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로 가는 길
우리시대 지식논쟁 결산 / 이명박 정부의 성격
지난해 9월1일부터 매주 한 차례씩 연재했던 ‘우리 시대 지식논쟁’이 지난 6월 달에 지젝에 관한 논쟁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시대 지식논쟁은 지식·담론·시사를 버무려 지상 논쟁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려는 노력이었다. 지금까지 37차례에 걸쳐 여러 지식인들의 글을 실었다. 모두 아홉 가지의 주제를 다뤘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1~3회),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4~6회),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7~9회),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10~16회),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17~21회), ‘코뮨주의 대안 맞나’ (22~25회), ‘이명박 정부의 성격’ (26~28회), ‘고종 어떻게 볼까’ (29~34회),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35~37회) 등이 우리 시대 지식논쟁의 화두로 다뤄졌다. 그 논쟁의 주요 장면을 톺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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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사회 ‘사상 논쟁’ 말문을 트다 (한겨레, 안수찬 기자, 2008-06-13 오후 07:56:21)
결산 / 우리시대 지식논쟁
신자유주의… 민족주의… 9개 주제 37차례 걸쳐 실어
최첨단 서구 이론으로 지식논쟁의 첫 장을 열었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주창한 개념인 ‘제국’을 둘러싼 논쟁을 다뤘다. “권력의 중심이 사라지고 경제적·문화적 교환들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상태를 일컫는 ‘제국’ 개념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이해하는 첨단의 이론틀이다. 국민국가 중심의 기존 이론틀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이기도 한 이 주장을 놓고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 정성진 경상대 교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이 논쟁을 펼쳤다.
제국 논쟁이 다분히 이론적인 논구의 성격이 강했다면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는 구체적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벌인 논쟁이었다. 반미 노선과 기간산업 국유화로 이름 높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실험이 ‘반신자유주의’ 진영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을지를 두고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김수행 서울대 교수 등이 논쟁했다.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실험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는지가 핵심 쟁점이 됐다.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는 조금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 올렸다. 근대문학이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제기를 바탕에 두고 ‘리얼리즘’의 가치와 근대문학의 현재적 의미에 관한 논란의 자리를 만들었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 등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라타니 고진의 이론을 지지 또는 비판했다.
우리 시대 지식논쟁이 주목한 가장 큰 화두는 민족주의 문제였다.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는 무려 일곱차례에 걸쳐 논쟁이 진행됐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제 지배, 분단, 산업화, 민주화 등을 가로지르는 핵심 쟁점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민족사학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새로운 보수 이념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고, 기존 진보학계 내부에서도 관성적인 민족주의를 성찰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는데, 이후 민족주의 논쟁은 복잡한 결을 가진 예민한 문제가 됐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임지현 한양대 교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권혁범 대전대 교수,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이 치열한 논전을 펼쳤다. 안병욱 교수 등이 저항적 민족주의로부터 초국적 자본을 견제할 동력을 찾은 반면, 박노자 교수 등은 계급 모순을 호도하는 민족주의의 맹점을 비판했다.
지식·담론·시사 버무려, 지지-비판 열띤 논쟁 벌여
다섯차례에 걸쳐 진행된 ‘고종 어떻게 볼까’ 논쟁도 민족주의 담론과 떼놓을 수 없다. 고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일제 강점 시기에야 타율적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를 가늠하게 된다. 이는 다시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오늘에 이르러 민주화와 산업화의 흐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 하원호 동국대 교수, 강상규 박사,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김도형 연세대 교수 등이 고종을 평가했다.
마르크스주의의 현대적 재해석을 둘러싼 개념들도 우리 시대 지식논쟁에서 자주 다뤄졌다. 다섯차례에 걸쳐 다룬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는 새로운 저항의 이념을 찾으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을 드러낸 논쟁이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창한 ‘노마디즘’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붙박이지 않고 끊임없이 탈주선을 그리며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사유 방식이 과연 저항 또는 변혁의 기획에 어울리는 것인지를 두고 홍윤기 동국대 교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 이광래 강원대 교수 등이 논쟁했다.
논쟁의 핵심은 노마디즘이 한국 사회에 새로운 영감을 던지는 실천적 기획인지, 아니면 급진적 언어를 빌린 상념의 소산인지에 있었다. ‘코뮨주의 대안 맞나’,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등도 비슷한 맥락의 논쟁이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주창으로 국내에서도 하나의 대안 이념으로 자리잡은 ‘코뮨주의’와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급진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사유를 각각 논했는데, 그때마다 이들 새로운 개념과 이념이 구체적 현실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를 두고 쟁점이 형성됐다. 고병권 ‘수유+너머’ 대표,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 이현우 박사, 박정수 수유+너머 연구원, 이성민 도서출판 b 기획위원 등이 글을 썼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정부 출범 2주 뒤부터 세차례에 걸쳐 연재됐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와의 차별성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성격 규정이 달라지는데,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 홍성민 동아대 교수, 고세훈 고려대 교수 등이 글을 썼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수용하는 논자도 있었고, 구보수와 별 차이가 없다는 이도 있었다. 신보수냐 구보수냐를 넘어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선명히 규정해야 한다는 필자도 있었다. 당시 논쟁은 한국 보수세력의 정치적 기원을 궁구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조희연 교수는 글에서 “극단적 친미주의, 공동체적 삶에 대해 전혀 고려가 없는 천민자본주의적 지향, 탈도덕적 경제주의 등이 한국적 보수의 특성”이라고 썼는데, 그 정의는 촛불집회 길에 컨테이너를 쌓아 올린 이명박 정부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새롭다. <한겨레>는 앞으로도 주요 쟁점이 떠오를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우리 시대 지식논쟁’과 비슷한 기획을 지면에 실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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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한겨레신문의 지면을 통하여 이명박 정권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진단은 대부분 비슷했다. 고세훈 교수가 약간 독특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는데, 적어도 조희연 교수의 한국형 신보수정권이라는 규정에 대해 비판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기사화된 5편의 글을 모아놓고 보니 딱히 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좌파진영에는 그 대안 제시가 필요한데, 조희연 교수가 다섯번째 글에 언급한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물론 내가 뭔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덧붙여, 맥락은 다르지만 프레시안에 실린 이근 교수의 '이명박 정부 어디로 가나'라는 진단도 함께 올린다.
강성만 기자의 해설
1)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2주가 됐다. 갓 출범한 정부의 성격을 논하는 것은 다소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보고서 등을 통해 새 정부의 국정 목표와 정책 기조는 대략적으로 드러난 상태다. ‘10년 만의 보수파 정권’ 탄생으로 학계에서도 새 정부의 구조적 성격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두고 논쟁이 활발하다.
주요 논점은 이명박 정부를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이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박정희식 개발독재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인다. 반면 박상훈 출판사 후마니타스 주간 등은 본질적으로 구보수와의 차별성이 없다는 점을 들어 ‘신보수’라는 정의에 반대한다. 일부 논자들은 ‘신보수’ 규정이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본질을 흐려놓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보인다. 선명하게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조 교수는 첫번째 글에서 새 정부를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하면서도 구보수 정권과의 동질성이 존재함을 강조했다. 시장자율주의와 개방주의가 차별성이라면 개발과 성장주의는 동질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전(前) 복지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했다. 1980년대 유럽과는 달리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점과 대중의 진보적 요구에 기초하고 있는 점도 ‘한국형’의 특징으로 거론했다.
2)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새 정권의 성격을 ‘신보수’로 규정했다. 조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개발과 성장주의라는 동질적 측면이 있음도 지적했다. 조 교수는 또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전(前) 복지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봤다. 1980년대 유럽과는 달리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닌 점과 대중의 진보적 요구에 기초한 점도 ‘한국형’의 특징으로 거론했다.
이런 견해에 대해 고세훈 교수는 ‘보수가 의미하는 바’에 근거해 반론을 폈다. 구보수든, 신보수든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전제하거나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박정희 정권에 보수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박 정권은 보수 이념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기득권층을 새롭게 형성하고 고착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도 박정희 체제를 거치면서 조각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고 교수는 “우리는 적극적 가치로서 보수해야 할 무엇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청산해야 할 역사적 유산들에 치여” 있다며, 새 정부를 신보수라고 일컫는 것은 진보정권으로 일컫는 것만큼 잘못된 규정이라고 했다.
3)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이명박 정부를 ‘신보수’로 규정할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조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 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국가개입 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고 했다. ‘신보수’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고세훈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면서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는 관점을 보였다.
강원택 교수는 ‘신보수’ 논쟁에서 비켜나 이명박 정부의 이념적 지형 분석에 치중했다. 그는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를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으로 요약했다. 구보수 세력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보수 세력의 경우 경제적 우파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보수에서 상층계급이나 자본가와 같은 계급적 기반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했다.
강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지향하는 또 다른 가치로 물질주의를 들었다. ‘물질주의적 우파’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보수의 등장과 함께 한국 사회의 갈등 지형이 경제적 가치를 둘러싼 좌우의 대결 혹은 물질주의 대 탈물질주의와 같은 한층 보편성을 띤 이념적 갈등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4)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며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과 한 묶음으로 보기 힘들다고 봤다. ‘신보수’라는 것이다. 반면 고세훈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며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는 시각을 보였다. 강원택 교수는 구보수 세력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봤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우회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홍성민 동아대 교수는 이 글에서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네 가지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의 보수적 헤게모니 안에 포섭되어 있는 점과 관료들의 정책 지향 등을 들어 현 정부를 보수정권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1990년대 이후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계급적 대립 지점이 흐려지고 있다며 이제 정권의 실무자들은 유권자들의 좋고 싫음이라는 취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교수는 결론적으로 새 정부가 순항하기 위해서는 이런 4차원 공간에서 전개되는 변화와 접합의 동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처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5)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새 정부가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며,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적 성격을 지닌 구보수와는 차별성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반면 고세훈 교수는 보수는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자율성을, 대내적으로는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한다며, 이런 기준으로 따질 때 박정희 정권이든 새 정부든 보수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강원택 교수는 구보수 세력이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면 새 정부는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했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홍성민 교수는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네 가지 층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이번 글에서 한국의 보수는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지배의 전통이 단절되는 등 정체성의 ‘해체적 재구성’을 겪었음을 강조했다. 서구적 기준의 보수와는 달리, 극단적 반북주의와 친미주의를 자기정체성으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보수 정권에서 생태주의적·신좌파적·신계급적·새로운 국제주의적 진보성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지라는 과제가 주어진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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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과거와 같고도 다른 ‘한국형 신보수 정권’ (한겨레, 조희연/성공회대 교수·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 소장, 2008-03-07 오후 07:29:19)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변화·불변성 함께 판단을
가끔 농담처럼 나는 ‘세상이 변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사물은 변화·발전한다’는 점에서 볼 때 부질없는 기대임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변화에 대면하고 변화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그에 대응하는 내 자신의 변화 자체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성립이라고 하는 ‘거대한 변화’에 직면해서 그 변화를 해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돌이켜 보면, 1990년대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언제나 새 정권의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 참여자들에게는 두 가지 시각이 교차했던 것 같다. 하나는 ‘불변론적’ 시각 혹은 정서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정권의 구조적·계급적 성격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엄청난 변화를 지적하는 ‘변화 강조론’이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성격에 대해서 ‘변화’의 측면과 ‘불변’의 측면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나는 이명박 정부를 ‘한국형’ ‘신보수 정권’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당연히 60·70년대의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구보수 정권으로 규정될 수 있다. 구보수 정권과 신보수 정권은 차별성과 연속성을 갖는다. 먼저 차별성을 보자. 구보수가 초기 산업화 단계의 개발독재였다면, 신보수는 ‘포스트-개발’ 정부이고 ‘포스트-독재’ 정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보수를 냉전적인 반북(反北)적 보수이자 ‘안보형 보수’로 성격지을 수 있다면, 신보수는 ‘시장형 보수’ 혹은 ‘신자유주의적 보수’로 성격지을 수 있다. 특별히 보수세력 내부의 헤게모니 분파의 전환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이 국가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표방했다면 이제 이명박 정부는 시장자율주의와 전면적인 개방주의를 표방한다. 반대로 연속성을 보자. 무엇보다 과거 독재시대의 집권당이자 90년대 민주개혁 국면에서 반개혁에 섰던 보수정당이 집권당으로 복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나아가 신보수는 구보수의 가장 핵심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발주의’와 ‘성장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 또한 신보수는 탈규제와 시장자율을 강조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구보수의 ‘친기업주의’와 ‘친자본적 성격’을 정확히 계승하고 있다. 단지 그 형태가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본이 제 발로 서지 못하고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스스로를 성장시켜야 했던 ‘원시적 축적’ 단계의 친기업주의를 구보수가 구현했다면, 이제 자본이 제 발로 서서 자력으로 중소자본과 기타 사회영역을 통제하고자 하고 국가적 지원 없이도 글로벌 자본축적을 수행할 수 있는 단계의 친기업주의를 신보수는 구현하고 있다. 여기에 ‘탈규제’ ‘자율경쟁’이 핵심 담론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신보수 정권이 구현하는 국가는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중도 리버럴 친미 정부의 붕괴가 좌파 정권으로 이어진 남미와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이명박-박정희 신.구 정권은 개방주의-보호주의 차별성과 동시에
보수정당 재집권이란 연속성 지녀, 개발성장-친기업.친자본 성격 계승도
앞서 ‘한국형’ 신보수 정권이라는 표현을 썼다. 신보수 정권 하면 80년대 영국의 대처 정부 등 서유럽의 우파 정부를 연상한다.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한국적·동아시아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80년대 이후 유럽의 신보수 정권이 60·70년대 복지국가를 비판하고 그것을 해체하고자 했다면,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포스트-복지국가적’ 신보수가 아니라 ‘전(前) 복지국가적 신보수’로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서구의 신보수 정권은 사회민주당 정부 시대의 문제점을 ‘복지병’ ‘산업공동화’ ‘과부하 국가’ 등으로 진단·비판하면서 출현했다. 사회민주당 정부 스스로도 ‘복지 요구의 확대와 그것을 충족시킬 조세 기반 간의 괴리’라고 하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반독재 중도 리버럴 정부(참여정부) 하에서 전면적인 복지국가로 이행하지 못했다. 보수세력은 초보적인 복지 확대의 시도조차도 ‘좌파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가공의 이데올로기적 인식’에 기초해 있다. 이것은 그만큼 한국의 보수, 그 일부로서의 신보수가 경제적으로 배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민주노총 내부에서 온건파가 리더십을 가져도 아무것도 자본으로부터 양보를 쟁취할 수 없는 조건에 놓인다. 이는 신보수 정권하에서 이른바 ‘개량화’의 기반이 대단히 취약함을 의미한다.
둘째,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시장자율과 자율경쟁을 지배담론으로 하지만 ‘신국가주의’적 성격을 관성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신자유주의적 국가들의 현실 모습은 개별 국가 내의 계급적·사회적 역관계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크게 유형화해 본다면, 신자유주의적 국가라고 하더라도, 북구형의 ‘신조합주의적 유형’, 영미 식의 ‘순수 시장자유주의적 유형’, 동아시아의 ‘신국가주의적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형 신보수 정권은 동아시아의 ‘신국가주의적 유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개발독재적 국가개입주의의 관성, 국가의 정책수단을 친기업적으로 활용하고 나아가 공권력에 의해 배제적 노동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본의 요구, 국가의 공적 역할에 대한 인식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부운하와 같은 친자본적인 대규모 국가프로젝트의 개발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구와 달리 복지국가 이행못한 현실 속 보수만이 아닌 진보적 기대 실리고
시장자율 구호 뒤 국가개입 관성도, ‘민주화 퇴행’ 대신 ‘보수의 진화’로 봐야
셋째, 한국의 신보수 정권을 성립시킨 대중들의 요구가 단지 보수적 요구만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라고 하는 중도 리버럴 정부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에 기초하여 성립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불신에는 양극화와 소득분배 악화의 극복, 사회복지 확대, 일자리의 확대 등 진보적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여론조사를 보면, 각종 진보적 요구들이 다 이명박 정부에 투사되어 있다. 또한 서구의 신보수 정권에서는, 국가 실패가 강조되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시장의 역할 확대와 가족의 강조가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은 사회복지가 발달되지 않은 조건에서※국가가 과부하가 아니라※가족이 ‘과부하’ 상태에 있다. 97년 경제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로 인하여 많은 중하층 가족은 사회의 부담을 이전보다 과도하게 떠안았고, 그 부담으로 더욱더 해체의 위기에 직면할 정도다. 이는 한국의 신보수 정권이 서구와는 다른 사회적 요구와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신보수 정권 시대의 등장을 아시아 민주화의 일반적 경로에서 보면 ‘퇴행’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개발독재적 예외국가’를 벗어나서 “자본주의적 ‘정상’국가”로 변신해 가는 일종의 ‘보수의 진화’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진보의 투쟁에 의해서 강제되면서 보수가 응전한 결과이다. 이제 ‘진화된 보수’에 영향을 받고 응전하면서 ‘진보의 진화’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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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도 신보수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일 뿐 (한겨레, 고세훈/고려대 교수, 2008-03-14 오후 07:32:19)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불필요한 수식어는 왜곡 우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놓고 지식계가 소란하다. 세월의 변화와 연속성을 모두 담아내려니 성격 규정에 수식어가 복잡하게 달린다. 나름대로 서술적 의의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류가 지나치게 세분화되면, 분류의 이론적 의의는 사라지고, 우선 너무 복잡해서 대중적 전달력도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조희연 교수의 ‘한국형’ 신보수가 있다면, 중국형·터키형·이탈리아형 신보수가 없으란 법 없다. 그러다 보면 왜 분류를 하는지, 그런 분류작업이 학문적·실천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렇다고 현 정부에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역사적 담론들, 예컨대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등을 수식어 없이 갖다 대기도 껄끄럽다. 무릇 이념이나 개념들은 특정의 상황적 맥락과 역사적 경험에서 태동하고 발전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출범한 정권에 대해 성격 규정을 서두르는 것 또한 걸린다. 그러나 시도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식이든 분류는 필요하고, 어차피 우리는 끊임없이 분류할 테니까. 그럼에도 현 정부를 ‘한국형’ 신보수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한국형’이란 수사가 주는 부담감도 문제지만, 그것이 이미 역사성을 내재한 보수주의 혹은 신보수주의의 개념적 근간에 조금이라도 닿아 있으려면, ‘한국형’이란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일정한 형용 모순이거나 혼선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구보수든 신보수든, 역사적으로 보수주의는 공동체 개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대외적으론 공격적이든 방어적이든 국가의 자율성을 일정하게 전제하거나 추구하며, 대내적으론 유기체적 일체성을 역시 전제하거나 추구한다. 보수주의가 어떤 계급적 혹은 계층적 체제로 귀결했는지는 그 다음 문제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 개념과 불가분, 개인 의무·책임 중시하고 복지 기여해
‘박정희 체제=구보수’라 말하지만 되레 공동체 허물고 새 기득권층 형성
이 점은 오늘날 신보수가 아무리 시장자유주의를 전면에 내건다 해도 마찬가지다. 가장 공격적인 신자유주의가 왕왕 가장 국가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는 데서 볼 수 있다. 당연히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시장이나 시민사회와 대립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 한 개념이다. 오히려 전통적 보수는 공동체를 원자화된 개인들로 분해하는 시장체제보다는 관계적 의무와 책임을 중시한다. 사실 보수주의 자체가 중세적 질서에 대한 일정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소유하다’(own)란 영어단어가 ‘빚진다’(owe)라는 중세적 어원을 가진다거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이 중세 계층간의 쌍무적 책무의식에서 연원한다는 점은 보수주의의 공동체적 특징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수주의가 사민주의 못지않게 서유럽 복지국가의 태동과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국가복지는 취약하더라도 민간복지 혹은 자선의 전통이 굳건한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선진국에 시장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듯이 보여도, 그 배후엔 구보수적 토대가 엄연하다. 이러한 연속성은 시장자유주의적 요소가 강화되는 과정이 늘 심각한 내적 갈등을 동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예컨대 영국의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벤저민 디즈레일리 이래 모리스 해럴드 맥밀런에 이르는 전통적 보수주의는 한때 에드워드 히스나 마거릿 대처의 신보수적 정치에 의해 뒷전에 밀리기도 했지만, 최근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에 의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심지어 대처주의가 당대적 힘으로 입증되려면 이른바 웨츠(wets)로 일컫던 구보수 진영과의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보수’ 아닌 ‘청산’할 유산들만 떠안은 새 정권에 ‘신보수’란 수식어는 잘못
‘한국형’이란 말도 역사성 없이 혼선 불러 되레 역사에 무임승차하는 빌미 줄 뿐
우리의 신보수주의는 과거 박정희 체제를 보수체제로 암암리에 상정한다. 그러나 박정희체제는 기실 어떤 적극적 이념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그 동기·과정·결과가 기득권층을 새롭게 형성하고 고착화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었다. 국가자율성이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서유럽 보수주의와는 정반대로 대외적 의존을 근간으로 한 대내적 (시민사회로부터의) 자율성이었다. 우리 국가의 대외적 자율성은 오로지 북한을 상대로만 기능해 왔다. 대내적으로도 국가는 수탈의 도구로 인식되었으니, 오늘날 한국 사회에 팽배한 반복지 의식 저변에는 반국가·반정치 의식이 깔려 있다.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오히려 박정희 체제를 거치면서 조각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미 와해된 공동체적 조건에다 신자유주의를 대세인 양 수용하면서 개인 중심의 극단적 혈연주의, 때론 가족조차 팽개치는 (이혼율, 해외입양률, 유아방기율, 낙태율, 출산율 등에서 나타난) 극단적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상태에 와 있다. 요행과 불로소득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며 정직한 노동과 노동자를 천시하고, ‘못사는’ 외국인노동자와 연변의 동족이나 북한을 경멸하는 저급한 의식상태가 거기에서 멀지 않다. 요컨대 우리는 적극적 가치로서 보수해야 할 무엇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청산해야 할 역사적 유산들에 치여 있는 것이다. 신보수나 신자유는 모두 중세라는 장구한 세월에다,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근대적 경험과 정치적 실험들이 농축된 역사적 개념들이다. 이 정권에는 신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때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조차 과분하고 민망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실용주의란 것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원칙이 전제되지 않는 유용성 혹은 현실과의 거리 조율이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건가. 우리의 실용주의도 실상은 성장주의라는 기만적 이데올로기에 터잡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 정치에 관한 한, 이념의 시대가 갔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것은 내 이념, 내 이해관계가 마침내 지배적으로 됐다고 흡족해하는 사람들의 오만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무릇, 음치가 합창단에 앉으면, 테너나 바리톤으로 ‘분류’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동적으로 테너가 되고, 바리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음치를 합창석에 앉히지 말라. 음치를 벗어나게 하려면 먼저 음치임을 자각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그렇다 치고, 이 정권에 신보수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수식어가 어떻든 그것을 진보정권으로 부르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규정이다. 장관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면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나. 투철한 국가의식은 애초에 언감생심이었고, 기형적인 한국적 시장체제에서 ‘성공한’ 몽롱한 얼굴들뿐, 진지하고 당당한 시장주의자의 모습조차 거기엔 없었다. 그리하여 현 정부가 자신의 별명을 그냥 ‘이명박 정부’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어떤 점에선 백번 옳고 또 잘한 일이다.
예명으로 언론이 갖다 붙인 고소영, 강부자 정부면 충분하다. 너무 냉소적이고 안이한가? 그래도 나는 이 정권에 신보수의 치장을 해 줌으로써 지레 면죄부를 주고, 그것이 역사에 무임승차하도록 빌미를 주는 일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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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성 뚜렷한 경제·물질주의적 우파다 (한겨레, 강원택/숭실대 교수, 2008-03-21 오후 07:16:15)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자기 변신한 보수
보수는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 질서나 가치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가치나 대상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항상 조금씩 변화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보수라고 해도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보수성’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은 예전의 보수가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나라의 보수 역시 변했다는 인식이 이 논란 속에는 깔려 있다.
200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세력이 승리한 것은 보수파의 자기개혁, 자기변신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구보수가 지녔던 지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을 유권자에게 제시했기 때문에 보수 세력은 승리했다. 구보수가 대표했던 가치는 냉전 시대의 반공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있었다. 과거 냉전 시대, 권위주의 체제의 이념적 유산이 우리나라 구보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이명박의 보수는 냉전적 보수에서 벗어나 경제적 요인과 계급적 특성을 지닌 우파적 속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냉전시대 반공이데올로기 기반으로 다양한 계층 속해 있던 구보수와 달리
이념 벗어나 경제적 우파 정책 강조, 기득층 대변·친기업 등 계급속성 강화
이명박 정부가 강조하는 ‘실용’이라는 용어는, 노무현 정부의 과도한 이념성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이념성이 강조되었던 구보수로부터 거리두기의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여기서 ‘실용’에 대비되는 ‘이념’은 서구 정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경제적 가치를 토대로 한 좌파 대 우파의 균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북관계, 대미관계, 국가보안법 등 반공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강조하는 실용은 이런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이념적 갈등에서 벗어나, 시장 중심, 성장과 효율 추구라는 전통적인 우파 정책의 강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기변신으로 이명박의 보수는 더는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을 지키려는 ‘꼴통’ 보수로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 때문에 과거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선택했던 많은 ‘진보적’ 유권자들로부터도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를 우파로 지칭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구보수에 비해서 계급적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구보수 세력은 계급적 속성이 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는 개인의 경제적 지위나 계급과는 무관한 개인의 가치와 신념의 문제였다. 계급이나 소득과 무관하게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한 신념을 지닌 이들이 과거의 보수 세력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다. 따라서 다양한 계급이 보수 세력 내에 공존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이념의 문제는 계급보다 세대적 요인이 더 큰 차별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에서 보수이념 성향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곧 과거 보수 세력은 경제적 의미의 우파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는 상층계급이나 자본가와 같은 계급적 기반이 한층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보수 세력의 계급성이 강화되는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강부자’ 내각, ‘고·소·영’과 같은 용어는 이명박 정부의 계급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런 용어들은 재산과 학연·지연·종교 등을 통해 형성된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명박 정부는 조각 과정에서 이미 이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역시 계급적으로 노동보다 자본에 대한 강한 선호를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풍요 부르짓는 물질주의가 대중지지 이끌어내 대선 승리했지만
환경·노동·인권 등엔 소홀 드러나 경제가치 둘러싼 좌-우 대결 신호탄
이처럼 계급적으로 비교적 편협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압승을 거둔 이유를 단지 냉전적 보수로부터의 이탈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지닌 또 다른 특성은 바로 ‘물질주의’이다. 물질주의는 인간 삶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 풍요와 사회질서의 유지와 같은 생존과 안전의 문제를 강조한다. 삶의 질의 추구에 앞서 생존을 위한 최소 요건의 충족을 선호하는 것이다. 물질주의에서는 개발과 경제 논리가 우선시되며 법과 질서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과 같은 개발 논리, 노동쟁의에 대한 엄벌과 질서와 법치의 강조 등은 이명박의 보수가 담고 있는 물질주의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많은 유권자들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물질주의적 호소의 위력이었다. 아파트 가진 이들은 부동산 재개발, 시장 상인들은 경기 회복, 젊은이들은 취업 등 물질주의적 메시지로 중산층과 서민, 노동자의 지지를 확보해 간 것이다. 경제적 침체가 지속되면서 물질주의에 대한 강조는 커다란 정치적 호소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탈물질주의적 가치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대운하 논란에서 드러나는 환경 문제의 경시, 각료 임명 과정에서 본 대로 성 평등 문제에 대한 취약함, 노동이나 인권 문제에 대한 소홀함 등이 이명박의 물질주의적 편향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경제적 성취와 가시적인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물질주의는 이명박의 새로운 보수가 중시하는 또 다른 가치인 것이다.
결국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는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이명박 정부의 이념적 지향점은 물질주의적 우파의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특성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정치적 변화의 특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과거 한국 정치의 균열이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을 둘러싼 갈등에 기반해 있었다면 이제는 서구의 경험을 고려할 때 한층 보편성을 띤 이념적 갈등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장·효율 대 분배·형평이라는 경제적 가치를 둘러싼 좌우의 이념 대결, 개발·안전 대 보존·자유라는 물질주의 대 탈물질주의 이념의 대결이 한층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축 역시 지역이나 세대를 넘어서 사회경제적인 의미의 계층·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다.
과거 우리 사회의 진보가 권위주의 유산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자임하면서 정치적 신뢰를 확보해 왔다면, 이제 이명박의 보수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런 진보의 역할은 이미 그 소임을 다한 것 같다. 과연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구현하면서 좌파적 분배 정의를 강조할 우리 시대의 진보는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변화된 시대에 걸맞은 진보의 자기개혁, 자기변신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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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일 수만은 없다 (한겨레, 홍성민/동아대 교수·정치학, 2008-03-28 오후 09:01:28)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④ 변수에 따라 다르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보수로 규정함에 있어서 지식인 사이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현실의 변화가 매우 급격하여 논의의 수준이 이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도 오늘날 한국 정치현장이 그런가 보다. 기초적인 정치학의 이론을 점검하면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차분히 따져보자.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네 가지 수준의 층위가 있다.
첫째는 정치 지도자의 개인적인 퍼스낼리티에 주목하는 방법이다. 개인의 성장배경, 사회적 경험, 인사운영의 스타일 등이 정치권력의 전반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추적하는 경우이다. 기업가 출신답게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노선을 앞장세워 국정을 운영하고 있어, 그 결과가 사뭇 궁금하다. 그러나 과거 군부독재와 같이 권력이 개인에게 독점된 상태가 아니고 보면, 대통령의 특성만으로 정치권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
둘째는 정치사회-시민사회의 관계 속에서 정치권력의 성격을 찾아보는 방법이다. 우리가 정권의 성격을 보수-진보로 구분하는 수준이 바로 여기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분류가 매우 상대적이며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18세기의 진보는 시장의 자유를 주장했지만, 19세기의 진보는 국가개입을 요구한 바 있다.
정치가 시민사회에 끼치는 영향력, 정권·관료들의 정책지향 볼 때
이명박 정부 보수라 부를 수 있지만 보수-진보 전통적 대립구도 무너져
또 정치권력을 보수-진보로 양분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에 대하여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유럽에서 18세기 시민혁명 직후에 정치권력을 진보/보수로 양분하는 관례가 생기는데, 이때 귀족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 반하여 시민사회를 대변하는 부르주아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이것은 정치권력이 사회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상황이 다르다. 우선 최근 10년 사이에 민주세력을 자임하고 등장한 행정부의 영향력이 시민사회의 보수세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의 보수적 헤게모니 안에 ‘실질적’으로 포섭되었다. 현재 불거지고 있는 삼성의 로비의혹이 전형적인 사례다. 따라서 정치세력이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시민사회의 문제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있어도 현실적인 영향력은 매우 미미했던 것이 노무현 정권의 특징적인 사례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사회적 기원과 관료들의 이념적 기원을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두환 정권의 사회적 기원은 군부독재였지만, 당시에 실질적으로 전개된 정책은 신자유주의의 성격이었다. 당시 경제운영을 전담했던 김재익은 미국에서 통화주의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민영화 정책을 실시한 대표적인 관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권력의 외면만을 보게 되면, 실질적인 내용을 혼동할 가능성이 있다.
국민의 취향·국제관계까지 고려할 때 정치권력 하나의 노선만 고집 못해
정치-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4각축 면밀히 주시하고 조율해야
이러한 세 가지 변수를 두고 볼 때 이명박 정부를 보수정권이라고 불러볼 만하다. 노무현 정권의 실정에 각을 세우면서 상대적으로 우경화된 노선을 주장하고 있고, 정권의 사회적 기원과 관료들의 정책지향은 과거 어느 때보다 일치도가 높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시민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가 많이 열려 있다. 대부분의 관료가 기득권을 가진 지배계급이고 그들의 친기업 정책은 정권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만큼 시장주의 논리에 더욱 철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변수에 변화가 생기면 정권의 성격도 지금과는 다르게 될 것이다.
셋째는 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로 확장하는 단계다. 보수-진보의 구분은 계급성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18세기에는 귀족-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대립이 있었고, 19세기에는 이것이 자본가-노동자의 대립구도로 성격이 변화된다. 계급과 정치의 상응관계는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지만, 1960년대에 서유럽이 이른바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보수-진보의 전통적인 대립구도가 사라진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보면 한국의 보수-진보의 대립구도는 애초부터 계급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즉, 지식인 중심의 진보는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에 기초한 노동정치는 매우 취약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도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개인들의 소비취향이 그나마 남아 있던 계급적 기반을 흐려 놓고 있다. 비정규직 투쟁에 앞장서는 노동자들이 자식들의 교육문제에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선호하는 이중성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강남 사람처럼 살고 싶은 노동자들의 욕망을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파편화된 욕망의 흐름을 이성정치의 언어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의 압도적인 승리는 바로 이러한 감성의 정치와 깊숙이 맞물려 있다. 이제 정권의 실무자들은 옳음/그름의 논리(이념)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의 좋음/싫음(취향)까지 고려해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치권력이 분명한 노선을 지킬 수가 없다.
넷째로 국제정치의 영향력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정치권력은 미국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자율성을 갖는 것이 현실이다. 박정희 정권을 군부독재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가 추진했던 개발독재는 당시 세계은행이 제3세계에 강력히 추진했던 “발전국가모델”의 전형이다. 박 정권 말기에 미국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했던 박정희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사주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음모설도 있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얘기지만, 그만큼 한국 정치는 미국의 영향권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권 초기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보인 도전적인 태도는 사실 매우 어리숙한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의 화해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경제회복을 외치며 정권을 획득했다. 현재 국민들의 기대수준은 매우 높아져 있다. 그런데 이 정부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강행하고, 이로 인해 민중들의 경제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갈 경우,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다. 실용이라는 구호만으로 국내정치의 요구와 국제정치의 외압을 조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군부독재보다 더한 수준으로 공권력을 남용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정치사회/시민사회-정치주체-국제정치라는 4각 축은 한국 정치를 떠받치는 높낮이가 서로 다른 기둥들이다. 이러한 4차원의 공간에서 전개되는 변화와 접합의 동학을 면밀히 주시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이명박 정부는 예상보다 빨리 좌초할 수 있다. 그런데 5년 뒤를 준비해야 할 진보세력도 이러한 4차원의 구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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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의 보수’는 재구성되고 있다 (한겨레, 조희연/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2008-04-04 오후 09:48:28)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조희연 교수의 재반론
지난달 22일 대만 총통선거에서 국민당의 마잉주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는 개발독재적 구(舊)지배와는 구별되는 ‘신보수정권’이 한국과 대만에서 출현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보수적 지배는, 필리핀이나 타이 등과 같이 과거 구독재세력이 강력한 제도적ㆍ비제도적인 영향력과 개입력을 보유하고 과거의 ‘정치적 독점’이 강고하게 유지되는 ‘신과두제’ 유형과 대비된다.
당연히 신보수정권은 개발독재적 구보수정권과 연속성 및 차별성을 갖는다. 내 글에 이어 실린 강원택 교수와 홍성민 교수의 글은 ‘차별성’을 강조하는 논의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내 논지와 크게 대립되지 않으면서 그 ‘차별성’의 복합적 측면을 강조하는 논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강원택 교수는 보수의 계급적 성격의 변화를 주목하면서, 이명박 정부가 과거 냉전형 보수와는 구별되는 ‘계급적 속성을 띠는 경제적 우파와 물질주의적 가치의 결합’으로 특징화될 수 있다고 표현했다. 이에 충분히 동의한다. 홍성민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복합적 성격을 논하였다. 네 가지 층위-정권 지도자의 퍼스낼리티, 정치사회ㆍ시민사회의 관계에 따른 정치권력의 성격, 정치 주체의 취향, 국제정치의 영향력-에서 보수정권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보아야 함을 강조했다. 특히 그가 말하는 새로운 ‘감성의 정치’ 개념은 보수가 진보를 ‘추월’하고 있는 지점을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단지 고세훈 교수의 경우는 다른 각도에서 중요한 논점을 제기하고 있다. 곧 보수의 일반적 성격과 한국 보수주의의 특수적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서구의 보수 개념을 근거로 하여, 보수를 “대외적으로 국가의 자율성을 추구하고 대내적으로 유기체적 일체성을 추구하는 지향”으로 규정하고 박정희 정권이나 이명박 정부를 보수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자신의 개념규정의 근거를 가지고 이명박 정부를 규정하는 것을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서구 보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바로 그 측면이 오히려 한국 보수의 성격이고 현실적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곧 한국의 보수가 드러내는 극우적 반공주의, 일면적인 성장주의, 전통적인 보수의 국가자율적 배외주의와는 대립되는 극단적인 친미주의, 복지와 공동체적 삶에 대해 전혀 고려가 없는 천민자본주의적 지향, 동성애나 낙태 반대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탈(脫)도덕적 경제주의’ 등이 한국적 보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3ㆍ1절과 8ㆍ15에 친미 데모를 하는 것 그 자체가 한국 뉴라이트의 성격을 드러내준다.
‘국가의 자율성’이라는 서구적 잣대로 ‘극단적 친미’ 특수성 부정하면 곤란
개발독재서 신자유주의적 성장으로 한국 신보수 헤게모니 전환 이뤄져
더 많은 논의를 해야 하겠지만, “보수를 공동체 개념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라고 고 교수는 주장하는데, 이는 근대 초기에 서구 보수가 전근대적인 중세적 질서를 일정하게 이상화하면서 옹호하는 형태로 자신을 구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이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보수는 자신들의 사회가 식민지로 전락하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의 ‘해체적 재구성’을 불가피하게 겪었다. 전근대에서 근대식민지로 전환하는 과정, 나아가 해방 이후의 ‘내전적 과정’과 분단 및 60년대 군부독재의 출현 과정 등에서 ‘지배의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점이 보수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보수는 역설적으로 극단적 반북주의와 친미주의를 자기정체성으로 하여 존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냉전 시기의 한국 보수이다. 60년대 이후에는 개발독재 하에서 보수가 친기업적 성장주의와 반(反)노동자주의를 내면화한 근대화 추진세력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했다.(이 과정에서 한국의 보수는 자유주의-진보주의 세력의 연합에 기초해 전개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억압했고 그래서 자유주의를 천명하지만 자유주의적 성격이 없다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개발독재의 ‘성공’적 추진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보수는 60~70년대 ‘근대화적 성장주의’를 새롭게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로 전환하면서 스스로를 재구성해가고 있다.(박정희라고 하는 보수의 역사적 자원을 부각시키면서 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보수 블록 내의 헤게모니 분파도 전환되어 왔다. 예컨대 개발독재적 보수 블록과 현재의 신보수 블록 안에서 헤게모니 분파는 명백히 다르다. 이러한 변화들을 ‘신보수’라는 개념을 통해서 포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에 대한 ‘선험적인’ 서구적 기준을 설정해 놓고 한국에서 그에 부응하는 ‘보수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소비자본주의 대중의 욕망 포획, 생활세계 지배하려는 보수시도 맞서
이젠 진보의 재구성 고민할 때, 생태평화적 ‘평등연합’ 구성해야
우리가 이명박 정부의 성격 논쟁을 하는 데에는, 신보수정권 시대 ‘진보의 재구성’과 ‘진보의 풍부화’를 고민하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나는 신보수정권 하에서 진보는 대중들의 새롭고 지속되는 삶의 고통들을 주목하고 새로운 복합적 평등연합을 재구성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사회)공공성 담론이나 ‘민주주의의 사회적ㆍ급진적 확장’ 같은 담론이 중요하다. 복합적 신평등연합은 70~80년대의 반독재연합이나 90년대 민주개혁연합과는 다른 다양한 대중적 동력을 수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신평등연합은 새로운 ‘의제연합’이자 대중들의 다종다양한 새로운 ‘요구연합’이 될 것이다. 물론 성공적인 새로운 복합적 평등연합은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모인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존의 진보그룹-그 일부인 급진적ㆍ좌파적 그룹을 포함하여-은 반독재적 진보성과 반미주의적 진보성, 초기 산업화 단계의 계급적 진보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제 신보수정권 하에서 우리는 생태주의적 진보성, 신좌파적ㆍ신사회운동적 진보성,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성장드라이브가 촉발하는 신빈곤과 양극화에 대응하는 신계급적 진보성, 지구화가 촉발하는 새로운 국제주의적 진보성을 어떻게 결합시켜 낼 것인가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얼마 전 창당한 진보신당이 기존의 진보 이슈에 더하여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는 평등, 생태, 평화, 사회연대 등의 가치는 진보의 재구성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대중의 생활세계에 대한 신보수적 지배의 새로운 공세로 인해 분출되어 나오는 새로운 저항성들을 폭넓게 수렴하려는 고민이 필요하다. 예컨대 고도 대중 소비자본주의 시대 대중들의 신체와 욕망, 삶의 전 영역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새로운 포획과 거기서 배태되어 나오는 저항적 주체성, 신보수적 지배의 ‘감성의 정치’에 포획되면서 동시에 그것에서 탈주해오는 대중들의 저항적 감수성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도 있다. 물론 성공적인 ‘우파 경제포퓰리즘’, 새로운 ‘우파 국제주의’ 전략, 신보수정권의 ‘경제 실패’가 가져올 수 있는 파시즘적 사회심리의 부상과 같이 신보수정권 하에서 나타날 수 있는 진보에 대한 위협적 상황도 예기해볼 수 있다. 다행히 경부운하 반대투쟁과 같이 새로운 주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저항적 주체성들이 분출하고 있다.
반독재 투쟁전선에서 이탈했던 대학생들이 등록금 투쟁으로 새롭게 정치화될 가능성도 나타난다. 암울했던 2007년 대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진보의 게토화’가 아니라 ‘진보의 풍부화’로 가는 새로운 희망의 근거들을 나는 발견해가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실용정부였다 (프레시안, 이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08-03-18 오전 7:54:12)
[진단] 이명박 정부 어디로 가나 <상>
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총선이 가까워지면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가 활발하다. 이에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대선 이후 3개월 남짓 보여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이론적으로 검토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근 교수는 세 편의 글을 통해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각종 정책과 행태를 비교·분석함으로써 현 정부가 표방하는 실용주의의 허상을 파헤쳤다. 이근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과도한 실용노선으로 인해 지지기반의 이반을 가져와 몰락한 반면, 현 정부는 겉으로만 실용을 내세울 뿐,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에 경도되어 그 어떤 정부보다 강한 이념성을 띠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편집자>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
민주주의의 반대는 무엇일까? 중고등학교, 심지어는 대학교 다닐 때까지 '국가 공인 정답'은 바로 공산주의였다. 한참 배워가던 시절, 그 어느 것에도 확신을 못하고 자신이 없었던 학생 시절에는 의아해 하면서도 왜 민주주의의 반대가 공산주의인지에 감히 따져보고 다른 생각을 가지려 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권위주의 독재가 아닌가 의심하긴 했지만 다들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소위 비판의식, 의심을 갖는 사고에 대한 훈련이 없었던 탓이었다. 너무나 오랜 기간 '정답'의 학교교육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좀 더 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접하게 됐는데, 당시 민주화 이론을 말하는 그 누구도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민주화를 논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모두 권위주의, 혹은 관료권위주의, 군부독재에서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연구하고 이론화하고 있었다.
좀 더 많은 시일이 지난 후 냉전이 종식되자 역시 서구의 학자들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민주화라는 용어 대신 '체제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처럼 공산주의(사회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개념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였던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알았던 정답은 오답인 것이었다.
너무 뻔한 진실이지만, 용어의 사용과 그에 대한 '정답화'는 매우 정치적인 의도를 그 뒤에 감추고 있다. 예를 들어 냉전기간 동안 언론과 주류 담론에서는 '공산세력'과 '민주세력' 간의 대치를 얘기했고, 공산세력이 아닌 자본주의 국가는 그 국가가 실제 민주주의 국가건 권위주의 독재 국가건 자연히 모두 민주세력으로 분류되는 마술을 우리는 보았다. 군사독재의 시절 대한민국은 그리하여 민주세력으로 분류되곤 하였다.
필자는 한동안 수많은 서구의 민주국가에서, 그리고 일본에서도 공산당이라는 정당이 존재하고, 때로는 사회주의 성향을 띤 정당이 집권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곤 했다. '정답'을 말하는 세뇌교육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따지는' 교육을 안 받고 정답을 알려주는 교육을 받아왔다. 제도권의 정규 교육뿐만이 아니라 소위 '운동권'의 '학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답을 모르거나 쉽게 이해하지 못하면 왕따를 당하는 야릇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결국 잘 몰라도, 이해가 안 되도 마냥 외우는 길을 택하는 편리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가진 생각 속에서 엄밀성과 창조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따지는 토론식 수업은 불편하고 정답이 전달되는 학원식 수업이 편안하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한국의 정치 및 경제 담론에서 강요된 부정확한 정답들은 무수히 많았다. 주로 정답 교육에 익숙한 소위 보수 언론과 학계에서 생산한 담론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조선과 21세기의 한국을 비교하는 것, 한국의 햇볕정책과 1930년대 영국의 채임벌린이 폈던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비교하는 것, '전쟁을 준비해야 전쟁을 막는다'라는 매우 단순한 주장, 노무현 정부가 '좌파정부'였다는 주장, 한미FTA를 하면 개방이고 그렇지 않으면 쇄국이라는 주장, 지난 10년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주장, 시대정신이 성장이라는 주장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는 쉽게 와 닿을지 모르지만 따져 보면 결코 제대로 된 정답이 아니다. 비교의 방법을 모르거나, 비교와 비유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비유와 이론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특정 조건 하에 형성된 주장과 이론을 조건을 무시하고 사용하거나, 개념이 탄생한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오류들이 나왔다.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볼 때 방법론상 대부분 F학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장들이 언론을 통해 정답처럼 국민의 여론을 형성하고 세뇌하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노무현 실용주의 정부
그러한 배경을 뒤로하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소위 '좌파 이념정부'인 노무현 정부와 대척점에 서서 '실용'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언론에 의해 정답화되어 있다. 실용정부라는 말 뒤에는 쓸데없이 이념논쟁으로 국력을 소모하지 않고 국민을 위해 행동으로 결과를 보여준다는 정치적 메시지가 숨어 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이러한 정답화는 현 정부에 매우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번 따져 보아야 한다. 과연 노무현 정부는 이념정부였던가?
실용주의(pragmatism)라 하면 그 철학적 개념의 연원과 정의가 간단한 것이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현재 한국적 맥락을 고려해 한국의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실용주의에서부터 이야기를 하겠다.
실용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 주장한 이른바 '흑묘백묘론'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주장이다. 즉 원하는 목표와 결과가 있고, 그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이념에 상관없이 가장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용주의가 진정한 실용주의이기 위해서는 수단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존재해서는 안 되며 경험적으로 증명된 수단의 효용만을 따져야 한다. 그래야만 원하는 목표를 위하여 이념을 뛰어 넘는 다양한 수단을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어떤 경우에는 정부의 시장개입을 최소한으로 하는 자유방임적인 경제정책을 쓸 수 있고, 상황이 바뀌면 전략무역,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총수요 창출 등 정부의 시장개입이 채택될 수도 있어야 실용정부이다. 실업을 줄이기 위해 북유럽과 같은 복지주의, 조합주의 모델을 원용할 수도 있고, 상황이 바뀌면 영미와 같은 신자유주의 모델을 가져올 수도 있다. 좌든 우든, 흑묘든 백묘든 효용이 검증되었고 필요하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면 미국과 같은 길을 갈 수도 있고, 때로는 미국과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어야 실용적이다. (단순히 힘센 쪽에 붙어서 힘센 쪽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 실용적이라면 가장 실용적인 한국 정부는 미국의 52번째 주 정도로 편입하는 정책을 쓰는 정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정부를 실용정부라고 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는 상대적으로 분배를 강조하고, 과거 기득권 세력을 역사 바로세우기 이념으로 공격하고 또 북한에 대하여 퍼주기를 한 것 등으로 인식되어 (좌파)이념정부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무현 정부는 이념정부이기보다는 오히려 실용정부라고 불리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노무현 정부가 다분히 개혁 지향적이고, 과거보다는 좀 더 사회복지와 분배를 강조하며, 또 주류세력을 새로운 세력으로 교체하려고 한 점에서는 개혁세력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정책의 내용을 보면 좌파이기보다는 우파의 내용이 매우 많이 들어간 우파 실용정부에 가깝다.
노무현 정부는 취임 초부터 국민소득 2만불 달성이라는 성장지향적인 국가목표를 세웠고,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법인세 인하, 특소세 인하, 재벌규제 완화 등을 허용했다. 임기 말에는 신자유주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였다.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한 것을 보면 노무현 정부 자신이 스스로를 흑묘든 백묘든 가리지 않는 실용정부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경제문제뿐만이 아니라 북핵 문제에 있어서도 진보적인 이념에 매달리기보다는 실용적인 대응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해법이 미국과 다를 때에는 미국과 각을 세웠지만,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미군기지 재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등에서는 미국의 요청을 거의 완벽하게 들어 주었다. 해외파병도 지지기반의 이반을 감수하면서 미국의 요청을 들어준 셈이다. 반면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나 미사일 방어(MD)의 문제는 끝까지 거부하는 고집도 보여주었는데, 이는 친미냐 반미냐의 이념을 넘어서 실용적으로 대미관계를 풀어나간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물론 잘잘못에 대한 판단은 다른 문제다)
국내정치도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시도하기도 하고, 내각에 삼성 인맥의 장관과 신자유주의 철학의 재경부 관료를 앉히기도 하였다. 출발은 호남에 기반을 둔 정권이었지만 핵심 요직의 상당수가 부산 경남의 인사로 채워진 것도 어찌 보면 매우 실용주의적인 선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목표를 위해 이념과 고정관념을 뛰어 넘어 유연하게 수단을 활용한 것이라고 본다면 노무현 정부는 실용주의 정부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노무현 정부가 너무 실용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결국 진보와 보수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실용적인 활용은 지지기반인 서민에 대해 참담한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며 정권을 마치게 했다. 정권 말 노무현 정부의 낮은 지지율은 여론을 주도하는 보수 언론의 힘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지나친 실용성을 반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실용주의 정부가 주류 언론과 보수학계에서 좌파이념정부로 규정되는 것은 아마도 한국만의 기현상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공산당이 존재하고 사회당이 집권하는 유럽, 사회복지의 수준과 국민의 조세부담율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북유럽적인 정부가 한국에 있었다면 이들 정부는 좌파이념정부가 아니라 아마도 원색적인 빨갱이 정부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 유럽의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하는 선진국들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국만 보지 말고 유럽도 공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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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 이념정부' (프레시안, 이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08-03-19 오전 8:16:56)
[진단] 이명박 정부 어디로 가나 <중>
이명박 정부야말로 진짜 이념정부가 아닌가?
노무현 정부는 보수언론과 학계의 '정답'과 달리 이념정부보다 오히려 실용정부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이제 '실용정부'를 표방하는 이명박 정부가 과연 실용적인지 그 '정답'을 검증할 차례다.
한국적인 맥락으로 볼 때 이념정부란 특정 이념에 갇혀서 정책목표, 정책수단, 정책구호 등이 경직적으로 그 특정한 이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정부의 요직도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즉 코드가 맞는 사람들로만 채워진 정부를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념은 사회주의 이념과 같은 좌파 이념뿐만이 아니라 우파 이념을 포함한 다양한 세계관 즉,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체계적 사고의 집합을 지칭한다. (한국에서는 좌파 이념만 이념이라고 생각하는 공부가 제대로 안 된 사람도 많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이념을 굳세게 따랐던 영국의 대처 정부, 미국의 레이건 정부, 현 조지 W. 부시 정부 등도 이념정부다. 그리고 나치즘을 신봉했던 독일 나치정부도 이념정부라고 할 수 있다.
출범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이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를 완전하게 검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나온 발언과 정책방향, 정부 출범 후 나온 인사, 그리고 이 대통령의 발언과 행보를 종합해 볼 때, 이명박 정부는 현재로서는 노무현 정부보다 훨씬 더 이념성을 많이 띤 이념정부에 가깝고 그 이념은 신자유주의와 개발주의가 복합된 '변종 신자유주의'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요소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때부터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완화, 시장원리에 의한 경쟁, 감세, 노동시장의 유연성, 사회복지의 축소 내지 시장화 등을 강조해 왔다. 잘 알다시피 이러한 내용은 대처, 레이건, 현 부시 정부가 고수한 신자유주의의 금칙과 같은 것이다.
아주 단순히 요약하자면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경제운용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1) 정부에 의한 시장 개입은 시장실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소화해 시장이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한다. (2) 이러한 시장에서는 기업이 세금과 규제, 그리고 경직된 노동시장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경쟁하고 기업의 수익률도 올라간다. (3) 기업이 잘 되면 궁극적으로 국가 경제가 성장하고, 그래서 실업도 감소하고, 세수도 늘어난다. (레이건 대통령 당시에는 이를 공급중시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이라고도 불렀다)
정책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정부기구의 축소, 법인세·종부세·양도세 감세, 재벌기업에 대한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융산업 구조개선을 위한 법률(금산법)' 완화, 수도권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사회복지의 축소, 건강보험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이념에 너무나도 충실한 경제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교육정책도 신자유주의의 원칙 아래 시장과 경쟁에 충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노동정책도 정규직의 확대보다는 시장의 원리에 따라 자유롭고 유연하게 노동의 수급이 이루어지는 것을 최선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정책방향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 이념에 매우 충실한 이념정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인사를 보더라도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 노동, 복지, 환경, 문화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공유하거나 저항 없이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각 부처의 장관들은 그 부문의 전문성보다는 신자유주의적인 이념을 공유하면서 신자유주의의 혜택을 주로 보았거나, 앞으로 볼 상류층 사람들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상당수는 개인적으로 시장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을 시장에 잘 적응하는 경쟁력 혹은 능력으로 인식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보로 치부하는 경향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방향과 인사는 왜 문제일까? 이를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의 경제 메커니즘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
대기업의 임원진은 보통 평사원과 달리 억대의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아간다. 평사원과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비교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다. 이에 대해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설명한다. '회사의 이익창출에 기여하는 만큼 연봉을 받아가는 것이 시장논리다. 임원진이 기여하는 부분이 일반 평사원보다 훨씬 높아 연봉이 그만큼 차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기여도와 연봉을 어떻게 기계적으로 계산하는지에 논란이 있겠지만 일단 여기까지 인정하기로 하자. 그렇다면 회사가 경영난에 허덕이고, 적자를 보는 상황에 돌입하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까? 이 경우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는 임원진을 고용조정하기보다는 일반 평사원 아니면 비정규직을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고용조정할 것을 권고한다.
물론 임원진도 감봉을 당하겠지만 그 고통은 평사원이나 비정규직이 직장을 잃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 임원진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만 대개의 경우 이들은 새로운 회사에 다시 임원진으로 채용되거나 그 동안 벌어놓은 막대한 자산(부동산, 예금, 주식, 펀드 등)으로 평사원이나 비정규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경제가 잘 나갈 때 상위층이 엄청나게 버는 것을 당연시하는 한편, 경제가 안 나갈 때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하위층이 책임을 지게 한다. 거기다 사회보장을 최소화하거나 민영화를 하게 되면 자산소득이 많은 상위층은 노동시장에서 잠시 물러나 있어도 질 좋은 사회보장과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노동시장에서 벗어난 중·하위층은 그런 혜택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물론 경기가 좋아지면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실업자의 재취업이 가능하게 되지만, 국가경제의 구조가 상위층의 소비력에 의존하는 것으로 되어 버리면 경기회복이 전반적인 고용확대로 이어지기 어렵다. 게다가 지식 서비스, 하이테크 산업이 경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면 상위층의 고급인력 이외에는 취업의 기회가 많이 늘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이러한 신자유주의 이념에 충실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급속도로 도입하게 되면 정부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개혁을 위해 시장의 강자(재벌)들을 묶어 놓았던 규제를 거의 다 풀어줄 수 있다. 재벌기업들을 규제한 이유는 무분별한 확장과 건전치 못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금융위기에 기여했기 때문인데도 말이다.
규제를 갑자기 풀면 시장이 매우 불균형·불균등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법인세 감세, 출총제 폐지, 금산법 완화, 사회복지 시장화,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는 한국의 경제구조를 재벌기업과, 이미 상당한 자산을 가진 자에게 특혜를 주는 구조로 급속히 바꿀 것이다.
금융시장의 장기적 안정도 담보하기 어렵다. 신자유주의 선진국인 미국의 서브 프라임사태 및 계속 되는 금융 불안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근본주의적인 신자유주의에서는 시장이 방향감각을 쉽게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신자유주의는 상위층이 확대한 부를 사회전반으로 흘려보내는 적하효과 (trickle-down effect)를 이념적·이론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나 실제로 상위층은 경제가 잘 나갈 때 훨씬 많이 취하고, 경제가 안 나갈 때 중하위 층을 희생양으로 삼기 때문에 적하효과는 매우 제한적이다. 반대로 미국, 일본, 영국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한 정부 하에서 격차가 확대된 것이 증명되고 있고 적하효과는 검증되지 않고 있다.
박정희식 개발주의의 결합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소위 '개발주의'가 접합되면 정부는 시장의 강자를 위해 매우 강력한 협력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즉 위에서 기술한 대기업과 상위층에 대한 특혜에 장애가 되는 것을 정부는 강력한 힘으로 제거해 나가는 역할을 하게 된다. 민영화에 대한 저항세력, 사회복지 축소에 대한 반발세력, 비정규직의 농성, 노동자의 파업 등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세력은 강력한 국가의 힘으로 제거되고, 그 과정은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형태를 띠게 된다.
아직 이명박 정부가 박정희식 개발주의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지만 코스콤 비정규직 농성에 대한 물리력의 동원, 대운하 발상, 노조에 대한 인식, 법치에 대한 인식, 소위 '좌파세력 척결'과 같은 구호 등을 보건대 개발주의적 사고는 이명박 정부에서 이미 넘쳐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정희식 개발주의는 핵심적으로 투입(input)을 늘려서 산출(output)을 증가시키는 매우 초보적인 경제발전 모형이다. 투입을 늘리기 위해 국가는 강제적으로 투입을 동원(mobilization)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 개발 독재 시절에는 안정적인 투입을 위해 국가가 노동을 통제하고, 재벌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국민의 '정신력'을 고양해 노동시간을 늘렸다.
그때는 그것이 가능했다. 높은 경제성장(output)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경제가 성숙해 지면 경제성장에는 투입보다 생산성의 향상이 훨씬 중요해진다. 정보, 지식, 하이테크, 서비스 산업을 지향하는 지금의 한국 경제는 정신력으로 무장해 새마을 운동을 하거나 노동을 통제해 노동 강도만을 높일 단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명박 정부의 패러다임은 운동장에서 구보하고, 새벽에 출근하고 한밤에 퇴근하며, 월화수목금금금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투입 위주의 개발주의 정신에 갇혀있다. 게다가 '비즈니스-프렌들리'라는 구호와 기업과의 핫라인 설치 등은 과거 재벌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개발주의의 관성에 지나니 않는다.
사실 정부가 신자유주의의 원칙을 철저히 따른다면 정부가 비즈니스 프렌들리하기보다는 규제는 완화하되 쓰러지는 기업은 쓰러지도록 하고 시장에서 살아남는 기업은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이 기업과 핫라인을 설치하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면 기업들에게 오히려 개발주의적인 잘못된 시그널을 보내게 된다.
Deja Vu: 정실 자본주의?
이렇게 신자유주의와 개발주의라는 이념이 합쳐지면 시장에서 강자 중심의 지배 심화, 재벌기업과 정부와의 정경유착, 재벌기업에 대한 건전한 규제와 감시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그림은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다. 바로 97년 IMF경제위기 직전의 한국 정치경제다. 그때는 이것을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으로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교롭게도 지금 이명박 정부의 경제 요직은 금융위기 당시의 사람들로 다시 채워져 있다.
강자 중심의 정치경제구도 재편과 함께 소수의 약자들에게 주어지는 안전장치가 순식간에 사라지면, 그리고 정부는 약자들이 스스로 살아남지 못하면 자연 도태되어야 한다고 방관한다면 앞으로 5년간의 이명박 정부는 참으로 피곤하고 힘든 나날이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진정으로 실용정부를 추구한다면 변종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의 덫에서 빨리 빠져나와 흑묘백묘의 정신으로 양극화 해소와 건전한 자본주의의 장기적 발전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편견 없이 연구·채택하고 그에 맞는 인사를 실용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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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에서 배워야 할 것 (프레시안, 이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08-03-20 오전 8:23:09)
[진단] 이명박 정부 어디로 가나 <하>
이명박 정부가 밟고 있는 지뢰 : 정보화 사회의 투명성
노무현 정부가 너무나도 실용적이어서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신자유주의의 실용성을 너무 믿은 나머지 상위층에게만 주로 혜택이 돌아가는 경제 성적표를 남겼지만, 긍정적인 업적을 만들어 놓은 것도 많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민주주의의 실천과 사회의 투명성 제고라는 면이다. 이는 최근 이명박 정부와 비교가 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새로운 인기가 형성되는 듯하다.
민주주의의 실천이라 함은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를 깨고 정치판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는 점, 스스로를 견제하는 권력기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인내했다는 점, 그리고 비판세력에 대해 힘보다는 논쟁으로 따지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부의 이러한 민주주의의 실천은 스스로에 대한 가감 없는(때로는 과장된) 보도를 용인하고 한국의 실정에서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높은 선진국의 검증기준과 판단 기준을 허용해 사회적 투명성과 '선진성'을 동시에 높였다.
이미 국민이 한 번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투명성의 매력을 맛보게 되면 다음 정부가 이전의 기준으로 돌리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권은 이미 높아진 기준과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칼날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칼날은 이미 이명박 정부의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여실히 빛을 발했다. 솔직히 노무현 정부가 인내했던,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만든 매우 선진적인 기준을 잣대로 한다면 그 기준을 통과할 이명박 정부의 인사는 극소수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실천과 투명성의 제고는 노무현 정부가 심어 둔 과거회귀세력에 대한 지뢰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와 초기 내각 인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지뢰를 밟고 있다. 사적인(private) 성공(결과적인 성공)과 공적인(public) 능력을 혼동하는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사적 능력의 영역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진출하려 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과거 사적인·개인적인 성공, 특히 과거 개발주의·권위주의와 동반성장한 개인적인 성공은 정상적인 과정을 벗어난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국민이 공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 매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많은 사람들은 현재 주류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갖고 있거나 재산을 많이 불렸으면 이미 공사(公私)의 영역을 불문하고 능력이 검증된 것이라고 믿는 단순한 오만함과 좁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단순한 오만함과 세계관이 노무현 정부 시기 올려놓은 투명성의 지뢰에 다 걸린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지뢰를 밟은 전우를 끌고 갈 것인가 버리고 갈 것인가로 고민하고 있지만 민주주의 사회 곳곳에 심어져 있는 지뢰 그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제거 시도 자체가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고, 더 깊은 지뢰의 수렁으로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보수언론이 보도하지 않고, 아무리 엠바고를 걸어도 말릴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와 정보화의 세계이다.
더구나 일반인들의 속성은 감추려고 하는 것을 캐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지, 잘한다고 선전하는 것에는 금방 식상하게 마련이다. 보수언론의 숨기고 포장하고, 정당화하고, 노무현 정부를 반복적으로 난도질하는 기사들에 대해 독자들은 금방 매력을 잃거나 식상하게 되고, 새롭게 터뜨리고, 파헤치고, 비판하는 언론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언론을 통제하자니 노무현 정권이 심어 놓은 투명성이라는 지뢰 때문에 여의치 않다.
필자는 권력의 트릴레마(trilemma)라는 가설을 주장하고 있다. (1) 권력의 유지 (2) 권력 사용의 자유방임 (3) 권력 사용의 투명성 중 한꺼번에 세 가지를 다 갖는 것은 불가능하고 많아야 두 가지만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금 한나라당과 같이 새롭게 권력을 잡아 유지하고, 그 권력을 쓰고 싶은 대로 사용하려면 한나라당은 언론 통제, 정보화의 축소 등으로 권력 사용의 투명성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권력을 무분별하게 자유방임적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몰라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만 생각하도록 언론 통제를 해야 한다.
반면 권력 사용의 투명성을 지키면서 권력을 유지하려면 권력을 자유롭고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절차와 기준을 따라 스스로를 제어하고 인내해야 한다. 이 경우 민주화와 정보화를 동시에 지키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선진적 정치가 이루어진다.
반면 투명성을 유지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하게 되면 그 권력은 급강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를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이 삼각형에서 동시에 가질 수 있는 변의 수는 두개를 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 권력의 트릴레마에서 한국은 이미 민주화, 정보화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정부가 권력 사용의 투명성을 줄이면서 나머지 두 가지를 가지려는 권위주의적인 노력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즉 이명박 정부는 과거의 패러다임과 민주주의 이전의 관행으로는 지지율 하락의 국면을 돌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보화와 민주화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을 없애면서 자유방임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려 하면 권력을 급속도로 잃게 되어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정보화 사회에 빨리 적응해 그간 높아진 기준과 투명성에 부합하는 인물과 정책을 찾아내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과제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5년 내내 정말로 피곤한 하루하루가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는 언쟁을 많이 해서 피곤했지만, 행동으로 실천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저항의 행동을 유발해 피곤함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게 될 것 같다.
정보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상징 전략
이명박 대통령은 서민과 같이 하고, 서민을 걱정하고, 물가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비추기 위해 시장에 자주 들르는 모양이다. 국밥도 먹고, 재래시장에서 물건도 사곤 한다. 라면값도 물어보고, 쌀값도 알아본다.
너무나도 훈훈한 광경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이에 대한 많은 국민의 반응이 꼭 좋지만은 않다. 국민들은 그런 모습과 실제 정책의 괴리를 금방 알기 때문이다. 정보화 사회가 국민들에게 가져다 준 힘이다. 인터넷 검색을 조금만 하면 실제 정책의 내용, 책임소재의 확인 등이 매우 쉽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검색까지 안 해도 강부자, 고소영 인사를 보면서 괴리를 안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많은 정보가 통제되고, 그 속에서 대통령의 발언과 행보가 포장되었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부동산 투기, 표절, 위장전입, 병역면제 등등의 기록뿐만이 아니라 정책의 내용, 과거의 발언, 과거 법안 발의의 기록 등이 가감 없이 인터넷과 입을 통해 전달되게 된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유언비어가 오히려 정확한 보도였다. 이제는 보수 주류언론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주류언론보다는 비주류 언론과 인터넷 매체에 더 정확한 정보가 돌아다니고 있으며 공신력도 점차 올라가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유언비어의 공신력이 올라가면서 권위주의 정부가 무너졌듯 지금 비주류 매체의 공신력이 올라가면서 소위 보수 주류세력은 위기의 임계점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의 정책과 사고방식이 겉으로 보여주는 언행과 다르면 그 언행은 금방 정치적 '쇼'로 치부되게 된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실제의 말·행동·정책이 투명하게 파헤쳐지고 있고, 날카로운 분석을 곁들이는 서비스까지 제공된다. 그에 따라 과거 박정희, , 전두환식의 상징전략(쇼)은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정부는 인사와 정책, 그리고 쇼에 있어서까지 너무나도 과거의 패러다임에 갇혀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은 새로 도입된 것 같지만 낡은 포도주 병에 새 술을 붓는, 연도수(vintage)와 포도주의 내용이 맞지 않는 불량품(개발주의가 결합된 변종 신자유주의)이어서 그 포도주가 제대로 팔릴지 회의적이다.
지도자의 도덕성 왜 중요한가?
국제정치학에 소프트 파워라는 개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나를 따르도록 하는 힘'을 일컫는다. 국내정치 영역에서도 지도자의 소프트 파워라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들을 강제하지 않고 국민들이 존경해서 지도자를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할 때 정치가 태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민주주의 시대에 실용정부가 진정으로 실용정부이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국민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지도자의 소프트 파워, 리더십의 소프트 파워가 매우 중요해지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장관과 같은 지도자의 소프트 파워는 우선 국민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덕목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래서 지도자의 도덕성, 인품, 모범이라는 것 등이 중요하다. 지도자가 도덕적이지 않고, 솔선수범하지 않고, 한 입으로 두말 하고, 말과 정책이 달라지면 국민들은 지도자를 알아서 따르기보다는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정부는 소프트 파워가 아니라 강제력이라는 하드 파워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국가 지도자의 도덕성은 능력의 후순위가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수단이다. 회사와 같은 사적 영역에서는 도덕성 보다 이익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우선되겠지만 민주주의 국가라는 공적 영역에서는 국민이 자발적으로 따라올 수 있는 지도자의 정당성, 도덕성, 솔선수범 등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정말 실용정부로서 정책 집행의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이러한 소프트 파워와 능력을 겸비한 지도급 인사를 주요 부문에 영입하고, 많은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구해 나가야 한다. 권위주의 시절의 밀어붙이는 방식으로는 이제 '실용적'으로 정책집행의 거래비용을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글을 마치며
물론 도덕성과 정당성, 인품과 같은 소프트 파워는 지도자가 자신의 비전을 펼치기 위해 가지는 매개일 뿐, 지도자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 국회의원이나 다른 공직의 이상적인 지도자는 이러한 수단 못지않게 국정을 이끌어갈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국회의원 공천 및 선거와 관련해 야당이건 여당이건 모두 이러한 소프트 파워(도덕적 깨끗함 등)라는 수단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즉 공천의 기준이 도덕성 이상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현 단계의 한국정치에서는 이것만 해도 훌륭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으로 여당과 야당의 정책적 차이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국정철학과 비전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여야 모두 깨끗한 사람들을 뽑았다고 가정해도 이들이 모두 신자유주의자이고 개발주의자라면 한국이라는 국가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한국이 선진국의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여야간 힘의 균형을 맞추거나 아니면 여당에 안정 의석을 부여하는 수준의 선거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미래비전과 정책을 놓고 따지는 선거를 하는 게 절실하다. 이제는 도덕성과 인품 못지않게 당과 정치인, 지식인의 투명한 정체성과 철학, 분석력이 중요해지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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