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샘 발인이 있던 4월 21일 이후에 나온 추모사, 추모시, 추모글을 담아왔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37520.html
홍세화 선생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늘 되물었다 [추모사] (한겨레, 2024-04-21 20:31)
‘고결한 자유인’ 홍세화 선생을 보내며
자본 세상 너머 꿈꾼 ‘내일’ - 이문철 노동당원(경기 고양 지역위원회)
일년 동안의 선생님의 투병 생활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우리는 고결함이 무엇인지 노동당원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각자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병마와 싸우시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여러 강연과 집필을 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깝기도 하였지만 우리는 전사의 강인함을 닮아가고자 하였다. 이번 총선 직후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울산 이장우 후보 득표율을 물으시고 안타까워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온몸을 던지는 최후 척탄병의 모습을 보았다.
선생님의 영정사진 속의 눈빛이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 우리는 안다. 이제 우리는 쓰러진 척탄병의 깃발을 일으켜 들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선생님이 외롭고 힘든 가시밭길을 맨발로 가셨듯이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이 장렬히 전사할 때까지 그 길을 가야 한다. 선생님의 오래전 진보신당 당대표 출마의 변을 다시 읽어 본다. “노동당이 아니면 어떤 정당도 해결할 수 없는 근본 문제가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 너머 내일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우리는 있다. 우리는 잃어버린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되찾아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재벌국가를 우리 모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가고자 했던 고결한 그 길을 갈 것입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평안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끊임없이 존엄한 삶 추구해 -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
홍세화, 선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모순적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애매하다는 의미에서 양가적이다.
기본소득에 대해 강의나 토론을 해달라고 요청하면, 언제나 공부가 부족하니 다음에 하자고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강의에 들어가면 그렇게 단호할 수가 없다. 선생이 보기에 기본소득은 인간의 존엄한 삶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양보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카드놀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가까운 벗들과 놀이를 하는 게 너무 즐겁다.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온다. 하지만 꼭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이 발동한다. 지면 화가 난다.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선생의 모습이 쉬지 않고 나아가게 하고 끊임없이 멈춰 서게 한 힘일 것이다. 유한한 인간인 우리는 언제나 부족하지만 자신이 믿는 바를 애써 추구하고, 또 회의한다. 선생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것을 후회했다. 그 책을 쓰지 않았다면 노스탤지어를 느끼지만 센강변에서 안온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그 책으로 얻은 명성을 세상에 바쳤다. 선생은 그런 사람이다.
진보운동은 귀한 분 잃었다 -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진보운동이 무너지고 있다. 붕괴와 소멸 수준의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영향력이 예전만 못해서가 아니다. 진보운동의 정체성은 어떤 조직에 속했는가 따위에 달린 게 아니다. 그건 전적으로 약자, 소수자의 처지에 내몰린 사람들과 함께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겨레 기자 명함이 진보의 보증수표는 아니고, 서울신문 기자도 가난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주면 진보인 거다.
지난해 5만명의 시민이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갇혔다. 돈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수감되면 생계 박탈, 가정 파괴와 함께 혹독한 사회적 낙인까지 찍힌다. 진보운동은 이런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다. ‘송파 세모녀’처럼 이례적, 극단적으로 죽지 않는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무슨 구경이라도 하듯 내려다봤던 것처럼 일가족 세명이 수해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지 않고서야 진보운동권의 눈에 들어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홍세화 선생은 달랐다. 진보인사들은 뭐든 묻지 않지만, 선생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늘 되물었다. 장발장은행 일을 맡았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진보는 이래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진보운동의 전선이라고 웅변했다. 진보운동은 귀한 분을 잃었다. 그래서 원통하다.
선생님의 글과 행적이 ‘등불’ - 안악희 ‘소박한 자유인’ 회원, ‘리셋터즈’ 베이시스트
나는 별로 근본 없이 살아와서, 선배나 어르신으로 부를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 홍세화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가입하게 된 ‘소박한 자유인’은 내 관점을 바꿔놓았다.
이곳은 학습모임이자 홍 선생님의 신념이 스며든 비폭력 직접행동 단체였다. 우리 회원들은 맥주와 당구와 등산을 즐겼고, 기후위기 행진과 외국인보호소 폐지 집회에 나갔다. 이 자유로운 사람들은 여기저기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다녔다. 홍 선생님은 잡기와 직접행동 모두 능한 분이셨다.
홍 선생님은 어르신이자 동지였다. 홍 선생님은 평화운동단체 ‘전쟁없는 세상’의 초기 후원회장이셨다. 아직 한국에 병역거부라는 단어도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2022년에는 나의 요청으로 이예다(파리에 거주 중인 병역거부자 난민)씨와의 모임에도 흔쾌히 응해주셨다. 그때 정말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나는 과거와 현재의 망명자가 마주 앉은 테이블에서, 무언가 풀리지 않은 시대의 질곡 같은 것을 느꼈다. 그 질곡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내게 숙제로 남아 있다.
어르신으로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이 떠나신 것이 너무 슬프다. 홍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선생님의 글과 행적이 후대를 밝혀주는 등불이 되길 기원한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1137521.html
[홍세화 추모시] 이성과 사랑, 그 고귀함에 대하여 (한겨레, 시인 송경동, 2024-04-21 20:37)
- 홍세화 선생님 영전에
당신이 마지막 남기고 가신 말
‘겸손’을 되새깁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빨리 오지 않더라도
절망하거나 훼절하지 않고
겸손하겠습니다
왜냐면, 이 나쁜 세상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모든 소박한 이들의 삶이 우리에겐 더 소중하니까요
당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부패하고 썩어가는 인간들 앞에서도
겸손하겠습니다
왜냐면, 그들의 이른 주검이 새로운 시대의 싹들이 자라날
좋은 토양과 거름이 될 거니까요
겸손이 특권이 되지 않도록
겸손이 무슨 권위나 식견이나 자랑이 되지 않도록
겸손이 온갖 공모와 협잡의 안온한 밀실이 되지 않도록
겸손이 행동하지 않음의 핑계가 되지 않도록
겸손 앞에서도 겸손하겠습니다
끝까지 소년 척탄병으로 남아
어떤 야만의 땅에도 끝내 뿌리내릴 수 없었던 외로운 난민으로 남아
약자와 소수자와 빼앗긴 자들의 스피커로 남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한 한 알의 씨앗으로 남아
그렇게, 끝까지 추해지지 않은 어른으로 남아 준 당신을 따라
우리는 어떤 주체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지
어떤 관계의 회복과 성숙과 연대를 실현해 나가야 할지
어떤 사랑과 불관용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지도
잘 되새기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소년처럼 내내 해맑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수줍고 선하고 참할 수가 있었을까
어제는 한강변 가로수 잎들 사이에서 당신이 웃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토요일인데도 작업복을 입고 일터로 가고 있는
씩씩한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끼어 웃고 있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쌩하니 지나가는 무심한 청년에게서
당신을 보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이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서로 연대하며 어울려 살기를 바라던 한 인간”
당신의 고난에 빚지며
한국의 근대가 조금은 부끄럽지 않아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수줍고 겸손한 미소에 기대
한국의 오늘이 조금은 근사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부단한 학습과 질문을 따라 읽으며
이 사회가 조금은 눈귀 밝아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동지
잘 가십시오. 선생님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7542
[사실과 의견] 왜 그를 기리냐면 (미디어오늘, 안수찬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2024.04.25 23:48)
2002년을 월드컵 4강 진출이나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시절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다른 일을 기억한다. 그해 2월, 홍세화가 한겨레에 입사했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와 존댓말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얼마 전까지 의견 지면을 담당했던 기자의 의견이 궁금하다고 했다. 뜻은 좋은데 잘 안될 거라고 참 건방지게 답했다. 입장만 분명하면 된다는 한국에서 그런 구상이 통할 리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조용히 웃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란 듯이 만들었다. ‘왜냐면’이었다. 그것은 예전의 칼럼 지면과 달랐다. 한 주제에 집중해 전문성을 갖춘 글만 골라 담았다. 추론의 수준과 품격을 갖췄다면 입장의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그 기획보다 신기했던 건, 그 사람이었다. 글 쓴다 싶을수록 남의 글에 관심이 없다. 제 글이 최고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달랐다. 남이 쓴 좋은 글을 진심으로 구했다. 시키지 않은 일을 밤낮으로 갈고 닦았다.
아무래도 유럽의 ‘의견 저널리즘’에 매료당한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좋은 주장만 엄선해 게재하는 것은 유럽 주류 언론의 전통이다. 프랑스나 독일 언론은 ‘주장의 품질’을 관리하려고 학자나 사상가를 종종 편집자로 앉힌다. 르몽드를 정론(正論)이라고 칭하는 것에 아무 잘못이 없다.
군사독재를 거쳐 형성된 한국의 독특한 의견 저널리즘은 그것과 다르다. 한국에선 정론지가 아니라 ‘논객’만 횡행했다. 자칭 논객은 제 글로 세상을 움직이려는 사람이다. 논객이 르몽드를 읽으면 짜르르한 필명만 본다. 홍세화는 달리 봤을 것이다. 유명 필자가 아니라 품격 있는 언론을 봤을 것이다. 그는 제 명성이 아니라 공론의 세상을 꿈꾸었다.
물론 그도 칼럼을 썼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억지로 겨우겨우 썼다는 걸 주변 사람은 다 안다. “글 쓰는 게 너무 힘들어 안 쓰고 싶다”고 막걸리 마실 때마다 말했다. 그는 칼럼니스트를 자처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는 진정한 편집자였다. 특히 ‘좋은 주장들의 편집자’가 되고 싶어 했다. 제 글로 이름을 높이려는 의견 저널리스트는 많았지만, 품격 있는 남의 글을 골라 세상의 합리성을 높이겠다는 의견 저널리스트는 없었다. 한국에선 그가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마지막이 될 것이다.
홍세화는 10년을 신문사에 머물다 진보정당에 갔다. 바랐던 바가 잘 구현되지 않는 언론 환경에 깊이 상심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한다. 정당에 갔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대하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권세 높은 정치인이 되려는 게 아니라, 좋은 정치인들이 섞이고 스미는 장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신문사에 오면서 유명 칼럼니스트를 욕심내지 않았던 것처럼.
사실과 의견을 분리해 기자들은 기사만 쓰자고, 예전의 이 칼럼에 적었다. 그건 의견을 낮춰 보는 게 아니라, 의견을 높이는 방법이다. 고뇌하는 사상가의 수준으로 한 문장도 틀림없이 의견을 적는 방법이다. 영미 객관주의 언론은 그 방법을 따라 대통령 후보 지지 사설을 쓴다. 그게 영 내키지 않으면, 유럽 의견 저널리즘의 전통을 따라, 잡다한 소리를 걸러낼 지성인에게 게이트키핑의 권한과 책임을 맡겨야 한다. 홍세화는 후자의 길을 닦았다. 다 걷지 못하고 혼자 씨름하다 너무 일찍 떠났다.
나의 기대와 달리, 그는 엄청 유명하진 않다. 평생 대중을 모은 적 없으니 당연하다. 그는 말이나 글로 사람을 거느리지 않고, 그저 삶으로 주변을 바꿨다. 그를 겪어본 이는 그가 온몸으로 쓴 글이 왜 그리 둔중한지 안다. 그는 생각한 대로 살았고 사는 대로 썼으나, 그 글조차 부끄러워했다. 그가 갔으니, 근거 없고 품위 없고 염치도 없는 자칭 논객들에게 일갈할 이가 이제 없다. 이 지경을 어쩌지 못한 채, 우리는 그를 그리워하며 살 것이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5022039015
한국 사회 부적응자가 남긴 이야기 (경향, 김종목 사회부문장, 2024.05.02 20:39)
2011년 여름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에서 홍세화를 봤다. 고공농성을 하던 김진숙을 응원하는 희망버스가 갔을 때다. 홍세화는 무대 먼발치 담벼락 쪽에서 홀로 행사를 지켜봤다. ‘진보 셀럽’들이 맨 앞자리 어디 앉을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걸 목격한 뒤라 그 모습이 오래 남았다.
2013년 홍세화가 제안해 만든 학습 협동조합 이름이 ‘가장자리’라는 걸 알았을 때 경계를 지키거나 버티려던 마음으로 담벼락 쪽에 선 건 아닐까 생각했다. ‘가장자리’ 창립과 ‘말과활’ 창간을 두고 인터뷰했을 때 홍세화는 이렇게 말했다. “삶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 벼랑 끝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이죠. 중심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중심이 점 하나라면, 가장자리는 평등한 점들이 모여 만드는 선입니다. 벼랑 끝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맞잡는 연대의 선인 거죠.”
부고에 그 가장자리를 떠올렸다. 그 자리는 전장이었다. 모두가 점 하나, 장교가 되려는 세상에서 홍세화는 늘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어”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고 했다. “척박한 땅에서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워 작은 열매라도 맺게 하는 거름” 역할을 하려 했다.
끝까지 ‘한국 사회 부적응자’로 남았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해 어느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고 계신가요’라는 진행자 질문에 “적응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했다. 홍세화는 불온성을 간직한 걸 또 다행으로 여기고 살며 악역을 자처했다. 불화, 비난을 감당하며 가장자리를 지켰다.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선’ 이 불온한 자는 거침없었다. 척탄병으로 폭탄을 던진 곳은 수구보수 자리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진보좌파’ 진영에도 투척했다. 홍세화는 “세상을 바꾼다면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기 전에 스스로 바뀐다는 사실”을 상기하려 했다. 조국의 사모펀드 문제와 “우리는 조국이다” 집회의 실상을 비판한 것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노동문제에 분노하던 이들이 문재인 정권의 노동문제에 침묵할 때 “나는 김용균”이라고 외친 것도 늘 가장자리를 지키며 싸운, 늙었으나 용맹했던 척탄병의 일이관지였다.
수구보수 쪽 사람들은 홍세화가 죽고 ‘진보좌파 비판’을 끄집어내지만, 그는 수구보수의 반동성을 줄곧 비판한 사람이다. 이 정권이 들어서자 윤석열의 ‘독불장군식 밀어붙이기’와 ‘김건희에는 눈감는 불공정’ 등을 비판했다. 홍세화는 ‘진보좌파’의 우경화와 이중성, 부의 축적을 비판했지 수구보수를 옹호하지 않았다. 2022년 11월 쓴 한겨레 칼럼에는 “<조선일보> 따위가 문재인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가 왜 진보냐? 좌파냐?’라고 응수하지 않는다”고 썼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수구 언론이 우경화된 ‘진보좌파’ 세력을 ‘좌파’로 부르는 것을 “좌파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다.
자기 좌표도, 공격 대상 좌표도 한결같았다. 소수자, 난민, 여성,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빈자 즉 “육체적 품이든, 정신적 품이든 품을 팔아야 먹고살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약자들” 편에서 싸웠다. 벌금 수십만원, 100만~200만원이 없어 교도소로 가 노역해야 하는 이들을 위해 맡은, 스톡옵션도 수당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장(장발장은행)’도 그에겐 마땅한 자리였다.
‘저널리스트 홍세화’도 20 대 80 사회에서 80의 생존과 투쟁 이야기를 거듭 끄집어내며 대물림되는 가난을 직시했다. 마지막 단독 저서 <결 : 거칢에 대하여>(2020, 한겨레출판)에서 언론이 다루는 서사는 연예인·부자·유명인·호감정치인 등 ‘20’과 관련된 것들이고, 노동자 등 ‘80’과 관련된 서사는 사회면에 양념처럼 곁들여지는 점도 지적했다.
‘공화주의자 홍세화’는 한겨레21과 진행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비판성·연대성을 공화국에서 품어야 하는 민주시민의 성격이라고 했다. 현실은 어떤가. 자기 진영·정파 사람들 잘못에는 눈감거나 옹호하고, 다른 진영·정파 잘못은 침소봉대한다. 진보와 개혁을 외치는 이들 중 난민, 소수자와 연대하는 이도 찾기 힘들다. 공공의 장은 비판적 이성과 토론 대신 광신과 맹신, 적의로 차버렸다. 홍세화는 ‘대한민국’이 국가 귀족, 사회 귀족 나라였지 공화국인 적이 없다고도 했다.
홍세화가 죽었다. 진보를 자처하거나, 진보 운동을 해온 이들이 진영·정파의 치어리더가 되고, 정론을 추구한다는 이들이 ‘20의 이야기꾼’ 노릇만 하는 세상에서 그의 부재를 오래 되새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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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9 00:40
홍세화 샘의 부고 소식에 페이스북에 홍세화 샘을 기리는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홍세화 샘이 우리들에게 어떤 분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 홍세화 샘이 한겨레신문에 실린 마지막 칼럼에서 남긴 이 고언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가 걸어갔던 길과 같이 말과 삶이 일치하는 길을 걷고 싶다.
홍세화 샘을 본 것도 20년이 넘었는데...
토요일에는 세브란스병원으로 샘을 찾아뵈야겠다.
노동당의 추모 성명과 함께 페이스북, 블로그에 홍세화 샘의 글과 거기에 내가 남겼던 코멘트를 담아온다. 그리고 4월 19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안영춘 기자의 기사와 한겨레21에 실린 홍세화 샘의 마지막 인터뷰 기사,
http://www.laborparty.kr/?page_id=13642&uid=2404&mod=document&pageid=1
[추모 성명] 다할 수 없는 슬픔으로 선생님을 보냅니다 (2024. 4. 18. 노동당 대변인실)
- ‘척탄병’ 홍세화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현 노동당의 고문이시고 노동당의 전신인 진보신당의 당대표를 지내셨던 고 홍세화 선생님께서 오늘 낮에 운명하셨습니다. 선생님과 오랜 인연을 가졌던 우리 노동당과 당원 모두는 이루 다할 수 없는 슬픔으로 선생님을 보내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으로 살고싶다’고 하셨던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신 그대로 살다 가셨습니다.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고 하셨지만, 선생님께서는 말글과 삶이 일치하는 드문 분이셨습니다.
늘 조용하시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분이셨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지하조직이었던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을 하셨던 것이나, 그로 인해 프랑스로 망명해서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살았던 과거의 경력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 있는 자리에 대한 욕심 등이 전혀 없었음에도 진보신당이 매우 어려웠던 시절 스스로 당대표로 나서길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끝까지 평당원 홍세화로 남겠다’고 하셨지만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기꺼이 오르셨습니다. 당대표를 물러나신 후에도,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각종 선거의 후원회장 등 당이 부탁하는 일은 언제라도 맡아주셨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되는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 등 보다 더 왼쪽으로 가셨습니다. 말과 글로만이 아니라 1인 시위 등 당신께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본인이 원하신 대로, 돌아가실 때까지 ‘평당원’이자 ‘척탄병’으로 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마지막까지 유지하셨던 주요 경력만 봐도 선생님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도권 정당 중 가장 왼쪽인 노동당의 고문이셨고, 가난으로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벌금을 빌려주는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이셨으며, 책 읽고 토론하고 공부하는 학습공동체인 소박한 자유인의 대표이셨습니다. 당신께서 그간 강조하신 뜻과 부합하는 것이라면 작은 단체라도 기꺼이 노력과 정성을 보태셨습니다.
이렇게 치열한 삶과 정신을 유지하시면서도, 선생님께서는 인간적인 매력 또한 넘치셨습니다. 늘 겸손하고 온화하셨으며,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리셨습니다. 지역의 당원들과 당구를 치고 바둑을 두셨으며 노래방에도 가끔 가셨습니다. 치열하게 살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드문 분이셨습니다.
이런 분을 떠나보내는 지금, 우리는 너무나 깊이 슬픕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삶을 조금이라도 따라가는 것이 선생님이 가장 바라시는 일이라고 믿기에 우리 노동당은 그 길을 흔들림없이 가고자 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갈 길이 멀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 하는 것’임을 다시금 되새기겠습니다.
평당원 홍세화 선생님, 부디 편안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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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37136.html
‘똘레랑스’ 일깨운 홍세화 별세…마지막 당부 ‘성장에서 성숙으로’ (한겨레, 고경태 기자, 2024-04-18 12:14)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전했던 작가이자 언론인, 사회운동가인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이 18일 별세했다. 향년 77.
고인은 1947년 12월10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얼마 안 돼 한국전쟁이 터지고, 부모와 떨어진 채 종로구 연건동 외가댁에 맡겨져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준 사람이었다고 한다. 경기중·경기고를 거쳐 1966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홍세화라는 이름 석 자가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프랑스 망명 중이던 1995년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였다. 망명자로 삶의 폭풍을 겪게 된 과정과 파리생활의 에피소드를 버무려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과 사랑을 받았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똘레랑스’는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 지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망명자가 된 것은 독일 뒤셀도르프에 이어 정착한 프랑스 파리에 있을 때 남민전 사건이 터지면서다. 당시 그는 무역회사인 대봉산업의 해외지사 근무원이었다. 1977년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맹원을 거쳐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전사가 되었는데, 조직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고국에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망명 20년 만에 1999년 처음 귀국했고, 이때 출간한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출판)가 서점 종합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작가로서 한 번 더 입지를 굳혔다.
2002년 완전 귀국한 그는 그해 2월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기획위원과 편집위원으로 일했고 2009년에는 한겨레가 발행하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을 지냈다. 한겨레 기획위원으로 일할 당시 다양한 시민들의 목소리와 의견을 담는 ‘왜냐면’ 지면을 만들었다. 왜냐면은 현재까지 이어지며 전문가와 언론인 중심인 여론 지형에서 시민 목소리를 대변하는 공론장 노릇을 하고 있다. 그는 회사를 떠난 뒤에도 조용하고 올곧은 성품으로 많은 후배의 존경을 받았다. 한국사회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활동가, 정당인으로 2011년 진보신당 공동대표, 2013년 ‘말과 활’ 발행인에 이어 2015년부터는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내지 못해 옥살이하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사회단체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을 맡았다.
고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서울대 금속공학과 1학년 시절이던 1966년 추석 때 아버지 고향에서의 일을 ‘사유체계의 바탕을 무너뜨린 인생의 분기점’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충남 아산군 염치면 대동리 황골(새지기)에서 문중 대부에게 한국전쟁기 주민 간 벌어진 학살극의 전모를 듣게 된 것이다. 그 현장에 세 살이었던 본인이 어머니, 동생과 함께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알게 됐다. 마을공회당에 갇힌 일가족은 ‘손가락 총’ 하나에 죽고 살 수 있었다. 문중 사람들은 가족단위로 몰살당했다. 이 사건 이후 어머니는 떠났고, 돌쟁이 동생 민화는 죽었다. 일본에서 돌아와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던 아버지는 도피생활 중이라 사건 당시엔 없었다.
방황을 시작한 그는 낙제하다가 학교를 그만뒀고, 1969년 서울 문리대 외교학과로 다시 진학했을 때에는 딴사람이 돼 있었다. 연극반 활동을 하며 학생운동에 몰두했다. 1970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과 1975년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을 접하며 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남민전에 들어간 계기다.
고인은 지난해 9월 언론 인터뷰에서 “이성의 빛을 잃는 순간, 우리는 인간임을 포기하게 된다. 맹자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똘레랑스”라고 말했다. 한겨레에 지난해 1월 마지막으로 실린 홍세화 칼럼의 제목은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였다. “자연과 인간,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성숙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고인은 지난해 2월 암 진단을 받고도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다. 12월께부터 암이 온몸으로 번졌고, 경기 일산 국립암센터와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왔다. 병세가 위중해지면서 부인을 포함한 가족들이 입국해 마지막 순간 임종을 지켰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일선씨와 자녀 수현·용빈씨가 있다. 장례는 18~21일 한겨레신문사 사우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영결식 및 발인은 21일 오전 8시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1137290.html
평생 자유 향한 고뇌…진영 넘어선 영원한 비판적 지식인 (한겨레, 안영춘 기자, 2024-04-19 05:02)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선생 별세
서당 선생이 학동 삼형제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 첫째는 정승이라 했고, 둘째는 장군이라 했다. 얼굴 가득 웃음 짓던 서당 선생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뀐 건 셋째의 대답을 듣고서였다. “장래 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개똥의 용처를 이렇게 밝혔다. “글 읽기는 싫어하면서 정승 되기를 바라는 큰형 입에 하나, 겁쟁이면서 장군 되기를 바라는 작은형 입에도 하나.”
소년에게 우화를 들려주던 외할아버지가 이 대목에서 문제를 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 몫이겠니?” 소년이 대답했다. “그거야 서당 선생에게 먹으라고 했겠지요. 두 형의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좋아했으니까요.” 외할아버지는 소크라테스처럼 잇대어 물었다. “너라면 그 말을 서당 선생한테 할 수 있겠니?” 소년은 망설임 없이 “그러겠다”고 큰소리쳤다. 외할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네가 앞으로 그 말을 못하게 되면 마지막 개똥은 네 차지라는 걸 잊지 마라, 세화야.”(1)
소년의 아버지는 홍(洪, 넓다)씨 성을 가진 아나키스트였다. 일제 강점기 도쿄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표트르 크로폿킨의 ‘청년에게 고함’과 ‘상호부조론’을 일본어로 읽었다. 자식 대의 항렬자는 화(和, 화하다)였다. 홍과 화 사이에 세(世, 세상)를 넣어 맏이 이름을 지었다. ‘세계평화’라는 뜻이었다. 둘째 이름은 ‘민족평화’를 뜻하는 민화(民和)로 지었다.(2) 두 이름 앞에 홍이 붙자 세계는 세계대로, 민족도 세계만큼이나 드넓어졌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과 외할아버지와의 문답은 소년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거대한 만유인력으로 작용했다. 이름은 고개 들어 먼 데를 바라보게 했고, 개똥 문답은 당면한 선택 앞에서 결심의 지침이 됐다. “세 번째 개똥을 하나라도 덜 먹겠노라고 일상적인 고문 행위와 억울한 죽음이 있는 사회에 맞서 나름 저항했다.”(3) 그것은 그의 생애 내내 “버거우면서 기꺼운 짐”이기도 했다.(4)
홍세화 선생이 18일 생을 마감했다. 버거우면서 기꺼웠던 짐도 비로소, 영원히 내려놓았다. 향년 77.
선생은 ‘한겨레’에 마지막 칼럼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2023년 1월13일)를 쓴 어름에 암 진단을 받았다. 왜 마지막 글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선생은 고요하게 병마에 맞섰다. 증세가 호전돼 가족이 있는 프랑스까지 두 차례 먼 길을 다녀오기도 했다. 호전 기간은 짧았다. 미욱할 만큼 집에서 혼자 고통을 견디는 선생을 뒤늦게 지인들이 병원으로 옮겼다.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병세는 가팔라졌고, 항암치료도 중단해야 했다.
선생은 지난 14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평생 긴장 속에 살아온 삶과 지금의 병마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의 ‘긴장론’을 떠올려보면, 그저 회한에 그치는 얘기가 아니다. 긴(緊, 줄어듦)과 장(張, 늘어남)은 대칭적 균형이다. 언중은 “긴장”이라 말하고 ‘긴’으로만 이해한다. 우뚝한 존재들의 삶에서 곧잘 이상과 실천이 단절되고, 이상도 실천도 둘 다 부러지는 이유다. 긴장은 강고함과 일관성, 그리고 지속성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요체다.
이상을 내려놓지 않은 웅숭깊은 사유자이면서 당면한 과제를 실천해온 단호한 행동가로서 선생의 삶이야말로 긴-장의 관계를 오롯이 보여줬다. 이름과 개똥 문답법, 짐의 버거움과 기꺼움의 관계에도 조응한다. 홍세화라는 이름 뒤에 붙었던 많은 호칭은 그의 생을 관통한 이상주의자와 실천가의 면모가 상호작용해 빚은 변증법의 자취다. ‘선생’이 그의 생애사를 통약해 붙일 수 있는 유일한 호칭인 이유도 그것이다. 그런 삶이 마침내 선생을 쓰러뜨렸다.
선생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전사’에서 망명 난민이자 작가로, 귀국 뒤로는 한겨레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에 몸담은 언론인으로, 이어 진보신당 당대표라는 현실 정치인으로, 다시 학습공동체 ‘가장자리’와 ‘소박한 자유인’ 대표로, 또 장발장은행장으로 살았다.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서 노역해야 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벌금액 만큼을 빌려주는 장발장은행의 ‘수장’이 된 뒤, 그는 “가장 출세한 자리”라고 서툰 농을 했다. 자기 책상 하나 없는 자리였다.
선생은 자신의 생애사 주요 국면마다 긴과 장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남민전 사건은 동생 이름과 제 이름 사이에서 발생했다. 그가 속한 운동계열은 훗날 ‘민족해방’(엔엘·National Liberation)이라 이름 붙은 계열에 가까웠다.(5) 사건이 터진 뒤 프랑스에서 받은 여권에는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6) 그렇게 난민이자 세계시민이 됐다. 비로소 제 이름에 부합하는 정체성에 도달한 것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발간은 한국 사회에 선생의 이름 석 자와 함께 프랑스 사회의 면모를 알린 사건이다. 그가 소개한 ‘똘레랑스’(용인)는 지식 생태계에 커다란 유행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식 생태계와 진보 진영의 문해력은 똘레랑스에 똘레랑스하지 못했다. 똘레랑스 안에는 필연적으로 ‘비판’이 내재해 있으나, 한국 사회는 그 비판에 앵똘레랑스(불용인)했다. 귀국 이후 선생의 삶은 한국 사회의 앵똘레랑스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졌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선생은 한겨레신문사에 재직할 때도 가장 강력한 내부 비판자였다. 2002년 1월 귀국해 입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민주노동당 당적 보유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사내 공청회에 이어 구성원 당적 보유에 대한 사원 찬반투표까지 진행됐다. 결과는 ‘당적 보유 금지’가 다수였다. 선생은 ‘불용인’에 몸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늘 한겨레 구독신청서를 품고 다니며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많은 구독신청을 받았다. 그의 재직 9년은 내내 긴-장이었다.
2011년 10월 한겨레신문사를 별안간 그만두고 진보신당 당대표에 출마할 때도, 선생은 진보정당의 얼굴격인 노회찬·심상정 의원의 탈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때 발표한 장문의 출사표 제목은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였다. 그는 “결국 상처만 입게 될 거”라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명망가 진보 정치인들이 버리고 떠난 당을 지키기 위해 외할아버지의 개똥 문답법을 따랐다. 진보신당은 이듬해 총선에서 2% 미만 득표로 등록 취소됐다.
당의 등록 취소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였다. 선생은 한국 사회, 특히 진보 진영에 공부가 절실함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꾸린 학습공동체 이름이 ‘가장자리’에 이어 ‘소박한 자유인’인 것은 아버지의 작명만큼이나 우연적이지 않다. 프랑스에서 난민의 삶이 아웃사이더의 자리였다면 귀국 뒤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은 한국에서의 삶은 가장자리였다. 그는 그 가장자리에서 학동 삼형제의 막내처럼 진보 진영의 무지를 통박했고, 그 전에 자신부터 반성했다.
‘소박한 자유인’이라는 이름은 선생이 평생 간직하고 지향해온 이상이 총체화된 형상이다. “소박한 자유인이란 소박한 생존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이면서 자아실현 또한 소박한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7) 선생에게 자유란 존재의 존엄과 고결한 삶의 토대를 뜻하는데, 그러려면 신자유주의처럼 무제한에다 만용적이고 타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여서는 안 된다. 소박한 자유에 대한 지향은 자연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기도 하다.
선생의 사상을 우리 사회의 납작한 분류 틀에 ‘배치’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공화주의자이면서 아나키스트이자 사회주의자다. 무엇보다 그가 자유주의자이기에 그렇다. 존재의 존엄을 지키는 자유는 사회정의(공화주의), 자주성과 연대성(아나키즘), 그리고 분배정의(사회주의)와 함께해야 이룰 수 있다고 선생은 믿어왔고, 이를 실현할 구체적 길을 탐문하고 실천해왔다. 선생은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유는 긴(緊)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건 안간힘이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8)던 선생은 아무래도 뜻대로 장(張)하지는 못했던 성싶다. 그리고 마침내 쓰러졌다. 그는 담배를 피우러 작은 병원 건물 밖으로 나설 힘마저 사라진 자신의 형편을 무척 아쉬워할 만큼 대단한 애연가였는데, 장을 위해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담배 말고 달리 없었을 터이다. 그의 마지막 사회적 실천은 더는 쇠잔해질 수조차 없는 그 몸을 이끌고 22대 총선에 사전투표를 한 것이었다. 끝없는 도전으로 온전히 소진하고 떠난 삶이었다.
<각주>
(1) ‘개똥 세 개’(홍세화 외 8인, 북멘토, 2013년) 등 재구성.
(2)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 1995년) 등 재구성. 민화는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첫돌 전에 병이 들어 숨졌다.
(3) ‘나·들’, 2013년 5월.
(4) 홍세화 칼럼, ‘한겨레’ 2020년 9월18일.
(5) ‘나·들’, 위의 책.
(6)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위의 책.
(7) 홍세화 칼럼, 한겨레 2010년 12월27일.
(8) ‘아웃사이더를 위하여’(홍세화 외 3인, 아웃사이더, 1999년).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395.html
“나는 민주시민인가 고객인가, 스스로 묻자” (한겨레21 1510호, 이재훈 편집장, 안영춘 이문영 기자, 2024-04-19 13:23)
홍세화 선생 별세 전 병실에서 마지막 인터뷰… “한국 진보정치와 민주시민 사이의 간극, 계속 줄여나갈 수 있기를”
2024년 4월14일 오후 2시30분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 3308호실. 비강캐뉼러(산소 공급장치)를 끼고 누운 선생의 눈은 자주 초점을 잃었다. 눈의 공막에는 황달기가 보였고, 몸을 쥐어짜서 내는 목소리는 거칠고 메말라 있었으며, 신장이 기능부전을 일으키는지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부은 종아리를 손으로 주무르며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물으니 선생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좋죠 좋죠”라고 답했다.
4·10 총선 사전투표 참여해
홍 선생에게 전화가 온 건 4월9일 오전이었다. 선생은 “나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나중을 위해서 미리 인터뷰를 좀 해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국립암센터에서 ‘더는 할 일이 없다. 통증 완화 치료밖에 안 남았다’는 최후 통보를 받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선생은 2023년 2월 암 진단을 받은 뒤 경기 고양 국립암센터와 녹색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왔다.
선생은 이날 2시간 정도 이뤄진 인터뷰 기간 내내 말하기를 힘겨워했다. 기력이 부쳐 세 차례 정도 인터뷰를 멈추기도 했다. 선생은 “별 이야기도 아닌데 이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오게 해서 송구스럽다”며 천천히 생각을 꺼냈다.
—몸 상태는 어떠신가요.
“저도 가늠하기가 어렵네요, 얼마나 남았는지. 보름에서 한 달 사이인 것 같아요. 완전 틀렸을 수도 있고. 누구도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4·10 총선 사전투표를 하셨다고요.
“21번(비례투표 노동당)을 꼭 찍었습니다. 지역구 투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안 했고.”
—20년 만에 원내에 독자적 진보정당이 한 석도 없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힘을 얻어야 하는데, 어려웠던 것 같아요. 예견됐던 일이고, 크게 실망하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어차피 양당 구도가 굳건한 상황에서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그 선택에 대해서 아쉽진 않아요.”
—한국 정치를 보는 마음은 어떠신가요?
“진보정치와 한국 민주시민의 간극, <한겨레>가 좀더 적극적으로 그 간극을 드러내면서도 줄여나갈 수 있길 바랐어요. 그게 <한겨레>에 계속 남아 있었던, 그리고 나왔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한순간에 이뤄진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인터뷰 도중 선생이 편집위원을 지냈던 격월간 잡지 <아웃사이더> 제17호(2004년 1월14일 발행)를 꺼내 선생이 쓴 머리글 ‘진보 정당 콤플렉스’ 일부를 읽어드렸다. 선생은 당시 이렇게 썼다. “한국 정치를 분석, 비판하는 사람 중에는 젊은 세대의 탈정치화 경향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진보 정당은 외면한다. 시민사회단체의 진보적 인사와 진보적 지식인 중에 진보 정당과 거리를 두는 이유를 기존 진보 정당과의 노선 차이를 드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진보 정당에는 거리를 두다가도 ‘개혁’에는 선뜻 동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진보 정당 콤플렉스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의 진보는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한 진보이기 때문인가.”
—이 글을 쓰셨던 기억이 나시나요?
“그러게요.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운 지점인데, 이상이나 지향이 정치적 지형과 잘 만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중요한 결정 상황이 오면 바로 손을 빼거나 실망하는 그런 면도 없지 않죠. 민주시민이라고 하면 세 가지 성격이 같이 묶여져 있어야 해요. 주체성과 비판성, 연대성. 주체성은 자기가 이 사회의 주체, 이 사회를 움직여가는 본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판성은 비판력을 갖게 되는 것이고, 연대성도. 그게 공화국에서 품어야 하는 민주시민의 성격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기존의 반민주 세력과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이 지쳐가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에 그런 경향이 강화하고 있고,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거기에 휩쓸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점점 더 굴종하는 모습이 대세가 되다보니.”
—귀국 뒤에 오염된 자유의 개념을 찾는 것과 관련한 글을 많이 쓰셨어요.
“사람들이 고객화했지요. 고객화했다는 건 구매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은 찾을 이유가 없고, 나만 잘났다는 거죠. 내가 말하는 자유는 고결함을 추구하는 것이에요.”
나 자신을 위한 글을 쓰지 않겠다
선생은 2020년 쓴 저서 <결: 거칢에 대하여>(한겨레출판)에서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은 고결함을 지향한다. (중략) 그는 ‘회의하는 자아’다. 회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를 짓는 자유는 무의미하다. 고쳐 짓거나 새로 지을 게 없는, 이미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이 책에는 “자유는 외로움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문장도 나온다. 선생은 이어서 미안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2002년 귀국할 때 스스로 다짐한 게 있어요.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한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이주노동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한국에 와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싶다는 것. 그랬는데 그 약속을 충실히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외국인보호소를 방문하는 시민모임) ‘마중’이라는 단체에 몸담았지만 성실히 임했나 하면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죠.”
—선생은 어떤 주의자라고 할 수 있나요?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다 맞죠. 세속적인 사회적 영혼을 담은 아나키스트에 아주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죠.”
—다시 <한겨레> 칼럼을 쓰신다면 어떤 글을 쓰시고 싶은가요?
“사람의 삶은 관계의 형성인데, 관계의 형성이 아니라 관계를 흐트러뜨리고 관계를 파괴하는 그런 것들이 더 심해졌어요. 관계성의 형성에 대해….”
—<한겨레> 독자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실까요?
“<한겨레> 독자는 민주시민인가 고객인가, 그 질문을 독자들이 스스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한겨레> 구성원도 마찬가지고. 고객이 되면 내 취향이나 의견이 조금만 비틀어져도 ‘절독’을 말하잖아요. 그건 고객화한 모습이에요. 민주시민이면 설령 나와 생각이 달라도 사회를 위해 올바른 건가 아닌가를 생각해볼 수 있죠. 학교와 학부모의 관계도 마찬가지지요. 최근에 일어난 사태도 그걸 말해줘요. 학교에서 민주시민 교육이 없어서 나타난 결과라고 봅니다. 정말 할 일이 많아요.”
겨우 인터뷰를 마친 선생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선생에게 “꼭 다시 뵙고 카페 벤야민(경기 고양시 선생 자택 근처 카페)도 가셔야지요”라고 하니 “맞아요 맞아요”라고 화답했다. 병실 문이 닫힐 때까지 선생은 후배 기자들에게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37370.html
자유인 홍세화의 ‘고결함’…외롭고 쓸쓸해 아름다웠다 (한겨레21, 이문영 기자, 안영춘 한겨레21 기자, 이재훈 한겨레21 편집장, 2024-04-19 17:59)
[한겨레S] 커버스토리 타계 4일 전 병상 인터뷰
“자유를 위해 늘 긴장한 일상…제가 의미하는 자유, 고결함 추구하는 것”
“오염된 자유는 민주시민을 고객으로…주체성·비판성·연대성 복구해야”
“날 위한 글 쓰지 않고 난민·이주노동자와 연대…‘약속’ 충실히 못 지켜”
인터뷰는 그의 “마지막 숙제와도 같았”다. “선생님은 자신의 삶에서 각별했던 한겨레와 꼭 마지막을 정리하고 싶어 하셨고 인터뷰를 기다리며 남은 기운을 끌어모으셨다”고 했다.
“21번, 꾸욱 찍었습니다.” 입원 전 그는 ‘비례 21번’ 노동당에 사전투표했다. 노동당의 22대 국회의원 선거 정당 득표율은 0.09%였다.
“(후회) 안 했어요. 진보정치와 한국 민주시민의 간극, 그 간극을 드러내면서도 줄여나갈 수 있길 바랐어요. 그게 한겨레를 나온, 가장 중요한 이유였어요. 한순간에 이뤄진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이상과 지향이 정치 지형과 잘 만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중요한 순간이 오면, 바로 손을 빼거나 실망하는 면도 없지 않죠. 우리가 민주시민을 지향하는 게 분명한데도, 민주주의에 대한 자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민주시민이라고 하면, 세 가지 성격이 드러나야 돼요. 세 가지.”
그가 잃어버린 물건 찾듯 머릿속을 헤쳐 찾아낸 단어들을 하나씩, 천천히, 말했다.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 이 세 가지를 복구해야 해요. 주체성은, 자기가 이 사회의 주체라는 것. 이 사회를 움직여 가는 본체라는 생각. 비판성은, 비판 능력을 갖게 되는 것. 그리고 연대성. 이것들이 민주시민으로 품어야 하는 기본 성격인데, 반민주세력과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후…(한참을 호흡), 뭐랄까, 생활이 많이 결여돼 있죠.”
“갈수록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이 지쳐가는 게 아닌가. 제가 볼 때, 아이엠에프(IMF) 이후 특히 그런 경향이 강화되고 있고,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까지도 거기에 휩쓸려 가지 않나 싶어요. 그 모습들이 대세가 되다 보니, 이제 너무 자연스러워진 것 같아요.”
현실에 조응하지 못한다며 ‘안’을 찾아 떠난 사람들로 옆이 차근차근 비어갈 때 그는 ‘밖’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고자 했다. 편이 있다면 그는 배제된 자들의 편이었다. 그편을 떠나지 않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썼다. 피해자 통계 속에 쇳물처럼 녹아버린 개별 존재들의 서사를 그 불온한 문장들로 줄기차게 썼다.
그가 안간힘을 다해 되찾아 오고자 했던 것도 ‘자유의 개념’이었다. 그는 “이 땅의 기득권 세력들이 저지른 윤리적 범죄행위 중에서 가장 앞선 것은 자유의 의미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럽혔다는 점”(책 ‘결’)이라며 조지 레이코프의 문장을 자주 인용했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자유 개념을 빼앗기는 일은 더욱 슬픈 일이다.”
“제가 의미하는 자유는, 고결함에 대한 추구예요.” “자유인은 고결함을 지향한다. 비단결이 고운 것은 올이 많아 섬세하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사유의 올들에 하나의 올이라도 더 보태거나 수정하여 조금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세상을 인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자유는 외로움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고도 쓰셨어요. 외로우셨나요?) “한때는 외롭고, 한때는 자유로웠어요. 자유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진정한 긴장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2002년에 귀국할 때, 제가 스스로 다짐한 게 있었어요.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한 글은 쓰지 않겠다. 다른 하나는…, 내가 (프랑스에서) 난민과 이주노동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 처지로 한국에 와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겠다. 그 두 가지였는데, 약속을 충실히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사는 마지막에요. 임박했을 때 내줘요.” 그가 기사를 앞질렀다. 2024년 4월18일 오전 11시55분. 자유로운 그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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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2.16(일)에 홍세화 샘의 아래 글을 옮겨오면서 별로 땡기지는 않는다고 코멘트를 했다. 민주당에 대해서는 이미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http://redpill.kr/index.php?document_srl=1603
민주당에는 민주주의자가 없다. (레드필, 홍세화, 2020.02.14 18:53)
민주당 안에 민주주의자가 보이지 않는다. 공수처 설치 반대 소신을 밝힌 금태섭 의원에 대한 정치적 린치 행위가 벌어져도 이를 제어하는 민주주의자가 없다. ‘문재인 씨’라는 발언을 문제 삼아 떼거리로 아우성칠 때 점잖게 나무랄 줄 아는 민주주의자도 없다. 선거를 앞둔 시점임을 강조하면서 임미리 씨를 고발했던 민주당인데, 그 민주당 안에 ‘청와대 선거 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하여 문재인 대통령에게 해명이든 석명이든 자신의 입장을 밝힐 의무가 있다고 발언할 줄 아는 용감한 민주주의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 스스로 지지자들뿐만이 아닌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천명했다면, 국민의 ‘일반의지’를 이처럼 모르쇠로 일관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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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2(일)에 일기장에 일부 옮겨놓은, 홍세화 샘의 글.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10313.html
[홍세화 칼럼] 탈진실 시대와 대통령 선거 (한겨레, 홍세화|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2021-09-03 04:59)
공약(公約)은 집권할 때까지만 유효할 뿐, 집권한 뒤에는 그 대부분이 공약(空約)이 된다는 것을 문재인 정권이 충분히 보여주었다. 4년여 전에 우리가 들었던 촛불은 지금 무엇으로 남았나? 당시에는 개헌 논의도 활발했고 시민의회 등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표출되었다. 그러나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나중에”도 계속 나중에로 남았다. 그런데 정치인이 손바닥 뒤집듯 자기 말을 뒤집어도, 공약이 공약(空約)이 되어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것 또한 탈진실 시대의 현상 중 하나다. 정치인에 대한 호오 감정이 옳고 그름의 판단을 압도하는 것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은 수구기득권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득권 세력을 형성케 하고 굳게 하는 것이 콘크리트 지지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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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1.15(일) 페이스북
홍세화 샘의 한겨레신문에 실리는 마지막 칼럼이라고 한다. 특히 아래 문장은 내 자신의 위선을 꾸짖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도 관계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선배로부터, 책으로부터 들었음에도, 스스로도 관계를 그리 강조했음에도, 나의 삶은 관계보다는 소유 중심이었던 듯하다. 관계는 체화되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조국 장관을 비판하면서도 그러는 나는 과연 스스로 진보나 좌파라고 할 수 있나 싶었다. 소유에서 관계로라는 홍세화 샘의 고언이 눈에 밟힌다. 앞으로는 그 당부를 잊지 않아야겠다.
https://m.hani.co.kr/arti/opinion/column/1075517.html
[홍세화 칼럼]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한겨레, 홍세화 |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2023-01-12 19:26)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 말할 수 있는 것도 특권에 속하는데, 적잖은 입이 말로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삶은 신자유주의를 산다. … 노동의 이중구조, 불평등의 세습구조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위선적인 문재인 정권과 독선적인 윤석열 정권이 똑같이 어떤 정치철학을 펼치려고 집권했는지 알 수 없는 점도, 그들의 관성에 따라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집권했을 뿐이라는 점으로 설명된다. 시민사회운동의 원천도 적잖게 소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 경향은 민주당 집권과 함께 강해졌다. 그만큼 운동의 토대와 방향성은 부실해졌다.
각자의 삶은 각자가 맺는 사회적 관계의 총화라고 했는데, 오늘 닥친 기후위기는 우리 모두에게 자연과의 관계 재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자연이 인간의 지배, 정복, 소유, 추출의 대상일 때, 인간도 다른 인간의 지배, 정복, 수탈, 착취의 대상이었다.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이 최악의 날들을 끝내기 위해 자발적 반란을 끊임없이 일으켰지만 결국은 모두 실패로 귀결됐다. 그렇다면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에 마지막 기대를 걸어볼 만하지 않을까. 우군이 된 자연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도 소유주의가 끝없이 밀어붙인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성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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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2004. 9. 30.
이 글은 홍세화 님이 고종석 님과의 대화 이후에 그 핵심을 정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글이다. 하기사 그들에게서 뭘 기대하겠는가? 민주노총 기관지 노동과 세계 제307호에 실린 것이다.
[홍세화 칼럼]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기대 마라 (노동과세계 제307호,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2004-09-24 14:51:51)
20여년의 이방인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 3개월, 나는 자주 분노와 슬픔의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사람은 본디 절대적 빈곤상태보다 상대적 박탈감과 불평등을 더 견디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이 사회의 물적 토대는 분명 과거에 비해 풍부해졌고 또 민주화가 되었다고 함에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불평등을 끝없이 강요하고 있다.
'개혁', 가진자들 사이의 싸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라는 긴급하고도 당연한 요구에 대해 개혁적이라는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는 개악의 표본이라고 할만한 근로자파견법으로 응수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개혁'이 '가진 자들 사이의 싸움'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전국 어디를 가나 차별과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움직임은 찾기 어려운 반면 "기업하기 좋은 나라" "기업하기 좋은 지역" "기업하기 좋은 도시"라는 구호가 널려 있다.
부유층 자식들이 서울대의 주를 이루고 있는 것에 뒤질세라 연고대 등 이른바 상위권 대학들이 출신배경으로 학생을 선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경제적 자본과 부는 자식에게 자본과 부뿐만 아니라 세칭 명문대 학벌까지 대물림하고 있다. 서민의 자식에게 그나마 실낱같이 남아 있던 계층상승의 유일한 통로였던 교육자본 형성의 가능성도 사라진 것이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언론은 민족의 명절에 비친 빈익빈부익부의 사회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피상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사회적 연대의 제도화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은 찾아보기 어렵고 고작 왼손이 알게 하는 오른손의 나눔을 캠페인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귀족은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진다'는 뜻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흔히 말하곤 한다. 유사시에 귀족일수록 가장 먼저 전선에 뛰쳐나가고 평상시에도 남보다 성실히 납세의무를 진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 땅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본디 귀족이 자발적으로 의무를 지운 게 아니라, 민중의 비판과 견제 능력에 의해 노블레스 오블리주 없이는 원활한 지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운 것이기 때문이다. 가진자들은 그것이 권력이든 부이든 스스로 나눠주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들이 비판과 견제 능력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그 크기에 따라 조절하거나 통제할 뿐이다.
이 땅의 정치, 교육, 언론 등 사회부문은 거의 가진 자들을 통제하거나 조절하도록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가진 자들의 논리를 '경제논리'로 포장하여 관철시키는데 협력하거나 보조자 역할을 하고 있다.
노동자가 믿을 건 노동자 뿐
민중의 편은 민중 바깥에 거의 존재하지 않고 노동자의 편은 노동자 바깥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없어 품을 팔아 생존해야되는 사회적 약자,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의식을 가질 때에만 권력과 결합한 자본의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균형력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이 땅의 정치, 언론, 교육 등이 다만 자본의 논리를 관철하기 위한 협력, 보조 장치에 지나지 않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노동자의식을 가질 때 지배의 폐쇄회로를 끊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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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2005. 1. 14.
어제 오전 노무현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국정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처음에 경제라는 말에서 시작해서 회견 내내 경제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여전히 그는 개혁을 이야기하지만 한나라당과 무슨 차별성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노무현 정권에게 개혁은 구호로서만 남은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2004년에도 일년내내 일자리 창출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였고,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외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비정규직 증대 및 청년실업율 증가였습니다. 그리고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경제사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인가 근본적인 것을 검토해야 할 듯한데, 노무현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 내용을 보고 환영한 이들은 열린우리당에 있는 똘마니들과 자본가들이었습니다.
경제가 좋아지면 민중들의 생활은 나아질까요? 국민소득 2만불을 달성하면 모두가 잘사는 사회가 되는 겁니까?
진보정치가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하여 11일 공개한 ‘신년특집 전국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의 역점 분야”에 대해 ‘국보법 철폐 등 4대 개혁과제 완수(4.1%)’나 ‘한반도 평화와 자주 외교(3.6%)’도 중요하지만, ‘비정규직 해결과 고용안정’( 34.1%)과 ‘빈부격차 해소와 사회복지’(29.2%)가 훨씬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13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도 경제 양극화 해소와 관련해서는, '다소 성장이 지연되더라도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답변(60.1%)이 '빈부격차를 감안하더라도 일단 성장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답변(38.4%)보다 훨씬더 선호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연령별로는 중간계층의 40대 가장과 직업별로는 농림/어업 분야 종사자들이 양극화 현상에 대해 가장 우려하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해답은 명확한 것입니다. 참여정부 3년의 국정방향은 민주노동당의 논평에서 제시된 것처럼 ‘근거없는 경제낙관론’, ‘실용주의적 신자유주의’, ‘무분별한 개방에 의한 선진한국’등의 정권안정화 대책이 아니라 서민경제(서민경제라는 말에 대한 더 나은 개념이 없을까요?)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과 개혁, 빈부격차 해소와 사회복지 확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원래는 홍세화 님의 한겨레신문 2005년 1월 13일자 칼럼을 퍼오면서 짧게 코멘트하려 했는데 길어졌습니다. 항상 이렇군요. 노무현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이 그런 식으로 끝날 것을 알고 홍세화 님이 미리 칼럼을 썼나 싶어서 담아온 것입니다. 홍세화 칼럼의 마지막 말처럼 '인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긴 한데, 그 인간에서 몇명은 빼고 싶군요.
http://www.hani.co.kr/section-001012000/2005/01/001012000200501121911208.html
이데올로기로 남은 ‘개혁’ (한겨레신문, 홍세화 기획위원, 2005.01.12(수) 19:11)
노무현 정권이 선 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개혁 후퇴와 실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드세게 제기해 왔다. ‘노무현 없는 대통령’, ‘얼치기 개혁정권’이나 최근에 쓴 ‘개혁의 타락’이란 글이 그것들이다. 노 정권에 대한 나의 반복적인 문제 제기는, 한편으로 개혁에 거는 기대를 접을 수 없었던 나의 안간힘의 표현이기도 했다.
권력은 그 자체로 민중적이지 않다. 그리고 정치나 행정에 입문하는 대학교수들이 종종 증명해 주듯, 권력 앞에서 최종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그동안 표명했던 정치의식이 아니라 내면에 숨어있던 권력지향의 정서인데, 권력의 일상 또한 사람의 정서에 일상적으로 작용하면서 의식을 변화시킨다. 그 때문이다. 흔히 말하듯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곧 개혁의 진정성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일상적 성찰이 요구되며, 동시에 권력의 품에서 일상이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진보정치 세력이 아직 취약한 한국사회에서 당적 견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노무현 정권도 역대 정권과 마찬가지다. 권력은 여전히 대통령을 중심으로 돌며, 사회 구성원들의 시민의식 부재와 수구언론의 영향력 아래, 개혁의 실종이나 후퇴에 맞서 권력 내부에서 중심부를 비판하거나 마침내 권력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사람을 보는 일은 아주 드물다. 이처럼 자기성찰과 비판이 효과적이지 못하며 당적 견제가 작동하지 않는 권력은, 그 일상에 의해 비민중적으로, 나아가 반민중적으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권력중추의 거처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며 감격해 마지않았던 ‘개혁’ 세력의 과거 한때 의식을 지배했을 법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라는 말은 그들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진다. 그들은 앞으로도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겠지만 이라크 파병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극복이라는, 그들이 한때 품었던 과제와 정면에서 충돌한다는 것조차 모르거나 무시할 만큼 그들의 의식은 자신의 가까운 과거조차 배반할 만큼 바뀌는 것이다.
최근 ‘이기준 3일 교육부총리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노무현 정권이 집권 초기에 그나마 보여주었던 긴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한테서 꾸중을 듣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들에게서 긴장이 사라졌다는 것은 바꾸어야 할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민중성의 상실을 반영하며, 실용주의라는 이름의 현실 영합주의와 보수세력 끌어안기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대미종속의 극복이라는 과제는 후퇴하고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개혁’의 중심 목표가 된다. 4대 개혁법안이 요란함 속에서 해를 넘긴 반면에, 파병연장 동의안과 함께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 민간투자법, 기금관리법 등 신자유주의 관철을 위한 법안은 통과되었다.
이제 ‘개혁’은 인간의 얼굴을 상실한 이데올로기로만 남았다. 실제로, 나는 노무현 정권한테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기 어려웠다. 늙은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민주화된 시대에 …”를 말하는 비인간성은 이데올로기로만 남을 ‘개혁’의 단초를 말해준 게 아닐까. 김선일씨의 처절한 외침 앞에서도, 지율 스님 앞에서도, 공무원 노동자들을 대대적으로 파면할 때도, 그리고 추위 속에 단식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친 일천여 농성단에게도 노무현 정권은 인간의 얼굴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 인간의 얼굴이 사라지고 이데올로기로 남은 ‘개혁’의 오만은 ‘이기준 사태’에 대한 처리 과정에서도 다시금 확인되었다.
광복과 분단 60년, 그러나 개혁은 놓칠 수 없는 절절한 역사적 요구다. 오늘도 나는 절망적으로 비판하고 말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그것은 끝내 버릴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고질병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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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2005. 6. 9.
홍세화 님이 벌써 4년 전에 아래와 같은 글을 썼네요. 당 기관지인 진보정치에 쓴 것인데, 그 문제의식은 여전히 지금도 의미있다고 보아 퍼왔습니다.
당원의무교육과 관련된 내용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당원이 후원자가 아니라 진정한 진보정당의 당원이 되고자 한다면 당비 납부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이겠지요. 실제 홍세화 님은 지난 6월 8일에 개최된 출범 1주년을 맞은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에 대한 평가 워크샵에서 당원 교육프로그램의 부재를 당의 오만함의 대표적인 예로 잡고 있습니다.
아래 글을 읽는 느낌이 새로울 것입니다.
http://kdlpnews.org/reader/view_pastarticles.asp?id=200112011000000003
[진보의창]당원인가, 후원자인가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kdlpnews-67 호 2001.11.30, 홍세화/<아웃사이더> 편집위원)
나는 귀국과 동시에 민주노동당의 평당원이 되어 당비를 성실히 내겠노라고 약속한 바 있다. 이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을 지킨다는 것으로 진보정당 당원의 소임을 다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당비를 내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적지 않은 우리들이 당원과 후원자를 혼동하고 있는 게 아닌지 묻고 싶다.
'진보'가 워낙 억압받고 취약했던 땅이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는 진보정당의 당원이 되어주고 당비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감지덕지한다. 그것으로 서로 '진보'를 확인하며 자위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또 정치에 염증을 내는 사회 분위기에서 우리 당원들 또한 만남의 자리들에서 정치가 개판이라고 비난하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진보정당의 당위성을 알리고 동참하도록 이끄는 일에는 대부분 머뭇거리거나 멋적어한다.
가령 추석에 고향을 찾은 기회에 당 선전을 하는 당원은 얼마나 될까?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일은 남이 할 일이라고 돌리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원이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대신 해 줄 것인가?
당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일상 속에서 당과 대중 사이의 징검다리 구실을 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의 당원들인 우리들도 사회를 해석할 뿐,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 노력에는 소홀했다고 말해야 한다.
'진보'가 취약한 땅이었기에 우리에겐 우리에게 동조할 수 있는 사회구성원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그런데도 우리들에게서 열성이 발견되지 않는다. 가령 프랑스의 사회구성원들 대부분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상응하는 정치적 성향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에 당원들이 아무리 열심히 선전과 홍보 활동을 벌여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럼에도 당원들의 활동은 우리들에 비해 훨씬 열성적이다. 예컨대 프랑스 녹색당의 당원 숫자는 1만명도 채 안되지만 그들의 활동은 민주노동당보다 훨씬 활발하다.
그 차이를 오직 편파적인 한국의 언론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은 당원의 기본 자세와 인식에 차이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프랑스 진보정당의 당원들은 구체적 삶 속에서 당원인 데 반해, 우리들 대부분은 관념과 의식 속에서만 당원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정치에 대한 냉소와 절망을 떨쳐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에 대한 냉소와 절망이 우리의 의식까지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의 구체적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앞으로 일터와 주거지에서, 친지와 친척들과 젊은이들을 만난 자리에서, 옛 친구와 해후한 술자리에서, 즉 일상적으로, 가슴 품에서 민주노동당의 기관지 <진보정치>를 주섬주섬, 그러나 열심히 꺼내들고 당을 선전하고 홍보할 것인가?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 중에는 나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볼 사람도 있을 테지만 개의치 않고 단순소박하게 <진보정치>의 구독을 권하고 당원 가입서를 건넬 것인가?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삶의 의미는 분명히 그 속에 담겨 있다. 가치관, 세계관으로 진보정당의 당원이 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한 한, 진보정당의 앞날이 역사의 방향과 함께 한다고 믿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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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2006. 3. 6.
3월 6일자 서울대 대학신문은 새내기특집호이다. 여기에 '신입생에게 주는 글'이라는 특집면에 홍세화 님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을 보고 새내기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
대학신문을 보고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찾아보았더니 이 글은 아직 웹사이트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점심시간에 쉴 겸해서 타자를 쳐봤다.
사회귀족 예비군에게
홍세화 (한겨레신문사 시민편집위원)
솔직히 말하자. 나는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할 수 없다. 나름대로 민중적 지향성을 유지하려고 해쓰는 사람이 어떻게 장래 한국의 사회귀족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게 축하메시지를 보낼 수 있겠는가. 다만 자기성찰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할 뿐이다.
오늘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귀족들은 사회의 엘리트로서 가져 마땅한 능력도 부족한 데다 사회적 책임감은 아예 갖고 있지 않다. 그대 또한 자기성찰을 게을리한다면 그런 선배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그대는 머리가 좋거나 배경이 좋아서 치열한 학벌경쟁에서 승리하여 서울대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험문제를 잘 풀고 주입식 교육, 암기위주 교육에 잘 적응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해줄 뿐, 그대가 사회문화적 소양이나 인문학적 상상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대 자신을 돌아보라. 그대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하다. 그럼에도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권력의지와 기름진 생존을 위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것에 자족함으로써 결국 이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층에 속하게 될 것이다.
아직 젊은 그대가 인간적 감수성을 품고 있다고 믿고 말하건대, 실로 놀랍지 않은가? 인간은 소우주라 했거늘,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은근히 오만해져 자기성숙의 긴장을 이완한다는 사실이. 그리하여 사회문화적 소양도 갖추지 않고 인문학적 바탕도 없는 사람들이 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바로 오늘 한국사회의 모습이 그러하다.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가슴에 새겨둬야 할 게 있다. 인간은 본디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머리 좋고 요령이 뛰어나다는 것은 자기 합리화에 뛰어나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대 또한 장래에 20:80의 사회에서 20의 상층을 차지한 자신에 만족하고 80의 기본적 생존권에도 무관심한 채 필드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아흔아홉 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합리화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부디 남과 경쟁하지 말고 그대 자신과 싸우라. 스스로 사회귀족이 되는 길보다 사회귀족 체제에 맞서 싸우는 길을 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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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2006. 3. 25.
"아시다시피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인해 청년실업이 40만에 육박한 이때에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 없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MBC 시트콤 "논스톱4"에서 고시생 역할을 했던 앤디가 1000번도 넘게 했다는 대사이다.
그 청년실업과 관련된 문제로 프랑스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비정규직양산법이라고 할 수 있는 법안을 보수양당이 야합하여 통과시키려 하는데도, 우리의 청년들은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긴 청년실업을 '고시생'이 걱정하는 판이니...
여기에 홍세화 선생이 따끔한 몇 마디를 했다. 물론 다 아는 사실을 얘기한 것이겠지만, 그냥 주의환기용으로 올린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60323080602
홍세화 "2006년 한국, 존재를 배반하는 사회" (프레시안, 김하영 기자, 2006-03-23 오후 7:44:39)
"신자유주의 파고에 '양보'는 해도 '포기'는 말라"
"프랑스에서는 26세 미만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2년 안에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최초고용계약법'(CPE) 때문에 예비노동자인 대학생들, 심지어 고등학생들까지 무려 150만 명이 거리로 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26세 미만은 물론이고 전 연령에 걸쳐 2년 고용계약을 할 수 있고 2년 안에는 아무 때나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법안을 만들어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관심이 없다."
22일 저녁 동국대 본관 중강당,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은 '강정구 교수 천막강의'의 세번 째 강사로 나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대학생,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제목의 이날 강연에는 300여 명의 동국대 학생들이 참석해 홍 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에서는 '비정규직 법안'에 왜 관심이 없나"
홍 편집인은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한국의 '침묵'에 대해 '비판적 사회의식'의 부족을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서 나만 고시 공부하고, 학점 공부하고, 토익 공부해서 상층부에 진입하겠다는 계층 상승을 모색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키우고 사회 전체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주문했다.
홍 편집인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는 '몸'과 '의식' 두 가지로 이뤄지는데, 우리는 '몸'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심이 높으면서도, 반대로 '의식'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는 "과연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것"을 권유했다. 국가적 이념만을 강조하는 교육체계와 자본이 장악한 대중매체에 의해 의식화된 일반 대중들이 어느샌가 '자발적 복종'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즉 국가가 교육을 통해 노골적으로 '복종'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분단 이후 '반공', '안보', '질서'라는 이름으로, 최근에는 '국익', '국가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은연 중에 국가권력에 복종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또한 '자본에 의해 장악된' 대중매체도 TV를 켜면 하루에도 수십 번 씩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카피가 물신주의를 조장하며 강력하게 일반인들의 의식세계를 파고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번 형성된 의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홍 편집인은 "TV토론을 나가봤는데, 토론자들은 나와서 시종일관 자시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애초부터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자세가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한번 성립된 의식이나 세계관은 좀처럼 바꿀 수 없다"며 "인간은 합리화에 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의 고집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홍 편집인은 특히 '정보화 사회' 덕분에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고 믿는 또 다른 무지 상태에 놓여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택시를 타고 가다 택시기사에게 '<한겨레신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20%는 호의적이지만, 80%는 '여당지다', '운동권신문이다', '편파적이다', '빨갱이신문이다', 심지어 '전라도 신문이다'는 반응까지 보이며 부정적 인식을 나타낸다"며 "그러나 정작 <한겨레신문>을 자세히 보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드물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교조를 욕하면서 사실 전교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고, 민주노동당에 대해 부정적이면서도 민주노동당에 대해 제대로 알려고 노력해본 사람도 없다"며 "대개의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조중동'과 같은 주류 매체에 의해 전해지는 피상적인 정보만 갖고 쉽게 판단하며 그냥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고 지적했다. 모두 '비판적 사회의식' 혹은 '성찰적 자아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며 살고 있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들은 결국 '존재의 배반'을 낳는다. 홍 편집인은 "20:80의 사회(상위 20%가 부의 80%를 소유하고 있는 사회)라고 하는데, 하위 80%를 위해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하자고 하면 정작 이들은 자신들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상교육·무상의료에 찬성하지 않는다"며 "이는 지배세력이 다수 서민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자신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 관심이 없는 우리 사회는 '존재를 배반한' 사람들로 가득찬 사회이거나, 최소한 구성원들이 '자신은 비정규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속에 사는 것이다.
홍 편집인은 이를 바탕으로 대학생들에게 "끊임없이 긴장하고 살 것"을 주문했다. 그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인생을 통해 딱 두 번 긴장을 하는데, '대학입시'와 '취직시험'"이라며 "그러나 자신의 삶에 있어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아 실현을 위해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이에 한 여학생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팽배한 상황에서 '먹고 사는' 문제도 중요한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홍 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고, 나름대로 그 속에서 자신의 자아실현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양보'는 가능할지언정 '포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세상에 '양보'는 할지언정, '포기'는 하지 말라"
대학 진학, 사회 진출의 순간에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지 못했다고 해서 '그냥 나는 돈이나 벌래'라는 식으로 '포기'하지 말고, 다른 길을 가는 순간에도 다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도모해야 한다는 말이다.
홍 편집인은 이날 대학생들에게 ▲고전 읽기 ▲견문 쌓기 ▲내면적 성찰 ▲인간성 회복을 강조했다. 그는 "리영희 선생의 '대화'라는 책을 읽었는데, 리 선생이 일제시대 중학생이던 시절 '데칸쇼'를 즐겨 읽었다고 쓴 구절을 봤는데, 여기서 말하는 '데칸쇼'는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말한다"며 "대학 시절에는 '5년 안에 10억 만들기' 같은 책보다는 고전을 통해 풍부한 지식과 사색의 기회를 가질 것"을 권유했다.
그는 또한 "요즘 배낭여행들을 많이 하는데, 뒤통수 너머 사진찍기에만 골몰하지 말고 북유럽이나 그런 곳에 가게 되면 대학교수와 청소부가 월급이 똑같은데 왜 그들은 그렇게 하는지 관심을 갖고 직접 알아보는 등 견문을 넓힐 것"을 주문했다.
홍 편집인은 "마르크스를 비난할 때 제발 모르고 비난하지는 말라. '자본론'을 읽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최소한 '경제학초고'나 '공산당 선언' 정도는 읽고 비판해도 해야 하지 않겠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2시간여에 걸친 강연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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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2007. 10. 11.
대통합민주신당(이에 대해 약칭 당명인 통합신당이나 민주신당을 쓰지 못하게 되자 대부분의 언론에서 7자를 다 사용하여 지면을 아끼지 못하고 있다. 대통당, 대신당, 대민당, 통민당 등 얼마든지 많은데 말이다.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는 약칭이 없으니 5자 그대로 말해달라고 해도 언론에서 민노당을 고집스레 사용하여 이제는 민노당으로 통하게 되는 것과 비교된다)의 1차 모바일 선거인단 개표 결과 손학규가 예상을 뒤엎고 1위를 차지하자, 언론의 2차 개표결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이를 화제거리로 삼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이런 개싸움에서 후보로 나오더라도 본선에서는 가망이 없을 터, 오히려 문국현 후보로 쏠리는 눈길도 상당하다. 물론 곽태원을 비롯한 사무금융연맹의 일부 민주노총 국민파들이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하는 뻘타를 날리기는 했지만, 이명박과 각을 세우면서 인간중심 경제를 운운하는 문국현의 참신함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문국현이 DJ를 만나서 나름대로 후광효과를 보기도 하고, 이명박의 토목경제와는 비교되는 자신의 경제틀을 제시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렇다고 문국현을 진보개혁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명박보다는 낫겠지. 하지만 한미FTA에 대한 입장, 이라크 파병문제,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 등에 있어서 민주노동당과는 차별성이 있는데, 이를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말로 뭉쳐서 파악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는 홍세화님이 잘 지적하고 있다. 나 또한 권영길 후보에 대해 불만이 많기는 하다. 자민통 세력을 업고 그리 참신하지 않은 내용으로 민주노동당을 대표하여 나서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많은 것이다. 물론 노회찬, 심상정이 나왔더라도 결과에 있어서 그리 차이는 않았을 테지만, 지지자들에게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정도나 조직적인 성과로 남기는 데 있어서 권영길 후보로는 모자라는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민주노동당이 이번 대선에서 대변하고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노동자 민중의 진보정치가 분명할 터, 그 근거가 되는 쟁점들에 대한 분명한 입장 표명 없이 소위 범여권의 후보들에게 애정을 갖는 것은 진보정치에 대한 예의가 분명 아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41702.html
[홍세화칼럼] 진보정치에 대한 예의 (한겨레, 홍세화 기획위원, 2007-10-09 오후 06:03:46)
20:80으로 양극화된 사회는 다수인 ‘80’이 소수인 ‘20’에게 지배당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민주주의 제도에선 당연히 ‘80’이 지배해야 맞다. 더욱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들과 달리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는 누구나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더욱 ‘80’이 지배해야 맞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20:80의 불평등, 대중의 궁핍화는 완화되기는커녕 시장만능주의, 승자독식으로 15:85, 10:90으로 치달으면서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이러한 모순은 ‘80’의 대부분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의 말을 빌리면, 강남 사람들은 철저하게 계급의식을 갖고 있는데 반해 강북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가령 ‘조중동’이 ‘20’의 이익을 대변하여 ‘세금폭탄론’을 제기할 때 세금 낼 것도 없는 ‘80’에 속한 사람들도 이에 부화뇌동한다.
‘80’의 이와 같은 자기 배반은 물론 우리만의 얘기가 아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것처럼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그들이 장악한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지배이념을 끊임없이 유포함으로써 대중의 의식을 통제하고 조작한다. 그 결과 피지배계급의 자기 배반은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남다른 것은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또 다른 명제가 오로지 ‘20’에게만 적용될 뿐이고 ‘80’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들 대부분이 반노동자 의식을 가지고 있을 만큼 ‘80’의 자기 배반의 정도가 아주 심하다는 점이다. 이는 분단 상황이 부른 굴레인 게 분명하다.
새삼스레 정치학 원론에서 나올 만한 얘기를 길게 한 것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처지’와 ‘의식’ 사이의 괴리가 낳은 정치세력 지형의 왜곡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다.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우편향, 취약한 진보정치세력, 이른바 보수정치세력이 주로 보수를 참칭한 수구세력인 점, 그러한 보수의 대칭 세력을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이라고 뭉뚱그려 말하게 된 점, 이 모든 게 대중의 처지와 의식의 괴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집권한 뒤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양산,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으로 ‘대중의 처지’를 배반하는 정책을 펼친 세력까지 ‘진보개혁세력’에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대중의 처지’가 아닌 ‘대중의 자기 배반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정치는 당연히 ‘대중의 처지’를 개선시키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 어려움은 대중이 자기 배반 의식으로 진보정치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는 점이다.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비판적 지지론이 대두되고 있다. 본디 올바른 지지 형태는 비판적 지지이지만 한국에서 사용되는 비판적 지지는 왜곡된 의미를 갖는다. 솔직히 말해,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는 것은 한나라당 후보를 미는 결과를 가져오니 문국현씨가 포함된 범여권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를 ‘삼진아웃’ 시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전제조건이 있다. 대중이 자기 배반 의식에서 벗어나도록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스스로 물어야 하며, 대중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적어도 비정규직법안과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이같은 진보정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없이 비지론을 주장하는 것은 대중의 자기 배반 의식 위에 군림하겠다는 권력의지 표명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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