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가는 길/책을 읽자

신진욱, <그런 세대는 없다: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

새벽길 2022. 4. 21. 13:22

2022-03-31 21:42
진욱 교수는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세대담론에 대해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가해자 세대와 피해자 세대, 착취하는 세대와 착취당하는 세대, 운 좋은 세대와 불운한 세대를 나누는 식의 현재 세대담론은 경험적으로 사실이 아닐뿐더러 정책적으로 무익하고 윤리적으로도 문제적이다. 그는 세대담론이 불평등 구조를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문제는 세대 간 불평등이 아니라 세대 내 불평등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각 세대의 고통의 경중을 저울질하면서 청년들이 더 아픈지, 노인들이 더 아픈지를 따지며 세대와 세대를 비교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그런 세대는 없다>에 대한 소개기사만 봤는데, 이 책을 직접 읽어보고 온라인상으로라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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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001374350810639&id=100028142501609
@양난주
신진욱 교수님의 신간 <그런 세대는 없다: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에 한국사회정책학회에서 저자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온라인으로 마련했습니다. 
이번 21대 학회에서는 회원들이 연구서를 내면 이렇게 줌으로 간단하게 토론회를 만들어 저자가 30분 정도 직강을 하고, 책을 읽었거나 읽을 예정인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는 시간을 가져왔고요 이번이 세번째입니다.  
첫번째는 정치학자 김영순 교수님, 두번째는 사회복지학자 김수영 교수님을 모시고 했는데.. 이번 세번째엔 사회학자네요. 사회정책학회에는 다양한 분야 연구자들이 계신데 누가 또 신간을 내서 4번째 북웨비나를 임기 마치기 전에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  
회원만 참여하는 자리는 아니니 관심있는 페친들도 들어오십시요. 들어오시기 좋으라고 바로 링크 겁니다. 
Zoom 회의 참가
https://cau.zoom.us/j/87396537168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32511234020756
'세대론'이란 굿판을 걷어 치워라!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 | 2022.03.26. 10:55:31)
[프레시안 books] 신진욱 교수의 <그런 세대는 없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늘 부딪히는 딜레마가 있다. 취재를 하다보면 어느 하나 명쾌하게 정리되는 게 없다. 복잡한 구조 속에 놓인 하나의 사건은 늘 이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모두 기사로 담아낼 수는 없다. 기사란 간결하고 선명한 주제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사를 쓰고 나면 뒷맛이 개운하지 않을 때가 많다.
언론이 모든 것을 담아낼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수많은 징후들을 기초 정보처럼 나열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나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많은 언론이 그런 역할조차 제대로 못하는 게 현실이다.
과거부터 언론은 '세대론'을 자주 사용한다. 최근에는 그 빈도가 잦다. 청년세대, 2030세대, MZ세대, Z세대, 밀레니엄 세대, 82년생, 90년생, 이대남, 이대녀, 586세대, 민주화 세대, 꼰대 세대 등…. 세대를 규정짓는 수많은 신조어들이 언론 지면에 오르내린다. 
이렇게 특정 세대를 '특정한' 성격으로 규정지으면 기사는 조금 더 명징해 진다. 다른 세대와 구분 지으면서 만들어지는 대결구도를 프레임화하면 이슈화 하기에도 편하다. 정치권도 이러한 언론의 흐름을 따라가기도 하고, 심지어 앞서 나가기도 한다. 
세대론은 없다 
최근 읽은 <그런 세대는 없다>(개마고원 펴냄)의 저자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지금과 같이 소비되는 '세대론'이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자칫 같은 세대 내 계급, 교육, 성별, 지역 등에 따른 차이와 불평등은 아예 무시하고 '어떤 동질성'이 같은 세대가 존재한다고 믿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물론, 저자가 세대 차이나 세대적 독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현재의 담론, 즉 세대론에 급격히 기울어진 우리 사회의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모종의 '경기'들에 급제동이 필요하다며 이 책을 낸 배경을 설명한다.
세대는 시대의 질문들에 대한 손쉬운 대답이 아니라,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어려운 질문이어야 한다. 지금의 현실은 저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세대론이 언급된다. 
일례로 저자는 '586세대'에 덧씌워진 허구를 이야기한다. 586세대론은 과거 '저항세대'에서 이제는 '기득권 세대'로 자주 사용되는 세대론적 구분법이다. 저자는 이러한 세대론에 문제를 제기한다. "과연 586세대의 다수가 우리 사회의 기득권으로 살고 있는가." 
저자는 다양한 수치와 통계자료로 기존 '586세대론'에 의문을 나타낸다. 우선 586세대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학력인구 중 4년제 대학 취학률이 13%에 불과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1960년대 생인 현재 50대 중 대학에 간 사람은 10명 중 한 명에 불과하다. 또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당시 대졸과 고졸 간 임금 격차에도 주목한다. 50대의 10명 중 7명은 현재 서비스판매직, 생산직, 단순노무직으로 종사하고 있는 점도 지적한다. 
이들을 배제하고 50대의 10%에 불과한 이른바 '586세대'를 마치 전체 50대로 등치해 기득권 세력으로 도식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한 줌도 안 되는 80년대 운동권 출신의 50대 엘리트층이 이 세대를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을 지워버리는 일이 된다"고 지적한다. 
'586세대'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인가 
'586세대'의 연장선에서 저자는 '기성세대'라는,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이 된 세대'에 주목한다. 이른바 '기성세대'가 사회에 통용되는 방식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부동산으로 쉽게 돈을 번 안정계층'을 뜻한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도식은 경계 대상이다. 과학에 근거하지 않는 이런 '세대론'이 마구잡이식으로 확장되면서 '기성세대=안정계층, 청년세대=불안정계층'이라는 도식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도식은 모호한 대상, 즉 '기성세대'라는 존재가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지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금권, 이권을 장악한 '권력 집단'은 세대를 불문하고 존재한다. 이런 '기득권 집단'이 '기성세대'론 뒤에 숨게 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저자는 "부의 세습,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 계급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고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라는 세대 간 불평등의 관념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기성세대는 대부분 안정계층이고 청년세대엔 불안정계층만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키는 '세대론'은 청년계층 내에 존재하는 '고소득 청년'의 존재를 사라지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현 사회의 불평등 문제는 어떤 세대가 안정계층이고 다른 세대가 불안정층이기에 발생하는 게 아니라 '부와 지위의 세대 간 이전'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안정계층의 부모자식과 불안정계층의 부모자식이 있으며, 이 문제가 청년세대에 와서 더 심각해졌다."
저자는 "지금 20대의 가장 주목할 점은 다 똑같은 취준생, 알바생도 아니고, 능력주의 공정 관념 세대도 아니"라며 이 세대의 핵심 문제는 "직업, 교육, 소득, 재산 등 여러 면에서 세대 내 양극화가 지난 10여 년간 충격적으로 심화되었다는 사실"이라고 지목한다.  
그러나 언론, 그리고 특히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세대론'을 적극 이용해 자신들의 표 획득에 골몰한다. 올해 치러진 20대 대선에서는 그 어떤 선거 때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이대녀'라든지 '세대포위론'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정치를 저자는 '신기루'라 표현한다. 세대론만 바라보는 정치는 실제 유권자들이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겠다는 것인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임대생활자는 주거안정 대책을 요구할 수 있으며, 빈곤층은 생계안정 대책을 요구할 수 있다"며 "하지만 20대의 이름으로 요구할 수 있는 정책은 없다"고 지적한다. 
세대론에 가려진 한국 사회의 불평등 
실제 이번 대선에서 '20대 청년들을 위한'이란 꼬리표를 달고 여러 정책이 나왔으나 그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돼 왔다. 일례로 수도권 중심으로 설계된 일자리와 주거 공약은 지방에 사는 청년들을 담아내지 못한다. 각기 다른 위치와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청년을 20대라는 세대론으로 묶다보니 발생하는 문제다. 
저자는 더는 '세대론'에 갇힌 논쟁과 담론이 만들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세대론에 가려진 한국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를 가져오려면 그래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 세대의 고통의 경중을 저울질하면서 청년들이 더 아픈지, 노인들이 더 아픈지를 따지며 세대와 세대를 비교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청년들의 어려움을 말하기 위해 다른 세대의 인생이 짊어진 무게를 폄훼하거나 심지어 기득권층으로 만들 필요는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가해자 세대와 피해자 세대, 착취하는 세대와 착취당하는 세대, 운 좋은 세대와 불운한 세대를 나누는 일은 경험적으로 사실이 아닐뿐더러 정책적으로 무익하고, 윤리적으로도 문제적이다." 
저자는 지금의 세대론을 두고 "특정집단이 세대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허위일반화하고 다른 집단을 배제함으로써 그 세대의 진정한 실태를 오인하게 된다"고 부작용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오인은 종종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은폐하거나 재생산하는 결과를 남긴다. 
우리는 세대론에 포위되어 정작 중요시해야 할 젠더, 지방 소멸, 불평등, 학벌 문제 등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세대론'에 갇혀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https://www.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2203261305021
신진욱 교수 “기성세대 기득권이란 진단, 엉뚱한 처방 낳고 있다” (경향, 정용인 기자, 2022.03.26 13:05)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사회의 세대론적 분석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고수해왔다. 신 교수는 세대론적 시각의 오류는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학자 및 사회학자가 여러 방면의 연구를 통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그가 최근 자신의 최신 연구를 담은 책 <그런 세대는 없다>를 펴냈다. 이제 막 대선이 끝났다. ‘이대남’이나 ‘이대녀’처럼 세대론적 시각에 기초한 담론이 횡행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여기에 반대하는 주장을 담은 논쟁적 저작을 내놓은 배경이 궁금했다. 지난 3월 22일 중앙대 연구실에서 신 교수를 만났다. 이번 대선을 어떻게 보는지, 유권자 관점에서 새로 출범할 윤석열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등도 함께 물었다.
-이번 대선 전부터 많은 사람이 이른바 이대남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이번 대선결과를 놓고 세대균열은 해체되고 있다고 진단했는데요. 과거 선거를 보면 승패와 관련 없이 20대는 진보를 지지하는 게 일종의 공식처럼 받아들여졌는데,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부터 20대 남성들을 중심으로 반(反)민주당 분위기가 감지됐죠. 그 경향이 이번 대선까지 이어진 것 아닐까요. 실제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과거에 민주당을 지지했다가 깊은 환멸에 빠지거나 혐오로 돌아선 사람들이 상당수 눈에 띕니다.
“일단 책에서 누차 밝힌 것처럼 세대 내의 관계를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대 내에 특정 부류 또는 집단이 다수라 가정해 그걸 세대 전체의 특성인 양 정리하다 보니 오해가 계속 쌓이는 것 같아요. 분명 청년층 내에 말씀하신 것 같은 우파적인 성향 또는 반민주당 정서를 가진 사람들의 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20대의 다수가 보수화되었다거나 점점 더 보수화되는 추세라고 단정지을 근거는 없습니다.”
-대선이 끝났으니 윤석열 정부가 일방주의적 통치를 하면 윤석열을 선택한 젊은층이 다시 진보진영으로 돌아올까요. 그러지 않을 거로 보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특히 한번 결정된 세대정치 효과는 오래 지속된다는 ‘세대정치이론’에 따르면요.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치러진 지방선거·총선·대선 때 보수투표로 완전히 넘어갔다가 다시 진보 방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윤석열 정부 이후에도 같은 현상이 그대로 반복된다고 예견하거나 단언할 수는 없겠죠. 또 일부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2030세대가 다시금 옛날처럼 진보가 다수인 방향으로 변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30세대가 다시 넘어가느냐 아니냐는 여기서 이슈가 아닙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집단들의 특성을 그 세대의 지배적인 양상으로 동일시하거나 장기적으로 지속될 어떤 구조적 필연성을 가졌다고 단언하면 오류로 판명날 가능성 또한 커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허위 일반화 오류가 굉장히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또 어떤 특정 국면의 현상을 굉장히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것으로 쉽게 단언하는 오류가 굉장히 많다는 걸 지적하고 싶습니다. 지금의 20대, 그러니까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세대의 특성을 굳이 꼽으라면 고도의 불확실성과 역동성쯤 될 겁니다. 지금 청년세대의 가장 특징적인 면이에요. 그래서 ‘반페미’랄까, ‘이대남’이라는 현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면적 주장입니다. 20대 지지율에서 이재명 후보가 윤석열 후보를 근소하게 제친 이번 대선결과를 놓고 ‘반혐오가 이겼다’는 식으로 승리 선언을 하는 것도 일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라고 저는 봐요.”
-윤석열을 지지한 20대를 실제 만나보면 정치적 효능감을 굉장히 희구하는 동시에 자신이 이 판을 결정하는 주인이 되고 싶은 욕구도 강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윤석열 당선인이 선거과정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모습을 청년층이 많이 느끼게 되면 차기 정부에 도움은 될 거라고 봐요. 그러나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처럼 권위주의적 성격을 보인다면 꽤 많은 20대들의 문화적 코드와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로 페미니즘 이슈의 폭발력입니다. 20대 사이에서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이어질 거라고 봅니다. 이 점에서 저는 20대 남성들이 모순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페미니즘과 정부의 양성평등 정책에 강력한 반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지난 몇년 동안 모든 조사에서 나타나긴 했는데 이 반감의 실체가 무엇이며 어디서 온 것인가는 아직도 모호한 구석이 많거든요. 접점을 찾아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를 모색하려는 시도가 굉장히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20대 남성들이 모순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페미니즘운동이나 단체를 반대하면서도 정작 페미니즘 이슈들에 관한 인식을 물어보면 20대 남성들은 윗세대의 남성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윗세대의 여성들보다 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거든요. 이 점에서 20대 남성들이 보이는 이중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강경한 ‘반페미’가 맞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일베’라고 부르면 그건 또 굉장히 억울해하거든요.”
-이번 대선에서 여야 모두 20~30대의 마음을 잡기 위해 총력전을 벌였습니다. 결국 민주당은 선거 막판에 ‘이대녀’의 마음을 얻었고, 윤석열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우면서 ‘이대남’을 중심으로 잃을 뻔한 20대의 지지를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 서로 갈음된 셈이라고 봐야 할까요.
“사실 전략적으로 이대남 현상을 증폭시키고 자기편으로 끌어오려는 의식적이고 전략적인 노력을 지난 보궐선거 때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민의힘’ 측이 전폭적으로 벌였음에도 마지막 결과물을 보면 48.56%를 얻어 순수한 정권교체 여론보다 낮았지요. 대선 이후에도 만약 국민의힘이 계속해서 지금의 기조를 강화해 결과적으로 민주당보다 더한 어떤 기득권층의 당이라는 인식이 굳어진다면(여기에 민주당까지 뭔가 의미 있는 쇄신의 움직임을 보인다면) 20~30대의 재진보화가 빠르게 나타날 수 있겠죠. 반대로 국민의힘이 민주당 집권 시기보다 오히려 경제적 격차 완화나 부동산 시장의 안정에 실제로 더 성과를 보인다면 청년세대의 보수화 흐름이 더 뚜렷해질 거고요.”
-사실 세대론의 문제의식은 세대 단위에서 기득권을 가진 쪽과 기득권에서 배제된 세대가 나뉜다는 관점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소위 586세대가 이 기득권을 가진 쪽이고, 제로섬게임처럼 아랫세대 특히, 청년세대는 비정규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인식인데요.
“586담론의 치명적인 문제는 범주의 혼돈입니다. ‘586세대’라는 말로 여러 단위를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오기 어려운 언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분하자면 현재의 사회적 불평등이 민주당 586 정치권의 책임이라는 주장이 하나 있고, 다음으로 민주화운동·진보세력 모두의 책임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노조까지 포함해 지식인·시민사회·정치권에 걸친 586 출생 코호트 내의 엘리트집단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넷째로 이 1960년대생 출생 코호트가 경향적으로 더 안정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았던 연령집단이라고 보고 기득권세력쯤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민주당 586 정치권과 권력화된 진보엘리트는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진보 세력 전체와 60년대 출생세대를 ‘기득권층’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에 어긋납니다.”
-1960년대생 전체가 운 좋은 세대라는 식으로 뭉뚱그려 보는 시각은 잘못되었다는 건가요.
“그렇죠. 예컨대 IMF 당시 이들의 앞세대, 산업화 세대는 임원진이라 잘렸고 뒷세대는 취직을 못 했는데 586세대만 운 좋게 위기에서 빠져나간 세대라는 식의 설명이 대표적이에요. IMF 환란이 벌어진 1990년대 하반기 당시에 어느 연령대가 많이 해고당했냐만 가지고 금융위기가 각 세대에 미친 영향을 말할 수 없거든요. 왜냐면 금융위기의 진정한 구조적 영향은 2000년 이후부터 쓰나미처럼 오는데 실제 2000년대의 세대별 경제상황을 봤더니 바로 이 1960년대 출생 세대에서 급격한 세대 내 양극화와 엄청난 불안정 계층이 양산되었다는 것이 여러 연구결과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출생세대가 운좋은 세대는 전혀 아니었다는 실증적 근거가 무수하게 있어요. 단적인 예로 지금 50대는 20대만큼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영세자영업자도 가장 많은 세대입니다.”
-정치권에선 소위 586세대 독점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아직 새 정권이 들어서지 않았으니 현재까지 여당인 민주당 정치엘리트가 한국사회 불평등에 대해 책임이 있느냐, 고 묻는다면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관련한 담론이 2019년에 크게 확산된 것은 의아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부 10년이 끝난지 2년 만의 시점에서 불평등구조를 민주당의 586 정치권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뭔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거죠. 민주당의 정치엘리트들이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심각하게 심화시킨 책임이 있는 것은 맞는데, 이점만을 지적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편향된, 균형을 갖지 못한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의 중심에 있는 양대정당 정치엘리트들이 한국사회 불평등 구조의 양상과 지속에 함께 책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둘 중 어느 한쪽만 지적하는 것은 결국 정략적인 담론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586세대라는 개념에 이미 1960년대 출생 코호트에 더해 80년대 학번이라는 특정 집단이 들어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들이 폐쇄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이너서클을 형성함으로써 기득권층화했다는 식의 비판인데요.
“소위 586세대 엘리트라고 이야기하는 고학력 중산층 집단을 한국사회의 기득권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아니면 위선적인 집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의 문제인데 저는 이 비난이 올바른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비난의 핵심은 사회적 정의나 평등·인권·복지 등과 같은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표방하나 그들의 존재 위치는 고학력 중산층으로 자가를 보유하고 자산을 축적하고, 교육으로 계층세습을 한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진보적 가치에 반하는 삶을 실제 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위선적인 집단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 이 586세대라고 하는 1960년대 출생 코호트 엘리트층은 다수가 진보가 아닙니다. 그러니 위선적이지 않고 진보를 표방하면서 기득권층의 삶을 살고 있지도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누구냐, 오히려 1970년대와 1980년대 코호트에서 고학력 엘리트집단 다수가 진보적인 가치 지향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들의 계급적 존재 위치를 중산층 화이트칼라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현상은 구조적인 정치현실의 문제이고 이 현상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에요. 토마 피케티가 이야기하는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의 대결 구도’와 같은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스티글리츠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 고학력일수록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진보정당을 찍는 경향이 있지만, 하층계급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정당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인식에서 출발한다면 결론은 계급 문제이고 정치의 문제라는 겁니다. 당연히 대안도 세대론과 달라지겠죠. 이번 대선을 보며 가진 의문은 ‘민주당도 국민의힘도, 심지어 정의당도 청년할당제는 이야기하면서 노동자할당제는 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가’라는 거였습니다. 해법도 세대교체론이 답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정치 영역에서 과소대표되고 있는 노동계급과 세입자·저소득층이 적어도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비중에 상응하는 정치적 대표성을 갖게끔 할까, 그런 방향으로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6399.html
[강준만 칼럼] 20대 남성은 정치적 선동에 놀아났나? (한겨레,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2022-03-27 15:30)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이 최근 출간한 <그런 세대는 없다: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를 읽었다. 내가 보기엔 탁월한 책이다. 저자는 정치권과 언론이 사랑하는 세대론에 정면 도전하면서 세대론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세대 간 허구적 대립을 부추기지 말고, 계급 불평등에 주목하라고 촉구한다. 나는 이 책의 주장에 대체적으로 동의하지만, ‘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자청해 꼭 생각해볼 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다. 취지엔 공감하면서도 표현이 좀 불편하게 여겨졌던 걸 몇가지 들자면 다음과 같다.
“청년들의 분노를 부채질하여 ‘내 편’으로 만드는 행동들이 정치권부터 언론과 지식인 사회에 이르기까지 두루 존재한다.” “기성세대라는 가상의 악을 만들어 청년들에게 비난의 대상을 만들어주고 청년의 편인 듯 가장하여 인기를 얻으려는 발상은….” “최근 (여러 분야의 거대권력을 쥔 자들)은 ‘청년’을 소리 높여 말함으로써 기대할 만한 이익이 많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
강한 어조로 메시지를 선명하게 하려는 뜻은 이해하지만, 세대론을 말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하는 게 문제 해결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질문을 해보는 건 어떨까. 세대론이 사라지거나 약화되면 그만큼 불평등이 주요 사회적 의제로 떠오를까? 나는 비관적이다. 그래서 불평등 문제를 포기하자는 게 아니라 한걸음 더 들어간 실천적 고민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여권이나 진보층엔 이준석을 비롯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20대 남성을 선동했으며, 20대 남성은 그런 선동에 놀아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과연 그런가? 정치인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동시에 20대 남성의 자유의지와 정치적 역량을 과소평가한 건 아닐까? 나는 <k-를 생각한다:  90년대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저자인 임명묵의 다음 견해에 동의한다.
“사실은 반대다. 일부 20대 남성이 자신들의 문제의식에 응답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주겠다고 공표하며 정치인들을 길들였다.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상황을 몰아간 것이다. 유권자가 정치인들을 뒤흔들며 통제한 셈인데, 미디어 시장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이는 ‘팬덤정치’의 메커니즘과 비슷하다. ‘침묵하는 다수’는 여론조사나 선거 때 자신의 선택을 밝히는 걸 제외하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길이 없다. 정당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전체의 1%도 안 되는 팬덤이나 열성 지지자들이다. 누가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느냐가 중요하다. 정치권과 언론이 그런 목소리에 큰 영향을 받는 걸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건 기존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언론의 작동 방식 역시 본원적 한계다. 언론은 그들이 천명한 사명과 시장에서의 생존이라는 ‘이중 구속’ 상태에 처해 있다. 시장에서의 생존이 사명을 훼손하거나 약화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에선 이런 ‘시장 저널리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총체적 대안이 있는 것 같진 않다. 전면적인 ‘언론 공영화’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시장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세대론은 풍부한 뉴스가치를 갖고 있다. 어느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대 담론은 쉽고 재밌다.” 어디 그뿐인가. 절박한 ‘피해자’들도 있다. 학자들은 계급의 문제를 들어 그런 세대론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지만, 저널리즘은 목소리에 민감하다. 주요 뉴스가치 중의 하나인 ‘중요성’은 국가적 중요성이라기보다는 언론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중요성을 의미한다. 대학과 더불어 부동산이 절대적 뉴스가치를 갖는 걸 보라.
반면 불평등은 뉴스가치가 약하다. 불평등은 주로 ‘사건’이나 ‘사고’의 관점에서 다뤄진다. 큰 사건이나 사고가 터질 때에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될 뿐이다. 이는 인구의 절반이 사는 지방이 평소 언론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불평등의 뉴스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데, 이는 학계의 도움이 필요하다.
불평등 문제를 다룬 좋은 논문들이 많지만, 이는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학자들도 ‘언론플레이’를 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자신의 논문을 알리려고 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고작 수십에서 수백명의 학자들이 읽고 끝나는 논문으로 사장되고 만다. 나는 관련 학계가 언론홍보를 전담하는 분과위원회를 두기를 제안한다. 언론이 좋아하는 뉴스가치 중심으로 쉬운 보도자료를 작성해 언론과 정치권이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자는 것이다. 이게 진정한 산학협력이 아닐까?
 
https://view.asiae.co.kr/article/2022033107190103733
[빵 굽는 타자기] 돌아보자, '세대론' 아래 감춰진 것들을 (아시아경제 박준이 기자, 2022.04.01 09:10)
문제는 세대가 아닌 계층이다
"너도 혹시 MZ(MZ세대)니?" 사회생활을 하는 20~30대라면 누구든 한 번쯤 들어본 말일 것이다. ‘MZ세대’, ‘이대남’ ‘이대녀’ ‘586세대’. 세대를 통칭하는 단어들이 유행처럼 번진 지 오래다. 이러한 수식어에는 대개 부정적인 말이 따라붙곤 한다. ‘OO세대는 원래 그래’ 따위의 말들이다.
‘그런 세대는 없다’의 저자인 신진욱 교수는 이와 같은 지점을 정밀하게 파고든다. ‘원래 그런’ 세대는 없다는 것이다. 흔히들 5060세대를 기득권 계층으로 규정하고, 고도 성장기에 태어나 지금의 청년 세대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세대’를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정치권, 기업 임원진 등 고위직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능력주의적 공정성에 찬성한다는 청년들의 특성도 청년층 전반이 아닌 능력주의 체제에서 승자가 된 일부 계층의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사회는 끊임없이 세대 갈등에 주목한다. 세대론은 언론과 정치권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기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도 다수의 정치인들이 ‘2030’을 외치며 저마다 생각하는 청년들을 위한 소구 전략을 펼쳤다. 어떤 이는 여성 이슈를 공략하고 또 다른 이는 게임과 공정 이슈를 건드리는 식이다. 심지어 한 정치인은 ‘세대 포위론’을 꺼내 들면서 특정 세대에 편중된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 언론에서도 ‘MZ 세대’ 기획 기사는 단골 소재였다. 이러한 가운데 세대 문제, 젠더 문제가 대선 최대 화두로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늘 세대의 문제로 규정되는 것들은 각 세대 구성원들의 현실과 거리가 멀다. 심지어 세대론이 부각될수록 진짜 문제들을 밀려나게 만든다. 예컨대 모든 청년세대가 능력주의와 공정에 가장 관심이 많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원하는 게 아니다. 어떤 청년의 삶 앞에 놓여있는 걱정들은 당장 집 한 칸 마련할 수 있을지, 아이를 키우려면 얼마만큼의 비용이 들지와 같은 것들이다. 중년세대 역시 모든 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의 확대 재생산에 관심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는 당장 오늘 때워야 할 끼니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세대가 아닌 계층에 있다. 20대나, 40대나, 60대나 불평등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료 시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세대론이 강조될수록 기득권 집단에 쏠린 막대한 이익과 계층 간 격차는 보이지 않는다. 특정 세대를 공공의 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민간연구소인 LAB2050 연구진이 부동산 자산계층을 분석한 결과 자산 상위 30% 사람들이 60대 이상에서는 79.62%의 자산을 점하고 있는데 30대 역시 상위 20%가 83.31%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연령대에서 부동산 자산 집중도가 높다는 것이다. ‘5060세대가 기득권층’이라는 인식은 성립될 수 없다.
정치권과 언론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금 시점에서 ‘세대론’을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회가 각 세대 구성원이 갖고 있는 복잡한 특성을 들여다보려 하기보다는, 다소 간명하고 얄팍한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삶의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직면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그런 세대는 없다 | 신진욱 지음 | 개마고원 | 400쪽 | 2만원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7633.html
[세상읽기] 참을 수 없는 권력의 가벼움 (한겨레, 신진욱|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2022-04-05 16:38)
강준만 교수는 지난달 28일치 ‘20대 남성은 정치적 선동에 놀아났나?’라는 제목의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최근 출간된 나의 저서인 <그런 세대는 없다>에 대한 논평과 더불어 중요한 토론거리들을 제안했다. 서두에서 “몇가지 꼭 생각해볼 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다”는 대목을 읽으며 나는 이미 그의 사유를 동행하기 시작했으며, 왜곡된 세대론의 비판에서 “한걸음 더 들어간 실천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이 자리에서 논의를 진전시켜보려 한다.
첫째, 강준만 교수는 열성적 정치관여층의 점증하는 영향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20대 남성이 보수정치권의 선동에 놀아난 게 아니라, 활동적인 일부 20대 남성들이 정치권을 움직인 것이라는 해석이다. 문제의식에 동의한다. 나는 2000년대 한국 정치의 핵심이 시민들의 정치적 행동주의와 그에 따른 정당-시민정치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라고 주장해왔다. 이것이 이번 저서에서 정치 관련 주장의 핵심이었고, 다음 저서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현상은 ‘20대 남성’이라는 특정 세대에 국한되지 않으며, ‘1%’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노사모’ ‘박사모’ ‘문프’ ‘개딸’ ‘건사랑’ 등 각종 정치팬덤, 유권자의 20%에 이르게 된 당원 수 급증 등 최근 경향은 정당정치의 환경을 크게 바꿔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참여 행동들이 거대 양당 대결 구도의 구조적 틀 안에서 작동하며, 대통령에 대한 지지 또는 비토를 핵심으로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도권력의 책임이 그만큼 무거운 것이다.
둘째, 언론이 시장성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이슈의 상품성을 좇게 되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세대론은 풍부한 뉴스 가치를 갖고 있지만 불평등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공감이 되는 고민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식을 더 밀고 나가서, 이슈들의 뉴스 가치를 결정하고 변화시키는 환경 요인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 세대론 자체에 높은 뉴스 가치가 내재된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에서 그것이 상품이 된다.
일례로 나의 분석 결과는 세대갈등론이 항상 뉴스거리였던 것이 아니라 2015년에 폭증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박근혜 정부가 노동자 해고 요건을 완화하고 성과 압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를 ‘청년 비정규직’ 대책으로 포장한 결과였다. 2019년의 세대불평등론의 폭발 때도 일부 보수언론과 경제신문이 열광적으로 소비한 데 반해, 진보언론이나 <동아일보> 등은 달랐다. 무엇이 뉴스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상이한 접근들의 경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 궁극적으로 우리는 불평등 문제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의 관심을 어떻게 촉발할 것인가라는 묵직한 화두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의 문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단해보자면, 나는 현시점의 문제가 불평등 이슈 자체에 대한 무관심이라기보다는 그것의 잘못된 이슈화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불평등은 언제부턴가 ‘장사가 되는’ 이슈가 되었다. 사람들의 즉각적인 분노와 몰입, 감정적 동일시를 끌어내는 데에 이만한 소재가 없다. 문제는 그것의 내실이다.
‘불평등’ ‘불공정’ ‘공정성’ 같은 이슈들은 최근 몇년 사이에 정치공방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고 신문지면을 뒤덮는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담론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고, 중년의 임금생활자들을 해고하고, 저성과자의 고용안정을 위협하는 것을 정당화한다는 사실이 지금 상황의 주목할 만한 새로움이다. 이제는 정치권, 언론, 기업 등 제도권력이 불평등이라는 이슈까지도 자신들의 맥락 안으로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나의 책의 전반부에서 각 세대 내의 불평등 현실과 한국 사회 상층계급의 범세대적 구성을 보여줬다면, 책의 후반부에서 궁극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계급불평등 현실을 은닉하고 왜곡하는 담론권력의 헤게모니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였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정치·경제·문화권력을 가진 집단들이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 의제를 설정할 수 있는 강력한 자원을 가지고 있고, 그만큼 무거운 책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의 권력층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 현실을 대하는 방식은 참을 수 없이 가볍기만 하다. 이 현실을 바꾸는 주체적 담론정치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289
“페미니즘 정치와 계급 정치 연계시킬 토양 탄탄하게 존재한다” (시사IN 761호, 김은지 기자, 2022.04.21 05:43)
“‘잘못된 세대론’과 ‘세대론’은 다르다. 세대적 관점은 중요하다.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는 젊은 집단을 눈여겨보고 있다. 새로운 정치세력이 윤석열 정부 5년을 겪으면서 등장하기를 고대한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과)는 정치사회학자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동력을 발 빠르게 포착해 그것의 사회적 의미를 분석해왔다.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2006년, 해당 집단에서 나온 관련 문건들을 수집해 논문을 썼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때는 새벽 2~3시까지 시위에 참여·관찰하며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손팻말 등의 문구를 모아 분석하기도 했다. 2014년 ‘일베’의 폭식투쟁, 2016년 박근혜 탄핵 집회, 2019년 ‘조국 사태’ 등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건의 담론 구조를 파헤치며 ‘현상 너머’를 살핀 연구 논문을 다수 내놓았다.
그런 신진욱 교수가 지난 20대 대선 직전 대중서인 〈그런 세대는 없다〉를 펴냈다. ‘기득권 기성세대’ ‘운 좋은 586 세대’ ‘희생자 청년세대’ 등의 ‘납작한 세대론’이 잘못되었다는 진단이다. ‘잘못된 세대론’이 가린 불평등의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하며, 지금 불거지는 세대론에서 대표되는 청년은 누구인지 묻고 있다. ‘기성세대는 기득권층인가’ ‘어느 청년의 공정인가’ ‘누가 왜 청년을 말하나’ 등과 같은 질문은, 관습적으로 쉬이 받아들이던 이야기에 균열을 낸다. 4월6일 서울 중앙대 캠퍼스에서 신 교수를 만나 책에서 비판한 ‘잘못된 세대론’과 이번 대선 결과 해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어떻게 집필하게 된 책인가?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책의 맨 앞에서부터 ‘나는 세대의 차이 내지는 세대적 관점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서평이나 기사가 잘못 나간 게 여럿 있다. 가끔 ‘세대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해하시는 분이 있는데, 아니다. ‘잘못된 세대론’과 ‘세대론’은 완전 다르다. 이번 책은 세대적 관점 자체에 대한 비판서가 아니다.
- ‘왜곡된 세대론 비판’의 계기는?
2019년 조국 사태를 전후해 ‘세대 불평등 담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86세대·베이비붐 세대 때문에 청년세대에 기회가 없어졌다는 유의 얘기다. 그러나 당시 통계를 보면 50대 비정규직 비율이 20대 못지않게 높다. 30대의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낮았다. (당시의 세대 불평등 담론은) 허구적 담론이었다. 이런 담론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기득권 기성세대로 불리는 연령대의 절대다수가 겪는 불평등의 현실을 보이지 않게 한다. 또한 2030 세대 내의 사회경제적 양극화 역시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각 세대의 불평등 조건과 양상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해야만 변화된 불평등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관련 논문을 썼고, 그걸 본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래서 이 책의 출발은 2019년 담론 분석이었다. 이후 세대 담론이 점점 더 정치화·상업화되면서 집필 프로젝트 자체가 확대되었다.
- ‘불평등을 못 보게 만드는 세대에 대한 관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를 들어 ‘지금 청년들이 집을 사기 위해 영끌한다’는 말을 보자. ‘영끌’은 중산층 청년 집단의 행위다. 부모 자산과 자기 소득이 충분한 청년 계층은 영끌을 안 해도 된다. 부모 자산도 자기 소득도 적은 집단은 자기 집을 구매할 엄두를 못 낸다. 목돈이 생기면 기껏해야 주식 투자를 한다. 저소득층은 그것도 못 한다. 투자라는 개념이 없다. 생계비 마련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청년층이 30% 가까이 된다. 그런데 ‘지금 청년은 영끌한다’라고 말하는 순간, 영끌할 필요가 없는 상층 청년과 영끌조차 상상할 수 없는 하층 청년의 삶이 보이지 않게 된다. 실제 존재하는 사회집단을 배제한다. 담론의 권력 효과다. 이것이 잘못된 세대론을 만들어낸다.
- 그럼 세대를 어떻게 봐야 하나?
세대라는 개념을 하나의 관계로 보면 된다. 세대 연구의 대가 카를 만하임의 말이다. 세대는 생물학적 위치 자체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세대 내의 관계를 잘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현재 페미니즘 이슈가 가장 만하임적 현상이다. 그 세대의 구성원들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라는 차원이다. 지금 청년층은 다른 어느 세대보다 페미니즘 이슈로 논쟁하고 연결된다. 문화적 측면에서 페미니즘을 둘러싼 갈등이 이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동시에 불평등의 사회구조를 청년기부터 겪었다. 이것이 이 세대 내의 계층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 이번 대선에서 세대에 따른 젠더 투표 경향이 일어났다고 보는지?
청년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몇 가지를 좀 더 눈여겨봤으면 한다. 첫 번째, 이번 대선이나 지난해 서울 보궐선거가 아니라 2016년 총선에서부터 조금씩 나타난 현상이다. 두 번째, 지금 20대에서는 남녀 간의 정당 지지도 차이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 복지, 노동, 심지어는 외교안보 영역에 대한 태도 차이까지 보인다. 사실상 거의 모든 의제에 연동돼 있다. 〈시사IN〉 ‘20대 여자 현상’ 기사(〈시사IN〉 제728호 커버스토리 “20대 여자 현상-약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차별받고 있다” 참조)처럼, 페미니즘에 우호적 태도를 갖는 여성들은 다른 모든 이슈에서도 약하지 않은 진보 성향을 보인다. 20대 여성들이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매개로 다른 모든 종류의 불평등에 대한 상상력과 공감 능력을 획득한 게 아니냐는 게 내 가설이다. 이 이야기로 이른바 ‘이대남’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웃음). 그렇기에 이번 대선 결과를 정당 지지도만 놓고 이야기하면 빙산의 아랫부분을 못 보게 된다. 선거 정치의 현상은 빙산의 일각이다. 빙산 아래에서 페미니즘과 여타 노동·복지 등 이슈와 소수자 의제 등이 다 연결돼 있다. 이른바 낸시 프레이저가 제기한 ‘분배 정치냐, 정체성의 정치냐’ 같은 논쟁과 관련된 부분이다. 이론적으로는 분배 정치와 정체성의 정치가 다르지만, 한국 청년층의 구체적 현실에서는 양자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게 내 입장이다.
- 이번 대선에서 청년층 내 계급이나 불평등 이슈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 같다.
청년만이 아니라 전 세대에서 계급 균열은 약하게 나타났다. 정당들도 선거 이슈로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 계급적 관점에서 상당히 주목할 만한 측면이 하나 있다. 국민의힘 선거 전략은 20대 남성 내 강한 반(反)페미니즘 정서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강한 반페미니즘 정서를 증폭시키면서 ‘혐중-반북-혐진보’로까지 프레임의 연계·증폭·확장을 적극 시도했다. 일정 부분 성공하기도 했다.
- 정치권이 20대 남성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일부 20대 남성이 오히려 정치인을 길들였다”라는 주장도 있다.
세대론의 프레임 안에서 현실을 보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20대가 뭔가 특별하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청년층이 그런 행동주의를 통해서 정치를 움직이고자 하는 욕구와 일정한 정도의 역량을 갖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중년은 중년대로 노년은 노년대로, 각 세대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도 정치 행위자들의 행동과 역학에 영향을 강력하게 미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다. 2000년대 와서 더 폭넓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금의 40대는 20~30대이던 시절 촛불 시위를 벌였다. 지금의 노년층은 주로 카카오톡과 유튜브로 자신들의 고유한 정치 담론과 주류의 여론을 만들어가려 한다. 20대 혹은 소위 ‘이대남’이 특별하다는 생각은 2000년대 한국 정치의 거대한 흐름의 지엽적인 세대 현상을 과장하는 것이다.
- 국민의힘의 반페미니즘 행보에 대한 다른 당의 대응은 어떻게 봤나?
민주당·정의당은 여성혐오 정치에 대한 대응을 페미니즘적인 가치 표방 하나로 밀고 나갔다. 앞서 말한 것처럼 페미니즘에 공감대를 갖는 젊은 여성들이라면, 많은 경우 동시에 복지나 노동·불평등 등의 이슈에서도 진보적 태도를 취한다. 이런 토양이 있다. 그런데 정치 행위자들은 이를 하나의 연계된 프레임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2030 여성 및 그들과 유사한 문화적 성향을 갖는 20대 남성을 연계시킬 수 있는 여러 의제 영역을 죽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정체성의 정치’와 ‘분배 정치’ 내지는 ‘페미니즘 정치’와 ‘계급 정치’를 연계시킬 수 있는 사회·문화적 토양은 지금 상당히 탄탄하게 존재한다. 다만, 그것을 정치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정치권이 한계를 보였다. 편협한 계급론자들과 ‘계급정치냐, 페미니즘이냐’ 혹은 ‘분배냐 정체성’이냐 같은 허구적인 논쟁을 할 것이 아니다.
- 선거에 패한 정당들이 복기해야 할 부분 같다.
페미니즘적 가치와 노동계급의 이슈들을 연계시킨다는 게 한국 진보 정치의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뭘 의미하는지 보자. 구좌파·구진보의 중심 이슈였던 분배·노동 등과 신좌파·신진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페미니즘·소수자·기후위기 이슈가 있다. 여기에 많은 사람의 오해가 있다고 본다. 젊은 세대는 신좌파의 이슈, 나이 든 세대는 구좌파의 이슈만 소비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진보 성향을 보이는 젊은 세대 집단 중에 다수는 구진보의 기준에서도 진보적 지향이 강하다. 그렇게 보면 나이 든 진보들이 새로운 가치 이슈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한다는 게 숙제다.
- ‘진보 정치의 재구성’은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정권교체 될 때도 나왔던 말이다.
당시와 지금 상황이 여러 맥락에서 유사성이 있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권이 집권했다. 둘 다(노무현·문재인 정부) 뚜렷한 세대 균열을 통해 집권했다. 그 세대 균열이 이념적·가치 균열과 간접적이지만 연관성이 있었다. 젊은 층이 문화적으로 더 진보적·개방적이고 이념적으로도 더 진보적이었다. 세대·이념·가치가 어느 정도 느슨하게 연결돼 있는 흐름을 타고 진보를 표방하는 정권이 집권했지만, 젊은 층으로 대표되는 지지 기반을 급격히 상실하면서 정권을 잃어버렸다. 이 같은 패턴이 두 번 반복됐고, 사실상 같은 세력이 겪은 일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곱씹어야 한다. ‘진보의 혁신·재구성’에 대해 노무현 정부 이후인 2008~2009년 일시적으로 토론이 있었다. 그때 논문도 쓰고 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정치적으로 퇴행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진보 진영의 정치적인 상상력 자체가 같이 퇴행했다. 진보 진영이 노무현 정부 때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자기성찰의 계기를 잃어버린 측면이 있다.
- 진보의 퇴행이 윤석열 정부에서도 나타날 수 있지 않나?
그런 우려를 갖고 있다. 적대적 공존의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한국 정치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그때와는 정말 달라야 한다. 두 번(노무현·문재인 정부의 정권교체) 다 대단히 유사한 패턴으로 실패했다. 그럼 이 시점에서 두 번의 경험 이후 진보가 어떤 방향에서 변하고 성찰해야 할 것인지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
- 어떻게 해야 할까?
‘엘리트 순환론’이 현재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설명하는 바가 많다. 폐쇄적인 권력순환 구조를 균열 낼 외적 충격이 제도적으로 필요하다. 정치학의 오래된 화두로 ‘제도가 먼저냐, 행위가 먼저냐’가 있다. 정치제도를 바꿔야 정치 현실이 바뀐다는 주장의 문제점은, 정치제도를 바꾸기가 매우 힘들다는 데 있다. 정치 행위자의 절대다수로부터 지지를 얻어내야 제도를 바꿀 수 있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이른바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시도가 결국 누더기 제도로 끝나버리지 않았나. 다수의 기득권 정치세력이 자신들을 기득권층으로 만들어준 제도를 바꾸는 데 강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제도가 바뀌어야 정치 행위도 바뀐다는 주장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을 주목한다. 지금 대략 20대에서 40대 초반까지 연령층에 우리 사회의 리더층이 흩어져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시민사회, 정치·행정·기업 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는 젊은 집단을 눈여겨보고 있다. 기성 정치집단과 그에 충성하는 유권자 집단으로부터 한국 정치가 한 단계 더 발전할 가능성을 찾기는 힘들 거다. 새로운 정치세력이 윤석열 정부 5년을 겪으면서 등장할 수 있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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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33480.html
‘기성세대 대 청년’이라는 허구적 대립 (한겨레, 안선희 기자, 2022-03-04 04:59)
기득권으로 모는 50대 다수는 노동자·자영업자
청년 내에서도 양극화 심화하며 격차 벌어져
세대 불평등 아닌 계층 불평등이 진짜 문제
그런 세대는 없다: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
신진욱 지음 l 개마고원 l 2만원
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272/391/imgdb/original/2022/0303/20220303504366.jpg
바야흐로 세대론의 전성시대다. 586, 기성세대, 베이비붐 세대, 2030, 엠제트(MZ)세대, 이대남 등 세대를 일컫는 각종 표현이 난무하고,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연령대별’ 득표 전략을 세우기에 여념이 없다. 특히 두드러지는 현상은 ‘각종 기득권을 누리는 기성세대’에 대한 매서운 질타와 ‘온갖 어려움을 견뎌 나가는 청년세대’에 대한 연민 어린 눈길이다. 이 두 세대를 대립시키면서 기성세대의 ‘반성’과 ‘양보’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선뜻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런 대립구도는 정말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을까? 이런 담론은 누가 주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집단은 누구일까?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지은이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성세대 대 청년’이라는 세대불평등 담론의 허구성을 각종 실증 자료를 동원해 파헤친다. 이와 함께 세대담론의 기원과 역사를 추적하고, 정치적·실천적 함의를 분석한다. 그동안에도 세대담론에 대한 비판은 공론장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지만, 이번 저서는 이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종합판’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기득권 기성세대’ ‘희생자 청년세대’ 등으로 총칭될 수 있을 만큼 동일한 속성을 가진 세대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세대라 할지라도 현저히 차이 나는 소득과 자산, 고용형태 등을 가진 상이한 계층들로 나눠진다. “이 불평등의 시대에 세대는 더욱더 계급계층으로 갈라지고 있으며 그만큼 더 동질적인 집단으로 간주될 수 없다.”
먼저 기성세대, 특히 이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흔히 ‘586세대’라고도 불리는 50대를 살펴보자. 이들은 ‘좋은 시절’에 태어나 쉽게 취직하고 사회에서 안정된 자리를 차지한 “꿀 빨아 먹은” 세대라는 식의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에 학령인구 중 대학 취학률은 20%, 4년제 대학 취학률은 13%에 그쳤다. 현재 50대 취업자의 70%가 서비스·판매직, 기능·기계조작직, 단순노무직에 종사하고 있다. 자영업자 중 28%가 50대다. 50대의 다수는 노동자와 자영업자인 것이다. ‘청년 일자리를 빼앗는 주범’이라는 식의 비난을 받는 ‘50대 대기업 정규직 노조원’의 비중은 전체 취업자의 0.7%에 불과하다. 결국 “지금 ‘기성세대’의 다수는 자식 세대를 위해 뭔가 양보하고 내려놓을 기득권이라는 걸 가진 사람이 아니다.”
청년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을, 대학을 나와도 취직의 기회가 없고 결혼과 출산마저 포기해야 하는 불행한 세대라고, 또는 능력주의와 경쟁주의를 신봉하고 반페미니즘 성향을 가진 ‘이대남’이라고 한꺼번에 싸잡아 말하는 것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최근 청년세대는 양극화가 점차 심화하고 있다. 소득·고용·사회보장의 세 측면에서 청년세대 내의 양극화 추이를 추적한 연구를 보면 2002년에는 ‘모두 불안정한’ 계층이 19%였지만, 2020년에는 29%까지 늘어났다. ‘모두 안정적인’ 계층 역시 증가했으며 그 사이에 놓인 중간계층은 줄어들었다. 청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월 임금총액 평균은 2017년 기준 각각 214만원과 127만원으로 갑절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런 상황은 지금 문제의 핵심이 청년세대 전반의 불안정화라기보다는 청년세대 내의 심각한 격차라는 것을 말해준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또 한 측면은 이 격차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연동돼 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부모보다 자식이 가난해진 시대’ 같은 담론이 유행하면서 세대 간 불평등이 문제인 것처럼 주장되고 있지만, 실제 현실의 문제는 ‘부자 부모 아래 부자 자식’ ‘가난한 부모 아래 가난한 자식’이라는 계층 간 불평등이다.
청년세대의 인식세계 역시 단일하지 않고 학력과 학벌, 계층,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등에 따라 큰 차이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학력·학벌이 높을수록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더 많은 몫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의 능력은 대학입시, 취업시험 등 시험 성적을 보면 알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은 공정하다’ 등의 문항에 동의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 누가, 왜 이런 세대담론들을 만들고 확산시키는가? 세대불평등론은, 청년들의 취업난, 비정규직 문제 등은 기성세대가 과도하게 자원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중장년 노동자의 고용, 임금, 조직을 약화시켜야 해결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구사한다. 이 프레임 안에서는 기업, 재벌, 고용주 등의 책임은 사라진다. 일하는 사람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책은 말해지지 않는다. 보수진영과 경영단체가 세대불평등론을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박근혜 정부가 노동자 해고 요건 완화 등 소위 ‘노동개혁’을 추진하던 시기 세대불평등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상대 정치 진영을 분노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청년의 적’으로 공격하는 정치권 역시 세대담론의 재생산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주요한 불평등이 세대 간에 발생하고 있다는 담론의 득세는 세대를 가로지르는 불평등의 실태를 정확하게 보고 그에 대한 실질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지은이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각 세대의 고통의 경중을 저울질하면서 청년들이 더 아픈지, 노인들이 더 아픈지를 따지며 세대와 세대를 비교하기를 멈추어야 한다”며 “가해자 세대와 피해자 세대, 착취하는 세대와 착취당하는 세대, 운 좋은 세대와 불운한 세대를 나누는 일은 경험적으로 사실이 아닐뿐더러 정책적으로 무익하고 윤리적으로도 문제적”이라고 강조한다.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203042035025
‘이대남·이대녀·MZ·586…’ 나누고 묶지 말라, 세대담론은 허상이다 (경향, 백승찬 기자, 2022.03.04 20:35)
그런 세대는 없다 | 신진욱 지음 | 개마고원 | 400쪽 | 2만원
업계 종사자로서 고백하자면, 미디어는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집단이나 사건에 이름을 붙여 대중의 이목을 끌고 사안을 쉽게 푸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복잡한 사안이 지나치게 단순하게 축소되거나, 심지어 본질이 왜곡되기도 한다. 요즘 특히 유행하는 세대론도 그중 하나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가 세대론의 허상을 짚었다. 동시대를 사는 시민들이 구조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동질한 집단이라 보기도 어렵다. 가령 산업재해 위험 속에 일하는 비정규직 청년과 가상통화 투자로 거액을 번 청년이 비슷한 생각을 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산재 사망 청년노동자를 추모하며 이 같은 체제를 만들어낸 586을 비판하곤 하지만, 기성세대인 이 청년의 부모 역시 산재에 위협받는 노동자일 수 있다는 사실은 망각된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이른바 ‘이대남’ ‘이대녀’의 표심이 판세를 가를 것이라는 분석도 횡행하지만, 저자는 이 같은 세대정치는 “세대별 유권자 성향의 수동적인 반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치적 기획”이라고 지적한다. 20대 유권자가 최근 보수 투표 성향을 보이는 것은 2000년대 유권자 정치에서 초유의 사건도 아니며, 오히려 최근 한국 유권자들은 계급투표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근래 연구 결과다.
저자의 주장은 “불평등 시대에 세대는 더 계급 계층으로 갈라지고 있으며 그만큼 더 동질적인 집단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586은 기득권이다’ ‘MZ세대는 경쟁을 당연시한다’ ‘2030은 불평등 구조의 피해자다’라는 세대론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한국의 불평등 사회에서 모든 세대 내에 깊은 경제적 계층격차와 그에 따른 정신세계의 괴리가 발생했다”는 결론 내린다.
 
http://www.lecturer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662
[강사의 서재] “오도된 세대담론의 오류과 왜곡을 풀다” 신진욱의 신간 『그런 세대는 없다』 (한국강사신문, 김지영 기자, 2022.03.12 14:05)
‘세대’와 ‘정치’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유권자들의 관심이 큰 만큼, 이 책에서 저자는 세대정치 현상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며 현재 2030세대의 정치적 유동성이 노무현 정권 후반기와 유사한 국면임도 보여준다.
나아가 각종 세대담론들이 박근혜 노동개혁, 조국 사태, 최근 보궐선거 및 대선 등 정치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음을 규명함으로써 세대담론의 정치적 측면을 보다 적확히 이해하도록 해준다. 나와 다른 시대에 나고 자란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생애와 현실을 알고자 하는 관심이, 따라서 세대론 자체가 문제이거나 한 건 전혀 아니다.
특정 세대를 안정/불안정, 가해/피해, 착취/피착취 식으로 갈라놓는 세대불평등론으로는 정작 각 세대 내에서 교육, 직업, 고용, 자산 등의 부문별로 한층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와 불평등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되므로 문제인 것이다. 결국 그런 담론의 허구성을 실증적으로 밝힘으로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려는 것이 이 책의 일차적 목표인 셈이다.
오도된 세대담론의 오류과 왜곡
‘기성세대의 기득권에 희생당하는 청년세대’라는 식으로 ‘세대 간 불평등’을 강조하는 주장에 과연 타당성이 있는지를 저자는 수많은 실증자료를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이고 있다. 우선, 많은 주목과 호응을 받으며 그런 세대선정주의에 단단한 버팀목 노릇을 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몇 가지 통념을 보자.
- 586세대는 당시 대학만 나오면 쉽게 취직했다: 그러나 이 ‘억세게 운좋은’ 사람들은 그 세대 내의 극히 일부라는 점은 곧잘 잊힌다. 80년대 학령인구 중 4년제 대학 취학률은 13%, 즉 1960년대생인 현재의 50대들 가운데 당시 대학에 간 사람은 10명중 1명 남짓. 따라서 실상은, 그때는 대졸 여부에 따른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컸긴 하지만 세대 내 다수는 비대졸자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세대 전체가 그러한 양 허위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다.
- 청년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주로 저임금 판매서비스직에 종사하고 있다: 이 직업군에 청년 저임금노동자가 집중되어 있는 건 맞지만, 한편으로 사무전문직 종사자의 비율을 보면 30대(31%), 15~29세(27%), 40대(25%)로 전문직은 20~40대의 직업이란 점 역시 같이 봐야 한다.
청년세대의 직업 구성은 “한편에 저임금 서비스·판매직 노동자, 다른 한편에 고학력 사무·전문직 종사자가 대단히 많은 반분 구조”인 것이다. 게다가 880만 청년의 일자리 빼앗는 주범이란 ‘50대 기득권 노조원’도 실상은 그들이 전체 취업자의 0.7%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매우 과장된 담론이 아닐 수 없다.
- 기성세대는 부동산으로 쉽게 돈 번 안정계층이다: 기성세대는 대부분 안정계층이고 청년세대엔 불안정계층만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키는 주장으로, 고소득 청년의 존재를 망각하게 한다. 오히려 이 문제의 핵심은 ‘부와 지위의 세대 간 이전’에 있으며, “어떤 세대가 안정계층이고 다른 세대가 불안정계층인 게 아니라, 안정계층의 부모자식과 불안정계층의 부모자식이 있으며, 이 문제가 청년세대에 와서 더 심각해졌다”는 데 있다.
저자 신진욱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2005년부터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베를린자유대와 오스트리아 그라츠대에서 방문교수를 지냈으며 알렉산더 폰 훔볼트 펠로우, 한국사회정책학회 부회장, DAAD독일유럽연구센터장을 역임했다. 민주주의, 정치담론, 사회운동, 불평등과 복지정치 등의 연구 분야에서 10여 권의 저서와 70여 편의 논문을 출간했다.
주요 저서로 <한국의 근대화와 시민사회>, <시민>, <다중격차, 한국사회 불평등 구조>(공저), <한국에서 불평등 심화와 그 영향>(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등이 있다. 최근에는 불평등의 정치적 원인과 결과, 사회적 약자의 임파워먼트, 21세기 사회운동과 거버넌스 변화에 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 저서로는 『그런 세대는 없다: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개마고원, 2022.02.28.)』가 있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86041
그런 세대는 없다 (교수신문, 최승우 기자, 2022.03.14 11:57)
신진욱 지음 | 개마고원 | 400쪽
세대선정주의: ‘기득권 기성세대’ vs ‘불안정 청년세대’
역대 그 어떤 선거와도 달리, 유독 이번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온갖 ‘세대’가 호출되고 수다한 ‘세대담론’이 쏟아졌다. 이는 물론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그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노력의 하나로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그중 특히 많이 불려나온 두 특정 세대(586/86 ‘기성세대’, 2030/MZ ‘청년세대’)는 서로 뒤얽히면서 ‘운빨 좋은 기성세대의 사다리 걷어차기와 그에 희생되는 청년세대’ 같은 유의 프레임까지 만들어졌다. 관련한 언론 기사 제목들만 봐도「불평등사회, 86세대에 책임을 묻다」「86세대 기득권 이제 양보해야 할 때」「586과 민노총 결탁, 젊은 세대 비정규직 내몰아」「청년들 힘든 삶에 책임지지 않는 586세대의 위선」「민주화세대, 86세대의 집합적 부도덕과 윤리 파탄」… 대개 이런 식이다.
그렇다면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 끼여 스물네 살 비정규 노동자 김용균씨가, 평택항 부두에서 컨테이너에 깔려 스물세 살 알바생 이선호씨가 사망했을 때, 이런 안타까운 청년들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그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묻게 되는 건 자연스런 수순인 듯 보인다. 하지만 이런 세대담론의 가해-피해 대립항은 뭔가 이상하다. 김용균씨의 어머니도 노동자이며, 이선호씨의 아버지도 아들과 같은 일터에서 일하던 노동자로, 이들이 이른바 그 기성세대 아닌가. 한국의 산재사망자는 해마다 2000명을 웃도는데, 그 70%가 나이 50대 이상의 노동자로, 바로 그 기성세대다. 최악의 산재사망률을 보이는 한국의 현실이 특정 세대만의 고통이 아닐진대, 그렇게 세대불평등론으로 불려나오는 순간 중년과 노년의 마찬가지 고통은 주목되고 포착되어야 할 삶의 현실에서 배제되고 만다.
청년들의 어려움을 말하기 위해 다른 세대의 인생이 짊어진 무게를 폄훼하거나 심지어 기득권층으로 만들 필요는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가해자 세대와 피해자 세대, 착취하는 세대와 착취당하는 세대, 운좋은 세대와 불운한 세대를 나누는 일은 경험적으로 사실이 아닐뿐더러 정책적으로 무익하고, 윤리적으로도 문제적이다. -본문 352쪽
오도된 세대담론의 오류과 왜곡
‘기성세대의 기득권에 희생당하는 청년세대’라는 식으로 ‘세대 간 불평등’을 강조하는 주장에 과연 타당성이 있는지를 저자는 수많은 실증자료를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이고 있다. 우선, 많은 주목과 호응을 받으며 그런 세대선정주의에 단단한 버팀목 노릇을 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몇 가지 통념을 보자.
- 586세대는 당시 대학만 나오면 쉽게 취직했다: 그러나 이 ‘억세게 운좋은’ 사람들은 그 세대 내의 극히 일부라는 점은 곧잘 잊힌다. 80년대 학령인구 중 4년제 대학 취학률은 13%, 즉 1960년대생인 현재의 50대들 가운데 당시 대학에 간 사람은 10명중 1명 남짓. 따라서 실상은, 그때는 대졸 여부에 따른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컸긴 하지만 세대 내 다수는 비대졸자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세대 전체가 그러한 양 허위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다.
- 청년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주로 저임금 판매서비스직에 종사하고 있다: 이 직업군에 청년 저임금노동자가 집중되어 있는 건 맞지만, 한편으로 사무전문직 종사자의 비율을 보면 30대(31%), 15~29세(27%), 40대(25%)로 전문직은 20~40대의 직업이란 점 역시 같이 봐야 한다. 청년세대의 직업 구성은 “한편에 저임금 서비스·판매직 노동자, 다른 한편에 고학력 사무·전문직 종사자가 대단히 많은 반분 구조”인 것이다. 게다가 880만 청년의 일자리 빼앗는 주범이란 ‘50대 기득권 노조원’도 실상은 그들이 전체 취업자의 0.7%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매우 과장된 담론이 아닐 수 없다.
- 기성세대는 부동산으로 쉽게 돈 번 안정계층이다: 기성세대는 대부분 안정계층이고 청년세대엔 불안정계층만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키는 주장으로, 고소득 청년의 존재를 망각하게 한다. 오히려 이 문제의 핵심은 ‘부와 지위의 세대 간 이전’에 있으며, “어떤 세대가 안정계층이고 다른 세대가 불안정계층인 게 아니라, 안정계층의 부모자식과 불안정계층의 부모자식이 있으며, 이 문제가 청년세대에 와서 더 심각해졌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벤처기업 사장 청년과 배달노동자 청년, 넥타이 맨 대기업 정규직 청년과 중소기업 공장노동자 청년,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졸업자 청년과 2년제 전문대 또는 고교 졸업자 청년, 브랜드 아파트에 거주하는 청년과 고시원ㆍ쪽방의 1인가구 청년이 과연 다 같은 ‘청년’이라는 이유로 비슷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비슷한 인식세계 안에서 살고 있을지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은 또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청년은 이렇다’라고 알고 있는 많은 것이, 사실은 청년세대 내에 사회적 발언권이 있거나 사회적 관심을 받는 특정 계층의 특성을 세대 전체의 특성으로 잘못 일반화한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 114쪽
세대 간 불평등을 과장하는 담론은 세대 내의 계층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불평등 구조를 자꾸 축소하고 외면한다. 그러나 이 불평등 시대에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것은 세대 내에서 갈수록 삼화되고 있는 고용격차, 소득격차, 자산격차 들이다. 이를 더욱 악화일로로 밀어붙이고 있는 부와 지위의 세습도 말이다.
세대 간 계층세습은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상류층만의 얘기가 아니다. 실은 많은 사람이 전혀 악의 없이 행하는 일상의 미시적 실천들이 모여 거시적인 격차구조를 만든다. 예를 들어 고학력 중산층 부모는 자식이 넓은 세상을 보고 꿈을 펼치도록 해외여행을 함께하고 어학연수를 보내주는 사랑으로 우리 사회의 학력ㆍ학벌의 격차구조 심화에 기여한다. 또한 그들은 자식이 집을 한 채 갖고 자기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희생으로 주거·자산 격차구조의 재생산에 동참한다. 그들은 사회이슈와 인문학에 관한 일상적인 지식의 전수로 중산층 문화 자본을 자식에게 대물림할 수 있다. 높은 학력, 좋은 직장, 안정된 소득, 자기 집, 넉넉한 재산, 괜찮은 인맥, 문화적 자원 중 어느 하나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이 계층세습의 고리에서 자신만은 완전히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 108쪽
2030세대와 정치권의 86세대 담론
2030세대는 인구학적으로는 소수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적극적이다. 박근혜 탄핵정국과 촛불집회를 통해 얻어진 정치효능감이 이들의 정치적 존재감을 높여준 덕분이지만, 동시에 특정 정당에 대한 충성도는 낮은 비당파가 많다. 이런 양면적 특성이 오히려 각 정당들로부터 구애의 대상이 되게 한다. 그런 와중에 ‘세대포위론’ ‘반페미 이대남’ ‘반중 20대’ 등의 이슈가 부상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2030세대에게 정치권이 적극 꺼내든, 기득권 50대 vs 희생자 20대라는 ‘86세대 담론’(기득권론, 무능론, 청년착취론)은 그러나 세대를 막론하고 모두가 겪고 있는 차별과 불평등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단지 청년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정적을 ‘청년의 적’으로 몰아 대중의 분노를 불러오려는 전략의 당연한 한계일 것이다.
세대론에 경도된 정치는 도대체 유권자의 어떤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지방거주자는 지역격차 해소를 요구할 수 있고, 임대생활자는 주거안정 대책을 요구할 수 있으며, 빈곤층은 생계안정 대책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20대의 이름으로 요구할 수 있는 정책은 없다. 20대 상류층을 위한 부동산 감세정책, 20대 중산층을 위한 주식시장 촉진책, 20대 노동자를 위한 최저임금 정책, 20대 페미니스트가 요구하는 성산업 대책, 20대 안티페미니스트가 요구하는 무고죄 강화 정책은 있지만 ‘20대 정책’은 없다는 것이다. -본문 31~32쪽
‘세대’와 ‘정치’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유권자들의 관심이 큰 만큼, 이 책에서 저자는 세대정치 현상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며 현재 2030세대의 정치적 유동성이 노무현 정권 후반기와 유사한 국면임도 보여준다. 나아가 각종 세대담론들이 박근혜 노동개혁, 조국 사태, 최근 보궐선거 및 대선 등 정치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음을 규명함으로써 세대담론의 정치적 측면을 보다 적확히 이해하도록 해준다.
실체 아닌 허상을 보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나와 다른 시대에 나고 자란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생애와 현실을 알고자 하는 관심이, 따라서 세대론 자체가 문제이거나 한 건 전혀 아니다. 특정 세대를 안정/불안정, 가해/피해, 착취/피착취 식으로 갈라놓는 세대불평등론으로는 정작 각 세대 내에서 교육, 직업, 고용, 자산 등의 부문별로 한층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와 불평등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되므로 문제인 것이다. 결국 그런 담론의 허구성을 실증적으로 밝힘으로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려는 것이 이 책의 일차적 목표인 셈이다.
‘기성세대’라는 악을 만들어 청년들에게 비난의 대상을 만들어주고 청년의 편인 듯 가장하여 인기를 얻으려는 발상은 어쩌면 큰 걸림돌이 없는 일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기성세대’는 동질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집단으로서 실체가 없기에, 비난에 대해 반박하지도, 보복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고용주에게, 직장 상사에게, 집주인에게 맞선다면 당신은 곧바로 응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가 노인이든, 중년이든, 당신보다 젊은 청년이든 말이다. 계급은 실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을 한 뼘만이라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려면 허상이 아니라 실체를 직시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