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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객관성의 담보없는 평가와 그에 의한 차별은 폭력이다 (이진송, 2022.4.2)

새벽길 2022. 4. 4. 07:15

"‘진상’들은 소비자 권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통제하려 하고 그런 평가 시스템으로 ‘플랫폼’은 더 많은 이익의 기회를 얻는다. 개인의 주관적 평가가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느냐는 우리 사회가 함께 협의하여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진송 발행인은 '별점'을 들어 평가가 서비스 노동자를 조종하고 억압하는 기제가 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실 평가는 공공기관 노동자들, 특히 공기업/준정부기관 노동자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공공기관 경영평가는 공공기관 임원 인사 및 성과급, 직원 성과급을 규정함으로서 공공기관에 대한 최후의 통제수단이자 가장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 제도이다. 그래서 기재부는 경영평가를 포기하지 못한다.
여전히 평가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평가에 대해 좀더 연구하고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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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4011620025
공정성·객관성의 담보없는 평가와 그에 의한 차별은 폭력이다 (경향,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2022.04.01 16:20)
평가사회, 서비스 노동자를 조종하고 억압하는 무기가 된 ‘별점’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업체가 고객 만족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세상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평가’를 하면서 살아간다. 매우 만족, 만족, 보통, 불만족, 매우 불만족. 나의 주관적인 생각과 기분이 순식간에 상대의 성과를 결정한다. ‘만족’으로도 부족하고, 꼭 ‘매우 만족’인 별 다섯 개여야만 ‘괜찮은’ 평가 시스템이 서비스 노동자에게 과도한 감정 노동을 부과한다는 비판이 제기된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평가는 멈추지 않고, 기준은 더욱 엄격해졌다. 평가하는 동시에 개인은 노동자로서, 또 평가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다시 평가에 노출된다. 평가사회가 ‘진상’, 블랙 컨슈머(악의적 소비자), 초소형(micro) 갑을 대량 양산하고 있다. 이는 공정과 평등의 개념을 오염시키는 ‘만능시험 주의’와도 이어진다.
평가는 어떤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하고, 인지적 차별성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일정부분 정치적 속성을 띠고, 협박이나 강요 없이, 심지어 칭찬과 같은 긍정적 얼굴을 하고도 타인을 조종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보복과 응징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3초도 안 걸리는 별점 평가로 사람을 겁박하고,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는 방식은 ‘이 방법이 통한다’라는 것을 꾸준히 학습한 결과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가 평가를 타격감 있는 무기로 만들고 사람들의 손에 쥐여주었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부당한 요구를 차단하기보다, 어르고 달래서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시시비비나 노동자 보호보다 ‘갑’이자 고객인 사람의 기분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거절할 권리가 없는 상황에서 이어지는 민원 응대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버티고, 우기는 사람이 이긴다. 고객이 왕이라는 세계관은 틀렸다. 왕도 잘못하면 끌어내려지고 단두대에 오르건만, 진상 고객은 어떤 짓을 해도 ‘돈을 냈으니까’ 그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전파했다.
문제는 적정선에 대한 교육이나 성찰 없이, 소비자 정체성만 지나치게 강조하여 권리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때 생긴다. 진상들은 자신이 부당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정도는’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믿고, ‘이 정도는’ 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느낀다. 평가는 통제 욕구와 결합한다. 웹툰이나 웹소설의 댓글난을 보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별점 테러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상식의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에서 만족할 만큼의 보상을 원하고, ‘내’가 기분 나쁜 만큼 상대가 손해 입기를 바란다. 평가를 중시하고 평가로 인한 서열화를 체화시키는 사회가 평가를 권력으로 만든다.
<평가지배사회>(김민주,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에서는 평가의 권력관계를 보여주는 이해관계자가 셋 있다고 주장한다. 평가를 하는 사람, 평가를 받는 사람, 평가를 대행하는 사람이다. 책에서는 이들을 각각 갑, 을, 병이라고 칭한다. 갑과 을까지는 익숙하다. 병은 위임받은 권한으로 피평가자를 직접 평가하는 주체로, ‘○○ 평가원’ 같은 공공기관이나 민간기관 또는 임시 팀이다. 병은 평가 대행 자체가 존재 이유이기에, 평가가 많을수록 이익을 많이 취한다. 내부 기준에 따라 추천 서비스를 제공하고, 더 많은 평가가 쌓일수록 이득인 배달 업체나 콘텐츠 플랫폼도 병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저자는 평가지배사회가 될수록 갑은 평가를 가지는 동시에 권함을 위임하기에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고, 을은 본연의 업무 이외에도 평가를 준비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배달 음식점의 손편지 서비스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병은 더 많은 수익 창출의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고 보았다.
택시에서 불쾌한 경험을 많이 한 여성 승객으로서, 서비스를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은 무척 매력적이다. 하지만 회사가 별점을 기준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보다 성희롱이나 차별 발언, 지정된 경로 이탈 같은 고질적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도록 피드백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저자는 다음 책 <호모 이밸루쿠스>(지식의 날개, 2020)에서는 평가사회가 어떻게 ‘시험 인간’을 만들어 냈는지 분석한다. “시험은 점수로 산출된 결과가 일종의 강력한 근거가 되어 경쟁우위의 지위와 자격 획득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데 큰 기여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험에 더욱 친숙해지기도 한다. 공식적인 시험을 통해 획득한 점수가 실제 실력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단 점수 그 자체가 실력으로 인정되며, 이는 이어지는 삶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시험 점수는 어떤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아, 정치인마저 시험이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라고 착각하며 만능시험주의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는 현실이 바람에 스친다. 평가에 익숙해진 개인은 평가에 순응하며, ‘더 객관적인’ 평가의 기준을 추구할 뿐 평가 자체에 내재한 권력이나 평가로 인한 불균등한 대우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 아니, ‘평가’해서 ‘차별’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기가 나쁜 평가를 한 업체나 개인에게 그토록 가혹하고 집요해지는 것이다.
평가 자체는 피할 수 없다. 무언가를 접하는 순간 욕구와 취향, 기준이 있는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다만 이 주관적인 결론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어디까지 표현해도 되느냐, 이러한 평가가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느냐는 사회가 함께 협의하여 만들어나가야 하는 영역이다. 또한 기업체나 플랫폼은 악의적인 평가를 차단하고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다. 평가사회의 비호를 받고 자라난 진상들은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법, 이제 무엇보다 조그마한 것은 너의 그릇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