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대안사회, 대안이론
[김규항 칼럼] 촛불과 지식인들 1, 2, 2.5, 그리고 몇 개의 글들
최근 들어 프레시안에 가끔 나오는 김규항의 글은 언젠가 자신의 블로그에 촛불시위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코멘트 끝에 본격적인 비판글을 써보겠다고 한 말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이러한 김규항의 글에 대해 진중권은 옛날엔 비평가 타령하더니, 이젠 지식인 타령이라고 비꼰다. 진중권은 이미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7월 7일에 진보신당 게시판에 "그냥 추상적으로 반신자유주의 운운하는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의제들을 들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적었고, 그 글이 아고라로 퍼 날라져서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읽기도 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진중권이 촛불시위를 찬양하는 지식인들을 비판했었나. 그가 말하는 대중은 황우석, 디워에 열광했던 그 대중이 아닌가. 진중권은 김규항 더러 "너나 잘하세요"라고 했지만, 그 말이 자신에게도 해당되진 않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거리에 나와서 대중들과 많은 얘기를 했다면, 자기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 얼마나 관념적인지 깨닫는 계기라도 됐겠지요. 촛불집회를 과소평가할 것은 없지만, 또한 과대평가할 것도 없습니다. 대중은 거리에 나올 때 자기들만의 이유를 갖고 나왔고, 그 이유가 불행히도 김규항씨나 좌파 먹물들이 거기에 나온 이유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식인이 주도하고, 지도하고, 선도하고, 영도했으면 뭐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오류지요. 그랬다면, 아예 촛불집회가 일어나지를 않았을 겁니다. 세상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대중도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김규항의 지식인 타령, 진보신당 홈페이지 당원게시판, 진중권, 2008-11-06 20:52:14)
진중권의 김규항 곡해는 지나치다고나 할까. 좌파 먹물이라고 얘기하지만, 그가 말하는 좌파 먹물이란 오히려 김규항이 비판하는, 촛불에 영합한 지식인이 아닐까 싶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좌파는 '지식인이 주도하고, 지도하고, 선도하고, 영도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김규항 같은 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거라고 전제하고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논의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규항이 촛불과 지식인들 2.5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갈수록 진중권보다는 김규항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으니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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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 촛불 앞에서 작동을 멈추다 (프레시안, 김규항/<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08-10-21 오전 7:41:46)
[김규항 칼럼] 촛불과 지식인들 1
촛불은 아름다웠다. 어른들이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뇌까리며 느물거릴 때 촛불을 들기 시작한 여중생들도,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사람들이 이룬 거대한 대열도, 그들이 보인 유쾌한 직접 민주주의의 풍경도. 제정신을 가진 누구도 그 아름다움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왜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고 행동했는데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 수 있을까? 딱히 달라진 건 없더라도 사회 진보의 열기가 살아나는 계기라도 되었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다들 맥이 빠져버린 모습이니 대체 어찌된 일일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만 다들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다. 촛불 시위 피켓엔 '이명박 너나 미친 소 쳐먹어' '내 인생 좀 펼쳐보려고 하니 광우병 걸렸네' 등 내가 죽고, 내 이웃이 죽고 우리 국민이 죽는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나아간다 해도 친미 정부, 자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정부를 탓하는 지점에서 끊긴다. 대한민국 안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들이다. 그러나 지구 위 어딘가에서 미친 소와 병든 닭, 그리고 오리는 여전히 아프다. 이런 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누가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집회현장에는 거의 없었다. 좁은 우리에 꽉꽉 채워 넣어 면역력을 떨어트리고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충분히 먹을 만큼 많은 곡식을 소에게 먹여 소수가 먹을 고기를 만들고, 그도 모자라 소가 소를 먹어 병들게 만든 것.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데 말이다." (<인디고잉> 12호)
촛불의 열기가 한창이던 즈음 나온 글이다. 글을 쓴 사람은 저명한 생태주의자도 논객도 아닌, 부산에 사는 한 고등학생이다. 우리는 이 '아이'의 견해를 통해 '광우병 소 반대' 구호는 '우리 동네에 쓰레기 소각장 반대' 구호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쓰레기가 처리되는 방식을 되돌아보며 생태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에선 쓰레기를 처리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 광우병 소라는 현상을 통해 자본주의적 축산 산업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자는 게 아니라 나와 내 새끼는 광우병 소를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같은 말이다. 한국의 지식인들 가운데 이 '아이'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상적인 사회란 아이들이 지식인에게서 배우는 사회지 지식인이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사회가 아니다.
물론 지식인들은 말한다. "촛불은 광우병 소라는 일개 사인이 아니라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낸 이명박 정권을 공격하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맞는 말이다. 촛불은 그랬다. 그런데 과연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모두 이명박이 만들어낸 것인가? 노동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불안정 노동층으로 전락하고 농민들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뿌리 뽑히며 청년들은 실업자로 사회에 진출하며, 불안감에 젖은 부모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아이들을 '경쟁의 지옥'으로 내모는 이 현실은 말이다. 나 역시도 '이 모든 게 쥐박이 때문'이라고 말하면 마음만은 개운하겠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명박은 나쁜 대통령이지만, 불과 몇 달 동안 이 모든 걸 뚝딱 만들어낼 만큼 전능한 대통령은 아니다.
촛불을 음해하는 놈들은 말한다. "미국산 소고기 문제는 이미 노무현 정권 시절 다 진행이 된 것이고 이명박 대통령은 사인만 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더러운 의도와는 별개로 그 말은 사실이다. 오늘 우리의 삶을 옥죄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이명박이 뚝딱 만들어낸 게 아니라 꽤 긴 시간 동안 진행되어 온 어떤 거대한 흐름의 결과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단지 이명박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괴물의 아가리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 괴물의 아가리에 한국 사회를 집어넣은 건 '쥐박이'가 아니다. 한국이 군사 파시즘에서 빠져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탑승하면서 시작된 일이며, 본격적으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진행된 일이다. 이명박에겐 책임이 없고 김대중 노무현 책임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그리고 이명박으로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정권이고 이명박 정권은 수구기득권 세력의 정권인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게 문제다.
우리가 사회 문제를 이야기할 때 늘 미궁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정권'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마치 고대 사회에서 정치란 단지 '왕이 누구인가'의 문제였던 것처럼 우리는 '정권'과 '대통령'에 집착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자는 '정권'이 아니라 '정권을 포함하는 훨씬 더 넓고 복잡한 체제'다.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분명히 '다른' 정권이지만 '같은' 지배 체제의 일원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지배체제의 그런 '신묘한' 정체는 지난 10여 년 동안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서 입버릇처럼 뇌까려진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사실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은 개념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진보 세력이란 좌파를 일컫고 개혁 세력이란 자유주의 우파 세력을 일컬으니,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은 결국 '좌파우파' 세력이라는 말인 것이다. 그런 '말이 안 되는 말'이 그토록 진지하게 사용되는 연원은 과거 군사 파시즘 체험에 닿아 있다. 문제는, 군사 파시즘이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후에도,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문제의 본질이 군사 파시즘이 아니게 된 다음에도 여전히 그 구도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민주화를 통해 국가 권력이 자본(재벌!)을 거느리던 체제에서 자본이 국가 권력을 거느리는 체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 문제의 본질은 파시즘이 아니라 '자본화'가 된 것이다. 자본화의 시절을 맞아 옛 군사 파시즘 세력은 대중들, 특히 젊은 세대의 지지를 잃고 급기야 10년 동안 정권을 잃기도 하지만, 탐욕의 결정체들답게 자본화의 흐름 자체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적응해나갔다. 그들은 처음엔 인민을 대놓고 누르고 밟을 수 없는 세상이 난감했지만 이내 더 자유롭고 효율적인 부의 축적이 가능한 세상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옛 민주화 운동 세력은 두 가지 세력으로 분화했다. 하나는 자본화의 흐름을 수용하는 개혁 세력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화의 흐름을 거부하는 좌파 세력이다.
한국 사회는 당연히 자본화,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수용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져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사 파시즘 시절의 구도가 그대로 이어졌다. 구우파가 우파를 맡고 신우파와 좌파가 이른바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좌파를 맡는 해괴한 구도를 이룬 것이다. 게다가 대형 시민단체를 비롯한 이런저런 개혁 운동이 대중들의 각광을 받으면서, 좌파 세력은 '철지난 몽상에 빠진 비현실적인 사람들'로 치부되어 버렸다. 말이 '진보개혁' 세력이지 그 주도권은 거의 전적으로 개혁 세력이 쥐게 된 것이다. 결국 한국 사회는 자본화의 시절을 맞아 정작 자본화를 반대하는 세력은 배제된 채 자본화를 찬성하는 두 세력이 각각 우파와 좌파를 자임하며 싸우는 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게 김대중 정권 이후 10년 동안의 상황이다. 자본화는 개혁 세력, 즉 신우파가 집권한 10년 동안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신우파는 한국의 거의 모든 양식 있는 사람들을 예의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구우파(수구기득권 세력이라 일컬어지는)와의 싸움에 전념하게 해놓고는, 차곡차곡 신자유주의 자본화를 진행한 것이다.
인민들은 당연히 고단해져갔다. 인민들로선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세상은 좋아지고 있는데, 민주화가 되고 민주화 운동 출신 인사가 대통령이 되고 <조선일보> 따위 '수구꼴통들'이 젊은 세대에게서 외면 받는 형국까지 보이는데, 갈수록 삶은 고단해져만 가니 말이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리자 인민들은 이게 다 '좌파 정권 탓'이라고 믿게 되었다. 결국 이명박 씨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며 구우파 세력은 10년 만에 신우파 세력을 누르고 다시 집권한다.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버렸다. 구우파가 집권하든 신우파가 집권하든 자본화가 지속되는 건 본질적으로 달라질 게 없지만, 구우파가 다시 전면에 부각되면서 자본화라는 지배체제의 본질은 훨씬 더 쉽게 은폐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촛불 광장에서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이명박이 한국 사회를 2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고 소리쳤다. 물론 구우파들은 신우파에 비해 훨씬 더 거칠고 추악한 외양을 갖고 있다.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에서 금방 도착한 듯한 꼴통들도 적잖이 있고 그들에 의해 시대를 거꾸로 흐르는 엉뚱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꼴통들의 행태야말로 지배체제가 우리에게 던진 미끼다. 2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면, 그렇다면 10년 전 5년 전은 괜찮았단 말인가? 이명박 정권은 부자 편만 드는 몹쓸 시장주의 정권이지만 노무현이나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와 서민의 정권이었다는 말인가? "이명박이 한국 사회를 20년 전으로 되돌리려 한다"는 말은 하나의 선동적인 수사로서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여 흥분하는 건 우리 스스로 20년으로 돌아가 주겠다는 말이며, 20년 동안 한층 세련되어지고 치밀해진 지배체제에 고스란히 먹히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혁이 사회 진보로 가는 현실적인 과정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오늘 이 현실을 낳았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인정하고 정신을 추슬러야 한다. 정치적 민주화를 근본적으로 되돌리기는 게 불가능해진 이후, 지배체제의 목표는 한국 사회를 군사 파시즘 시절로 되돌리는 게 아니라, 끝없는 자본화를 진행하여 무한정 부를 축적하는 데 있다. 현재 지배체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오늘 한국 사회 문제의 본질이 자본화라는 사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은폐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지배체제 입장에서 이명박 정권은 대개의 진보 지식인들의 말하듯 '무능하고 쓸모없는 정권'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존재하는 모든 정의감과 사회 의식과 사회 진보의 열기를 모조리 흡수해주는 매우 '유능하고 기특한' 정권이다.
촛불 광장 그 몇 달 동안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이라는 논리에서라도 벗어난 예는 단 한번, 불교 집회 때 수경 스님이 낭독한 108배 참회문뿐이었다. 기막힌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촛불 광장에 아이 손을 잡고 나온 모든 사람들을 지배체제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쥐박이' 욕만 했다고 비난할 순 없다. 사회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지식인들도 지난 10년 동안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이나 뇌까리며, 개혁을 사회 진보로 가는 현실적인 과정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구우파와 싸우는 일을 사회진보의 충분한 실천이라고 생각한 판에, 사회 공부는커녕 먹고사는 일에 치어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모든 분노를 '쥐박이'에게 집중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특히 진보 혹은 좌파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경우가 다르다. 그들은 그 소중한 분노가 이명박이라는 인물에만 집중되어 소모되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야 했다. 물론 그런 행동은 분노의 열기에 젖은 사람들에게서 오해를 받거나 전선을 흐트러트리는 짓으로 비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이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오해와 불편을 무릅쓰고'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슬프게도, 촛불의 열기 속에서 지성이란 그저 거대한 분노의 대열에 편승해 깃발을 꼽아대는 것을 뜻했다. 생각이 모자라서 그렇게 한 것이든, 누구 말마따나 포퓰리즘을 통해 제 세속적 이해를 도모한 것이든, 분명한 건 그 열기 속에서 지성은 작동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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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오는가?" (프레시안, 김규항/<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08-11-04 오후 12:01:07)
[김규항 칼럼] 촛불과 지식인 2 : 다른 세상을 상상하자
우리가 내내 소리치면서도 막막함을 거둘 수 없는 건 이명박이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이명박이 물러나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일 것이다. 진보적이라는 사람치고, 오늘 이 지랄 같은 현실을 만들어내는 진짜 적이 신자유주의라는 걸 부인할 사람이 있겠는가. 문제는 이놈의 신자유주의와 싸운다는 게 도무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신자유주의가 적으로 삼고 싸우기엔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언론을 예로 들어보자. <한겨레>나 <경향신문>은 조·중·동과 달리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비참을 이야기하지만, 신자유주의 자체에 대해선 ·거부할 수 없는 전지구적 현실·이라는 견해에 머문다. '사수해야 할 공영방송' KBS나 이명박 정권과 긴장을 이룬다는 MBC도 나은 건 없다. 두 회사의 몇몇 피디들이 '준 방송 사고' 형태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비참에 대해 간간히 이야기하는 정도다. 이쯤 되면 신자유주의와 싸운다는 건 '존재하는 모든 것'과 싸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신자유주의와 싸운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그놈의 신자유주의가 어느 새 우리 안 깊이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교육 문제를 보자. 신자유주의 교육과의 싸움은 이명박의 시장주의 교육과 싸우는 것은 물론, 아이를 시장주의 교육에 실어 보내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 그래서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대개 이명박의 시장주의 교육 정책은 욕하면서 내 아이의 시장 경쟁력은 알뜰하게 챙기는 '자못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생존 자체가 숙제인 시대에 누가 그걸 정색을 하고 비난할 수 있으랴만, 이명박 쪽에서 보면 참 꼴이 우습긴 할 것이다. 소리 높여 시장주의 교육 정책을 성토하는데, 정작 제 새끼 교육시키는 모습은 저희들과 딱히 다를 게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빌어먹을 사교육 사업의 주역들은 모조리 386 운동권 출신들이다.
하여튼 그런저런 추레한 사연들 속에서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진짜 적과의 싸움은 '비현실적인 싸움'으로 접어두고, '좀 더 구체적인 싸움'이라는 미명 하에 이런저런 '대체된 적'과의 싸움에 몰두하곤 한다. '조·중·동'이 그렇고 '수구반동'이 그렇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구호가 그렇다. 그리고 이명박은 그 대체된 적의 백미다. 이명박이야말로 오늘 진보적이라는 사람들, 즉 우리가 아무런 마음의 불편 없이도 비장하고 순정한 얼굴로 마음껏 욕할 수 있는 '70년대(혹은 80년대) 스타일'의 적인 것이다.
물론 사회 진보를 위한 노력이란 원칙과 당위만 주장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 1980년대를 돌이켜 보면 지나치게 거대담론만 강조하느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에서 결핍과 오류가 너무나 많았다. 한국의 진보 운동은 그 뼈아픈 경험을 반성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던가.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거대담론 편향이 아니라 정반대로 '거대담론의 결핍'이다.
문제의 근본과 얼개를 말하는 건 모조리 '거대담론 혐의'를 받는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말하는 건 모조리 비현실적인 소리로 치부되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만날 똑같은 소리만 하는 관념론자'로 낙인찍힌다. 이런 상태에서 이른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만 갈피없이 즉자적으로 강조되다 보니, 정작 오늘 한국의 사회 진보 운동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어떤 세상을 꿈꾸는 것인지가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이명박 이전에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훨씬 더 민주적이며 개혁적인 정권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사회 진보 운동의 목표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인가? 물론 진보적이되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야 '이명박이라는 짜증나는 인간'만 사라져도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대개의 사람들은 이명박이 물러나고 김대중이나 노무현 시절로 되돌아간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
이건 좌파의 상투적 과장이 아니라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가 함께 질리도록 체험한 '사실'이다. 우리가 이성을 가진 인간들이라면 이젠 그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이명박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적어도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선 세상'이어야 한다. 우리는 '조·중·동'이니 '수구반동'이니 하는 대체된 적과의 싸움이, "모든 게 이명박 때문" "이명박만 없으면"이라는 허깨비 신학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짜 적과의 대면을 피하는 방편이기도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적이 "실현 가능한 진보"니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로는 흠집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진짜 적과 대면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자본주의의 극단화한 형태로서 신자유주의에 기인하며, 결국 자본주의 자체에 닿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제 아무리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를 파고든다 해도, 100만이 아니라 1000만 명이 촛불을 들고 일어난다 해도, 자본주의를 문제 삼지 않는 한 결국 쳇바퀴 안의 다람쥐 꼴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개선된 세상'이라는 몽상을 버리고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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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잃은 당신은 희망이 없다" (프레시안,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08-11-21 오전 7:53:58)
[김규항 칼럼] 촛불과 지식인 2.5 : 꿈을 잃어버린 세상의 풍경
지나친 이상주의보다 심각한 것은 이상주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꿈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듯, 이상주의가 사라진 사회, 모든 사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생각을 중단한 사회, 모든 사람이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회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신자유주의의 공세와 우경화의 바람으로 이상주의의 퇴조가 세계적인 흐름이라지만, 이렇게 이상주의가 무작정 혐오되는 사회는 찾아볼 수 없다. 혐오는 가히 히스테리에 가깝다. 이상주의는커녕 현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맥락을 밝히려는 태도조차 "80년대식 낡은 태도", "비현실적 거대 담론" 따위로 매도당하곤 한다.
한국의 80년대에 변혁 운동에 투신했던 지식인과 청년들이 자신의 미숙함과 관념성을 성찰하고 현실사회주의의 공과를 분석하며 사회진보의 전망을 다시 모색했다면 그들 자신에게나 한국 사회에나 얼마나 좋았겠냐만 그런 사람은 아주 적었다. 대개는 자기혐오에 젖어 80년대를 청산했다.
살아가는 양태는 다양했지만 그들의 정신에 크게 남은 자기혐오의 흉터는 같았다. 그리고 그 흉터는 그들로 하여금 한 가지 사회적 태도를 공유하게 했다. 바로 좌파적 상상력에 대한 혐오,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다.
어떤 사람들은 80년대 이상주의자들이 90년대 이후 한국 최초의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들로 등장하면서 많은 유익을 가져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유주의가 고전적 의미에서 자유주의의 건강성을 갖지 못한, 즉 전근대적 속박과 암흑을 깨부순 해방 정신으로서 자유주의가 아니라, 심각한 자기혐오에서 잉태된 병든 자유주의였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처럼 정신적인 갈피를 찾을 수가 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우편향의 사회에선, 자유주의자의 양식만으로도 선거 때 진보정당 후보를 찍는 정도의 실천은 가능하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서 그런 경우는 눈을 씻고 찾아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예는 고종석이다) 그 자유주의가 병든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는 이른바 '계몽'에 대한 혐오로도 나타난다. 그들은 말한다. "대중을 지도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다."그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 80년대에 자신이 했던 계몽운동이 바로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몽의 진정한 의미가 사회적 최면에서 깨어나는 것, 즉 제가 사는 세상의 얼개를 파악하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우뚝 서는 것이라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계몽이 필요한 세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그 구조와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쏟아지는 미디어와 정보의 홍수 속에 인터넷의 분방한 소통 속에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걸 다 보고 말하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실은 지배체제의 손바닥 안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계몽은 분명히 필요하며, 문제는 '계몽의 방식'이다. 진정한 계몽은 80년대처럼 지식인이 민중을 대상화하여 지도하고 영도하는 일이 아니라, 지식인이 대중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제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지식 노동의 요체는 이 파악하기 어려운 사회의 구조와 본질을 인문적으로, 사회과학적으로, 혹은 문화 예술적으로 해명하여 사회에, 즉 다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사실 계몽에 대한 혐오는 지식인들이 현실의 구조와 본질이 명백히 해명되는 걸 두려워하는 심리의 반영이기도 하다. 현실의 구조와 본질이 해명되면 이상주의에 대한 병적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자신의 사회적 태도가 더 이상 정당하지 않게 되며, 그걸 기반으로 하는 피상적이고 즉자적인 싸움, 이를테면 미친 극우 인사들 따위와의 싸움을 사회진보의 주제인양 말하며 살아가기도 곤란해진다. 그래서 그들에게 계몽은 일종의 금기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희망을 잃게 된 건 '이명박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이상'불가능한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명박을 물리치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사람을 다시 부르는 게 우리의 꿈인가? 우리가 잃어버린 꿈을 되찾을 때, 비로소 우리 앞에 희망도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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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들여 (규항넷, 2008/09/24 08:28)
촛불의 열기가 조선일보 보던 사람을 경향이나 한겨레를 보게 하는, 말하자면 극우에 무감하던 사람이 ‘자유주의’라는 우파 본연의 교양을 얻게 되는 성과가 있었지만, 그 후폭풍으로 진보적 열기가 광범위하게 식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도처에서 그렇고, 심지어 고래도 신학기라고 생각하기 어려울만치 신규 구독신청자가 적다. 어쨌거나 촛불은 그 열기만큼이나 냉정한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면 전반적인 후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조금씩이라도 오버 안 한 사람이 없다보니 다들 머쓱한 분위기지만 그럴수록 겸허하고 정직한 평가와 성찰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대한다. 나 역시 글을 하나 쓸 생각인데, 주로 두 가지 오버에 대해서다. 하나는 ‘군중의 대규모 출현’만 있으면 그 정체성이나 배경은 제쳐두고 이성을 잃고 호들갑을 떠는 한국 인텔리들의 오랜 습성. 사실 이 문제는 사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매듭을 짓고 넘어갔어야 했는데(당시의 호들갑을 담은, 그러나 즉시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 책만 몇 권이던가!) 그렇지 못했다. 또 하나는 ‘현실적인’, 혹은 ‘합리적인’ 좌파를 자처하는 몇몇 자유주의자들의 행태. 이건 지난번 언급한 진보신당 내 상황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들의 방자한 행태는 촛불을 거치며 결국 도를 넘어서버렸다. 그들의 방자함이야 그들 스스로 책임질 인격의 문제지만 사회적 해악이 문제다. 오체투지 중인 수경스님에게 약속한 글이기도 해서, 정성들여 써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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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야 원 (규항넷, 2008/09/25 15:26)
현실사회주의가 패망한 건 그게 사회주의라서가 아니라 전제정이었기 때문이다. 전제정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혹은 다른 무슨주의든 상관없이 망하게 되어 있다. 부르주아들과 자본 진영에선 당연히 그걸 ‘사회주의의 패망’이라고 대중들에게 주장하고 선전해왔다. 그런데 현실 사회주의가 세계에 해악만 끼친 건 아니다. 만일 현실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왼쪽으로 당기는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 나라들엔 복지라는 게 애당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른바 ‘사민주의’라는 자본주의에 이식된 사회주의 시스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른바 사민주의자를 자처하며 ‘사회주의의 폐기’를 주장하는 바보들은 그 맥락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사민주의(민노당, 진보신당 등)가 여전히 기를 못 펴는 가장 큰 이유는 우파의 공격이나 모략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 세력이 지나치게 약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그 바보들이 소망하는 대로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사라져버린다면, 다시 말해서 사민주의가 한국에서 가장 극좌 세력이 된다면 한국에서 사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은 ‘0’이 되는 것이다. 아마 ‘유시민 대통령’ 정도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다. 이념이란 본디 자기보다 왼쪽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오른쪽은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제 이념이 현실이 되길 바라는 사람이 가져야할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나보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 존중하고 나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 혐오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바보들은 존중해야 할 사람들은 혐오하고 혐오해야 할 사람들에겐 보기 불편할 만큼 관대하(거나 유착되어 있)다. 그러면서 만날 제가 세상에서 제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좌파란다. 이거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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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 (규항넷, 2008/10/07 21:31)
사회적 악은 그 전모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라는 지랄 같은 마법적 복잡성의 사회에선 대개 그 일부만 불거져 드러난다. 그 말은 그 불거진 일부로 인해 나머지 부분이 은폐되기 십상이라는 뜻이며, 대개의 사람들은 그 불거진 부분에 집중하는 걸로 충분한 사회비판을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뜻이다. 지성이란 바로 그때 그 불거진 부분 덕에 가리어진 사회적 악의 나머지 부분을 폭로하여 사회적 악의 전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 한국사회로 말하자면 지성이란 대개의 양식 있는 사람들이 이명박이라는 불거진 악에만 집중할 때 이명박 덕에 가리어진 사회적 악의 나머지 부분을 폭로하여 사회적 악의 전모(물론,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를 ‘오해와 불편을 무릅쓰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 한국에서 지성이란 그 불거진 악에 집중하는 거대한 대열에 편승해 깃발을 꼽아대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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