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대안사회, 대안이론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2)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 (3)헌법 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새벽길 2009. 2. 9. 15:32

박명림, 김상봉 교수의 서신대화에서 의외로 많은 생각할 꺼리들을 발견한다.
아직까지 공화주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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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2)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上) (경향,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2009-01-18-17:28:06)
ㆍ경제가치 아닌 ‘국가적 이상’ 공유해야 참 공화국
ㆍ‘돈’은 공공성과 양립할 수 없어
ㆍ‘잘 살아보세’를 공공가치로 오해
ㆍ‘법과 공공성’ 살아있어야 공화국

 
저는 사사화, 역근대화, 근본화, 파당화를 한마디로 표현해서 민주주의의 자기파괴로 이해했습니다. 그 네 가지 질병이 문제인 까닭은 우리가 그동안 그토록 어렵게 성취한 시민적 자유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생각하는 동안에 ‘미네르바’가 체포되고 구속되었는데, 저는 이 사건이야말로 현 정부가 자유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 테러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한국 사회에 공공성의 원리가 존재하지 않고, 이 나라가 엄밀한 의미에서 공화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이란 라틴어로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는 ‘공공적인 것’(public thing)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푸블리카라는 형용사는 포풀루스(populus), 즉 인민(people)이라는 명사에서 만들어진 낱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레스 푸블리카를 레스 포풀리(res populi)라고 풀이했는데, 이 말은 ‘인민의 것’(people’s thing)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인민이란 계급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고 나라 구성원 전체로서 겨레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나라가 특정한 집단이 아니라 ‘모두의 것’일 때 그것은 참된 공화국인 것입니다.
 
키케로는 공화국을 처음 고전적으로 정의한 사람인데 그에 따르면 인민이란 “합의된 법과 공공 이익에 의해 결속된 다중의 공동체”인 바, 나라가 그런 인민 모두의 것이요, 모두를 위한 것일 때 그것은 공화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법치와 공공성이야말로 공화국의 기준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국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민주국가가 자동적으로 공화국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많은 나라에서 공화국은 군주국의 반대말로 이해되고, 민주국가와 거의 같은 말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민주국가냐 군주국가냐 하는 것은 국가의 통치형태에 관한 문제로서, 국가의 실질적 온전함을 판단하기 위해 그것이 공화국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고전적 이론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법치와 공공성의 원리가 지켜진다면 군주국가도, 과두제 국가도 민주국가도 모두 공화국입니다. 반대로 그 원리가 실종되면 아무리 형식적으로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국가라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공화국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화국과 민주국가의 관계에 대해 때때로 철학자들은 역설적으로 들리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는데, 독일의 철학자였던 칸트는 공화국과 가장 거리가 먼 정치체제가 민주국가요, 거꾸로 군주국가야말로 진정한 공화국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좋은 정치체제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른바 자유선거에 의한 민주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자기 나라를 (인민) 공화국이라 부르는 것을 단지 위선적인 말장난이라 치부할 수 없으며, 거꾸로 우리가 형식적으로 민주화를 이루었다 해서 마치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안이한 생각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주의의 위기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하나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국가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전혀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민주정이냐 과두정이냐 아니면 군주정이냐 하는 것은 나라의 통치형태를 구분하는 이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선출하면 그것이 민주적 통치형식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양 민주주의의 요람이라 할 고대 그리스인들의 구분기준으로 보자면 선거를 통해 국가권력을 위임하는 국가형태는 민중이 권력에 참여하는 민주정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과두정 곧 소수에 의한 지배체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필연적으로 극소수의 재력가들만이 생업을 밀쳐두고 선거에 뛰어들 수 있으므로, 절대 다수 민중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거가 아니라면 무엇을 통해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 민주주의적인 제도이겠습니까?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정치형태를 추구했던 아테네인들에 따르면 그것은 추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권력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국회의원도 판사도 행정관도 모두 추첨으로 뽑았습니다. 예외적으로 그들이 선거를 통해 뽑았던 공직이 꼭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장군입니다. 그런데 아테네인은 자기들이 선출한 장군들의 명령에 복종했으나, 그들의 과오에 대해서는 민회에서 가차 없이 탄핵함으로써 장군들의 권력이 민중의 주권 아래 있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테네인들이 가르쳐준 민주주의입니다.
 
지금 우리처럼 선거로 국가권력을 위임하는 체제는 민주적 지배가 아니라, 소수지배(oligarchy) 곧 소수의 잘난 사람들을 뽑아 나랏일을 맡기는 정치체제인데, 이 체제의 가장 큰 위험은 부자들만이 선거에 나갈 수 있고,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가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국가로 전락하게 되며, 인간의 참된 자유와 자기실현 그리고 온전한 만남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또 다른 무엇보다 자본의 지배는 결코 나라의 공공성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원래 공화국의 반대말은 레스 프리바타(res privata)입니다. 말 그대로 ‘사사로운 것’(private thing)이라는 뜻이지요. 여기서 사적인 것이 무엇이냐면 집안일입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말하는 집안일은 바로 돈 버는 일, 곧 경제였습니다. 영어에서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economy)란 말은 원래 그리스말로 가정관리를 뜻하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를 그냥 영어로 쓴 말인데, 그리스인들에게서도 역시 집안일은 돈 버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오이코노미아라고 하든 레스 프리바타라고 하든 돈 버는 일을 사사로운 집안일로 보고, 나랏일과 엄격하게 구별했는데, 이는 돈이 절대로 공공적인 가치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키케로의 고전적 정식에 따르면 공화국은 법치와 공공성에 존립합니다. 그런데 키케로가 공화국의 조건으로서 공공적인 가치를 말한 까닭은 우리의 삶에는 개인이나 가정으로는 실현할 수 없고 오직 국가를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어떤 공공적이고 일반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겨레에 열려 있는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무엇이 국가가 추구해야 할 공공적 가치일 수 없는가 하는 부정적 기준은 명확히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돈을 벌고 부자가 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국가가 추구할 공공적 가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시대 이래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잘 살아보세”가 국가가 추구해야 할 공공적 가치인 것처럼 오해되어 왔습니다. 오죽하면 진보정당에서조차 ‘민생정치’가 구호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는 잘 살아 보자는 말을 약간 우아하게 표현한 것이겠지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누군가는 ‘모두가 잘 사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공공적인 가치가 아니겠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산다’는 술어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모두가’라는 보편적 주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니 도리어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그 자체로서는 철저히 사사로운 욕망으로서, 그냥 내버려두면 나의 경제적 이익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경제적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잘 살기 위해 필요한 돈이 사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두에게 개방된 존재로서 그 자체로서 공공적인 것이요, 모두에게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은 사적 소유의 대상이어서 나의 지갑에 든 돈은 그 자체로서는 나를 위해 좋은 것이지 남을 위해 좋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겨레가 오로지 돈을 벌고 부자되는 것 외에 다른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의 나라는 야수적인 무한경쟁 속에서 해체되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것도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한 겨레가 참된 공화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상의 공공적인 가치와 보편적인 이상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파편화시키고 분열시키는 사사로운 욕망, 곧 경제적 욕망을 규제하고 승화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말하고, 독일인들은 하나됨과 정의와 자유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습니다. 함석헌이 그리도 자주 말했듯이 국민적 이상이야말로 나라의 참된 기초이니, 우리 또한 이제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과연 우리가 더불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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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2)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下) (경향,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09-02-01-17:12:37)
ㆍ김상봉-박명림 서신대화
ㆍ국가의 바탕은 ‘공동선’, 그 최종 결정자는 ‘인민’

 
저희가 이 대담을 시작하자마자 공화국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두 개의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말씀하신 미네르바 구속과 용산참사입니다.
 
먼저, 미네르바 구속은 공화국 시민으로서 공동체의 공적 문제에 대한 의견제시 자체를 봉쇄한다는 점에서 민주국가에서 상상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정부의 오류가능성을 부인하는 독재적 발상이지요. 어떤 정부와 지도자도 비판에서 면제되어선 안 된다는 원리야말로 민주주의의 최소 요건입니다. 자기 오류가능성의 인정은 민주주의는 물론 대화와 소통의 필수요소이지요. 더욱 문제는 국민 나누기입니다. 미네르바의 학력·직업과 비판 자격을 연결하는 데서 저는 1등국민과 2등국민, 엘리트와 일반 시민을 나누는 무서운 차별의식을 읽습니다. 학력고하와 직업유무가 공화국의 시민자격, 특히 정부비판을 포함한 공적 참여자격의 허용과 배제의 기준이라면 이것은 스스로 공화국이기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입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주체는 외려 공론형성 역할의 부재로 미네르바의 등장을 초래한 ‘자격있는 전문가들과 제도언론’이지요.
 
용산참사는 국가의 존재이유(raison d’etre)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합니다. 저는 21세기 한국사회 지평에서 공화국을 논할 때 출발은 바로 국민의 생명과 행복을 위한 바른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용산참사를 보며 저는 키케로가 말한 “민중의 행복이 최고의 법”이라는 언명에 대한 동의여부는 법철학적 논의로 미루더라도 -저는 용산참사를 보며 이를 “민중의 생명이 최고의 법”이라는 말로 바꾸어 적극 수용했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사회적 실존을 둘러싼 거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로부터 연유하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행복’을 합당한 ‘통치체제’의 문제로 연결시킨 로크의 혜안을 바로 떠올렸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서 정치와 연결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으며, 정치를 바로 세우지 않고 바로 설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습니다. 즉 용산참사는 이익(갈등)의 문제요 질서와 법률의 문제이면서, 무엇보다 정치의 문제이고, 그를 통한 실존과 생명 보호의 문제이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의 본질을 드러내줍니다.
 
국가가 국민 일부(철거민·세입자)의 행복은 물론 아예 생명을 앗아가며 다른 이익을 법률·질서·공권력의 이름으로 보장하려 할 때, 생명을 박탈하며 보호해야 할 그런 가치가 과연 존재하나요? 단연코 없음에도 국민 일부를 테러 집단으로, 좌파로 만들어 생명을 박탈했기에 이것 역시 국가의 자기부정입니다.
 
그동안 저는 시민적 덕성에 의해 형성되는 공동선을 공화국의 핵심요소로 여겨왔습니다. 이는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서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이상의 일정한 합의를 말합니다. 시민적 헌신과 충성의 대상이기도 하지요. 잠정적으로 배려와 연대, 참여와 책임, 정의와 중용을 21세기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선으로 여겨봅니다. 역사를 볼 때 물질과 풍요의 부족보다는 가치·정신·합의의 붕괴로 인한 공적 헌신과 충성의 철회, 분열이 훨씬 중요한 공동체 몰락의 요인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경제적 불평등을 제한하려한 것은 바로 참여·시민덕성·평등·중간계급 함양이라는 공화적·공공적 지표를 중시했기 때문이지요.
 
시민적 덕성에 기반한 공동선과 유리되어 발전해온 공화국은 없습니다. 사회적 가치의 출발은 개체로서의 인간 존재를 전제하지요. 동시에 공동선은 개체적 덕성의 단순한 총합을 넘는, 어떤 공공성과 일반성을 담아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공동선을 말할 때는 전체와 부분,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균형적 문제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참된 공화국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의 구축을 통해 비로소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자유·이익·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화국 논의가 결코 국가주의나 전체주의로 나아가서는 안 되는 소이이지요.
 
둘째는 인민주권과 자기결정의 원칙입니다. 공화국의 공공성의 최초 출발 및 최종적 완성은 인민에게 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공적인 문제에 참여하고 또 책임을 지게 되지요. 공동선은 참여를 통해 ‘정치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인민은 공공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공화적 시민을 말합니다. 아렌트가 말하듯 공공문제에의 참여는 개인과 공동체를 통합시켜주는 계기입니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공공문제와 공론형성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 없이는 공동체의 발전도 어렵지만 전체사회의 발전 없는 내 삶의 개선 역시 어렵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은 곧 참된 시민덕성에 의해 밑받침되는 공화적 시민국가입니다.
 
결국 인민주권은 치자와 피치자는 동일하다는 민중의 자기지배의 원리로부터 발원하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민주주의와 선거주의는 결코 동일하지 않지요. 선거로 인한 정부 운영권한의 위임이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닐 뿐더러 선거시점의 선택을 갖고 시민에게 정부의 무능과 실정의 책임을 묻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위기에 직면한 근본 이유는, 그리하여 공화국이 점점 더 소수를 위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대의민주주의를 유일 대안으로 강조하는 동안 인민주권과 자기결정의 원칙을 폄하하고 배제한 데 있다고 봅니다.
 
대표와 시민사회, 정당과 인민의 유리는 이제 일반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정권창출을 제외하면 오늘날 정당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의와 공론형성 기능 자체도 정당, 인터넷, 언론, 시민단체로 4분되어 있고요. 인민주권 원리의 복원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요소의 확장이 없다면 대의민주주의는 상시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여민주주의와 심의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셋째로 공화국의 핵심 요건의 하나는 법의 지배입니다. 권력과 재산의 무한 추구를 일정한 법률과 규율 아래에 두지 않고는 공화국 발전은 고사하고 형성·유지될 수조차 없습니다. 즉 공화국의 필수요건이자 합의체계로서의 법 지배는 권력의 자의적 행사, 이익의 제한없는 추구, 사회의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한 최저 준거입니다. 법은 권력이나 재산이 아니라, 바로 공동선의 구체적 구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법의 지배는 국가와 인민을 제약하는 동시에 보장하는 즉 질서와 자유, 의무와 권리 보호의 이중 요체이지요. 그 점에서 법은 뜻 그대로, 공정과 형평을 벗어나선 존재할 수 없지요. 때문에 법의 공정성이 무너진 사회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법 앞의 평등”처럼 ‘법’과 ‘평등’을 모두 조롱하는 언설도 없습니다. 두 측면에서 오늘날 법의 지배는 무너졌습니다. 하나는 권력과 재산의 크기에 따라 좌우되는 공정과 형평의 파괴이며, 둘째는 법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민주주의 억압입니다. 오늘날 법의 지배는 공정성과 형평성을 상실해 권력의 지배나 재산의 크기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거나 아예 권력과 재산을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동시에 좌우독재국가들이 그러하였듯 법치의 이름으로 참여·비판·민주주의를 봉쇄하려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법이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헌정민주주의를 넘어, 민주주의가 법치를 규정하는 민주헌정주의를 바람직한 공화국을 위한 대안으로 여깁니다.
 
끝으로 견제와 중용, 타협과 균형을 추구하는 권력분할입니다, 참된 공화국에서는 대통령·의회·법원 어떤 부문도 권력을 독점하거나 과점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기존의 3권분립 체제는 너무 낡았을 뿐만 아니라 빈번한 권력과 재산의 과점에 직면하며, 인민주권을 반영한 참여민주주의를 실천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혁신적 고안 없이는 오늘날 꽉 막혀 있는 한국의 정치, 민주주의, 헌법, 공화국 담론과 실천을 고양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스, 로마, 베네치아, 영국, 프랑스, 미국을 포함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제시했던 사례들은 늘 혁명적 제도 창신을 통해 이를 추구해왔습니다.
 
인민주권과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하며 저는 그동안 두 차원의 새로운 견제와 균형을 제안해왔습니다. 하나는 정부, 대의기제(정당·언론), 시민사회 사이의 새로운 3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입니다. 정부 내의 ‘수평적’ 3권분할을 넘어 ‘수직적’ 권력분할이 절실합니다. 둘째는 감독부(監督府) 신설을 통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3권분립을 넘는 4권분립 및 그들 사이의 새로운 길항과 균형입니다. 감독부는 감독·검찰·시장관리·대표선출과 조정·국민보호 기능을 갖는 기구들-예컨대 감사원, 검찰, 공정거래위, 방송통신위, 국가인권위 등-을 3부로부터 떼어내어 독립, 국민과 대면해 해당 사안을 처결합니다. 현재의 3권분립 체제에서는 특별히 정당, 언론의 공론과 대의기능 왜곡을 고려할 때 선거와 저항을 제외하면 시민들이 직접 의사를 반영할 정부조직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반공국가건설, 경제발전, 민주화의 압축달성 속에 지나쳐온 공동체 가치와 이상, 공적 시민덕성에 대해 일대 토론의 난장을 전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참된 공화(국)의 정신으로 여러 가치들의 중간·중산·중앙·평균 개념보다는 중용·형평·융섭·균형 개념을 더 좋아합니다. ‘기계적 중간’ ‘산술적 평균’이 아니라 ‘움직이는 중용’ ‘정치적 형평’이지요. 지금이라도 우리가 움직이는 중용을 찾아 시민덕성에 기반한 공동선, 공공성이 무엇인지 깊은 사회적 개인적 성찰을 진행하지 않는다면 국가·사회의 발전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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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3)헌법 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上) (경향,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09-02-08-18:39:32)
ㆍ‘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 불변의 정신·원칙·비전
 
헌법은 국가와 국민, 사회의 역사·정체성·비전·정신·가치와 관련된 근간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008년 촛불집회를 계기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거리에서 시민들이 헌법 제1조를 제창하면서 헌법은 법전 속에서 살아나와 국민과 민중의 조항이 되었습니다.
 
유신헌법 및 5공헌법 철폐투쟁과 달리 촛불시위의 헌법1조 제창이 지니는 의미는 ‘독재헌법’을 향한 ‘개헌투쟁’이 아니라 국가주권과 국가이익을 둘러싼 정부의 헌법정신 일탈에 맞서 ‘민주헌법’의 ‘해석주체’와 ‘해석권한’을 국민화·시민화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입니다. 이때 국민화·시민화는 헌법제정 주체 자신에 의한 헌법의 정치화·사회화라는 의미를 함께 담지요.
 
저는 건국헌법의 등장을 근대 이래 한국의 헌법혁명의 산물로 설명해왔습니다. 헌법혁명 개념은 민주혁명, 산업혁명, 국민혁명처럼 근대로의 이행에서 헌법부문의 혁명적 변화를 통한 입헌민주주의의 등장을 지칭하지요.
 
대한제국의 몰락, 한일병합, 3·1운동을 거치며 급속히 성장한 공화주의 의식과 운동은 마침내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지요. ‘대한’과 ‘민국’, 당시의 최초 결합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민주공화’라는 말이 처음 헌법 제1조로 등장합니다. 90년 전 1919년 4월11일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말 이래의 근대국가 건설운동, 특히 당시 아시아 최대의 공화주의 민중운동이었던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최초의 근대적 공화정부였지요.
 
첫 등장 이래 헌법1조는 바뀐 적이 없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은 헌법정신은 물론 헌법의 구성·편제·순서까지도 거의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높은 유사성은 현행 헌법까지 이어집니다.
 
해방이 되자 신생국가 건설을 위한 헌법제정 노력이 분출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민주공화’ 정신과 가치의 사회적 합의에 가까운 일치였습니다. 저는 당시의 거의 모든 시민·사회 및 기관들의 헌법안(17개)을 입수해 분석하면서 이 일치를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랐습니다. 거의 모든 초안들이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공화국을 천명한 헌법 제1조를 국가의 근본정신과 가치로서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이상적 결합, 즉 민주공화주의로 해석합니다. 민주공화국가·민주공화주의야말로 건국 이래 대한민국의 제일 공준이요, 공동선인 것이지요.
 
제1조가 민주공화주의의 정신을 밝혔다면, 제2조는 주권의 국민소재 및 권력의 국민발원을 밝힌 것입니다. 이는 국가권력의 형성과 존립, 정당성의 근원을 국민에게 부여한 조항으로서 국민주권의 원리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인민주권에 반하여 국민주권 원칙을 천명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권력의 소재가 국민에게 있음을 밝히는, 인민주권과 국민주권의 포괄적 혼합이었습니다.
 
사실 임시정부 헌법부터 대한민국의 헌법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추구한 삼균주의에 기반한 공화주의를 뼈대로 삼고 있습니다. 건국헌법은 “기회균등, 개인능력 발휘 보장, 책임과 의무 완수, 국민생활의 균등 추구를 기본으로 사회정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강조했습니다. 각인의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고 했고요. 당시 “균형있는 국민경제발전” “경제민주주의”는 “우리나라 경제질서의 원칙”으로 불렸습니다. 실제로 경제는 주요 자원의 국유, 무역의 국가통제, 운수·통신·금융·보험·전기·수리(水利)·수도·가스·공공기업의 국영 또는 공영 등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철저한 공공·형평·균등을 추구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압축근대화의 토대를 놓은 1940~50년대 초기 평등주의 변혁, 즉 토지개혁과 교육혁명이 가능했던 것 역시 북한 급진주의와의 경쟁에 더해, 이러한 오랜 공화주의 전통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헌법 1조에 관한 한 그동안 규범과 사회, 조문과 현실이 일치되거나 근접하지 못했지요. 그러나 초기 출발조건은 거시적 영향을 미칩니다. 즉 최초의 규범과 제도의 가치는 비록 현실에서는 부족하더라도 목표로서의 의미를 지녀 미래 비전을 제시해주거나 또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촉발한다는 점입니다.
 
제정 이래 헌법1조의 민주공화주의는 현실적으로, 헌법·법률적으로 모두 도전받아 왔습니다. 현실적 차원에서는 헌법파괴를 통한 권위주의 체제의 등장과 연장처럼 헌법1조와 헌법정신을 유린한 것도 없습니다. 헌법파괴세력이 헌법준수, 법치, 준법을 주장한 것이 민주화 이전의 한국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독재정부의 헌법파괴에 대한 헌법복원노력의 의미를 담는 것이었지요. 민주화 이후 국가의 급속한 사사화·탈공공화 역시 민주공화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반공화성의 핵심인 부패는 모든 정부에 걸쳐 있고요. 헌법·법률 차원에서는 국가보안법과 유신헌법이 그것입니다. 이들은 헌법1조의 풍부한 민주적 자장과 넘치는 공화적 수원, 즉 민주공화적 상상력과 체제 디자인을 좁은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 위축시키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두 번의 민주공화주의 흐름이 밑으로부터 분출했습니다. 첫째는 한말-식민-해방-건국 시기로 근대 국민국가 건설로 귀결되었고, 두 번째는 민주화운동 시기로 87년 민주화를 거쳐 민주정부의 달성이란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권위주의 시기에는 무엇보다 민주주의 파괴로 인해 실현불가였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민주화가 자유화와 탈공공화, 특히 시장·기업의 자유화와 국가의 탈공공화로 귀결되어 참된 공화성과 공공성은 달성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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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3)헌법 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下) (경향, 김상봉|전남대 교수·철학, 2009-02-15 17:24:46)
ㆍ낡은 국가 부정하고 새나라 만드는 게 헌법정신
 
저는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헌법이 쓰인 뒤에 여러 차례 헌법이 개정되어 왔지만, 그리도 일관되게 나라의 정체성을 민주공화국이라 천명한 것은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입장이나 성향과 무관하게 민주공화국에 대한 온 겨레의 요구와 열망이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민주공화국의 기틀이 이 나라에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민주공화국의 의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말뜻뿐만 아니라 그 괴리를 사유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근본에서 보자면 국가는 인간의 본질로부터 생겨난 공동체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모두 미완성의 존재, 가능성의 존재로서 세상에 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하나의 과제인 바, 한갓 가능성으로서의 인간성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몫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고 창조해 나가는 활동이 바로 인간의 자유입니다. 자유란 탈주나 도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형성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자기 혼자서는 자기가 될 수도, 자기를 형성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오직 너를 통해서 세상에 오며 너와의 만남을 통해 내가 됩니다. 모든 나는 누군가의 너로서 존재하며 너와 함께 우리를 이룰 때만 나도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립된 홀로주체가 아니라 만남과 인연의 교차점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자기를 형성한다는 것은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된다는 것, 개인이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의 온전함 역시 너와 나의 만남의 온전함에 존립합니다. 만남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나의 자유의 범위도 넓어지고 그 만남이 참되고 온전한 만큼 나의 삶, 나의 자유도 온전해지는 것이지요.
 
국가 역시 그런 만남을 통해 생성되고 형성되는 공동체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 수많은 사람의 만남이 일정한 외연과 형식 속에서 전체를 이룬 것이 국가인 것입니다. 이처럼 국가의 문제가 만남의 문제인 한에서, 국가의 참됨 역시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의 참됨에 존립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국가를 생각하는 것은 참된 만남이 무엇인가를 묻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만남의 현 실태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도 일방적으로 주체가 되거나 객체가 되지 않고 너와 내가 서로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가리켜 서로주체성이라 불러왔습니다만, 이것은 구체적으로 세 계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감성의 서로주체성은 너와 내가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데서 시작됩니다.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 될 때, 우리는 감성의 차원에서 서로주체성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둘째로 의지의 서로주체성은 너와 내가 서로에게 책임을 느끼고 의무를 다하려 할 때 성립합니다. 이를테면 너와 내가 서로의 고통을 단순히 공감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의무의 대상이라고 느끼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애쓸 때, 우리는 윤리적 의지의 차원에서 서로주체성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의 서로주체성이 있는데, 이는 너와 내가 고립된 홀로주체로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더불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자주 말해지는 집단적 지성은 바로 서로주체성 속에서 생성되는 지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도덕적 이념과 결합하면 한갓 지성에서 머물지 않고 공공적 이성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만약 한 나라가 참된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전체라면 저 세 가지 요소를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즉 시민들이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어야 하고, 서로의 행불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마지막으로 모든 일에 대해 같이 알고 더불어 생각하면서 나랏일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눈물에 무관심한 사람들, 타인의 고통에 아무런 책임도 못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만사를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는 사람들이 같이 나라를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이 심각한 위기에 처한 근본 원인도 바로 이 국가의 바탕이 치명적으로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나라의 시민들이 고통과 책임과 생각을 더불어 나누면서 나라를 같이 만들어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나라의 주인이 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시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 상태가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서로주체성 속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국가는 단순히 시민들의 개별적 주체성의 총합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을 초과하는 전체입니다. 전체는 여럿의 하나가 모여 다시 새로운 하나를 이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 사람의 의지가 하나의 의지가 되고 만 사람의 생각이 하나의 생각이 될 때 그것이 전체로서의 나라입니다. 물론 이 전체는 언제나 개별적 주체들의 전체이니, 그 자신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주체입니다.
 
그런데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주체로서의 국가가 개별적인 주체성을 초과한다고 말씀드린 까닭은 국가가 개인 위에 군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모두로부터 있으며 모두를 위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모두에게 있음과 모두를 위해 있음이라는 국가의 공공적 존재방식을 가리켜 우리는 공화국이라 부릅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 모두를 위해 있는 우리 모두의 나라가 바로 공화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공화국이란 개별적 시민의 주체성과 나라의 공공성이 온전히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의미에서 이런 나라를 이루는 것은 시민의 과제입니다. 시민이 국가 속에서 태어나는 한에서 국가는 시민적 삶의 전제이지만, 시민이 국가를 끊임없이 참된 나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에서라면 국가는 시민적 삶의 과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함석헌이 말했듯이 전체도 자라는 것인 까닭에 시민이 국가를 형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낡은 것의 부정이요, 지양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의 헌법전문이 3·1운동과 4·19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것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3·1운동과 4·19를 사건 자체로서 본다면 그것은 민중이 당시의 국가기구를 부정하고 지양한 사건이니, 대한민국의 헌법이 그 사건의 정당성을 승인하고 그 정신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것은 참된 나라, 온전한 민주공화국을 이루기 위해 시민이 현존하는 국가기구를 부정하고 지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요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난해 숭례문이 불탄 것이 전조였다면 올해 용산참사는 나라를 태우는 불꽃이 실제로 타오르기 시작했음을 알려준 사건입니다. 서로를 잠에서 깨우고 함께 모여 불을 꺼야 합니다. 하지만 공연히 불이 난 것이 아니라 집이 낡을 대로 낡아 불이 난 것이니, 이제 우리는 이 집을 헐고 새 집을 지을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헌법 제1조를 생각하는 뜻은 씨알들이 그렇게 낡은 국가를 부정하고 지양해 끊임없이 새 나라를 만들어 나가라는 헌법정신을 생각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221722165&code=210000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4)정부 수립 60주년,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나(上) (경향,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09-02-22 17:22:16)
ㆍ실질적 민주주의 역진, 희망의 공동체와 멀어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11730275&code=210000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4) 정부 수립 60년,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나<下> (경향,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2009-03-01 17:30:27)
ㆍ‘민중을 적으로’ 독재 악순환, 반복된 민초의 항쟁
ㆍ김상봉 - 박명림 서신 대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81735595&code=210000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5)“법만능이 직접정치 억압” “현정부 특정집단 ‘사당화’” (경향, 2009-03-08 17:35:59)
ㆍ‘김상봉 - 박명림 서신대화’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