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진보정당과함께

강동진. 2008. "좌파정당운동에 대한 사고의 편린들." 「문화/과학」 2008년 여름호 (통권54호)

새벽길 2009. 1. 6. 12:13
강동진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운동권 인맥에 연연하는 것과 함께 상호간의 불신이 해소되지 않는 한 쉽지 않은 과제이다. 과거에 저지른 몇 가지의 오류를 침소봉대하면서 자신들만의 독자성과 우월성의 근거로 삼는 좌파정치조직들의 행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강동진의 주장이 먹힐리 없다. 
 
무조건 대동단결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원칙있는 연대를 하면서 좌파정당운동을 모색하자는 것인데, 왜 이리 어려울까나.

 
강동진. 2008. "좌파정당운동에 대한 사고의 편린들." 「문화/과학」 2008년 여름호 (통권54호): 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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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정당운동*1)에 대한 사고의 편린들
강동진(진보전략회의(준) 회원)
* ‘좌파정당운동’이라 함은 필자 주관적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서 명확하게 신자유주의 반대를 표명하는 정치, 정당운동을 일컫는다. 이른바 자유주의세력, 개혁세력도 ‘신자유주의 반대’를 천명하기는 하나, 이는 신자유주의 전략과 정책 중 일부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거나, 정치적 수사로서 동원되는 것일 뿐이다. 시민운동세력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다고 했을 때 ‘좌파정당운동’에 포함되는 세력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한국 사회당, 초록정치연대 그리고 노동자의힘을 비롯한 노동자계급정당을 주장하는 세력 등이다. 또한 한편으로 이들은 ‘반자본’이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1
분명한 사실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든, 아니면 제도정치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표현한 것이든, 투표율이 5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대중의 제도정치에 대한 이탈이 심각하다는 점일 것이다(강동진, 2008: 200).

보수정치의 불안정성은 ‘강부자’ ‘고소영’으로 불려지는 이명박 초기 내각, 청와대의 인사정책에 대한 불신, 영어몰입교육과 교육자율화로 표현되는 불도저식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 국민 2/3가 반대하는 대운하 강행의지에 대한 저항, 그리고 ‘광우병 쇠고기 협상’의 무능, 졸속, ‘조공 외교’로 표현되어지는 일방적 굴욕이 이어지고 맞물리면서 두달밖에 지나지 않는 정권의 지지율이 반토막 나버리는 데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촛불집회’로 대중들의 정치적 행동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정부는 7ㆍ80년대식의 대응을 통해 이를 무마하려는 ‘반동성’마저 내비치고 있다. 다시 민주주의의 위기가 본격화되고 있는 시대를 진보운동은 마주하고 있다(강동진, 2008: 201).
 
2
지배정치구도, 보수정당체제의 불안정성이 곧바로 좌파정당의 도약과 약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97년 이후 좌파정당운동은 2004년 총선에서 단기간의 약진을 제외하곤 노동자ㆍ민중의 희망으로 자리잡은 적이 없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민주노총당이란 평가는 ‘대기업 정규직’의 이해만을 대변하고 비정규직을 포함하여 더 광범위한 미조직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였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로 이 평가 내용은 좌파정당의 대중적 토대를 더욱 확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보다는 보수정치와 언론의 ‘정규직 이기주의’ 이데올로기 공격에 방어적 혹은 이를 회피하려는 시각에서 제기된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문제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적ㆍ정책적으로 오른쪽으로 경도될 것이 분명한 외연확대의 문제가 아니라 좌파정당이 대중의 바다에 얼마나 깊고 넓게 자리잡을 것인가이다(강동진, 2008: 201-202).
 
북핵이든 북한 인권의 문제이든 이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태도와 입장의 문제로서, 이에 대한 생각의 차이는 분명 있을 수 있다. ‘종북’이란 평가는 이를 넘어선다. 정당의 강령, 노선, 전략의 문제이다. ‘종북’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서로의 차이가 분명하다면 이는 하나의 정당 안에서 논쟁과 토론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데모당’이란 평가는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을 폄훼하는 것이다. 원내 의석이 극소수인 조건에서, 대중운동이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실에서 아직은 대중운동이 더 활성화되어야 하고,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더욱 기여할 진보정당은 지금보다 더 많은 ‘데모’를 해야 한다. 그것도 제대로 말이다(강동진, 2008: 202).
 
3
좌파정당운동이 위기를 맞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현 신자유주의체제를 뛰어넘을 비전과 가치, 그리고 이를 구체화시키는 전략과 운동의 부족에 있다 할 것이다. 대중의 욕망에 자리잡은 ‘성장과 그에 따른 이익’을 뛰어넘을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가치와 삶의 원리,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데에 있다. 2002, 2004년 선거에서 보여줬던 ‘무상의료, 무상교육, 부유세’ 등의 사안별 전략에서 더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전략과 운동이 부재했다. 대선 시기 어느 좌파정당 후보의 말처럼 ‘신자유주의 반대’ ‘자본주의 반대’는 ‘가치와 도덕’일 순 있어도 ‘전략과 운동’으로 설정하기엔 ‘2% 부족’하다. 역설적이게도 좌파정당에 좌파정치가 부재하다. 그 결과가 위기를 낳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단초는 우선적으로 최근 회자되고 있는 ‘진보의 재구성’이란 언명처럼 자기정체성에 대한 정립1)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의 확립은 추상적인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치 중심으로 정체성을 얘기한다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한국 사회당, 초록당, 계급정당으로 나뉘어질 필요가 없다. 이러한 가치에 모두들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치중심의 정체성’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강동진, 2008: 203-4).
 
좌파정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모색과 논쟁, ‘진보의 재구성’ 과정은 사민주의, 사회주의, 사회적 공화주의 등 80년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사회구성체 논쟁을 이어 21세기에 걸맞은 사회적 이념과 대안전략을 둘러싼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 좌파정당운동을 ‘하나로 모여라’라는 당위로 결집시키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서로의 존재가 서로를 갉아먹는 경쟁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며 상승하는 길항관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윤리가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강동진, 2008: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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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정당들의 재편과 재구성은 사실 당운동 그 자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87년 이후의 노동자운동의 성장과 96, 97총파업투쟁의 효과가 민주노동당을 낳고, 노동자 대중운동과 학생대중운동에 기반한 여러 정치세력이 한국 사회당을 비롯한 현재 정치세력의 흐름을 탄생시켰다. 현재 좌파정당운동의 위기는 노동조합운동, 학생운동 등 대중운동의 위기와 동떨어진 게 아니다. 향후 ‘새로운 좌파정당운동’을 추동할 대중운동은 침체에 휩싸여 있다. 
 
사실 한국 사회 내의 운동의 질곡과 정파적 분열은, 그리고 그에 따른 대중운동의 질곡은 민족주의 노선을 제외한다면 ‘당운동 노선’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당운동’과 관련한 논쟁은 ‘전략당이냐 전술당이냐’ ‘합법정당이냐 아니냐’ ‘혁명정당(전위정당)이냐 아니냐’ ‘반자본 정당이냐 아니냐’ 차원에서 제기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진보적민주주의, 사민주의, 민주적 사회주의, 사회적 공화주의, 21세기 사회주의, 당운동비판(비국가변혁) 등으로 콘텐츠를 함유한 논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이 구체적인 대중프로그램과 전략으로 이어질 때 좌파정당운동은 대중조직운동과 함께 상승과 침체의 운명을 같이 한다(강동진, 2008: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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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정당운동과 사회운동, 대중운동 내부의 ‘좌파’―좌파의 좌파―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좌파세력은 생존권, 기본권 방어와 사수 차원에서 투쟁을 전개해왔다. 이는 노조운동 수준만이 아니라 인권, 평화, 생태, 여성 및 각종의 부문운동에서도 개별적인 대응 특히, 방어적 수준의 운동으로만 대응해 왔다. 이에 따라 단 한 번도 현실적인 대안세력으로 한국 사회에 등장하지 못했다. 그 결과 ‘좌파’들은 신자유주의 모순의 심화에 따른 ‘반자본의 정치’를 형성하지 못한 채, 대중에게 잊혀지고 있다. 누구보다도 신자유주의의 문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운동의 정치로, 대중의 운동으로 형성하지 못하고 각각 운동 영역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수준으로 머물러 있다(강동진, 2008: 207).
 
현재 ‘당운동좌파’는 당운동에 대한 비전과 전략에서 구체성이 없다. 단지 의회정당ㆍ선거정당이 아닌 사회운동적 정당을 노선으로 제출한다. ‘비제도정당’도 ‘사회운동정당’과 내용면에서 질적 차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사회운동좌파의 현실은 ‘대중없는 사회운동’이라 명할 수 있다. 주요하게 소수의 활동가 중심의 실천이 전부이며, 계획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운동전략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단기적이고 즉자적인 대응이 중심이다. 노동운동좌파 또한 미래전략이 부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항상 수식어운동을 해왔다. 계급적 민주노총, 변혁적 산별노조 등이 그것이다. 즉 이들은 노동조합운동의 ‘일 분파’로서의 미래가 현재까지 그/녀들의 전략의 전부였다. 이제는 일분파가 아닌 ‘독립적 세력’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아직 마련된 것은 없어 보인다(강동진, 2008: 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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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운동 좌파세력이 벌이는 작업장에서의 헤게모니 투쟁이 기업차원에서의 조합주의적 실리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설명은 임금 및 고용, 노동조건을 둘러싼 투쟁에서의 ‘비타협성’ 이외엔 거의 없다. ‘비타협성’ ‘전투성’이 자본의 ‘유연성’을 뛰어넘을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의 사회주의관 또한 경직되거나 편협된 측면을 내포한다. ‘소유’에 국한된 사고가 지배적이고 결국 실천에서는 큰 규모의 사업장 위주로 편향되어 있다. 조직운동적 측면에서 대중적 관점이 부재하다. 이들은 ‘자각되고 훈련된 사람’의 결집을 강조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과의 구별이 모호한 시대이다. 이러한 구별은 고립되고 왜소화된 운동을 낳는다. 당운동 좌파세력의 건강성은 무엇보다 ‘반자본’을 분명히 한다는 것 그 자체에 있다. 운동의 ‘우향우’를 견제하는 현재의 존재감을 넘어, ‘장외세력’이 아닌 제도 안과 밖을 아우르는 세력으로서 대중적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이 당운동 좌파의 일차적 과제이다(강동진, 2008: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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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고리는 많다. 우선적으로 ‘당운동(정치운동)’에 대한 관점 및 지향의 통일이 중요할 것이다. 당운동에 대해 ‘최대공약수’적 합의보다는 ‘최소공배수’적 의견을 중심으로 모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반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통일에 앞서 평화’ ‘성장보다는 삶의 질’ ‘여성주의적 가치’ ‘인권과 민주주의’ ‘국제주의적 실천’ ‘생태적 가치’ 등의 가치와 ‘투쟁정당’ ‘대안정당’ ‘대중정당’ ‘운동정당’ ‘코뮌적 정당’ 등 당의 역할을 공통분모로 하는 개인과 집단(세력)이 참여하는 틀을 형성하는게 어떨까 싶다(강동진, 2008: 209-10).
 
당운동과 더불어 이데올로기(담론) 지형, 대중운동과 전선(연대) 운동에 대한 계획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다. 그 지점은 다음과 같다. 하나,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질서에 대한 대응을 공동의 실천과제로 삼아야 한다. 둘,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공동실천과 모델의 형성이다. 이는 제도적, 비제도적 실천을 아우른다. 셋, 대중적 교육프로그램의 공동개발과 참여이다. 넷, 이념적, 전략적 모색의 공동 추진이다. 다섯, 공동의 이데올로기적 무기의 발전이다. 여섯, ‘민주노총’을 뛰어넘을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략 모색이다.
 
스스로의 역량을 재배치하더라도 이 공동의 고리를 풀어가기 위한 역량투입과 실천을 전개해야 한다. 이러한 고리를 풀어내기 위해 빈곤, 문화, 의료, 교육, 인권, 평화운동 등 사회운동의 다양한 영역은 그 자체로 발전하면서도 기여하는 메커니즘을 형성해야 한다. 이 과정 속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다양한 불안정 노동자, 사회적 소수자의 자기조직화와 권리 주장, 실현을 위한 운동 △제반 보편적 가치실현을 위한 사회적 의제를 중심으로 한 연대운동 △생태적 지역 코뮌의 건설과 이들의 전국적 네트워크의 형성이라는 삼각축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당운동과 대중연대운동 그리고 코뮌건설 운동은 좌파운동의 트라이앵글이다(강동진, 2008: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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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정당운동은 당운동 자체가 대중운동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색깔’만을 가진 정당운동이란 사실 없다. 아울러 항상 강조하는 ‘계급성’은 선험적이거나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 속에서 형성되는 과정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또한 변혁적이냐 개량적이냐 하는 구분도 정당의 강령으로 대체되거나 구분이 가지 않는 것임은 일종의 ‘정치적 수사’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당운동을 중심으로 여타의 운동을 수직배치 배열하는 사고 또한 지금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한다면 향후 좌파정당운동의 전개 과정은 이념ㆍ조직ㆍ활동ㆍ문화의 재구성의 새로운 창출 과정과 동일할 것이며, 이 과정은 또한 대중주체형성의 과정일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개입과 그것을 담보해낼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브레이크 없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이명박 정부의 집권, 보수우익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정치지형은 운동진영이 ‘진보의 재구성’ 자체에만 몰두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특히 현재 발생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안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권력과 체제대안을 고민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상황이다(강동진, 2008: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