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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부, 정치 퇴행 파시즘 징후” 평가 잇따라 (한겨레, 08-12-25)

새벽길 2009. 1. 12. 11:16

 MB정부에게서 파시즘의 징후가 보이기는 한다. 
아래 한겨레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전규찬, 이광일, 신진욱, 박명림 교수의 글을 읽어봐야겠다. 그런데 기사 상으로만 보면 고전적인 파시즘 논의하고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또한 촛불시위에서 경찰의 폭력를 새롭게 접한 이들을 빼놓고 과거 군사정권 하에서의 폭력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현재의 이명박 정부의 행태에서 파시즘 징후를 읽어낼 것 같지는 않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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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부, 정치 퇴행 파시즘 징후” 평가 잇따라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8-12-25 오후 02:45:27)
“부시·대처처럼 치안 내세워 인터넷 검열·매스컴 등 통제”
전규찬·이광일 교수 등 전문가 “소통 부재, 경찰 국가” 비판

 
이명박 정부에 대한 학계의 비판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통치 스타일의 일방성에 집중됐던 초기의 비판이, 촛불시위 참가자에 대한 검·경 수사와 방송·집시법 개정안 파동 등을 거치며 ‘민주주의 역진론’과 ‘정치 위기론’으로 확산되는 형세다. ‘민주화의 일시적 지체는 있어도 후퇴는 없을 것’이란 낙관론이 우세했던 1년 전과는 온도차가 확연하다.
 
이런 흐름은 최근 간행된 겨울호 계간지들에서도 확인된다. 이명박 정부의 행보에서 ‘정치적 퇴행’과 ‘파시즘’의 징후를 읽어내는 분석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우선 주목되는 것이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문화과학>에 쓴 ‘치안의 스테이트와 저항의 스테이트’라는 글이다. 전 교수는 이 글에서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치안 스테이트’로 규정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치안’은 소통과 합의가 사라진 ‘정치 부재의 통제 상태’를 지칭하기 위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게서 빌어 온 개념이다. 전 교수에 따르면, 노동유연화와 실질임금 삭감 등 반노동적 축적전략에 의해 지탱되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무력과 결합된 국민적 동의 메커니즘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법치 확립을 명분으로 경찰기구가 통치 전면에 부상하고, 건전한 여론 형성을 빌미로 미디어에 대한 장악과 통제가 시도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 교수는 이런 치안 스테이트의 선례를 영국 대처리즘과 조지 부시 미국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내각의 ‘범죄와의 전쟁’에서 찾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적 공포를 조장해 안전과 공익에 대한 허구적 합의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강압적 공권력이 전면화하는 예외적 통치 상황을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전 교수는 따라서 “2008년 한국에서 목격되는 인터넷 검열과 매스컴 통제, 낙하산 인사와 공영방송 해체의 모습들도 결코 우발적이지 않은 ‘신자유주의 치안 스테이트’의 징후이자 산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사한 논의를 이광일 성공회대 연구교수의 <시민과 세계> 기고문 ‘신자유주의, 이명박 정권과 민주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교수는 여기서 이명박 정부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회적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치안기구의 감시·통제 기능을 극단화한 ‘신자유주의 경찰국가’로 규정하는 한편, 파시즘으로의 전환 가능성까지 경고한다. 그는 이런 징후를 근대 기술의 합리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민주주의 과잉론’과 ‘좌파 적출’ 같은 극우적 언사를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집권층의 행태에서 찾는다. 특히 근대의 산물인 노동운동을 사회 안으로 포용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부정하는 이들의 태도에선 파시즘의 특징인 ‘반동적 모더니즘’의 경향마저 관찰된다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다.
 
<기억과 전망>에 ‘정치위기와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기’라는 글을 발표한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지난여름 촛불시위 국면을 통해 형성된 진보·보수의 ‘파국적 균형’ 상황에 주목한다. 이런 균형은 “어떤 사회정치적 대표체도 대중의 집단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총체적인 헤게모니 위기”를 반영하는데, 이 위기가 해소되는 경로는 두 가지다. 하나가 정당과 달리 ‘대표성’의 제약이 크지 않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전면에 부상하는 방식이라면, 다른 하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등장해 위기를 수습하는 ‘케사리즘’이다. 그러나 신 교수는 파시즘과 같은 ‘반동적 케사리즘’의 등장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명박 정부의 통치 방식이 반동적 형태를 띠고 있긴 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1920~30년대 유럽에서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대중 동원’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본격 파시즘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낮다는 이유에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권력자원의 집중과 정치의 탈공공화로 요약되는 지난 1년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세계사적 보편으로부터 ‘경로이탈’하고 있음을 보여준 시기”라며 “치안국가의 등장은 신자유주의 국가의 일반적 특성이라기보다 짧게는 1987년 체제, 길게는 한국 민주주의의 사회적·제도적 취약성과 관련된 것인만큼, 한층 역사적이고 정교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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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14:21

한국사회의 파시즘화 논의는 의미가 있다. 레디앙의 기사는 몇몇 사람의 코멘트를 따서 파시즘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다루고 있지만, 좀더 심도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반독재국민전선이냐 아니면 반신자유주의투쟁전선이냐의 대립구도로 파악하여 구성한 논점 자체는 잘 잡았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주강현 소장의 경향신문 기고글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우리 사회가 파시즘으로 흘러갈 가능성은 아직은 없지만, 그 성숙 조건과 조짐은 충분히 보인다고 지적한다. 이는 반합리성의 강화, 불평등을 미덕으로 찬양하는 사회분위기, 일상적 파시즘이 생활양식으로 내재화, 한국인의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적 측면, 다중의 소시민화로 요약되는데, 주강현 소장의 글에 나타나는 이러한 추상적인 조짐보다 그 예시로 드는 구체적인 사례가 훨씬 설득력이 있다. 주강현 소장과 조현연 교수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대안을 어떻게 만들어나가느냐를 고민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이를 구체화해나가는 일일 터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강현 소장도 제시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주강현 소장의 글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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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허물어진 ‘죽은 양심의 시대’ (경향, 주강현 | 한국민속문화연구소장, 2008년 09월 17일 15:08:56)
 
우리 사회는 파시즘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접된 어떤 예감이 하시라도 닥쳐올 수 있는 사회이다. ‘촛불’을 위시한 미래적 힘과 사회진보적 역량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역으로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자본에 포섭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 자본의 힘이 흔들릴 때 한국 사회는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공황상태로 접어들 것이고 파시즘적 그 무언가에 기댈 가능성도 짙다.
 
한국 사회에서 돈이 지고의 가치가 된 순간부터 진보와 보수는 ‘하나’가 되었다. 관료들에게 통제당하던 재벌들이 어느 순간 관료들을 끌고다니는 역전극이 벌어지는 순간, 한국 사회는 새로운 체제로 돌입했다. 전 국민의 증권화, 영어에의 올인은 상징적 사건들일 뿐이다.
 
외형적으로는 노무현 정권의 진보성과 현 정부의 보수성으로 나누어서 판단하고 일정 부분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노정권이 진보적이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일상적 파시즘을 경계하는 논의가 활발했고 부분적으로는 성공한 측면도 있지만, 생활양식으로서의 파시즘적인 태도가 지난 10여년간 숙성되어 갔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등장은 지난 10여년의 결과가 빚어낸 열매일 뿐, 우연은 아니다.
 
사회 진보의 속내는 결코 시대를 뒤따라가지 못하였다. 멍청하게 대처했던 여당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민주당은 정체성도 없이 지리멸렬하고, 선진당과 창조한국당 같은 짝퉁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분명히 뒤로 돌려놓았다. 시민단체는 많지만 시민은 별로 없고, 진보정당은 둘이나 있지만 젊은층은 별로 없고, 환경운동가연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환경은 더욱 더 나빠지는 식이다.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지난날 종로5가의 진보적인 목회자들의 민중신학 전통은 어디로 가고 낡은 미국식 근본주의신학만이 떨치고 있을까. 한국 역사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종교간의 분쟁 조짐이라는 기가 막힌 현실은 어쩌면 필연적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제 문제를 오늘의 단기지속의 결과물로만 보는 것은 그야말로 근시안이다. 한국 사회는 ‘섬’이다. 남한 사회에서 외국을 나가려면 반드시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한다. 절반이 휴전선에 막혀 있는 이상 결코 대륙에 딸린 한반도가 아니라 섬나라일 뿐이다. 인맥·지연 따위로 얽혀진 섬답게 늘 작은 일로 분노하고 흥분하고 들끓는다. 세계 어느 곳에서건 섬나라는 쏠림이 강하다. 한반도라는 통일적·대륙적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나,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섬으로 살아왔다는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해양사적으로는 반도도 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들끓는 한국 사회를 우리는 그저 ‘냄비근성’식의 감성론으로 치부해왔다.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 관심을 표명하고 주식 등 경제에 관심을 갖지만, 정작 표를 까보면 정치의식 수준이 현저하게 낮고 부동산 투기 중심의 천민자본주의형이다. 이웃 일본을 섬나라 근성이라고 구박하지만 정작 우리가 섬나라 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만 모를 뿐이다. 섬나라에서는 논란도 뜨겁지만 냉각도 순식간에 이루어지며, 일치단결·대동단결된 흐름으로 촛불을 만들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물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파시즘적으로 흘러갈 가능성, 아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숙 조건과 조짐은 충분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