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가는 길/책을 읽자

합의되지 않은 위험을 더 두려워하는 이유 (홍성욱, 교수신문 08-05-26) / [서평모음] 홍성욱의 과학에세이

새벽길 2008. 9. 28. 10:56
교수신문에 홍성욱 교수가 쓴 '위험사회와 과학기술학'에 대해 다룬 글을 보고, 이를 담아오면서 이전에 네이버블로그에 담아놓았던 '홍성욱의 과학에세이'에 관한 서평글도 옮겨온다.
 
2008/07/20 23:31
홍성욱 교수가 펴낸 <홍성욱의 과학에세이>에 관한 서평을 담아온 이유는 이 책이 단지 사람들이 광우병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거나, 과학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전개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과학이 바로 정치사회적 문제임을 말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소위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나 조망이론(prospect theory) 등에서 나오는 얘기들을 과학의 틀을 통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갔다. 서평들은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면들을 강조하고 있다. 
 
확률이나 합리적 경제인의 가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을 이해하는데 행동경제학이나 카네만, 트버스키의 조망이론이 도움이 된다. '정책과정이론연구'라는 강의 시간에 배웠던 조망이론은 많은 호감이 갔는데, 강의 당시에 논문 몇 개를 읽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손댈 엄두를 못내고 있다. 시간이 나면 이를 행정학적으로도 적용해보고 싶다. 
 
아무튼 홍성욱 교수의 이 책과 같은 글쓰기를 하고 싶은데, 참 쉽지 않다. 예전에 학부 교양수업 때 김영식 교수가 쓴 <과학사개론> 책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
합의되지 않은 위험을 더 두려워하는 이유 (교수신문, 2008년 05월 26일 (월) 15:23:37 홍성욱/서울대·과학기술학STS)
진단_위험사회와 과학기술학
 
광우병, 대운하, 유전자조작식품, 조류독감, 원자력발전, 세포치료…. 실로 우리는 위험 요소들이 범람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같은 새로운 위험의 대부분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해 야기된 것들이다. 매년 겪는 태풍과 홍수 같은 자연적 위해도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생명을 앗아가지만, 자연적 위해가 비교적 규칙적으로 발생함에 반해서 기술적 위험은 우리의 경험을 비웃듯이 갑자기 등장한다. BSE(광우병)는 과학화된 목축이 낳은 부작용이었는데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갑자기 등장하고 퍼졌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대운하는 홍수와 같은 자연적 위해를 기술적 위험으로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다.
 
예측의 어려움 때문에, 위험사회에서는 이미 축적된 정책 노하우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 사전예방의 원칙, 기술영향평가, 환경평가, 다양한 시민참여의 기제들은 위험한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최소한의 ‘보험’이다. 기술적 위험의 생성과 분배는 새로운 사회적 갈등을 낳는다. 전통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승자와 패자의 구도가 아니라 ‘위험 승자’와 ‘위험 패자’ 사이의 갈등이 부상하기도 한다.
 
위험은 불확실성으로 특징지워진다. 그 이유는 위험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미래에는 일어날 수도 있는 사고”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1969년에 미국의 엔지니어 스타(Chauncey Starr)는 기술적 위험 확률을 사회적 이득과 비교·분석했다. 그렇지만 그의 분석은 이러한 손익대차표로만은 파악하기 힘든 변칙을 보여주었는데, 예를 들어 스키를 타다가 죽을 확률이 원자력 발전소 옆에 살다가 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자를 기꺼이 즐기고 후자에 대해서는 극도의 불안감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이 연구의 중요한 함의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위험에 대해서는 훨씬 관대하다는 것이었다. 즉 자발성은 ‘위험체감지수’를 뚝 떨어뜨리는 요인이었으며, 반대로 자기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외부에서 강제된 위험에 대해서는 이를 인식하는 정도가 훨씬 더 증폭되었다.
 
스타의 연구는 이후 위험 연구의 새 장을 열었다. 일반 시민의 위험인식을 오랫동안 연구한 슬로빅(Paul Slovic)은 사람들이 끔찍한(dread) 결과, 미지의(unknown) 정도, 위험에 노출된 사람의 수에 비례해서 위험을 체감한다는 것을 밝혔다. 영국 왕립협회의 연구 결과도 위험 인식이 사망자의 수, 끔찍함, 과학자들 간의 의견 불일치 정도, 거대한 재앙의 가능성과 같은 요소들에 의존함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위험 체감지수는 직업, 계층, 성(性), 학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으며, 위험은 사람의 정체성(identity)을 위협할 때 훨씬 더 커졌다. 이를 고려하면 광우병에 대해서 주부와 ‘예비주부’인 여학생이 더 큰 위험을 느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섣부른 위험 정책은 위험을 없애기는커녕 이를 더 키운다. 위험의 평가에는 전문 지식이 개입하고, 따라서 위험 관리와 정책은 기술관료와 전문가들이 담당한다. 이들은 위험에 객관적인 위험이 있고 주관적인 위험이 있다고 믿는다. 객관적인 위험은 과학적, 확률적 방법을 통해서 평가한 위험이고, 주관적인 위험은 사람들이 감정에 근거해서 피부로 느끼는 위험이다. 이들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 결과를 잘 홍보하면 주관적인 위험이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객관적/주관적 위험을 가르는 모델은 위험 커뮤니케이션에서는 그 효력이 거의 없다. 대중의 위험 인식은 그저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시대에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일종의 ‘생존본능’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위험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적인 교육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여야 하며, 이러한 대화는 몇 가지 개혁이 전제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자는 과학기술 지식에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정치인과 관료는 정치권력을 더 공유하겠다는 데에 동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보의 제공은 전문가와 시민 모두에게 더 투명해져야 한다. 이러한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자, 정치인, 관료를 포함한 전문가와 시민 사이의 신뢰의 구축이다. 신뢰는 보통 상대방에 대한 기대, 위기나 기회를 받아들인다는 태도, 능력에 대한 인정, 배려의 중요성에 대한 동의, 미래의 예측성 같은 요소를 포함한다. 현 정부는 애초부터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된 정보를 숨기고, 또 기준에 대해서 수차례 말을 바꿈으로써 불신을 초래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신뢰를 다시 구축하는가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기술적 위험과 관련해서 신뢰를 쌓고 이를 유지하는 것은 무척 힘든 과정이다. 광우병 논쟁에서도 볼 수 있지만, 기술적 위험에 불확실성이 크고, 전문가들도 극과 극으로 나눠지며, 시민은 자신과 후속 세대의 생명에의 위협을 포함한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해 위험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히 이 경우에는 서로의 의견을 끝까지 청취하는 태도와 다양한 시민참여를 통해서 시민들의 의견과 감정을 지속적으로 고려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위험이나 안전의 정도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합의하는 것은 위험 커뮤니케이션의 첫 단계인데, 이 단계는 전문가와 시민의 협의에 의해서 선정된 독립성을 가진 위원회가 이를 평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위원회는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전문가를 포함해야 하고, 여기에 덧붙여서 일반 시민과 같은 비전문가들의 참여도 보장돼야 한다. 그리고 위험 평가에는 과학적 고려만이 아니라 위험을 느끼는 사람들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요소가 함께 포함돼야 한다. 이러한 위원회는 하나의 정책보다는 지금까지 알려진 사안들, 우리가 아직 모르는 사안들, 이후 가능한 결과들, 실패할 가능성들에 대한 다양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수렴해야 한다. 또 검역기관, 조사기관, 모니터링 단체에도 다양한 방식의 시민 참여를 유도하고 허용해야 한다. 시민들의 위험 인식은 정책기관이나 평가기관에 대한 신뢰의 정도에 따라 크게 좌우되며, 신뢰가 커질수록 이러한 기관들의 실제적인 효율성도 증대한다.
 
시민의 참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정부의 이해관계에 깊이 관여하지 않은 채로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제공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존재이다. 위험과 관련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 시민은 누구를 더 믿어야할지 결정하기 어렵다. 어떤 편견도 없는 과학자는 있을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솔직할 경우에는 그 의견을 평가하고 신뢰하기가 더 용이하다. 그렇지만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리거나, 연구비 등의 이유로 정부정책에 반하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시민사회가 기술위험의 사안들에 대해서 믿을만한 전문가를 키우고,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 이들과 연대하는 것은 위험사회를 극복하는 중요한 실천이다.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한 공공정책은 더 많은 대화와 토론, 그리고 이를 통한 시민의 자발적인 동의를 거쳐야 한다. 위험 사회에서 침묵은 동의가 아니라 깊숙한 불만과 분노의 표출이다. 사람들은 합의를 거치지 않은 위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참여와 대화는 참여정부만의 철학이 돼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홍성욱/서울대·과학기술학STS
필자는 서울대에서 ‘존 암브로스 플레밍과 전기공학의 발전’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 『Wireless: From Marconi’s Black-Box to the Audion』(MIT Press, 2001) 등이 있으며,  과학사회학과 과학기술사 전반에 걸쳐 글쓰기를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