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대안사회, 대안이론

소련 해체 30주년

새벽길 2021. 12. 27. 13:55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12월 25일은 소련이 사라진지 30년이 되는 날이었다. 어느 새 30년이라니... 나에게, 전세계 노동자들에게 소련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전히 러시아에는 소련을 기억하고, 그 때가 좋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더 많은 듯 하지만, 큰 의미는 없다. 현재의 러시아는 소련과는 완전히 다른 체제이고... 장석준 동지의 글은 우리가 현재 고민해야 할 것을 잘 지적하고 있다. 이를 실천과 어떻게 연계할 것인가 또한 우리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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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1024630.html
‘강한 러시아’ 열망 올라탄 푸틴, 20여년 ‘힘의 대결’ 내달아 (한겨레, 조기원 기자, 2021-12-24 04:59)
[소련 해체 30주년-상]
푸틴 “소련 붕괴는 최대의 재앙”
체첸 강경대응·유가 상승 발판
소련 해체 혼란 수습하며 인기
러 국민 75% “소련, 가장 좋았다”
강대국 열망 딛고 대외 강경 행보
장기집권 길 트며 1인 독재로
헌법 개정 2036년까지 집권 가능
반대파 나발니 가두고 언론 탄압
인권단체 메모리알 해산도 강행
권위주의 체제 회귀 서구와 충돌
30년이 지난 올해 소련을 공식 계승한 러시아 정부는 소련 해체와 관련한 공식 행사를 계획하고 있지 않다. 배경에는 소련 해체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씁쓸한 기억이 있다.
국영 여론조사 기관인 ‘전러시아여론조사센터’의 지난 3월 조사를 보면, 응답자 67%가 소련 붕괴를 “애석하다”고 답했다. 독립 여론조사 기관인 레바다 센터의 지난해 여론조사에서도 소련 붕괴가 애석하다고 답한 이들이 65%였다. 이 조사에서 소련을 “가장 좋았던 시대”라고 답변한 이들은 75%에 이르렀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 모스크바센터의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는 최근 일본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러시아 정치 체제는 (예전엔)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관리된 민주주의’라고 불렸지만 현재는 본격적 권위주의 체제”라고 말했다. 굿코프 소장도 현재 “러시아는 군사적 용맹, 제국주의적 업적, 소련의 산업화 같은 과거에 호소해 정당화를 끌어내는 국가 가부장주의와 애국주의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며 이것이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이끌고 다원주의를 제거한다”고 말했다. 그 정점에 푸틴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https://www.khan.co.kr/world/europe-russia/article/202112262102015
[소련 해체 30주년] 서방과 신냉전·빈부격차 심화…러 국민들 “소련 때가 좋았다” (경향, 윤기은 기자, 2021.12.26 21:02)
1991년 68년여 만에 해체
독립국 대부분 ‘반러’ 전향
루블화 폭락 등 ‘대혼돈’
1991년 12월25일(현지시간) 구소련 모스크바 크렘린궁 게양대에서 낫과 망치 문양이 그려진 빨간색 소련기가 내려졌다.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를 실현한 나라인 소련은 이튿날 만 68년11개월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후 미국과 함께 세계를 반으로 가르고, 첫 우주비행사를 탄생시키는 등 인류 역사에 중요한 기록을 세운 나라가 무너진 것은 그렇게 한순간이었다.
■ ‘세계 최강’ 소련이 무너지다
경제계획 실패는 소련 붕괴의 결정적 원인으로 꼽힌다. 소련은 국가가 모든 생산품의 생산량과 가격을 정하는 체제를 택했다. 이 때문에 물품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맞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 노동 강도는 다르지만 임금이 비슷해 노동 생산성도 떨어졌다.
미국과의 경쟁을 위해 군비증강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은 점도 경제난을 불렀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도 스스로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 소련 향수에 빠진 러시아
‘세계 2인자’ 자리 내줬지만 미국·유럽과 정치·경제 등 위태로운 기싸움은 진행형
러시아 독립 여론조사 기관인 레바다센터의 지난해 여론조사에서 소련을 ‘가장 좋았던 시대’라고 답변한 러시아 국민이 75%에 달했다. 지난 19일 열린 아이스하키 채널원컵 핀란드전에서 러시아 선수들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약자 ‘CCCP’가 적힌 유니폼을 입었다. 
전문가들은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 국민들이 연료와 전기 등 공공요금이 저렴했던 소련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말한다. 러시아 언론인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는 CNN 칼럼에서 “공정한 사회를 꿈꾸는 러시아인에게 소련 외에 다른 사회체제 모델이 없다”고 분석했다. 미국에 맞설 만큼 국력이 강했던 상황을 그리워하는 시민들도 있다. 
■ 21세기에도 이어지는 신냉전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024869.html
‘소련’을 잊고서, 이 시대의 절박함을 헤아릴 수 있을까 (한겨레,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2021-12-27 04:59)
[기고] ‘다시 사회주의를 말하다’
소련식 모델, 뭐가 잘못됐나?
소련이 퇴장하며 남긴 숙제들
한 세대 넘도록 해결 못하는 세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며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한 시대가 끝났을 때, ‘좌파’나 ‘사회주의’ 같은 말 언저리에라도 있었던 전세계의 모든 흐름과 세력은 두가지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하나는 20세기 내내 ‘사회주의’와 등치됐던 소련식 사회 모델에서 잘못된 게 무엇인지 밝히고, 이 모델과는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비전과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과제가 더 있었다. 그것은 지구상에 ‘소련’이 존재했기에 등장하고 유지되던 세력 균형을 그 ‘소련’이 존재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지탱하는 일이었다. 보통선거제도의 확산, 파시즘의 패배, 식민지의 정치적 독립, 복지국가의 등장, 이 모두는 소련이 버티고 있던 시기에 벌어진 거대한 변화다. 가장 보수적인 논자조차 이런 변화가 성사되는 데 소련의 존재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이라는 무게추 덕분에 세력 관계의 저울은 그래도 조금은, 가진 자들 쪽으로 덜 기울었다. 
이 시대는 자본주의가 초래했지만 정작 자본주의는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기후 재난과 극단적 불평등이 인류를 덮치는 시대이고, 신자유주의의 전성기가 끝난 이후 자본주의 쪽에서 어떠한 대규모 혁신도 출현하지 않는 시대다. 하지만 동시에 소련이 퇴장하며 남긴 숙제가 한 세대 넘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 출구가 없는 듯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소련’을 잊고서는 이 시대의 가난함과 절박함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소련이 무너질 때 막 걸음마를 떼던 남한 좌파는 위 두 과제와 대결할 능력이 없었다. 정신적 고아 상태에서 시작해 소련 국정 교과서 정도나 읽은 수준으로는 앞으로 뭘 해야 할지조차 분별하기 힘들었다. 뒤늦게 소련 공산당 노선 외의 마르크스주의 사조나 사회주의 흐름을 찾아 학습해야 했고, 이런 벌충 작업의 열기조차 몇년 안 가 수그러들고 말았다. 대다수는 가장 편한 해법을 선택했다. 고민 자체를 버렸다. ‘사회주의’는 이제 표어가 아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민주주의’나 ‘진보’였다. 어느덧 안정된 중산층 지위에 올라선 사람들에게는 이런 언어만으로도 충분했다.
한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그 본고장과는 달리 이념의 공백을 채우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서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운동에 깊이 뿌리내린 사회주의의 한 지류였다. 소련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말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주의를 둘러싼 고민을 던져버리고 자본주의에 환호할 만반의 준비가 된 이들의 변명거리로 오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한때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벅찬 이야기와 얽혀 당당히 자기 이름을 가졌으나 지금은 존재조차 식별되지 못하는 이들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이제 ‘피해 대중’이나 ‘비정규직’ 같은 이름으로만 분류된다. ‘민주주의’와 ‘진보’가 이념의 왼쪽 경계인 사회에서 이들이 패배자의 운명을 반전시킬 무기는 무엇인가? 그런 것이 과연 있기는 한가?
이제 소련은 없다. 소련식 사회주의도 추억거리일 뿐이다. 그러나 투명인간이 더는 투명하지 않으려면, ‘민주주의’와 ‘진보’에만 머물 수는 없다. 한국 사회의 좁은 상식과 상상력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흐름이 있어야 한다. 이 흐름이 다시 ‘사회주의’라 불릴지 아닐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름이 뭐든 그것은 분명 자본주의 너머를 바라보며 현재의 패배자 입장에서 세계를 재편하자는 외침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