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가는 길/쉬어가며 보는 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 Sewing Sisters, 2020

새벽길 2022. 3. 23. 04:22

미싱 타는 여자들 Sewing Sisters, 2020
개봉 2022.01.20, 다큐멘터리, 한국, 전체관람가, 러닝타임 109분
감독: 이혁래, 김정영
출연: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
1970년대 평화시장에는 가난해서 혹은 여자라서 공부 대신 미싱을 타며 
`시다` 또는 `공순이`로 불린 소녀들이 있었다 
저마다 가슴에 부푼 꿈을 품고 향했던 노동교실
그곳에서 소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노래를 하고, 희망을 키웠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청춘이 오늘의 청춘에게 보내온 편지
“전태일 말고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들” ? 봉준호 감독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초청작!
국내 유수 영화제가 선택한 2022년 첫 필람 다큐멘터리!
 
다큐였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의미 있는 영화. “그래도 잘 살았어. 지금도 잘 살고 있고...” 마지막에 이 말이 인상적으로 남는다. 나와는 열살 안쪽으로 나이를 먹지 않은 분들인데, 나는 저 분들 나이에 뭘 했나, 무슨 생각을 했나 싶다. 그들은 내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었다. 영화를 통해 그 삶을 응시하는 것은 눈물 없이 힘들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34581.html
“함께여서 단단해졌다” 40여년 전 소녀 미싱사들을 만나다 (한겨레, 정여울, 2022-03-12 18:03)
[한겨레S] 살롱 드 여울 | ‘미싱타는 여자들’ 감독·출연진
1970년대 평화시장 노동교실 소녀 미싱사들
어린 여성이라 소외된 기록, 꾸밈없이 스크린에
1970년대 청계피복노조에서 만난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10대 시절 ‘시다’(미숙련 노동자)로 만나 60대가 넘은 지금까지도 서로를 마치 피붙이처럼 아끼고 보살펴준다. 어떤 계산도 없이, 어떤 의심도 없이. 누구도 누군가에게 군림하지 않고, 완전히 평등한 우정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우정에도 필연적으로 권력이 존재하기 마련인데(그럴 때마다 나는 우정 자체를 포기하곤 했다), 이들의 눈빛에선 어떤 권력이나 억압의 기미도 찾아볼 수 없다. 평생 아픔을 견뎌온 서로를 향한 온전한 믿음과 사랑, 그것이야말로 <미싱타는 여자들>의 주춧돌이다. 영화 초반에는 그들이 견딘 아픔이 애틋해서 울고, 중간쯤에는 그들이 나눈 짙은 연대의 시간이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러워 울고, 끝날 때쯤엔 그들이 머나먼 역사 속 타인이 아니라 우리 엄마, 누이,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함께 울게 된다.
김정영 감독, 이혁래 감독,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제 인물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 5인을 한꺼번에 인터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아이디어였다. 다행히 제작진뿐 아니라 배급사인 영화사 진진 식구들까지 따스하게 맞아주셔서, ‘살롱 드 여울’은 <미싱타는 여자들>과 어우러져 비로소 소담스러운 ‘우정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턱없이 부족했던 여성 노동자의 기록
"<미싱타는 여자들>을 보면서, 이제야 우리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지금은 가능해졌어요. 우린 알게 되었지요. 노동자들이 모이면 정말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래도 내가 참 잘 살았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노조 활동을 통해서였고, 국가폭력 피해에 대한 소송 끝에 저희 부부가 받은 배상금 8300만원을 김근태기념치유센터에 장학금으로 몽땅 내놓았던 것도 ‘함께하는 삶’만이 의미 있기 때문이에요. ... 노조 활동으로 인해 제 삶이 바뀌었고, 이젠 제 삶의 기쁨을 타인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신순애)
울면서 건져올린 개인의 시간
"<전태일 평전> 이후 노동자들은 수십년 동안 희생자로만 그려져왔어요. 그걸 반복한다면 다시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었죠. 임미경 선생님이 “누가 시켰냐”며 자신을 탄압하는 경찰과 판사를 보며 ‘저들은 누가 시켰길래’ 하면서 연민을 느끼는 장면을 보면서 확신이 생겼어요. 개인이 역사를 뛰어넘는 순간을 포착했던 것이지요. 그 장면을 보면서 이 영화가 가치 있는 작업이 될 거라고 믿게 됐어요.
40여년 전 소녀 미싱사를 세상에 내보이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었어요. 오랫동안 숨겨온 과거의 나를 마주할 기회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때 나 자신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웠는지 스스로 확인하고 과거와 현재의 내가 서로를 위로하는 자리를 영화를 통해 만들고 싶었어요.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는 과정 중간중간에 친구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여행을 떠나고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는 등 과거 노동교실에서 누렸던 일상을 다시 체험하도록 했던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어요. 이 영화를 시작할 때 처음 다짐한 게 딱 두 문장이었거든요. 지루하면 안 된다! 울려야 한다!" (이혁래)
"가장 기억나는 순간은 재판을 받으며 본 판사들의 표정과 행동입니다. 판사들은 열다섯살 소녀 임미경을 보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토록 가혹한 판결을 내린 걸까요. 그 순간이 너무 억울해서, 저라도 법을 배우고 싶어서, 제가 직접 늦은 나이에 법학과에 입학하여 졸업도 했습니다. 지금은 판사들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거나 명령을 받아서 판결을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간절하게, 정의가 살아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임미경)
농성, 성취, 인생의 전환점
"열심히 노조 활동을 했던 많은 동료, 후배들의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웠는데, 영화를 통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과연 영화 한 편이 우리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해줄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 그려주어서 좋았습니다. 수십년간 꽉 막혀 있던 속이 이제야 후련해지는 느낌이지요. 며느리들이 영화 보고 많이 울었다고 말해주었어요. 가족들은 제 과거를 잘 모르고 있어서 많이 걱정했는데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만약 전태일을 몰랐다면, 전태일을 알게 되어 나 자신의 자아를 찾아 노조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는 돈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것 같아요. 노조 활동을 하면서 저만이 아니라 주변 세상을 둘러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갖게 되었거든요.
1975년 2월9일 노동교실 찾기 첫번째 싸움에서 처음으로 농성을 하여 승리하고, 그 후 노동시간 단축을 비롯해서 여러 노동조건이 개선된 것이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었어요. 내가 뭔가를 해낼 수 있구나, 그날 9·9 사건 때 내가 교실 안에 남아서 한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의 목숨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영화를 보며 ‘내가 그때는 저렇게 활짝 웃었구나’라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요. 노조에 처음 다니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 힘들고 피곤해도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거예요." (이숙희)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열다섯살 소녀를 북한의 앞잡이라는 명목으로 불법 감금하는 판사가 지성인인가, 어린 소녀들을 잠도 못 자게 하고 일만 시키는 공장주의 만행을 막기 위해 노동교실에서 잘못된 현실과 끝까지 싸운 열다섯살 소녀가 지성인인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 소녀 미싱사들이야말로 참된 지성인이 아니었을까.
김정영 감독은 언니·오빠가 없는 맏딸이라 외로웠는데, 청계피복노조를 통해 ‘평생의 언니들’을 우르르 만나서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한다. 십대 시절 만나 가장 힘들고 아픈 시절을 함께하고, 엄혹한 시절일수록 더 따스하게 서로를 보듬어주는 그들의 우정은 오늘도, 이 아프고 힘든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다. 그들의 눈부신 합창, ‘흔들리지 않게’처럼. “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물가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흔들리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