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대안사회, 대안이론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1)왜 공화국 논의가 필요한가 (김상봉-박명림 서신대화, 경향)

새벽길 2009. 1. 13. 20:43
김상봉 선생과 박명림 선생이 공화주의, 공화국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피는 건가.
얼마 전에 만난 채원 선배는 앞으로 30여년간은 공화주의를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공화주의가 공공성과도 통하는 지점이 있어 나름 매력있는 주제이긴 한데, 왠일인지 나에게 공화국, 공화주의라는 용어는 어색하다. 박정희의 공화당, 미국의 공화당 때문일까. 
 
김상봉-박명림의 서신대화를 통해 공화국에 대한 논의가 풍부해지기를 바란다.

 
--------------------------------------------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1)왜 공화국 논의가 필요한가 (上) (경향,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2009-01-04-17:20:53)
ㆍ김상봉-박명림 서신대화
ㆍ공공성을 상실한 나라는 더 이상 나라일 수 없다

 
한국사회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구도에 놓여 있습니다. 보수 대 진보라는 구분, 절차적 민주주의로는 해결되지 않는 다양한 요구가 존재하고 충돌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와 모색의 시기에 공동체와 개인의 조화를 통해 바람직한 공공의 영역이 확보된 상태, 즉 ‘모두 함께 잘 사는 나라’로서 ‘공화국’의 모습을 제시해 봅니다. 철학자 김상봉, 정치학자 박명림이 ‘공화국’을 주제로 주고받은 24편의 서신이 매주 월요일 독자 여러분에게 배달됩니다.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는지요? 새해 인사로 덕담을 주고받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으나 이번에는 정초부터 세상이 너무 뒤숭숭합니다. 저는 지난달 중순쯤에 학회 일로 스페인에 다녀왔는데 떠나기 전에는 일제고사에 반대했던 교사들을 파면·해임한다고 야단이더니, 돌아오니 이제 방송법으로 법석이군요. 그걸 보며 저는, 어쩌면 제 무덤을 파는 일에 저리도 열심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분노보다 연민의 감정이 먼저 듭니다.
 
이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20~30년 만에 한 번씩 거대한 민중봉기가 일어났음을 상기하고, 1987년 이후 잦아들었던 항쟁의 에너지가 머지않아 폭발적으로 분출하리라고 예견해왔는데, 지금 이 정부가 하는 행태를 보면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정권의 위기가 닥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국가기구가 어떻게 국민의 손에 의해 전복될 수밖에 없는지를 가장 눈부시게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그런데 그 엄연한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자들이 지금의 집권세력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그것을 마냥 기뻐하지 못하는 까닭은 지금의 집권세력이 오래 가지 못하더라도 그 뒤가 어떻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이 땅의 씨알들은 나랏일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물을 것입니다. 그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낡은 길로 되돌아가는 악순환에 빠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 길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나라를 생각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는 데는 영웅적인 용기를 보였으나, 과연 무엇이 바람직한 나라인지 생각하는 일에는 게을렀던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하지만 설계도 없이 집을 지을 수 없듯이 아무런 이상 없이 나라를 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87년 6월항쟁을 통해 마지막으로 독재 권력을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도 20여년 전 우리가 몰아냈던 독재권력의 후예들에게 다시 국가권력을 헌납한 까닭도 우리에게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전망이 제대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단순한 비판과 부정이 아니라 나라를 형성하기 위한 이상과 척도를 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바람직한 국가에 대해 생각하는 일에 서툰 까닭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고전적 사회주의 이론이 국가를 소멸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알게 모르게 국가에 대한 적합한 인식은 물론 바람직한 국가에 대한 상상을 억압해온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시즘에 따르면 바람직한 국가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퇴행적인 일로 치부되는 까닭에 엄연히 국가의 울타리 속에서 살고 있고 내심으로도 국가의 소멸 따위는 믿지 않는 사람조차도 짐짓 국가의 파괴와 소멸을 입에 올릴 뿐 바람직한 국가를 어떻게 형성하고 건설할 것인지를 물을 수 없었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고, 아직도 그 관성이 다 청산되지 않은것이 국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첫 번째 이유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에 와서 한국의 진보진영에 고전적 사회주의자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다수는 일찌감치 옛 마르크스, 레닌이 꿈꾸었던 혁명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국가소멸론 따위에는 더 이상 아무 관심도 없으므로 바람직한 국가의 모습을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국가의 상이 하나같이 다른 나라 학자들의 이론을 빌려온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남의 철학을 가지고 제 나라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남의 이론은 남의 역사에 뿌리박고 있는 까닭에 이 땅의 씨알들의 역사적 기억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나는 나’라는 자아의식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 자아의식이란 자기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미래의 자기에 대한 욕구와 동경입니다. 그 기억과 동경이 조화롭게 맞물릴 때 비로소 나의 존재는 안정됩니다. 이런 사정은 집단적 주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한 겨레의 역사적 기억과 미래의 이상이 균형을 이룰 때 역사 속에서 안정된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새로운 나라의 이상이 우리들 자신의 역사적 체험으로부터 자라나온 것일 때만 민중은 그것을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이상이 대중성을 가질 때 비로소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이 됩니다. 하지만 남에게서 얻어온 국가의 이상이란 민중의 역사적 기억과는 단절된 것인 까닭에 그 자체로서는 이 땅의 씨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민족이 다른 민족과의 만남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지만, 남에게서 배운 것도 자기 속에서 따라 체험하는 한에서만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족의 역사에 뿌리박지 못한 이상은 죽은 이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난날 많은 사람들이 단지 국가폭력만이 아니라 그 국가에 대항하여 싸웠던 사람들의 공동체 속에서 치유하기 어려운 심리적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주위에서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공동체에 대해 조건반사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공동체를 불신하는 사람에게 바람직한 공동체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의미를 가질 리 없으니, 이들의 관심은 온전한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국가기구 또는 일체의 공동체에 포획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탈주의 자유란 망상일 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폴리스 속에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스스로 형성함으로써 그 주인으로 자유를 누리거나 아니면 국가의 노예로 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즉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서로의 상처를 감싸고 치유하면서 우리 자신의 역사로부터 우리가 꿈꿀 수 있는 바람직한 나라의 이상을 이끌어내는 일입니다.
 
여기서 제가 이웃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는 것이 무슨 단체나 조직이 아니라 온전한 만남의 문제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참된 나라를 꿈꾸는 것은 국가기구에 종노릇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슨 추상적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오직 너와 내가 온전히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의 자유는 참된 만남 없이는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우정 없이 행복이 있을 수 없다면 참된 만남이란 가장 중요한 개인적 욕망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고 자유가 실현되는 만남의 지평이 바로 나라입니다. 국가가 타락하면 우리의 만남이 왜곡되고 그 결과 우리의 삶이 불행해집니다. 그런 까닭에 이상적인 나라는 당위 이전에 자연스러운 욕망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적인 나라 자체는 추상적인 이념인 까닭에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이상국가의 도식이나 전형이 있게 마련입니다. 300년 전이었다면 성인이 덕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이상국가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30년 전에 참된 나라를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독재국가 아닌 민주적 국가를 생각하는 것을 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사라진 지금 누구도 단순히 민주국가가 우리가 꿈꾸는 참된 나라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같이 만들어나가야 할 나라의 이름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바로 공화국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키케로나 루소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법이 말하는 민주공화국이며, 동시에 지난 봄 여름 촛불시민들이 요구했던 민주공화국입니다. 요구하는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현되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민주국가가 문제라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독재에 대한 항쟁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고 또 불완전하나마 어느 정도 실현하고 있습니다. 촛불시민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쳤습니다만, 이명박 정권은 두 번의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확고히 권력을 위임받은 정권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공화국입니다. 그것은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구별하자면 민주국가에서 더 나아가 온전한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는 것, 그것이 지난번 촛불항쟁을 통해 명확히 표출된 시대정신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공화국이란 나라가 공공적 기관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불완전한 예외를 제외하면 왕조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나라의 국가기구는 한 번도 온전히 공공적 기관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소수의 권력집단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적으로 점유한 수탈과 억압의 도구가 국가기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공공성이란 나라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상실하면 나라는 더 이상 나라일 수 없으며 우리가 그런 나라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나아가 민주주의 역시 공공성의 원리가 없다면 내용 없는 형식으로 껍데기만 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극히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이명박 정부의 폭정에서 똑똑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즉 지금까지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서도 이제는 공화국에 대해 말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하지만 공화국은 무엇이며 공공성은 또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 나라 역사의 어떤 지점에서 공화국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을 찾는 것은 누구보다 철학자의 일이지만, 그 이상이 관념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 속에 뿌리내려야 하는 까닭에 이제 저는 한국정치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해 오신 선생님께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나라에 공화국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공화국을 꿈꾸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현재의 한국 정치의 한복판에서 참된 공화국으로 통하는 길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성가시지만 피할 수도 없는 물음으로 선생님을 초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세상이 비록 혼돈뿐이더라도 선생님께서는 평안하시길 빕니다.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칸트의 주체철학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 학문의 진보성과 주체성, 민중성을 추구해왔다. 시민단체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들어 학벌타파와 대안교육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진보신당 정책연구소 이사장이다.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학벌사회>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서로주체성의 이념> 등의 저서가 있다.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교수. 한국전쟁 연구에서 시작해 한국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의 바람직한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학문적 대안을 제시해왔다.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구체적 실천으로서 헌법개혁운동, 북한과의 학술교류를 기획하고 참여해왔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 <한국 1950-전쟁과 평화> 등의 저서는 해외 대학의 교재로 채택됐다.
 
참고 
 
------------------------------------------------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1)왜 공화국 논의가 필요한가 (下) (경향,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09-01-11-17:18:12)
ㆍ한국사회는 ‘공준 없는 공동체’… 혼돈·불안의 근원
 
김상봉 선생님, 안녕하셨는지요. 이제 여독이 좀 풀리셨나요? 새해의 시작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우리들 개인과 주변을 둘러싼 거의 모든 일들이 하나도 녹록지 않은 상황입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읽으며 한편으로는 한국현실을 고민하는 정치학도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 속한 시민으로서 무거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제 생각엔 오늘의 한국사회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되어있지 않나 싶습니다. 민주화 이후 20년, 외환위기 이후 10년 동안 진행되던 변화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더욱 급격하여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공론, 공익, 공준, 공공성, 공동가치나 정신이라고 할 어떤 합의나 합의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공동 가치 없는 공화국’ ‘공준 없는 공동체’, 이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가치와 행동의 탈공공화야말로 오늘의 상황을 근거짓는 핵심인 동시에 한국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요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현실의 혼돈과 미래의 불안의 근원 역시 따지고 보면 모두 공준 창출의 실패에서 출발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합의 가능한 공준과 공공성을 찾아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여겨집니다. 물론 갈등의 건강성 또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민주적 절차와 방법을 거쳐야겠지요.
 
과거 권위주의 시절은 그래도 ‘경제발전’ ‘민주화’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나름대로 합의된 가치와 준칙이 존재하여 암묵적인 공준을 갖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국가주의에 의한 강제로서의 합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합의된 지향가치로서의 공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넓은 합의는 현실의 부조리와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준 사회적 비전을 의미했지요. 진보와 보수, 좌우가 공히 인정하는 공정한 발언으로부터 파생하는 귄위와 영향력을 갖는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 경제인도 존재했고요.
 
그러나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런 가치도 인물도 그룹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치와 기업은 말할 필요도 없고 언론과 지식과 종교의 역할붕괴처럼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 공적 가치 창출과 대화의 중심이어야 할 정치에 공준이 존재하나요? 공공성과 공론의 전달자여야 할 언론에 최소한의 싹이라도 있나요? 공준, 공공성이 존재하질 않자 이를 대체하는 다른 흐름들이 이 사회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중 사사화(私事化), 역(逆)근대화, 근본화, 파당화의 네 가지가 핵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먼저 사사화를 볼까요? 사회의 최소 공공 준거에 대한 합의가 부재하자 이를 대체하고 있는 것은 사적 관점과 이익의 전면화와 극대화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시장과 기업의 논리가 전체 국가와 사회를 장악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시장과 기업의 창의성, 경쟁성, 효율성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 경제는 인간들이 생존하고 생활하기 위한 근본요소이기도 하고요. 따라서 그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적 기업논리가 인간생활, 국가, 사회의 다른 모든 공적 영역까지 지배해나갈 뿐만 아니라 공공기관마저 사익 대변자로 전락하며 공공성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공적 기구들이 공공성을 상실하면서 개인들이 생존과 생활을 위해 직접 시장과 대면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사회가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사회화, 형평화, 복지화를 통해 국가·사회의 공공성, 민주성, 휴머니즘을 동시에 제고하였던 역사적 보편경로로부터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지배적 담론과는 정반대로, 사사성이 아닌 공공성의 제고야말로 삶의 질을 높이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 공공성의 한 징표인 한국의 현재 공적 사회지출은 30년 전 민주국가들이 도달했던 수준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시민성과 공공성의 표상이어야 할 국가와 정부가 ‘사적 시장정부’ ‘유사 민간기업’이 되어있고 대통령은 ‘CEO 대통령’으로 불립니다. 아니 정부와 대통령 자신이 그런 방향으로 가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추구하고 있습니다. 시민친화 또는 민주주의 친화나 민주공화국 친화가 아니라 공공연히 기업친화, 시장친화를 말해오지 않았습니까? 세계의 민주주의 역사에 비추어 본말 전도도 이런 전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저는 당시 유행하던 CEO 대통령 담론을 두고 오토 아펠이나 하버마스의 개념을 빌려 전형적인 ‘수행모순’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언어나 개념이 형성되는 순간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명제나 조건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사익·시장·경쟁을 대표하는 CEO로서 성공하면 할수록 공익·균형·조정을 표상하는 대통령으로선 실패할 수밖에 없고, 대통령으로서 성공하려고 하면할수록 CEO성격을 버려야 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CEO 대통령’은 어느 하나를 빨리 버리지 않는 한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공동체를 파국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봅니다. 국가와 정부에 공익, 공공성이란 양도할 수 없는 최소 존재요건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도 말씀하셨듯 공화국이란 나라가 공공적 기관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사화의 진행과 함께 두드러진 현상은 바로 역근대화입니다. 우리는 근대성의 표상으로서의 제도적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지 두 세대 만에 세계사에 유례가 드물게 근대화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공화화를 포함하는 근대화란 무엇입니까?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 가치, 공적 지향에의 합의를 통한 사적 신분, 출신, 세습, 주인-노예나 귀족-평민 같은 양극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아니었나요?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는 재산의 불평등·양극화가 교육·기회·취업·수입·신분의 극심한 불평등으로 연결되고 두렵게도 공공성·공화성의 표상인 공직·대표구성까지 좌우하고 있습니다. 중간과 중심의 강화를 통해 신분과 재산과 기회의 양극성을 넘어 통합을 지향한 것이 근대화요, 공화화요, 민주화였다면 제가 아는 역사지식으로는 요즘 우리 사회처럼 거꾸로 가는 근대화와 공화화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사사화를 통한 세습사회를 공화국이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문제는 이런 양극사회가 통합과 안정 속에 지속된 사례가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부족한 대로 비교적 일찍 시민적 공화주의나 사회적 연대, 공공성, 사회화를 주창한 것은 무슨 평등주의나 급진주의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거꾸로 인간화를 통해 이 사회의 해체를 막아보자는 소박한 시민윤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양극사회로 진입했고 더욱 절망적인 것인 부모의 경제, 사회적 양극지위와 자녀의 꿈, 교육, 기회, 수입의 양극성이 거의 비례하여 전승되는 근대이전 사회로 역진입하였음을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 역동성의 다른 표현은 삶의 높은 불안정성인데 저는 이것이 바로 엄청난 탈공공성의 반영이라고 봅니다.
 
공준의 부재는 또한 문제판단과 갈등의 근본화·근본주의화와 적나화(赤裸化)로 직접 연결되고 있습니다. 공론이나 공적 합의가 존재한다면 사회갈등들은 대부분 그것의 성취를 둘러싼 절차나 방법, 자원배분에 관한 적정 갈등 또는 최소 갈등에 머무르지만 한국사회의 갈등은 언제나 근본적 이념과 가치를 둘러싼 최대갈등, 또는 감정대립으로 치닫곤 합니다. 사회·정치적 언어 역시 ‘친북좌파’, ‘수구꼴통’, ‘척결’처럼 폭력적이기 이를 데 없지요. 즉 한국사회의 또 다른 특징인 근본화로서 인간 생활의 가장 나중 또는 근본인 개인적 실존 차원의 범주들이 사회적, 정치적 판단과 행동의 기준·준칙으로 부상하였다는 점입니다. 공준이 존재하고 국가의 공공성과 중간 집단의 바른 역할이 있었다면 나타나기 힘든 현상입니다.
 
늘 근본주의로 돌아가니 가치의 교환을 통한 공존 체계인 정치마저도 이들 근본화의 영향을 받아 좀체 타협을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근본화는 예컨대 종교화, 이념화, 지역화를 말합니다. 모두가 근대화, 민주화, 공화화의 진전과 함께 사회갈등의 전면에서 물러나야 했던 요인들이 점점 더 중요한 정치행위와 갈등요인으로 불러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른 공공적, 민주적, 사회적 의제들은 묻히게 되고 말지요.
 
끝으로는 파당화를 들고 싶습니다. 이는 특히 사회문제의 수렴을 통한 해결을 위해 존재하는 정당, 언론, 종교, 대학, 조합, 경제·사회단체와 같은 중간기제들에서 더욱 격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와 타자, 적과 동지, 흑과 백, 선과 악, 진보와 보수를 가른 뒤 모두 자기가 속한 쪽의 논리와 이익만을 부르짖을 뿐입니다. 자신이 딛고 있는 이익과 그것을 정당화해줄 파당적 이익과 이념을 전제로 판단하고, 또 거의 오로지, 그리고 철저하게 그것을 위해 발언하고 있습니다. 모두 자기가 속한 진영을 대변하고 자기진영에게 확인받기 위한 파당적 내지르기는 존재하나 상대 진영과의 대화를 향한 발언은 존재하질 않습니다. 공적 말의 신뢰가 붕괴되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옳은 말도 상대진영의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기안녕과 이익은 상대의 그것을 인정할 때 확보된다는, 즉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기본 철칙조차 망각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따라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관계와 만남은 완전히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외려 한 공동체 내의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상대 진영은 공존이 아니라 제압의 대상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의 대화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대화란 서로 다른 생각과 이익 사이의 인정, 존중, 교환이라고 할 수 있으나 우리에게 본래적 의미의 대화는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사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시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리 갈라져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갈라놓았고 이것을 무엇으로, 어떤 가치와 이념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요?
 
공적 관계와 공준의 부재, 사사화, 파당화는 근대적 계약관념조차 소멸하여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급기야 예종적·굴종적 인간관계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탈공공화의 궁극적 귀결로서의 비인간화이지요. 그리고 저는 이 점, 즉 ‘공적 시민’과 ‘인간적 사회’의 회복이야말로 공화국을 다시 세우고 공공성을 강화해야 할 이유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최소 생존을 위해 온갖 사적 이해관계에 자신의 권리와 존엄을 내어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근대적 주체로서 체결한 계약관계는 사라지고 전근대적 주인-노예관계가 재등장하게 되지요.
 
예컨대 수많은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정규직과의 경제적 수입의 차이를 넘어 최소한의 삶의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 파괴된 상태로 내몰려 삶의 순간순간 인간적 차별과 모멸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경제적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생존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참아야 하는 굴종은 그들을 목적적 존재가 아닌 지위로 매일매일 내몰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회체제가 일단 최소 공공성과 계약관계라도 유지하여 품위와 격조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간적 안정과 자존을 유지할 수 있는 체제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것은 정말 공화국의 한 시민으로서 저의 최소 희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시민적 공공성에 기초한 새로운 공화국을 향한 꿈을 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소 생존과 자존의 제공의무는 국가와 사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공적 역할을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가? 또 사회 중간집단들의 공공성 회복은 가능하며 시민주체성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공준 창출과 확대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선생님과 함께 이 물음들을 되새기며 오늘의 편지를 맺습니다. 평안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