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가 정말 열받은 모양이다. 이번에는 이명박 정부의 종교 편향에 대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듯하다. MB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던 걸까. 그런 사람을 지지했던 불교계의 업보라고 하면 지나친 걸까.
물론 종교적인 이유로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한다거나 지지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리고 종교보다 정치적인 신념이나 입장, 경제적 이해관계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신정국가가 아닌 이상, 최소한의 것을 지킬 수 있는 이들 지지했어야 했다.
이러한 불교계의 분노를 보면서 법정스님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그나마 법정스님은 '무소유'라는 산문집을 통해 나에게 불교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를 심어준 이이기 때문이다. 생각난 김에 법정스님의 말씀과 글을 담아놓는다. 불교계가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가기를...
--------------------------------------------- 불교계 깊은 배신감…산문 박차고 서울 복판으로 (한겨레, 조현 종교전문기자, 황준범 기자, 2008-08-22 오전 08:38:46) 27일 서울광장에서 범불교도대회 열어 정적인 불교계가 서울 한복판서 대회 ‘일대사건’ “계속되는 종교 편향 못참아” 20만명 참여 목표
개신교와 달리 정적인데다 무게중심이 도심보다는 산중에 있는 불교계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정부 규탄’ 집회를 여는 것은 그 자체가 ‘일대 사건’이다. 조계종 관계자들은 그만큼 불교계의 분노가 크다는 징표라고 설명한다.
불교계는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때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고, 부산에서 전국의 사찰이 무너지라고 기도한 예배에 축하 영상을 보내고,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나님의 역사라고 발언했지만, 정작 대통령이 되어서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고 토로한다. 불자들의 상당수가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기에 이런 배신감은 더욱 크다.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 그런 것인 줄은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 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될 것 같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 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편향된 시각과 제한된 소견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게 되면, 마음에 안 들고 미운 것이 많이 생기게 마련이고, 이는 비난과 다툼의 원인이 된다. 물론 사람은 익숙하고 당연한 것에 머물기를 좋아해서 거기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익숙한 것에서의 ‘탈출’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해준다."
1. 2005년 길상사 가을법회 법문
“사람의 손이 빚어낸 문명은 직선입니다. 그러나 본래 자연은 곡선입니다. 인생의 길도 곡선입니다. 끝이 빤히 보인다면 무슨 살 맛이 나겠습니까? 모르기 때문에 살 맛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곡선의 묘미입니다.”
"가을엔 모든 것이 투명합니다. 햇살, 공기, 바람결, 물, 나무 모두 다 투명합니다. 산에 사는 저희 같은 사람은 귀가 밝아져 방 안에 있어도 낙엽 구르는 소리, 풀씨 터지는 소리, 다람쥐가 열매 물고 가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 역시 곡선의 묘미.”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어정거리고, 길 잃고 헤매면서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충실히 깨닫고 사는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직선은 조급, 냉혹, 비정함이 특징이지만 곡선은 여유, 인정, 운치가 속성.” “오늘 우리가 여유롭게 사는 것은 전(前) 세대, 선인들이 어려운 여건을 참고 기다릴 줄 알았던 덕.”
“남녀의 사랑도 서로를 길들일 시간, 뜸들일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요즘은 웬만한 식당에선 제대로 뜸들인 밥을 먹기 어렵다”. “모든 것을 단박에 이루려 서둘러서는 안 된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 역시 곡선의 묘미.” “곡선의 묘미를 삶의 지혜로 받아들이면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생길 뿐만 아니라 가정의 화목과 이웃사랑의 나눔도 실천하게 될 것.”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어정거리고, 길 잃고 헤매면서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충실히 깨닫고 사는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나와 관련된 가족이나 이웃들의 삶도 달라질 것.”
2. 가을은...
가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오늘 낮 사소한 일로 직장 동료를 서운하게 해준 일이 마음에 걸린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하에서 주소록을 펼쳐 들어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알아차린다 이 시대 이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연줄로 맺어져 서로가 믿고 기대면서 살아가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낮 동안은 바다 위의 섬처럼 저마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던 우리가 귀소(歸巢)의 시각에는 같은 대지에 뿌리박힌 지체(肢體, 존재)임을 비로소 알아차린다.
상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볼 때 우리들의 현실은 지나간 과거처럼 보인다. 이삭이 여문 논밭은 황홀한 모자이크, 젖줄같은 강물이 유연한 가락처럼 굽이굽이 흐른다. 구름이 헐벗은 산자락을 안쓰러운 듯 쓰다듬고 있다.
시골마다 도시마다 크고 작은 길로 이어져 있다. 아득한 태고적 우리 조상들이 첫걸음을 내디디던 바로 그 길을 후손들이 휘적휘적 걸어간다. 그 길을 거쳐 낯선 고장의 소식을 알아오고, 그 길목에서 이웃 마을 처녀와 총각은 눈이 맞는다. 꽃을 한아름 안고 정다운 벗을 찾아가는 것도 그 길이다. 길은 이렇듯 사람과 사람을 맺어준 탯줄이다.
그 길이 물고 뜯는 싸움의 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람끼리 흘기고 미워하는 증오의 길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 뜻이 나와 같지 않대서 짐승처럼 주리를 트는 그런 길이라고는 차마 상상할 수가 없다. 우리는 미워하고 싸우기 위해 마주친 원수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 사랑하려고 아득한 옛적부터 찾아서 만난 이웃들인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 듯 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 그런 것인 줄은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 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1973)
3. 무소유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섯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 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 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 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 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마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 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슨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정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蘭)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 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 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에는 한정이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는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 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현대문학] 1971. 3)
4. [토요일 아침에] 거꾸로 보기/손희송 가톨릭대 교수·신부 (서울신문, 2006-08-26)
오래 전에 읽었던 법정 스님의 수필집에 실려 있는 이야기 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스님은 어느 여름날 자신이 거처하는 암자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마루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비스듬히 주위 경치를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평소에 눈에 익고 친숙하게 보이던 산 경치가 색다르게 눈에 들어왔다.
스님은 벌떡 일어나 마루에서 마당으로 내려와 서서 허리를 굽혀 가랑이 사이로 다시 그 경치를 내다보았다. 눈앞에는 전혀 새로움이 펼쳐졌다. 하늘은 푸른 호수가 되고 산은 그 속에 잠긴 그림자가 되었다. 스님은 이 발견이 너무나도 신기해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소개를 했다. 먼저 스님이 숙달된 조교처럼 시범을 보이면 그들도 따라 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좋아했다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고정된 시각을 바꾸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가르침! 각자의 고유한 시각에서 독특한 개성이 형성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편견과 고정 관념이 생겨서 거기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 편향된 시각과 제한된 소견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게 되면, 마음에 안 들고 미운 것이 많이 생기게 마련이고, 이는 비난과 다툼의 원인이 된다. 물론 사람은 익숙하고 당연한 것에 머물기를 좋아해서 거기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익숙한 것에서의 ‘탈출’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해준다.
올여름에는 어느 해보다 장마가 길었고, 장마가 끝난 직후에는 찜통더위가 지속되어 불쾌지수가 상당히 높았다. 게다가 신문과 방송에서 접하는 소식은 우리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고 마음을 갑갑하게 만드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럴 때일수록 일상사를 한 번 거꾸로 보는 시각 전환을 해보면 좋겠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람이 쓴 ‘항상 감사하기’라는 제목의 글은 짜증스러운 일상사도 뒤집어보면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10대의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집들이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으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 데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으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교회에서 뒷자리 아줌마의 엉터리 성가가 귀에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고/그리고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이유는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고/할 일 안하고 지금 내가 놀고 있는 이유는 나에게 아직 여유가 있다는 뜻이고.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당신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누누이 강조하신다. 회개란 잘못된 삶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삶에로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 성경에서 회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 ‘메타노이아’(metanoia)는 어원적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달리 생각하는 것’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새로운 삶이 생각을 바꿈으로써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 숨통이 막힌 듯 답답할 때마다 생각을 바꾸어 세상을 다르게 보는 훈련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 보이면서 긍정적인 시각을 얻을 수 있다. 긍정적인 시각은 한 자락의 여유를 선사하여 꽉 막힌 숨통을 트이게 해줄 것이다. 마치 무더운 날에 쏟아지는 한 줄기 시원한 소나기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