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는 재미/사람들도 만나고

박재동 예종 교수, "시사만화가는 '매일' 역사를 비평한다" (프레시안, 08-12-18)

새벽길 2008. 12. 18. 22:15
아직 박재동 교수를 실물로 본 적은 없지만, 왠지 친숙한 느낌이다. 
그가 쓴 '만화, 내 사랑'도 참 흥미롭게 봤다. 물론 그가 한겨레에 그렸던 만평이 가장 인상 깊었고...
한컷만화, 나아가 글보다 더 전달력이 강한 만화의 힘을 그의 작품을 통해 깨달았다.
그런데 언제 교수가 되셨나?
 
----------------------------------------------
"시사만화가는 '매일' 역사를 비평한다" (프레시안, 정리=김하늬 김선영 사진=이해곤, 2008-12-18 오후 4:28:40)
[세명대 저널리즘특강]<6> 박재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만화같이 살면서 '할 말은 하는 사람'
옷깃에 가죽을 덧댄 짙은 회색 코르덴 자켓을 입은 은발의 사내가 성큼 강의실로 들어왔다. 추운 날씨였지만 붉은 털실 목도리와 목덜미까지 덮이는 장발이 따뜻해 보였다. 뒷머리는 꽁지머리로 묶었고, 옆머리는 자유롭게 늘어뜨렸다. 옆으로 둘러 맨 큰 가죽 가방을 털썩 내려놓는 뒷모습이 백발만 아니면 삼십대라 해도 믿을 만했다. 그는 자신의 훤칠한 키를 패션에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 박재동 화백은 초등학생 때 그린 불조심 포스터를 설명하면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지금 봐도 흥분된다"고 말했다.ⓒ이해곤
 
박재동 화백은 패션에만 꼼꼼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의 산책>이라는 수업을 맡고 있는 교수이자, 매주 금요일 <한겨레>에 '손바닥 아트'를 연재하는 시사만화가이다. 부산 울산 통영을 누비며 만화그리기대회와 아트페어에 참가하고 시사만화100주년추진위원회 사업을 돕고 있다. 지난 여름 촛불집회 때는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와 표정을 캐리커처로 그려 <오마이뉴스>에 올리기도 했다. 종종 만화축제나 문화제에 불려가 특강을 하고,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개정판에 삽화를 그려 넣는 등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즘은 또 해금을 배워 얼마 전 홍대 앞에서 그림전시회를 겸한 야외 연주회도 열었다.
 
박 화백은 2시간 반 가량 강의 앞뒤로도 빡빡한 일정이 잡혀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넌더리를 칠 법한 스케줄을 지난 이십여 년 간 짊어지고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지치지 않고 이곳저곳에 등장해 새로움을 선보이는 박 화백의 열정, 그 원천이 궁금했다.
 
송곳으로 방바닥에 그린 그림도 칭찬해준 부모님
박 화백이 부산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집은 만화 대여점이었다. 요즘 만화와는 다른 그림소설 형식이었지만, 박광현의 <그림자 없는 복수>, 박기당의 <만리종>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우영 화백이 '추동성'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한 <아짱에>라는 만화 속 화면에 가득 찬 그림을 보며 어린 박 화백은 '그림책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만화의 한 페이지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박 화백은 또 다시 "캬~"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금도 영화를 챙겨본다는 박 화백은 어릴 적부터 영화광이었다. 그림과 영화의 공통점, 즉 '생동감 있는 메시지 전달'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자신이 그린 그림에 나름대로 멋진 제목을 붙이곤 했다.
 
그는 CD에 담아온 자신의 그림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온 몸을 사용했다. 바다와 파도를 설명할 때는 입으로는"처얼썩"소리를 내면서 손뼉을 쳤고, 송곳으로 방바닥 장판에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린 이야기를 할 때는 "내가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멋진 생각인거야. 캬~"하며 서너 번 고개를 흔들어댔다.
 
"당신들보다 어렸을 때 그린 그림이지만 너무 잘 그렸다고 놀라지들 마."
그의 표정과 몸짓에는 타고난 익살과 넉살이 배어나온다. 타고난 소질이 일찌감치 개발될 수 있었던 것은 박 화백의 노력에 부모의 뒷바라지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떡볶이 가게와 만화 대여점을 하면서도 화구는 아낌없이 사주었다. 장판에 송곳으로 그림을 그린 철부지 '재동'에게 부모님은 "잘 했구나"라며 칭찬을 하곤 다음날 조용히 새 장판으로 바꾼 일도 있었다. 그는 "감상과 칭찬으로 아이의 우주를 키워준다면 장판 값은 비싸지 않은 영재교육비"라며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만화는 깨달음과 웃음을 한꺼번에 준다"
박 화백이 강의실에서 펼쳐 보인 중학교 일기장에는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시골 댁을 다녀오는 길을 그림일기로 정리한 솜씨는 대학생 작품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터미널에 줄지어 서 있는 버스 옆에서 잠시 쉬고 있는 운전기사를 놓치지 않고 그려 넣었다. 저 멀리 길을 건너는 어린이도 포착했다. 버스 안 모습은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정면 모습을 상상해서 그렸다. 그의 그림 속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람을 관찰해온 덕분에 촌철살인의 시사만화가 박재동이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것은 저널리스트가 꼭 갖춰야 할 관점이기도 하다.
 
꼼꼼히 기록하고 남기는 습관은 이제 오만 잡동사니들을 버리지 못하고 방에 쌓아둘 정도가 됐다. 그의 방에는 명란젓병 과자봉투 병뚜껑 전단지 등이 만물상 또는 쓰레기장처럼 그득하다고 한다. 가족들은 박 화백이 수집하는 종류가 많아지면서 아우성이다.
 
"가족 다들 미치려고 해. 나도 미치겠어. 내가 왜 이러는지. 그런데 생각해봐. 3만년 후 후손들이 우리가 지금 먹은 명란젓을 연구할 수도 있어. 내가 이렇게 모아두면. 사실 이 수업도 말이지, 이상한 노인이 나타나서 여기 사람들을 다 데리고 과거로 여행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의 강의는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세계로 빨아들여 함께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강의 도중 재킷 윗주머니에 꽂혀있는 만년필을 자주 만지작거렸다. 무의식적인 손 습관은 그가 기록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는 그저 그림일기만 그리는 소년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 첫 풍자만화를 그렸다. 왼손에는 고기를 쥔 채 오른손에는 '살생 금지'표지판을 쓰고 있는 스님을 그렸다. 그의 첫 풍자만화였다.
 
▲ 박 화백이 처음 그린 풍자만화.
"나는 설명 없이도 위선을 드러내는 한 장의 그림이 그리고 싶었어. 만화는 깨달음과 웃음을 한꺼번에 줄 수 있잖아."
 
대학 졸업 후 다니던 괜찮은 일러스트 회사를 접고 <한겨레> 시사만평으로 달려간 이유도 거기 있었다. 그는 그 때 결심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시민들은 기가 죽어있었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까? 자기 검열이 먼저인거지."
 
저널리스트로서 시사만화가가 지켜야 할 세 원칙
신생 언론사로 가면 당분간 생계가 힘들 수도 있지만 시대의 요구를 드러내는 민주적 운동에 재능을 쏟을 것을 다짐했다. 그가 한겨레 만평에 낸 첫 만화는 <다윗과 골리앗> 이었다. 작은 소년 다윗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으로, 거대한 괴물 골리앗은 독재정권으로 묘사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듯 민주주의의 승리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는 <한겨레>에 있으면서 저널리스트로서 시사만화의 원칙을 세웠다.
 
'팩트에 충실할 것'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이 아닌 철학적 사고를 담은 사회적 비판을 할 것'
'날 선 비판보다 공감을 이끌어내는 비판을 할 것'
 
팩트가 부정확해 독자들의 항의를 받았을 때는 정직하게 사과하는 것도 또 하나의 원칙으로 정했다. 한강 상류의 축산폐수가 정화되지 않고 유입된다는 기사를 보고 만평을 그렸을 때는 "한강 오염의 원인이 축산 폐수 하나뿐인 것처럼 그려졌다"는 축산업자의 항의를 받았다. 일리가 있어 싹싹하게 사과했다. 사과를 하는 것도 언론의 신뢰를 쌓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내가 칭찬받으려다가 죽는 줄 알았다, 요것아"
외국에서는 18세기부터,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사만화가 그려졌다고 한다. 어찌 보면'시사'와 '만화' 두 단어의 조합은 어색하다.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를 만화책과 소설책, 만화프로그램과 뉴스프로그램의 차이로 인식해 온 탓인지도 모른다. 시사만화는 어른들 얘기를 아이들 만화처럼 표현한다는 뜻 같기도 하고, 순수한 아이의 눈으로 세상사에 질문을 던진다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박 화백이 처음 <한겨레>에 연재를 할 때도 시사만평은 신문 속 양념이나 볼거리 정도로 여겨졌다고 한다. 시사만화를 양념으로 두지 않고 장르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만화의 완성도와 시사적 메시지, 두 가지를 잡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고 한다. 최근 사건 위주로 시사만평을 준비하는 일간지 특성상 정보가 부족할 수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박 화백은 직접 취재하러 현장에 나갔다. 동시에 누구나 알기 쉬운 대중 예술로 만들기 위해 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기도 했다. 자신의 만평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사에 어둡다'고 상대방을 무시하기 전에 스스로 실력부족을 탓했다.
 
"아무리 취재를 많이 해도 만화는 기사처럼 좍 기사로 못쓰잖아. 만화에 긴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건 실패란 말이지."
 
한번은 자신의 시사만화를 인사동 갤러리에서 전시했을 때 한 후배로부터 "선배 만화는 좋긴 한데 가끔 그저 그럴 때도 있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후배의 평가에 펄쩍 뛸 듯 화가 나면서도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타인의 평가에 과민했지만, 훗날 그 뼈아픈 평가를 칭찬으로 돌려받겠다는 각오를 작품에 녹여 넣었다.
 
몇 해 뒤 그 후배가 "선배 만화는 정말 대단하다"는 말을 했다. 기분이 좋았지만 속으로 외친 한마디.'내가 그 말 들으려고 하다가 죽는 줄 알았다, 요것아!'
 
그 후배 덕분에 자신의 시사만화도 독하게 '업그레이드'됐으니, '후배한테 배운다'는 말이 실감났다고 했다.


▲ 박재동 화백의 대표작중 하나인 <올챙이의 죽음>ⓒ<한겨레>
 
역사를 기록하고 해석하려면 현장에 가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푹 빠져있는 사람만큼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박 화백은 이룬 것 다 이룬 행복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그래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곳도 많다. 탄탄대로에 들어선 고속버스가 아니라 이곳저곳 들르는 시골버스와 같다고나 할까? 바쁘면서도 오만 데 눈길이 간다. 최근에는 삶의 긴 호흡을 다룬 만화 에세이집 <인생만화>를 냈다.
 

▲ 4.3희생자 유골 발굴 현장에서 그린 <손바닥 아트> ⓒ <한겨레>
 
그러나 역사를 하루 단위로 나눠 비평하던 일간지 시사만화가 시절의 소명의식을 잊은 적이 없다. 시사만평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큰 만큼 역사적으로도 떳떳해지고 싶고 한편으로 책임을 지고 싶다고 했다. 매일 나가는 건 아니지만 <한겨레>에 주간 단위로 연재를 시작한 <손바닥 아트>에서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그의 역사의식이 느껴진다.
 
얼마 전 제주도 공항 부지에서 4.3 집단희생자 유골이 발견됐을 때도 박 화백은 직접 그 곳에 가본 뒤 그림을 그렸다. 뒤엉킨 유골과 일그러진 해골의 표정이 해학적이다. 유골 위로 떨어지는 잔잔한 꽃잎과 전제적으로 따뜻함을 간직한 색감에는 그의 안타까움이 서려있는 듯하다. 그는 과거에도, 그리고 오늘도 '할 말은 하는 저널리스트'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