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주 교수의 아래 글조차도 꽤 되었다. 하지만 티베트 사태를 제대로 바라보는 데 의미있는 글이라 생각하여 담아온다.
사실 아직까지 티베트 사태를 파악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점을 세우지 못했다. 베이징 올림픽이라는 계기를 티베트 독립을 위한 계기로 삼으려는 시도를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그렇게 티베트가 독립하는 게 타당한지도 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이남주 교수의 글에 나오는 것처럼 지금까지의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 티베트 사태, 돌파구는 있는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33호 | 2008년 7-8월호, 이남주 |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계간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원)
지난 봄 티베트문제가 갑작스럽게 한국사회의 주요 관심사로 등장하였다. 3월 10일 티베트 지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고 인명피해가 확인되면서 국제적인 관심이 티베트로 모아졌다. 그 여파로 샌프란시스코, 런던, 파리 등지에서 성화 봉송을 둘러싼 충돌이 발생하면서 중국과 서방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특히 4월 27일 서울을 통과하는 올림픽 성화를 ‘수호’하기 위한 주한 중국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폭력사태를 유발하면서 중국에 대한 비판여론이 들끓었다.
티베트문제가 다시 갑작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5월 12일 중국 쓰촨을 강타한 지진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쓰촨에서의 구조활동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쓰촨 대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8만 명을 훨씬 넘을 정도로 그 피해가 컸고 상황이 긴박하였기 때문에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티베트문제로 인하여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국제사회, 특히 각국 정부가 쓰촨 대지진을 계기로 중국과의 화해무드를 조성하고자 하는 의도도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언제 다시 티베트문제가 우리사회에서 중요한 의제로 등장할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티베트문제를 둘러싼 논란만으로도 우리사회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영향을 남겼다. 티베트문제를 티베트 독립이라는 의제와 연결시켜보는 일부 한국인들의 의견과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정부와 중국인들의 입장 사이의 커다란 간격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각각의 시각은 중국이 국력의 증가와 함께 패권주의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과 서방국가들이 중국의 성장을 막기 위해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는 행위에 한국도 동조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며 한중의 상호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인식을 재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티베트문제는 대중의 관심사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신중한 평가를 필요로 한다.
중국정부와 티베트 충돌의 역사와 원인 중국정부와 티베트인들 사이에는 인명피해를 동반한 대규모 충돌만도 이미 1950년, 1959년, 1988, 9년 등 세 차례 발생한 바 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붕괴된 이후 정치적 공백을 이용하여 티베트에서는 독립을 추구하는 정치적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49년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중국공산당이 1950년 티베트에 대한 통치권 복원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분리주의세력과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1951년에 중국정부는 현 달라이라마(14세 달라이라마)의 대표와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방법에 대한 합의(17조 합의)’를 체결하여 폭넓은 자치권의 보장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1950년대 중반부터 티베트 내에서 적극적인 사회개혁, 종교개혁을 추진하였고 티베트인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1959년의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달라이라마는 인도로 피신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면서 현재 티베트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이 만들어졌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정부가 문화대혁명의 좌경적 정책을 수정하여 소수민족의 종교, 문화에 대해 조심스러운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를 불충분하다고 여기던 적지 않은 티베트인들의 불만이 국제무대에서 달라이라마의 적극적인 활동, 특히 미국 방문과 미 의회에서의 달라이라마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등과 결합되면서 1988,9년의 대규모 시위와 계엄령 선포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대규모 충돌을 초래할 만한 뚜렷한 정치적 계기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티베트문제를 국제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이에 대한 우려로 중국정부가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 사이의 상승작용이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티베트에 대한 정책이 갑작스럽게 강경한 방향으로 전환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달라이라마도 1990년대 초반부터는 독립이 아닌 진정한 자치(genuine autonomy)를 요구하고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는 소위 ‘중도노선’을 주장하여왔다. 따라서 양자가 충돌과 대립으로 발전할 직접적인 계기를 찾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번의 격렬한 저항의 원인은 상층보다는 아래에서 발생한 새로운 변화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이번 충돌이 진행되는 과정에 독립노선을 추구하고 독립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서장(티베트)청년대회(Tibetan Youth Congress)’와 같은 조직이 달라이라마의 중도노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설 정도로 달라이라마도 통제하기 어려운 급진주의가 티베트 내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몇 년 전만 하여도 서장청년대회의 관계자가 탈라이라마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고 인정했던 것에 비하면 상황이 크게 변한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우선 달라이라마의 중도노선이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급진주의의 영향력이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2002년 9월부터 중국정부와 달라이라마 사이에는 대화가 진행되었으나 2006년 이후에는 다시 대화가 중단되는 등 새로운 돌파구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약화되어 더 급진적인 주장이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또한 중앙정부에 의해 주도되는 현대화 사업이 티베트에 미치는 충격도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중국정부는 티베트에 많은 투자를 하고 경제발전을 촉진하고 있다는 점을 치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2006년에는 티베트의 라싸 시까지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을 관통하는 철도도 개통되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주도하는 현대화는 전통사회에 더욱 커다란 충격을 주어 문화적, 종교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실 투자의 혜택이 불균등하게, 특히 상대적으로 교육을 더 잘 받고 네트워크도 좋은 한족에게 유리하게 분배되거나 티베트인들 내에서 계층분화를 발생시켜 사회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번 시위 과정에서 900곳이 넘는 한족 상점들이 공격을 받았다는 중국정부의 발표가 이번 사태의 새로운 양상을 잘 보여준다.
티베트에서 민족·종교적 갈등에 사회·경제적 갈등이 더해지면서 급진주의가 증가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정부와 달라이라마의 협력이 문제해결의 열쇠 현재로서 이 문제를 풀 열쇠를 가지고 있는 당사자는 중국정부와 달라이라마이다. 물론 이들 사이의 협력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중국정부는 달라이라마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거두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고려하여 달라이라마와의 대화에 나서기도 하지만 중국정부는 일관되게 달라이라마를 분열주의자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달라이라마가 독립이 아니라 고도 자치, 진정한 자치를 요구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일견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다.
티베트문제가 티베트의 독립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달라이라마 자신도 1959년 망명 이후 독립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티베트문제를 티베트의 독립문제와 동일시할 경우에는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졌다. 독립을 주장하는 측이나 티베트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는 측 모두 자신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의 정치적 지위는 어떤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의 요청이 아니라 중국, 티베트, 그리고 서구 열강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거쳐 형성된 것이며 변경되기 힘든 것이다.
우선 주권이 성립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국제적 승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현재 티베트의 주권을 인정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세워져 있는 인도정부만이 중국의 티베트 통치권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취하였지만 2003년에는 티베트자치구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냉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붕괴 이후 새로운 주권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인종학살 등의 참상을 보면 새로운 주권국가의 형성이 이성적이고 합리적 과정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현재 티베트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근본적인 변경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티베트인들에게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도 볼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여 티베트 저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달라이라마도 1987년부터 독립이 아니라 진정한 자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달라이라마의 이러한 태도변화는 불리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고려한 전술적 변화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계속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달라이라마의 태도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동요한 경우도 있으나 이미 20년 동안 중국 내에서의 자치라는 원칙을 지속적으로, 공개적으로 밝혀온 이상 달라이라마의 숨겨진 의도를 문제 삼으며 진지한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번의 유혈사태가 발생한 이후 원자바오 총리 등 중국의 고위 지도자들이 일제히 달라이라마를 그 배후세력으로 지적하고 나선 것도 중국정부의 달라이라마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사태의 전개과정이 보여주는 것처럼 달라이라마는 폭력의 사용에 일관되게 반대하였고, 이에 급진세력이 불만을 표시하는 등 티베트 저항세력 내에서 분열도 나타났다. 따라서 중국정부의 주장 중 이번 티베트에서 전개된 시위에 어떤 조직적 세력의 개입이 있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를 달라이라마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니다.
중국정부와 달라이라마 사이에는 여러 불쾌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정부로서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은 티베트에서 반중국적인 정서가 만들어진 것에는 중국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중국정부는 티베트에 대하여 자신이 해방자라는 역사해석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정부가 티베트 정책의 정당성을 옹호할 때 항상 강조하는 것이 제정일치와 농노제에 의해 억압당하던 티베트인민들을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티베트에 대한 억압적 정책에 대한 자기반성은 그다지 진솔하지 않다.
사실 1950년대에서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중국 전체가 소외 ‘좌화(좌경적 오류에 의한 재난)’에 의해 엄청난 문화, 인명, 재산적 손실을 치러야했다. 소수민족의 경우는 이러한 좌화에 더욱 취약하였으며 티베트는 가장 커다란 충격을 받은 지역의 하나이다.
근대화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티베트의 제도와 문화가 낙후되고 반인도주의적, 봉건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 경우에도 티베트인들이 주체가 되어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다. 결국 강제적 개입은 중국과 티베트 사이에 감정적 대립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청말 근대화 개혁이 시도되는 시기에도 유사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청조가 파견한 관리들의 적극적인 개혁정책은 티베트인들, 특히 상층 계층의 반발을 불러 13세 달라이라마가 청조에서 일탈하여 영국에 의존하는 정책을 추구하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다. 소위 1950년대 ‘민주개혁’이라는 것은 같은 오류를 반복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유산을 고려하면 중국정부로서는 달라이라마에게 항복문서를 요구하거나 달라이라마를 무력화시키기보다 문제를 만든 당사자들이 불행한 역사적 유산을 청산하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진정한 자치 vs 민족구역자치 양자가 문제해결을 위한 대화를 시작한다고 할 경우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달라이라마가 주장하는 ‘진정한 자치’라는 방안이 티베트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이다. 달라이라마의 진정한 자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티베트는 중국과 연맹(association) 관계 하에서 민주적 정치실체가 되어야 한다. 2. 중국정부가 티베트의 외교를 책임지지만 티베트정부는 국외에 종교, 문화 방면의 외교대표부를 둘 수 있다. 3. 티베트정부는 헌법이나 기본법에 따라 구성된다. 4. 티베트정부는 세계인권선언의 완전한 준수를 통해 연설, 집회, 종교의 권리를 포함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 5. 티베트정부는 인민들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독립적 사법부로 구성된다. 6. 티베트의 경제, 사회체제는 티베트 인민의 요구에 따라 결정한다. 7. 티베트에서는 핵무기 및 기타 무기의 제도, 시험, 저장 및 핵에너지의 이용을 금지한다. 티베트를 세계 최대의 자연보호지역으로 만든다. 8. 비군사화를 통해 티베트를 평화의 성지로 만든다. 9. 중국정부는 한족을 티베트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중단한다. (1988년 6월 15일 유럽의회에서의 연설)
이러한 주장에는 중국정부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 있다. 위의 주장은 중국정부가 홍콩, 마카오에 적용하였고 타이완문제를 해결하는 원칙으로 제시하는 일국양제의 구상과 유사하다. 그러나 일국양제는 모두 역사적 원인에 의해 중국이 주권을 포기한 적은 없지만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본토와 구별되는 경제, 사회, 정치제도를 발전시킨 지역에 대해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중국정부가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티베트에 대해 일국양제라는 원칙을 수용할 가능성은 없다.
중국정부가 국내의 소수민족에 대해서 실시하는 정책은 ‘민족구역자치제도’이다. 이는 소수민족이 밀집하여 거주하는 지역을 민족자치지역으로 정하고 헌법과 국내법에 저촉되지 않는 전제하에서 소수민족의 풍습과 문화에 부합하는 특수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다. 정부구성에서 소수민족 간부에 대한 우대, 소수민족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준의 자치는 달라이라마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를 좁히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협상의 기초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1953년 5월 중국정부와 달라이라마의 대표가 합의한 ‘17조 합의’가 협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달라이라마는 1959년 인도로 망명한 이후 이 합의를 폐기한다고 밝혔고, 이 합의가 강제적 분위기에서 체결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1959년 이전까지는 이 합의를 존중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으며 이 합의를 무시한 것은 중국정부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정부는 이 합의가 평화적 환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앞으로 티베트문제 해결을 이 합의에 기초하여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 합의 내용이 현재 ‘민족구역자치법’의 수준을 넘어서는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17조 합의’는 일단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다음 두 가지의 내용은 티베트가 다른 지역과는 다르다는 특수성과 다른 지역의 민족자치보다 높은 수준의 자치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4조에서는 중앙정부는 티베트의 현행 정치제도, 달라이라마의 고유한 지위와 직권을 변경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고, 11조에서는 중앙정부는 티베트의 각종 사무의 변경을 강요하지 않으며 티베트 지방정부는 자발적으로 개혁을 진행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50년대 초반 티베트 지역에 중국공산당에 의해 진행된 개혁은 이러한 합의를 위배하는 것이었고 1959년의 대규모 충돌을 발생시키는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현재는 양측이 모두 17조 합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거기에 담긴 정신은 중국정부와 달라이라마가 티베트의 상황에 부합하는 자치의 내용에 대해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줄 수 있다.
티베트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역할 티베트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제사회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19세기 말부터 티베트문제가 국제문제의 하나로 등장하여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는 티베트문제의 국제화가 영국 등 서구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정책과도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국제사회의 티베트에 대한 관심에서 오리엔탈리즘적의 흔적을 찾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티베트는 정신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많은 유산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현대화의 과정에서 해결해야할 많은 문제도 가지고 있는 사회이며 결코 유토피아는 아니다. 티베트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티베트문제를 둘러싸고 극단적인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자는 제국주의와 국가주권수호라는 대립구도를, 후자는 정신적 유토피아와 이를 유린하는 ‘악’으로서의 중국정부와 한족이라는 대립구도를 재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대립구도는 티베트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티베트에 대한 관심은 인도주의적 대의와 티베트문제의 정치화를 분리시키고, 이러한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약화시킬 때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한국, 특히 시민사회의 티베트문제에 대한 대응에서도 신중히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우선 티베트문제를 티베트의 독립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현재의 정치적 틀 내에서 티베트인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티베트문제를 과도하게 정치화시키는 것, 즉 이를 중국의 중화주의와 패권주의적 의도로 간주하고 이를 쟁점화 시키는 것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권’을 역사적, 사회경제적 요인들에 대한 고려 없이 절대화시키는 것도 인권담론의 패권적 사용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티베트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중국정부와 달라이라마가 평화적 해결의 길을 모색하는 진지한 대화를 가질 수 있는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는 것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만 티베트에서의 인권문제에 대한 보편주의적 관심과 인권증진을 위한 노력에 대한 지원 등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단기적인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부침하지 않는 지속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