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지기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갑자기 페북 뉴스피드에 위의 문구가 여기저기 눈에 뜨여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아래 기사를 보고 의문이 풀렸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82114.html
한겨레의 이문영 기자가 조세희 샘의 '숨겨진 작업 노트' 22권이 공개된 것에 붙여 쓴 기사에 그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기사의 말미에 조세희 샘이 작업노트 어느 구석에 남긴 이 문장이 워낙 인상적이고, 여전히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던 것이다. 나에게도 그러하다. 좀더 치열해져야 한다.
덧붙여,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다가(올초부터 앞으로 더이상 보지 않거나 책 욕심에 억지로 보관해왔던 책들을 버리는 작업을 시나브로 진행하고 있다) 그간 어디 쳐박혀 그 존재 여부가 희미했던 난쏘공을 우연히 발견했다. 헌책방에서 산 것인데, 이건 버릴 수 없지. 1979년에 나온 14쇄판이다. 시간나는대로 함 읽어봐야지.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82114.html
조세희의 미공개 노트 “우린 지기만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겨레, 이문영 기자, 2023-03-04 07:00)
[한겨레S] 커버스토리
고 조세희 작가 ‘숨겨진 작업 노트’ 22권 첫 공개
신의 아들이 2022번째 연례행사로 세상에 오던 날, 80살의 소설가는 다시 올 일 없는 세상을 떠났다. 신의 아들은 천국에 이르는 길을 열기 위해 이 땅에 왔지만 이 땅의 지옥을 그려온 소설가는 천국에 대한 기대 없이 숨을 거뒀다. 유품은 단출했다. 한국문학사에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남긴 작가였으나 평생 단편집 두 권과 사진 산문집 한 권만 남겼다. 가족에게 물려줄 재산은 남기지 못했고 가난을 대신 남겼다. 몇 장인지 모를 사진들을 남겼다. 몇 권 갖고 있지 않던 책들은 남기지 않고 말년에 모두 버렸다. 미출간 장편 하나를 남겼지만 어찌 처리하라는 유언은 남기지 않았다. 남긴 것보다 남기지 않은 것들이 많아 남은 자들을 안타깝게 만든 그가 사후에도 남아 주길 바랐는지 알 수 없는 ‘메모 더미’를 남겼다. 그동안 아무도 존재를 몰랐던 그 기록들이 얼마 되지 않는 유품들 틈에서 발견됐다. 오랜 세월 출간을 둘러싸고 전설 같은 이야기를 뿌려온 ‘그 원고’의 작업 노트들이었다.
글의 운명이 있다면
마침내 ‘아침’이 온다.올 듯 올 듯 하면서도 밝아오지 않던 아침이 ‘첫 예보’ 뒤 꼭 30년 만에 온다. 아침이는 고 조세희 소설가가 끝내 책으로 묶지 않은 장편소설 <하얀 저고리>의 주인공(동명이인)이다. 연도를 알 수 없는 먼 옛날부터 5·18광주민주화운동까지를 다룬 소설에서 노비의 딸(조선시대)과 영희 남매의 증조할머니(현대)로 나온다. 소설은 수백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가난과, 불평등과, 독재와, 학살과, 저항의 역사를 꿰고 잇는다. 1990년에 111살인 아침이는 “국민에게 총질한 큰 죄인들이 죽어 땅에 묻히는 것을 보기 전”엔 눈감길 거부한다. 그 아침을 맞지 못하고 먼저 눈을 감은 작가를 대신해 유족들이 원고를 정리하며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하얀 저고리>는 길고 긴 시간 동안 출간 예고와 번복을 되풀이하며 소설보다 긴 이야기를 써왔다. 원고는 1988년 3월부터 2년간 <월간중앙>에 나눠 실리며 처음 활자가 됐다. 광주 참상의 책임을 묻는 ‘5공 청문회’(1988년 11월)가 열리기도 전이었다. 작가는 박정희·전두환과 그 조력자들의 실명을 써넣으며 에두르지 않는 언어로 비판했다. 1990년 겨울(조세희 특집호)부터 1991년 여름까진 계간지 <작가세계>에 세 차례에 나눠 재연재했다. 현직 대통령 노태우의 이름을 명기한 도입부를 새로 써서 더했다.
소설 출간(세계사)을 알리는 첫 보도(<한겨레> ‘난쏘공 작가 조세희 7년 만에 새 장편 탈고’)는 1993년 1월5일 나왔다. 인쇄기는 해를 넘기도록 돌지 않았다. “단독 기사는 결국 단독 오보가 되고 말았다.”(당시 작가를 인터뷰해 기사를 쓴 최재봉 기자) 1996년에도 ‘결과적 오보’(1월9일 <동아일보> ‘올 관심 끄는 화제작 쏟아진다: 고은·조세희·이문열씨 등 신작 마무리 한창’)는 계속됐다. 시대 배경을 김영삼 정권까지 늘려 그해 봄 책을 내놓겠다던 작가의 계획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2002년 가을 출간을 재추진하던 세계사는 12년 만에 <작가세계>에 ‘조세희 특집’을 다시 꾸렸다. 잡지 뒷면엔 책 광고도 실었다. 작가와 교정지를 주고받으며 막바지 작업까지 나아갔으나 결국 중단됐다. 출간이 무산될 때마다 추측과 궁금증이 부풀었다. 책을 기다리던 독자들은 아쉬워하며 잡지 연재본을 복사해서 돌려 읽었다.
소설은 오래전에 마무리돼 있었다. 번복을 반복한 까닭은 글을 끝내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작가가 붙들고 있었던 것은 시대였다. 시대의 변신을 지켜보며 언어를 고르는 데 힘겨워했다. “우리 시대의 일들이 작가가 자기 능력에 맞추어 다룰 수 있도록 좀처럼 축소가 되어주지 않는다”(<작가세계> 54호 대담)며 답답해했다. 일본군 출신 군인이 쿠데타로 장기집권을 했다. 독재자의 뒤를 이은 후배 군인이 동족을 학살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던 정치인이 독재·학살 세력과 권력을 합했다. 불의가 정의를 뒤섞어 말로 말을 배반하는 시대가 그의 앞에 와 있었다. “1980년대에는 현실에 비해 언어가 가벼워 계속 부서져 나갔고 90년대에는 세상이 간교하게 바뀌면서 부적절한 언어가 돼버렸다”(2002년 6월13일 <경향신문> ‘조세희씨 “이젠 젊은 세대에 희망을 쏜다”’)며 그는 글을 거둬들였다. 출간 중단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겐 “언어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고 말했다. 쓰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건 싸움이었다.
작가가 출간 의지를 다시 붙잡은 때는 2008년이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1978)이 서른살 되던 해였다. 그해가 가기 전에 원고를 고쳐 묶으려 했지만 이미 뜻대로 글쓰기가 되지 않을 만큼 건강이 나빠져 있었다. 그는 2000년대 초부터 심장 부정맥 등으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길 반복했다. “원고를 보느라 머리를 감싸 쥐고 몰두하시는 모습에 큰일 나겠다 싶어 가족들이 설득해서 중단”(큰아들 조중협 이성과힘 대표)시켰다. 그 뒤로도 병원 진료 때마다 그는 “제가 다시 글을 쓸 수 있겠냐”고 물었고 의사는 그때마다 만류했다. 남은 삶이 길지 않음을 직감한 뒤부턴 “아침이의 말을 풀어주지 못하고 갈까 봐 죽음이 두렵다”고 했다. 그가 영어 알파벳으로 옮겨 이루지 못한 소원처럼 부르고 사용한 이메일 아이디는 ‘이아침’이었다.
조중협 대표는 작가의 1주기(2023년 12월25일)에 맞춰 <하얀 저고리>와 ‘난쏘공’ 새 판본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절판된 <시간여행>과 <침묵의 뿌리>를 차례로 복간하고 작가가 남긴 사진들을 추려 사진집도 낼 예정이다. 작가가 살아서 세상에 내보내지 않은 아침이 작가가 떠난 까닭에 세상에 오게 됐다. 소설가가 쓴 글이었지만 글의 운명이 소설만큼이나 소설 같다.
장례 뒤 발견된 무더기 메모
노트들은 열린 적 없는 상자 안에 있었다.
작가가 40여년을 살았던 좁고 낡고 물 새는 아파트가 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2017년쯤이었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이 서재를 치웠다. 부피가 크지 않은 짐들을 추려 종이 상자에 담았다. 그 상태로 5년이 흘렀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유품을 정리하던 아들은 그동안 잊고 있던 상자를 떠올렸다. 뚜껑을 열자 크고 작은 노트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생전 가족들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소설가의 손글씨 뭉치였다. <하얀 저고리> 작업 노트였다. 그가 남긴 유일한 육필 유품이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노트는 모두 22권이다. 형태와 크기가 다양하다. 공책 12권, 서류철 8권, 수첩이 2권이다. 수많은 소문을 몰고 다닌 소설이었지만 작가가 작품을 쓰기 위해 어떤 시간을 통과했는진 알려진 바 없었다. 그 길고 지난한 시간들이 노트들 안에 상세하고, 치밀하고, 빽빽하게 담겨 있었다.
그가 작업 노트를 만들기 시작한 시점은 확실치 않다. 노트마다 사용 기간을 따로 표시해두지 않았다. 다만 추정 가능한 흔적들은 있다.
그가 작품을 구상한 계기는 광주의 비극이었다. ‘난쏘공’ 출간 2년 뒤의 일이었다. 노트에서 특정 연도가 눈에 띄는 것도 그때부터다. ‘1980년’이 찍힌 수첩 종이를 찢어 메모한 글들이 첫번째 노트에 붙어 있다. 학살 직후 그해 나온 수첩을 들고 다니며 작품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광주’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였던 시절이다.
그의 노트 작성 체계는 독특하다. 격식이나 모양새보다 작업 효율에 중점을 뒀다. 컴퓨터의 도움 없이 정보를 모으고 글을 쓰던 때였다. 흔들리고 구불거리는 특유의 글씨체를 따라가다 보면 시대를 끌어안고 고민했던 한 작가가 스토리를 세우고, 자료를 수집·분류하고, 장면을 구체화하고, 문장을 끌어내어,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여정이 읽힌다.
①<하얀 저고리>는 종잇조각들에서부터 시작됐다.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주위에서 손에 잡히는 아무 종이나 끌어당겨 적었다. 재질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수첩을 찢어 적었고, 원고지 파지를 잘라 썼고, 갱지에도 적었고, 화장지에도 썼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 한 단락 분량을 쓰기도 했고, 손가락 하나 크기에 한 문장만 적기도 했다. 가로세로 3㎝ 종잇조각에 단어 두어개만 적은 것들도 있다.
②통일된 형태가 없는 노트들을 구해 겉면에 ‘메모 1’ ‘메모 2’ ‘메모 3’ 등의 이름을 순서대로 부여했다.
③메모한 종이들을 노트 내지마다 풀이나 투명테이프로 차곡차곡 붙였다. 수첩이나 공책에 직접 메모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수첩·공책은 메모하는 용도라기보다 메모한 종이들을 모아 붙이는 스크랩북을 닮았다. 메모지 덩어리다.
④신문기사를 오려 붙이거나 직접 옮겨 적은 메모지를 추가로 붙였다. 구제금융 시대 버려진 아이들, 열악한 국내 노동 상황, 정치권력과 결탁해 급성장한 재벌, 달라지지 않는 여성들의 현실, 광주 학살자들의 재판과 외국 독재자들의 몰락 소식 등이 메모들과 자리를 다퉜다.
⑤참고할 만한 사상가나 작가들의 문장을 필사해 붙였다. 톨스토이, 함석헌, 에른스트 블로흐, 맬컴 엑스,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 프란츠 파농, 체스와프 미워시(체슬라브 밀로스) 등의 문장이 메모지에 적혀 노트로 왔다.
⑥공부가 필요한 주제들은 집중적으로 옮겨 적었다. 오래 두고 볼 글들을 만나면 짧게는 한개에서 길게는 십여개의 메모지에 썼다. 현대 정치와 군부의 관계, 독재자들이 파괴한 남아메리카의 현실, 독일식 흡수통합의 한반도 적용 가능성 등을 분석한 글들이 그의 글씨로 노트에 있다.
⑦소설에 넣을 문장이나 장면들은 떠오를 때마다 써뒀다. 주요 등장인물들(특히 증조모 아침이와 광주에서 시위대를 이끌다 죽임을 당하는 큰오빠 영우)의 캐릭터와 행동 묘사도 노트를 바꿔가며 장시간 구축했다. 초기 노트들엔 참고자료 성격의 메모가 많다면 후기 노트들에선 소설 문장과 장면 구성이 많아졌다. 초기와 후기 노트들 사이엔 20여년의 시간차가 있다. 후기로 갈수록 글씨들이 깨져 알아보기 쉽지 않다.
⑧노트의 내지마다 페이지를 매겼다.
⑨페이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나 문장, 아이디어들을 별도 메모지에 다시 요약했다. 노트 표지에 요약 메모를 붙인 뒤 해당 쪽수를 덧붙였다. 노트들이 계속 늘어나도 표지만 보면 원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게 만든 그만의 분류법이다.
⑩노트들을 보면서 원고를 작성한다. 반복해서 읽으며 빨간 펜으로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더한 흔적들이 수없이 확인된다. 노트와 노트의 메모들을 연결 지어 이야기를 확장한 정황들도 보인다. <하얀 저고리>는 이 모든 메모와 정보와 문장들을 모으고, 맞추고, 깎으며, 연결한 거대한 그림과도 같다.
치열한 안간힘
메모들이 그림이 되는 동안 한 페이지가 한 문장으로 압축되기도 하고 단어 몇개가 소설 전체로 번져 나가기도 했다.
“우리나라 전통적으로 세 가지 색깔. 백(白)―이것, 우리 자신. 적(赤)―선, 신념, 정의, 생명, 불사. 흑(黑)―악, 죽음의 색.”
노트의 이 짧은 문장은 ‘빨간 반점’(핍박당하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정의로운 사람들)과 ‘검은 반점’(독재와 학살의 주동자와 그들을 도우며 호시절을 누린 사람들)의 대결이라는 소설의 기본 구도가 된다. “우리 역사에서 빛나는 승리는 아무 반점도 달지 않아 밋밋한 무색 가슴의 사람들이 빨간 반점의 용사들을 따라 일어나 싸울 때 이루어진 것들”이란 아침이의 믿음도 이 메모에서 출발했다.
여러 노트에서 등장하는 ‘여량도 노화’(전라도와 광주를 상징)에 대한 메모들은 “의로운 것을 첫째로 치는 노화”나 “옳은 편이 이기는 노화의 전통” 등으로 소설에 배치된다. 노트엔 솔잎혹파리의 병충해 피해를 다룬 신문기사도 붙어 있다. 솔잎혹파리는 부패한 벼슬아치와 공직자, 관리들을 가리키는 비유로 소설에서 반복해서 사용한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대한 기사와 그의 고문 기법을 옮겨 적은 메모들은 영우의 고문 피해를 서술하는 자료가 된다.
메모가 원고로 바뀌는 단계에서 빠지거나 변형된 구상들도 있다.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 사할린 징용을 겪은 인물은 이름까지 받았지만 소설엔 등장하지 않는다. 꿈에서 전두환을 질타하던 큰오빠가 잠에서 깨자마자 침입자를 확인하고 집 밖으로 몸을 피하는 장면도 원고엔 없다. 노트엔 항쟁 몇 해 뒤 ‘오월 이야기’를 해달라며 영희를 찾아오는 기자들이 나온다. ‘그럼 학살자들이 감옥 가야 한다는 말부터 시작하자’는 영희의 태도에 기자들이 인터뷰를 접고 서울로 돌아가는 내용도 소설이 되진 않았다.
작가는 평소 강조했던 말들을 소설 속 문장들로 숨겨두기도 했다. 그는 2004년 한 강연에서 혁명을 “아름다운 사람이 죽으면 하늘의 별이 된다고 믿는 것”이라 정의한 적 있다. 농민 봉기의 선두에서 “나를 죽이지 않고는 노화에 들어올 수 없다”고 외치던 노비 섣달쇠(조선시대 아침이의 남편)는 진압군의 삼지창에 찔려 죽은 뒤 “캄캄한 북동쪽 하늘에서 유난히 밝게 빛나는 큰 별”이 된다. “역사의 빛나는 순간엔 늘 절규하는 사람이 있었다”던 작가의 말도 “긴 세월 동안 정의를 위해 죽은 사람들의 절규 하나하나가 모여 그대로 역사가 되었다”는 영희의 생각으로 옮겨 간다.
<하얀 저고리>의 문장은 그 절규들을 닮았다. ‘난쏘공’에서 칼 같던 그의 단문은 <하얀 저고리>에 이르러 한 문장으로 한 쪽을 채우는 길고 긴 장문이 된다. 숨 쉴 틈 없이 거칠고, 투박하고, 격렬하게 발산한다. 풀리지 않는 한과 분노를 한 자락씩 잡아당겨 꺼억꺼억 토해내는 듯하다. “반란 무리” 20여명의 실명과 직책을 한 호흡에 박아넣은 문장을 만나면 그 이름들을 또박또박 새겨넣는 것이 소설을 쓴 목적처럼 보인다. 그는 어느 자리에선가 “저는 훌륭한 작가가 되려고 쓰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작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쓴다”고 했다.
그 마음이 책이 되지 못하는 사이 독자들의 세대도 바뀌었다. 소설 제목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고 있을 때도 작가에게 <하얀 저고리>는 필생의 업이었고 끝내지 못한 숙제였다. 그가 떠난 뒤 유족들은 그의 컴퓨터에서 수십개의 문서 파일을 찾아냈다. 2000년 이후 그가 <하얀 저고리>를 쓰고, 다듬고, 고치고, 들여다보며 만든 원고·자료 파일들이었다. 그즈음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소설 작업도 노트에서 하드디스크 안으로 옮겨갔다. 파일들을 열 때마다 확인되는 것은 삶이 허락할 때까지 원고 수정을 멈추지 않았던 ‘병든 작가의 안간힘’이었다.
그는 <하얀 저고리>가 옛이야기가 되길 원치 않았다. 언제 출간되든 그 시대를 현재로 둔 이야기를 써넣고 싶어 했다. 1985년 펴낸 <침묵의 뿌리>를 끝으로 더 이상 책을 내지 않았지만 그는 언제나 ‘당대의 작가’였다. 2006년 8월 생성한 파일에서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까지 시대 배경을 확장하는 구상을 남겼다. 다른 파일들에선 증조할머니 아침이가 각각 115살(1994년)과 122살(2001년)까지 나이를 먹는다. 서두의 한 문단을 두개의 버전으로 다시 써놓은 원고도 있다.
‘최종 원고’를 찾아서
“나는 뭘 바라고 글을 쓰진 않았어. 내가 해야 할 일이어서 했을 뿐이지. <하얀 저고리>도 그저 써야 할 글이어서 썼어. ‘난쏘공’은 그나마 힘이 좀 있었는데 <하얀 저고리>는 여전히 힘이 없네.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
2017년 여름 그는 “아프기 전에 내려둔 수정 방향”(호흡이 흔들려 정확하게 받아 적지 못했다)을 들려줬다. “결국은 아파 버려 끝내지 못했다”며 말끝을 참았다. 그가 쓰고자 했던 소설의 최종 형태가 무엇인지 남은 자들은 알 길이 없지만, 그가 쓴 소설의 마지막 형태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일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꼬리를 물고 분화된 원고와 자료 파일들을 하나하나 대조했다. 추측해볼 단서는 있었다.
가장 정돈된 글은 2002년 출간 직전까지 갔던 원고였다. 200자 원고지 1150매 분량이다. 파생 파일들 대부분 이 원고에 기초하고 있다. ‘도입부+1부(조선시대·8개 챕터)+2부(현대·7개 챕터)’로 구성돼 있다. 이 글 2부에 8번째 장(54매)을 추가한 원고가 파일들 가운데 숨어 있었다. 챕터의 내용은 모두 지우고 제목처럼 ‘8’만 남긴 원고도 있어 그가 8장을 유지하려 했는지 버리려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 8장엔 영우가 죽기 전 공수부대 진압군들에게 학살 명령을 거부하라며 “국민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원고의 ‘최종 저장 날짜’는 2018년 5월3일 오전 0시28분이었다. 뇌 속 기억들이 작가를 떠나 뿔뿔이 흩어지던 시점이었다. 누구도 몰랐던 ‘소설가의 마지막 글쓰기’는 그렇게 있는 힘을 다해 치열했다.
생전 그는 “아무것도 남긴 것 없이 평생 져온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하곤 했다. 그가 작업 노트 어느 구석에 이 문장들을 남겼다.
“당분간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지기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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