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사회분석,운동사

학생행진·사회진보연대 입장 비판 (플랫폼C, 2021-11-15)

새벽길 2021. 12. 17. 14:44

플랫폼C의 학생행진, 사회진보연대 입장 비판은 총정리용 성격의 글이라 발췌하여 옮겨놓는다.
원문은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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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latformc.kr/2021/11/criticize-misplaced-statement/
학생행진·사회진보연대 입장 비판 : 대선을 앞둔 사회운동의 태세를 묻는다 (플랫폼C, 2021-11-15)
전도된 인과관계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조직화되는 추세를 간과한 채로, 촛불의 성과를 민주당이 죄다 가져갔다며 ‘전부 아니면 전무’식 논리에 함몰되어선 곤란하다.
행진식 소득주도성장론 비판의 공백
최저임금 제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저임금과 빈곤을 해소한다는 것이고, 자영업자들의 문제는 임금 정책이 아니라 산업 정책을 통해 해소해야 한다. 두 문제를 인과관계로 상정하고 자본가들이 노동시간을 늘리고 임금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잉여가치를 늘린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순간,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논리에 함몰될 수밖에 없다. 
소득주도성장론이 초라하게 꼬리를 내리게 된 것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무관하지 않고, 대중이 부채를 통해 자산을 불리는 등 요인과도 연결되어 있다. 문재인 정부 집권기 부동산 시장의 팽창과 가계부채의 증가로 인해, 소득 증가가 소비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를 유예시켰기 때문에, 부동산 제도와 양적완화와 같은 금융환경의 변화에 대한 기민한 대응이 없는 상태에서의 소득주도성장은 성공할 수 없었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는 「임대사업자 활성화 대책」 등 잘못된 대책을 내놓는가 하면, 부동산 시장 과열을 조기 차단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아파트값의 폭등을 방기했다. 
어긋난 과녁
검찰과 경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어느 한쪽에 대한 편향적인 제도 개혁을 통해 이뤄진다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조직된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민주당식 검찰개혁의 궁극적 문제는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아니라, 검찰에 대한 ‘민주당식 통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데 있다.
오늘날의 실패는 ‘대중운동의 급진화’의 미완에서 기인하지, 대중운동 자체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과오에 대한 어긋난 평가와 냉소는 선거를 앞둔 시기에 섣부르게 대중을 주권을 행사하는 유권자 정도로만 호명할 뿐이며, 정치 주체화와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정치 현실에 실망한 대다수 민중의 기대는 학생행진이 잘못 상정하듯 ‘정권 교체’ 여부에 가둬져 있지 않으며, 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관통한다.
검찰개혁을 둘러싼 논의에 적실하게 비판하고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하는 문제 역시 민주당식 검찰개혁 프로세스가 결여하고 있는 바에 대해 있는 그대로 비판하고, 그것이 빚어낼 우려에 대해 지적하되, 동시에 과거 엄연하게 존재했던 검찰 내 엘리트들의 정치 개입과 자본과의 유착(삼성장학생 등) 문제,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의거해 기소권을 남발하거나 행사하지 않는 등 고질적 병폐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가에 대해 논하면 된다.
뇌피셜과 가짜뉴스
실제 국내 방역에서 발생한 첫 문제는 당시 대구의 요양병원의 ‘코호트 격리’에서 불거진 오류에서 더욱 부각됐으며, 의료 인력의 현저한 부족이 낳은 의료 노동자들의 고강도 노동이라는 문제는 코로나19 발발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또, 노숙인과 도시빈민 등 취약계층에게 재난의 피해마저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는 점과 공공의료 부족을 방치하면서 불거지는 문제들 등 비판할 근거는 많다. 학생행진은 보수언론의 논거를 베껴 K-방역의 실패를 주장하는데, 구조적인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사회진보연대 소책자의 문제
첫째, “잠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조건에서 단기적인 정책으로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키기는 어렵다는 점, 여기에 더해 낮은 출산율과 빠른 고령화라는 제약조건을 고려하면 과감한 확장 재정정책으로 국가채무를 무분별하게 증가시키는 것 또한 위험”이라는 사회진보연대의 주장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윤석열이 이재명보다 나은 이유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고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공상적 정책을 펼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을 노동정책에 대한 평가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 윤석열은 빈번하게 반노동적 입장을 표명해왔는데, 정작 사회진보연대는 이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다. ‘아전인수’라는 지적을 벗어나기 어려워보인다. 
둘째, 이 소책자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윤석열이 “반노조주의자도 아니고 극단적 노동유연화론자도 아니”라고 섣부르게 주장한다. 또, “윤석열 후보는 친노동자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국가 경제와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최소한 이재명 후보보다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의힘의 역사적 경향을 너무나 쉽게 무시할 뿐만 아니라, 단순한 반정립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이재명에 대해서는 자기 나름의 시각을 갖고 분석적으로 검토하는 데 반해, 윤석열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보기에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발언 몇 개만 인용해 손쉽게 이재명의 비합리적인 발언들과 비교한다. 이런 아전인수 논리로 따지면, 이명박이나 박근혜, 문재인에게서도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발언과 원칙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진보연대는 자의적으로 윤석열의 좋은 요소와 이재명의 나쁜 요소를 편취해 몇 가지 단순한 프레임으로 평가해버린다. 유일한 지지 근거로 (직무급과 임금 양보를 통한) 임금격차 완화를 거론하고 있는데, 이는 기실 이재명과 윤석열 모두 다르지 않은 입장이기도 하다.
“주120 시간 노동”, “집 없어서 청약통장 못 만들었다”, “가난한 사람은 불량식품이라도 먹게 해줘야”, ”손발 노동은 인도도 안 하고 아프리카나 하는 것” 등의 발언은 윤석열이 반노동적일뿐만 아니라, 국가 정책의 기초적 상식마저 결여되어 있을 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은 후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학생행진과 사회진보연대는 이런 점들에 대해 아무 언급 없이 그를 너무나 너그럽게 ‘자유주의자’라고 격상시킨다.
셋째, 사회진보연대는 정치의 사법화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여러 차례 밝혀왔다. 그런데 윤석열 후보는 누구보다 정치의 사법화를 앞장 서서 추동해온 행위자 중 하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그의 인식 역시 우리는 들어본 바가 없다. 오히려 최근 불거진 고발 사주 의혹은 검찰총장 시기 윤석열이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였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누구의 포퓰리즘인가?
누군가는 양적완화나 재정 확장론을 ‘포퓰리즘’이라 칭하고, 누군가는 도널드 트럼프처럼 인종주의적인 혐오 선동을 ‘포퓰리즘’이라 부른다. 또 어떤 사람은 노사모나 문파식의 팬덤 정치를 ‘포퓰리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야당은 여당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고, 야당도 여당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 이렇게 모두가 포퓰리즘에 반대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기준에 대한 보편적이고 정확한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을, 누구를 위해, 그리고 어떤 원리를 구현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해석하고, 집행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한 쟁점이다. 
위기의 시대, 사회운동의 태세
학생행진-사회진보연대는 자조직을 유난히 똑똑해서 상황을 간파하고 있는데 반해, 다른 사회운동 단체들이나 활동가들은 뭘 모른다는 식의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이는 운동의 질적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뿌리 깊은 계몽주의와 선명성 경쟁에 다름 아니다.
역대 어느 선거보다 ‘지지 후보 없음’이 많다. 누군들 이런 선거에 대해 보이콧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정세에서 좌파 혹은 사회운동이 취야 하는 태도가 양자택일의 함정에 갇혀 보수언론의 논리에 기대고, 동시에 설익은 주장으로 ‘진정한 좌파’ 경쟁에 몰두하는 것일까? 차라리 최근 진보 5당(노동당, 녹색당, 사회변혁노동자당, 정의당, 진보당 ? 이상 가나다순)의 민중경선을 주장하는 흐름을 주목하는 것, 진보정당을 혁신·재조직하고 연합을 도모하는 것, 민주노총의 정치 방침에 개입하려 노력하는 것, 대선 시기 보다 급진적인 정책 의제를 발굴하고 관철시키는 운동이 사회운동적 태도에 가깝다. 얄팍한 현실주의가 운동의 길을 집어삼키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대안 세력을 대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어떠한 대안이 필요한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