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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 번역가 이세욱 (대학신문, 2009-03-07)

새벽길 2009. 3. 11. 01:48

이세욱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보니 이세욱 씨가 번역한 책은 믿어도 좋을 것 같다.
 
이세욱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이이다. 베르베르의 소설을 『개미』정도만 읽어본 것 같다. 물론 재미있었는데, 그 뒤에 다른 작품을 읽어볼 여유가 없었다. 이세욱 씨가 말하다시피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는데, 굳이 시간투자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 이세욱 씨가 베르베르의 작품과는 작별을 고한다니 아마도 더 좋은 작품을 번역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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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베르베르 (대학신문, 2009년 03월 07일 (토) 22:33:02 서종갑 기자)
[작가와의 대화] 번역가 이세욱
 
“번역은 제게 여행이에요. 직접 ‘발’로 돌아다니면서 성숙해지는 일이니까요.”
 
『개미』, 『타나토노트』, 『뇌』 그리고 최근 출간된 『신』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너무 쉽다고? 물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이다. 그것 말고도 다른 공통점이 있다는 건 아시는지? 바로 이 모든 책이 번역가 이세욱씨의 손을 거쳤다는 점. 그가 없었다면 베르베르가 펼쳐놓은 짜릿한 공상의 세계를 그토록 생생하게 맛볼 수 있었을까. 번역 작품은 이질감을 주기 마련인데 이세욱씨가 번역한 작품은 한편의 잘 쓴 한국소설을 읽는 듯 편안하다. 이 정도라면 번역을 ‘또다른 창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대학신문』은 ‘번역작가’ 이세욱씨를 만나보았다.
 
그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를 거절하기로 유명하다. 출판사가 책을 홍보하기 위해 애걸복걸 달라붙어야 인터뷰에 응할 정도다. 이번에도 그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기자가 그의 과 후배임을 넌지시 밝히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인터뷰요? 당연히 해야죠!”라고 답했다.
 
(서울대) 불어교육과 80학번인 그는, 그의 문학이 그렇듯, 젊은 패션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의 문학 사랑의 출발점은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죠.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쓰인 문학작품들을 보며 낯선 어휘, 아름다운 문장을 차곡차곡 정리해 노트를 만들었어요. 틈날 때마다 노트를 펼쳐 어휘와 문장을 맘껏 음미했죠. 그때부터 문장 연습은 충분히 한 것 같아요.”
 
우리말을 사랑하던 ‘문학소년’은 대학 시절 ‘운동권’ 활동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당시 감옥에 들고갈 수 있는 서적은 제한돼 있었다. 그는 가지고 간 불불사전을 통째로 외우며 공부했다. 지금의 번역가 이세욱을 있게 한 ‘비하인드 스토리’다.
 
그는 “번역계에서도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번역계는 의역이냐 직역이냐를 두고 케케묵은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는 과감하게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번역 작업을 ‘비행술’에 비유한다. 그러고 보니 번역을 비행술에 빗대는 논법은 번역가 이희재씨가 쓴 『번역의 탄생』에서 이미 본 적이 있다. 두 번역가는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고, 이희재씨가 먼저 책에서 이 비유법을 소개했다고.
 
“직역에 비유되는 낮은 포복은 좀스럽죠. 의역인 고공비행을 하자니 비행기가 어디로 날아갈지 종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나마 좀 나은 방법이 의역과 직역 사이로 날아가는 저공비행인데 이도 마뜩찮아요. 위, 아래 모두 암초가 있는 꼴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선택한 것이 원작자를 태우고 저공비행을 하는 것이에요. 원작자는 모든 항로를 꿰뚫고 있으니까요.”
 
원작자를 비행기에 태우는 과정은 만만찮다. 작가가 작품을 쓸 때 경험한 모든 것을 그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이세욱씨는 자신이 체험해야 할 것들의 목록을 작성한다. 그 목록에는 가볼 곳, 만날 사람 심지어 먹어야 할 음식에 이르기까지, 작품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담겨있다. 한 작가가 이뤄놓은 금자탑에 이름을 함께 올려놓기 위해 그는 치열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그는 『개미』들이 살고 있는 파리 퐁텐블로 숲을 거닐었고, 『황금구슬』을 찾기 위해 마르세유에서 파리로 향하는 주인공 소년의 모든 경로를 답사하기까지 했다. 최근 그는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의 무대가 된 이탈리아 북부의 소읍 나차몬페라토를 다녀왔다. 베르베르의 『파피옹』을 번역하지 않은 것도 에코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 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프 리흐테르가 남긴 음악에 관한 메모를 다룬 『리흐테르』를 번역할 때는 “책에 나오는 모든 음악을 다 듣기 전까지 번역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그는 절판된 음반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 이탈리아의 음악상을 직접 찾아다녔고, 모든 음반을 들은 뒤에야 책을 번역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꼼꼼함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본전도 건지지 못할 일을 한다”고 핀잔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번역을 하면서 성장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된다고 말한다.
 
“많은 번역가들이 번역을 ‘엉덩이’로 한다지만 전 ‘발’로 해요. 작품 속 장소에 직접 책을 들고 찾아갈 때의 그 감동은 정말 말도 못해요. 그 공간이 제게 ‘훅훅’ 빨려들어 오는 것만 같죠. 제게 번역은 여행이에요. 작품 속 공간들을 직접 답사하기 때문에 여행이고, 저를 성숙시키는 과정이기도 해서 여행이에요. 여행을 하면 자신이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잖아요.”
 
“번역은 생계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곤 하는 그에게 번역계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번역계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제가 원하는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쓰리잡을 해가면서도 좋은 번역을 하려고 노력해요”라고 답했다. 그는 2003년까지도 학원강사와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번역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했다. 하지만 그도 출판계에 갖는 아쉬움은 있다. 그는 “출판계의 번역에 대한 인식이 낙후돼 있다”며 “번역가들에게 노력의 대가를 주는 데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때문에 의욕을 가지고 번역계에 발을 들여놓는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길을 찾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베르베르 전문 번역가라는 타이틀은 제게 아킬레스건이에요”라고 말하는 이세욱씨. 베르베르 번역가로서 유명세를 날린 그에게 들은 답이라 당혹스럽다. 그는 “베르베르의 소설은 기발하지만 가볍다”며 “진지한 고민 없이 가볍게 번역하는 것처럼 보여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신』을 끝으로 이제 베르베르의 작품을 번역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세욱씨는 익숙한 길보다는 낯선 길을 택해왔다. 인터뷰 내내 강조한 ‘기개와 패기’를 직접 실천해왔던 것이다. 그가 베르베르와 이별한다는 것이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된다. 이제 그가 선물해줄 ‘푸른 눈의 모국어 작가’는 대체 누굴까. 그 작가, 누군지는 몰라도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