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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도주’ 일생 이관술 (2008 12/09 위클리경향 803호, 김성동)

새벽길 2008. 12. 11. 21:13
나중에 이관술 평전을 읽어봐야겠다. 이 책을 읽어본 모 동지는 별로 재미없었다고 했지만, 그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지금은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면서 이관술에 대해서도 다르게 평가하게 되었지만, 과거에는 TV의 반공드라마 속에 나오는 왜곡된 이미지로만 남아 있었다. 아마 일제하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렇게 악의 화신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이것은 보수언론을 통해 제공되는 파편적인 정보제공 속에서 그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하고 있으리라. 
 
이런 까닭에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가 하는 관점이 중요하다. 꼴보수들이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현대사특강을 강행하고, 역사교과서 수정을 시도하는 것도 이런 시각에서 파악해볼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막무가내식으로 밀어부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게다가 지금의 역사 교과서가 오히려 우편향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더 타당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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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리랑]‘끝없는 도주’ 일생 이관술 (2008 12/09 위클리경향 803호, 김성동)
땅불쑥하였던 수더분한 혁명가
 
옥중에서 이관술. <사회평론 제공>
"나의 과거 생활 중 가장 유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체포되었을 때 박헌영 동지와 동생 순금의 주소를 말하라고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 기로에 처했는데 나는 죽기로 맹세하고 13일간을 단식하다가 전에 함남 지방에서 일하던 것을 이용하여 허구를 꾸며서 그들을 감쪽같이 속인 일이다. 그리고 3일간을 단식한 후 쓰러진 체하여 의사를 부른 사이에 미리 병에 받아 놓았던 커피를 머금고 있다가 의무실에 가서 각혈을 하는 것같이 토하여 보석을 하게 만든 것 등이다.”
 
서울 소공동에 있는 근택빌딩 2층 조선공산당 사무실이었다. <조선인민보> 기자와 마주 앉은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李觀述)은 여간 쑥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었다. 1946년 4월 16일.
“이관술씨는 그의 피로 쓴 지하운동의 과거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동고보·동경고등사범 나와
다음날 실린 인터뷰 기사 머릿글이다. 김태준(金台俊)이 쓴 <이주하론(李舟河論)> 뒷면이다. 이관술 인터뷰 기사 위쪽에는 ‘조공, 형극의 길 21년’이라는 제목 아래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식 모습이 실려 있다. 우익 쪽에서 펼쳐오는 온갖 정치공작들이 심상치 않았지만 4층짜리 근택빌딩 유리창에 부딪치는 햇살은 따스하였다. 캄캄한 땅밑으로 숨어다니며 모진 일제와 싸우던 이관술이 일간지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이미 바뀌었다는 것을 웅변하여주고 있다.
 
“내가 주의사상을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은 1929년 저 유명한 광주학생사건 때부터였다. 나의 쓰라린 경험을 말하면 한 없다. 1934년 12월에 4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이재유 동지와 강원도로 낙향하게 되자 양주로 가서 참외막을 만들고 그것을 아지트로 쓰면서 한 해 참외농사를 하여 가며 서울과 연락하다가 이재유 동지가 돌연 체포되었고 나는 피하여 4개월 동안을 엿장수 쓰레기장수 봇짐장수 등으로 몸을 감추고 다녔다.
 
1937년 12월 대구로 갔을 때는 몸만 감추기도 대단히 곤란한 때라 처음에는 다리 밑을 집으로 삼았고 거기까지 마수가 뻗치게 됨으로 이곳저곳 다리 밑 집을 이사다녔던 것이다. 그후 43년 12월 보석출옥하여 44년 4월에 대전을 중심으로 솥때움질을 하면서 전남 지방을 왕래하면서 주로 반전운동을 지도하다 8·15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관술은 1902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경성콤그룹 맹장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인 이순금(李順今, 1912~?)의 배다른 오라버니다. 유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 중동고등보통학교를 나와 동경고등사범학교 지리역사과를 마쳤다. 동경고사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많은 책들을 읽기는 하였으나 본격적으로 민족문제와 사회문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동덕고등여자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부터였으니 1929년이다.
 
동덕여고 교무실. 이관술은 동덕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사회평론 제공>
처음에는 그저 관념적인 민족주의자에 지나지 않았다. 교육자가 된 것도 청년들을 올바르게 가르쳐 잠들어 있는 민족정신을 일깨워보자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맑스엥겔스 사상에 다가가게 된 것도 거기에 암담한 우리 민족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다가 맞게 된 것이 광주학생항쟁인데, 일제에 아부하고 타협해서 저희들의 계급적 이익을 지켜나가는 이른바 민족주의자들 실체를 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배하는 계급도 없고 지배당하는 계급도 없이 더불어 함께 일해서 함께 먹는 공산주의사상만이 옳은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햇빛에 그을린 것처럼 낯빛이 남달리 검어 ‘물장수’라는 애칭을 듣던 이관술의 임김과 보살핌을 받은 동덕고녀생들은 경찰관들 교내 침입 반대와 성실한 교육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벌이는데, 광주학생항쟁 물결이 밀려온 것이었다. 3·1운동과 함께 29년 일어난 광주학생항쟁은 민족해방 투쟁사에서 커다란 고빗사위(분수령)가 된다. 3·1운동이 박헌영·김단야 같은 막 20대로 접어든 젊은이들을 공산주의혁명 길로 나서게 하였다면, 중고등학생들까지 공산주의사상에 동조하게 만든 것이 광주학생항쟁이었다. 이른바 계몽론으로 무장된 민족주의자들 실체가 참으로는 자기들 계급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한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이른바 민족주의 세력들 항일운동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니, 민족개량주의나 주장하는 관념주의 항일로 떨어지고 만다. 몇몇 결사체가 있었다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면피용 시늉에 지나지 않았고, 민족해방투쟁 목대를 잡게 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졸렬한 외관과 달리 혁명가적 열정
“그 다붙은 이마, 옹졸하게 생긴 얼굴에 검은 안색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그 전직인 솥땜쟁이로밖에 보지 않을 것이며, 좀더 높이 평가한다면 궁촌의 한문훈장으로밖에 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관찰하면 그의 옹졸하게 생긴 얼굴에는 어딘가 이지에 빛나고 있으며, 양식에 빛나고 있으며, 결백한 심혼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좀더 친숙해지면 질수록 그 양식과 양심적인 그리고 개결한 심혼 앞에서 누구나 감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김오성(金午星, 1908~?)이 본 이관술 생김새이다. 46년 9월 대성출판사에서 나온 <지도자 군상>에는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두봉, 무정, 장건상, 성주식, 이주하, 김성숙, 홍남표, 유영준, 이여성, 이강국, 최용달, 김세용 같은 쟁쟁한 사회주의 갈래 독립투사들 인물평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땅불쑥한(특이한) 것이 이관술이다. 이른바 정치가라는 것은 대중을 제압하는 외양도 필요하고 대중을 설득하는 언변도 필요한데, 이런 것이 조금도 없는 사람으로 어떻게 인민들의 열화 같은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된 것인지 놀라워 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관술씨야말로 일점의 사욕이나 명예욕을 갖지 않은 청렴한 지사형의 인간이다. 나는 그가 중앙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에 한 번도 그 자리에 나와 앉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무슨 권세의 자리처럼 자기의 실력도 없으면서도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애쓰건만 이관술씨는 자기의 기능이 거기에 해당치 않음을 깨닫고 시종일관 사양하여 나오지 않고, 오직 자기가 지켜야 할 공산당의 부서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이관술의 배다른 동생 이순금이 <현대일보>에 이관술의 무고함을 알리는 글을 실었다. <사회평론 제공>
그는 결코 화려한 외관을 타고난 인간은 아니다. 그리고 기발한 착상이나 탁월한 수완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말하자면 외관은 졸렬하고 특이한 기능은 없는 범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졸렬한 범부가 가진 혁명가적 정열과 성의와 계급적 양심은 세간의 모든 범부가 따를 수 없는 씨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인민의 의사를 들을 줄 아는 겸손과, 인민의 이익을 옹호할 줄 아는 정의감과,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애국적인 정열은, 모든 범부가 따를 수 없는 씨의 인간적 영역인 것이다.”
 
반제동맹 사건으로 1년 2개월 징역을 살다가 병보석으로 나온 1934년 무렵 동덕고녀 제자였던 박선숙(朴善淑, 1909~?)과 왜경 눈을 피하여 몰래 혼인하였다. 함흥 출신인 박선숙 또한 몇 차례 징역을 살며 독립운동에 매진한 이관술의 사상적 동지였다. 오랜만에 귀가한 이관술과 잠자리에 들었던 두 내외는 겹겹이 둘러싼 형사대에 잡혀 징역을 살게 되는데, 박선숙 뒷이야기는 알 수 없다.
 
1934년 9월 초, 이관술은 동덕 제자였던 박진홍(朴鎭洪)을 통하여 이재유(李載裕)와 만나게 되고, 김삼룡·이현상·변홍대·안병춘·이순금 등과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한다. ‘트로이카’라는 것은 삼두마차(三頭馬車)를 뜻하는 러시아 말로, 3명씩 한 동아리를 이루어 겹고리로 퍼져나가는 공산주의자들 특유의 조직체계이다. 지도부가 위에 있어 지시하고 감독하는 체계가 아니라 저마다 중심이 되어 하나의 둥근 원을 이루어나가는 아주 민주적인 조직 개념이다. 항일투쟁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던 ‘경성트로이카’는 여덟 달 만에 그 주요 구성원들이 체포됨으로써 무너지는데, 이재유는 잠수한다. 이현상은 7년, 김삼룡은 5년 선고를 받고 긴 감방투쟁에 들어가고 이관술은 16개월 만에 가출옥한다. 이재유는 34년 1월 붙잡혔으나 유치장에서 탈출하여 ‘매우 전투적인 좌익교수’인 경성제대 미야께(三宅) 집에 숨어 있다가 미야께가 체포되자 도로공사장 인부로 위장하고 이관술·박영출(朴英出, 1908~?)과 경성재건그룹을 조직한다. 41년 1월 체포된 이관술은 2년 만에 나왔고 8·15까지 지하활동이 이어졌다.
 
이관술은 이재유와 함께 2개월 이상 강원도 영서지방 산속으로 숨어다니던 끝에 이제 서울 도봉구 창동인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새주막거리 비석골로 들어간다. 거기서 2년 가까이 위장 농군으로 지내게 되는데, 이재유는 경성을 넘나들며 조직 재건에 힘쓰고, 이관술은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 <적기(赤旗)>를 ‘가리방 긁어’ 제작한다. 36년 12월 25일 수백 명 형사대에 둘러싸여 이재유는 체포되고, 이관술은 도주한다. 6년 만기를 채운 이재유는 다시 청주예방구금소로 옮겨져 ‘보호관찰’당하던 끝에 눈을 감으니, 44년 10월. 해방을 10개월 앞둔 때였다.
 
남북 양쪽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아
이관술의 일생은 끝없는 도주였다. 대전으로 가고 대구로 갔다. 전라도로 가고 경기도로 갔다. 솥땜쟁이, 엿장수, 넝마주이, 풍각쟁이, 동냥아치로 변장만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런 사람들과 한몸 되어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며 노동자 조직을 만들고 트로이카 식으로 작은 동아리들을 만들어 반제반전 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이관술은 해방 직후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 지도자 5인 가운데 든 사람이다. ‘선구회’라는 이승만계열 우익단체에서 한 여론조사였다.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 최현배 7%, 김규식 6%, 서재필·홍남표 5%. 경제부장에서는 2위이다. 백남운 215표, 이관술 98표, 박헌영 36표, 김규식 34표.
 
이관술이 체포된 것은 46년 7월 6일이다. 위조지폐를 찍어냈다는 터무니없는 쏘개질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이관술은 고립무원이었다. 박헌영과 이강국, 이승엽은 북으로 올라갔고 김삼룡·이주하·이현상은 지하로 들어갔다. 조선공산당은 불법단체가 되었고 기관지는 폐간당하였으니, 구명을 위하여 힘써줄 단체도 사람도 죄다 없어졌다. 6·25 직전, 면회를 간 고향 쪽 친척들에게 한 말은 책을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돌아간 날짜도 모른다. 6·25 직후 7월 3일부터 15일 사이에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좌익수와 충북·전북·경북에 춘천형무소 쪽 좌익수들까지 끌어다가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뼈잿골에서 학살하였는데, 최소한 8000명이 넘는다.
 
식구들은 물론이고 일가친척들도 무수히 결딴났다. 1992년 남은 친척들이 무덤도 없는 이관술을 기리기 위한 빗돌을 세웠는데, 우익단체들이 뽑아버렸다. 평양 근교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도 이관술 이름은 없다. 남북 양쪽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은 중음신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