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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 관련 기사

새벽길 2008. 12. 3. 18:41

자크 랑시에르가 설대에 왔다는데도 그의 강연을 보지 못했다. 뭐, 그의 저서를 하나라도 제대로 읽은 게 없어서 강연을 들어 무슨 소용이랴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실은 잊어먹고 지나갔다. 오늘에야 생각이 나더라.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번역이 워낙 개판이라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여 작년 말 서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잠시 훑어보았다가 기억에서 지웠는데, 그의 책들이 계속 번역되고 방한까지 하게 되었다.
  
최근에 번역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볼 만할 것 같다. 특히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를 서술한 부분.
관련하여 랑시에르와 그의 저서를 다룬 기사를 담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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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은 인민의 주체적 역량으로만 가능” (경향, 정리 김진우기자, 2008년 12월 02일 17:38:47)
첫 내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듣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파리8대학 명예교수(68)가 지난달 30일 프랑스문화원 후원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그는 현재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함께 프랑스 사상계를 이끌고 있다. 2일 서울대를 시작으로 홍익대·중앙대에서의 공개 강연을통해 한국 독자들을 만나는 랑시에르 교수를 지난 1일 만났다. 그의 저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의 번역자이기도 한 양창렬씨(31·파리1대학 박사과정)가 대담자로 나섰다.
  
-같은 세대의 프랑스 사상가들에 비해 뒤늦게 주목 받는 이유는.
“나는 당대의 이론적 토론에 개입하거나 다른 사상가들과의 차이 속에서 개념을 만들어내기보다 자신의 길을 걷는 작업을 해왔다. 1970년대 10여년 동안 19세기 노동자운동의 문서고를 뒤지면서 정치와 미학에 대한 생각들을 마름질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왜 그런 논의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 명확한 철학적 체계를 세우거나 일반적인 언표들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2년쯤 <불화>의 근간이 되는 강연들을 하는 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체계화된 설명을 내놓자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유가 요구되고 있다. 당신이 보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과 대안은.
“신자유주의는 시장이 세계적인 수준에서 모든 관계를 자기조절할 수 있다는 통합된 자본주의에 대한 유토피아를 가리킨다. 그것은 사회적 연대 체계를 파괴하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전통적인 모든 관계를 소환하려는 의기양양한 유토피아였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 위기는 시장이 자기조절을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국가가 개입함으로써 시장 논리와 국가 개입의 논리는 다시 평형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듯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동적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경제 위기가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의 편성에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나 마이클 하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발전이나 위기가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와 단절하는 인민의 주체적 역량을 통해서만 해방이 가능하다.”
 
-한국은 촛불시위나 비정규직 문제 등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주체에 대한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다. 당신이 말하는 ‘배제된 자들의 정치적 주체화’와 맞닿는 것 같다.
“공연예술 분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의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작품에 참여하는 기간이 아니면 장시간 실업 상태다. 프랑스에는 그들을 위한 사회보장체계가 있다. 정부는 그 체계를 개혁해 그들의 권리를 축소하려 했다. 이에 맞서는 운동은 두 상반된 논거에 사로잡혔다. 한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국가나 시민들에게 중요한 문화의 일익을 담당하는 만큼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반대되는 논거에 따르면, 그들은 스스로를 문화나 예술에 종사하는 특수한 노동자가 아니라 오늘날 일반화되고 있는 불안정하고 단속(斷續)적인 노동조직화를 증언하는 자로 내세웠다. 그들은 노동시장구조에서 노동과 실업의 경계에 있는 자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사회학적으로 정체성을 부여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처럼 노동과 실업의 경계, 한계점, 틈새에서 노동과 시간을 다른 식으로 활용하는 방식에서 정치적 주체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당신은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것을 치안이라고 칭하면서 그에 대립해 정치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했는데.
“공동체 조직에 대해 사유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치안이란 공동체 내에서 각자에 맞는 자리, 직무, 정체성들을 자연적으로 분배하는 일종의 총체성이다. 곤봉이나 총을 든 경찰은 치안 논리의 결과에 불과하다. 치안 질서에서는 출생, 부, 나이, 지식, 종교 등이 통치를 하기 위한 자격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것은 대개 과두정치나 전문가들의 통치로 귀결된다. 반면 정치는 치안 논리에 따라 정해진 사회 집단의 정체성으로부터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인 ‘인민’은 사회학적으로 식별가능한 집단이나 주민들의 총합이 결코 아니다. 정치란 오히려 각자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할에 맞서 하나의 ‘보충’으로서 공통적인 것에 참여하는 인민의 힘을 가리킨다. 정치는 정부 또는 선거 같은 대의 체계를 뛰어넘는 활동이 벌어지는 도처에 존재한다. 민주주의란 통치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던 자들이, 모두에게 속한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합의를 실행하는 국가 형태나 특정한 사회적 삶의 형태로 간주하는 것은 정치를 제거하는 것이다.”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얼마 전 <해방된 관객>을 출간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전통 좌파는 반민주주의적이었다. 지배를 이데올로기의 필연적 강제·부과라고 보았던 그들은 관객이 영상, 광고, 이미지 등에 속고 소외되는 멍청이들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또한 외양 뒤에 숨겨진 현실이 있으며, 그것을 전문가들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무지한 스승>에서 검토한 바 있듯이, 위의 관점은 지능의 불평등에서 출발해 불평등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은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거리를 계속 유지하는 불평등의 고리에 빠지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지능의 평등에서 출발해 관객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장해야 한다고 본다.”
 
자크 랑시에르
1940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파리8대학에서 1969~2000년 미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루이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펴낸 <‘자본’을 읽자>(1965)의 공저자였지만 68혁명을 경험하면서 알튀세르주의자들의 ‘앎과 대중의 분리’에 반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민주주의나 평등 등 현대 사회가 선전하는 가치들이 일부 구성원을 배제한다고 비판하면서 본래의 정치란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에 있다고 말해왔다. <무지한 스승> <역사의 이름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불화> <감성의 분할>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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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크 랑시에르 파리8대학 교수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2008-12-02 19:43)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 연대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에서 사람들 간의 불화와 불일치는 필연적입니다." 세계적 정치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자크 랑시에르(68) 파리8대학 명예교수는 2일 서울대에서 가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랑시에르 교수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합의'보다 '불일치'라고 말했다.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민주주의에서 합의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합의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이 불법노동자, 이민자 등 약자들과 합의할 수 없는 지점까지 끊임없이 소통하고, 대화하라는 말이다. '불일치'가 소통을 통해 계급 간의 '일치'를 보는 것.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합의이다.
 
--민주주의에서 '합의'보다는 '불일치'가 더 바람직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모든 사람들이 보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정치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불화와 불일치는 필연적이다. 모든 사람의 이익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주주의 개념에서 '합의'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다양성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허용할 수 없는 주장들까지 터놓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동질적인 세계를 구축하려는 방편으로 타자와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들이 가진 권력'은 주류 질서 속에서 배제되는 권리까지 논의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정치의 바탕이다. 토론이나 합의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경계를 넘어선 주장들을 어떻게 수용하는 가다.
 
--모든 사람들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능력의 의미는 무엇인가. 교육을 통한 능력인가.
▲공통적 능력은 학문적, 과학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을 받건 받지 않건 누구나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명령하는 사람이 있으면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명령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명령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명령자와 명령받는 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얘기다. 또 교육이라는 건 다양한 종류의 학습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을 학교 안에서 배울 수도 있고, 학교 밖에서도 배울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촛불집회를 필두로 대의제 논란이 확산됐었다. 그때 민주주의의 위기, 희망론이 분분했는데, 현대 사회에서 지적되는 대의제 위기에 대해서는.
▲대의제란 모순적인 개념이다. 일단 사회.경제적으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실시한 제도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하위주체들의 수많은 투쟁을 통해 보완 수정된 제도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버려야 할 제도는 아니다. 내가 강조하는 건 대중들의 직접적인 행위가 정치에 구현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사적 산물로서 축적된 대의제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의 말처럼 '벌거벗은 자'(약자라는 의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세계화의 파고 속에서 상대적으로 더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벌거벗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정치적으로 주체가 될 힘과 능력이 있다는 점이 나의 일관된 주장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인도주의라는 명목하에 뭔가를 주자는 게 아니다. 이미 벌이고 있는 투쟁, 이를테면 불법이민자의 투쟁에 변호사들이 합류하는 것과 같은 연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건 도움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싸움에 동참하는 것이다. 함께하고 연대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시민의 발목을 잡는 철도, 지하철 파업" 같은 논리는 부적절한가.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건 연대다. 해결책은 파업주체와 시민사회가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1995년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파업에서 실질적으로 파업 주체들과 시민들 사이에 연대성이 공유된 경험이 있다.
 
--비주류였던 오바마 당선이 미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라 보나.
▲큰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 건 과한 생각이다. 하지만 오바마의 당선은 미국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또 줄 것이라고 믿는다. 인종주의적 정책이 잔존하고, 복음주의, 신보수주의가 상종가를 치는 상황에서 오바마의 당선은 미국의 이 같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 인종주의의 역사가 오래된 미국이 이제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미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줄 것이라 본다. 그렇다고 '기적'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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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새 정치의 희망” (한겨레, 정리 이세영 기자, 2008-12-02 오후 07:41:18)
‘프랑스 철학 거장’ 자크 랑시에르에게 듣다
대담자 진태원 고려대 교수 
 
지난주 한국을 찾은 자크 랑시에르(68) 파리8대학 명예교수는 정치와 평등, 민주주의에 관한 독창적 사유로 주목받는 프랑스 철학계의 거목이다. 그는 1일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철학)와의 대담에서 “진정한 정치는 사회에서 주변화되고 배제됐던 사람들이 새로운 통치 주체로 참여하는 과정”이라며 “경제위기로 삶의 불안이 심화하는 지금이야말로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삶의 불안정화에 맞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이야말로 한계에 직면한 조직 노동운동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의 희망”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대담은 주한 프랑스문화원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진정한 정치는 배제된 사람들이 통치주체로 참여하는 것
촛불 참가자들 생명 이슈 정치적으로 만든 진정한 ‘인민’ 
 
진태원(이하 진)=지구상의 모든 정부가 민주정부를 표방하면서, 민주주의는 어느 순간 진부한 것이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사람들은 대의제와 인권을 민주주의의 핵심요소로 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인민이 가진 권력 자체다. 그것은 (국회의원처럼) 인민의 대표를 자임하는 자들이나, 사회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은 집단들이 행사하는 권력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대의제를 통해 인민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기성의 시스템을 넘어서려는 힘이며, 배제되고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정치적 주체가 돼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상치 못했던 시간에,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주체들이 공적인 문제들을 결정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진=최근 한국에도 출간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란 책에서 당신은 ‘치안’과 ‘정치’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 차이는 어떤 것인가.
 
랑시에르=사실 그 개념들은 정치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사람들은 보통 정치를 ‘국가가 사회를 경영·관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이것을 정치가 아닌 치안이라고 본다. 치안은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고정된 자리와 정체성을 배분하는 작업이다. 이런 치안의 논리를 문제삼고, 여기에 새로운 집단성을 개입시키는 활동이 정치다. 말하자면 정치는 부·지식·가문 같은 자산의 크기에 따라 사회를 분할하는 치안 논리에 맞서, 어느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 능력을 가지고 통치과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활동이다.
 
» 자크 랑시에르 파리8대학 명예교수와 진태원 고대교수의 좌담. 김경호기자
 
진=당신의 사상에서는 데모스(demos), 인민(people)이란 개념이 중요하다. 지난여름 한국에서는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며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당신이 얘기하는 인민인가.
 
랑시에르=내가 말하는 인민이란 주민의 총합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고 투쟁하는 사람들이다. 흔히 생각하듯 정치적인 것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란 정치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조차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집단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건강처럼 비정치적인 것으로 보이는 문제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한국인들은 진정한 의미의 인민이었다.
 
진=수입 철회 조처가 없었음에도, 대통령이 나서 사과한 뒤 촛불시위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시위가 가라앉자 정부는 주동자를 구속했고 사과 자체를 부정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촛불시위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랑시에르=운동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려면 처음 내걸었던 요구가 충족됐는지, 또 사회적 세력관계가 운동을 통해 변화했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2006년 프랑스에서는 정부의 최초고용계약제(CPE)에 반대하는 시위가 장기간 지속됐다. 정부가 결국 정책안을 철회했지만, 과연 이 시위가 성공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문제는 정부가 양보한 뒤 거리의 정치공간은 닫혔고, 운동은 무장해제됐다는 점이다. 요구안의 즉각적 성취를 넘어, 사회의 독점적 합의체제에 얼마나 균열을 일으켰는지가 중요하다.
 
진=세계적 경제위기는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어선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당신의 민주주의론이 비정규직 노동을 포함한 사회문제를 새롭게 사고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랑시에르=비정규직 노동은 한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보호 시스템이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 없이 노동자의 신분은 전반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역할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직 노동운동처럼 동질적 계급 이해에 기반한 운동은 쇠퇴하고 있다. 이 때문에 네그리같은 학자는 ‘비물질노동’이란 개념을 통해 정규 노동시장에 편입되지 않은 서비스·비정규직 노동자 집단의 존재에 주목하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확장이란 차원에서도 지금의 시스템에서 일정한 권력 지분을 갖고 있는 전통 노동운동보다, 주변화되고 배제된 이 노동자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
 
진=이 과정에서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랑시에르=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탈정체화’를 정치의 출발로 규정한다면,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사실상 없다. 지식인들은 주어진 자리를 분배하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인/비지식인, 전문가/비전문가, 전공자/비전공자의 구분과 차별을 깨뜨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