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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 현장에 선 조세희 선생 인터뷰

새벽길 2009. 1. 23. 10:44
용산 참사를 본 사람들이 조세희 선생의 '난쏘공'을 떠올린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역시나 기자들도 조세희 선생 인터뷰에 나섰고, 용산 현장에 선 조세희 선생의 모습이 부각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현장에 선 그에게 용산 참사는 참담함 그 자체였으리라. 어떻게 30년 전의 일이 반복될 수 있는지 믿겨지지 않았을 테니까.
조세희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발췌하여 담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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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 "공동체 동족 죽인 경찰, 5·18 군인과 똑같다"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 2009-01-22 오전 1:04:54)
[인터뷰] "학살 막지 못한 우리도 죄인이다"
 
"내가 쓰면 이건 학살이다!"라고 쓸거야 (참세상, 이정원 기자, 2009년01월21일 23시20분)
[살인진압] 용산 현장에 선 조세희 선생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67) 작가. 1970년대 철거민을 비롯한 도시 빈민의 삶을 절절히 다룬 이 소설집은 '난쏘공'이라는 애칭으로 불려지며 순식간에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철거 현장을 오가며 소설을 썼던 조 작가였지만 용산 소식을 들은 충격에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 작가는 21일 지병으로 인해 그간 마다해 왔던 각종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했다. 몸이 좋지 않다며 이따금씩 하던 말을 중단했으면서도 저녁에는 용산의 참사 현장을 찾아 헌화했다. 용산 참사를 두고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난쏘공 쓸 때, 미래에는 이런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이런 슬픔, 불공평, 분배의 어리석음, 이런 정치로는 미래가 깜깜할 수밖에 없다, 이대로 가면 벼랑 끝을 향해 가는 것이다, '난쏘공'은 이 선을 넘으면 위험하다, 벼랑으로 떨어진다는 표시였다.
 
그런데 30년 동안 발전했다며 오늘에 다다랐다. 오늘은 21세기의 어느 날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한국도 굉장히 어려움에 처해 있다. 무엇으로 극복할 줄 모른다. 정치가, 경제가가 극복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가난뱅이에게 고통을 넘겨줘버리는 것이다. 왜 가난뱅이만 두들겨 맞고, 희생을 치르고, 잘사는 권력층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서 행복을 누리고 좋은 나날을 보내야 하나.
 
작년에 말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행복해 하는 자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라고. 지금도 취소할 생각이 전혀 없다. 한국이 존재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고생하고 있나. 비정규직 850만, 농민 300만이 있다. 지금까지 버텨온 건 착취의 방법이 달라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제 저녁에 내가 집에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던 건 어느 집에서 울면서 한숨을 내쉬고, 한탄을 하면서 괴로워한 덕이었다."
 
"어제 일은 더 충격을 줬다. 6명, 적은 숫자가 아니다. 어제 돌아가신 6명은 그 순간에 뭘 느꼈을까? 절망을, 뜨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나도 숱한 싸움을 옆에서 지켜보고, 카메라도 망가지고, 몸도 다치면서 공포심을 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사람이 갖는 공포심을 합해도 어제 6명의 그 공포심, 슬픔, 비극에는 비교를 할 수 없다.
 
경찰은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수행했다는 5.18때의 동족을 학살한 미개한 군인과 똑같다. 어제 경찰은 80년 5월 한국의 특전사 병사처럼 자기 임무를 유기했다. 군대나 경찰은 우리 공동체, 이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임무를 유기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을 죽였다."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 자기 형제나 친구가 6명 중에 끼어 있었다면 어젯밤 잠자리가 어땠을까. 또 어제 이 대통령은 밤을 지새웠을까. 그 아래 사람들은 어제 일을 가지고 밤에 고민을 했을까. 나의 동시대의 문인 작가들은 잠이 제대로 왔을까.
 
여섯 명이 죽었다. 내 '난장이' 소설에 보면 경찰의 곤봉이나 군대의 총만이 폭력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 시대의 어느 아이 하나가 배고파서 밤에 울면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그치게 하지 않고 놔두는 것도 폭력이라고 했다. 어제 어마어마한 폭력이 가해졌는데도 우리가 그냥 지나간다면 죄를 짓는 것이다.
 
여러분이나 나나 똑같이 동시대 구성원이다. 우리 형제들이 그 추운 날 옥상 건물에 가 있을 때 우리가 거기에 물을 뿌리고, 그 뜨거움 속에서 죽게 하진 않았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죄가 없나? 그렇지 않다.
 
그 범죄 행위, 학살 행위를 미리 막지 못한 것이 우리의 죄라는 말이다. 동시대인으로서 다 같은 죄인이다. 이 말을 하러 나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우리가 그 죄에 연루되지 않도록 우리 책임을 다하자는 말을 드리고 싶었다."
 
"막자. 불행을 막자. 아는 사람들은 일하자. 적과 만나서도 토론할 것 있으면 하자. 우리 안에는 힘이 있다. 몇 사람이 모이면 힘은 배가 된다. 이 힘을 알아야 한다. 토론을 하고, 싸워야 할 자리가 있고, 촛불을 들 자리가 있을 때 한 사람의 힘을 보태는 것은 중요하다. 권력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 가면 한국에 비극이 또 일어난다.
 
독재라는 말을 쓰지 않을 뿐이지 민주주의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지 않나. 민주주의가 제대로 된다면 남의 평화, 자유, 행복을 지켜줘야 한다. 그런데 비정규직도 그렇고 수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 내가 보기에 한국은 집이 부족한 게 아니라 지혜가 부족하다. 그리고 20대들은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라. 냉소주의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공동의 일, 공동의 숙제를 해낼 수가 없다. 냉소주의는 우리의 적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노작가는 기자들에게 언론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았다. "애매모호하게 쓰지마. '내가 쓰면 저건 학살이다! 학살을 멈춰라!' 라고 쓸거야." "써야 할 게 가득 쌓여있는데 쓰질 않아" "언론사가 무덤같다"고 했다.
 
[동영상]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추모제'에 참석한 조세희 작가 발언 (참세상, 2009년 01월 21일)
"저는 작은 촛불 하나를 갖고 왔습니다"
 
30년 전 철거민의 삶을 다룬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쓴 작가 조세희. 그는 이번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을 어떻게 느꼈을까. 21일 용산 현장에서 열린 '희상자 추모제'에 참석한 조세희씨는 스스로를 '나약한 작가'라고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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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님 인터뷰 - “노동자들 신음소리에 숨이 막힌다” (2004/11/28 05:11)
 
얼마 전 한겨레신문에 조세희 선생을 인터뷰한 기사가 있던데, 그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레이버투데이의 인터뷰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혹자는 조세희 선생이 아직도 '난쏘공'을 썼을 때의, 1970년대의 뒤떨어진 감각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현재와 소통하고 있는 그가 느끼지는데, 저의 감각도 낡은 것인지....
 
그는 노동자들의 신음소리를 매일 같이 듣기에, "숨이 막힌다”고 합니다.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위해 총파업에 나서야만 하는 오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오늘이 그를 제대로 숨 쉴 수 없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세희 선생은 "무엇보다 역사의 진보를 믿고, 시간이 지나면 밀림에서 나와 앞이 확 트인 개활지를 언젠간 보게 될 거라 믿"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하기에 공무원노조의 투쟁을 지지했구요.
   
“나는 정말 무서운 것은 ‘무지’라는 생각을 종종 해. ... 우리 공동체 안의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공포심에 사로잡힐 때가 많아. ... 파업 참가자들에 대한 전원 중징계·파면·해임 또는 ‘전교조식으로 복직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들을 쉽게 하는데, 아직 정리하지 못한 가까운 과거의 일들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런지 우리 시대의 이런 무지와 잔인함에 난 몸서리가 쳐져. 이때 들리는 파면·해임·복직불가라는 말이 내게는 ‘너희는 직장에서 쫓겨나고, 너희 가정은 이 어려운 시절에 경제적 압박을 못 이겨 파괴되고, 너와 가족은 피눈물을 흘릴 것'이란 말로 들려. ... 그러나 이걸 알아야 해. 긴 독재시절 함께 죄 짓고 그 죄의 단물 빨며 잘 살아 온 썩어문드러진 인간들이 자기들한테 좋도록 우리나라가 더 오래 재난에 빠져 허덕이게 하고 싶겠지만, 우리 역사는 오늘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 무엇보다 공직사회 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을 앞세운 공무원노조를 이젠 아무도 죽일 수 없어.”
 
“우리가 꼭 구호나 투쟁 몸짓으로 만나는 건 아니어도 어떤 연대의 시간을 가질 때, 그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생활 자체가 나에게로 와서 나를 흔들지. 그래서 나는 작품은 많이 못 써도, 내 안에는 여러 편의 작품이 들어 있다고 말하지.”
 
조세희 선생을 집회 중에 가끔 보기도 합니다. 특히 민지네 식구들이 이라크파병반대집회에서 '파병 강행, 노무현 퇴진!'을 외칠 때 함께 하시면서 힘을 주셨지요. 이럴 줄 알았다면 몇컷 함께 찍을 걸 그랬나봐요.
 
“사람은 생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죽기까지 누구나 한 번은 절규한다고 해. ... 어느 역사에든 빛나는 순간이 있어. 그 순간의 역사가 빛나는 건, 절규하는 사람의 절규가 너무 진실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워서 후대 사람들이 버리지 않고 잘 모아 놓았기 때문이야.”
 
모 소설가가 '시대와의 불화'라는 글을 썼던 것처럼, 이제 누구나 불화를 얘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세희의 불화는 조금은 다른 것이겠지요. 이를 배우고자 합니다. 저의 진보넷 아이디인 '외길'처럼 말이죠.
 
“외길 가는 사람은 외로워도 그 길 가야 돼. 그래야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