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사회분석,운동사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관련 기사

새벽길 2023. 9. 27. 11:46

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흥미로워 관련 기사를 옮긴다. 이럴 때 보면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의 제대로 된 복권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문재인 정권에서처럼 애매하게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춰 부각시키는 게 아니라 이 대한민국이 건국되는데 사회주의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밝혀져야 한다. 갑자기 윤철호 등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관계자들의 최후진술, 항소이유서 등을 모아 낸 책이 생각난다. "그렇소,우리는 사회주의자요!" 그게 1990년인데, 30년이 넘은 지금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반공정치, 이념통치를 하는, 시대착오적인 꼴을 봐야 하는 상황이 어처구니 없다.

-------------------------------------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06315.html

홍범도 자유시 참변주도? 학계 무장해제·진압 간여 안했다 (한겨레, 최원형 기자, 2023-08-30 07:00)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 안에 있는 홍범도 흉상을 이전하겠다며 자유시 참변사건을 주된 이유로 들었다. 국방부는 29“19216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을 언급하며, 홍범도가 소련 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소련 공산당의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1대대장으로 임명 등의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 몰살을 주도했다는 등 일부 극우 커뮤니티와 매체들이 퍼뜨려온 괴담을 국방부가 은근히 지지해주는 모양새다.

자유시 참변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파벌 싸움에서 비롯한 사건으로, 만주에서 온 홍범도로선 여기에 간여할 이유도 힘도 없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일본이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토벌에 힘을 쏟자, 독립군 부대들은 이를 피해 1920~1921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성국가인 극동공화국 내 자유시(스보보드니)에 집결해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 및 극동공화국의 지원 아래 대규모 통합부대를 결성하려 했다고, 자유시 참변을 깊이 연구해온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논문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사변에 밝혔다. 일본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적대 관계였다.

그런데 19211월 러시아 공산당이 맡아오던 극동지역 지원 업무가 전세계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으로 이관되면서, 코민테른과 연결된 이르쿠츠크파(고려혁명군)와 독립군 통합의 주도권을 행사해온 상하이파(대한의용군)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고, 1921628일 극동공화국 군대가 치안 유지를 이유로 대한의용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홍범도 등 간도에서 옮겨온 독립군 대부분은 통합 주도권이 대한의용군에서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가는 것을 인정했다. 학계에서는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윤상원, 같은 논문)이었다고 본다. 독립군 연구 권위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들은 당시 그쪽에 몸을 기탁한, 이를테면 손님이었다. 그는 코민테른의 결정에 반발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무장해제 결정 과정에 간여하거나 영향을 준 일도, 진압 과정에 동원된 일도 없다고 지적했다.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가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홍범도’)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대한의용군에 대한 재판 과정에 홍범도가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사실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자유시 참변은 곧바로 국제사회에서 첨예한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르쿠츠크파는 명망과 권위가 높은 항일의병장 홍범도를 재판위원으로 삼음으로써 신속한 사태 수습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재판 결과 실형(징역형 2)을 받은 독립군은 3명뿐이었다. 이후 진상 규명 과정에서 홍범도를 비롯한 간도 출신 독립군들은 정파 싸움에서 들러리로 희생당했다는 취지의 성명을 내기도 했다.

홍범도가 이르쿠츠크 회군뒤 소련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1대대장으로 임명된 것을 두고도, ‘홍범도가 적군에 가담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9218월 일본의 집요한 요구로 극동공화국에 주둔할 수 없게 된 고려혁명군은 이르쿠츠크로 이동해야 했고, 이때 독립군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형식적으로 적군 소속을 부여했고 독립군은 현실적으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풀이가 나온다.

홍범도 흉상 이전 등 국방부의 시도에 대해, 반병률 교수는 “‘공산주의라고 김일성과 같은 말이 아니다. 독립군의 역사도, 공산주의의 역사도 이처럼 복잡한데, 이를 입맛에 맞게 단순화시켜 확대해석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7329873

[사실은] "홍범도 논란의 핵심, 역사의 소급 적용" (SBS뉴스, 이경원 기자, 2023.09.02 07:55)

국방부 "홍범도, 독립군 몰살 관여 의혹" 따져 보니…

이번 주는 육군사관학교 내부에 설치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놓고 정치권 논란이 뜨거웠습니다. 국방부는 "공산주의 이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해 기념하는 것은 육사의 정체성을 고려할 때 적절하지 않다"고 입장문을 냈습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관련 행적의 구체적 사례를 열거했습니다.

그렇다면, 국방부 주장에 대한 역사학계 주류 의견은 어떨까요.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SBS 팩트체크 사실은팀이 확인했습니다.

자유시 참변, 그리고 홍범도 장군

위 국방부 주장을 보시면, 홍범도 장군과 관련해 가장 많은 의혹이 제기된 역사적 사건이 1921년 자유시 참변입니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현재 스바보드니)에서 독립군과 레닌의 적군(赤軍)이 교전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기술된 정의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독립군이 레닌이 이끌고 있었던 공산주의 세력, 이른바 볼셰비키 적군과 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독립군이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희생됐다는 것, 그런데 홍범도 장군이 바로 이 볼셰비키 적군 편에 서서 독립군 몰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국방부가 제기한 겁니다.

일단 사실은팀은 자유시 참변이 어떤 사건인지 확인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러시아 적군과 독립군의 교전'이라고 일원적으로 규정할 만큼 단순한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령 안에서 벌어진 러시아 적군과 백군의 갈등, 그 사이 연해주를 불법 침법한 일본군, 결정적으로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로 나뉜 독립군 내 계파 갈등이 얽히고설킨 결과였습니다.

먼저, 자유시 참변의 내용을 최대한 쉽게 정리해봤습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해석을 위해,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설명을 요약했습니다.

 

<자유시 참변 정리>

① 1921년, 연해주 지역의 일본군 탄압이 거세지면서, 점 조직처럼 움직였던 우리 독립군도 힘을 합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임시 정부 역할을 했던 '대한국민의회'는 연해주 각지의 한인 무장부대들이 자유시로 집결하도록 지도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도 자유시에 주둔하게 된다.

② 하지만, 독립군 내부에 계파 갈등이 생긴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갈등이 대표적이었다. 고려혁명군정회의(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의 한인 정부를 자처했던 대한국민의회, 사할린의용대(상해파)는 상해 임시정부의 연장선에 있었다. 양군의 팽팽한 대치 상황 속, 형세는 고려군정의회가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다.

③ 이르쿠츠파의 뒤에는 볼셰비키 적군이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일본은 적군에게 독립군 해체를 요구했다. 일본군을 철수시킬 필요가 있었던 적군은 일본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독립군을 볼셰비키에 흡수하는 식으로 마찰을 피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

④ 독립군 내의 계파 갈등, 여기에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이 맞물리면서, 6월 27일 밤 고려군정의회 지도부는 사할린의용대(상해파)의 강제 무장 해제를 결정하고, 다음날 공격을 시작한다. 희생자 규모는 제각각이지만, 최소 36명, 최대 550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 자유시 참변은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 독립군을 무장 해제한 동족상잔의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핵심은 홍범도 장군이 여기에 얼마나 개입됐는가 입니다. 이를 위해 1920년대 독립운동사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명예교수,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장세윤 수석연구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오세호 전 연구원입니다.

먼저, 홍범도 장군이 볼셰비키 적군의 지원을 받은 고려혁명군정회의(이르쿠츠크파) 편에 선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오세호 연구원은 "당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간도 독립군 지도자들이 왜 고려혁명군정회의를 택했는지 당시 기록이 성명서 형태로 남아 있는데, 무장 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이 컸다"고 말했습니다.

정세윤 연구원은 당시 시대 상황에 빗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국방부 설명대로,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몰살에 개입한 정황이 있을까요.

전문가들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에 가깝다는 겁니다. 정세윤 연구원은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본 군대는 허재욱 장군이 주도하는 의군부 독립군인데, 허재욱 장군은 홍범도 부대와 크게 활약한 부대였다. 자유시 참변으로 우리 독립군이 희생됐다는 소식을 들었던 홍범도 장군은 장교들과 솔 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오세호 연구원은 이르쿠츠크파가 아닌, 여기에 맞선 상해파 피해자들의 발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반병률 교수는 다른 증거를 들었습니다. 반 교수는 "오히려 참변 6개월 후 전모를 파악한 홍 장군은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탄원서를 소련 정부, 러시아 공산당, 국제공산연맹 측에 제출한 사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국방부 설명처럼 홍범도 장군이 상해파를 처벌하는 재판에 참여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부분이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관여하지 않은 또 다른 증거일 수 있다고 합니다.

오세호 연구원은 "당시 홍범도 장군은 한인들 사이에서 명망과 권위가 있었고, 이르츠쿠츠파는 이런 홍범도를 선임해 재판이 불편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반병률 교수는, 비슷한 맥락에서 적군 공산당에 이용 당했다는 점에 무게를 둡니다. 반 교수는 "당시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에 관여하지 않았던 까닭에) 정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르쿠츠크파를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공산당 극동비서부장 슈미야츠키는 이런 홍범도가 재판에 들어가길 바랐고, 당시 상황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홍범도가 수락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해석이든 홍범도 장군이 당시 자유시 참변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몰랐다는 것, 달리 말하면, 참변에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자유시에 모여있던 수천 명의 한인 독립군은 자유시 참변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소비에트 적군 제5군 직속 한인 여단으로 개편됐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여기서 제1대대장으로 임명됐습니다. 반 교수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자유시 참변 등 부침을 겪었던 독립운동 세력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통신과 연락을 재개하면서 통합 작업에 들어갔고, 1920년대 중반 만주 독립운동의 새 지평을 열어갔습니다.

국방부 말대로, 홍범도 장군이 1922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대표대회에 참석한 것은 사실이고, 당시 레닌에게서 권총과 상금 100루블을 받았습니다. 다만, 1922년 당시엔 레닌 러시아 혁명 정부가 세계 약소 민족들에 굉장히 많은 지원을 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작성한 조사표가 발굴됐는데, 소속 정당도, 소속 노동조합도 '없다'고 적었고, 꿈은 '고려 독립'이라고 썼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22년 고려군 혁명군에서 제대하고, 1923년에 제대 군인들과 함께 연해주 이만에서 협동농장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나이로 60세인 1927년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19379, 소련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공화국 사나리크로 이주했으며, 이듬해에는 카자흐스탄의 소도시 크즐오르다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1943102575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자유시 참변과 관련한 주류 역사학계의 주장입니다.

소급 적용된 역사

이 밖에도 국방부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 빨치산으로 참가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껏 많이 보도됐지만, 1920년대의 빨치산은 우리가 아는 빨치산과 개념 자체가 달랐습니다. 오세호 전 연구원은 "빨치산은 프랑스어로 '동지' 또는 '당파'라는 뜻의 'parti'에서 유래된 말로 비정규군을 의미한다. 홍범도를 비롯한 1920년 독립전쟁에 참전한 독립군들은 정규군이 아닌 '의용병'이나 '빨치산'으로 참가했다"고 했습니다.

사실은팀이 취재했던 전문가들이 한 입 모아 강조한 부분이 있습니다. 국방부 주장의 '각론' 하나하나에 대한 팩트체크 보다는, 그 각론을 관통하는 국방부의 문제 의식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 국방부의 각론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 공간의 공산주의, 그리고 1945년 이후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공간의 공산주의를 동일하게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사실 두 기간의 공산주의는 문양이 매우 다릅니다. 지난 29일 국방부 브리핑에서 SBS 김태훈 기자가 말했던 것처럼, 김일성은 1912년생입니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국방부 주장들은 김일성이 10대였을 시기였습니다. 반병률 교수는 "당시 미국과 소련은 독일 등에 맞서 한 편에 서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체제 경쟁이 시작된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고 부연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역사를 소급 적용하는 오류에 가깝다는 겁니다. 우리는 "세종대왕이 행정권은 물론 사법권까지 장악했기 때문에 독재자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1950년대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2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 끼워다 맞추다 보니 무리한 주장이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인식이었습니다.

실제,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행적은 1970~80년대 꽤 많이 알려졌음에도 국사 교과서에 매번 등장했습니다. 사실은팀이 7차 교육 과정까지 초··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전수 분석했는데, 1차를 제외한 2차 교육 과정부터 7차 교육 과정까지 홍범도 장군의 업적이 모두 실려 있었습니다. 특히, 국정 국사 교과서 시절은 공산주의 행적이 있는 독립운동가에게 엄격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행적은 달리 바라봐야 한다는 역사학계의 공감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해석이 성역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새로운 사료가 나오면 해석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다만, 협의되고 합의된 역사적 해석을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증거, 그러니까 새롭게 발굴된 사료가 있어야 합니다.

"비록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으나, 경계 없이 활약했던 장군의 의지와 기개는 한민족 모두에게 큰 울림을 준다. 외세의 압제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한민족의 독립 전쟁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그가 어느 곳에 있더라도 후세에게 귀감이 된다."

이건 SBS 사실은팀의 해석이 아니라, 국방부가 3년 전 펴낸 <독립전쟁과 홍범도>에 나온 문장입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현재까지 발굴된 홍범도 장군의 사료는,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당시 홍범도 장군의 영상 정도가 있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1106841.html

호국한다며 독립·민주걷어차기그러면 나라 지켜지나 (한겨레, 김지훈 기자, 2023-09-02 14:00)

[더 파이브: The 5] 정부가 홍범도 장군을 지우려는 이유

윤석열 정부가 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이름을 바꾸고, 홍 장관에 수여된 건국훈장을 취소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가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던 이력을 문제 삼고 있는데요. 정부가 갑자기 홍 장군을 흔드는 진짜 이유는 뭘까요? 권혁철 기자에게 물어봤습니다.

[The 1] 정부는 왜 육사에서 홍 장군 흉상을 없애려는 걸까요?

권혁철 기자: 국군의 뿌리가 독립군·광복군이냐 아니면 미 군정 국방경비대냐를 두고 오랜 논란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군의 뿌리가 독립군·광복군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2018년 독립군·광복군의 흉상을 육사에 세운 것이죠. 하지만 전직 장성, 극우 세력과 역사관을 공유하는 윤석열 정부는 미 군정 국방경비대를 군국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독립운동의 역사는 자신들의 역사관과 양립할 수가 없다고 보는 거죠.

독립운동에는 자유주의, 반공주의 같은 우익만이 아니라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온갖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윤 정부가 보기에 국군은 한미동맹을 지키고 반공 투쟁을 하기 위해 존재해왔을 뿐이라는 겁니다. 우익 세력의 원죄를 가리기 위해서도 그래야 하고요.

[The 2] 무슨 원죄인가요?

권혁철 기자: 친일 부역이죠. 독립운동 역사를 인정하면, 친일의 역사도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선엽 장군이 대표적이죠. 백선엽은 제 발로 (일본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만주군 장교 양성 학교에 입학했잖아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군 장교로 5년이나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사람입니다. 그러다 일제가 망하니 슬쩍 노선을 바꿔서 한국에서 장군도 되고, 한국전쟁에 나가 공로도 세운 거죠. 해방 후 미국과 반공주의에 올라타 친일파 청산을 피해 살아남은 뒤 각 분야에서 주류가 된 수많은 이들의 행태와 동일하잖아요.

[The 3] 그래도 백선엽 장군이 한국전쟁에선 공을 세우지 않았나요? 정부가 홍 장군 대신 백 장군 흉상을 육사에 세우려 한단 이야기도 군 안팎에서 나오는데요.

권혁철 기자: 백선엽의 공과를 따지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 정부는 백선엽이 나라를 구했다고 하지만, 당장 같이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부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1사단장으로, 당시엔 남한이던 개성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이 개성부터 치고 내려왔을 때 1사단은 아무 저항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전날 서울서 열린 육군회관 파티에 가서 술 마시고 자다가 부대로 복귀를 못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백선엽은 평생 대접받고 산 사람입니다. 30대 내내 장군, 40대에는 프랑스·캐나다 대사, 50대에는 교통부 장관과 공기업 사장을 지냈습니다. 60대 이후엔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호국의 별로 떠받들어졌고요. 하지만 홍 장군은 아버지처럼 머슴과 광산노동자로 전전하다, 추운 만주 전쟁터에서 싸웠고, 나이 들어선 강제로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 극장 경비 등을 하다 죽었습니다. 두 사람의 삶의 경로를 봤을 때 육사에서 장교들에게 본받으라고 내세울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The 4] 윤석열 대통령도 정치적으로 득이 되니까 홍 장군 흉상을 철거하란 거 아닐까요?

권혁철 기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국민적 존경을 받는 홍 장군을 흔들면 선거나 정치에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하잖아요. 양당에 각각 30%의 부동지지층이 있고, 중간에 있는 40% 유권자의 표를 더 많이 가져오는 게 기본 선거 전략이니까요. 하지만 윤 대통령은 일반적인 대통령이 아니에요. 대통령이 되는 것까지만 목표였던 걸로 보여요. 다시 대통령 선거 나올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정책도 없는 거죠. 그냥 전 정권이 한 거 때려 부수고, 검사 때처럼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국가 세력이라며 벌주는 일이나 하는 거죠. 저출산, 한반도 평화, 기후위기처럼 어려운 문제는 내버려두고요.

[The 5] 여당은 대통령이 국가 기틀을 세우기 위해 표에 도움이 안 되는 일도 하고 있다고 옹호합니다.

권혁철 기자: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란 솥엔 독립·호국·민주라는 세 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보훈부는 독립투사, 전쟁공로자, 민주화 유공자 모두 잘 기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보세요. ‘독립민주란 두 다리는 걷어차 버리고 호국다리 하나만 남기려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자신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니 이해하기가 힘들죠. 지금처럼 민주화 된 한국에서 역사를 독점하는 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권력은 역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https://www.khan.co.kr/politics/defense-diplomacy/article/202309021839001

홍범도 흉상 이전에 박노자 정부, 무능 덮으려 독립 영웅 부관참시 (경향, 김정화 기자, 2023.09.02 18:39)

육사 홍 장군 흉상 외부 이전 추진에 쓴소리

“총체적 난국에 대중 관심 돌릴 연막 공작”

카자흐 고려인들도 “큰 충격…계획 철회를”

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 장군 흉상을 교내에서 외부로 이전하기로 한 데 대해 러시아 출신의 귀화 한국인인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과 교수가 정부가 무능과 실정을 덮으려고 독립 영웅에 이념 시비를 거는 꼴이라고 밝혔다. 홍 장군은 50만 고려인들의 집단적 정체성의 상징이기도 하다이를 모독하는 게 사회 통합에 도움이 되느냐고 지적했다.

역이민자인 고려인 동포들의 삶을 연구하는 박 교수는 2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육사에서 벌어지는 홍 장군 흉상 철거의 촌극은 그야말로 연막 공작’”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홍 장군은 단순히 독립운동 영웅이 아니다“50만명 고려인의 5분의 1은 지금 국내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은 그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해야 하는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연 그 상징인 홍 장군을 이처럼 모독하는 게 사회 통합, 나아가 구소련 고려인 디아스포라와의 좋은 관계 구축에 도움이 됩니까라고 지적했다.

특히 현재의 흉상 이전 논란이 정부의 무능을 덮으려 벌어지는 일이라고 짚었다. 박 교수는 수출 부진으로 경제 성장률 전망치도 세계 전체 평균보다 2배나 낮고, 일본의 오염수 방류 등 한국 정부가 종범이 된 대형 환경 범죄도 감행되고 있다흉상 철거와 그 철거가 초래한 이념 시비는 결국 대중의 눈을 돌릴 만한 소재라고 말했다. 이어 흉상 이전은 홍 장군에 대한 부관참시라고까지 하며 염치 없는 패당이고, 정부라고 부르기도 뭐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앞서 흉상 이전 소식에 국내외에서 큰 반발이 일어나는 가운데 홍 장군이 말년을 보낸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동포들 역시 이전 계획 철회를 촉구했다. 리 류보피 카자흐스탄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 예술감독과 박 드미트리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카자흐스탄 지회장 등 고려인 동포들은 지난 1(현지시간)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흉상 이전 계획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들은 고려극장 안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대형 사진 앞에서 항일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 ‘홍범도 장군 공산당 이력이 문제면 내 가족과 고려인 동포 50만명도 모국의 적인가?’라고 써진 플래카드를 들고 이전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2021년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현장에 있었다는 박 지회장은 당시 홍범도 장군이 아름다운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겨 영면하시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뿌듯해했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자랑스럽게 느꼈다카자흐스탄 국민들도 같은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다섯 분의 독립전쟁 영웅 중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만 철거한다는 소식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그렇다면 공산당원이었던 돌아가신 나의 부친도, 옛 소련에서 태어나고 인생의 절반 정도를 소련 체제 속에서 살았던 나도 제거 대상인가. 21세기에 공산당도 소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리 예술감독은 체제와 정권이 바뀔지라도 홍범도 장군은 우리 민족의 독립전쟁 영웅이라며 그가 8천만 겨레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고려극장은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3090211232262653

레닌 친필 서명 '조선대장군', '좌익' 홍범도 만드는 명분에 이용되었다 (프레시안,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전문위원 | 2023.09.03. 05:35:16)

[박흥수의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상] 홍범도 장군을 생각하며

동방의 파리로 불리는 이르쿠츠크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도시이다. 이르쿠츠크역 앞에서 시 중심가로 향하는 1번 트램을 타면 앙가라 강 위에 놓인 글라즈코브스키 다리를 건너게 된다. 이 다리를 건너면 5군단로를 만난다. 길을 부대 이름으로 명명했다. 격동의 시기 이르쿠츠크를 지킨 5군단이라는 이름은 시의 거리 명으로 남을 정도로 상징적인 부대였다. 5군단에는 특별한 부대가 있었다. 한인들만으로 구성된 특립 고려여단으로 오하묵이 여단장이었고 박승만은 여단 군정위원이었다.

20개 중대 2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소속된 고려여단은 자유시 참변이라는 비극을 딛고 여러 경로로 떠돌던 항일 독립군들이 모여 만든 부대였다. 조선인 항일 독립군들로 북적였던 5군단 거리는 굳이 러시아 말을 쓰지 않아도 소통되는 장소였다. 이 고려여단은 자유시의 비극을 치유하고자 했던 여러사람들이 노력한 결과였고 그 대표자가 홍범도 장군이었다.

왜 시베리아의 자유시에 한인 무장 유격대들이 모여들게 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19년 조선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3.1 독립 항쟁은 수 많은 조선인들의 의식을 깨워 일으켰다. 해외 각지에서 독립을 위한 결사체가 생기고 임시정부도 세워졌다. 당시 만주에는 1800년대말 간도 대이주시기부터 정착한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고 당연히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도 많았다.

일본제국주의는 안정적 조선지배에 위협이 되는 만주의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섰다. 이에 한인 무장 세력은 아무르강을 넘어 러시아 땅 시베리아로 향했고 이 과정에서 무장 독립운동의 두 세력이 대립하게 된다. 이른바 이르쿠츠크파로 불리는 고려혁명군정회의는 시베리아의 모든 한인 무장세력은 자신들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상해파로 불리는 사할린 특립 의용대가 주축인 대한독립군단은 고려혁명군정회의가 조선독립보다는 한인 부대를 볼세비키 군대에 편입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고려혁명군정회의는 이에 맞서 대한독립군단이 민족주의에 경도된 반혁명적 노선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 혁명이냐 민족이냐는 문제는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줄곧 따라다녔던 갈등이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이 두 세력은 한국독립투쟁을 지원하는 공산주의 국제연합(코민테른)에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대표를 보내려고 했다. 코민테른은 독자적인 조사를 진행해 무력 투쟁을 벌인 양측을 비난하고 양측이 같은 수로 임시위원회를 구성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어쨌든 자유시 참변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한인끼리의 갈등과 대립은 조선독립에 해가 될 뿐이므로 이 사태를 더 큰 상처 없이 마무리해야 한다는 심정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기 1년 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전쟁 영웅이었다.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대한독립군단에 대한 재판에서 홍범도는 재판관의 일원으로 참여해 대부분의 수감자들을 석방하게 했다.

일본제국주의 침탈 시기 많은 조선인들은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낸 러시아(소련)가 식민지 해방투쟁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천명한 것은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 분쇄를 통한 사회혁명이었다. 오늘날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은 철 지난 유토피아 이념에 빠진 어리석은 일로 간주한다. 하지만 18,19세기의 공산주의 이론은 답 없어 보이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빛이었다.

신분제 사회의 강고한 틀에 갇혀 하인들은 감히 상전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는 일이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던 사회였다. 10대 초반의 아이들마저 하루 14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리고 여성들이 투표를 한다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징조라고 생각하는 시대였다. 이런 때에 등장한 해방이론이었던 사회주의는 유령처럼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부침을 거듭하다 무너진 소련이나 오늘날 이상한 국가 취급을 받는 북한의 모습만으로 공산주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펼쳐진 사상을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평가도 가능하다.

1925년 을지로 중국집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 창립 선언문에는 사회주의 혁명 완수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완전한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제1강령으로 하고 있다. 일본 침략자들은 경악했고 암암리에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미소를 지었던 사건이었다. 일본 지배자들이 극도로 경계하고 싫어하는 집단이라면 조선인들에게는 희망이었던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평생을 풍찬노숙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갔다. 안중근 의사의 공판기록에도 홍범도 장군이 등장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 한 후 관동도독부 감옥에서 미조부치 다카오 검찰관이 작성한 신문조서의 내용을 살펴보자.

검찰관 : 그러고는 어디로 갔는가?

안중근 : 웅기에서 북간도로 갔다.

검찰관 : 그다음에는 어디로 갔는가?

안중근 :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검찰관 :이범윤의 집에도 갔는가?

안중근 : 그곳에는 두세달 동안 있었지만, 그를 만나지 못했다.

검찰관 : 그동안 최재형, 최봉준, 이상설, 이위종, 전명운, 이춘삼, 유인석, 홍범도 그리고 차도선을 만난 일은 없는가?

안중근 : 그곳에서는 홍범도만을 만났다.

검찰관 : 홍범도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

안중근 : 함경도 의병의 거물이다.

동의회를 만들어 의병부대를 재조직한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에서 안중근과도 만나 국내 진입작전을 모의하기도 했다.

함경도 의병의 거물에서 만주와 시베리아 독립군의 상징적 인물이 된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 이듬해 모스크바로 갔다. 코민테른이 식민지 독립 투쟁에 나선 나라들의 혁명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개최한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대회에 참가한 56명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붉은 광장으로 이어지는 리콜리거리 7번지에서 19번지에 이르는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홍범도 장군은 숙소까지 찾아온 사절을 따라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다. 한인 대표자들 중 유일하게 소련의 최고 지도자를 만난 것이다. 레닌은 홍범도 장군을 만나 초청한 이유를 말했다. "우리 두 민족의 공동한 항일 투쟁에서 홍범도 동지가 세운 전투적 공훈을 높이 평가하여 사의를 표하기 위해 이렇게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룬 홍범도 장군의 항일 투쟁 성과는 모스크바 지도자들에게도 인상적이었으며 항일투쟁 전선을 이끄는 조선의 군사적 지도자로서 예우를 한 것이었다.

이 만남에서는 자유시 사건에 대한 대화도 이루어졌다. 홍범도 장군은 담담하게 자유시 참변에 대한 견해를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전달했다.

"저는 그 사변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변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정치에는 감각이 무딥니다.....고려혁명군사의회 조선 사람인 지도자들은 이르쿠츠파 사람들이고 사할린 특립의용군 지도자들은 상해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고려혁명군 사령관 갈란다라시월린은 이르쿠츠크파 사람들의 말만 듣고 독립의용군 지도자들 중에서 몇사람을 고려혁명군군사의회 지도부 성원에 넣어 달라는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이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런 문제를 가지고 끝가지 연합에 반대해 나선 것은 사할린 독립의용군 지도자들의 잘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할린 독립의용군이 연합을 반대한다고 해서 그 부대가 중령으로 넘어가려고 한다는 구실까지 꾸며가지고 무장해제 시키고....무장해제를 할 때에 100여명의 무고한 군인들을 죽게 한 것은 천인공노할 범죄적 행동이라고 인정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소련 지도자 레닌 앞에서도 소련의 정치 노선을 따르는 고려혁명군의 자유시 무장해제 사건에 대해 범죄적 행동이라고 분명히 지적했다. 군인으로서의 당당함을 바탕으로 항일 전선에 나서는 조선인들은 서로 간의 차이를 극복해 연대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힌 것이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정의 홍범도 장군 흉상을 옮기면서 자유시 참변의 책임을 묻는 것은 역사적 누명을 덮어 씌어 항일독립운동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홍범도 장군은 레닌으로부터 조선독립군 대장 예우에 준하는 선물을 받았다. 군용 외투와 군모, 권총과 금화 100루블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의 손에는 선물과 함께 레닌이 친필 서명한 "조선군대장"이라는 증명서가 들려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선물들이 나중에 홍범도 장군에 대한 배척의 사유가 되어버린다. 극단적인 이념대결이 펼쳐진 해방정국과 냉전 시대를 통과하면서 홍범도 장군은 잊힌 영웅이 되었다.

지금도 작은 기관이라도 방문을 하게 되면 기념품을 받게 된다. 하물며 유럽과 아시아에 뿌리를 내리고 주변 민족들과 연방을 이룬 러시아 최고 지도자가 초청자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일반적이고 당연한 관례이다. 다만 선물은 조선 항일 운동을 이끈 군인 홍범도 장군의 위상에 걸맞은 예우를 갖췄을 뿐이다.

홍범도 장군의 인간적 됨됨이는 그의 삶 곳곳에 배어있다. 장군은 민족종교로 불린 대종교에도 참여했고 단군을 기리는 단학회에도 관여했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사상도 종교도 다투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심이 없었다. 레닌으로부터 받은 금화 역시 연해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위한 협동조합 조성기금으로 사용했다. 홍범도 장군은 자립적인 독립운동을 주장했다.

당시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은 동포들의 모금에 의존했다. 그러나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은 고국을 떠나 막노동판이나 삭막한 농토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삶을 이어가는 민초들이었다. 이들을 찾아 우리는 독립운동을 하니 무기와 식량을 사게 돈을 내놓으쇼라고 말하기에는 동포들의 처지가 너무도 처량했다. 홍범도는 동포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협동농장을 일궈 나오는 소득으로 항일 운동을 하고자 했다.

공직에 나서면서도 주식 백지 신탁을 거부하거나 코인이니 주식이니 사욕을 채우는 투자에 눈이 먼 오늘날의 정치인들과는 격이 다른 인간이 홍범도였다. 이런 거인을 기리기는커녕 역사에서 지워버리자고 말하는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항일 투쟁에 나선 많은 이들이 빠르면 10대 초반 나이에 조선 해방에 몸을 던지겠다며 만주로 시베리아로 상해로 떠났다. 춥고 배고픈 광야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는 지역과 당파를 넘고 사상과 이념의 골을 지나 해방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왔다.

한 가지 사실을 더 부연하자면 일제 강점기 조선과 동아시아 곳곳에서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들의 삶을 짓밟았던 자들은 해방 후 반공 투사로 거듭났다. 친일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더 극심한 반공 투사가 되었다. 이들은 사상적 투사가 아니라 당대 권력의 대세를 따르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역사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너는 어느쪽이냐"는 살벌한 물음을 한반도 민중에게 던졌다. 그리고 70여년, 대한민국은 굳이 무엇이라 규정하지 않아도 다이나믹하게 변화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 시점에 먼지가 뒤덮인 낡은 레파토리를 다시 꺼내 적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 김일성과 연대하고 평생을 투철한 공산주의 혁명가로 살았던 호치민의 무덤까지 찾아가 머리 숙여 참배한 대통령과 정부가 자국 독립운동 영웅을 좌익으로 몰아 역사의 뒤 켠으로 내모는 작금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항일 투쟁에 평생을 바치면서 갈등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 서로를 손 잡게 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홍범도 정신이 그리울 뿐이다.

<참고도서>

김상웅, 빨지산 대장 홍범도 평전, 현암사, 2013.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돌베게, 2015.

박흥수, 시베리아 시간여행, 후마니타스, 2017.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106892.html

김문수·전광훈의 홍범도 비난 논리, 윤 정부가 이어받았다 (한겨레, 이승준 기자, 2023-09-03 15:24)

육군사관학교(육사)는 지난달 31육사 외 독립운동 업적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적절한 장소로 이전한다며 반대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정 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 밖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20218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고, 같은해 818일 대전현충원 안장식에서 여야 대표와 국방부 장관, 각군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홍범도함장이 참석해 최고의 예우를 한지 2년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국방부와 육사가 흉상 이전을 추진하며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이력 등을 문제 삼았는데 결국 2년 만에 스스로를 부정한 셈이 됐습니다.

2년 전 유해 봉환 당시 소련 공산당 이력을 부각하며 비난했던 이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뉴라이트 인사들과 일부 개신교 단체, 보수·극우 성향의 언론매체들이었고 당시에는 이러한 주장들이 공론장에서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국방부와 육사의 홍범도 지우기는 이들의 발언에 다시 권위를 실어줬습니다. 당연히 앞으로도 이러한 주장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이&nbsp; 2021 년&nbsp; 8 월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당시 페이스북에 올린 글 .&nbsp; 페이스북 갈무리

김문수, 강규형현 정부 인사들의 2년 전 발언

2년 전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이력을 부각하며 유해 봉환을 비난했던 이들은 현 정부에서 주요 자리를 맡은 인사들입니다.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은 2021818·1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홍범도. 자유시 참변 때 독립군 수백 명을 학살한 소련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고 레닌으로부터 권총·군복·상금까지 받고, 소련 공산당원이 됐습니다. 광복절·건국절에 이승만은 지워버리고, 소련공산당원 홍범도만 띄우는 문재인의 목적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가요등의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체제에서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이사로 임명된 강규형 명지대 교수(국가기록관리위원회 위원장)2021820일 뉴데일리에 기고한 칼럼에서 홍범도의 자유시 참변 참가는 반민족 행위였고 그 이후 무장 항일운동의 씨를 말린 직접적 이유가 됐다. 그는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 받았지만 사실 그는 대한민국건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소련 공산당 당원이자 소련군 대위로서 공적 생활을 마친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자였고 그의 고향은 평안도이니 차라리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발언 모두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 당시 무장해제·진압 간여 안 했고, 소련 공산당 입당도 독립운동을 위한 방편이었다는 역사학계 대부분의 시각과 배치되는 주장입니다.

전광훈 독립군 탄압하고 죽인 범인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 등 극단적인 주장을 폈던 이들도 2년 전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유해 봉환을 주도한 문재인 정부에 색깔론을 들이댔습니다. 2021822일 전광훈 목사는 유튜브 LGs-TV전광훈 목사의 홍범도 공산사상을 "P히다(밝히다의 오타로 추정)’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의 장교 출신이다. 러시아 군대 소속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오히려 독립군을 수도 없이 탄압하고 죽인 범인 중의 하나다자기 나름대로 일본군하고 싸웠다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은 공산주의자 편에 서서 오히려 애국지사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다. 이 사람을 이장을 시켜서, 세상에 유골을 한국에 가져와 대전 국립묘지에 재운다고 하면서 문재인이가 이 사람 앞에서 경례를 하면서 울었다. 공산주의자다 이 사람(문재인 전 대통령)”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일부 개신교 단체와 극우성향의 매체들도 비슷한 논리를 폈습니다. 한 개신교 단체는 20218홍범도가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그는 소련 공산주의 편에 서서 같은 독립군을 학살했다. 우리 정부는 어찌 공산주의자들만 특별 대접하는 것처럼 보이는가라는 입장이 담긴 논평을 내기도 했습니다.

뉴라이트, 극우세력 주장 더 힘받나

이들의 발언은 모두 지난달 28일 국방부가 발표한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에서 내세운 논리와 닮았습니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의 이력 가운데 자유시 참변에 연루됐다는 의혹 봉오동·청산리 전투 때 빨치산으로서 참가했다는 의혹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사실 등을 근거로 홍범도의 흉상 이전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역사학계 등에서 대체로 근거가 없다고 반박해온 내용을 이번에 국방부가 나서서 대변해준 셈이 됐습니다. 유해 봉환을 계기로 사회적 합의를 이룬 홍범도 장군에 대한 평가도 뒤집어버렸습니다.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안인데 국방부는 흉상 이전 논의에 역사학계와 협의는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문제는 흉상 이전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문수 위원장이나 강규형 교수 등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깎아내리고, 건국절을 주장하며, 친일 전력이 있는 백선엽 장군의 재평가 등을 주도해온 뉴라이트 성향의 인사들로 꼽힙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 이동관 위원장,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등의 뉴라이트 인사들도 현 정부에서 중용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지우기, 백선엽 장군 재평가, 건국절 부각 등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뉴라이트 인사들 중심으로 시도됐고, 매번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계기로 건국절, 백선엽 장군, 역사교과서 등과 관련한 이들의 주장이 다시 힘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국가의 정치적 지향점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이념이라는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이러한 전망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06926.html

임시정부 뜻 떠받든 홍범도-러 연대’, 냉전 논리로 흠집내나 (한겨레,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2023-09-03 18:29)

[기고] 홍범도 독립운동 왜곡 논란

최근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10~194310) 장군의 행적과 흉상 이전 문제가 큰 논란이 됐다. 때마침 올해 10월은 홍범도 장군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땅 크즐오르다에서 서거한 지 80주기가 되는 달이다. 중앙아시아에 묻혀 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지도 2년이 넘었다. 따라서 그의 독립운동과 나라 사랑, 그 정신과 가치,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 등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불멸의 자취를 반추하고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인 듯하다. 지난 829일과 31일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 밖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과 이념을 무리하게 재단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국무총리는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이름도 바꿔야 한다는 발언까지 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독립전쟁 영웅을 대하고 기려야 할까.

홍범도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인 189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의병과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20여년 동안 줄기차게 일제와 싸웠던 대표적 무장투쟁가다. 그처럼 오랫동안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국내는 물론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 등지를 넘나들며 초지일관 항일투쟁을 벌인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은 물론 북한, 중국 옌볜(옛 북간도), 그리고 현재 중앙아시아의 한인들까지 모두 그를 추앙하고 있다. 그가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주요 무대였던 북한 함경도 지방과 중국 옌볜,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그의 활동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가 민담과 민요,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해 전해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홍범도는 항상 부하와 주민, 독립군을 후원하는 민중과 혼연일체가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부하와 동포들로부터 절대적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는 일화가 널리 전한다. 특히 1907년 말에서 이듬해 말까지 함경도 일대에서 주민들의 절대적 성원을 바탕으로 치열한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여 수십 차례 전투를 치르며 일본 군경에 큰 타격을 주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1920년 전후 독립전쟁 때도 치고 빠지는 기습적인 유격전 방식으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홍범도는 육사나 우리 군의 전범, 특히 게릴라전의 한 롤모델로서 상찬되고 깊이 연구 교육할 필요가 있는 영웅적 인물이다. 국방부 등 일각에서는 그가 소련공산당(19216월 당시 러시아혁명 세력)과 협력하고, 그들 편에 섰다고 문제삼기도 한다. 특히 육사동창회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했다는 무리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범도는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존중하고 임시정부의 방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191912월 발표한 유고문대한민국 원년 12월 노령(露領·러시아령) 주둔 대한독립군 대장(大將) 홍범도(참모 박경철,이병채)’로 끝맺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서기 1919년이라 쓰지 않고, 임시정부 연호인 대한민국 원년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그가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은커녕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에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의병-독립군-한국광복군(임시정부)-국군으로 면면히 계승되는 대한민국 국군과 독립운동·무장투쟁의 맥락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중요한 원천이다. 이는 과장과 미화로 가득 찬 김일성 위주의 편협한 북한의 역사 인식 및 혁명전통’, 정통성 주장과 뚜렷이 대조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국방부와 육사의 홍범도 흉상 이전이 오히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쪽에 가깝다.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항일투쟁 경력을 능가하고,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전쟁의 상징적 인물을 소련 공산당원이었다는 냉전적 논리로 흠집 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동북지방(만주, 북간도 등)에서 러시아 자유시로 들어가기 전에 홍범도는 중국이나 러시아와 연대를 모색했다. 이 무렵 그는 임시정부 특파원 안정근·왕삼덕 등과 함께 중로(中露, 중국-러시아)연합선전부 조직에 참여하여 간도지부 집행군무사령관의 직책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중로연합선전부19208월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러시아혁명정부 사이에 맺은 공수동맹 조약문의 제5항 규정에 따라 설치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방침에 따라 중국·러시아와의 연대와 협력을 모색했고, 이 과정에서 독립군 부대의 자유시 이동이 가능했다. 이처럼 임시정부 방침과 자신의 정세 판단에 따라 러시아혁명 세력과 연대한 홍범도의 일련의 행위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일본은 러시아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미국·영국·프랑스와 함께 최대 7만여명에 달하는 군대를 국제간섭군으로 시베리아·연해주에 파병하였다. 따라서 우리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적의 적인 러시아 볼셰비키 세력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정세 개념으로 당시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가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하는 배경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 동아일보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는 19216자유시 사변전후에 홍범도가 조선독립의 후원을 얻기 위해 치타정부(당시 볼셰비키파가 장악한 러시아 원동정부의 별칭, 치타는 원동정부의 수도)에 갔다거나, 치타정부의 후원으로 독립군을 모집한다는 보도를 수차례 내보내기도 했다. 1920년대 중후반에도 홍범도의 국내 진입설, 재기설을 여러번 보도했다. 이런 보도들은 그의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시베리아로 북상한 뒤 혁명 세력에 합류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한 약소민족들이 자신의 힘만으로 독립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당시 국제 열강의 협력과 지원, 그들과 연대를 통해 비로소 독립과 해방을 맞았다. 1920년대 전반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우리 독립운동 세력은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등 열강의 도움을 받아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방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중국을 제외한 열강은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들이었기에 약소민족인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협력과 지원 요청을 외면했다.

정부나 공공기관이 주도하는 국가 정체성의 상징화와 기념·추모사업 과정에서 사회적 기억과 기념, 추모의 편향성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념과 추모, 교육과 활용 등에 일관성 있는 자세로 다양성을 반영하며, 국가나 사회 통합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분열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부작용이 있어서는 더욱 안 된다. 북한의 경우처럼 편협하고 왜곡된 김일성·김정일 위주의 국가적 혁명전통의 상징화가 초래한 역작용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꼭 이전 설치하겠다면, 천안 독립기념관보다는 차라리 서울 시내 한가운데 광화문광장에 설치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외국 사례를 보면 독립영웅이나 위대한 인물의 동상이나 기념물을 많은 사람이 오가고, 늘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친근한 시민의 공간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군과 육사를 사랑하는 예비역 병장으로서 진심으로 조언하고 싶다. 무려 2500여년 전 중국 고대 병법서 손자’(孫子)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아는 사람은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또 이 병서에는 적을 알지 못하고 자신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는 내용도 있다. 과연 우리 국방부와 군, 육사는 북한은 물론,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가?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107019.html

해방 뒤 10년 육군총장 모두 친일육사 뿌리가 광복군 거부 (한겨레, 권혁철 장예지 기자, 2023-09-04 15:26)

홍범도 흉상 논란에서 뜯어보는 육사의 정체성

지난달 31일 육군사관학교(육사)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육사 정체성을 고려해 학교 밖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육사의 정체성은 뭘까.

육사 총동창회는 지난달 29일 낸 입장문에서 육사는 6·25전쟁, 각종 대침투작전 등에서 1475명의 선배가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곳이라고 밝혔다. “한 마디로 조국수호 반공전사양성이 육사의 본질적 기능이자 정체성”(육사 출신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이란 주장이다.

육사 누리집은 194651일 국방경비대사관학교 개교를 육사 개교라고 설명한다. 국방경비대는 해방 후 미 군정이 만든 군사조직이다. 이 학교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1800명의 사관후보생을 배출했는데, 상당수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다.

육사는 195110,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를 본뜬 4년제로 다시 개교했다. 이전에는 45~6개월 단기 교육 과정이었다. 미 육군 제8군 사령관인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4년제 육사 재개교 때 큰 도움을 줘서 육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지난 20111월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육사에서 기념행사를 하려고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육사는 신흥무관학교가 최초의 독립군 양성소란 점은 인정하지만 육군사관학교 창설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성이 낮다기념행사를 육사에서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왜 육사는 해방 이전 독립군, 광복군의 역사를 외면하는 것일까.

역사를 1945년 해방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국립서울현충원 묘비에 군의 아버지로 적힌 이응준, 백선엽 등 한국군 원로들의 친일 행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역대 육군참모총장을 보면, 1(19481215~194958) 육군참모총장 이응준부터 10(1957518~1959222) 육군참모총장 백선엽까지는 10명 모두가 친일 행적이 뚜렷한 일본군이나 만주군 장교 출신이다.

11(195987~1960522) 송요찬부터 21(197531~1979131) 이세호까지도 일본군 장교나 부사관, 간부후보생 출신이다. 1948년부터 1979년까지 30년이 넘도록 역대 21명의 육군참모총장이 모두 일본군 혹은 만주군 출신이었다.

국군과 육사의 모태가 미 군정이 만든 국방경비대란 주장에 대해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헌법 전문에 따라 정체성을 독립군, 광복군까지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다.

그 결과물이 2018년 육사 안에 설치된 독립전쟁 영웅 5명의 흉상이다. 흉상들은 국군과 육사의 뿌리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아닌 독립군, 광복군, 신흥무관학교라는 상징이다.

육사의 홍 장군 흉상 철거 방침은 국군과 독립군, 광복군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자르려는 윤석열 정부의 역사 전쟁이다. 이미 추앙해온 육사의 아버지’(밴 플리트)군의 아버지’(이응준)가 있으므로 소련 공산당원 홍범도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육사의 정체성이 반공 전사 육성이란 일부 주장과 달리 육사 누리집은 교육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국가 방위에 헌신할 수 있는 육군의 정예장교 육성.”

 

https://www.hani.co.kr/arti/opinion/readercolumn/1107115.html

범도작가가 되뇌는 홍범도 잘못 알고 고치지 않는 이가 잘못된 자 (한겨레, 방현석 소설가, 2023-09-05 05:00)

[기고] ‘홍범도 지우기’ 안된다

홍범도 어록으로 본 그의 일생

홍범도 장군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소설 범도를 쓰기 위해 13년 동안 그의 삶을 추적하고 조사하면서 내가 반복해서 확인하게 된 그의 특징이다. 그는 말 많고 남 탓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

나는 많지 않은 홍범도의 어록을 정리하고 옮겨 쓰면서 수백 수천번씩 그의 어록을 되뇌어 보았다. 그의 성격과 말하는 방법을 파악하고 터득하기 위해서였다. 말에는 그 사람의 생각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까지 담겨 있다.

남 탓하는 사람을 믿지 마라. 남 욕하기 좋아하는 자를 멀리해라. 대체로 남 탓하고 남 욕하는 자들이 더 나쁘다.”

홍범도 어록 1번이다. 그는 언제나 말이 아니라 상대가 하는 행동을 보고 판단했다. 그래서 소설 범도에서 홍범도는 늘 말하는 사람의 입이 아니라 눈빛과 손발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범포수는 맞닥뜨린 호랑이가 아무리 포효해도 호랑이의 네 발에서 눈을 떼는 법이 없다.

그는 머슴의 자식으로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홉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참으로 불우했지만 단 한번도 남 탓을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자기 앞에 닥친 모든 난관을 이겨내며 성장했다. 만주와 연해주를 전전하며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는 남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어떤 세력가와 재력가에게도 줄 서지 않았으며 이익을 좇아 어느 파당에 가담하지 않았다. 가난한 동포들에게 성금을 걷으러 다니는 여느 독립지사들과 달리 그는 스스로 블라디보스토크 부두의 하역 노무자로 일해 총기를 장만했다. 시베리아 광산의 광부로, 고깃배를 타는 어부로 일해 모은 돈으로 탄환을 구입했다. 그런 홍범도를 무시하고 멸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랬기에 조선 유림의 최고 수장이었던 유인석이 자신의 호인 여성과 같은 돌림자인 여천이란 호를 홍범도에게 붙여주며 형제 예로 존중한 것이다.

남의 근력이 아무리 세면 뭐 하오. 남의 근력이 내 근력이 되는 걸 보았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의 힘이오.”(‘범도’ 14)

이것이 남 탓하며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이를 지적하는 홍범도의 어법이다. 책임을 떠넘기기 좋아하는 자들이 쓰는 가장 흔한 수법이, 없는 차이를 만들어 남 탓하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을 묵인한 미국을 비판하는 참모와 러시아를 힐난하는 참모가 서로 언쟁을 벌이자 홍범도는 묻는다.

그럼 우리가 어찌해야 한다는 것이오?”

두 사람 모두 일본과 싸워야 한다고 대답하자 홍범도는 다른 부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잘 들었소? 우리는 일본과 싸우면 되는 것이오. 로씨아가 조선독립을 위해 싸워주오? 아니면 아미리가가 조선독립을 위해 싸워주오? 없는 차이를 만들지 마시오.”(‘범도’ 14)

없는 차이를 만들어 책임을 떠넘기면서 갈등을 부추기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장군이 홍범도였다. 홍범도가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흘렀음에도 변함없는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가 가장 오래 싸우고 가장 크게 이긴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첫 군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명정대한 대일 선전포고에 따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수행한 첫 전쟁인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홍범도는 대한 독립전쟁에 나서기 전에 먼저 스스로의 삶을 독립시키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다.

권력에서는 가장 멀고 죽음에서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적과 싸우며 언제나 모든 책임을 기꺼이 감수했던 이가 소설 범도를 쓰며 13년 동안 항일무장투쟁 전선의 종군작가로 살았던 내가 만난 홍범도였다. 나라를 책임진 지도자들이 남 탓만 하며 없는 차이를 만들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영웅들을 이토록 모욕하면 이 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되겠는가. 진정 홍범도 장군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랬다면 지금이라도 그의 어록 1번을 곰곰이 되새기며 반성할 일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잘못을 반성하는 이들을 위해 홍범도 장군이 친절하게 준비해둔 어록 2번이 있다.

잘못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오직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사람만이 잘못된 사람이다.”

홍범도 장군은 승리 앞에서 오만했던 적이 없고, 패배 속에서도 비굴했던 적이 없었다. 헌신은 무한했으나 바란 대가는 전무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오직 사람으로 대했다. 노선과 이념, 계급으로 사람을 가르고 상대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자기 앞의 문제를 돌파했던 홍범도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여전히 배우고 따라야 할 모럴이다. 권력은 유한하고 모럴은 영원하다. 그의 흉상은 바로 그 영원한 표상으로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서 있다. 홍범도의 흉상을 1도 옮기지 마라.

 

https://www.naeil.com/news_view/?su=Y&id_art=472680

[내일시론] '친일 콤플렉스'와 홍범도 흉상 철거 (내일신문,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 2023-09-06 15:03:15

'홍범도 논란'이 뜨겁다. 발단은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종합강의동 충무관 앞에 있는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이회영 5인 독립투사의 흉상을 난데없이 철거하겠다고 밝힌 데서 비롯됐다. 광복회와 역사학계 등에서 강력히 반발하고 여론이 들끓자 당황해 내놓은 꼼수가 가장 '약한 고리'로 여겨지는 홍범도 장군을 분리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가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공산주의자라는 것이다. 또 학계에서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정''자유시 참변'에 그가 관여했다는 의혹도 새삼 끄집어냈다.

항일투쟁하던 1920년대 공산당 입당 지금 잣대로 재선 안돼

홍범도 장군은 1890년대 말부터 20여년 동안 국내는 물론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를 누비며 일본군과 싸운 전설적 항일투사다. 1923년 봉오동전투와 그가 김좌진·이범석 장군과 힘을 합쳐 승리한 청산리전투는 번번이 당하기만 했던 우리 민족이 일본 정규군을 통쾌하게 섬멸한 찬연히 빛나는 투쟁사다.

홍 장군이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활약했던 1920년대 상황을 지금 잣대로 재단해선 안된다.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제국주의 관점에서 철저히 일본 편을 들었고 우리의 독립호소를 외면했다. 3·1운동 후 막연히 걸었던 기대가 절망으로 바뀐 상황에서 그나마 볼세비키혁명에 성공한 소련이 피압박민족에 관심을 기울이며 지원했다.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있던 이동휘에게 40만루블(나중에 20만루블 추가지원)이란 엄청난 자금을 지원한 것도 레닌이었다. 설사 그것이 공산세력 확산을 위해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활동을 지원하는 자금이었다 하더라도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적의 적'인 볼세비키 세력과의 협력은 항일독립투쟁의 한 방편이었다. 1921년 한인 독립군들이 소련군에 강제 무장해제당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빚어진 '자유시 참변'에 그가 관여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에 대한 '공산주의자 멍에'는 이전 정부에서 이미 검증해 걸러진 바 있다. 1962년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2015년 박근혜 대통령 시절 잠수함 '홍범도함' 명명식을 가졌으며, 그의 유해봉환은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꾸준히 추진해 2021년 문재인 대통령 때 성사됐다.

20183·199주년을 맞아 홍범도 등 5명의 흉상을 육사에 세운 것은 생도들이 선열의 뜨거운 애국심을 본받기 바라는 뜻이었을 터이다. 더 깊게는 우리군의 뿌리를 멀리는 항일의병에서 시작해 항일독립군 광복군의 무장투쟁에서 찾고자 함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을 위시해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그리고 독립투쟁에 앞장서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 흉상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멀쩡한 흉상들을 굳이 내치겠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왔을까. 한국군의 부끄러운 과거, 뿌리 깊은 '친일 콤플레스'가 작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신생독립국으로 출범해 한국전쟁까지 겪은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해방된 조국의 군대를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장악해 내리물림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부터 21대 이세호에 이르기까지 1948년부터 30년이 넘도록 역대 21명의 육군참모총장이 예외없이 일본군·만주군 출신이었다. 이런 '친일 콤플렉스'가 독립투사 흉상 건립을 명분상 반대하지는 못했지만 눈엣가시처럼 불편한 심정이었던 인사들이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친일행보와 '이념전쟁' 흐름에 편승해 거부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오염수 해양투기,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부정 비판 못해

독립투사들 흉상을 치워 일본에 잘 보이려 하는 것이라고까지는 단언하지 않겠다. 다만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 등 과거사문제 양보,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투기나 독도 망언, 간토(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일본 관방장관 망언에 항의 한마디 못하는 등 일본의 눈치를 살피는 정책기조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려다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게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고 한 윤 대통령 발언에 힘을 받았음인지 국방부와 육사는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흉상 철거를 밀어붙일 태세다. 그러나 이런 퇴행적 역사전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최근 빚어지는 '이념전쟁'을 보면서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떠오른다. 

 
https://www.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2309132122025
역사학계, 홍범도 논란 ‘팩트 체크’…정부 ‘독립운동 지우기’ 강력 비판 (경향, 전지현 기자, 2023.09.13 21:22)
51개 단체 공동성명 발표
흉상 철거 계획 철회 촉구
자유시 참변과 연관? “홍 장군은 유혈사태 우려…사망자 낳은 무장 해제에 가담 안 해”
빨치산=공산주의자? “빨치산은 비정규군이라는 뜻,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의병 지칭”
역사학계가 13일 국방부·육군사관학교가 내세운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이유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육사 교내 흉상 철거 계획의 철회를 촉구했다. 이들은 윤석열 정부가 독립운동 지우기 등 ‘역사 부정’을 행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역사연구회 등 51개 역사단체는 이날 오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반대 역사단체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국방부는 홍범도의 소련 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을 문제 삼았으며, 논란 와중 대통령은 ‘이념이 중요하다’, 국가안보실장은 홍범도의 후반기 삶이 ‘육사 교육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육사와 국방부의 독립운동 역사 지우기, 독립운동에 대한 색깔론 제기가 윤석열 정부와 공감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명백해졌다”고 했다.
역사단체들은 육사와 국방부가 홍 장군의 행적을 두고 제기한 “홍 장군은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역사단체들은 “역사학계는 다양한 자료를 비교 분석해 자유시 참변의 기본 성격이 통합 방법을 둘러싼 독립군 부대들의 내분이었음을 밝혀냈다”면서 “사망자를 낳은 무장해제의 책임은 고려혁명군 지휘부에 있었으며 홍범도는 유혈 사태를 우려했고 무장해제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했다.
‘홍 장군이 빨치산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빨치산(partizan)’은 비정규군이라는 뜻으로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의병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였다고 반박했다. 홍 장군이 이끈 빨치산 부대는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부대였다고도 했다.
국방부 등이 홍 장군의 소련공산당 입당 이력을 문제 삼은 것을 두고는 “일제강점기에 공산주의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고,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 세력은 소련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면서 “홍 장군은 1922년 모스크바의 원동민족혁명단체 회의에 참석하면서 입국신고서에 직업 ‘의병’, 입국 목적과 희망은 ‘고려 독립’이라고 썼다”고 했다.
역사단체들은 “현 정부가 이승만 중심의 건국사만을 대한민국의 정통으로 강조하고 그와 결이 다른 다양하고 풍부한 독립운동사를 배제하려고 한다”고 했다. 이어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통령이 선열들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국가 정체성의 핵심이라 강조했으나 3·1독립선언과 상해 임시정부 헌장, 국내외 무장투쟁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