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정부에게서 파시즘의 징후가 보이기는 한다.
아래 한겨레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전규찬, 이광일, 신진욱, 박명림 교수의 글을 읽어봐야겠다. 그런데 기사 상으로만 보면 고전적인 파시즘 논의하고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또한 촛불시위에서 경찰의 폭력를 새롭게 접한 이들을 빼놓고 과거 군사정권 하에서의 폭력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현재의 이명박 정부의 행태에서 파시즘 징후를 읽어낼 것 같지는 않다, 아직까지는...
------------------------------------------- “MB정부, 정치 퇴행 파시즘 징후” 평가 잇따라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8-12-25 오후 02:45:27) “부시·대처처럼 치안 내세워 인터넷 검열·매스컴 등 통제”
전규찬·이광일 교수 등 전문가 “소통 부재, 경찰 국가” 비판
이명박 정부에 대한 학계의 비판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통치 스타일의 일방성에 집중됐던 초기의 비판이, 촛불시위 참가자에 대한 검·경 수사와 방송·집시법 개정안 파동 등을 거치며 ‘민주주의 역진론’과 ‘정치 위기론’으로 확산되는 형세다. ‘민주화의 일시적 지체는 있어도 후퇴는 없을 것’이란 낙관론이 우세했던 1년 전과는 온도차가 확연하다.
이런 흐름은 최근 간행된 겨울호 계간지들에서도 확인된다. 이명박 정부의 행보에서 ‘정치적 퇴행’과 ‘파시즘’의 징후를 읽어내는 분석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우선 주목되는 것이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문화과학>에 쓴 ‘치안의 스테이트와 저항의 스테이트’라는 글이다. 전 교수는 이 글에서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치안 스테이트’로 규정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치안’은 소통과 합의가 사라진 ‘정치 부재의 통제 상태’를 지칭하기 위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게서 빌어 온 개념이다. 전 교수에 따르면, 노동유연화와 실질임금 삭감 등 반노동적 축적전략에 의해 지탱되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무력과 결합된 국민적 동의 메커니즘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법치 확립을 명분으로 경찰기구가 통치 전면에 부상하고, 건전한 여론 형성을 빌미로 미디어에 대한 장악과 통제가 시도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 교수는 이런 치안 스테이트의 선례를 영국 대처리즘과 조지 부시 미국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내각의 ‘범죄와의 전쟁’에서 찾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적 공포를 조장해 안전과 공익에 대한 허구적 합의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강압적 공권력이 전면화하는 예외적 통치 상황을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전 교수는 따라서 “2008년 한국에서 목격되는 인터넷 검열과 매스컴 통제, 낙하산 인사와 공영방송 해체의 모습들도 결코 우발적이지 않은 ‘신자유주의 치안 스테이트’의 징후이자 산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사한 논의를 이광일 성공회대 연구교수의 <시민과 세계> 기고문 ‘신자유주의, 이명박 정권과 민주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교수는 여기서 이명박 정부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회적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치안기구의 감시·통제 기능을 극단화한 ‘신자유주의 경찰국가’로 규정하는 한편, 파시즘으로의 전환 가능성까지 경고한다. 그는 이런 징후를 근대 기술의 합리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민주주의 과잉론’과 ‘좌파 적출’ 같은 극우적 언사를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집권층의 행태에서 찾는다. 특히 근대의 산물인 노동운동을 사회 안으로 포용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부정하는 이들의 태도에선 파시즘의 특징인 ‘반동적 모더니즘’의 경향마저 관찰된다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다.
<기억과 전망>에 ‘정치위기와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기’라는 글을 발표한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지난여름 촛불시위 국면을 통해 형성된 진보·보수의 ‘파국적 균형’ 상황에 주목한다. 이런 균형은 “어떤 사회정치적 대표체도 대중의 집단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총체적인 헤게모니 위기”를 반영하는데, 이 위기가 해소되는 경로는 두 가지다. 하나가 정당과 달리 ‘대표성’의 제약이 크지 않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전면에 부상하는 방식이라면, 다른 하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등장해 위기를 수습하는 ‘케사리즘’이다. 그러나 신 교수는 파시즘과 같은 ‘반동적 케사리즘’의 등장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명박 정부의 통치 방식이 반동적 형태를 띠고 있긴 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1920~30년대 유럽에서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대중 동원’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본격 파시즘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낮다는 이유에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권력자원의 집중과 정치의 탈공공화로 요약되는 지난 1년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세계사적 보편으로부터 ‘경로이탈’하고 있음을 보여준 시기”라며 “치안국가의 등장은 신자유주의 국가의 일반적 특성이라기보다 짧게는 1987년 체제, 길게는 한국 민주주의의 사회적·제도적 취약성과 관련된 것인만큼, 한층 역사적이고 정교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 [커버스토리]민주주의 퇴행,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2009 01/20 위클리경향 809호, 정요인 기자) 진중권 교수 “미네르바 체포, 독재국가냐” 일갈
이 대통령, 집회결사의 자유를 ‘떼법’으로 인식
1월 8일, 청와대 지하벙커에는 야전사령부가 설치됐다. 비상경제대책회의라는 이름이다. 주적(主敵)은 ‘경제위기’다. 이명박 대통령이 주재한 첫 회의가 열린 1일 8일 오후, 다음 아고라를 무대로 활동하던 ‘미네르바’의 긴급체포 소식이 타전됐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 예견 등으로 ‘인터넷 경제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던 누리꾼이다. 김유정 민주당 대변인은 “청와대 ‘지하벙커’ 첫 작품이 미네르바 체포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넷은 들끓었다. “당국의 발표대로 ‘미네르바’의 정체가 공업고등학교·전문대를 졸업한 30대의 무직자가 맞다고 하더라도 긴급 체포는 무능력을 자인한 꼴”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진중권 중앙대 독문과 겸임교수는 “미네르바의 체포는 파시스트 독재국가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고 일갈했다. 체포 근거는 전기통신법이지만 여권이 강행 신설하려는 ‘사이버모욕죄’의 맛보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국회 입법전쟁’ 시각도 극과 극 현 상황에 대한 시각은 극과 극이다. 입법전쟁에 대한 전직 대통령 코멘트도 정반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은 다수의 표로 당선했으니 다수에 복종해야 한다”라며 “위법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야당을 비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국회 절차가 있는데 도끼로 국회의사당을 깨는 것은 우리나라밖에 없는 것 같다”라며 거들었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독재와 싸운 민주당의 근성이 나타나고 있다”라며 “지난 10년간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유했던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협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1월 9일자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정치학 교과서에 의회주의는 ‘의회가 한 나라의 최종적인 정치적 결정이나 법률 제정을 다수결 원리에 따라 행하는 정치방식과 입장’이라고 쓰여 있다. (중략) 의회주의는 기본적으로 절차적 적법성을 더 중시한다. (중략) 민주당이 단상 점령, 회의장 점거로 법안 상정 자체를 봉쇄해왔으면서 ‘의회주의’를 들먹이는 것은 코미디다. 민주당 의원들이 도대체 어떤 정치 교과서로 공부했기에 단상 점령, 회의장 점거를 의회주의로 잘못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교과서가 궁금했다. 그래서 Weekly경향은 각계의 자문을 얻어 정치학 교과서를 살펴봤다. 연세대 이극찬 명예교수가 지은 <정치학>(제2개정판)은 법문사에서 1984년에 나온 책으로 정치학개론서로는 가장 유명한 ‘교과서’다. 책의 384~393쪽은 ‘의회정치 운영을 저해하는 견해’라는 항목이다. 책은 ‘저해하는 견해’로 둘을 들고 있다. 첫째는 의회주의의 원내주의적 해석이다. 원내주의적 해석이란 이런 것이다. 총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하면 다음 선거 때까지는 다수당의 결정을 곧 국민의 총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다. “일단 선거를 통해서 선정된 의원들은 그 임기 동안에는 무엇이 국가의 원리적 의사인가를 결정할 백지위임장이라도 유권자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385쪽) 김영삼 전 대통령의 첫 번째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김 전 대통령의 말이 잘못된 견해의 첫째로 거론되는 것이다.
둘째는 ‘다수법 원리의 왜곡’이다. 이극찬 교수의 <정치학>에는 “원내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다수당이 표결의 승패는 처음부터 이미 정해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토의 과정을 단순히 그것에 이르기까지의 절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무시해버린다면 그것은 분명히 ‘다수의 폭력’이라 할 것이다”라고 기술돼 있다.
‘교과서’의 바로 다음 기술은 흡사 2009년 여의도 풍경을 담은 예언서의 한 대목을 보는 듯하다. “어쨌든 다수의 횡포 현상이 보이게 되면 소수파는 정책의 대결보다는 오히려 극한 투쟁의 방법을 택하게 될 것이며, 합리적 토의 과정을 거침이 없이 어떤 법안이 다수파의 동의에 의해서 무모하게 통과된다면 그곳에서는 ‘법적으로는 유효,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무효’라는 감정이 널리 유포될 것이 분명하다.”
한양대 제3섹터 연구소의 정상호 교수(정치학 박사)는 “이미 선거를 통해 과반수의 위임을 받았기 때문에 절차적 민주주의에 하자가 없다’는 우리 사회 일각의 주장은 ‘철학의 빈곤’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저열한 이해 수준을 드러낸 논리”라고 단언한다. 정 교수는 말을 잇는다. “그것은 입법독재의 논리다. 대통령 선거나 총선에서 위임받은 것은 총괄적인 위임이다. 개별 정책에 대한 동의가 아닌 것이다. 경부대운하와 같은 개별 이슈는 그때마다 국민 여론이나 의회 공론화를 통해 재추인을 받는 동의가 필요한데 문제는 그 절차를 생략하려는 데 있다.”
정치학 교과서에는 맥키버 교수의 견해를 원용, 다음의 다섯 가지 ‘민주주의의 진위를 가리는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사람들이 정부의 시책에 대해 자유롭게 또는 전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고 할지라도 그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심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가.
둘째, 정부의 시책에 반대되는 정책을 표방하는 조직을 자유롭게 조직할 수 있는가.
셋째, 집권당에 대해서 자유롭게 반대 투표할 수 있는가.
넷째, 만일 집권당을 반대하는 투표가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을 경우, 그 투표로써 정부를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는가.
다섯째, 그리고 이와 같은 문제를 결정짓는 선거가 일정 기간 또는 일정 조건하에서 실시될 수 있는 입헌적인 조치가 되어 있는가.
(이극찬, <정치학> 455~456쪽)
첫째와 둘째·셋째 물음은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투표의 자유 등이 보장되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넷째는 정권의 평화적 교체 가능 여부 문제이며 다섯째는 민주적인 선거 절차 확립 여부에 대한 물음이다.
맥키버 교수는 이상의 물음에 대해 단 하나라도 ‘아니다(No)’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하나의 예시만 들어도 답은 간단히 나온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정책 철회를 외치다 연행·구속된 촛불시위 참가자들은 현재 심신의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이른바 사이버 모욕죄든, 마스크 방지법이든 이명박 정부가 현재 추진하는 법이 전체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헌법에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시위의 자유가 개별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것은 다 까닭이 있다. “언론·출판의 자유는 회사를 갖고 있거나 언론·출판이라는 지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만 누리는 자유다. 반면 가지지 못한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집회·시위밖에 없다. 미디어 관련 법안 등을 보면 언론·출판의 자유를 강한 자가 누리는 자유 쪽으로 위축시키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더 큰 문제는 집회·결사의 자유를 대통령이 ‘떼법’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이야말로 헌법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헌법적 가치의 훼손 문제는 더 심각하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1987년 국민투표로 최종 개정되었다. 국민의정부·참여정부 시절이 아니라 노태우·김영삼 정부 때 만든 합의다. 헌법 연구자들은 그래서 현 체제를 ‘1987년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헌법 아래서도 ‘범죄와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공안정국 조성, 국회 날치기 통과, 국가보안법 사건 등이 벌어졌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집시법 개악은 이명박 정부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돼왔고, 참여정부 때 농민 3명이 맞아 죽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 퇴행 문제에서 이명박 정부가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국 교수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헌법적 가치의 조문 하나하나는 계급이나 계층, 정파에 따라 해석을 달리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가 양심의 자유에 해당하냐는 것이 단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네 정권 아래에서는 가능하면 민주주의와 인권, 헌법적 기본권을 강화·확장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흘러왔다. 이명박 정부가 이걸 10년 전으로 돌리려고 하니 혼란이 오는 것이다.”
87년 개헌 때 원래부터 있던 임시정부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 계승은 남았고 5·16은 빠졌다. 헌법 가치에 근간해야 할 정부기관이 4·19를 데모라고 칭한다든가, 건국절 논란, 박정희 정권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헌법정신에 대한 ‘도발’이라는 지적이다. 전문은 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총강의 1장 1조의 규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 교수는 “대의민주주의가 국민주권을 온전히 수렴하지 못하거나 반영하지 못할 때 다른 방식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규정한 것이 헌법 전문에 언급된 3·1운동이나 4·19의 계승”이라며 “전문과 같이 고려했을 때 헌법 1장 1조는 불의에 항거하는 국민의 저항권을 명백히 인정하는 조항”이라고 말했다.
촛불시위를 두고 집시법 상 야간집회 금지 등을 들어 불법성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더 상위 개념인 헌법적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 집시법에 대해 제기되어 있는 위헌제청도 같은 취지다. 이밖에도 일부 경제계를 중심으로 폐지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헌법 9장, 경제와 관련한 조항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토지공개념, 국토균형개발, 농어촌개발, 소비자 보호, 중소기업 육성 등의 내용을 담은 이 조항은 그전 정권에서는 그나마 의식을 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 깡그리 무시되고 있다는 것. 비규정직 문제나 수도권 규제 완화 등 이명박 정부가 우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받아 시행하겠다는 대부분 경제정책이 9장에 대한 위헌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명박 정부와 여권이 ‘악법’ ‘5공·유신으로 회귀’와 같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지난 1년간 여러 사례로 볼 때 지금 체제의 코어(core) 그룹에서 분명히 단호하게 판단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가 보기에 대통령제 아래에서 집권 1년차에 현 정부처럼 ‘위기’를 경험한 사례는 드물다. 지금 상황에서 반대 진영, 야권과 시민사회, 누리꾼까지 포괄해서 확실히 제압하지 않으면 남은 집권 4년을 식물 대통령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단이라는 것이다. 박 대표는 그러나 전선(戰線)만 중심으로 현재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진단한다. 일부 행동파 중심으로 꿈꾸는 ‘이명박 없는 체제’는 “주장하면 할수록 전체 시민사회와 간극을 벌일 뿐이기 때문에 착실히 성찰하면서 대안을 만들 때”라는 지적이다. 박 대표는 “오늘의 이명박 정권을 만든 것도 지난 10년 소위 ‘민주파’의 무능력에 대한 실망 또는 반발 때문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다시 이명박 정부다. 현재의 대립은 진보-보수와 같은 이념 대립 상황이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조국 교수는 “합리적 보수파 정권이라면 사회통합을 통해 실력·권위를 보여줘야 하는데, 상당히 위험한 전략이지만 30%의 지지기반으로 끝까지 가기로 작정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의 정치적 냉소주의와 투표율로 볼 때 30%만 똘똘 뭉치면 정권재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표를 안 줬던 사람,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더 이상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내놓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암울하다. 여권 내에서도 매파가 득세하면서 비둘기파는 밀려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는 정치적 반대세력뿐 아니라 국민이 될 것이라는 게 더 큰 불행이라는 지적이다.
------------------------------------- [커버스토리]전체주의는 어떻게 부화하는가 (2009 01/20 위클리경향 809호, 정원식 기자)
신진욱 교수 “현 정부는 대처 시절 영국, 레이건 시절 미국에 가깝다”
집권세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공권력이 시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어이없는 상황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민주주의 최일선을 달리는 미국에서조차 민주주의 위기와 파시즘 대두를 경고하고 있다. 실례로 2006년 6월 미국 환경운동가 스티븐 하워드는 아들을 피아노 레슨에 데려다주는 길에 당시 부통령 딕 체니 일행이 쇼핑몰에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하워드는 체니에게 다가가 ‘당신의 이라크 정책은 비난받을 소지가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10분 뒤 하워드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고, 그는 ‘부통령을 공격한 혐의’로 기소됐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나오미 울프는 2007년 펴낸 <미국의 종말>에서 2001년 이후 미국에서 이와 같은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다고 지적하면서 부시 행정부 시기 미국 사회가, 민주주의가 ‘파시즘으로 이행하는’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고 진단했다.
1920년대 이탈리아와 1930년대 독일에서 대두한 파시스트 정권은 기존의 민주적 제도를 합법적으로 활용하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먼저 의회에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하는 법을 제정하고 문화적 압력을 행사하면서 사법기구와 친위 기구를 동원해 시민들에 대한 일상적인 사찰과 공포 심리를 조성했다. 그러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법치를 강조했다. 히틀러는 합법적 절차를 거쳐 1933년 총통의 지위에 오른 지 일 년 뒤 뉘른베르크에서 행한 연설에서 “명확히 말하건대, 국가사회주의 정부의 기초는 국가사회주의 법률이다”라면서 나치 독일을 가리켜 “질서, 자유, 법의 나라”라고 불렀다.
시민들의 사생활을 훔쳐보려는 것은 파시즘의 전형적인 속성이다. 1927년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전화를 도청하고 교황까지 비밀 사찰 대상으로 삼았다. 1930년대 독일의 복지 관련 공무원들은 ‘비사회적 시민’의 명단을 작성했다. 2005년 12월 16일자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 재무부 관리들은 2006년 한 해 동안 CIA의 도움을 받아 영장이나 소환장 없이 수백만 건의 개인 은행거래 내역을 조사했다.
언론에 대한 압박도 파시즘의 주 메뉴다. 1923년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지역 조직들은 어떤 신문이 국내외에서 국가의 신뢰를 해치는 보도를 했거나 여론을 자극하여 질서를 교란했다고 판단될 경우 해당 신문사의 재산을 압류하고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1933년 나치 독일의 선전상 괴벨스는 불과 6개월 사이에 국영 라디오 방송 직원의 13%를 해고했다.
부시 지지자인 케니스 톰린슨은 미국 공영방송 PBS의 재정을 지원하는 재단 회장으로 임명된 뒤 직원이나 출연자 들의 정치적 성향을 조사하는 작업을 벌였다. 2006년 7월 PBS 어린이 프로그램 <굿나이트 쇼> 진행자 멜라니 마르티네즈는 부시의 음주운전 경력을 풍자한 금주 교육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이 빌미가 돼 해고됐다.
위의 사례들은 서유럽의 고전적 파시즘 체제와 울프가 ‘파시즘 이행기’였다고 규정한 부시 행정부 시기 미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일부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공공연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2009년 한국 사회는 이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미국의 종말>을 번역한 성공회대 김민웅 교수는 “민주주의와 파시즘 간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단정했다. 그는 파시즘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집권 세력과 대자본이 동맹을 맺는 체제”로 규정하고 “영구적인 권력을 획득하려는 정치 권력과 영구적인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는 자본의 입장에서 민주주의는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신문방송 겸영과 재벌의 방송 참여를 허용하는 방송법과 인터넷 여론을 통제하려는 사이버모욕죄 도입 시도는 이를 위해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려는 수단이라고 봤다. 김 교수는 “지금 정부가 속도전을 강조하면서 지하벙커를 만드는 행태를 보면 지금 같은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토론과 합의 같은 민주적 절차는 한가한 놀음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중앙대 신진욱 교수는 “엄밀히 말해 파시즘 체제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어떤 체제를 파시즘이라고 규정하려면 정권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가 있어야 하는데, 권위주의적 권력 행사 이외에 파시즘이라고 단정할 만한 요소를 찾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군사독재 시기에도 자유민주주의 이념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했다”면서 “한나라당이 강경파의 압력 속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야당과 합의를 도출한 걸 보면 집권세력이 더 이상 한계를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그럼에도 파시즘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촛불집회 이후 의회를 건너뛰고 관료와 검경 등 선출에 의한 대표성을 띠지 않는 기구들이 전면에 나서 강제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과 ‘조계사 횟칼 테러’에서처럼 우익세력의 대중동원 양상이 나타났다는 점을 그 징후로 꼽았다. 신 교수는 “역사적으로 대비한다면 현 정부는 대처 시절의 영국, 레이건이나 부시 시절의 미국에 가깝다”고 진단했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는 “대처와 레이건 정부가 등장했을 때 서구 학자들은 ‘프렌들리 파시즘’ ‘부드러운 파시즘’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말했다. ‘부드러운 파시즘’이란 전통적인 파시즘처럼 공개적 의미의 독재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일을 진행하는 방식이나 멘탈리티가 정상적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측면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파시즘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복합적이기 때문에 어떤 체제를 쉽게 파시즘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파시즘 연구의 대가 로버트 O. 팩스턴은 “모든 사람을 남김없이 만족시킬 수 있는 파시즘 해석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썼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조금씩 이전과 다른 억압적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연세대학교 나임윤경 교수는 “파시즘의 특성은 전체주의라기보다 구성원 사이에 차이를 조장하면서 상호 불신과 반감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노동·경제 정책은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를 비판하기보다 경쟁 구도 안으로 자발적으로 흘러들게 유도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정작 자신의 정체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파시즘의 정체가 아닐까”라고 우려했다.
참고자료<파시즘>, 로버트 O, 팩스턴, 교양인
<미국의 종말>, 나오미 울프, 프레시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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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파시즘화 논의는 의미가 있다. 레디앙의 기사는 몇몇 사람의 코멘트를 따서 파시즘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다루고 있지만, 좀더 심도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반독재국민전선이냐 아니면 반신자유주의투쟁전선이냐의 대립구도로 파악하여 구성한 논점 자체는 잘 잡았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주강현 소장의 경향신문 기고글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우리 사회가 파시즘으로 흘러갈 가능성은 아직은 없지만, 그 성숙 조건과 조짐은 충분히 보인다고 지적한다. 이는 반합리성의 강화, 불평등을 미덕으로 찬양하는 사회분위기, 일상적 파시즘이 생활양식으로 내재화, 한국인의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적 측면, 다중의 소시민화로 요약되는데, 주강현 소장의 글에 나타나는 이러한 추상적인 조짐보다 그 예시로 드는 구체적인 사례가 훨씬 설득력이 있다. 주강현 소장과 조현연 교수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대안을 어떻게 만들어나가느냐를 고민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이를 구체화해나가는 일일 터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강현 소장도 제시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주강현 소장의 글의 일독을 권한다.
우리 사회는 파시즘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접된 어떤 예감이 하시라도 닥쳐올 수 있는 사회이다. ‘촛불’을 위시한 미래적 힘과 사회진보적 역량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역으로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자본에 포섭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 자본의 힘이 흔들릴 때 한국 사회는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공황상태로 접어들 것이고 파시즘적 그 무언가에 기댈 가능성도 짙다.
한국 사회에서 돈이 지고의 가치가 된 순간부터 진보와 보수는 ‘하나’가 되었다. 관료들에게 통제당하던 재벌들이 어느 순간 관료들을 끌고다니는 역전극이 벌어지는 순간, 한국 사회는 새로운 체제로 돌입했다. 전 국민의 증권화, 영어에의 올인은 상징적 사건들일 뿐이다.
외형적으로는 노무현 정권의 진보성과 현 정부의 보수성으로 나누어서 판단하고 일정 부분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노정권이 진보적이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일상적 파시즘을 경계하는 논의가 활발했고 부분적으로는 성공한 측면도 있지만, 생활양식으로서의 파시즘적인 태도가 지난 10여년간 숙성되어 갔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등장은 지난 10여년의 결과가 빚어낸 열매일 뿐, 우연은 아니다.
사회 진보의 속내는 결코 시대를 뒤따라가지 못하였다. 멍청하게 대처했던 여당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민주당은 정체성도 없이 지리멸렬하고, 선진당과 창조한국당 같은 짝퉁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분명히 뒤로 돌려놓았다. 시민단체는 많지만 시민은 별로 없고, 진보정당은 둘이나 있지만 젊은층은 별로 없고, 환경운동가연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환경은 더욱 더 나빠지는 식이다.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지난날 종로5가의 진보적인 목회자들의 민중신학 전통은 어디로 가고 낡은 미국식 근본주의신학만이 떨치고 있을까. 한국 역사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종교간의 분쟁 조짐이라는 기가 막힌 현실은 어쩌면 필연적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제 문제를 오늘의 단기지속의 결과물로만 보는 것은 그야말로 근시안이다. 한국 사회는 ‘섬’이다. 남한 사회에서 외국을 나가려면 반드시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한다. 절반이 휴전선에 막혀 있는 이상 결코 대륙에 딸린 한반도가 아니라 섬나라일 뿐이다. 인맥·지연 따위로 얽혀진 섬답게 늘 작은 일로 분노하고 흥분하고 들끓는다. 세계 어느 곳에서건 섬나라는 쏠림이 강하다. 한반도라는 통일적·대륙적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나,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섬으로 살아왔다는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해양사적으로는 반도도 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들끓는 한국 사회를 우리는 그저 ‘냄비근성’식의 감성론으로 치부해왔다.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 관심을 표명하고 주식 등 경제에 관심을 갖지만, 정작 표를 까보면 정치의식 수준이 현저하게 낮고 부동산 투기 중심의 천민자본주의형이다. 이웃 일본을 섬나라 근성이라고 구박하지만 정작 우리가 섬나라 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만 모를 뿐이다. 섬나라에서는 논란도 뜨겁지만 냉각도 순식간에 이루어지며, 일치단결·대동단결된 흐름으로 촛불을 만들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물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파시즘적으로 흘러갈 가능성, 아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숙 조건과 조짐은 충분히 보인다.
첫째, 우리 사회에 반(反)합리성이 강화되고 있다. 사기, 여타 범죄를 일으켜 감옥에 가는 경우도 있지만 반합리적인 논리로 살아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러한 반합리적 세력이 견고한 연합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귀족-자본-군부 등이 견고한 연합전선을 폈던 스페인의 파시즘처럼, 한국 사회도 비슷한 연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반합리성이 연대를 형성하면 위험사회가 되고 만다. 가령 작금의 대북문제가 그러하다. 반합리성이 우리 사회를 완벽하게 지배하게 되면 불행하게도 연합을 형성한 몇몇의 선택 그룹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흐려지고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파시즘의 본령은 인간 불평등 자체를 지지하는 바, 불평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을 미덕으로 찬양하는 사회로 진입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평등’이라는 말은 여간해서는 쓰지 않는 금칙어가 되었으며 무능력의 대명사가 되었다. 명품, 브랜드 가치 따위의 구호는 상업적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 가치의 우선이다. 세계 경제력 10대 순위 국가라는 국가 홍보는 범람하지만 사회 안전장치는 후진국이다. ‘개천에서 용나는 일’은 사라진 지 오래며, 각종 인적·문화적·물질적 자본으로 무장한 상위층에 의해 ‘수월성’이란 이름의 특권적 교육선택권으로 전환된 지 오래다. 선택된 ‘우월한 종자’는 선택된 교육의 결과, 멕시코형의 지극히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다.
불평등의 대표격은 비정규직 문제이다. 이만한 한국 사회의 뇌관도 없다는 생각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을 하대하며,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 자체를 거부하는 노조가 다수라는 것은 뇌관이 ‘자본-노동’ 대립 이전에 노동자 내부에도 존재함을 말해준다. 노동자계급 자체가 소시민화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소시민화는 20세기 벽두의 독일 노동자계급이 그러하였듯이 파시즘 발호의 더할 나위없는 토양이 될 것이다.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들과의 대응방식은 ‘학교-비정규직 강사’ 이전에 ‘정규직 교수-비정규직 강사’와의 1차적 ‘노예’관계이다. 이런 구조는 조교 연구자의 사용화(私用化)로 일상화되었다.
셋째, 일상적 파시즘이 생활양식으로 내재화하고 있다. 폭력은 폭력을 가하는 자와 폭력을 당하는 자, 모두의 삶을 망가뜨린다. 한국 사회의 일상적 폭력과 법적·정치적 폭력은 사회 전체를 폭력으로 길들여가고 있다. 백주테러의 형식을 갖춘 구사대의 폭력, 정치적 폭력, 언론에서의 폭력 등이 만연되고 있어도 사회적으로 무감각하다. 워낙 강력한 폭력에 길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폭력들은 ‘다른 세상’일 뿐이다. 국가적 폭력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며, 폭력에 길들여진 소시민들은 잠시 동안은 분노하지만 본질적 분노는 표하지 않는다. 진정한 분노는 자신의 주식값이 떨어졌을 때만 허락되기 때문이다.
한때는 스포츠와 권력, 스포츠와 정치 등의 제 관계를 되묻고 고민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노력조차 사라졌다. 88년 전통에서 월드컵으로, 베이징올림픽으로 나날이 스포츠는 고공 행진이다. 스포츠 강국으로 모든 것을 만회하려는 듯, 축구에 흥분하고 야구에 놀라고 수영에 뒤집어진다. 국민 건강과 직결된 생활체육은 온전히 개인의 부담이며, 비만문제에서조차 빈부 격차가 벌어진 지 오래다. 몸을 둘러싼 파시즘, 혹은 국가의 개입이 일상화되어 있다. 황우석 집단을 비롯한 지난 수년간의 윤리적 논쟁은 인간의 몸과 생명을 둘러싼 과학집단과 국가-자본의 개입 결과일 뿐이다. 국가가 인간의 몸에 개입할 수 있는 파시즘적 양상을 황우석사태는 너무도 충분히 보여주었다.
넷째, 한국인의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적 측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외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한국인, 한국 문화의 협한화로 귀결되고 있다. 왜 협한화일까. 한국인들은 미국인·서구 유럽인은 좋아해도 흑인이나 동구 유럽인은 깔본다. 매케인을 반대하면서도 정작 흑인인 오바마를 지지할 수 없다는 백인층의 고민 비슷한 것을 한국의 중산층도 지닌다. 재미동포는 여전히 대우받지만 재중동포나 이른바 고려인들, 탈북자 또는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인들은 3등인간일 뿐이다. 오래 전에 문제가 되었던 이런 인종차별이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
파시즘의 가장 대표적 형태 중의 하나인 인종주의에서 한국인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반영한다. 한국 사회 노동계급의 하부단위 40만명이 외국인이지만 ‘고용허가제’로 통제되어 불법체류인이 양산된다. 수십만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만 사용자인 일반시민 다중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식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유럽 극우파시스트식의 직접적 폭력은 없어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은 나을 것이 없다.
한국 자본은 베트남 투자 1순위를 기록하면서도 현지에서의 일상적 노동착취에 전념한다. 제국 아류로서 그 역할을 해내고 있을 뿐이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국내 진보단체들은 이들 문제를 등한시하고 있다. 1970년대, 마산·창원 공단에 진출한 일본 기업의 횡포를 적극 고발하였던 일본의 양심적 활동가 같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거의 없다.
세계화·국제화? 미국은 잘 모르겠으나 유럽 국가에서 한국학을 주전공으로 가르치는 교수 요원이 불과 10명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자부하는 한류는 고작 베트남 따위에 머물며, 그 한류라는 것이 얼마나 허위의식으로 가득찼는가는 이 지면에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한류의 미국과 유럽 진출, 현재 구조로는 불가능하다.
파시즘은 여성의 몸과도 관련된다. ‘수입 색시’가 싼값에 ‘구매’되고 가정 폭력으로 이들이 목숨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러시아와 필리핀 여성들이 매춘 조직에 인계되어 혹독한 조건에서 몸을 팔고 있어도 우리의 중산층 중심 여성운동의 논의 중심은 못된다. 저평가된 아파트값 상승을 고려하면서 장안평 ‘창녀 소탕작전’에 환호를 보내는 주민들에게 창녀는 창녀일 뿐이다. 매춘녀, 매매춘녀 등 그럴싸한 표현은 사실 허구이다. 오늘도 수많은 남성들이 룸살롱의 ‘몸의 식민지’에서 ‘제국의 일상’을 보내며, 골프채를 둘러메고 아시아의 또다른 식민지에서의 섹스관광에 나서고 있다.
무엇보다 이라크 파병 등에서 보여주었듯이 한국인들은 국제적 책무나 도덕적 연대에 무감각하다. 외국의 모든 군대가 빠져나가도 나홀로 지키겠다는 한국인들의 불필요한 의무감은 일찍이 베트남 전쟁터에서도 발휘되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반성은 망각으로 대체되었으며, 한국은 미국이 관계하는 전쟁마다 늘 투입전야 태세이다. 지구상에 이런 ‘5분대기조 국가’가 있을까. 국제적 용병으로서의 이미지만 굳히고 있는 중이다.
다섯째, 다중의 소시민화다. 경제적 이득만 된다면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것이 망가져도 좋다는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환경운동의 오랜 축적에도 불구하고 새만금 따위는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도도한 지역주의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그 어떤 환경논리도 뛰어넘었다. 구두선으로 환경을 되뇌지만 막상 자신의 지역에 문제가 되자 경제논리만이 앞섰다. 자신들의 뼈를 묻을 화장터 하나 세우는 데 전 시민이 대동단결해 반대하는 나라가 세계에 또 있을까. ‘님비’라고 간단하게 표현하지만, 경제속물적 판단일 뿐이다.
학력으로 인한 피해를 적잖이 본 입장에서 극도의 입학경쟁을 막아야 할 처지에 서 있는 피해자들이 오히려 경쟁관계 지지에 나서고 있다. 대학과 초·중등학교, 사설학원집단은 연합을 형성하고 있으며 학부모들은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람사르 총회를 유치한다고 떠들썩하면서 불도저로 우포늪 외각을 허물었다. 근대문화유산을 역설하면서도 일제시대 서울시청 건물을 무너뜨렸다. 문화유산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600년 전란도 피해온 숭례문을 태워버렸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지만 결과는 매번 완패다. 불은 날 것이고 문화재는 파괴될 것이고 자연은 황폐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티즌의 흥분과 분노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망각이란 병이 온 사회를 감염시킨다. 망각은 한국 사회가 지닌 고질병이며 시도때도 없이 발병하는 만성병이다. 과거사 청산에 대한 논란과 식민지근대화론의 정체도 과거를 깡그리 잊은 온갖 망각병의 산물이다. 망각은 파시즘으로 가는 좋은 토양이다.
파시즘이란 결국 야만으로 가는 길이다. 그토록 열렬히 촛불을 드는 한국 사회의 건강성이 설마 그런 야만의 길을 갈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짐’은 충분하다. 분단국가인 데다 하나의 고립된 섬이다. 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유사시에는 가공할 폭력이 가해질 가능성이 상존하는 나라이다. 필자의 주장이 과하다고 생각이 된다면 필자의 전공분야로 되돌아가 마무리를 해보자.
인문학을 살린다고, 살려달라고 곳곳에서 난리다. 학술진흥재단은 지난 10여년을 관통하면서 대단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어떤 대학도, 어떤 연구자도 지원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려운 학회 살림, 연구소 살림에 짭짜름한 지원금(사실은 세금 돌려받기)이 고맙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제 학진은 더이상 단순 지원기관이 아니다. 학문 줄세우기를 본격화한 지 오래다. 배고픈 비정규직 시간강사들은 연구교수 등 각종 지원책에 목숨을 걸고 있다. 가장 맑고 영민하게 연구하고 독립적인 사고를 펼쳐야 할 학문 후세대들부터 줄서기에 몰두한다. 인문정신은 어디로 갔을까.
지난 10여년간 학진의 지원을 받은 연구들이 엄청 이루어졌는데 인문학이 중흥되었다는 소식은 없고 위기의식(돈 없다는 목소리)만이 강조된다. 재탕·삼탕 연구, 표절 및 중복 등이 만연하고, 국가적으로 약속된 연구만 수행하는 반인문적 현상이 만연되고 있어 ‘돈이 없으면 연구도 안한다’는 상식이 만연되었다. 학자의 능력은 연구논문보다 연구비 신청서 작성과 자금 유치로 결정된다. 그나마 학진을 해체하고 통·폐합된 거대 조직으로 키운다고 한다. 이제 인간 양심의 최후 보루인 인문학조차 국가주의의 냉혹한 부름에 응할 뿐이다. ‘야만으로 가는 길’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 대한민국, ‘파시즘’ 국가로 가고 있나? (레디앙, 2008년 10월 06일 (월) 10:46:56 정상근 기자) 두 개의 시각과 대응 방안…반독재 vs 반신자유주의 전선
최근 이명박 정권의 ‘파시즘적 성격’을 우려하거나 경고하는 목소리가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대중 여론을 무시하고 소수의 이해관계를 '비타협적'으로 관철시키면서, 이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나 가치는 외면하고, 권위주의 정권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언론 장악을 위한 노골적인 힘의 행사나 유모차 엄마와 고등학생에까지 사법 처리를 강행하는 등 권력이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질서와 준법이라는 전체주의적 가치 속에 개인들의 요구 표출을 '공포와 위협의 정치'를 통해 억제하는 태도 역시 이 같은 경고음을 발하게 만들고 있다.
노동부가 최근 내려보낸 '노동조합 지도지침'은 노동운동을 현장에서부터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그대로 드러났으며, 비판적 시민단체들을 목조르기 위해 후원금 차단 등을 노린 기업체 협박도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공안통치 기구'들이 맹활약을 하고 있다.
또한 한국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키는 이명박 정권의 불균형 성장 정책은 그의 임기 안에 보다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초래할 것이며, 이 국면에서 한국사회의 파시즘화 가능성이 매우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가세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파시즘화 가능성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행태에서 '파시즘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한국사회의 파시즘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파시즘화를 우려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우석훈 박사는 최근 저서인 『괴물의 탄생』(개마고원)을 통해 “경제위기 국면에서 ‘한나라 일당독재 파시즘’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파시즘으로의 전환 속도가 더 빨라지면 ‘MB 파시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찰국가로 급속도로 전환될 것"으로 전망했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부교수도 <레디앙>과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이명박 정부가 통치 방식을 다소 강경화시키고 반체제적 움직임들을 분쇄시키는 것은 물론, 개혁주의적 사회 투쟁의 기회마저도 빼앗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민족주의의 이용과 통치 방식의 폭력화 차원에서 ‘파시즘적 요소’를 인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성희 소통과 혁신연구소장도 최근 <레디앙>에 기고한 글을 통해 “세계경제공황이 종종 파쇼와 전쟁, 제3세계 식민지 종속국의 혁명을 야기하는 환경을 조성했음을 역사는 말하고 있으며, 지금 이명박 정권이 위기에 놓인 내외 독점자본의 충견 노릇을 자임함으로써 서서히 파시즘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파시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뉘앙스 차이가 있다. 노회찬 진보신당 공동대표와 박노자 교수,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는 현정권의 '파시즘적 요소'를 인정하면서도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조심스러워 하는 반면, '반독재 국민전선'을 제안했던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과 정성희 연구소장은 '파시즘화'를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현정국을 보는 정세 인식과 대응 방안의 차이로도 나타난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현재 이명박 정부의 파쇼화와 공안탄압에 대응하는 '반독재 국민전선'을 주장하면서 '반이명박' 세력을 결집하는데 힘을 모으는 반면, 노회찬 대표와 박노자 교수 등은 '반신자유주의'가 주전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노당-이석행-정성희 '반이명박' 전선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최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반독재 국민전선’에 대해 “정권의 폭주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자, 그리고 모든 개인이 연대하는 ‘거대한 전선’을 만들어내야 한다”며 “정권의 탄압이 강해지고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혼자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며 연대의 강도와 폭도 단단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성희 소통과 혁신 연구소장도 “진보개혁세력이 현명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실제 이 땅에 파쇼와 전쟁 위기가 도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며 “오늘의 '반이명박 범국민연대' 준비는 이 같은 엄혹한 정세와 맞닿아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도 최근 '촛불-공안탄압 저지 대책위'를 구성하며 “‘촛불-공안 탄압대책위원회’는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야당 및 야당 정치인들과도 연대해 국가보안법 탄압과 촛불탄압에 대한 총체적 대응을 모색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반신자유주의 연대’를 강조하는 쪽은 이 대통령의 경제사회 정책을 지난 10년 동안의 '민주파' 정권과 구분짓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이 대통령은 이들 정권과,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에 관한 한 연장선에서 있으며, 현 시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민주정부-이명박 정부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해 저항하고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노회찬-박노자-조현연 '반신자유주의' 전선 노회찬 대표는 <레디앙>과의 인터뷰를 통해 “‘반독재국민전선’이 형성된 가운데 FTA가 강행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반독재국민전선’에는 FTA 찬성론자, 반대론자 모두 다 들어올 것 아닌가? 또한 비정규직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비정규직 악법을 통과시켰던 사람들과 더불어 해야 하는가?”라고 비판하며, “‘반신자유주의’가 진보진영의 주전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박노자 교수도 “히틀러-무솔리니의 국가통제형 경제와 달리 이 대통령의 기본적인 경제 구상이 독점기업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의 독식을 돕는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존의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친재벌적 신자유주의를 계승, 발전하는 차원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어 “이 대통령의 폭력적 요소가 있는 통치 스타일에 대해 자유주의 좌파가 다소 반대할 수도 있지만 친재벌 신자유주의라는 차원에서는 이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유시민 등이 사실 ‘공범’”이라며 “그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국민전선’ 전략보다 ‘반신자유주의’, ‘반재벌’ 전선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재벌 위주의 수출주도경제 대신 공공 영역과 중소기업 위주의 내수 주도적 복지 경제 모델의 실현이어야 한다”며 “그러한 모델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 재벌들에게 정치 자금을 받는 자유주의 좌파 정객들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듯하다”고 말했다.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 역시 “현정권이 파시즘 경향은 있지만 그렇게 규정지을 순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 이후 경향적으로 파시즘이 가속화되는 것도 있지만 이 정부를 파시즘으로 규정한다면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과 구분이 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이 정부는 소위 민주정부 10년과 연결선상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어 “1일 노동부의 노조 지도지침이 지침이 너무 노골적이긴 하지만 사실 이전 10년의 정부에도 노동에 대한 탄압은 있어왔다”며 “이명박 정부를 파쇼로 규정지어서 마치 지난 10년이 ‘조금 나았던 시간’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