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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 '꿈' 짓밟는 한국 스포츠 (프레시안, 정희준 교수, 2008-12-09)

새벽길 2008. 12. 9. 18:22

마이런 롤이라는 친구를 정희준 교수의 글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미국을 단지 무시할 수만은 없을 듯 싶다. 누군가 미국이 그렇게 문제가 많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학계가 아직 건강해서라고 하던데, 학계 말고도 시민사회에서 나름의 상식이 살아숨쉬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던 친구 하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야구선수 활동을 접고 검정고시를 보았다. 이대로 야구선수가 되면 머리에 돌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에는 축구부, 고등학교 때에는 야구부가 내 모교에 있었는데, 같은 반 친구였던 선수들은 수업을 전혀 듣지 않았다. 물론 내가 생각해봐도 수업을 통해 얻은 것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고등학교까지를 마친 이들이 경험한 보통의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그런 점에서 박태환이나 장미란에게 가해지는,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해야 한다는 강압은 스포츠 선수들에게 쏟아지는 열광 뒤에 숨은 어두운 면을 살펴보게 만든다. 사실 내가 저 나이 때였으면 박태환이나 장미란 만큼 거절하지 못하고 뒤에서만 궁시렁댈 뿐 그냥 시키는 대로 따라했을 것이다. 이런 과거가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 후속 세대들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마 기성 세대들이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결국 변화의 몫은 자신들의 꿈을 펼쳐야 하는 새로운 세대 자신들에게 있다. 그래서 그들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하기를 바란다. 그에 양식 있는 기성세대들이 기꺼이 연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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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박태환과 장미란이 사회를 본 사연 (프레시안,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교수, 2008-12-09 오전 11:18:18)
[정희준의 '어퍼컷'] 선수들 '꿈' 짓밟는 한국 스포츠
 
대한체육회는 지난 8일 충북 진천에서 국가대표선수 종합훈련원 기공식을 가졌다. 현재의 태릉선수촌이 낡고 포화상태에 이르러 제2선수촌을 짓게 된 것이다. 체육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는데 그 첫 삽을 뜬다니 이는 기쁜 소식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나의 고개를 갸우뚱 하게 하는 언론 기사가 등장했다. 기공식 사회자로 장미란과 박태환을 불렀는데 본인들이 고사했음에도 결국 '주변'의 권유로 사회를 보게 됐다는 것이다. 장미란은 기공식 당일 동료들과 뉴질랜드로 떠나는 전지훈련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전문사회자도 아닌 우리가 왜 사회를 봐야 하느냐"며 동료들과 함께 떠나겠다고 버텼는데 체육회는 장미란을 따로 불러 설득 했다고 한다.
 
박태환의 경우는 좀 더 눈길을 끈다. 그는 당일 기말고사가 예정돼 있어 사회 보는 것을 거절했다가 역시 '주변'의 권유로 입장을 바꿨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에 따르면 박태환도 다른 사람이 사회를 보길 원했지만 결국 참석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고 말했단다. 시험에 관해서 아버지는 "학교 측에 적당한 조치를 취해놨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재시험인지 리포트 제출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고 한다. 선수촌 기공식이 아무리 대단한 행사라 해도 시합도 아니고 훈련도 아닌데 사회를 보게 하기 위해 시험을 봐야 하는 박태환까지 불러낸 것은 분명하고도 심각한 문제라 해야 할 것이다.

▲ 지난 8일 충북 진천에서 열린 국가대표선수 종합훈련원 기공식에서는 사회자로 장미란과 박태환이 참석했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들이 고사했음에도 결국 '주변'의 권유로 사회를 보게 됐다는 것이다. ⓒ뉴시스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된다는 사람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졌던 '장희진 파동'이 생각난다. 8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한국스포츠는 그대로라는 안타까움에서다. 수영 국가대표로 선발된 14세 중학생 장희진이 학교에 다니면서 훈련하겠다고 하니 수영연맹은 대표 자격박탈은 물론 연맹에서 아예 제명시켜 버렸다. 올림픽 개막식은 9월 15일이니 몇 달 후였고 태릉에서 모든 훈련에 참여하겠다는 조건으로 1학기 기말고사 때까지만이라도 학교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선수촌과 연맹은 장희진의 요청을 묵살했다.
 
결국 여론이 들고 일어나자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에 출전하긴 했지만 결국 그는 올림픽 다음 해에 학업을 병행할 수 없는 한국에서의 운동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명문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에서 경영학과 정치학을 전공하는 그는 이번 베이징올림픽에 한국대표로 출전해 자유형 50m에서 결승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출전선수 90명 중 31위에 올랐다.
 
앞으로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는 게 목표라고 하는 그는 한 인터뷰에서 "태릉선수촌은 어린 학생의 미래를 염두에 둘 만큼 포용력과 융통성을 가진 곳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아니, 부족하다. 실상을 표현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단 말이다. 장희진 파동 당시 한 체육계 인사는 국가를 위해 개인은 희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깟 올림픽 성적을 위해 열네살 소녀의 미래를 포기하라고?
 
학생 선수의 롤모델, 로즈장학생 마이런 롤
학생이 시험을 포기하고 사회를 보러 불려 나가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과 대비되는 사건이 있다. 미국 대학풋볼 최강인 플로리다주립대(FSU·Florida State University)의 주전 세이프티(수비시 최종 저지선) 마이런 롤(Myron Rolle)은 FSU 역대 최고의 디펜시브백(세이프티롤 포함해 수비시 상대 와이드리시버 등의 공격을 저지하는 선수들)으로 내년 NFL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선발이 보장된 선수다.
 
놀라운 것은 그가 신경외과의사를 꿈꾸는 의예과(pre med) 전공생으로 3.75의 평균학점으로 2년 반만에 대학을 졸업할 예정일 뿐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많은 봉사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상까지 받은 학생이라는 점이다. 그의 코치 중 한 명은 그가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다는 불평 아닌 불평을 할 정도였다. (사실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외국의 학생선수 이야기, 별로 놀랍지 않을 수도 있겠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권위 있는 장학재단인 로즈(Rhodes) 장학재단 장학생에 지원한 것이다. 매년 미국 최고의 엘리트 대학생 1000여명이 로즈장학금에 지원하는데 이 중 32명만이 선발되는 영광을 누린다. 로즈장학생에 선발되면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2~3년간 공부를 하게 되는 혜택을 받는데 여기에 몇 명이 선발되느냐에 따라 대학의 평판과 후원금 규모가 달라질 정도로 상징성과 영향력이 큰 장학금이다. 클린턴, 블레어 전 영국 총리, 호크 전 호주 총리와 이번에 신임 UN대사로 지명 받은 미국의 수전 라이스 같은 이들이 로즈 장학생이었다. (외국에서 운동선수가 공부 잘 해서 장학금 신청하는 것 역시 별로 놀랍지 않을 수 있겠다. 뭐 흔히 보는 일 아니겠는가.)
 
정말 놀라운 것은 이제부터다. 로즈장학생선발의 길고 긴 과정을 거쳐 마침내 최종 후보자 명단에 오른 마이런 롤의 마지막 관문은 선발위원회에서의 인터뷰였다. 장소는 알라바마주 버밍햄시. 일시는 지난 11월 22일 오후.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공부냐 경기냐 그것이 문제로다
롤이 인터뷰를 해야 할 22일 오후는 소속팀인 FSU가 메릴랜드대학과 원정경기를 치러야 할 시간이었다. 메릴랜드대 정도면 예년 같으면 쉽게 이길 팀이겠지만 올해 메릴랜드의 전력이 만만치 않고 또 시즌 초 부진했던 FSU가 소속 컨퍼런스인 ACC의 챔피언결정전에 나가려면 꼭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그런데 팀내 최고의 수비수인 롤은 그 시간 비행기로 두 시간 떨어진 곳에서 인터뷰를 해야 하는 것이다.
 
팀이 과연 그가 경기에 결장하는 것을 용납할 것인가. 그것도 챔피언결정전 진출이 걸린 경기인데. 그것도 절박한 원정경기인데. 그것도 방송사 ESPN이 전국에 생중계 할 경기인데. 미국의 대학스포츠는 그 인기와 규모가 워낙 대단해서 TV중계권료만 일년에 수백억 원에 이르고 감독 연봉이 십억 원을 넘나든다. 풋볼팀, 농구팀의 한 해 성적에 따라 다음 해 신입생 경쟁률이 달라지고 동문후원금이 널뛰기를 한다. 이러한 마당에 학교와 감독은 팀내 최고 수비수가 그깟(?) 장학금을 신청했다고 해서 그의 결장을 허락할 것인가.
 
그러나 결론은 간단했다. 우선 FSU 풋볼팀 감독인 바비 보우든은 "나는 더 이상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이건 머리 쓸 것 없는 간단한 일"이라면서 "나는 공부가 먼저라는 걸 안다. 오직 그가 장학금을 받길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결장을 당연시 한 것이다.
 
로즈장학생 인터뷰와 경기출전이라는 고민에 놓인 롤의 처지가 미국사회에서 작은 소용돌이로 변해가자 이번엔 미국대학스포츠연맹(NCAA)와 경기를 중계할 방송사 ESPN이 동참했다. ESPN은 원래 FSU와 메릴랜드 간의 경기를 오후에 중계하기로 했었지만 그가 인터뷰 후 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경기시간은 저녁 7시 반으로 옮기는 것에 NCAA와 합의한 것이다. ESPN 입장에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바뀐 경기시간이 주말 황금시간대였기 때문이다.
 
학생선수의 미래를 위해 총출동한 그들
또 하나의 관문이 있었다. 인터뷰는 오후 5시경에 끝나게 되어 있는데 비행기를 타고 오면 경기 중에라도 경기장에 도착할 수 있지만 정규항공편 중엔 그 시간에 비행기가 없었다. 결국 학교측이 롤을 위해 전세기나 대학 후원자의 자가용 비행기를 띄우기로 했다. 그런데 또 이는 NCAA 규정위반이었다. 학교는 학생선수에게 그 어떤 혜택도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FSU의 체육부 디렉터 랜디 스핏맨은 NCAA에 롤의 경우만큼은 예외로 해달라는 청원서를 올려 끝내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롤은 22일 오후 로즈장학생 선발 인터뷰를 마치고 바로 공항으로 이동해 비행기를 타고 메릴랜드에 도착해 메릴랜드주 경찰이 흔쾌히 제공한 경찰차를 타고 2쿼터 경기 중인 경기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로즈장학생에 선발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학생선수의 미래를 위해 경기불참을 당연시 한 감독, 인터뷰 후 경기출전을 위해 전세기까지 제공하는 학교, 학생선수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 중계시간을 바꿔주는 방송사, 이 모든 사정을 파악하고 선수의 입장에서 청원을 받아들인 NCAA, 적군(?)이지만 경찰차를 내준 경찰…. 보름 전 미국 대학스포츠는 이렇게 돌아갔다. 그리고 스물두살 대학생 마이런 롤은 자신의 꿈을 이뤘다.
 
롤의 이야기가 많은 미국의 학생선수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던 그때, 국내에 전해진 또 다른 소식은 한국스포츠의 현실을 다시금 느끼게 해줬다. 고교와 대학 시절 농구선수였던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지명한 행정부와 백악관 요직에 역시 고교·대학 시절 농구 선수로 활약했던 인물들을 다수 배치했다는 것이다. 에릭 홀더 법무장관 지명자, 수전 라이스 주유엔 미국대사 지명자, 제임스 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지명자들이 모두 학창 시절 농구선수였다고 한다. 여기에 고교 농구선수 출신인 폴 볼커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장 지명자까지 가세하면, 가드·포워드·센터를 모두 갖춘 한 팀의 농구팀이 결성된다니 신기하기도 하면서 부럽기도 했다. 하긴 부시 대통령도 예일대에서 야구선수를 했으니 별날 것도 없다.
 
꿈과 희망을 주는 스포츠…한국만 빼고
이런 건 미국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한국이 그렇지 않을 뿐이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올림픽 사격선수였고 태국의 푸미폰 국왕은 동남아시아게임 요트 금메달리스트다. 모나코의 국왕 알베르2세는 동계올림픽 5회 출전자다. 푸틴 총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유도 챔피언이었고 나우루공화국의 마루쿠스 스테픈 대통령은 자국의 유도영웅으로 유일한 세계선수권대회 메달리스트다.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과 오딩가 케냐 총리는 축구선수였다고 한다.
 
이제 살만한 나라는 어디든 스포츠 천국이다. 스포츠에 감동이 있고 희망이 있고 꿈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감동은 있는데 꿈은 없다. 예를 하나 들겠다. 우리는 얼마전 '우생순'에 또 한번 열광했다. 이제 그만 열광하자. 주전선수 평균연령 34세라서 더 감동적이었다고? 이번에 안타까운 동메달이니 38세에 또 도전하라고? 고마 해라. '우생순 아줌마'들 골병 든다. 그들은 후배 선수가 없어 뛰고, 은퇴해도 할 게 없어 또 뛰었다. 한국 스포츠엔 꿈이 없다. 국가와 경기단체엔 꿈이 있을지언정 선수들에겐 꿈이 없다. 우생순이 한국 스포츠의 감동이라고? 차라리 한국 스포츠의 비극이다.
 
외국은 운동 못하면 왕따 되는데 우리나라는 운동하면 왕따 된다. 맞는 건 기본이다. 무시무시하게 맞는다. 초등학교 여학생이 50대 맞는 나라다. 또 수업 안 들어가고 시험 우습게 보고 초등학생 때부터 합숙을 하니 친구도 없고 세상도 모른다. 오죽하면 학생 선수들의 존재 이유는 일반 학생들을 위해 '내신 깔아주기'란 말이 나왔을까.
 
운동하면 바보 된다는 말은 우리나라에만 있다. 운동 선수는 무식하다는 편견, 한국 스포츠의 전매특허다. 우리나라 체육계가 학생 선수들에게 공부시키기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시험을 봐야하는 학생까지 엉뚱한 일로 부르지만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