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의 생각/국제, 평화, 민족
프랑스 좌파 정당, 잘 하고 있나? (레디앙, 2008-11,12)
레디앙에 올라왔던 NPA 관련기사는 NPA와 브장스노, 그리고 LCR을 파악하는데 유용했다. 그 내용을 발췌해서 올린다.
-------------------------------------------------------
프랑스 좌파 정당들의 몰락, 왜? (레디앙, 2008년 12월 15일 (월) 08:13:08 박지연 / 파리통신원)
지리멸렬 사회당, 좌우잡탕 녹색당 등…밑으로부터 연대가 희망
사회당은 항상 이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진보의 두 걸음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했지만, 자본주의 행보와 지나치게 가까운 타협점은 사회당 외부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내부 분쟁도 발생시켰다. 이미 장-뤽 멜랑숑이 사회당을 박차고 나와 좌파당을 건설했고, 좌파당은 내년 2월에 창당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멜랑숑은 지난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공산당과도 LCR과도 연대의 틀을 짜는 데에 실패했지만, 이제 내년 유럽의회선거에서 공동후보 전략을 놓고 좌파들과 협상 중이다. LCR은 이를 거절한 가운데 공산당은 우호적으로 검토 중이다.
프랑스 공산당이 우호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 또한 존재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에(대통령 선거 득표율 1.93%), 공산당 단독 선거에서 승산이 너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지난 4일 당 대회에서 공산당 대표 마리-조지 뷔페는 당기관지 뤼마니테(L'Humanite) 전 편집장인 피에르 로랑을 전 당 대표 로베르 휴에게서 떼어내서 자신의 곁에 앉히는데 성공함으로써, 이제 멜랑숑과 손을 잡는 것에 대한 반대파들을 정리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그나마 전체 좌파의 지진부진함 가운데 NPA의 창당 논의와 운동만이 활기를 띄고 있을 뿐이다. 현재로서는 NPA의 올리비에 브장스노만이 단독으로 유럽의회 선거에 뛰어들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맥락에서 LCR은 공산당과의 연대에도 문제점을 지적했다. 공산당이 약화된 지금 시점에서 공산당은 사회당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고, 이는 공짜가 아니라는 점이다. 공산당은 모든 정책에서 사회당의 볼모가 될 수밖에 없고 공산당과의 연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동적으로 한 다리 건너있는 사회당의 볼모가 같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시민의 56%, 좌파지지자들의 52%가 세고렌 루와얄이 지도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 새로운 인물을 기다린다고 답했다. 이는 비단 사회당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기를 겪으면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는 좌파정당들에 대한 식상함을 나타내는 지표일 것이다.
좌파운동이 활성화되어 있는 프랑스를 자랑스러워했던 프랑스 시민들에게 좌파의 연대적 몰락을 바라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일게다. 그럼에도 이 국제적 경제적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밑으로부터의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으며, 그리스 청년 투쟁이나 프랑스 교사들의 투쟁에 내미는 연대의 손길은 계속되고 있다.
------------------------------------
새로운 정당, 지금이다! (레디앙, 2008년 11월 26일 (수) 10:11:47 올리비에 브장스노 / 혁명공산주의자동맹 대변인)
[NPA특집] 사회당은 자유주의자…21세기 사회주의 위해 투쟁
우파와 강력한 자본가들에 맞서 우리는 분명하고도 결연한 투쟁이 필요하다. 오로지 투쟁과 운동속의 맞섬만이 사르코지의 ‘프랑스 사회의 재정비’를 저지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위해서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고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일부 좌파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항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체제화되어버린 좌파는 새로운 권력을 여는 데 무능력하다는 확신을 가진다. 이것은 (선거)실패에 의해서 각성된 지도자의 부재 문제가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곳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당은 자유주의자로 심하게 개량되었다. 예를 들면 ‘구매력’(역자 후주)에 관한 입장에서 명백해진다. 구매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해결방안은 정말로 간단하다. 월급인상을 요구하면 되는 것이다. 사르코지도 이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월급은 인상되어도 그것에 따르는 이익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이것이 전체화된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의 경제법칙을 수용해야 하는 좌, 우파 개량주의자들을 힘들게 하는 함정이다. 이러한 개량적 관점들이 사회당에서부터 권력층까지의 분해를 가속시키고 그들을 다시 집합시키는 즉 헤쳐모여를 설명할 수 있는 답이 되고 있다. 이러한 우파적 경향은 단지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현재의 제도적 장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사회당을 필요로 하는 자들까지 거대한 한 덩어리로 뭉쳐지게 하고 있다.
녹색당과 공산당이 지역공동체를 함께 경영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사회당에 다가선다 하더라도 이들은 지금의 자유주의 사회 안에서 새로운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나라 안에서 우리의 저항을 멈출 순 없다. 지금 약 만천 명의 여성들, 남성들이 투쟁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 젊은이들, 그들이 속했던 당의 방향과 지도에 진저리를 느끼는 정치정당의 당원들, 기업의 노조 운동가들, 모든 세대의 페미니스트들, 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그들의 열정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주의자들….
프랑스 사회의 모든 다양성 속에서 이러한 것들을 잊지 않고 있는 이들을 위해, 저항은 우리의 첫 약속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정당 안에서 통합할 것을 제안한다. 자본주의의 파멸을 위하여, 21세기의 사회주의를 만들기 위하여 투쟁하는 당은 노동의 세계 속에서 확고히 서게 될 것이다.
새로운 정당은 정당건설의 출발점이 되는 반자본주의, 환경을 위한 투쟁들, 여성들에 의해서 시작되는 모든 해방을 위한 싸움들, 역사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노동운동의 최고의 전통들을 결집시키기 원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 등, 이 모든 것들을 담게 될 것이다.
LCR은 대의원대회에서 스스로를 해체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건설과정 속에서 새 정당을 창설할 것을 발표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라 말할 수 있다. 성공적으로 대통령선거를 끝낸 후 우리는 우리의 조직을 정비하고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만족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수행하기로 했고, 우리는 좀 더 확대된 당을 제안하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은 종종 우리에게 묻는다. 그러면 당신들은 누구와 신당을 건설할 것인가? 물론 가담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새로운 정당 건설의 시급함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누가 이 제반 정치적 현실의 위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권력을 뒤흔들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되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창당 과정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여기에는 모든 좌파가 포함된다. 우리의 계획에 동의하는 전국적 정파들의 운동 속에서 함께 하기를, 호소하기를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 예를 들면, 노동자투쟁당(LO), 자유주의론자들, 공산주의자들, 반자유주의자들….
대의원대회의 발의와 각 지역위원회에서의 호소를 시작으로 이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새로운 정당을 근간으로 다 같이 토론하며 실천하기 위하여 지역단위 속에서부터 통합하기를 제안한다.
정치토론의 첫 장이 될 다가올 지방선거를 준비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또한 이 지역위원회가 전국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거점이 되기를 제안한다. 그래서 진행 중인 건설 운동 안에서 다양하고도 대표적인 운영위원회로 제대로 서기 위해서 새로운 정당 건설의 내용들을 심사숙고하여 구성하고, 마침내 연말쯤엔 창립 대회가 통합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정당을 준비하고 풍부하게 만들기 위하여 각 지역과 도시외곽 주민들, 임금노동자, 젊은이들이 주제별로 전국에서 토론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유럽과 전 세계를 결집시키기 위한 과업을 위한 모든 제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화, 국제주의는 전에 없이 시대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밥상 위에 밥은 차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할 때만이 그것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자 후주 : 구매력은 사르코지 정부가 출범하면서 경제살리기 정책의 일환으로 내세웠던 슬로건의 내용이다. “좀 더 많이 일하고 좀 더 많이 벌자”는 곧 구매력의 상승으로 연결됨을 선전하였고, 이에 구매력에 관한 내용들에 찬성과 반대로 사회당 내부와 권력층에도 분화가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노동시간은 급격히 증가하였으나 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사르코지 정부의 대표적으로 실패한 정책으로 비난받고 있다.
* 번역 박지연 파리 통신원
-----------------------------------------
평당원 아가트, LCR과 NPA를 말하다 (레디앙, 2008년 11월 26일 (수) 16:36:34 박지연 파리 통신원(2008년 11월 18일 파리3대학에서))
[인터뷰] “그들은 거리의 화염 속에서 언제나 함께 했다”
혁명적 공산주의동맹(LCR)은 해체를 기반으로 하는 범좌파통합의 신당 건설, 즉 반자본주의신당(NPA)을 공개적으로 제안하였으며 내년 2009년 1월 창당을 목표로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고 있다.
LCR의 역사는 멀리는 러시아혁명과 궤를 같이 한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때 혁명을 지지하는 프랑스 좌파들이 소그룹을 만들어 활동한 것이 최초의 조직적 전신이다. 그 후 1930년대 반스탈린주의의 기치를 내걸며 활동의 영역과 세를 더해 갔으며 1938년 9월 ‘4번째 인터내셔널’ 창설에 가담하면서 좀 더 당적인 모습을 갖추어 갔다.
그 후 이어온 활동 명맥은 1960년대 새로운 좌파로서 다시 전면 등장한다. 1966년 혁명적 공산주의 청년회(JCR)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당원들은 68년 5월 투쟁과 세계 곳곳의 무장투쟁에도 가담하게 된다. 다시 당명은 공산주의동맹(LC)으로 바꿨고, 이후 좀 더 좌파적 정체성을 부각하는 이름으로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CR)이 탄생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60년대부터 활동했던 당 활동가에서 근래 들어 주력 당원들은 30, 40대 젊은 층으로 바뀌면서 당내 세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정치국에서 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리고 60년대 LCR을 기억하는 유권자들에게 27살의 젊은 대표가 LCR의 당 깃발을 들고 대통령선거에 나왔을 때 모두들 놀라워 했었다. 이에 대해서 60년대 LCR을 창당했던 초기 당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과 우리는 혁명에 관한 같은 준거나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당은 젊어졌다. 소련은 사라졌고 세계화가 시작되었다. 수학공식처럼 자명하지 않느냐. 새로운 시기 + 새로운 세대 = 새로운 정당이다. 다양한 혁명의 전통을 집결시키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만들어야 하는 당이 반자본주의신당이다.”
LCR의 중앙당 사무실은 파리 외곽에 있는 큰 건물의 3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아래는 초대형 규모의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가격을 3등급으로 나누어서 첫 번째 가격은 LCR 과 NPA을 위한 가격으로 소폭 마진을 남기는 수준이었고, 두 번째는 그들의 친구들, 즉 모든 진보운동권을 위한 가격, 그리고 세 번째 가격으로 상업 인쇄를 하여 이윤을 남기면서 정당 활동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당사무실에는 하얀 백발이지만 눈에는 아직도 혁명의 원기가 살아있는 초기 당원들로부터 젊은 당 실무자 및 연구자들 그리고 인쇄소 노동자, 운영팀과 멀리 아래층에서 들리는 윤전기 소음 등이 어우러져 활기찬 분위기가 뿜어졌다.
취재하면서 늘 만나고 소개받은 간부당원이 아닌, 평당원의 입장이 듣고 싶어졌다. 이들은 당의 결정과 진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들도 이렇게 열성적으로 활동에 임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파리3대학에서 작년 겨울부터 문제가 되어온 교육민영화정책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는 한 여학생을 만나 짧게 인터뷰하였다.
- 언제부터 NPA활동을 하게 되었나?
= 2006년 JCR(혁명적 공산주의 청년회)에 먼저 가입하고 한 달 뒤 LCR로 옮겼다. 그리고 지금은 NPA의 이름으로 활동한다.
- 왜 LCR을 택했나? 다른 정당이나 그룹도 많은데.
= 내가 처음 조직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6년 봄에 있었던 CPE(최초고용계약서) 투쟁 때부터이다. 그땐 매일 거리로 나갔고 학교는 봉쇄되었다. 길고 험난한 투쟁의 시간이었고 조직 활동에 대한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리에서 내 주위를 둘러봤을 때 항상 LCR이 같이 있었다. 파리가 화염으로 뒤집혔을 때도 늘 그들은 선두에 있었다. 정말 단순한 이유 같이 들리겠지만 그뿐이다. 내가 거리에 있을 때 그들이 내 옆에 있는 것!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아니겠느냐? 그리고 LCR은 많은 활동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나처럼 외향적인 사람에겐 알맞기도 하다. 그냥 늘 회의나 하는 그런 모임이 아니다.
- 이유는 동감하지만, 그들의 당 강령에 어떻게 동의했는가? 특히 혁명적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당인데.
= 우리들의 강령은 좌파로서 당연한 이야기들이다. 다만, 혁명에 관해서는 나도 처음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LCR에 가입하기 전엔 단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 조금씩 혁명에 대해서 고민해고 차츰 동의하고 있는 단계다.
- 그래서 지금 아가트가 생각하는 혁명은 무엇인가?
= 나는 혁명이 방법론적으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사민주의 체제도 자본주의 안에선 완벽하게 완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다. 당장 지금처럼 세계경제가 위기에 처하고 금융 자본가들이 어려워질 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는지 우리 모두가 보고 있지 않느냐?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길거리로 내몰리는 이들은 시급으로 일하는 일용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약한 자들부터 쓰러질 것이다. 복지정책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물론 나도 러시아혁명 때처럼 무장혁명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어떤 형식으로든 자본주의는 끝나야 한다는 선전의 의미다. 적들의 공격에 방어하는 단어이고, 절대적으로 끊기지 않는 고민이 될 것이다.
- LCR에서 NPA로 재창당되면서 당명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삭제되었다.
= LCR의 모든 당원이 혁명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LCR 안에서도 다수의 당원들은 혁명을 이야기하지만, 소수 그룹의 반혁명파도 있다. 그래도 모두들 어쨌든 LCR 당원이었고 지금은 모두들 NPA 당원이다. 반자본주의란 말은 이미 많은 것을 내포한다. 창당대회에서 결정되겠지만 실질적으로 합리적인 방안에서 혁명에 관한 강령이 결정될 것이다. 모든 결정은 쉽지가 않을 것이다.
- 평당원으로서 NPA 활동은 어떻게 하고 있나?
= 대체로 신당 건설 활동과 투쟁 활동으로 나뉜다. NPA의 하부조직으로 학생위원회가 지난 4월에 생겼다. 나는 이 학생위원회에서 일한다. 각 대학에 하나씩의 위원회가 있어서 학교 실정에 맞는 활동을 하고 또 연합으로 이번 주 목요일에 학교민영화반대 가두시위를 룩상부르크 공원 앞에서 할 것이다.
- LCR은 물론 지지자들의 수는 많았지만 그에 비해 실질 당원 수는 3천 명이었다. 하지만 아직 당과 당의 통합은 없는데도 NPA 창당 발표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당원 수가 만 명, 지금은 또 한 달 조금 넘은 기간 동안 만천 명이 되었다. 이유가 뭔가?
= 결국은 실천하는 당이기 때문이다. 지금 자본주의 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는 답이 될 수 없음을 NPA는 온갖 투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며 이야기하기 때문에 쉽게 당원으로 가입이 가능하다. 실천만이 신뢰를 줄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에겐 시의적절한, 정확하고도 명백한 목표가 있다. 반자본주의!
- 반자본주의신당의 당명이 가지는 포괄성도 큰 것 같다. 그래서 당명 또한 바꾸지 않을 거라고 들었다.
= 응? 나는 반대하는데…. 왜냐하면 2, 3년이 흐른 뒤에는 더 이상 신당이 아니지 않느냐?
--------------------------------
NPA는 무엇인가? (레디앙, 2008년 11월 27일 (목) 14:00:16 피에르 루쎄)
[특집] “가장 큰 어려움은 이름 정하는 것…모든 언어는 오염됐다”
이 글의 원제목은 「반자본주의신당(NPA)의 설립에는 뭔가 새로운 것이 있는가?」이다. 필자인 피에르 루쎄는 68세대 활동가이자 연구자로, 한국 ATTAC 회의 때 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 편집자 주
2007년 6월, 프랑스에서는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LCR)이 반자본주의 신당(NPA) 건설을 제안했다. 1년 후, 약 일천여 명의 대표들이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하나의 시도를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파리에 모였다.
2008년 11월 초, 약 400여 명의 지역위원회 대표들이 3가지 논제 즉 활동 강령, 정치적 방향성 그리고 NPA의 위상과 기능 등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다시 모였다. 지금 현재 대략 만 명의 운동가들이 이 건설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NPA에 관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여기에 스스로를 투자할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위원회가 그들을 맞이할 만큼 잘 기능할 수 있을는지를 알기에는 너무 이르다. 게다가 새로운 정당의 설립 이후에 새로운 가입의 물결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다.
NPA의 정치적 충격은 매우 중요하다. 일련의 공간들에서, 창당 과정 중에 있는 이 정당은 매우 활동적이고 사실상 벌써 LCR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2008년 11월 6일 파리에서는 2000명 이상의 참가자들과 함께 최초의 대중회의를 개최했다.(「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 제안 첫대회」)
11월 15일, 프랑스 남부의 몽펠리에에서는 1500명이 참가했다. 이 참가자들의 수들은 2007년 LCR의 대통령 선거 당시보다 때때로 더 중요한 숫자이다. 물론 어떤 지역들은 다른 지역들만큼 진전을 보지 못하며 진행은 더욱 느리다.
확정된 절차는 1월 29일 LCR의 정치적인 해산과 NPA의 설립회의가 2009년 1월 30일에서 2월 1일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거다. 모든 것들이 정해진 시간을 향해 진행되고 있다. NPA의 설립 과정이 진전되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이다. 그것은 명백히 하나의 정치적 기다림에 답하는 것이다.
이 기다림, 이 ‘새로움’의 필요성이 인지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프랑스에서 지난 10여 년간 LCR보다 더 질적으로 광범위한 반자본주의 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들이 모두 실패했다. 이 실패들을 넘어서기 위해, LCR은 새로운 방향을 시도하기를 결심했다. 너무나 새로워서 과거에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을…. 그래서 지금 반자본주의신당 설립과정에 새로운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다른 모든 시나리오들이 실패하고 난 후…
LCR은 NPA를 착수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 조직이 과거, 사회의 넓은 영역들 속에 사회적으로 뿌리내린 혁명적 정당의 설립을 어떻게 고민해왔는지를 되돌아보는 것은 유의미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쇠진해가는 나의 세대, 이른바 68년 5월 세대의 시각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960년대에 우리 세대는 활동적이고 급진주의적인 새로운 조직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이 조직들은 소규모였다. 일반적으로 수백 명으로 시작해서 이후 조직이 약화, 스스로 해체되기 전까지 최대 5천에서 만 명 정도가 참여했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우리는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결정적인 계급간의 대치가 일어나기 이전에 우리는 재빨리, 열정적으로, 위기 속에서, 강력한 실천력으로 새로운 혁명적 정당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우리는 역사의 리듬이 우리가 믿었던 것보다 훨씬 느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기적인 전망에서 대중에게 뿌리내릴 수 있는 혁명적인 정당의 구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우리 세대에게 이것은 정신적 혁명이었다).
LCR은 사회 속에 넓게 뿌리내린 혁명적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 결코 자신의 성장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것은 좌파와 노동운동 안에서의,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하는, 훨씬 폭넓은 ‘재구성’과 힘들의 재배열 과정의 결과물일 것이다. 우리는 세 가지 ‘유형’의 시나리오를 고려했다.
1. 노동자들이 지지하는 기존 정당(사회당, 공산당)에서 노동자들이 대거 이탈하여 급진화되는 방법
장-피에르 슈벤느망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당 분파는 ‘좌파 국가주의자’가 되었다. 프랑스의 ‘늙은 좌파’는 부분적으로라도 스스로를 소생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최근 사회당의 장-뤽 맬랑숑의 이탈이 이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우리는 좌파로 근본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새로운 대중적 노동자 정당의 설립에 대해 숙고했었다.
그러나 맬랑숑은 ‘공화주의 좌파’ 프로그램을 위해 LCR보다도 적은 수의 멤버들과 함께 사회당을 떠났다. 그는 단번에 정권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좌파 정당’을 설립했고, 이는 지금 현재로서는 사회당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야망이 되어버렸다.
2. 노동조합 운동을 통한 노동계층의 새로운 급진적 정당의 설립
노동자 정당의 창당, PT 와 같은 형태이거나 혹은 더 최근으로는 남한의 경우로 민주노총(KCTU)은 민주노동당의 창당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 두 경우의 정치적인 시도는 군사독재의 혹독한 시기 이후 재조직된 ‘젊은’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결행되었다. 프랑스에서 주요 노동연맹체들은(CGT, CFDT, FO) 이러한 활동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예들은 매우 드물다. 이들은 예외를 대변하지 통례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3. 세 번째 시나리오 : 급진좌파의 두세 개의 중요한(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정치조직들이 함께 새로운 정당의 구성을 제안하는 것
이는 특히 포르투갈(좌파 블록), 덴마크(적과 녹의 연합)에서 일어났다. 이는 세 가지의 시나리오들 중에서 앞의 것들에 비해 훨씬 온건했기에 가장 간단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프랑스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 반면에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노동자 투쟁(LO)의 아르레뜨 라귀에의 득표율(5%)와 2002년 아르레뜨 라귀에와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놀라운 총득표율(10%)에서 보듯이 정치적인 공간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존재한다.
이 영역에서의 프랑스의 교착을 설명하는 첫 번째 이유는 LCR이 급진좌파 중에서 통합정당의 설립을 희망하는 1960~1970년대 급진화의 유일한 직접적인 후손이라는 점이다. 그 시대의 ‘생존자들’인 다른 두 조직은(노동자투쟁(LO)과 람베르트주의 정파들) 이러한 관점에 어떠한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2005년 신자유주의적, 반민주주의적, 군사주의적 제안의 유럽 헌법에 대한 선거에서의 반대 승리 이후 프랑스에서는 어쨌든 하나의 중요하고 새로운 정치적 입구가 생겨났다. '좌파의 좌파' 내에서 정치적 연합체에 대한 강한 희망이 표현되어졌다. 그러나 연합체는 프랑스공산당에서부터 LCR를 아우르는 다양한 조직들과 지역 위원회를 포함하는 강도 높은 2년여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실현되지 못했다.
유럽헌법의 부결이라는 승리에 이어진 연합의 실패는 이 긴 협상에 참여한 조직 구성원들 사이에 많은 냉소와 협상 실패의 책임을 누가 질런지를 알기 위한 고통스런 논쟁을 야기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이 실패의 책임을 누가 질런지를 찾는 것보다는 여기에서 언급된 세 가지의 시나리오들이 수십 년에 걸쳐 연속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왜 항상 실패해야만 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는 또다시 아주 도식적인 방식으로 다음의 요소들을 강조하려고 한다.
'노쇠한' 정치적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노쇠한' 정치적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은 급진좌파에 새로운 젊음을 다시 가져다줄 만한 잠재성이 없었다. 정당 쪽을 보자면 사회당의 사회적 뿌리는 변화하였고, 즉 '사회자유주의'라는 그들의 방향성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그들의 통합의 깊이를 표현한다.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그들은 결코 진정으로 스탈린주의에 맞선 과거가 없으며, 오늘날에는 선거에 관해서나 제도적으로 사회당의 인질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공산당은 여러해 전부터 위기 속에 있는데 그것은 불행하게도 '활기 없는' 위기이다. 노동조합들을 살펴보자면, 주요한 세 연합체들은(CGT, CFDT, FO) 너무나 관료화되었다.
이것은 '노쇠한' 노동운동에 속하는 개인들이나 활동단체들이 NPA나 다른 급진 정당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우리가 1970-1980년대에 희망하던 것과는 반대로 전통적인 노동운동을 '재구성' ('재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훨씬 근본적인 방식의 '재건'이 필요하며 이는 매우 복잡한 일이다.
새로운 사회운동과 조합운동
새로운 사회운동과 조합운동이 최근 십오 년에서 이십년 사이에 일어났다. SUD의 창립과 단결(Solidaires), FSU, 실업자와 ‘없는자(sans)’들의 단체(역자 후주①), 다양한 반세계화 구성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상당히 다양한 층위이기는 하나 훨씬 전망 있는 잠재적 급진성이 존재한다. 오늘날 이 운동의 상당수 구성원들이 NPA의 계획에 호의를 보이고 있으며 참여하고 있다.
2005년에서 2007년 사이 몇몇 조합과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서 ‘좌파의 좌파’의 단일화 방안을 논의했다(일반적으로, LCR에 대한 대항으로서). 이러한 논의는 사회운동의 주목할 만한 진화와 프랑스 정치 광경의 부동성 사이의 간극을 메워줄 수 있는 긍정적인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협상들의 지체와 이후의 실패는 이러한 측면들의 노력들까지 멈추게 하는 작용을 했다.
더욱 심오하게는, 프랑스에서 사회운동과 정치정당 간의 관계는 어려운 상태로 남았다. 노동조합들과 다른 대중조직들의 독립성은 특히 ‘민감한’ 문제이다. 이는 몇몇 부정적인 이유들(‘활동가의 환영幻影’) 때문이기도 하나 특히 합당한 이유들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과거 도구화와 막후 공작을 당했던 경험들.
이러한 장애를 넘어서기 위해, 미래에는 더욱 효율적인 상호 활동성을 보장하기 위해, NPA와 같은 급진적 정당은 실천적으로, 그리고 일관적으로 사회운동 자체의 독립성과 민주성을 존중한다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좌파의 좌파
프랑스에서 ‘좌파의 좌파’가 무엇인지를 묘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구성체들이 정치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공산당은 그 구성체들과 가장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프랑스 공산당은 깊고 불명확한 위기 속에 있다.
LCR은 단일체의 구성을 위해 노력하는 ‘극좌’(혁명적) 조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소그룹들과 경향들, 비공식적 활동가들의 연결망, 지역구성체들, 당원들, 개인적 ‘인물들’…. 이 모두가 단순한 정당들의 연합에 비해 훨씬 넓은 하나의 ‘경향’, 하나의 ‘영역’을 형성한다.
2007년 선거를 위해서 2005년과 2006년 사이에 단일후보를 선출하려던 시도가 왜 실패했는가? 왜 단일화의 희망이 파편화 속으로 어둡게 침잠했는가?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기존에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중심적인 정치적 질문이 존재한다. 즉 사회당과의 관계, 선거연합과 정권에의 참여에 관해서다.
사회-자유주의, 혹은 중도좌파와의 연합이라는 문제는 정권참여가 명백한 조건이었거나 조건일 여러 국가들에서 ‘좌파의 좌파’로서는 핵심적 문제이다. 브라질, 서뱅갈, 이탈리아, 독일,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에서는 선거 시스템이 매우 반민주적이다. 의회에 선출될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는 사회당의 지지가 있어야만 한다. 그 지지는 까닭 없이 주어지지 않는다. 약화된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선거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사회당과의 협약이 필요하다.
1차적으로 공산당과 연합하려는 자는 이를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때때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고 해도, 그들은 현실적으로 사회당과의 선거 블록의 관점 안으로 자동 가입하는 것이 된다.
LCR은 -다른 ‘좌파의 좌파’의 구성체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점을 거부한다. LCR은 현재의 역학관계 하에서의 정권 참여는 어떤 식으로든지 사회-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질서의 운영을 함께하는 극단적인 타협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탈리아에서 프로디 정부에 참여한 재건공산당의 참혹한 결과를 보라).
LCR의 입장에서는 사르코지 정부에 대해 가장 광범위하고 단일대오의 사회적 저항의 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정당적인’ 측면에서는, 우선 우파보다는 사회자유주의와 같은 좌파의 대안을 구현할 수 있는 급진적인 중심점을 강화해야만 한다. 이는 사회당과의 관계에서의 완전한 독립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선거연합과 사회당에 관한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경계선을 구성했었고 또 앞으로도 구성할 것이다.
2006년 말, LCR은 ‘좌파의 좌파’ 사이에서 매우 고립된 것처럼 보였다. 2007년 초, 대통령 선거에서 마리-조지 뷔페는 프랑스 공산당을 대표했고, 도미니크 보이네는 녹색당을,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LCR, 조제 보베는 몇몇 ‘좌파의 좌파’의 구성체들을 대표했다.
브장스노의 선거캠페인은 정치적으로 매우 활기찼고, 그는 4% 이상 득표했다. 2%를(프랑스공산당으로서는 기록적으로 낮은 수) 얻은 뷔페는 대통령선거에서 어떠한 활기도 없었다. 보이네의 실패는 명백했고(1.5%), 보베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겨우 1%를 넘는 득표율로 꼴지를 차지했다. 방향성에 대한 2년여의 심도 있는 토론들 후에, 대통령 선거는 '좌파의 좌파'를 위한 더 큰 성격의 정치적 실험을 보여주었다. 선거는 LCR에 새로운 책임을 안겨주었다.
LCR의 새로운 책임들
정치적 방향성과 선거 승리 덕분에 LCR은 '좌파의 좌파'의 초점이 되었다. 따라서 문제는 “이 승리를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LCR은 불붙은 활기를 예전처럼 잃지 않기 위하여 신속히 하나의 시도를 행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2007년 중반, 대통령 선거의 실험에도 불구하고 반자본주의 신당을 설립하기 위해 다른 중요한 조직들과 동의를 맺는 것은 계속 불가능했다. ‘위에서 아래로’의 어떠한 호소도 가능하지 않았으며, LCR은 ‘아래에서 위로’의 진전을 촉진시키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정당을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NPA의 지역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되었다. 위원회들의 연결망은 새로운 정당의 기반들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LCR보다 질적으로 더 폭넓은 급진정당에는 열린 공간이 존재할 것이 명확하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놀라운 명성이 말해주고 있다. 올리비에는 뛰어난 후보이며 대변인이다. 그의 명성은 ‘미디어적인’ 현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봉급을 받고, 파업에 참여하기도 하는 우편배달부로서, 그는 대중들에게 직업적 정치인으로 비춰지지 않았다. 대신 ‘동료-노동자’, ‘우리들 중의 하나’로 비춰졌다. 젊기 때문에 젊은 층은 더 쉽게 그가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말을 하나 더 하자면,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일관성 있다. 27살에 그가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2002년), 그는 이미 LCR의 정치국의 일원이었다. 방송토론회에서 젊은 우체부는 그에게 반대의견을 보이는 직업적인 정치인들과 정부요인들을 참패시켰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한다!
LCR이 NPA를 시도하도록 허락한 이유 중의 하나는 흔히 간과되어왔는데 그것은 LCR의 지도부가 심도 있게 쇄신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LCR의 모든 ‘역사적인 인물들’은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여전히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앙당 차원의 지도부는 30대와 40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 내의 다른 조직들의 경우와는 다를 것이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일어난 세대의 급격한 변화를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LCR은 구성원들과 지도부의 체계를 다시 젊어지게 할 줄 알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6~70년대의 LCR의 기원을 벗어나지 않는 조직으로 남았다. 그러므로 LCR은 현재의 운동세대의 정치적 경험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정당의 창조를 촉진할 수 있으며, 또 해야만 한다.
새로운 정당으로서의 NPA
LCR의 목적은 단순히 더 크고 수가 많은 정당을 구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새로운 조직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URSS)의 해체와 자본주의의 세계화라는 시대의 급격한 변화를 체험했다. 우리는 또한 급격한 세대변화를 경험했다. 오늘날의 운동가들은 68세대와는 같은 지표들과, 같은 집단적 경험과 등의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두 가지 (시대와 세대의) 급격한 변화의 결합은 정치와 운동이 생존한 방식에 있어 심대한 중요성을 가진다. 지난 수십 년간의 정치적 경험들과 20세기의 교훈들(제국주의, 스탈린주의…)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과거를 잃지 않는 동시에 어떻게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
LCR의 유산(모든 구성요소들)을 NPA에 전승하면서. 또한 지난 세기의 다른 혁명적, 정치 활동적 전통 중 최선의 것들과 맑시즘과 자유론자들의 다양한 경향들, 페미니즘과 환경사회주의자들, 반세계주의자들, 등을 받아들이면서….
사회적 뿌리와 이미 구성된 능숙한 지도체계를 ‘제공’하는 동시에 NPA가 전체 대중사회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게 그 영역과 분야를 넓힐 수 있도록 도우면서. 급진적인 노동운동과 자본주의 세계화의 복잡한 양상, 외곽도시(역자 후주②)에서의 저항들, 이민자들의 투쟁들, 차별에 반대하는 투쟁들을 포착하면서. 새로운 정당이 지금 세대의 정치적 언어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허락하면서.
LCR에 있어서 다른 이들과 함께 더 폭넓은 반자본주의 정당을 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LCR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를 희망해왔다! 새로운 점은 바로 '아래에서 위로'의 진전을 촉진한다는 것이며 NPA의 개념 속에 시대와 세대의 변화를 실제적으로 합치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지점이 아마도 가장 중요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LCR은 NPA의 구성에 참여한 프랑스 내의 '좌파의 좌파' 중에서 유일하게 ‘거대한’(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구성체이다. 참여한 다른 집단들은 훨씬 소규모이다. 그런데 NPA의 설립 이후에 LCR이 정당 내의 정당으로 남는 상황은 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엄격한 결정들이 취해졌다. LCR의 멤버들은 NPA를 운영하는 위원회들 내에서 일반적으로 소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LCR은 NPA의 설립총회 이전에 해체되어야 할 것이다. NPA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생산하는 동시에 정치 사회적 융화의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정치적으로 여기에 동의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쉽다. 일단 사회당과의 관계문제가 해결된다면, 오늘날에는 예를 들자면 1970년대의 '소비에트 연방의 성격'과 같이 분열을 일으킬만한 논쟁 주제는 없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이론적인 단련이 부족하며 전략적인 질문들은 거의가 구체적인 답을 얻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떻게 부르주아지를 무력화시킬 것인가? 등. NPA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체계적인 기반을 굳건히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많은 시간을 요할 것이다. 다가올 진로는 상당히 불명확하다.
NPA가 부딪힌 가장 기본적인 어려움은 그 이름을 정하는 것이다! 이는 전혀 우스갯소리 같은 일이 아니다. 6,70년대에는 일종의 ‘공통된 정치적 소유물’을 구현하는 단어들이 존재했으며 모든 ‘좌파의 좌파’는 이를 인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이는 형용사 ‘공산주의(의)’이었으며 벨기에에서는 ‘사회주의(의)’였다. ‘프롤레타리아’나 ‘노동자’와 같은 단어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모든 단어들은 오염되었다. 어떤 공통의 경험을 (거의) 모두가 나눌 수 있는 ‘일체화된 이름’을 재구성해 내지 못했다. 이 점은 이름을 결정하는 데 대한 어려움을 반영하며 나아가 정해진 정치적 간격을 반영하고 있다.
LCR을 해체하는 결정은 확실히 위험하지만 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다. 현재의 기회를 잡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아마도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이는 모든 ‘좌파의 좌파’에 해당한다. NPA는 거대해진 LCR로 비춰지거나 실제로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대신 질적으로 새로운 정당이 되어야 한다.
좋은 참여율로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정당에도 참여해 본 적이 없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예전에는 프랑스공산당과 다른 단체들에 소속되었던 많은 이들, 조합과 노조의 활동가들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만일 2009년 1월 말로 예정된 NPA의 창당이 성공한다면 현재 LCR과 연합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좌파의 좌파’ 내의 정치적 구성체들 또한 아마도 의견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과해야 했었고 또한 앞으로 통과해야 할 여정들을 어림잡기 위해서는 2009년 2월 초와 NPA의 설립을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루쎄 피에르 (ROUSSET Pierre), 2008년 11월 21일, 파리
* * *
역자 후주
① SUD와 Solidaire는 좀 더 강한 좌파적 성향과 투쟁적인 노동조합연맹들이며, FSU는 단위노조로서 교육공무원 노조Organisation des fonctionnaires de l'enseignement가 그 전신이다. sans은 “없다”는 말로 여기서는 무허가체류자(sans papier), 노숙자 (sans domicile fixe)등, 프랑스 사회 내 소외계층을 의미한다.
② 여기서 외곽도시 Banlieu는 파리외곽 특히 북쪽으로 형성된 지역을 일컫는다. 이주 노동자,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현대식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이곳은 가난, 차별, 인종, 범죄의 상징체가 되었고 점점 게토화 되어가고 있다. 특히 지난 2005년 겨울 사르코지, 당시 내무부장관의 인종차별 정책과 발언에 대한 폭력적 저항이 진행되기도 했다.
'길 위에서의 생각 > 국제, 평화, 민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모델론’ 서구 좌파들 뜨거운 논란 (0) | 2009.01.23 |
---|---|
BOYCOTT ISRAEL CAMPAIGN 이스라엘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다국적기업 불매운동 (1) | 2009.01.14 |
예비군과 민방위, 비용과 편익을 따져보자 (0) | 2008.12.03 |
오바마 당선의 의미 (0) | 2008.11.08 |
2008년 10월의 브라질 지방선거 결과 관련 기사 (0) | 2008.10.29 |
'길 위에서의 생각/국제, 평화, 민족'의 다른글
- 현재글프랑스 좌파 정당, 잘 하고 있나? (레디앙, 2008-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