제, 그리고 생산관리 등에 제한적으로 노조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하는 좁은 의미의 참여는 기존 경영권을 인정한 전제 아래 노동자의 발언 지분을 늘리겠다는 소극적 뜻을 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도 함께 경영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의지가 없다면 이는 진정한 경영 참여라고 보기 어렵다. 일각에서 거론되는 종업원 지주제의 확대나 노동자들의 자사주 갖기 운동 등은 이러한 이유에서 대안일 수 없다.
현재 기업 경영의 최고의사결정 기구는 주주 총회이며, 그 권한은 주식 보유량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노동자는 전혀 다른 원리에 입각해서 생산 활동의 주도성을 확보해야 한다. 주식 보유량(1주 1표)에 따라 의사결정권이 주어지는 현행의 방식에서 벗어나 ’노동’ 그 자체로부터 권한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종의 ’노동 이사제’라고 할 수 있는데, 노동자가 직원총회를 통해 1주 1표가 아닌 1인 1표 방식으로 자신의 대표를 선출해 이사회에 파견하는 방안이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로 불리는 독일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해당사자란 주주는 물론, 기업의 노동자, 금융 등 기업과 이해를 같이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포괄한다. 주주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하는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넘기 위해서도 이러한 개념을 사회적으로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 사회관계나 국민경제의 필요에 따라 기업, 주식회사의 개념과 관련 법률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기업을 주주들의 소유로 보는 인식부터 버려야 한다. 외환 위기 때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부도 위기에 몰렸다가 공적자금을 수혈 받아 기사회생 했는가. 만일 기업이 사회와 무관하게 홀로 선 존재라면 이런 일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 활동에서 자본의 기여도는 충분히 인정을 해주고 투하 자본의 이윤 획득을 보장해주되, 주주의 사적 이윤만을 위해 사회 공공의 이익을 위배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식회사의 개념과 주주의 권한을 조정해야 한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근거한 ‘공공주식회사’을 제안한다. 공공주식회사는 기업이 주주와 노동자 그리고 국민 일반에 대한 책임성에 근거해 경영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경우 주주의 권리는 기업의 자본 책임 부분으로 한정된다. 예를 들어 M&A와 회사 폐업 등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기업 존립의 주요한 문제는 주주와 노동자 대표, 사외이사 등이 함께 결정하도록 하는 식이다.
지금과 같은 주주 중심 주식회사 체제의 법적인 문제점은 자본주의 선발국인 미국과 일본에서도 꾸준히 제기되는 상황이다. 주식회사는 ‘법인격’을 부여받아 많은 부분 인간의 권리를 누리고 있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거의 규정되어 있지 않다. 인격체라면 사회와 공공의 이익을 반드시 살펴서 할 행동도 법인격체에게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주식회사의 유한책임, 기업을 주주들만의 소유물로 보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법률로 정해져야 한다.
‘기업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움직임이 일고 있다. 펜실베니아주의 시민단체들은 기업 허가 기간을 30년으로 제한하는 법규 개정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이 법이 도입되면 기업이 공중에 이바지한 바를 스스로 입증해야만 허가 기간을 연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캘리포니아 주의 아카타(Arcata)라는 도시에서는 시 안에서 활동하는 모든 기업들에 대해 시민들이 민주적 통제권을 갖도록 입법화하기도 했다.
외국 자본에 대한 철저한 규제
다음으로 노동 주도형 국민경제 모델을 구현하기 위한 주요 정책 과제들, 즉 자본 정책, 노동 정책, 산업 정책, 그리고 국민 경제의 기본 작동 단위인 국가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자본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제 투기자본에 대한 대책이며 그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경제 발전을 위한 건전한 산업자본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먼저 국제 투기자본은 어떤 형태로든 규제책을 강화해서 함부로 국내에서 투기활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예방해야 한다. 또 사후에라도 그러한 일이 확인되면 강도 높은 세금 부과 등으로 국부 유출을 막아야 한다.
투기자본과 건전 자본을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우선 예방 장치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나라가 산업 금융의 핵심인 은행에 대해서는 외국인 지분 보유를 제한하는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이 예가 되겠다. 미국의 은행법 72조를 한번 살펴보면, "모든 은행의 이사는 재직중 미국시민이어야 하고, 이사의 과반수는 은행이 소재한 주(州), 혹은 본점으로부터 100마일 이내에 1년 전부터 거주해야 한다"고 돼 있다. 신자유주의 종주국이라 해서 대단히 개방돼있을 것 같지만 정작 자신들의 핵심 중추는 이렇게 철저히 보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본에 대한 규제 정책이 자본 철수로 이어질 것이라 우려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단언컨대 외국 자본의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규제의 정도가 아니라 한국 시장이 가진 투자 가치의 크기다. 일례로 2005년 특정 기업의 주식을 5% 이상 갖고 있는 대주주의 신고의무를 강화한 ’대량보유주식 보고제도’가 도입된다고 하자 외국인 투자가 크게 위축되리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오히려 외국인 큰손의 투자가 크게 늘어났다.
사실 국제투기자본의 활동에 대한 규제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선진국들은 주요 산업에 대한 투자 사전심의제, 보유 주식에 대한 의결권 제한 등 다양한 방법을 시행하고 있다. 미국은 엑손-폴로리어 규정에 의해 국가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분야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규제하고 있고 일본은 외국무역법에 의해 국가안보, 공공질서, 공공안전 보호, 국민경제의 원활한 운영에 현저한 악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되면 사정에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는 외국인 투자법에 의해 공공질서, 안전, 보건 등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 투자에 대해 사전 승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캐나다는 투자법에 의해 외국인이 대규모 기업을 인수하면 사전 심의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은행의 공공성 회복
은행은 국민경제의 청정 동맥이다. 그러나 IMF의 여파를 이기지 못한 국내 은행들은 대부분 공적자금이 투입된 후 헐값으로 그 지분을 외국 자본에 넘긴 상태다. 그 결과 오늘날 은행들의 행보는 전통적인 자원배분 기능을 극도로 왜곡시키고 있다. 따라서 은행 공공화를 통해 장기적이고 건전한 산업자본의 젖줄로 은행을 활용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은행들은 단기 실적에만 집착하면서 장기투자 성격의 기업대출을 기피하는 것은 물론, 경기가 좋을 때는 주택담보대출을 확대하고 경기가 나빠지면 중소기업 대출을 마구 거두어들이는 경기 순응적 자금 운영을 하고 있다. 제조업의 경우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산액(50.8%)과 부가가치(51.7%)에서 절반에 이르지만, 은행의 민간기업 대출에서 중소기업에 빌려준 돈은 2.5%에 그치고 있다.
또 공공성을 상실한 은행 영업 행위는 부동산 투기와 신용 대란을 부추기는 직간접적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면 국민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미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기관에 대한 공공 통제를 회복하는 것은 대단히 절박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금융기관들이 공공성을 포기한 채 철저히 사적 이익 극대화에 골몰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국자본에게 점령당한 탓도 있지만 최소한의 금융 감독 기능마저 사라진 탓이기도 하다. 따라서 은행의 소유 구조를 공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자면 은행 소유 지배구조와 관련된 기준을 법률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 최소한 외국인 지분은 전체의 49%를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1인 대주주의 지분이 10%를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와 함께 국민연금 등 공적 기금을 투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은행에 대한 공적 소유를 실현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은행을 재차 공공화, 국책은행화 하자는 데 국민들이 반대할 이유는 별로 없다. 민주노동당은 물론 열린우리당도 동조하고 있으며, 한나라당과 재벌조차 은행이 외국자본에 의해 소유, 경영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정부의 의지 그리고 국민들과의 합의만 있다면 국민경제의 동맥인 은행을 외국인으로부터 되찾거나 공공화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고용 국가책임제
노동 부문으로 주제를 옮겨 신자유주의의 상징처럼 돼버린 노동 시장 유연화의 해법과 함께 노동정책의 주요 과제들을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고용문제를 ’사회적 안전망’, 또는 ’고용보장’과 같은 복지 차원에서 접근하는 관점은 노동을 피동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노동창의성을 중심으로 한 관점에서 보면, 국민의 노동 창의성을 높이지 않으면 국민경제의 성장은 없다. 일부 특별한 엘리트가 아닌 전체 노동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이를 국민경제가 요구하는 적재적소에 결합시키는 길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성장 동력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고용 문제는 성장 동력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구체적인 노동 정책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 노동 시장을 안정화시키는 일이다. 국민경제 전반에 안정적인 고용 모델이 마련되지 않으면 노동 창의성의 발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용 안정이 필요하다고 해서 기업 차원의 종신 고용이 궁극적 해답이 될 수는 없다. 경제적 생산이 양적 생산에서 질적 생산의 시대로, 피동적 육체노동에서 창의적 정신기술노동 시대로 옮겨가고 있는 마당에, 노동 창의성 발휘를 특정 기업 구조 안에 영원히 종속시키는 것은 맞지 않다.
개별 기업을 떠나 산업적 차원으로 보면,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경쟁력 없는 산업을 축소하고 경쟁력 있는 산업,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을 강화하는 산업 구조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력의 재배치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해서 개별 기업 단위에서 고용의 유연성을 제한 없이 인정해 버리면 국민경제 단위에서 결국 노동자의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 따라서 기업 단위에서 고용의 유연성은 국민경제 단위에서 고용을 책임지는 정책과 맞물려 제시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 고용 국가 책임제’의 핵심이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불가피한 경우에 한하여 유연한 인력 정책을 쓸 수 있지만 국가 전체적으로는 노동 안정을 기하고 노동의 질을 높이는 역동적 시스템을 골자로 한다.
고용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은 재취업시까지 실제적으로 실직자의 생존 문제를 지원하며 취업 교육과 취업 알선까지 국가가 종합적이고 최종적인 책임을 맡자는 것이다. 취업 교육 또한 직업 기능을 몇 가지 익히는 차원을 넘어서, 노동자의 산업간 이동이 가능한 수준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일시적 해고를 수반하는 노동력 재배치가 국가적인 견지에서는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연속적인 지식기술 혁명으로 산업 구조가 급변하고 이에 따라 노동력 수요도 항상 동태적으로 변하고 있다. 개별 기업과 산업별 노동 수요 변화를 국가적 완충을 통해 흡수하고 사회 전체로는 보다 질 높은 노동력의 끊임없는 재생산이 가능한 역동적 고용 구조를 창출하자는 것이 그 취지다. 따라서 고용에 대한 국가 책임제는 단순한 실업자 대책을 넘어 국민 노동의 질적 제고를 통해 국민경제를 성장시킬 국민 노동 창의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산업정책과 신기술혁명의 중요성
산업 정책은 국민경제의 장기적인 성장 계획을 이루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산업 정책은 국민 경제라는 토대와 함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 정책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과거처럼 몇몇 경제 부처 관료들의 머릿속에서 설계되고 정부의 총애를 받는 소수 재벌들에게 특혜가 돌아가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경제와 정치의 민주화 정도에 걸맞게 산업 정책에 대해서도 국민적 동의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이를 바탕으로 국가적인 힘을 집중하는 새로운 방식이 나와야 한다.
특히 앞으로의 산업 정책은 첨단 신기술혁명 시대를 맞아 노동하는 국민들의 지혜와 창의성을 이러한 시대 조류에 부합하는 산업 발전으로 연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노동 주도형 경제 모델이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무한한 성장 발전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는 이들 첨단기술 산업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장기 계획이 서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지구상에서는 첨단 지식기술 산업을 제대로 틀어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에 따라 산업 역량, 경제 역량의 역전 현상이 다각도로 목격되고 있다. 1980년대 세계 경제의 맹주였던 독일이 오늘날 겪고 있는 정체는 시시하는 바가 크다. 전통적인 제조업으로 재미를 본 독일은 세계 경제가 빠르게 정보통신 혁명으로 진행되는 것을 따라잡지 못해 이 분야에서는 2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첨단산업 분야를 어떻게 틀어쥐느냐가 한 나라의 경제발전 속도를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새로운 시대가 된 것이다.
IT 혁명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환경기술(ET), 우주해양기술(ST) 등을 통해 인류는 연속적인 기술혁명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특히 생명공학과 나노공학 분야는 모든 기술 변화의 새 장을 열어가며 첨단 산업분야의 지형을 통째로 바꾸어 낼 파괴력을 지닌 신종 산업 분야다. 해양우주공학은 지구라는 초록별, 그 가운데서도 대륙에 한정되었던 산업 영역을 해양과 무한한 우주공간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환경기술 분야는 생산력의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어느 나라가 이들 첨단 신기술 산업 분야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세계적 발전의 주도권이 결정될 것이다. 인류는 새로운 기술혁명 전쟁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산업혁명기에 영국이 선두를 치고나간 뒤 200년 이상 전성기를 구가한 것을 떠올린다면 지금 닥쳐오고 있는 변화의 물결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의 한복판에 놓인 한국경제가 소수 대자본만 믿고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실로 국민경제의 장기적 성장이 걸린 핵심 문제다.
이 문제 역시도 노동 주도라는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 산업정책을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으로 내려 보내고 투입 요소를 국가가 동원하는 식으로 조달하는 것으로 파악해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이런 과거형 산업정책의 대체 모델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산업 클러스터다.
산업클러스터는 일정한 거점을 중심으로 특정 산업과 관련된 연관된 대학, 연구소, 기업, 정부기관이 모여서 정보, 기술, 인프라를 공유하고 상호 협력하는 시스템이다.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각 주체들이 자발성에 기초해 산업과 관련한 지식정보를 긴밀히 교류함으로써 참여 주체들의 노동 창의성을 증대시키고 기술과 생산성을 발전시키는 효과로 이어진다.
또 클러스터는 기업이라는 생산 단위, 대학과 연구소라는 교육 및 R&D 단위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정부의 기능이 유기적으로 연결됨으로써 현장과 연결된 학습 교육 시스템을 통해 노동 창의성을 높이는 유력한 방도다.
국민경제에서 국가 역할의 재인식
국가가 경제를 주도하는 행위는 이미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렵지만 국민경제의 보호자, 육성자로서 국가의 역할은 현시대에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WTO 질서의 세계화 시대에도 국민들은 여전히 국가 단위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를 노동 창의성의 적극적인 후원자, 조직자로 역할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시민사회의 자율성 확대는 국가와 사회의 분리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 현상은 본질적으로 국가와 사회구성원 다수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다. 즉 국가와 다수 사회구성원의 이해관계가 일치되어야 하는데 그 방법이 과거의 권위주의적 국가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에서는 사회를 국가 기구로 통합시키는 방법이었다면 노동 주도의 경제를 만들어 나갈 이 시대에는 거꾸로 국가기구를 사회로 통합시키는 역발상을 해야 한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과 같이 국가에 대해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국민들이 국가와 거리를 두는 것은 오히려 자본과 노동의 대립관계에서 국가의 힘을 방치하고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자본에게 이득을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점을 전환해 국가를 국민, 노동의 지원자로 끌어들여 노동 주도의 국민경제 시스템을 꾸리는 데 적극 활용해야 한다.
국민들과 국민경제를 보호하고 육성, 지원하는 기구가 될 때 비로소 국가는 지배 기구라는 낡은 틀을 벗을 수 있다. 미래를 내다보고 산업 정책을 수립하는 일, 외국 투기자본으로부터 국부를 보호하고 금융을 공공화하여 산업의 동맥으로 활용하는 일, 노동의 창의성을 최대한 발양시킬 수 있는 기업 구조를 유도하는 일 등등 노동 주도형 경제 시스템을 수립하는 데 국가의 역할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향후 새로운 국민경제에서 국가는 ‘지배하는 국가’가가 아니라 ‘지능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 전체가 노동 창의성에서 역동적인 성장발전의 에너지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후원하고 조력하는 컨설턴트가 되는 것이다. 또한 국민적으로 창출해낸 지식과 창의성을 집중하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보다 높은 지식과 창의성의 융합, 재창조를 밑받침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진보의 대안부재? 새사연의 상상력에 물어보라 (데일리서프, 황진태 기자)
[책동네] 재기발랄한 대안들의 향연 모은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
6월 항쟁 이후 절반의 민주화를 이룩하고서 386세대들은 정치인으로 시민운동가로 그리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극우보수정당에 들어간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그람시(A. Gramsci)의 기동전/진지전 개념을 제멋대로 인용하여 자신들의 행보를 합리화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개념을 원용하자면 근래에 불거진 ‘87년 체제의 위기’로 인해 그동안 386세대들이 파왔던 진지에서 나와 다시 기동전의 대오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징후에 진보적 싱크탱크의 설립이 있었고 대표적으로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하 새사연)을 손꼽을 수 있다. 새사연의 이번 첫 신서는 그간에 고정관념처럼 여겨지던 진보진영은 ‘비판은 잘하는데 대안이 없다’는 비난에 대해 고민한 미완의 결과물이 담겨져 있다.
한미 FTA, 지정학적 불안정, 국내경제 위기, 하나로 보는 시선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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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한국 사회의 전망과 비전을 제시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2006 |
맑스와 아담 스미스의 경제주의적 관점의 차이를 잠시 언급하면 먼저 맑스는 경제주의적 관점의 표층에는 자유를 강조한 유통(시장)관점을 심층에는 지배계급의 착취를 포착한 생산과정, 이 둘로 나누어 파악하고 있는 반면에 스미스의 경제주의적 관점은 생산과정은 못 보고 유통(시장)관점만을 주목하였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아담 스미스의 주장만 듣지 맑스의 주장은 무시한다. 여기에 덧붙여 맑스는 반시장적인 공산주의 이론가로 낙인찍지 않던가. 사실 맑스도 경제주의적 관점에서 유통관점을 긍정하는 즉, 시장자체를 비난하지 않고 생산과정을 지적했을 뿐인데 말이다. 맑스의 논지라면 온전한 ‘경제학’은 있을 수 없고 ‘정치경제학’이 선차성을 갖는다.
어쨌든 아담 스미스로부터 이어져 온 외눈박이 경제주의적 관점은 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한미 FTA 논란 초창기부터 진보진영에서는 한미 FTA가 신냉전이라고 불리고 있는 중국/미국 간의 대결구도로 표상되는 정치, 외교, 지정학상의 미국 헤게모니 관철임을 강변하였다. 그러나 정부, 학계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번 한미 FTA 논의는 경제분야에만 국한될 뿐 정치, 지정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을 동어반복했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한미 FTA 찬성론자들은 치명적인 거짓말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그 한줌의 신뢰마저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한겨레>가 입수한 2005년 9월 12일치 '제5차 대외경제위원회 안건'에 따르면 한미 FTA 추진에 있어서 미국의 두 지식인의 발언 “미국에 앞서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할 때, 워싱턴에서는 충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엄청난 실수(enormous mistake)가 될 것”, “미국 조야에서 불만의 소리(some unhappiness)가 들릴 것”이라는 경고에 지레 겁먹고서는 중국과의 FTA 협상을 미루고, 한미 FTA로 선회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를 통해서 중국과의 신냉전구도를 앞두고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의 한미 FTA 체결의 정치경제적인 함의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진보/보수를 넘어서 한국사회는 앞으로 한국이 어떻게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하는 가하는 생존의 근본적 물음에 봉착해 있다. 그런데 보수진영은 한미 FTA를 통해서 낙후된 산업의 경쟁력을 이끌어 올려서 먹고 살 수 있다는 대안을 내놓고 있는 데 진보진영은 무엇을 내놓았는가. 이미 여러 저작을 통해서 한미 FTA의 장밋빛 미래 속에 감춰진 핏빛 미래를 지적했지만 그러한 비판 이상의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진부한 명언 중에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본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서는 이러한 남북이 대치된 지정학적 위기, 국내의 경제위기, 그리고 현존하는 정치구조에 대한 고민까지 (속어를 빌리자면) ‘한큐’에 뽑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재기발랄한 대안들의 향연
본서의 첫 장은 노동주도 경제를 주장한다. 한국경제의 흐름을 ‘국가주도→자본주도→노동주도’로 이어진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노동주도형 경제 모델을 말 그대로 읽는다면 노동계급이 주도한다는 사회주의 경제를 의심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해 “국민경제의 발전은 어느 특정 계급에서의 노동 발전으로는 부족”하다며 “일하는 국민 전체의 노동 조건, 노동의 질과 창의성을 높이는 것이어야 국민경제가 세계화 시대에 강력한 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다.
노동 주도란, 이처럼 자본 주도형 경제에 반대하고 한국 경제 성장의 원천 동력인 노동의 발전에 동의하는 범국민적 아젠다, 그리고 이를 정치권력과 경제 운영 핵심부에 정확히 반영하는 정치적 동력을 통해 주도성을 쥐게 되는 것을 의미”(99쪽)한다고 밝힌다. 얼핏 첫 장부터가 유토피아적인 망상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유토피아의 본디 의미인 아무데도 없는 곳(no-where)을 바로-여기(now-here)로 바꿀 수 있는 상상력은 하이픈을 어디에 두는가의 차이 아니던가. 이러한 노동주도 경제를 이루기 위한 선행조건으로 신기술혁명, 지식기반경제와 노동의 창의성, 은행공공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선행조건 중에서 주주 중심 주식회사에 대한 근본 개편 주장은 이미 정승일 교수를 필두로 한 대안연대에서 주장하는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이 주주자본주의의 맹신으로 연결된다는 비판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새로운 의견은 아니다. 그런데 노동의 창의성, 지식기반경제, 신기술혁명 등의 수사는 사실 시장주의자들도 애용하는 기치들인데 이는 진보든 보수든 딱히 다른 대안이 있지 않고, ‘와일드카드’로써 이러한 수사들이 실제 경제부문에 미치는 파급력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새 노동 정책에서는 노동의 질적 차이에 근거한 차등 임금제를 적절히 인정해 주어야 한다”(175쪽)고 보는 한 토론자의 주장처럼 이러한 진보/보수 진영의 흐릿한 경계에 앞으로 더 깊고 선명한 각론이 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노동 창의성과 관련하여 팀제의 도입과 도요타 공장을 예로 들면서 “사회 전체적인 관계가 수직적이고 상명하복적인 관계”에서 “서로 수평하고 대등한 관계라는 인식이 발전”(111쪽)으로 본 것은 의도확대의 오류로 보인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인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도요타의 린(lean) 생산기법을 예찬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생산기법과 최근 기무사, 국정원에서도 팀제를 도입한 것을 볼 때 이러한 변환은 이윤율 증대, 관료제의 효율화에 더 기인한 게 아닐까. 좀 더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겠다.
다음 장에서는 통일민족경제를 주창한다. 앞장에서의 노동주도 경제 해법 제시는 남남갈등의 해소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통일민족경제는 남남 갈등에서 나아가 남북갈등 해소까지 보고 있다. 이 부분의 주요 논지는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남한의 기술이 결합한다는 교과서적 민족경제통합에서 나아가 북한의 우수한 기초과학연구능력과 남한의 생산응용기술 결합을 통한 통일경제와 중국, 러시아, 몽골로 더 뻗어나가는 동북아 허브로서의 남북한 경제의 추진력이 될 것임을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통일민족경제 성공의 관건은 현재 진행 중인 개성공단의 성공 유무에 달려있겠다. 그러나 최근 한미 FTA 협의에서 개성공단은 자칫 실패로 귀결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정문수 전 청와대 경제보좌관은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 문제와 관련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문제이고,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미 정부는 개성공단 제품을 한국산이 아니라며 못을 박고 있다. 미국이 개성공단의 한국산 인정 문제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원산지 예외규정을 인정하고 있다거나 미국 섬유업계의 강력한 로비 등의 이유와는 상관없이 개성공단이 통일주도 경제 성공의 시금석임을 비춰볼 때 동북아 평화를 바란다는 그동안 미국의 허언(虛言)과 한국경제의 체질개선을 통한 재도약의 기회가 될 거라는 한국정부의 핏빛 섞인 장밋빛 발언에 국민들은 과연 동의할 수 있을까.
개성공단은 그간 대북정책이 퍼주기식이라는 비난단계를 넘어서 남북한 간의 상호 신뢰를 견지해 줄 수 있는 안전판으로서의 기능을 인정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사실 새사연에서 내놓은 대안이라는 것도 대안은 이미 마련되어 있지만 실행할 수 있느냐의 매듭만 남았는지 모른다. 미국이 한반도에서의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으려는 현 상황에서 앞으로 남북통일 진행을 더욱 경직시킬 신냉전구도가 ‘포괄적 봉쇄구도 속에서 경제적인 통합구도 지속: 단일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면 이러한 일극 헤게모니의 경제영역에서부터 북한, 몽골, 중국, 러시아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한다면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까지 완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본서에서 제기한 남남갈등과 남북갈등 그리고 동북아의 지정학적 위기를 일소시킬 수 있는 ‘노동주도 국민경제→민족통일경제→북방대륙 경제협력 구상’의 틀은 작금의 화두인 한미 FTA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정책이더라도 정책을 추진하고 제도화할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할 정치력의 부재는 이 모든 말들이 말장난으로 증발시킨다. 근래 들어 ‘87년 체제의 위기’가 제기되고 있는 와중에 본서의 마지막 장은 작금의 한국정치체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현 노무현 정권은 87년 체제 이후에 민주화 정권이 인적요소를 갖췄지만 이라크 파병, 황우석 사건, 대추리 사태 그리고 한미 FTA 진행에서 현 정권의 오만과 엘리트 정치의 파국이란 실패의 모래탑을 쌓고 있다. 단순히 인물갈이만으로는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확실한 이정표를 명확히 제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 하여 본서의 마지막 장은 대안으로 국민직접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민소환권, 발안권의 현실화, 생활정치의 활성화, 거주지 보다 직장 우선의 선거구 제안, 시민감사제, 청빈관료제 등 그동안 유럽의 사민주의 정치를 이상적인 모범답안으로 제시한 수준이 아닌 보다 한국정치지형을 감안하고 고민한 재기발랄한 대안들이 제시되었다.
본서를 관통하는 여론정치, 의사소통 강조
본서의 마지막 장까지 관통하고 있는 새사연의 여론정치, 의사소통의 강조는 타 싱크탱크가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본서에서 토론자들은 노동주도 국민경제의 실현에 앞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국가의 역할 강화는 자칫 시민사회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박세길은 “노동주도의 경제를 만들어 나갈 이 시대에는 거꾸로 국가 기구를 사회로 통합시키는 역발상을 해야”(187쪽)한다며 국가의 역할 강화가 국가주도형 경제로의 회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국가가 상위를 차지하던 기관에서 사회에 하복(下服)하는 기관으로 전환된다”는 맑스의 주장과 동일한데, 그러니까 “정치와 국가기능의 일반적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강권으로부터 해방된 시민사회가 민주주의와 여론정치를 통해 국가를 통제하는 것으로 재건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본서의 국민직접정치 부문에서 국민투표제의 시행에서 우려되는 국민의 정책판단능력 부재에 대한 우려도 인터넷의 발달로 “학습과 토론을 통해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점점 높아”질 것이라며 “국민 투표제가 정착되기 시작하면 우리 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은 급속도로 높아갈 것”(311쪽)라는 확신에서도 초기 맑스가 꿈꾸었던 여론정치의 실현 가능성을 발견한다.
결정적으로 새사연이 연구 성과물을 민중들과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는 인터넷 마당인 ‘이스트플랫폼(East Platform)'의 추진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 또한 여론정치의 실현화를 위한 실천적 포석으로 볼 수 있으리라. 이러한 인터넷의 긍정과 시민사회의 한결같은 여론정치의 구체적 강조는 기존의 싱크탱크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하다.
진보적 싱크탱크들에 대한 괜한 우려인가
괜한 우려일까. 손석춘이 박현채 선생의 NL-PD 갈등에 대한 비판 발언을 인용하면서 새사연은 통합을 내세웠지만 안수찬이 지적하듯 새사연이 “박경서, 손석춘, 박세길 등 명망가를 앞세우고 있지만, 실은 전대협 세대의 결집을 핵심으로 하는 모임이다. … NL-PD의 통합을 주창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NL의 그늘이 강하다는 점도 부담이다”는 지적과 함께 NL-PD 갈등뿐만이 아니라 “현상적으로는 서로 다른 부문운동 활동가 또는 관련 지식인들이 서로 대면 또는 대좌하지 않으려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그 이질성이 NL-PD 대립으로 표상되는 ‘정파 간 차이’가 아니라, 각 부문운동 간 적대로 등장하고 있다”는 지적 또한 유념해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처럼 ‘깃발’만 꽂았다고 승리한 것은 아닐 것이다. 뉴라이트 진영 관련 단체들 간에도 서로 다른 의견의 충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으로는 ‘연합’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앞으로 세교연구소, 희망제작소 등과의 연대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도 진보적 싱크탱크들이 풀어야 나가야 할 과제이리라.
한국사회에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이 발휘되길 바라며
필자는 인문사회과학서적에 대한 전반적 기피 또한 청년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과 무지, 보수화에 한 몫 했다고 보는데 국민직접정치 성공의 관건은 이들의 정치 관심과 의식수준에 달려있겠다. 앞으로 새사연이 이번 첫 신서를 기점으로 이러한 보수화된 풍토 위에 있는 한국사회에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지켜보자.
*본문은『계간 신진보리포트』2006년 가을호에 기고했었던 글인데『신진보리포트』편집부의 양해를 구하여 전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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