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대안사회, 대안이론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코뮌 (프레시안)

새벽길 2009. 1. 4. 15:18

프레시안 창간 7주년 기념으로 나온 기획기사는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이라는 주제 아래 협동, 코뮌, 생태라는 키워드로 북유럽의 현실을 살펴보고 있다. 성현석 기자가 쓴 글이기도 하고, 북유럽을 다룬 것인 만큼 다른 기사들도 볼만하지만, 여기에서는 코뮌과 관련된 기사를 발췌하여 담아놓는다.
 
코뮌 또는 인민의 집 등과 관련한 북유럽의 현실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도를 하려 하지만, 스웨덴과는 다른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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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없이 늙어도, 당당하다" (프레시안, 스톡홀름=성현석 기자, 2008-10-10 오후 7:53:23)
[<프레시안> 창간 7주년 :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코뮌 (上)
 
<아내가 결혼했다>가 현실로…보편적 복지제도가 낳은 다양한 가족 형태
스웨덴 스톡홀름 시내 곳곳에 있는 공원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을 보며, 이 씨 얼굴에 드리워졌던 불안한 표정을 계속 떠올렸다. 스웨덴에서는 혼자 지내는 노인의 비율이 더 높다. 하지만, 이들이 아파도 병원에 못가거나, 더위와 추위 앞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일은 없다.
 
그 배경에는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보편적 복지제도'가 있다. '보편적 복지제도'와 대비를 이루는 개념이 복지 수혜 대상자의 범위를 공공기관이 정하는 '선별적 복지제도'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이 표방하고 있는 '보편적 복지제도'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생겨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스톡홀름 인구 가운데 약 60%가 '1인 가정'이다. 스웨덴 전체에서는 약 40%가 '1인 가정'이다. 독신으로 늙어가는 인구가 많다는 뜻이다. 자식과 동거하는 노인은 전체 노인의 약 4%에 불과하다. 자녀와 거의 만나지 않고 지내는 노인도 40%에 달한다. 자녀와 자주 교류하는 경우에도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 등과 만나는 일은 드물다. 대신, 동년배 친척이나 친구 또는 과거 직장 동료들과 만나는 일이 많다.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이들과 맺어진 인연을 더 중시하는 셈이다.
 
가족을 뒷받침하는 결혼 개념도 상당부분 허물어졌다. '삼보(Sambo, together with)', '델스보(Delsbo, partly living together)' 등으로 불리는 동거가 결혼보다 흔하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20~24세 연령층에서는 44%가, 25~29세에서는 30%가, 30~34세에서는 15%가 결혼이 아닌 동거를 택하고 있다. 그래서 스웨덴 신생아의 절반가량은 '혼외 출생아'다.
 
스웨덴에서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가족 형태는 어머니와 자식으로 구성된 가정(모자가정)이다. 두 번째로 흔한 게 전처(前妻) 혹은 전(前)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와 함께 사는 가정이며, 친부모와 친자식들로 구성된 가정은 그 다음이다.
 
또 법적으로는 아직 인정되지 않지만, 집단혼 유형도 간혹 있다. 소수의 남녀가 주거, 성생활, 금전 등을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형태다. 1남 2녀, 1녀 2남 등의 형태를 주로 띤다.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에 등장하는 사례가 실제로 구현되고 있는 셈이다.
 
평생 전업 주부도 '경제적 홀로서기'가 가능
스웨덴 역시 20세기 중반까지는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스웨덴 사회는 결혼과 가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가장 선도적으로 허물어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찍부터 이뤄져 온 피임 교육, 성(性)에 대해 개방적인 문화가 그 배경에 있다.
 
하지만, 문화적 특징만으로 스웨덴 사회의 자유로운 가족 관념을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탄탄한 사회 복지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현상인 까닭이다. 스웨덴에서는 학비가 무료이며 학생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게 쉬운 까닭에, 자식은 고등학교만 마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게 일반적이다. 자식이 일찍 독립하므로, 부모 역시 자식 부양의 부담을 오래 지지 않는다.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식은 혼자 지내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동거를 시작한다. 동거를 거치지 않고 바로 결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성별, 학력 등과 관계없이 누구나 기본적인 생계가 보장되므로, 배우자 혹은 동거인과 헤어져도 경제적 충격을 감당할 수 있다. 평생 전업 주부로 지낸 여성도 '경제적인 홀로서기'가 가능하다. 스웨덴에서는 사회보험에 기여금을 평생 한 번도 납부하지 않은 사람도, 65세 이후에는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집 밖에서 돈 벌이를 한 적이 전혀 없어도, 7153크로나(140만3132원)의 최저보장연금(2007년 기준)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몸이 불편해도 홀로 지낼 수 있다…'코뮌'을 통해 이뤄지는 생활 복지
이처럼 가족 관념이 자유로운 까닭에, 홀로 지내는 노인도 많다. 이런 현상 역시 복지와 맞물려 있다. 노인을 위한 수발 서비스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병이 있거나, 몸이 불편한 노인이 있는 가정에 수발 도우미와 간호사가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돼 있다. 도우미와 간호사의 방문 횟수와 시간 등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정한다. 보건의료 관련 복지는 주로 광역 지방자치단체(Landsting, 랑스팅)이 담당하고, 다른 복지와 교육은 주로 기초자치단체(Kommun, 코뮌)에서 맡는다.
 
이처럼 생활과 밀접한 복지 영역을 지자체가 맡고 있기 때문에, 지방 의회 선거에 대한 스웨덴 사람들의 관심은 매우 높다. 쇠데르턴 대학(Sodertorn University, 남스톡홀름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최연혁 교수는 "스웨덴 코뮌 의회 선거 투표율은 약 90%"라고 말했다. 또, 복지가 주로 코뮌을 통해 이뤄지는 까닭에 중앙 정치가 부침을 겪어도 시민에게 제공되는 실질적 복지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2006년 스웨덴 총선에서 우파 정권이 탄생했지만, 복지가 일정 수준 아래로는 퇴보하지 않는 배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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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정부'는 '코뮌'에서 나온다" (프레시안, 스톡홀름=성현석 기자, 2008-10-15 오전 9:11:07)
[<프레시안> 창간 7주년 :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코뮌 (中)
 
"북유럽에는 늘 '착한 정부'만 있었을까?…천만에!"
나쁜 정치 속에서 살아온 탓에, 많은 한국인들은 국내 정치에 대해 부끄러움을 안고 지냈다. 사회적 약자가 겪는 문제에 대해 정치가 무능한 상황 역시 이런 부끄러움 속에서 방치돼 왔다. 그래서 약자를 보살피는 '착한 일'은 정부에게 기대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착한 정부'는 북유럽 복지국가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 성장을 위한 경쟁이 치열한 한국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라고들 믿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복지와 인권이 존중받는다고 알려진 북유럽 사회. '사람값이 비싼 사회'에서는 늘 '착한 정부'만 있었을까. 그곳에 사는 이들은 정부가 국민을 살해하는 '최악질의 정치'를 경험한 적이 없을까. (☞관련 기사: "'사람값'이 비싼 사회를 찾아서") "그렇지 않다"는 게 답이다. 북유럽 복지모델의 원조로 꼽히는 스웨덴 역시 군대가 시민을 학살한 역사를 갖고 있다. 멀지도 않다. 1931년, 그러니까 77년 전의 일이다.
 
파업 노동자에게 총을 쏜 스웨덴 군대…아달렌의 비극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순식간에 세계를 휩쓸었다. 유럽 다른 국가들보다 한 발 늦게 산업화에 뛰어들었던 스웨덴 역시 공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경제가 파국으로 치닫자, 스웨덴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스웨덴 역시 한국처럼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의 변화가 가파른 속도로 진행됐던 까닭에, 당시 노동자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농민이었거나, 농민의 자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낯선 도시 변두리에서 빈손으로 살아남는 법을 몰랐다. 시골에서 귀족에게 그랬듯, 그들은 도시의 교회에서도 부자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곤 했다.
 
하지만, 양보하고 고개 숙인 대가가 결국 굶주림일 뿐이라는 깨달음이 불길처럼 번지면서 마냥 순하기만 했던 스웨덴 노동자들은 변했다. 다이너마이트와 성냥을 발명한 기업가의 나라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파업이 일어나는 나라가 됐다. 전국 곳곳에서 분노의 폭발음이 울렸다. 경찰력만으로 파업의 파도를 막을 수 없었던 보수당 정부는 1931년 군대를 동원했다. 한국에서 광주가 희생됐듯, 스웨덴에서는 작은 도시 아달렌이 표적이 됐다.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서 시체가 뒹굴고 피가 흘렀다.
 
"스웨덴 복지 체제, 출발점에는 노동자의 핏자국이 있다"
공포는 파업을 잠재우지 못했다. 대신, 잠들었던 양심이 총소리에 깨어났다.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보수당 정부는 이듬해 선거에서 사민당에 정권을 내줬다.
 
1976년까지 44년 동안 흔들림 없이 유지된 사민당(SAP,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 체제의 시작이었다. 사민당이 정권을 잡은 다음해부터 스웨덴 경제는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와 함께 정부는 공공부문 투자를 크게 늘렸고, 실업자들은 일자리를 얻었다. 2주 유급휴가제, 국민연금, 실업보험 등이 도입된 것도 이 무렵이다. 노동자에 기반을 둔 사민당은 농민동맹과 손을 잡았다. 그 결과, 늘 불안정했던 농산물 가격을 정부가 보장하게 됐다. 사민당 정부는 농민과 손을 잡으면서, 노동자만이 아닌 국민 전체가 대상이 되는 복지 체제를 만들게 됐다.
 
정치가 안정되자, 사회도 안정을 원했다. 1938년, 스톡홀름 근처의 고급 휴양지 살츠셰바덴에 노동자 단체(LO) 대표와 경영자 단체(SAF)대표가 마주앉았다. 노동자들은 얼씬하지 못하던 부유층의 휴양지에서 뒷날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스웨덴 사민주의 체제의 기반이 세워졌다. 노동자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애쓰고, 경영자는 해고를 자제하며 정부는 복지에 힘을 쏟는 노사정 타협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살츠셰바덴 협약을 계기로, 임금 및 노동 조건을 둘러싼 노동자와 경영자의 교섭은 개별 사업장 단위가 아닌 중앙 단위에서 이뤄지게 됐다. 어떤 직장에서 일하건,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도록 하는 '연대 임금제', 직장을 잃은 노동자가 생활수준을 떨어뜨리지 않고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돕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등 스웨덴 체제의 대표적 특징 역시 이런 중앙 교섭 체제의 바탕에서 등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웨덴 체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아프면 누구나 무료로 치료받고 공부하고 싶으면 누구나 무료로 공부하는 사회, 일자리를 잃는 게 두렵지 않고 늙거나 다쳐도 존엄한 대우를 받는 사회, 직업과 학력 등에 따른 차별이 없는 사회가 생겨난 출발점에는 군대가 시민을 학살한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더 많은 피를 흘린 한국은 왜?"
여기서 한숨이 나온다. 5월 광주에서 흘린 피에 빚진 자들이 권력을 잡았던 한국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화 세력은 대중의 삶을 개선하는데도,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는데도 사실상 실패했다. 군대가 시민을 학살한 비극을 똑같이 겪은 한국과 스웨덴은 왜 다른 길을 걷게 됐을까.
 
물론, 답이 없는 질문이다. 다만, 한국에 없거나 부족했고 스웨덴에는 있었던 것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런 것들 가운데 하나가 '코뮌(Kommun)'이다. '코뮌'이라는 단어는 스웨덴에서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하나는 작은 공동체라는 뜻이다. 또, 기초지방자치단체를 가리키는 행정용어로도 쓰인다.
 
코뮌에서 이뤄지는 '자치'의 전통은 아달렌 거리에 남겨진 핏자국을 딛고 권력을 잡은 스웨덴 사민당이 지지층을 배반하지 않도록 붙잡은 힘이 됐다.
 
변방이라서 남아 있던 '코뮌'의 전통
코뮌은 원래 프랑스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12세기 경, 프랑스 북쪽에서 왕과 영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치를 도모하는 주민들의 공동체가 곳곳에 꾸려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공동체는 유럽 곳곳으로 번졌고 스웨덴에서도 생겨났다. 1871년 '파리코뮌'에서 확인할 수 있듯, '코뮌'은 자치와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단어로 역사 속에 자리 잡았다.
 
유럽에서 코뮌이 쇠퇴한 결정적인 계기는 14~15세기 백년전쟁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전쟁은 중세 유럽의 질서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전쟁을 거치며 왕권과 관료제의 힘이 강해졌다. 이 과정에서 봉건영주와 코뮌이 모두 힘을 잃었다. 평화를 서약한 주민들의 자치 공동체 코뮌은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유럽의 변방에 있던 스웨덴은 이런 영향을 덜 받았다. 그래서 코뮌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또, 스웨덴은 중세에도 본격적인 봉건제를 경험하지 않았다. 날씨가 춥고, 경작지가 적은 자연 환경 탓이다. 그래서 농민 중에 농노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고, 자영농이 차지하는 비중이 유달리 높았다. 이런 특징 역시 코뮌 전통이 유지될 수 있는 배경으로 꼽힌다.
 
종교 개혁 이후, 루터교가 전래되면서 루터교 교구(敎區)를 중심으로 코뮌이 형성됐다. 주민들은 교회에 모여 지역의 크고 작은 일들을 상의하곤 했다. 최근까지도 스웨덴에서는 출생신고와 사망신고를 행정기관이 아닌 교회에서 접수했다. 지금은 세무기관에서 접수한다.
 
복지 정치는 지방자치 속에서 훈련된다
이처럼 코뮌 전통이 강했던 탓에 지방자치 역시 일찍부터 이뤄져 왔다. 중앙정부가 갖고 있던 과세권이 지방자치단체로 넘어간 게 1862년이다. 지금도 스웨덴에서는 코뮌(Kommun, 기초자치단체)과 랑스팅(Landsting, 광역 지방자치단체)에서 근로소득세를 부과한다. 복지는 중앙정부보다 지방자치단체가 주로 담당하므로, 복지에 필요한 예산을 지자체가 직접 확보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세금을 얼마나 거둬서, 어떻게 쓸지가 지자체에서 결정되므로 주민들은 지방의회에 쏟는 관심은 매우 높다. 지방의회 선거 투표율이 90%가 넘는 배경이기도 하다. 실제로 스웨덴에서는 지방마다 소득세율이 다르고 복지의 질도 다르다.
 
강력한 지방자치 전통 속에서 훈련된 까닭에, 스웨덴 정치인들은 대중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문제를 포착하는데 민감한 편이다. 노인 복지, 보육 등 누구나 생활 속에서 겪는 문제를 중앙 정치의 쟁점으로 만드는데 가장 먼저 성공한 나라 역시 스웨덴이다.
 
"기업주들이 술 마시며 음담패설 할 동안, 노동자는 책을 읽자"
기초지방자치단체를 가리키는 행정용어 코뮌이 아닌, 작은 공동체를 뜻하는 코뮌 역시 스웨덴 사민당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스웨덴 사민주의는 노동조합과 사민당의 협력을 통해 유지된다. 이런 협력의 폭과 수준에 따라 사민주의 정치의 질이 결정된다. 노동자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지, 노동자들이 얼마나 성숙한 정치의식을 갖고 있는지가 핵심 변수라는 뜻이다.
 
스웨덴 사민당 정치인들은 일찍부터 이런 사실을 간파했다. 사민당 창당을 이끈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얄마르 브란팅은 스웨덴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기만 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으려면 파업을 통해 공장을 멈추는 것 못지않게 정치, 문화적 실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기업주들과 유착한 보수정치인들이 막대한 자금력과 끈끈한 인간관계를 통해 권력을 유지한다면, 노동자들은 지적, 문화적, 도덕적 우위를 통해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기업주들이 정치인들과 술을 마시며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시간에 노동자들은 책을 읽어야 한다. 사민당 초기 활동가들이 얼핏 청교도적인 느낌을 주는 '금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다.
 
"노동자가 책을 읽는 게 복지사회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자가 책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확보하는 것이 노동운동 진영과 사민당의 전략적인 목표가 됐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도서관을 늘리는 정책, 대학 입학의 문턱을 낮추고 무상 교육을 실시하며 평생교육을 강화하는 정책 등이 이런 목표와 맞물려 있다. 실제로 스웨덴에서는 노동자가 대학에 진학하는 게 쉽다. '직장 경험'이 대학 입시 점수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웨덴에서는 대학 신입생의 연령대가 다양하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입학한 학생,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찾느라 한동안 방황하다 입학한 학생, 직장에서 일하다 들어온 학생 등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가 정치, 문화적 실력을 키우려면 제도교육을 확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활 속에서 늘 정치 토론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역할을 맡은 게 '노동자 코뮌'과 '인민의 집(Foljhemmet)'이다.
 
'노동자 코뮌'…노동운동이 지역정치에 뿌리내리다
스웨덴 사민당은 1901년 노동자 코뮌이 당의 기초 지역 단위 역할을 겸하도록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지역마다 있는 사민당 조직, 노동조합 조직, 진보적 종교인 모임, 금주 운동 모임, 진보적 문화 단체 등이 뒤섞여 있는 게 '노동자 코뮌'이었다. 노동자 코뮌이 사민당 지역 단위 역할을 겸하면서, 사민당과 기층 노동자 조직이 한데 엮이게 됐다. 또 노동조합이 지역에 뿌리내리는 계기도 됐다. 스웨덴 노동운동이 노동조합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큰 정치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지역마다 생겨난 노동자 코뮌의 최대 관심사는 '교육'이었다. 노동자가 지방자치 속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더 나아가서 중앙 정부를 운영할 수 있으려면 정책을 이해하고 설계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 코뮌은 '인민의 집'을 곳곳에 건설했다.
 
'인민의 집'에 모여 토론하는 노동자들
스웨덴에서 '인민의 집'은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우선, 복지 국가를 비유적으로 뜻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비바람을 막아주는 집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두 번째 뜻은 노동자 코뮌이 세운 일종의 마을회관인 '인민의 집'이다. 이곳에는 도서관과 강당이 마련돼 있다. 또 작은 모임을 열 수 있는 방들이 있고, 건물 임대료를 낼 수 없는 소규모 언론사와 출판사를 위한 공간도 있다. 영화가 보급된 뒤에는 영화 상영실도 설치됐다. (☞관련 기사: "혁명은 당신의 동네에서 시작된다")
 
인민의 집에서 강연회와 토론회, 문화행사를 여는 게 노동자 코뮌이 주로 한 일이었다. 1890년에 처음 생겨난 인민의 집은 불과 20년 만에 112개로 늘었다. 사민당의 전성기였던 20세기 중반에는 수백 개로 불어났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노동자들로 북적이는 인민의 집은 스웨덴 사민주의의 상징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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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집', 그들만의 천국?" (프레시안, 스톡홀름=성현석/기자, 2008-10-18 오후 3:41:20)
[<프레시안> 창간 7주년 :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코뮌 (下)  
  
"미카엘은 자신은 이미 공부라면 충분히 해 왔고, 직장도 있기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 대신 지금 어떤 사람에게 고용되어 책을 한 권 저술하고 있는데 그 일을 할 수 있게끔 감방 안에서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요청은 즉시 받아들여졌다.
 
…(중략)…이렇게 미카엘은 비교적 유쾌하게 두 달을 보낼 수 있었다. 하루에 여섯 시간 정도는 반예르가와 관련된 작업을 하고, 남은 시간에는 의무 사역을 하거나 오락을 즐겼다. 사역은 두 동료-수감자 한 명은 셰브데 출신이고, 다른 한 명은 칠레 이민자 2세였다-와 함께 매일 교도소 체육관을 청소하는 일이었고, 오락은 TV를 보거나 포커를 하거나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것이었다."
 
"스웨덴 교도소에서 유쾌하게 지냈다"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이 쓴 추리소설 <밀레니엄>의 한 대목이다. 월간지 기자인 주인공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는 재벌의 비리를 고발하는 기사를 썼지만, 오히려 명예 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위에 인용한 내용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주인공이 교도소에서 복역하는 대목이다.
 
이 부분이 소설 전체에서 중요한 대목은 아니다. 다만, 교도소 복역에 관한 묘사가 눈길을 끈다.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교도소 생활에 대한 인상과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웨덴 등 북유럽에서는 교도소 재소자에게 외출이 허용되는 경우가 많다. 또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재소자가 자유롭게 오락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있다.
 
'인권 선진국'다운 면모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신병원 입원자와 더불어, 교도소 재소자들이 지내는 사정은 사회 전체의 인권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꼽힌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도 소중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면, 평균적인 인권 수준 역시 높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인건비는 비싸도, 인권은 멀었다"…제도의 그늘에 남아 있는 폭력
하지만, 북유럽 사회는 천국이 아니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강력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 정당 덕분에 '사람값이 비싼 사회'를 이루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사람이 소중한 사회'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복지에서 거둔 성취만큼 인권이 보장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앞서 인용한 소설 <밀레니엄>에서 스웨덴의 '인권 선진국' 다운 모습이 드러난 장면은 앞서 인용한 부분 외에 찾기 힘들다. 오히려 이 소설은 스웨덴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잘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소설에는 끔찍한 범죄 위험에 노출된 이민자 여성들이 나온다. 또 혼자 사는 어린 여성에게 저질러진 성폭력에 대한 묘사도 있다. 스웨덴 사람들의 일상 속에 스며든 파시즘에 대해 고발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썼던 기자이기도 한 작가는 소설 곳곳에 스웨덴 여성들의 인권 실태에 관한 통계를 집어넣었다.
 
작가가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스웨덴 여성 가운데 13퍼센트는 심각한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또 성폭행을 당한 스웨덴 여성 가운데 92퍼센트가 고소를 하지 않았다. 물론, 스웨덴은 국회의원과 장관의 절반이 여성인 나라다. 또 여성의 권리에 대해 일찍부터 눈을 뜬 사회다. 하지만, 제도가 힘을 미치지 못하는 음습한 그늘에서는 여성을 향한 폭력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인종적 편견을 가진 극우 세력, 사회 약자에게 분풀이
인종에 따른 차별 역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북부 라플란드 지역 원주민인 사미족이 겪는 보이지 않는 차별은 북유럽 인권 활동가들에게 여전히 고민거리다.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는 극우 세력 역시 남아 있다. 이들은 100년 전에는 게르만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우생학을 신봉했고, 이어 독일 나찌를 지지했다.
 
이들은 지금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대신, 가끔 사회적 약자를 향해 공격성을 표출해서 문제가 된다. 이주노동자, 동성애자, 여성, 어린이 등이 주로 이런 범죄의 표적이 된다. 소설 <밀레니엄>에서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인물 역시 인종 우생학에 심취한 극우 세력에 뿌리를 둔 기업가다.
 
인권과 복지를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집권한 나라에서 왜 이런 범죄가 사라지지 않고 있을까.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런 질문 앞에서는 사민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게 때로 도움이 된다.
 
"스웨덴 사민당 정부 시절, 장애인에게 강제 불임 수술이 이뤄졌다"
1997년 8월 스웨덴에서는 우파 언론인 자렘바(Zaremba)가 발표한 글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글에 담긴 사실(fact)와 해석이 모두 논란거리였다. 이 글에서 자렘바는 스웨덴에서 1934년부터 1976년 사이에 정신장애인을 대상으로 약 6만 3000건의 불임수술이 실시됐으며, 이 중 상당수는 강제로 실시됐다고 주장했다. 1934년은 스웨덴에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단종법(斷種法, Sterilrseringslag)이 실시된 해다. 우생학적 관점에서 나쁜 유전 형질을 물려줄 가능성이 높은 부모의 생식 능력을 제거하도록 규정한 이 법은 1896년 미국에서 처음 제정돼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등으로 확산됐다. 독일 나찌에 의해 저질러진 유대인 학살극의 근거가 된 단종법은 대표적인 반(反)인권 법안으로 꼽힌다.
 
스웨덴에서 1934년에 제정된 단종법은 불임수술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장애인들에게 적용됐다. 또, 1941년 도입된 법안은 자기 신고에 의해 혹은 제3자의 권고에 의해 불임 수술을 하도록 돼 있다. 두 법안 모두 본인이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 강제로 불임수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돼 있다. 하지만, 자렘바는 상당수의 불임수술이 "본인의 뜻과 달리, 강제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버림 받은 자식'은 '인민의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이어 그는 이런 반(反)인권적인 조치가 스웨덴 사민주의가 표방해온 '인민의 집' 이념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고 풀이했다. 스웨덴 복지체제의 바탕에는 사회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합리적으로 제거해나가려는 강한 사회공학적인 지향이 있다는 설명이다. '버림 받은 자식'은 '인민의 집'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맞물려 있는 이런 지향은 인종주의적 우생학과 일맥상통한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이 글이 나오자 일각에서는 사실 관계가 과장됐으며, 해석 역시 논리적 비약을 담고 있다는 반발이 나왔다. 하지만, 이후 진행된 연구와 조사에 따르면 1934년 이후 42년 동안 최소 200건에서 최대 2만 건 사이의 강제 불임수술이 실시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필, 우파 언론인에 의해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좌파는 체면이 구겨졌다. 사민당 집권 시기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사민당 집권 시기에 인종주의적인 반인권 행위가 광범위하게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되자, 단종법 제정 및 집행에 대한 책임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다.
 
자렘바 "反인권적 강제 불임수술, 사민당 정부가 용인했다"
자렘바의 주장은 이렇다. "스웨덴 사민주의 모델가 표방해 온 '인민의 집' 이념에는 원래 배타적인 성격이 담겨 있었다. '인민의 집'은 모든 인민을 위한 집이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스웨덴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집에 불과하다.
 
강제 불임수술은 우연히 발생한 사고가 아니다. 장애인이 늘어났을 때 생겨날 복지 비용을 고려해서 정부가 용인한 일이다. 스웨덴 모델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뮈르달 부부(군나르 뮈르달과 알바 뮈르달. 남편 군나르는 노벨 경제학상을, 부인 알바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의 사상에는 국가의 통제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요소가 담겨 있다. 이들 부부는 과학과 전문지식을 독점한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 서비스가 개인의 사생활을 대체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사상 때문에 철저히 개인적인 문제인 임신 여부까지 정부가 개입하는 일이 벌어졌다."
 
복지국가 성숙과 인종주의는 반비례 관계
하지만, 자렘바의 이런 주장은 과도한 면이 있다. 스웨덴 식 복지국가 모델이 성숙해가면서 인종주의도 완화됐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스웨덴에서 기승을 부리던 인종주의적 극우 세력은 사민당 체제가 궤도에 오른 이후 급격히 세력을 잃었다. 요컨대 복지국가 성숙과 인종주의는 반비례 관계라는 뜻이다.
 
또 뮈르달 부부, 특히 알바 뮈르달이 육아처럼 당시까지 가족 내에서 해결해야 할 사적 문제로 여겨져 왔던 영역을 공공 서비스로 대체하려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부 가운데 여성이 당연히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전통적인 성(性) 역할을 허물기 위한 조치였다. 실제로 공공 부문이 보육을 담당하게 되면서,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졌다. 그리고 뮈르달 부부의 이론은 대부분 강한 이상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단종법 제정 논의가 이뤄지던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이 이들 부부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사례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게다가 1930년대 스웨덴에서 사회복지 정책을 추진한 사회부 장관 묄러는 단종법 제정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이었다. 출산처럼 사적인 문제에 대해 국가가 함부로 개입하면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실제로 단종법 제정을 추진한 세력은 사민당과 연정을 이루고 있던 농민당 이었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 좋은 집"
자렘바의 주장은 지나친 면이 있지만, '인민의 집'이라는 상징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지역 노동자들이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하는 사랑방이었던 '인민의 집'이 스웨덴 복지체제를 가리키는 표현이 된 계기는 한손 사민당 당수의 1928년 의회 연설이다. 한손 당수는 당시 연설에서 스웨덴의 장래를 "다른 사람을 경시하거나, 그 희생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사람이 없으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거나 약탈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좋은 집"에 비유했다.
 
이어 그는 같은 해 사민당 대회에서도 "(사민당이) 국민 다수의 지지에 의해 '인민의 집'이라는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진정으로 강력한 국민정당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는 모든 국민을 위한 안락한 집이 돼야 한다는 뜻이 담긴 '인민의 집'은 그 무렵부터 한손 당수가 입에 달고 다니는 표현이 됐다. 그리고 1932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승리하여 한손이 수상이 되자, '인민의 집'은 스웨덴 식 복지체제의 상징이 됐다.
 
"'인민의 집' 구호, 가부장적인 느낌 때문에 싫다"
하지만 '인민의 집'이라는 표현에 대해 당시에도 거부감을 갖는 이들이 많았다. 일부 좌파들은 스웨덴 사민당이 우경화한 징후로 파악했다. 산업 국유화 등 전통적인 좌파 노선이 폐기된 자리에 공동체주의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구호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들은 거대기업과 공존하는 복지 체제에 대하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우파들이 노동자와 함께 지내는 '인민의 집'을 꺼렸다면, 일부 좌파들은 자본가를 아우르는 '인민의 집'에 반발했다.
 
또 가부장적인 느낌을 준다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집'이라는 낱말을 긍정적인 뉘앙스로 쓰는 순간,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을 이상화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여성을 억압하는 전통적 가정 형태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들 역시 '인민의 집'이라는 표현을 썩 내켜하지 않았다.
 
사민당 초기 이론가이며, 한손 정부에서 재무 장관을 지냈던 비그포르스가 이런 경우다. 비그포르스는 산업 국유화를 사회주의로 향하는 유일한 경로로 여기는 전통적인 좌파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었다. "우리는 몇십년, 몇백년 파라다이스를 준비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던 그는 사회주의는 고정불변의 도그마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검증해야 할 '작업가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정통 사회주의를 쫓는 이들과 다른 맥락에서 '인민의 집' 구호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비그포르스는 '인민의 집' 이라는 구호를 내건 한손 정부에서 각료로 일했지만, 전통적인 가정을 옹호하는 느낌을 준다는 이유로 '인민의 집'이라는 표현을 쓰기 싫어했다. 뮈르달 부부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인민의 집' 이라는 표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보수 진영과 노동자가 모두 좋아한 '가족적 구호'
진보적인 이론가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던 '인민의 집' 이라는 구호는 역설적으로 보수 성향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는 효과를 거뒀다. 약간 보수적인 느낌을 주는 '인민의 집' 이라는 구호는 보편적 복지 정책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당시 노동운동 진영이 스웨덴 사회에서 노동자가 지내는 처지를 '불쌍한 대우를 받는 주워온 자식'에 비유하곤 했던 전통과 맞물리면서, '행복한 가정'을 떠올리게 하는 '인민의 집' 이라는 표현은 현장 노동자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인민의 집'은 20세기 내내 스웨덴 복지모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깊이 뿌리내렸다. 더구나 '코뮌'에서 이뤄지는 지방 자치의 전통 역시 지역 공동체를 '확대된 가정'으로 여기게 했다. 지역에서 자치를 통해 복지 체제를 유지하는 과정은 "지역 주민 모두는 '인민의 집'에서 함께 지내는 가족"이라는 비유로 설명되곤 했다. (☞관련 기사: "'착한 정부'는 '코뮌'에서 나온다") 심지어 복지 축소를 주장하는 우파 정치인들도 '인민의 집'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곤 했다. "경제가 어려우니, 이제 집을 좀 줄여야 할 때입니다"라는 식으로.
 
가족 해체 시대, '인민의 집'은 어디로?
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떠올리게 하는 '인민의 집' 이라는 표현은 스웨덴 사회에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통적인 형태의 가족이 급격히 해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개인의 자발적 선택에 따라 이뤄져 왔다.
 
때마침, 우파 언론인에 의해서 '인민의 집'이라는 구호 아래에서 저질러진 반(反)인권적인 강제 불임수술이 폭로됐다. 춥고 캄캄한 북유럽 날씨 속에서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돼 왔다고 여겨진 '인민의 집' 안에도 그늘이 있었던 셈이다.
 
한때 노동자들의 서러운 정서를 자극하는 구호였던 '주워온 자식'이라는 표현이 이제는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게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들이 따뜻한 난로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 역시 과거처럼 강렬한 호소력을 갖기 어렵게 됐다.
 
이혼과 결혼 기피가 모두 늘어나면서, '1인 가정'이 스톡홀름 인구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이 약 60%에 도달한다. 게다가 어머니와 자식으로 구성된 가정(모자 가정), 그리고 전(前) 부인 혹은 전(前)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와 함께 사는 가정이 친부모와 친자식들로 구성된 가정보다 훨씬 흔해 졌다. (☞관련 기사: "가족 없이 늙어도, 당당하다")
 
개인주의와 사회적 연대의 양립, 언제까지 유지될까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를 확대한 이미지로 사회복지 체제를 설명하는 것은 호소력을 갖기 힘들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코뮌'이라는 작은 집단을 '확대된 가정'으로 여기는 문화 속에서 지탱돼 온 스웨덴 식 사회 복지 모델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물론, 스웨덴 등 북유럽 사회에서는 개인주의와 사회적 연대가 양립하는 상황을 이상하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적 연대를 통해 공공 부문을 강화해야 개인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늙거나 병이 들어도 존엄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회적 보장은 사적 영역에서 개인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반이라는 생각이다. 공동체적 정서가 사라져도, 사회복지는 크게 후퇴하지 않는 현상 역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스웨덴이 EU(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낯선 문화권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급증한 상황은 공동체적 정서가 희박한 상태에서 유지되는 복지 체제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또 사회복지 및 교육 제도를 EU 평균에 맞추도록 조절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스웨덴 정부는 EU 바깥에서 온 유학생에 한해 학비를 받기로 했다.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국적에 관계없이 누구든 무료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전통에 금이 간 것이다.
 
우파 정부는 인기 없지만, 우경화 흐름은 여전
낯선 문화권에서 온 사람이 스웨덴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비용을 낭비로 여기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2006년 총선에서 집권한 우파 연정이 이런 세력과 가깝다.
 
물론 '좌파보다 더 좌파 같은 우파' 이미지를 내세워 집권한 뒤, 부유세를 폐지하고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등 '우파 본색'을 드러낸 현 집권 세력에 대한 스웨덴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스웨덴 식 사회복지를 축소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사회복지 체제가 더 잘 작동하도록 운영하려 할 뿐"이라던 약속이 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우파 연정에 기울었던 좌파 지지층은 금세 제 자리를 찾았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약 45퍼센트로(좌파 전체 지지율은 약 56퍼센트), 우파 전체 지지율인 약 41퍼센트를 크게 능가하고 있다. 특히 프레드릭 라인펠트 현 수상이 몸담고 있는 온건당의 지지율은 약 23퍼센트에 불과했다. 다음 총선에서는 모나 살린 사민당 당수가 이끄는 좌파 연정이 집권하리라는 게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하지만, 평범한 노동자가 높은 정치적 관심을 갖게 만든 배경인 공동체적 정서가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좌파가 집권한다 해도 전체적인 우경화는 피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실제로 스웨덴에서 상속세가 없어진 게 사민당 집권 시절이었다. 모나 살린 현 당수는 사민주의 정통파와 가깝다고 분류되지만, 우경화 흐름을 견제할 만한 능력과 의지는 약하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가족을 넘어선 공동체를 상상하자"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스웨덴 복지 모델을 지켜낸 힘은 '코뮌'을 통해 이뤄진 '자치' 전통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코뮌'을 '확대된 가정'으로 여기는 문화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인민의 집'에 모여 앉은 화목한 가족"을 동경하는 공동체적 정서가 사라지면서, '자치' 전통의 뿌리가 조금씩 말라가고 있다.
 
'핏줄로 이어진 가족'을 대체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 조금씩 다인종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스웨덴에서 누구나 혜택을 누리는 '보편적 복지 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