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가는 길/책을 읽자
[서평모음] 서병훈, 『포퓰리즘: 현대민주주의 위기와 선택』
3월 말에 이명박 대통령께서 손수 일산경찰서를 방문하여 경찰서장을 아작낸 것을 보면서 이명박 정부 내내 이러한 포퓰리즘식 보여주기가 횡행하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프레시안의 송호균 기자가 이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발언과 연결시켜 기사를 썼다. 전봇대 발언, 기상청 오보발언, 톨게이트 발언 등 행정부처 과장급이 말해도 충분할 얘기들을 대통령이 털어놓으면서 국민들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늉을 하고 있는 현실을 짚은 것이다. 이런 행태가 5년간 지속되는 것을 바라보기엔 넘 끔찍하다.
중국산 멜라민 파동 때문에 시끄럽자 MB는 전격적으로 식약청을 방문하여 식품안전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지식을 과시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 멜라민 공포는 계속 확산되어 가고 있으며, MB의 보여주기 정치 ㄸ한 별다른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포퓰리즘도 어느 정도 대중의 선호에 영합해야 가능하지 MB 정도면 그걸 넘어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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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서울, 이문영기자, 2008-03-06 23면)
20여년 전 ‘포퓰리즘의 이념적 위상’이란 논문으로 한국 학계에 포퓰리즘 논의의 씨앗을 뿌린 서병훈 숭실대 교수(한국정치사상학회장)가 ‘포퓰리즘-현대 민주주의 위기와 선택’(책세상)이란 단행본을 냈다.
서 교수는 먼저 포퓰리즘의 개념 정의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한국에서 넘쳐나는 포퓰리즘이란 말의 인플레이션 현상은 포퓰리즘에 대한 개념 혼동에서 비롯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서 교수는 “사람마다 다른 현상을 염두에 두고 포퓰리즘을 사용하는 바람에 포퓰리즘은 신발은 있으나 신발에 맞는 발은 어디에도 없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신세가 됐다.”며 ‘인민에 대한 호소’와 ‘선동적 정치인에 대한 감성 자극 정치’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포퓰리즘을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이 두 기준에 따라 서 교수는 포퓰리즘을 “기성 질서 안에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정치지도자가 인민의 주권회복과 이를 위한 체제개혁을 약속하며 감성적인 선동 전술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정치운동”으로 정의한다.
서 교수는 고전적 포퓰리즘의 양대 기둥이 된 1870년대 러시아의 ‘브나르도(인민 속으로)’ 운동과 1892년 미국 인민당 운동 등을 출발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위력을 발휘해온 포퓰리즘의 과거와 현재를 더듬는다.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억만장자 페로의 2000만표 득표, 2002년 프랑스 대선에서 극우 정치인 르펜의 16.86% 득표, 50년대 아르헨티나의 페론과 21세기 초 베네수엘라 차베스로 이어지는 남아메리카의 포퓰리즘 등을 살핀다.
서 교수는 민주주의의 한계상황을 거름삼아 자라온 포퓰리즘을 단순 정치현상이 아닌 ‘병적 징후’로 규정한다. 서 교수는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른 대중의 불안심리 ▲정당정치의 퇴보 ▲감성을 자극하는 ‘흥행사’ 정치인의 등장 등을 포퓰리즘 만개 원인으로 꼽는다.
서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가 주권자 인민과 겉돌고 있는 현실에 실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포퓰리즘에 환호한다.”며 포퓰리즘 극복을 위한 유권자의 깨어 있는 의식, 시민단체와 언론의 감시기능 회복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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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위기 먹고 사는 선동정치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08-03-07 오후 09:04:17)
<포퓰리즘〉서병훈 지음/책세상·1만2000원
개념 광범위한 ‘포퓰리즘’ 압축해 설명
‘인민 주권’ 내세우지만 권력 장악 수단 삼고감성자극 단순정치로 민주주의 왜곡시켜
지난 수년 동안 한국정치 현상을 규정하는 용어로 가장 많이 동원된 것 가운데 하나가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었다. 주로 수구적 보수신문·보수정객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공격할 때 들이댄 무기가 포퓰리즘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정말 포퓰리즘 정권이었나. 정치학자 서병훈 숭실대 교수가 쓴 〈포퓰리즘〉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욕설에 가깝께 사용된 포퓰리즘이란 말의 개념을 명료하게 한정하고 그 함의를 밝히려는 이론적 시도다.
그동안 국내에서 통용된 포퓰리즘이란 말은 ‘대중영합적 인기전술’을 뜻했다. 일종의 낙인찍기 효과를 노린 정치용어였다. 그러나 엄밀한 규정 없는 용어의 남용은 언어의 인플레이션 현상만 일으킨다. “언어의 오용이 심해지면 그 말의 값어치와 분석력이 떨어진다.” 포퓰리즘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말인 것은 사실이다. 인민주의·민중주의·대중주의로 번역될 수 있는가 하면, 인기주의·대중영합주의·인기영합주의로 옮길 수도 있다. 포퓰리즘은 이 모든 의미를 동시에 거느린 말이다. 그런 의미의 산포 때문에 학계에서는 포퓰리즘의 개념 규정을 포기하기도 한다. ‘포퓰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학문적 합의가 없다는 사실을 두고,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합의가 이루어졌을 뿐”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 책은 학문적 사정이 이렇다는 점을 전제하고서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일에 뛰어든다.
여기서 지은이가 채택하는 전략이 포퓰리즘의 개념적 범주를 최대한 압축하는 일이다. 지은이는 포퓰리즘의 핵심 요소로 ‘인민 주권의 회복 약속’과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를 제시한다. 인민이 역사의 주인이며 정치의 주체라고 선언하고 그 선언을 실현하겠다는 ‘인민주권론’은 고전적 포퓰리즘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흔히 ‘인민주의’로 번역되는 고전적 포퓰리즘은 19세기 러시아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이 시발점이며, 특히 19세기 말 흥성했던 미국 인민당 운동이 전형이다. 미국 인민당은 1892년 창당대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현재 미국은 도덕적·정치적·경제적으로 파탄 상태에 직면해 있다. 선거는 부패했고, 도덕은 땅에 떨어졌다. 수백만 인민이 땀 흘려 거둔 수확을 극소수 부자가 챙겨가고 있다. 도시 노동자들은 자기 보호를 위한 권리를 박탈당했다. 우리 포퓰리스트(인민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재건함으로써 미국의 본디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지은이는 이 고전적 포퓰리즘을 현대의 포퓰리즘과 구별한다. 현대의 포퓰리즘은 ‘인민 주권 회복’이라는 약속을 고전적 포퓰리즘과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연결되지만,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를 또다른 핵심 요소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 정치는 언제나 인민을 앞세우고 인민에게 호소한다. “포퓰리즘은 한마디로 인민에서 시작해 인민으로 끝난다. 인민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포퓰리즘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포퓰리즘의 역사가 인민에 대한 찬양, 그리고 인민이 배제되고 무시되는 정치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인민민주주의’와 공통점이 있지만, 그 공통점은 ‘인민 주권’을 앞세운다는 지점에서 그친다. 포퓰리즘은 인민주권을 말로만 앞세운다. 포퓰리즘의 또다른 요소는 ‘감성 자극적 선동정치’다. 포퓰리즘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정치운동이다. 카리스마를 지닌 선동정치가가 엘리트 집단, 특히 기성 정치권을 ‘인민’의 이름으로 공격하고 규탄하면서 그들을 쓸어버리고 인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열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포퓰리즘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장기적 변혁·개혁 과제를 제시하지 않고 즉각적이며 모순적인 약속을 남발하기 때문에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선동 정치에 머무른다. 지은이는 포퓰리즘은 대체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치운동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 정치의 진정한 목표가 인민 주권 실현이 아니라 지도자의 권력 쟁취에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획득하면 그 순간부터 지도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 제도권과 타협하고 거기에 굴복하게 된다. 포퓰리즘은 자기 원칙이 분명한 정치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 책은 현대 포퓰리즘 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 프랑스 극우파 르펜의 국민전선, 하이더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자유당,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정권 따위를 제시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인민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위축시킨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성적 토론, 합리적 사유, 건전한 상식을 위협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자양분을 얻지만 결국엔 민주주의 위기를 심화한다. 그렇다면, 국내 보수파들의 주장대로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포퓰리즘 정부였나. 지은이는 두 정부, 특히 노무현 정부가 일부 포퓰리즘적 성격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포퓰리즘 정부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민 주권을 내세워 선동 정치를 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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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대통령은 왜 경찰서장을 '깼을까'? (프레시안, 송호균/기자, 2008-03-31 오후 7:51:59)
[기자의 눈] '이명박식 포퓰리즘'을 보며…
"대통령이 전부 나서서 한다면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중간층들이 별 볼일 없게 되지 않겠느냐. 처음엔 신선해 보이지만…."
"이쯤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으로 뜨거운 화제를 불렀던 지난 2003년 '평검사와의 대화' 직후 당시 한나라당 대표 권한대행을 맡고 있던 박희태 의원이 쏘아붙인 말이다. 같은 당 심재철 의원 역시 "국민여론을 의식한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치"라고 비난했었다.
경찰서장 찾아가 혼쭐내고…
이명박 대통령이 31일 초등학생 납치미수 사건과 관련해 일산경찰서를 긴급 방문, 이기태 경찰서장을 면전에 두고 격노한 모습을 보였다. 이 대통령은 "일선 경찰이 아직도 형식적으로 너무…"라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격앙돼 있었다. "일선 경찰이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뛰어 나왔다"고도 했다.
안양 초등생 살인사건에 이어 벌어진 이번 사건에 대해 국민들이 경악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치안당국의 총체적인 기강해이는 민심의 불안 요인인 만큼 대통령이 직접 일선 경찰서를 방문해 관심을 기울인 걸 무턱대고 사시로 쳐다볼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경찰당국의 행태가 국민들로부터 비난받는 것과 치안행정을 포함해 국가운영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일선 경찰서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이 대통령의 격노한 발언과 사색이 된 경찰서장의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낄수는 있겠으나, 그 너머에는 대중들의 공분을 활용한 포퓰리즘 통치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지난 29일 국가보훈처 업무보고에 앞서 "오늘 일기예보가 틀렸네"라며 "뭐든 빠르면 좋은 줄 알고…"라고 불신감을 드러낸 대목도 그렇다. 기상청의 오보에 낭패를 본 경험이 누군들 없을까. 그런 대중들 심리에 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찰싹 달라붙는 맛이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적에 힘입어 기상청의 오보가 좀 개선될 수 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톨게이트' 발언으로 애꿎은 비정규직만…
'작은 일'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도 위태로워 보인다. 국정운영의 '효율성'을 강조하다가 나온 이 대통령의 '220대 톨게이트' 발언 이후 관계당국이 "도대체 하루에 통행량이 220대뿐인 톨게이트가 어디냐"면서 부산을 떨다 일일 통행량이 282대인 문평 톨게이트가 지목된 일만 해도 그렇다.
문평 톨게이트에 근무하고 있는 인력은 도로공사 직원 2명과 용업업체 직원 16명.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이들 용역업체 직원들 중 상당수는 국가 유공자이거나 장애인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오히려 새로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국토해양부가 대통령의 지시에 '가장 근접한' 이 톨게이트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을 두고는 "억지에 가깝다"는 지적도 나온다. 마무리 공사가 남아 있는 나주~광주구간(10.95㎞)이 개통되는 6월 초부터는 하루 통행량이 1000대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기 때문.
이에 대해선 정치권의 빈축도 나온다. 통합민주당은 논평에서 "대통령의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을 생각은 않고, 바람보다 먼저 눕는 '예스맨'들 때문에 힘 없고, 빽 없는 백성들의 고통만 가중되고 있다"며 "틀린 것은 틀렸다고 얘기하는 분별력 있는 공무원을 보고 싶다"고 공무원 사회의 '과잉충성'이 낳는 부작용을 지적했다.
민주노동당은 이 대통령을 정조준했다. 민노당은 "톨게이트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난데없이 제비뽑기식 구조조정으로 해고될 처지에 몰린 것"이라며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말처럼 대통령의 즉흥적 발언 한 마디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맞아 죽게 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무원의 무사안일'을 지적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충심'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 불똥은 엉뚱하게도 해당 톨게이트의 비정규직 직원들에게 튀고 있다. 자신이 지적한 일에 대한 신속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대통령과, 그런 대통령을 모셔야 할 공무원들의 과잉충성이 빚어낸 웃지 못할 블랙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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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민주주의’로 포퓰리즘 극복할 수 있을까 (주정립 / 5·18기념재단·정치사상, 2008년 04월 14일 (월) 14:09:00 교수신문)
>>서평_ 『포퓰리즘: 현대민주주의 위기와 선택』 서병훈 지음 | 책세상 | 2008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대개의 경우 좌파적인 ‘경거망동’을 지칭한다. 주로 보수언론들이 이른바 진보 또는 좌파 세력의 몇 가지 정치 행태에 대해 국가의 안정적 발전을 해치는 포퓰리즘으로 규정하며 배격해왔기 때문이다. ‘좌파’의 포퓰리즘이 지속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보여주는 타산지석으로 항상 등장하는 것이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스트 정권, 그 중에서도 페론 치하의 아르헨티나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의도적으로 편파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면적이라는 비판만큼은 피할 수 없다. 다른 많은 포퓰리즘의 사례들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정치권과 언론에서 주로 정치적 적수를 폄하하거나 그 도덕적 자질에 흠집을 내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용되는 빈도수가 높아지는 데 반해,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거의 부재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몇 개의 주목할 만한 논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형태와 내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저작은 국내학자가 쓴 최초의 본격적인 포퓰리즘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일찍이 남미의 포퓰리즘에 대한 논문을 통해 국내 학계에 포퓰리즘이라는 정치현상을 이론적으로 선보인 적이 있다. 그 후 20년 만에 나온 이 연구서는 남미를 넘어 전 세계의 주요한 포퓰리즘에 대한 고찰과 이로부터 도출된 포퓰리즘의 일반적 속성 및 각각의 형태들이 지니는 고유의 특징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를 담고 있다. 게다가 이 논의는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민주주의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론의 사상적 계보와 이론적 지형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하게 해 주는 미덕도 지니고 있다.
국내학자가 쓴 최초의 본격 포퓰리즘 연구서
저자는 포퓰리즘이라는 정치현상이 실로 다양하고 그 의미와 용도가 애매모호하다는 이유에서 개념 규정을 포기하는 다수의 이론가들과 달리 포퓰리즘의 핵심적인 공통점으로부터 출발하는 개념 규정을 시도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민주권 회복론’과 ‘선동 정치인에 의한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가 모든 포퓰리즘의 핵심적 공통점이다. 저자는 이 둘을 포퓰리즘의 ‘기본 명제’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둘은 각각 다시 여러 개의 하위 명제를 포괄한다. ‘인민주권 회복론’은 보통 사람들에 대한 낭만적 미화, 엘리트에 대한 적개심 고취, 현상 타파 주장,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계급연합과 같은 5개 하위 명제를 포함하며,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단순 정치’로부터는 권위주의적 지도자중심주의, 선동정치, 체제 개혁의 한계와 같은 3개 하위 명제가 파생된다. 저자에 따르면 어떤 정치적 현상을 포퓰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이 현상이 반드시 두 가지 기본 명제를 뚜렷이 드러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다양한 형태의 하위 명제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역으로 이 두 기본 명제만 확인할 수 있다면 하위 명제들 중 일부만 갖추고 있더라도 큰 무리 없이 그러한 정치현상을 포퓰리즘이라 부를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기준을 통해 포퓰리즘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할 것을 주장한다.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는 점은 포퓰리즘과 ‘인민 민주주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포퓰리스트들이 인민주권 회복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 널리 설득력을 발휘하지만 그 비민주적 지도자중심주의나 감성 자극적인 단순 논리에 바탕을 둔 선동 정치야말로 민주주의의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까지 고려하면서 저자는 포퓰리즘을 “기성 질서 안에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정치 지도자가, 인민의 주권 회복과 이를 위한 체제 개혁을 약속하며, 감성 자극적인 선동 전술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정치 운동”이라고 규정한다.
저자는 러시아의 나로드니체스트보와 미국의 포퓰리즘, 남미의 신·구포퓰리즘, 유럽의 신포퓰리즘, 고이즈미식 포퓰리즘 등 포퓰리즘의 다양한 현상형태들을 서술하고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특히 현대 포퓰리즘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도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유럽에서 포퓰리즘은 대의제 민주주의 정치의 위기로부터 발생한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는 세계화의 높은 파고 앞에서 불안한 삶을 영위하는 대중들이 믿고 의지할 곳을 찾기 힘들다는 ‘구조적 상황’으로부터 비롯된다.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하에서 사회민주당마저 ‘제3의 길’을 표방하며 전통적 우파 정당에 가까워지는 등 기존의 정당 체계가 무너짐으로써 서민 계층은 자신들을 대변해줄 정치 세력을 상실했다. 이러한 공백을 파고들며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반엘리트 정서’, ‘반외국인 정서’ 등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민족’이나 ‘우리’와 같은 집단적 정체성을 제공함으로써 정치 지형을 일시적이나마 뒤흔들 정도의 득표율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후기 산업 사회의 경제가 맞닥뜨려야 하는 구조적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진단하고 있다.
현대 정치의 위기와 포퓰리즘의 발생 원인에 대한 저자의 분석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은 버나드 마넹에 의거해 민주주의의 현 단계를 ‘대중 정당이 쇠락하고 선거 운동 과정에서 대중 매체의 영향이 증대되는 청중 민주주의(audience democracy) 시대’로 규정하는 부분이다. 이에 따르면 1970년대 이후 소위 ‘미디어 정치’가 보편화되면서 전통적 정당 질서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여론 조사와 선거 마케팅이 정당의 선거 공약이나 정책 방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며 미디어 전문가의 역할과 비중이 당 관료와 핵심 활동가를 능가하게 된다. 정치인들은 정당 기구보다 텔레비전 등 미디어를 통해 유권자들을 직접 설득한다. 이는 대화와 토론을 통한 설득 대신 이미지 정치의 확산을 가져오며 수동적 청중을 양산한다. 이러한 변화는 연예인처럼 미디어를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아는 포퓰리스트 -정치 흥행사!- 에게 더 없는 호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록 서구의 정당 체계를 대상으로 한 분석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하겠다.
풍부한 논의, 균형잡힌 시각, 남는 문제점
그런데 저자는 포퓰리즘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더 심각한 이유를 들고 있다. 민주주의를 둘러싼 철학적 논쟁, 특히 ‘민주주의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가 바로 그것이다. 민주주의 이상의 그늘에서는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며 충동적인 대중의 다수지배가 합리적인 전문가의 견해와 활동을 가로막을 수 있으며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무시할 수 있고, 인민주권의 명분을 내세워 법치주의의 근간을 훼손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실적 폐해를 이유로 민주주의, 특히 인민 스스로의 지배를 역설하는 인민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민주주의의 억제’를 요구해왔다. 저자는 엘리트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 등의 ‘민주주의 억제론’에 대해 ‘근본주의’ 민주주의자들이 벌이는 ‘이론적 싸움’에 포퓰리즘이 편승하고 있다고 바라본다. 이러한 싸움은 민주주의에 본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기에 민주주의가 균형을 상실할 때 그것은 언제라도 고개를 들 수 있는 것이 된다.
포퓰리즘은 부분적으로 현실적 성과를 보이기도 했으나 본질적으로 이성적 토론을 가로막고 다원성을 억압하는 등 민주주의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으므로 그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저자는 여기서 포퓰리즘의 극복 방향으로 대중의 참여와 전문가의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특히 존 스튜어트 밀의 구상, 즉 대중 지배의 틀 속에서 전문가가 능력을 발휘하는 ‘숙련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한다. 나아가 사무엘 헌팅턴이 주장한 민주주의의 선별적 적용에도 마음을 두고 있다. 이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구분해야 한다. 학문, 예술 등 소수 지배가 관철돼야 하는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일정 부분 배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듯 저자는 자유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국내의 포퓰리즘 논란에 대해 저자는 비교적 균형 잡힌 평가를 하고 있다. 풍부한 경험적 사례와 이론적 논의를 토대로 포퓰리즘을 연구한 저자에게는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 결론은 보수 논객들이 김대중 및 노무현(정권)에 대해 제기해 온 포퓰리즘 혐의는 몇 가지 근거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개혁을 거부하는 일부 정치 세력의 편견이 담긴 결과”라는 것이다. 나아가 노무현 정권에서 산견되는 포퓰리스트적 정치 행태는 엄밀히 말해 “한국의 모든 정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본다. 이명박 정권의 “법과 질서를 잘 지키면 국민총생산이 1% 올라간다”는 주장도 아마 그러한 행태에 해당될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포퓰리즘에 대한 풍부한 논의와 비교적 균형 잡힌 시각이라는 훌륭한 미덕을 지니고 있으나 몇 가지 아쉬운 부분도 지적할 수 있겠다. 지면을 고려해 한 가지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자유주의자로서 저자는 포퓰리즘이 바로 자유주의의 쌍생아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자유시장경제로서 자본주의와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내거는 의회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저자는 포퓰리즘의 보다 근원적인 원인으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들었는데 이는 현재 매우 가시적인 형태로 현재화되고 있다. 1960년대 말까지 전후 황금기를 구가하던 서구 산업국가들은 분배구조의 개선을 통해 계급분열이라는 자본주의의 ‘현실’과 민주주의의 ‘이상’ 사이의 괴리를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경제적 위기와 침체가 반복되면서, 특히 1990년대 이후 체제대립이 사라지면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점점 더 예리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사회적 불안과 불만은 고조되고 있다. 기존 정당 체계는 이러한 괴리를 호도하기에 급급하고 있으며 사회적 분열의 과정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포퓰리즘이 발호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임에도 이 책은 이러한 근본적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현재 퇴조세를 보이는 포퓰리즘 세력이 ‘반등’할 것 같지 않다고 바라보고 있으나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 설 경우 전망은 사뭇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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