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가는 길/쉬어가며 보는 영화
<다크 나이트>에 대한 어떤 영화평
그렇지만 2시간 반을 상영하는 그 영화는 별로 지루하지 않았고, 역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였다. 물론 굳이 아이맥스관에서 돈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영화에 대한 평을 쓰는 것은 내 전공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문화에 대한 쓸만한 식견을 가진 분들이 한마디씩 해주었는데, 여기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전진 게시판에 올려진 것이라 회원이 아닌 다른 이들은 공유하지 못할 듯해서 여기에 담아놓는다. 당연히 이것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이고, 우려되는 사람은 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길다. ㅡ.ㅡ;;
그런데 다크 나이트라고 하지 않고, 어둠의 기사라고 하면 좀 이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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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관지 노힘 148호, 마ㅇㅇ / 겨레아동문학연구회
대한민국, 거대한 고담시
선과 악의 대립, 그리고 결국은 선이 승리하는 결말.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공식이다. 특히 슈퍼맨, 스파이더맨 등 각종 ‘맨’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슈퍼히어로물에서는 그 대립이 유치할 만큼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즉 슈퍼히어로는 철저히 영웅으로 그려지고, 그에 대적하는 악당은 억만장자가 되려 하거나 지구정복을 꿈꾸는 희화화된 속물로 그려졌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그 가운데에서도 슈퍼히어로물의 진화가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진화의 징후는 주로 주인공인 슈퍼히어로를 통해 드러났다. 더 이상 슈퍼히어로들은 악과 싸우는 것을 그저 자랑스럽기만 한 사명으로 여기지 않을뿐더러, 마냥 정의감에 불타오르지도 않는다.
즉 슈퍼히어로들에게도 최소한의 리얼리즘 혹은 휴머니티가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웅에 목말라했던 관객들은 더 이상 자신과 전혀 다른 특별한 존재를 원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자신들과 같이 고민하고 망설이고 연애에 마음 졸이는 슈퍼히어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스파이더맨>>을 기점으로 하여 <<핸콕>>에 이르기까지, 악당들이나 보여주던 어수룩하고 희화화된 모습을 이제는 슈퍼히어로들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렇듯 슈퍼히어로물이 진화하고 있는 와중에 슈퍼맨과 더불어 대표적인 슈퍼히어로라 할 수 있는 배트맨이 돌아왔다. 그런데 많은 면에서 이전과는 차이를 보인다. 우선 당연히 배트맨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던 영화 제목에서 배트맨의 이름을 빼버리고 <<다크 나이트>>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이는 이번 영화가 배트맨이라는 슈퍼히어로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역시 배트맨의 숙적 조커의 ‘존재’이다. 조커의 ‘활약상’이 화제라고 하지 않고 굳이 조커의 ‘존재’가 화제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악행보다도 그의 존재 자체가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배트맨 시리즈는 처음부터 만만하기만 한 오락영화가 아니었다. <<배트맨 포에버>>부터 그렇고 그런 헐리웃 블록버스터와 다를 바 없는 영화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희대의 괴짜 감독 팀 버튼이 메가폰을 잡았던 <<배트맨>>과 <<배트맨 2>>는 감독 특유의 기괴함이 암울한 고담시의 정경과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룬 독특한 슈퍼히어로물이었다.
팀 버튼은 펭귄과 캣우먼 등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매력적인 악당 캐릭터를 창조해냈는데, 역시 관객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명배우 잭 니콜슨이 광기 어린 연기를 보여주었던 조커였다. 따라서 이번 영화에서 조커의 귀환은 배트맨의 귀환보다 분명히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더구나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히스 레저라면, 잭 니콜슨이 연기했던 조커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조커를 연기해내기에 충분할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해 있었다.
과연 히스 레저의 소름 끼치는 연기는 명불허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히스 레저의 연기뿐만이 아니라, 조커라는 캐릭터의 존재 자체이다. 이번 영화에서 조커는 단순히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그는 돈이나 명예 따위 너절한 것들에는 하등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모든 인간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악한 본성과 폭력성이 무질서하게 분출되는 순수한 혼돈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고결한 절대악, 그 자체라 하겠다.
김기덕의 <<나쁜 남자>>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나쁜 남자 한기가 선화에게 강제로 키스를 한 뒤에 일군의 해병대 무리에게 집단구타를 당하는 것이다. 해병대 무리는 폭행을 멈춘 뒤에 한기를 선화 앞으로 끌고 간다. 선화가 사과를 요구하자 해병대 무리도 한기에게 사과를 ‘명령’한다. 선화는 한기에게 침을 뱉고 자리를 떠난다.
한기가 선화에게 가한 성폭력은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구타와 같은 방식의 처벌이 용납될 수는 없다. 그런데 해병대 무리는 집단폭행이라는 방식으로 한기를 ‘처벌’했다. 나는 그들이 휘두른 가공할 폭력에 소름이 끼쳤다. 군복 입은 마초들에게는 그것이 알량한 정의감의 표출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 폭력 행사를 통한 그들의 스트레스 해소에 불과하다.
그들은 귀대 후에 자랑스레 그들이 행한 정의로운 처벌에 대해 떠벌렸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군 생활 스트레스 해소 삼아 악명 높은 해병대식 구타 및 가혹행위로 후임병들을 처벌했을지 모른다. 나는 만약 한기가 선화에게 성폭력을 행한 뒤에 해병대 무리에게 집단구타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그 경우에도 한기가 선화를 성노동자로 만들어서까지 소유하려 했을까? 한기가 선화의 삶을 짓밟기까지는, 합법적 폭력집단인 일군의 해병대 무리가 한기를 상대로 휘두른 사적 폭력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절대악은 그러한 알량한 정의감을 그냥 지켜볼 수 없다. 절대악은 정의감에 불타올라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이를 지목하여 파멸시킨 뒤에 그의 내면에 억눌려 있던 악마적인 본성을 끄집어내고자 한다. 이러한 연유로 조커는 하비 덴트를 지목한다.
“나는 하비 덴트를 믿는다”라는 촌스러운 캠페인으로 스타 지방검사장이 된 하비 덴트. 그는 부패로 얼룩진 고담시에서 범죄 집단들과 타협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올곧은 면을 보여준다. 대기업 최고경영자인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은 그를 지지하며 후원회까지 열어준다. 이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의 정치인 후원회에 대한 자료를 볼 때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라는 것은 결국 돈 잔치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지방검사장을 위해서도 후원회를 열어주다니, 역시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나라답게 모든 것을 돈으로 표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기야 이 나라에도 조중동이라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전직 대통령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살인자에게 명패를 집어던짐으로써 일약 스타 국회의원으로 떠올랐다가 대통령까지 한 정치인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인민들이 순진하게도 그를 믿는다고 외쳤던가. 미국식 후원회는 없었지만 감동적인 노란 저금통의 물결이 이어졌었다. 그는 심지어 십분의 일이라는 말장난까지 하며 대기업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것을 스스로 밝히기까지 했지만, 그를 믿었던 인민의 상당수는 아직도 그를 굳건히 믿고 있다.
그의 영혼의 쌍둥이를 자임하던 정치인은 이라크 침략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선결조건으로 내걸었던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옹호하고 의료영리화의 가속 페달을 밟았지만, 여전히 상당수 인민은 그가 저지른 일들이 그의 본심은 아니었을 것이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면서 아직도 그를 믿는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있다.
그러니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조커는 말한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고.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아니,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인간의 본성과, 돈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고결한 절대악에 대하여 근본적이고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조커만으로도 이 영화는 분명히 기존의 헐리웃 블록버스터와 차별화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가 보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죄수와 시민들이 각기 나뉘어 탄 두 배가 서로 기폭장치를 터뜨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는 지점으로 가보도록 하자. 수인의 딜레마라고 할 만한 상황에서 시민들이 취하는 행동은 다수결의 원리에 입각한 투표이다. 사람들의 목숨을 놓고 투표를 하다니, 이 얼마나 민주적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체제인지를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다수결의 원리에 입각한 투표를 통하여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정치인들을 선출해왔고 경쟁을 당연시하는 교육감을 선출했다. 우리의 정치적 결정을 대의하게 된 그들이 추진한 비정규직법과 무한경쟁교육이 노동자 민중을 죽이고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면, 우리에게도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다시 영화 속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결국 시민들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기폭장치를 누르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죄수들은 기폭장치를 배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을 택한다. 자, 이쯤 되면 도대체 누가 죄수들인지 분간이 되는가? 이것이 바로 조커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시민들도 끝내 기폭장치를 누르지 못하는 것이다. 도대체 저들은 죄수들이니 죽어도 되지만 자신들이 죽을 수는 없다고 투표했던 잘난 시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막상 죄수들을 죽게 하려니, 갑자기 한꺼번에 자신들이 죽을지언정 죄수들을 죽일 수 없다는 휴머니스트가 되기라도 한 것일까?
감독은 배트맨뿐만이 아니라 서로를 ‘죽이지 못한’(‘죽이지 않은’이 아니다) 사람들이야말로 슈퍼히어로이며, 모든 사람들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희망의 싹을 남겨두기 위함이었는지 몰라도, 관객들은 영화 속 시민들의 선택에 개연성이 부족하며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다.
다음으로 브루스 웨인. 하비 덴트마저 투페이스가 되어 내면의 악마적 본성을 아낌없이 표출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고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배트맨을 쫓기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조커를 죽이지 못한다. 그는 악을 응징할 뿐, 결코 해치고자 하지 않는 절대선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슈퍼히어로인 만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기로 하자.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도대체 대기업 최고경영자인 억만장자가 절대선이 될 수 있을까? 관객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기업 경영자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소외당하게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억만장자가 선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배트맨을 절대선으로 활약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브루스 웨인의 막대한 자본이다. 돈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고결한 절대악인 조커에 비해, 브루스 웨인의 막대한 자본이 없이는 배트맨이라는 절대선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하지만 철저히 미국적인 사고란 말인가?
어쩌면 많은 미국인들에게 미국은 악의 축을 응징하고 자유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전하는 슈퍼히어로일 것이다. 물론 슈퍼히어로에게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따라서 슈퍼히어로는 마땅히 식량과 원자재 투기, 그리고 전쟁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태평양 건너 먼 땅에는 미국식 자유주의를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서는 조폭을 동원한 사적 폭력으로 감히 자신의 아들을 때린 사람을 스스로 ‘처벌’한 최고경영자가 아직도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천문학적인 돈을 탈세했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전방위 로비작업을 벌이고도 한 차례도 구속되지 않은 최고경영자가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꼽히며, 대다수 젊은이들이 무노조가 원칙인 그의 회사에 비정규직으로라도 취업하는 것을 꿈꾸고 있다. 어쩌면 그곳은 거대한 고담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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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ㅇ
[영화평] 다크나이트 - 실재의 열망이냐, 상상으로의 회피냐
영화나 혹은 문학을 평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작가가 경험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본 후에 작가의 의도를 예상해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사회적 맥락에서 작품의 가지는 의의를 평해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런 일체의 외부적 맥락과 관계없이 작품 내적인 요소로만 평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여러 가지 비평론들은 제각기 나름의 긍정적인 역할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어차피 비평이라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알아맞히는 퀴즈 게임이 아니므로, 위에 쓴 여러 가지 방법론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작품을 독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나는 자칭 대단한 ‘빨갱이’이므로.. 이런 맥락에서는 나에게 있어서 모든 영화는 빨갱이 영화고 모든 감독은 빨갱이 감독에 다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영화 평론으로 먹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그다지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도 아니며, 평론이나 비평에 대해 그리 잘 아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의 내용이 가지는 아마추어적 관계들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이해만 해준다면 그다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쨌든 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다크나이트’라는 영화가 빨갱이 영화인 이유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빨갱이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이 되겠다.
강박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는 어릴 때 악당의 손에 부모를 잃은 한 재벌 2세가 부모가 죽을 때에 생긴 트라우마로 악당을 다 때려잡아야 하겠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박쥐 가면을 뒤집어써서 슈퍼히어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에서도 이러한 설정이 크게 변화하지는 않는데, 이전 시리즈와 사소하게 다른 점은 배트맨, 브루스 웨인이 그의 부모가 죽게 된 이유에 대해서 ‘내가 그 때 밖으로 나가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식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배트맨의 트라우마를 구체화시킨 셈이다. 결국 이 트라우마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강박증의 정신분석적 원인이 된 것인데, 그의 강박은 한 마디로 말하면 ‘질서에 대한 강박’이다.
그가 굳이 박쥐 가면을 쓰고 범죄자를 때려잡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범죄자들을 다 때려잡아야만 하는데, 기존 질서가 범죄자들을 모두 때려잡지 못하는 것이라서 그렇다. 범죄자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범죄자가 없어도 되는 완벽한 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배트맨은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배트맨이 넘지 못하는 선은 없어요.” 라고 말하며 질서의 룰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다. 이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는 기존 질서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이 질서를 ‘완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아이러니 하게도 그 질서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강박증적인 행동은 오직 범죄자에게로만 향하지 갱들에게 매수된 경찰과 사법조직으로는 향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타락한 경찰들을 미워하고 때때로 그들이 명백한 조짐을 보였을 때에 응징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모두 2차적인 것들이다. 배트맨의 원래 자아인 브루스 웨인은 그 막대한 자본력으로 사실상 고담시를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타락한 경찰과 사법조직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인가? 이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경찰과 부패한 사법조직 역시 고담시를 지탱하는 질서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완벽한 질서’에 대한 그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욕망’이다.
회사 돈을 유용하여 최첨단 장비를 만들어 박쥐 가면을 쓰고 밤에 날아다니며 싸움박질을 하는 것이 도대체 고담시의 완벽한 질서를 만드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결국 그의 행위는 ‘불가능한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쓸데없는 짓’을 하는 전형적인 강박증의 증상인 것이다.
히스테리
많은 사람들이 조커에 대해서 ‘절대 악의 순수한 결정체’와 같은 수사를 붙이고 있지만 내 생각에 그건 지나치게 단순한 정의다. 예를 들면, 던전 앤 드래곤스라는 주사위 게임의 규칙에는 캐릭터의 성격을 정하는 기준으로 2개의 축이 등장하는데, 하나의 축은 선-중립-악이라는 축이고 다른 하나의 축은 질서-중립-혼돈이라는 축이다. 이 게임의 규칙에서는 한 캐릭터 안에 선과 혼돈이 공존할 수도 있고 오로지 중립만이 최선의 가치인 캐릭터가 등장할 수도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주사위 게임에서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단순한 선, 악 구분은 하지 않는 것이다.
조커를 정의하는 가장 정확한 말은 ‘질서를 알고 있지만 거기에 별로 관심이 없는 자’이다. 그는 이 세계의 질서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질서를 완벽하게 만든다는 것은 현재의 질서가 포괄하지 못하는 질서의 외부를 보다 잘 관리할 수 있도록 질서의 영역을 확장시킨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조커는 이 ‘질서의 외부’라고 믿어지는 영역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질서 자체가 조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반쪽이 불에 타버린 하비 덴트에게 조커는 말한다. ‘봐라, 질서를 만들겠다며 설치고 다니던 네가 결국 그 질서 때문에 뭔 꼴을 당했는지...’ 조커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물론 하비 덴트에게 ‘질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것은 조커가 ‘완벽한 질서’를 바라는 강박증 환자 배트맨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조커가 ‘넌 날 완성시켜!’라고 표현하는 배트맨과의 애증관계는 이런 방식으로 구성된다. 배트맨이 ‘완벽한 질서’를 원하고 그것을 강박증적인 방식으로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계속해서 증명되며 조커의 자존감이 형성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조커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조커의 이러한 측면은 우리가 상상하는 기묘한 악마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조커에게는 과거가 없다. 지문, DNA, 옷의 상표, 그리고 입 주변 상처의 기원까지..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조커의 과거를 알 수가 없다. 그는 두들겨 맞아도 아파하지 않고 뒤집혀버린 트레일러에서도 멀쩡히 살아나오며 심지어 배트맨의 배트포드에도 (배트맨의 의지든 아니든) 부딪치지 않는다. 조커가 악마와 같은 초자연적인 그 무엇에 근접해있음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마지막에 가까운 장면에서 배트맨이 조커에게 습격당할 때, 배트맨의 특수한 전자 장비가 잠시 효력을 잃게 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것들은 누가 뭐래도 악마의 상징들이고 악마는 언제나 히스테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존재로 이해되어 왔다.
미국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배우 아론 애크하트를 하비 덴트 역으로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서 그의 외모가 미국적으로 생겨서라고 말했는데, 이 얘기가 전혀 틀리지 않다. 즉, 하비 덴트는 미국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데, 하비 덴트가 브루스 웨인이 주최한 정치자금 모금 행사의 주인공인 이유는 미국에서는 (주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지방 검사를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때문이다. 로스쿨을 졸업한 이들은 대부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변호사를 직업으로 선택하지만 굳이 지방 검사에 선출되기를 바라는 이들은 경력을 쌓아 판사로 선출되기를 바라거나 이후에 정치권에 진출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즉, 어쨌든 하비 덴트라는 캐릭터는 정치적인 맥락 위에 서있는 셈이고,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수호하고 집행하는 역할을 넘어서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배트맨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하비 덴트는 배트맨의 ‘불가능한 욕망’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우리의 희망’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인들이 2001년 9월 11일 이전까지 자기들의 자랑스러운 나라를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미국은 소련이 망하고 나서 사실상 세계의 대장으로 행세하고 있고, 세계평화를 지키고, 경제적으로도 나쁘지 않고, 전쟁이나 기아, 폭동 같은 건 먼 나라 얘기고, 이런 상황에서 나는 플로리다 해변에서 마음 편하게 오렌지 주스나 마셨으면 좋겠다, 라는 게 대다수 미국인들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하비 덴트의 앞, 뒷면이 똑같은 동전과 ‘운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야.’라는 순진한 자신감이 이러한 상황을 잘 나타내주는데, 그것이 911 이전의 미국이었다고 한다면 911 이후의 미국은 어떠했는가? 레이첼 도스의 죽음과 반쪽이 타버린 행운의 동전은 그야말로 911이라 할만하다. 레이첼 도스의 죽음 이후 하비 덴트가 겪는 변화는 당연히 미국의 변화를 재현한다.
하비 덴트가 투페이스로 변화하는 과정처럼 미국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가난한 나라에 보복공격을 했다. 언제나 환상에 젖어있을 것만 같았던 미국이라는 나라가 쌍둥이 빌딩의 붕괴로 현실에 내던져진 것이다.
하비 덴트 역시 현실을 직시해야 했기 때문에 그가 맨 처음으로 한 일은 자신을 배신한 경찰을 찾아가 응징하는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운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앞, 뒷면의 동전은 어떠한 질서에도 구애받지 않는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비 덴트도 조커처럼 ‘완벽한 질서’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로 죽음을 얻는다.
그가 죽는 이유는, 사람이 어떠한 질서에도 구애받지 않는 단 한 번의 순간이 바로 죽음과 마주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커가 ‘총을 쓰지 않고’ 칼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재에 대한 열망이냐, 상상으로의 도주냐.. 죽어서 영웅이 될 것이냐, 살아서 악당이 될 것이냐.. 이것이 다크나이트의 등장인물들이 마주하고 있는 딜레마다.
정치
이것을 체제, 시스템의 문제로 바라본다면 문제는 ‘정치’다. 과연 고담시와, 그것과 대면하는 주체들의 가장 바람직한 정치적 태도는 무엇인가?
하비 덴트와 조커의 결론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 후반의 ‘사회실험’ 장면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장면이 가지는 함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만일 조커가 자기 역할을 제대로 다 하려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버튼을 눌렀을 때 상대방의 배가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타고 있는 배가 폭발해야 한다. 그것이, 배트맨에게 레이첼 도스와 하비 덴트가 있는 장소를 반대로 가르쳐 주었던 것과 같이, 조커가 질서를 비웃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조커를 두들겨 패면서 “너는 틀렸어. 아직도 고담시에는 선한 사람들이 많아.”라고 말하고, 조커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니까!”라면서 스스로 버튼을 누르려 하지만, 이런 배트맨의 결론은 올바른 것일까? 조커가 정말 틀렸던 것일까?
핵심은 배트맨과 조커는 배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배 안에서 일어났던 일을 복기하면 배트맨이 틀렸고 조커가 옳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선량한 시민들이 탄 배에서의 유력한 의사결정 수단은 무엇인가? 다수결이다. 다수결의 결정 사항은 버튼을 누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버튼은 눌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명인들의 체제’는,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을 결정하지도 못하고 버튼을 누르지도 못한다. 오히려 죄수라는 야만인들은 그 중 가장 훌륭한 님이 버튼을 갖다 버렸는데, 문명인들의 시스템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다.
조커가 놓친 것은 다수결의 결과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할 것 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조커는 문명인들의 훌륭한 질서가 결국 그들에게 파멸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현실이 어떤 공간인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을 것인데, 어쨌든 문명인들의 질서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한 셈이다. 결국 이 게임의 승리자는 조커다. 선거로 선출된 하비 덴트가 고담시를 구원할 수 있었겠는가? 조커에 의해 이 물음의 대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이에 반하여,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강박적 자아의 실천적 결론은 자신이 질서의 (부정적인) 일부가 되는 것인데, 자신이 전체 질서에서 맡아야 할 역할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배트맨의 방식이다. 이 영화의 결론에서 그는 강박에서 현실로 조금이나마 전진한다. 그러나 여전히 배트맨은 ‘완벽한 질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 배트맨이 아무리 기발한 무기를 만들어내고 굉장한 책략을 고민해낸다 하더라도 고담시의 질서 그 자체에 도전하지 않으면 배트맨이 직면한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 범죄자는 늘 들끓고 경찰과 사법조직은 늘 부패해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비 덴트의 방법론은 어떤가? 동전의 양면이 모두 앞면일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동전의 양면이 모두 앞면이라는 것 자체가 왜곡된 질서, 오해, 환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그가 동전의 양면을 모두 사고할 때에야 그는 부패한 경찰을 응징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부패 경찰’이 당하는 경우는 하비 덴트에 의한 것이 유일하다.
그러나, 하비 덴트가 실존적으로 증명했다시피 모든 질서를 외면하고 현실로 돌진해버린 결과는 주체의 소멸이다. 실제로 현실에서는 조커나 하비 덴트와 같은 상황에서 많은 대중들이 집단적으로 앓는 대표적인 열병이 냉소주의와 테러리즘이다. 오직 배트맨만이 이 길을 가려하지 않고 있고 그가 어떻게 조커와 하비 덴트와 같은 길에 빠지지 않으면서 고담시를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느냐가 이 영화가 던지는 물음의 핵심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크나이트를 ‘스타워즈 에피소드 5’에 비견했다. 알다시피 스타워즈 에피소드 5는 ‘마무리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크나이트의 후속편에서는 다크나이트에서 던져진 물음에 배트맨이 어떤 대답을 내놓느냐가 주요한 내용이 될 것이다. 감독이 가지고 있는 대답에 따라 배트맨이 아닌 브루스 웨인이 고담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면에 나설 수도 있고 배트맨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배트맨은 진보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소위 진보세력이라는 우리의 실천적 고민과 이에 따라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현실이 우리에게 남겨준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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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장 ㅇㅇ
나는 오히려 그 '사회실험' 장면에 주목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상황인데요.
'다크 나이트'는 이 '죄수의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훌륭한 사례를 보여준 것이지요. 즉, 이 상황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은 선택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수의 딜레마'의 고약한 점은 선택을 강요받는 자들에게 '악'을 분배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선택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선택을 강요하는 자들에게 '악'을 전가시킬 수 있습니다.
'다크 나이트'에서는 바로 이러한 선택을 '죄수'(영화에서 그대로 '죄수'로 나왔죠)가 감행합니다.
다수결이 아니라 어떤 행위가 난국을 뚫고 세상의 구원을 시작한다는 것 ...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라 민중의 어떤 행위라는 것 ...
오직 그러한 행위 앞에서만 '절대악' 따위는 무력해진다는 것 ...
마 ㅇㅇ
저도 수인의 딜레마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그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전에 올린 영화 평에도 썼듯이, 현실에서라면 죄수들은 수인의 딜레마를 거부할지언정 잘난 시민 계급은 거부하기 힘들 것입니다. 처음 선택을 강요받았을 때, 시민들은 자신들이 죄수들보다 나은 존재임을 강변하며 저들은 죄수들이지 않은가, 우리가 죽을 수는 없다, 따위의 말을 내뱉습니다. 결국 그들의 선택은 철저히 자유민주주의적인 방식, 즉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목숨을 놓고! 하기야 어차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비정규직법도 시민들이 투표를 통하여 선출한 자들이 국회에서 표결을 통해 '합법적으로' 통과시킨 것이지요.) 그들은 철저히 계급적으로 사고하는 것이지요. 죄수들이 기폭장치를 던져버린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시민들이 죄수들의 배를 폭파시켰다면, 시민 계급이 어떻게 사고하는지를 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보다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렇게 했을 경우에는 절대 지금과 같은 오락영화가 될 수 없었겠지요.
이 ㅇ
장, 마 동지의 의견은 물론 일리있는 지적이지만, 저는 이 영화를 주체가 상징 질서의 공백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에 대한 텍스트로 보고 있기 때문에 굳이 그 장면을 게임 이론의 재현으로 상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죠. 배트맨은 상징 질서의 공백으로부터 상상적 도피를 하는 존재이고 조커는 실재의 사막으로 달려가는 존재라고 독해한다면 게임 이론의 딜레마는 의미가 없어지고 실제로 그 안에서 상징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였나, 그리고 그것에 대면하는 주체들의 태도는 어떤 것이었나가 독해의 초점이 되는 것입니다.
장, 마 동지의 독해를 따르자면 '쟁가'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는 박권일 아저씨의 견해를 참고할만 합니다. 여기에 내용을 붙여보지요.
조커의 사회실험에 관해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시민들은 못누르고, 죄수들은 안누른건데, 어쨌든 결과를 놓고보면 윈윈입니다. 일테면 시민들은 문명세계의 무책임성 때문에 못누른 것이고, 죄수들은 문명세계의 룰을 내면화하고 있어서 안눌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문명세계의 양 극단을 대표하는 속성 때문에 참사를 피한 것이고 이것이 결국 사회질서에 봉사한 셈이니까 조커가 패한 거지요. 그런데 그건 선에게 악이 패한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그냥 조커가 너무 순박했던 거죠.
조커는 "악은 계획하지 않는다"며 마치 심오한 본성론을 설파하는 포즈를 취하지만 정작 영화에서는 종업식날 초딩처럼 계획적인 어린이였습니다. 조커의 악은 뭔가 철학적인 '악'이 아니라 단지 게임이론적 세계관의 다른 말입니다. 혹은 도킨스적인 세계관이거나. 저 사회실험은 현실에서 게임이론적 상황을 100% 구현해보려는 시도였는데, 그러기에는 조커가 너무 무식해서 변수들을 미리 통제하지 못했을 뿐인 거죠. 정리하자면 선과 악, 문명세계 대 야만세계 이전에 그냥 멍청한 아저씨가 거대한 계획을 세우면 쪽만 팔게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
장 ㅇㅇ
죄수'들'이 버튼을 안 누른 게 아니라 '한' 죄수가 그 버튼을 바닷 속에 던져 버린 것이죠.
두루뭉수리 이야기하면 같은 이야기지만 아주 다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조커는 두 배 모두 폭파되지 않은 것을 보고 '실제로' 놀라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조커가 당황하는 대목입니다.
배트맨은 조커를 당황하게 하지 못하지만 (이것은 이미 이모가 잘 지적했지만)
'한' 죄수의 행위는 조커를 당황하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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