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가는 길/책을 읽자
[서평모음] 우석훈의 <촌놈들의 제국주의>, <직선들의 대한민국>
우석훈 씨가 다시 새롭게 책을 펴냈다. 그것도 두 권씩이나... 이미 그가 쓴 책을 3권이나 사서 보았으니 구미가 댕길만도 하건만 이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걸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생각되어서인지 책을 사서 볼 마음은 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서울신문에서 가장 먼저 서평을 냈다. 이문영기자가 웬 일로 우석훈의 책에 서평을 썼을까도 조금은 궁금하다. 프레시안의 서평은 성현석 기자가 했는데, 책의 내용을 많이 옮겨 놓아서인지 상당히 길다.
그간 우석훈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서 책이 쓰여지고 있는 상황을 꾸준히 올려왔다. 기본적인 방향은 잡고 끊임없이 수정해가면서 책을 완성시킨 것이니 나름대로 완성도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견지하고 있는 경제학적 시각에 있다. 그의 책은 경제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번 책은 이문영 기자가 '행동하는 평화경제학'과 '행동하는 생태경제학'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본격적으로 경제학을 다루었을 터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이 경제학적 마인드일까.
유머와 위트 넘치는 필체, 가능하면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우석훈의 글쓰기는 배우고 싶다. 아마도 이번 책들에서도 그런 점이 두드러질 것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그리 간결하지 못하다. 물론 나와 같이 어려운 글을 쓸데없이 늘려쓰는 이에 비하면 그만의 미덕이라고 하겠지만, 조금더 압축된 서술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책은 어떠할런지...
그는 자신이 펴낸 책마다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 안에 대안이 있다고 하지만, 그 대안보다는 문제제기가 훨씬 관심을 끌고, 실제로 풍부한 상상력에서 나온 그러한 도발은 충분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특히 나에게는 대안이 필요하다. 10대 청소년들에게는 어떨까. 잘 모르겠다. 적어도 굳이 책으로까지 묶을 필요가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물론 그는 블로그 상으로 더이상 학술적인 활동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이번 책들을 통해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것들을 다 쏟아붓고 싶었을 거다. 이런 책들과 도발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우석훈 교수가 활동하는 경제학계의 보수성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김수행 교수를 끝으로 설대에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흐름이 중단될 위기에 있다.
우석훈의 책은 에세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술서도 아니다. 그래서 인용하기도 조금은 모호하다. 물론 그의 책에서 괜찮은 아이디어를 건진 것도 꽤 되지만 말이다.
새 책에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사실상 북한 식민지화 정책이었고, 전쟁보다는 평화에 이득을 얻는 세력이 많아야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며, 건설업은 '평화재건'이라는 탈을 쓴 전쟁산업이라는 그의 통찰 역시 날카롭다. 이 부분은 성현석 기자의 서평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그러고 보니 이라크에 파병된 부대 역시 건설부대이다.
그의 통찰을 빌려오는 셈 치고 책을 읽어볼까나. 물론 시간이야 그리 많이 들지 않을 것이기에...
아래에서는 이 책들에 대한 서평을 담아온다. 두 권의 책은 이미 읽었다. 이를 정리한 내용은 진보블로그에 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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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주의자’의 도발적 주장과 꼬집기 (서울, 이문영기자, 2008-06-12 22면)
우석훈(41)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명랑주의자’다. 엄숙주의를 멀리하고, 오직 명랑만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글은 여느 학자의 글처럼 먹물티를 풍기는 대신 유머와 위트로 비판 대상을 꼬집는다. 남들이 보지 못한 혹은 소홀히 한 문제의 핵심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짚어낸다.
우 교수가 지난해 펴낸 ‘88만원 세대’(레디앙)는 출간과 동시에 ‘출구 없는 20대’를 규정하는 사회·경제학적 개념으로 보통명사화됐다. 그 자신도 출판계가 가장 눈독 들이는 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가 최근 새 책 두 권을 한꺼번에 내놨다.‘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이란 부제의 ‘촌놈들의 제국주의’(개마고원)와 생태미학의 구축을 주창하는 ‘직선들의 대한민국’(웅진지식하우스)이다.
수십만개의 촛불이 환하게 타오른 10일 저녁, 촛불집회 참가자들로 빽빽한 서울 시청 앞 도로에서 우 교수를 만났다. 그는 자칭 ‘C급 경제학자’다. “A급 경제학자는 이론을 만들고, B급 경제학자가 이론을 수정할 때, C급 경제학자는 이론을 적용한다. 곧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는 C급 경제학자의 삶을 ‘액션 대로망’이라고 정의한다. “늘 조금씩 하던 액션을 필요에 따라 세게 하는 것”이다. 두 권의 책도 각각 ‘행동하는 평화경제학’과 ‘행동하는 생태경제학’이라고 부를 만하다.
특히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한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하는 도발적 주장을 담았다. 제국주의이되 ‘촌놈들의 제국주의’다. 우 교수는 “식민지를 만들어낼 능력도, 식민지 경영의 경험도 없으면서 생존의 돌파구는 식민지가 요구되는 제국주의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한국 자본주의”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한국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전환을 보여주는 변곡점으로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남북 경협을 꼽는다.
우 교수에 따르면, 이라크 파병은 석유확보를 목표로 자원전쟁에 동참한 것이자 국익을 주장하며 전쟁을 불사한 제국주의적 현상이다. 경제영토의 확장을 꾀하는 한·미 FTA도 시장과 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식민지를 추구하는 제국주의적 특징을 노정하고 있다는 게 그의 견해다. 남북간 평화의 가교로 평가돼온 경협을 제국주의로 보는 시각도 논쟁적이다. 우 교수는 “한국 자본주의에서 북한이라는 존재는 지난 10년을 거치면서 경제적 의미로 식민지에 가까워진 게 분명한 사실”이라면서 “햇볕정책에 대한 찬반 입장 차이는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 전환시킬 때 정부를 그대로 두고 식민지 정책을 추진할 것인가, 정권을 무너뜨리고 일종의 총독부처럼 직접 관리할 것인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햇볕정책 지지자들 내에서도 간간이 제기돼온 지적이나 우 교수처럼 대놓고 날을 세우기엔 민감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진보진영 원로들에 대한 비판도 주저하지 않는다. 일본과 전쟁을 해서라도 독도를 지켜야 한다는 소설가 조정래의 주장과 한국 문화가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 전망하는 시인 김지하의 문명담론 또한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팽창주의와 묘하게 공명한다는 점에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통일운동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미학적 전환을 말하는 책이다. ‘직선’은 구불구불한 강들을 곧게 펴는 대운하 공사를 상징한다. 책은 개발주의적 건설미학이 팽배한 한국에서 생태미학으로의 전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전기로 모터를 돌려 한강물을 억지로 흘려보내야 하는 청계천은 ‘거대한 어항’에 불과하지만, 청계천을 어항이라 말할 수 있으려면 대중의 미학을 거스르는 생태적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미학은 철학의 분파로 출발했다. 미학과 철학은 사유의 힘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하나, 오늘의 한국에서 생태미학은 사유를 넘어 행동을 필요로 한다. 우 교수는 “한국적 생태미학은 ‘촛불’ 속에서 진화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촛불이 수많은 촛불들 속으로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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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저 한국경제’ 어떻게 멈출까 (한겨레, 전진식 기자, 2008-06-20 오후 05:40:35)
한중일 경제 패권다툼 조짐
평화 인프라 구축 나서고
개발 대신 생태 근본주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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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의 제국주의〉
우석훈 지음/개마고원·1만2000원
〈직선들의 대한민국〉
우석훈 지음/웅진지식하우스·1만2000원
경제학자 우석훈씨의 글을 관통하는 원리는 ‘베르누이의 정리’다. 유체의 위치 에너지에 변화가 없는 경우, 곧 수평면에서 운동할 때 유체 압력의 감소는 유속의 증가를 가져온다. 명량해전 하면 떠오르는 울돌목이나,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는 속담이 그것의 간결한 예를 이룬다. 우석훈씨에게 베르누이 정리는 ‘수다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지난해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를 펴낸 뒤 채 1년도 안 돼 그는 책 두 권을 또다시 독자들 앞에 내놓았다. 어려운 경제학 개념과 현상을 일상적 표현에 버무려 샐러드처럼 상큼하게 내놓는 솜씨는 여전하다.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 첫째 권인 <88만원 세대>에서 지은이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강조한 바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매몰돼 젊은이들의 미래를 ‘절도’ 내지 ‘횡령’하는 현실에 대한 윤리적 경고를 담고 있는 표현이었다. 그는 이것을 일러 ‘에토스에 대한 알레고리’라 했다. 둘째 권에서 그는 ‘슈퍼보드’라는 개념을 통해 대기업이 조직론적으로 빠지기 쉬운 함정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희망을 말하며 거듭 이성과 합리성을 말했다. 로고스에 대한 요구였던 셈이다. 이번에 나온 시리즈 셋째 권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일체의 이해관계를 떠나 ‘평화’라는 공공재를 위해 우리 시대가 쏟아야 할 열정을 말하고 있다. 파토스다.
“경제학자로서 내가 소망하는 것은, 평화가 밥 먹여주는 시대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작금의 한·중·일 세 나라는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로 치닫고 있다. 그것을 ‘동북아 중심국가’ ‘중화주의’ ‘보통(정상)국가’와 같은 표어가 선명히 상징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출주도형 경제구조의 모순과 한계가 임계점에 가까워오면서 ‘이윤 추구의 눈초리’가 외부로 몰리는 상황이며, 김대중 정부 때 선포된 ‘다이내믹 코리아’가 노무현 정부 들어 ‘동북아 중심국가’로 확대재생산되었다는 게 지은이의 분석이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도 하고, 경제성장도 도모하고, 더불어 민족의 숙원이던 만주로의 진출도 꾀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따라 철도망과 도로망도 건설하며 영원한 경제번영을 이루자는 얘기는 (…) 19세기 말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탄생을 이뤄냈던 힘과 동일한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한-미 동맹의 조건이 겹쳐지면 미국을 등에 업고 ‘경제 영토’를 개척한다는 발상이 자연스레 이어져 나온다. 지은이는 이를 일러 ‘촌놈들의 제국주의’라 꼬집는다. 나아가 정치적 스펙트럼이 우향우로 치우친 현실을 곱씹어 보면, 한반도에서 파시즘이 출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며, 한국형 파시즘은 북한과의 통합·통일 과정에서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다. 이를 막을 대안은 무엇인가? 신중하게 그가 제출하는 답안은 평화의 인프라를 준비하자는 것이며, 유럽연합의 대학생 교환프로그램인 ‘에라스뮈스 프로그램’을 예로 들고 그 특장으로 공공성과 역사성을 결합한 문화적 통합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경제동물로서의 낯가죽을 버리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가는 길이며 민족 패권주의의 대중적 열광이라 할 ‘한류’의 조류를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이다.
평화-전쟁의 부등식에서 평화 쪽으로 부등호를 돌리는 일이 근본 전제라면, 마땅히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로 기울어야 한다. 그것은 어찌해야 이뤄질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와, 백범 김구가 말한 ‘아름다운 나라’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여기서 나온다. 이 문제를 천착한 책이 <직선들의 대한민국>이다. 자전거를 타면서도 타인과 속도 경쟁을 벌여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 청계천을 복원한답시고 ‘어항’을 만들어버린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사회.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자들의 자녀들이 거꾸로 아토피를 더 많이 앓고 있는 곳. 뉴타운·새도시로 개발돼 봤자 채 10%도 안 되는 사람들만이 재정착을 할 수 있는데도 너도나도 그와 같은 개발에 찬성하는 현실. 서울과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이 몰리고 도시화율이 90%에 이르렀지만, 이쯤에서 멈추자고 말하는 사람이 물정 모르는 인간 취급을 받는 나라. “누가 이 불도저를 세울 것인가? 힘이 아니라 부드러움이고, 강함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다.” 이 모든 부조리를 넘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름다움’이라며 ‘생태 근본주의’(Deep ecology)로 가는 열쇳말로 지속 가능성, 공동체, 자치, 소통, 다원성을 들고 부지런히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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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의 제국주의' - 외연적 확장의 길과 내포적 성장의 길 (김광수경제연구소 카페, 사띠현정, 08.06.17 09:21)
책이름 : 촌놈들의 제국주의 지은이 : 우석훈
출판사 : 개마고원 출판일 : 2008년 6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생각'은 늘 가능한가 보다. 나는 우석훈 박사의 책을 읽을 때 마다 내가 해 보았던 생각을 발견한다. 어쩌면 우석훈 박사의 글을 읽고 '확장'된 생각을 해 보았거나 아니면 우석훈 박사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비슷하게 생각하는 패턴을 공유한다 싶기도 하다.
한국 자본주의가 '위기'에 직면하고 '탈출구'가 없어서 헤매고 있다는 것을 나는 '경제학자'들의 여러 글을 읽고 알았다. 그런 통찰을 제공해 주는 사람으로 이 연구소의 김광수 소장이나 우석훈 박사만한 학자가 없다. 이 두분은 모두 대단한 '통찰'을 갖춘 경제학자이면서 한국경제의 위기에 있는 그대로 직면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 두분이 서로 만난적은 없겠지만 나는 '책'으로 만나면서 '대조'해 보는 즐거움도 누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두분이 '경제학자'로서 한국경제의 문제가 무엇인지 샅샅히 파헤치는 일에 지극히 성실하다는 점이다.
경제학자가 경제에 성실한 것이 이상한 나라
경제학자가 '경제'에 성실한 것을 '중요하다'고 말하는게 이상한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한국에서는 경제학자가 '외도'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대표적으로 안병직 이분은 도요다 연구 펀딩을 받아서 '한국사' 연구하는 경제학자 아닌가? '경제학'과 관련된 한국사 연구이기는 하지만 '뉴라이트'의 역사관에 더 신경을 많이 쓰시니 내게 외도처럼 보인다. 박세일 이분은 '국제경제학' 전공이라지만 사실은 '시장원리 교육개혁'이 주전공처럼 바뀌어 있다. 이 분의 제자이신 현 이주호 교육사회수석 이분도 '경제학자'출신이다.
경제학자가 '교육개혁'할 수도 있고 사실 '관료주의'에 물든 교육계 또는 교육학 진영을 '혁신'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애초에 그래서 '신선'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약 20여년 경과하면서 모든것이 뚜렷해졌다. 특히 '민주정부'가 교육개혁할 때는 '반신반의'였는데 이명박 정부가 '같은 일'을 하니까 너무 명백해졌다. 간단히, 교육을 '돈벌이'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음이 너무도 분명해졌기에 이제 '시장원리 교육개혁' 그것의 문제가 무엇인지 '저절로' 드러나는 국면이 된 것이다. 실제 사례로, 하나은행이 자립형 사립고 설립에 뛰어드는데, '서울시장'이 반대한 것을 청와대가 챙겨서 '되도록' 한다는 이것 하나 만으로 충분하다. 여기 온갖 '병폐'가 다 포함되어 버렸는데 근본 원인은 교육을 '공공영역'이 아니라 '사적' 영역으로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학원업'과 비슷하게 '학교'도 '업'으로 설정했다는 점에 있다. 이미 대학은 그렇게 변질되었다.
우석훈 박사는 사실 이런 점도 이미 짚고 있다. 68혁명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유럽에서는 대학교육까지 무상화되었고 신자유주의 파도 속에서도 여전히 국민소득 4만달러인 나라에서 대학등록금은 1년 50만원 정도 내고 다닌다는 이런 사실 말이다. 이! 기가막힌! 지표는 한국과 중첩된다. 민간정부 20년동안, 사람들이 모두 '민간정부'를 '민주정부'로 믿어 의심치 않았고 바로 그동안에, '대학교육'은 엄청나게 변질되었는데 그 핵심은 '재단'의 기업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화'된 재단이 결국 '등록금'을 엄청나게 올렸다는 점에서 너무 명백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경제성장의 어떤 단계에서 '경제정책'이 아니라 '사회정책'이 더 '경제성장'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시점이 오게 된다고. 교육은 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정책'에 속한다. 무상교육은 '사회정책'으로 수행된 '경제 고도 성장'의 중요한 '계기'라는 것이 내 확신이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내포적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회주의'니 뭐니 하는 이념논쟁은 불필요하다고 본다.
그냥 '경험값'만 갖고 얘기해 본다. 북구의 강소국들은 예외없이 교육이 강한나라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간단히, 외연적 '확장'의 '제국주의적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당연히(!) 내포적 '고밀도 발전'을 꾀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내포적 고밀도' 발전의 핵심은 '경제성장' 보다는 '사회발전'에 있다. '경제적 효율성'이 외연적 성장의 핵심지표로 늘 내세워지는 것이라면, 사회적 효율성은 '내포적 발전'의 핵심지표이다. 여기서 '발전'이란 양과 질 양쪽의 성장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가령 외환위기 이후 10년동안 한국경제는 연평균 5-6%정도 '성장'했는데 과거에 비교하면 정말 '눈꼽'처럼 작게 느껴지는 '외연 확장'이었다. 하지만 선진국에 비교하면 이 수치조차 엄청 놀라운 확장이었다. 허나 사회적 '양극화'는 점점 심해져 갔는데 이런 경우 '경제의 외연 확장'이 '사회의 내포적 발전'과 어긋난 경우다. 바로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나는 '내포적 성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이것은 반드시 '사회의 내포적 발전'을 전제로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역사상 이것은 숱하게 발견된다. 사실 독일식 '국민경제모델이야 말로 '앵글로 색슨'의 외연적 성장 '방해'를 딛고 내포적으로 성장하는 방식 아니었겠는가. 이른바 '유럽형 녹색 사민주의 모델'이라는 것도 나는 이와같은 '내포적 발전'의 길로 보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석유와 달러 패권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지향도 들어 있는 만큼, 그로부터 연유하는 '외연적 확장'에 대한 '방해'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무상교육, 무상의료에 신재생에너지 전환 등등 모두가 다 '내포적 성장'에 속하며 바로 그 결과 미국을 넘어서는 4만달러 소득이 가능했다. 무조건 '외연적 확장'의 길로 간다고 전혀(!)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포적 성장의 길을 놓쳐서 '외연적 확장'으로 엇나가려는 한국경제
헌데 우리나라는 이와같은 경제의 총체적 '내포적 성장'으로 나아가는 '사회의 내포적 발전'의 계기롤 놓쳤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내포적 발전'을 좀더 다듬어 본다. 내게 그 '내포적 발전'의 계기란, 애초 대운하와 같은 '거대토목건설계획'이 '출현' 불가능한 사회정책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과도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북유럽 강소국들이 그러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식민지를 개척할 수도 없고 외연적 확장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군비확장 같은 것은 과도한 낭비로 부각된다. 이럴때 가장 손쉽게 가능한 '투자'가 교육이다. 따라서 무상교육이란 사회적 효율성 제고에 반드시 오는 국가의 책무적 사업이었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사실 2001년 김대중 정부는 중학교까지 무상화했다. 이것이 더 '확장'되어야 했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멈췄다. 바로 그 '대체물'이 제주도 해군기지 같은 것이었다면 틀린 생각일까?
김대중 정부에서는 군비가 크게 줄고 교육비가 크게 늘었다. 바로, 내포적 발전의 길로 한걸음 나아가긴 했다. 중학교 무상교육은 연 7500억원 정도의 교육재정 증가로 가능했다. 너무도 손쉬웠던 셈이다. 고교까지도 손쉽게 가능하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어느새(!)' 한국의 재정규모가 확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디피 6%의 공공 교육재정을 확보하면 대학까지 무상교육은 아주 쉬웠다. 당시도 지금도 지디피 6% 교육재정은 약 30조에서 40조 정도이다. 사실 현재 교육재정에다가 연 5조원 정도 늘리면 고교까지 무상화는 아주 손쉽게 가능하며, 연차적으로 좀 더 늘리면 대학까지 무상교육은 더 손쉽게 가능했다. 그런데 이것의 적절한 실행시기를 놓쳤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이른 바 '재투자' 효과를 최대한 거두는 시점을 잃고 말았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 효율성 제고'와 낮은 수준일지라도 '경제적 투자 효과'의 제고라는 것 말이다. 이것이 '최대'의 효과로 나타날 시점은 바로 '파병논란'이 빚어지던 그 직전 그러니까 탄핵열풍이 몰아치던 그 무렵이었던 셈이다. 만일 교육에 많은 돈을 집중투자하고 있었다면 '해외 파병'은 당연히 억제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 결과는, 내포적 성장의 길을 자꾸 '외연적 확장'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이고 이런 경향이 점점 강해진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석훈 박사는 이것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들여다본다. 경제 성장이 '난경'에 부닥친 상황에서 '뚫어'보기 위해 이것 저것을 다 고려하는 가운데 가장 손쉬운 '건설토목계획'이 남발된다. 이미 노무현 정부에서 그러했고 여기에 사실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해외파병과 더불어 세계 여기저기서 이루어지는 '석유 탐사' 사업도 포함된다. 요컨대 '외연적 확장'의 싹이 너무도 커져 있는 것이다.
이른바 한국판 '뉴딜'이라고 하여 지방개발과 각종 항만, 도로 등의 사회적 인프라에 참여정부는 엄청난 돈을 투입했거나 할 계획을 세워서 현 정부에 넘겼다. 토지보상금은 연평균 10조씩 사용했다. 이렇게 쓸 돈은 엄청나게 많았다. 심지어 이번에 이명박 정부가 발표한 석유값 인상 대책에 사용하는 돈은 10조원이다. 나는 바로 이런 것이! '내포적 성장'의 기회를 놓친 때문에 빚어지는 사태라고 본다. 왜냐하면 연 10조원이면 대학까지 무상교육이 가능한 돈이다. 해마다 이만한 돈을 무상교육에 사용한다면, 당연히 20조규모의 대운하 계획 같은 것을 내놓기 어렵다. 그만한 재정을 꺼내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석유값 폭등한다고 함부로 재정에서 10조라는 돈을 꺼내서 소모해버리거나 또는 함부로 군비를 늘리거나 하는 방향으로 가지도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그렇게 보았다.
하지만 한국은 교육과 의료에 '공공투자 증대' 방식으로 사회적 효율성을 높여서 국민소득의 '증가'를 향해 나아가는 '내포적 성장'의 길을 놓쳐 버렸다. 나는 지금도 귓전에 생생한 소리가 있다. 다름 아니라, 열린우리당이나 통합민주당 지지하는 지식인들 대부분이 한국은 너무 재정이 빈약해서 '무상교육'에 쓸 돈이 없고 그것은 19세기 발상이라는 투의 담론들 말이다. 이들은 예외없이 '신자유주의' 찬가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보였다. 단지 참여정부가 이런 사람들의 담론을 '민주정부'라는 허울 속에서 가려놓고 있었을 뿐이다. 우석훈 박사는 일찌기 1년에 10조원 정도의 '돈'이 도로건설과 유지 보수에 사용된다고 밝힌 바 있지만 이런 얘기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년 10조면 대학까지 무상교육 가능한 돈인데, '아무도' 우리나라가 대학까지 무상교육하는 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생태주의 영화 찍는 '황윤' 감독의 '어느날 그 길에서'에서 우석훈 박사의 얘기가 변주되었는데, 우리나라의 도로밀도가 단위 제곱킬로미터당 1킬로미터의 길이라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한국 전체가 한변의 길이가 1킬로미터인 '포장도로'의 정사각형 격자의 '바둑판'으로 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러니 동물들이 1킬로미터 못가서 '도로'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는 얘기였다. 이 동물들이 도로위에서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건설토목과 '전쟁의 신'을 제어할 것인가
우석훈 박사의 이 책은 바로 이와같은 '건설의 신'이 한국에서 얼마나 위력적인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위력'은 김성동의 소설에서 잘 묘사되었다. 화두잡고 수행하는 은거 수행자의 동굴 근처까지 '도로공사'하는 장비들의 건설소음으로 시끄러워진다는 얘기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제곱킬로미터당 1킬로미터의 도로밀도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밀도 높은' 도로망을 만들어 놓고서도 여전히 1년 10조원의 '도로공사' 예산은 책정되고 집행된다. 사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예산항목을 많이 바꿨는데 대부분 도로와 '회관' 건설로 돌렸다고 한다. 요컨대 이명박 정부는 '건설토목'을 중심산업으로 경제를 이끌어 나가려는 의도를 가진 정부다. 문제는 단위제곱킬로미터당 1킬로미터의 '도로포화' 상태이니 어쩌겠느냐이다. 아주 간단한 방책이 나오는데, 고 정주영 이분처럼 2층 고속도로 건설안을 내거나 서울시장 오세훈처럼 '지하 격자도로 계획'을 내거나 아니면 이명박 대통령처럼 '대운하' 계획을 내는 것이다!
바로 이순간, 이와 같은 경제가 정말 가능한가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그와같은 '건설의 신'이 어디를 향할까이다. 가장 '만만한' 장소가 북한이다. 이 지역은 지난 60여년간, 사회간접시설의 '피폐화'를 겪고 있다.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적어도 1990년 소련이 무너진 이후, 석유가 끊겨서 더 이상 손써볼 도리 없이 경제 전체가 '낙후'되어 버렸다. 요컨대 '석유'경제 시대에 '석유'가 없으니 당연 경제가 제대로 굴러갈리 만무하다. 가령 쿠바처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의 방향으로, 도시영농 같은 것을 활성화하면서 살 길을 찾는 방식도 있었다. 허나 북한은 '생태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가령 생태주의를 니카라구아의 산디니스타에게서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다락논 노선' 같은 것을 채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산디니스타가 자신들의 생태주의적 전환계획을 미처 실행하지도 못한채 무너지자 이 계획을 쿠바에서 배워갔고, 그 덕분에 지금 정도라도 탈석유 경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다락논 때문에 이후 산사태와 홍수 그리고 농업생산력의 급속한 저하와 함께 바로, 오늘의 기아사태 원인이 생성됐다. 그리고 이를테면 지금은 멈춰버린 '케도'처럼 이른 바 한국형 경수로 원전을 지어주는 계획이 있었다. 사실 그만큼 '급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바로 북한이 이렇게 '사회간접자본'의 낙후속에 있기에 한국의 '도로건설자본'이 볼때 얼마나 훌륭한 진출가능 지역으로 보이겠는가!
이런것들이 겹쳐져 햇볕정책이 담보하고 있었던 '인도주의적 통일' 이런 지향이 '자본의 제국주의적 진출'로 변질되는 단계에 지금 한국이 와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점은 사실 미국에서도 감지되지 않는가. 지난 봄인가 미국에서 열린 대북정책 공청회에서는 '너도 나도' 북한에 '획기적인 제안'을 해야 한다면서 가령 '철도'를 러시아 중국으로 이어주겠다는 이런 제안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다름 아니라 클린턴 전 정부의 전 고위 외교 관계자가 말이다.
이런 이유로 북한은 '통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급하다'는 것이기도 하고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는 상황으로 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급한' 나라가 하나 더 있으니 '대한민국'이라고들 한다. 그 '대한민국'의 가장 급한 '자본'중 하나가 '건설토목자본'이다. 미분양이 20만채라는데, 이것 보다는 도로 항만 회관 아파트 등등 하도 많이 지어대고 있어 이미 '공급과잉'으로 접어들고 있다. 그래서 어디 '깨끗한' 들판이라도 있기를 바란다. 우석훈 박사는 그것을 '평양역'에 거대한 주상복합을 짓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표현했다.
사실 남한 자본인들 조건이 좋은 것은 아니다. 다름아닌 석유 때문이다. 에스케이는 '지구'를 거꾸로 엎는 '광고'를 통해서 이곳 저곳에서 석유를 찾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카스피해까지 진출해 있다. 물론 영미 석유자본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우석훈 박사는 아프리카에도 나가 있다고 한다. 아주 중요한 지점중 하나는, 가령 동남아시아에서 산유국인 인도네시아와 베트남도 '석유'를 수입한다는 이런 실이다. '석유'가 나는데 '석유'를 수입한다? 정확히, 원유가 나지만 정유시설이 없어 '정제석유'는 수입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거꾸로다. 정유시설은 엄청난데 원유가 없다. 그래서 원유가 있는 곳이라면 달려가서 이미 무엇이건 하려 들 태세에 와 있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파병'은 아마도 군에서조차 꽤 '체험'하고 싶은 일이었을 것이다. '체험 전쟁현장' 이것이야 말로 군사적 본능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박사는 참여정부하에서 단행된 파병속에 이미 '아류 제국주의'적 지향이 담겨 있었다고 분석한다. 정확하다. 시민운동이 아무리 '평화'를 겉으로 부르짖었지만 속으로는 '이제는 이정도' 할 만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길 바라지만 정말 어렵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한국적 '방어형 민족주의'가 '공격형'으로 전환되어 갔다고 하는데 그 '계기'가 되는 사건들이 황우석 사태와 디워 사태 등이었다.
촛불에 내재된 위험 잘 들여다 보기
그래서 나는 지금의 '촛불'에 약간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모든 '권위'를 해체하는 듯 하면서도 뭔가 어긋난 지점이 있는데 뭘까? 우석훈 박사의 책을 읽고 알아차렸다. 바로, 일본 우익이 그렇듯,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 말이다. 사실 진보진영의 '주체'적 '민족주의'는 부작용을 낸다. 북한이 무슨 '주체'라기 보다 '경제원조'가 필요한 나라 아니면 그저 한국자본이 진출할 미답지 정도로 국민들이 인식한다면 당연 어떤 생각을 갖겠는가? 주체의 민족주의는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의미의 민족주의 작동이 가능하지 않은가? 바로 미국에 대하여 할말 하는 '정상국가' 이런 생각을 가질 법하지 않겠는가? '촛불'에 이런 지향이 더 강하게 담겨 있다면 바로, 우석훈 박사의 '걱정'이 싹을 틔운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주 틀리지 않는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선교단의 부모들은 모두 '자식'을 자랑스러워했다. '위험하게 왜 그런델 가니'하면서 '만류'한 부모 내 보건데 한명도 없었다. 지금 한국 부모가 이렇게 변해 있다. '앞장서라'. 그리고 '앞장서라' 이것은 바로 '제국주의'의 명령어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초기 동남아시아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일본군이 그렇게 전투했다. 이등병이 달려가 기관총안구에 몸을 눕혀 '총알'을 몸으로 막는동안 다른 병사들이 '벙커'를 점령하는! 이런 전투였다. 물론 일본군 병사들의 '앞'에는 당대의 '제국' 영국군이 있었다. '제국의 징후'는 바로 이렇다. 부모들이 더 이상 '맨 앞에도 맨 뒤에도 서지 말고 중간쯤 있어라'가 아니라 '무조건 맨 앞장서라'가 되었을 바로 그때! 우석훈 박사는 파병에 이어서 황우석 사태와 디워사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선교단 사태에서 그런 '징후'를 발견한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할 시점이다. 우석훈 박사는 경제학자이나 생태학을 공부했다. 한국에서 '생태경제학'은 매우 생소한 분야이다. 하지만 경제의 생태적 전환은 사실상 눈앞에 화급한 문제이다. 한국사람들이 '급한' 만큼 너무도 '무딘' 측면도 있는데 생태학과 같은 분야다. 물론 인류학도 마찬가지다. 이제 뭔가 '외연적 확장'의 길로 나가려니 너무도 미흡한 것이 여실히 드러 난다는 것인데 이럴때 핵심이 되는 학문이 인류학과 생태학이다. 요컨대 전혀 준비도 없으니 '촌놈들의 제국주의'인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촌놈이라도 '외연적 확장'의 본능은 제국주의와 정확히 합동이 될 수 밖에 없다. 한국은 곡물과 석유를 모두'해상'을 통해 들여 온다. 해상 수송로는 군사전략적 단어로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외부' 의존 경제를 만들어낸 한국인의 운명과 같은 삶의 경로이다. 그래서 정말 어렵다. 석유 수송로에 이제 한국해군이 초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제주도 해군기지는 이런 이유로 만들려는 것 아니겠는가. 당연히 한중일 사이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지금부터 평화의 싹을 만들어 나가는가 이런 화두를 잡고 있다.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내 생각에 어떻게 한국의 경제와 산업을 '생태적으로 전환'하는가의 문제가 핵심이라고 여긴다. 물론 앞에서 말한 '사회적 효율성을 높이는 내포적 발전'으로의 전환도 여전히 남아있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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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불도저의 묵시록 (한겨레21 2008년06월26일 제716호, 유현산 기자)
지칠 줄 모르는 경제학자 우석훈이 펴낸 두 권의 책 <촌놈들의 제국주의> <직선들의 대한민국>
진중권이 경제학을 전공했다면 우석훈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지금 교양과 재치로 무장하고 엄청나게 많은 글을 쏟아내는 경제학자를 보고 있다. 그의 펜끝은 늘 대중을 향해 있다.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를 보는 건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글 잘 쓰는 경제학자’는 멸종 위기의 희귀종에 가까우니까.
대중적 설득력을 갖춘 경제학자를 꼽아본다면(잘 안 꼽아지겠지만), 엄지손가락은 장하준 교수 차지일 것이다. 장하준의 글은 매우 우아하면서도 교양과 풍부한 논거들로 무장돼 있다. 장하준과 우석훈의 차이는 밀도와 면적에 있다. 장하준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성장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경제학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다. 그의 글은 매우 밀도가 높다. 우석훈은 틈만 나면 경제학을 벗어나서 세상만사에 끼어든다. 그의 글은 면적이 넓다.
청계천, 거대한 어항
우석훈, 이 놀라운 에너지를 가진 경제학자가 거의 동시에 두 권의 책을 냈다. 일종의 시평집인 <직선들의 대한민국>(웅진지식하우스 펴냄, 1만2천원)과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인 <촌놈들의 제국주의>(개마고원 펴냄, 1만2천원)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직선’은 불도저로 상징되는 건설공화국이다. 이는 청계천을 거대한 어항으로 만들어놓고 생태 복원이라 부르는 우리 마음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전기로 모터를 돌려 끌어온 물을 다시 한강으로 흘려보내는 청계천은 비만 오면 오염물질이 한꺼번에 청계천으로 흐르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그러면 죽은 물고기들을 걷어내고 또다시 물고기들을 방류한다. 청계천이 제대로 복원될 때까지 끝없이 반복될 숨바꼭질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외형적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직선’의 단면을 더 살펴보자. 집 없는 사람들이 집값이 오르면 환호한다. 뉴타운은 현재까지의 경향으로 보면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의 10% 정도만 다시 입주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도심에서 더 먼 곳이나 주거환경이 더 나쁜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뉴타운 계획이 알려지면 모두들 기뻐 날뛴다. 신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토호들의 놀이터’가 돼버린 지방을 보면 더 심각하다. 이장한테 도장을 맡겨놓고 사는 순박한 주민들은 토호들의 이익을 위해 토지를 팔아치우는 데 동의한다. 한국의 도시화율은 이미 선진국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수도권에 모든 재화를 집중시키고 있다. 이런 ‘직선’적인 힘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발상에서 정점을 이룬다.
왜 이런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이 땅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선택은 경제적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우석훈은 경제학자의 영토를 뛰쳐나간다. 그는 건설공화국이 유지·강화되는 원인을 시대 정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즉, ‘건설 미학’이 한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청계천을 찬양하거나 집 없는 사람들이 뉴타운 건설을 환영하는 이유는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미학이 투기와 결합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파천황’이 된다. 그러므로 ‘건설 미학’을 ‘생태 미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안이다. 그는 건설 미학이 한반도 대운하 발상에서 정점에 이르렀지만, 그 때문에 새로운 사유를 할 공간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생태도시로의 전환, 생협 네트워크 등은 진행 중인 움직임이다. 그는 “주제넘은 이야기를 하는 김에” 건축·문학·음악·영화의 ‘생태 미학’까지 참견한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수출 지향, 에너지 소비 지향, 건설 지향의 한국 경제가 내적 불균형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국익’을 앞세운 이라크 파병에서 보듯, 이제 한국 경제는 해외 영토를 갈망하고 있다. 즉, 제국주의의 길로 나서고 있다. 이게 ‘촌놈들의 제국주의’인 이유는 식민지도 없고 식민지를 거느릴 능력도 없으면서 끊임없는 정복욕과 증오를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징후들의 집합이다. 우석훈은 우리 사회·경제 내부에서 제국주의의 징후들을 계속 끄집어낸다. 제국주의의 문화적 형태는 ‘수출주의’인데 한류 열풍을 지나 황우석 사건에서 절정을 맞는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미 제국주의의 등에 올라타 영토를 확장하려는 사람들의 욕망도 읽는다. 또 촌스런 제국주의는 북한을 내부 식민화하려 한다. 한국 자본주의는 북한을 값싼 노동력의 공급처나 부동산 개발의 요람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경제 통합 과정에서 북방 진출을 향한 야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중·일의 증오는 더 커져가고 있다. 이들 국가의 소득 분포도는 중산층이 두터운 마름모꼴에서 중산층이 붕괴되는 8자형으로 바뀌고 있다. 에너지와 자원을 둘러싼 각축은 계속 치열해진다. 3국의 산업구조는 전쟁에서 이득을 볼 에너지산업과 건설산업의 비중이 크다. “결론적으로 한·중·일 세 나라가 30년이라는 시간 지평에서 전쟁을 피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우석훈은 이 끔찍한 미래를 막기 위해 평화라는 ‘공공재’의 가치를 되새기고 한·중·일 경제 통합의 밑그림을 그려본다. 무엇보다, 미래의 전쟁을 막는 일은 10대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들의 감성을 죽이는 ‘교육 파시즘’을 반드시 철폐해야 한다.
동아시아 3국의 전쟁이라고?
한국의 제국주의에서 시작해 3국의 전쟁 가능성까지 짚어보는 작업은 좀더 섬세하게 토론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매우 대담한 가설이다. 기본적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성장 동력을 잃고 있으며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국주의로의 전화에 대해 논의하려면 현재의 제국주의 개념에 대한 규정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19세기 제국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또 제국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설명돼야 한다. 어쨌든 우석훈의 목표는 세밀한 개념 규정이 아니라 레모니 스니켓의 ‘불행 시리즈’ 같은 묵시록을 던져놓고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 미래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는 또 경제학자의 영토를 벗어난다.
두 권의 책은 계속 어떤 이름 하나를 호출하고 있다. 이미 용서받은, 잊혀진, 심지어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이름, 노무현이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김대중 시대를 완화된 신자유주의로, 노무현 시대를 강화된 신자유주의로 규정한다. 두 시대를 거쳐오면서 건설 미학이 강화됐다.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노무현과 이명박 정권은 정책적으로 거의 비슷하다. 진보세력으로 분류됐던 강금실은 서울시장 선거 때 한강 하구 개발을 얘기했고, 정동영은 새만금 개발을 떠들었으며, 손학규는 경기도의 전면적 개발 붐을 주도했다. 우석훈은 노무현 지지세력 중 최악의 인물로 미학적 고민을 해야 할 임무를 방기해버린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들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아예 한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노무현을 꼽고, 노무현 정권의 기반이 극우민족주의와 맞닿아 있었다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정치·경제의 새로운 국면들을 이명박 대통령의 개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이명박 정권에 대한 과소평가다. 우석훈의 두 책은 한국의 불도저 정신과 제국주의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현재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우리 사회를 묵시록으로 이끄는 힘의 봉인을 푸는 과정이었다. 이 힘의 해체를 위해선 이명박 개인의 독특한 인성만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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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족 내버려두면, 전쟁 난다" (프레시안, 성현석/기자, 2008-06-23 오후 2:05:46)
[화제의 책] <촌놈들의 제국주의>
"중국이 이런 스피드로 나간다면, 전쟁이 날 거라고 봐요. 인류의 역사는 잉크로 쓴 게 아니라 에너지로 썼다는 말도 있는데, 1차 세계대전도 사실 독일이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시작한 거고요. 강대국들은 최근에도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큰 무기가 에너지라는 걸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듯 보여집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이 현재 1인당 석유소비량이 2ℓ가 채 안 되지만, 향후 10년 동안 2배로 늘어날 거라는 거죠. 어느 나라나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석유소비량도 늘어나기 마련이지만, 중국은 인구가 13억 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중국이 마치 전 세계의 자석이 되는 셈이에요. 산업화가 진전될수록 자원을 급속도로 빨아들이게 되는 거죠."
지난 2004년 5월 21일 발행된 주간지 <이코노미21> 기사 중 일부다. 얼핏 보면, 학자나 평화운동가의 발언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실물경제 동향에 해박한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전망이다. 당시 이 잡지가 마련한 좌담에서 전병서 대우증권 리서치본부장 (현 한화증권 리서치본부장)이 한 이야기다.
읽다 보니 그럴싸했다. 그래서 잡지를 덮으며, '이민 가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자원 쟁탈전'에 열 올리는 한ㆍ중ㆍ일, 1차 대전 직전 유럽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비유한 동북아시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경제가 성장하는 '스피드'는 떨어지지 않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신흥공업국이었던 독일이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식민지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 쳤듯, 중국 역시 자원 기지에 목말라한다. 아직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자원과 석유가 매장돼 있는 아프리카 대륙에 중국이 극진한 외교적 노력을 쏟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은 최근 콩고, 잠비아 등에 경제특구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자원외교'다. 이미 '자원외교'는 동북아 3국이 함께 매달리고 있는 과제가 됐다. 일본 역시 꽤 오래전부터 해외 자원 기지 확보를 위해 애쓰고 있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 '자원외교'를 외쳤다. 일본정부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자원외교'는 요란하게 진행되고 있다.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대신, 관련 부처들 사이에서 나오는 불협화음은 꽤 시끄럽다.
하지만 지구가 품고 있는 자원의 총량은 한정돼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소비했다. 상당수 학자들이 2050년께가 되면 물, 석유, 유가금속 등 주요 자원의 부족 현상을 피할 수 없다고 전망한다. 제한된 자원을 놓고, 패권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게 되리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자원외교'라는 이름으로 '자원 확보를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한국, 중국, 일본 역시 이런 긴장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전망대로, 우리는 과연 전쟁을 피할 수 없을까?
"사하라 사막의 탱크전, 한ㆍ중ㆍ일 버전으로 재연될 수도"
이런 질문에 대해 답하는 책이 나왔다.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를 저술하고 있는 경제학자 우석훈의 책 <촌놈들의 제국주의>다. <88만원 세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 이어 나온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 3권'이다.
급한 질문부터 확인하자. 과연 전쟁 날까? 저자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고향에서 익숙하게 보던 한중일의 갈등을 그 먼 아프리카 땅에서도 보게 될는지 모른다. 유럽을 떠나 먼 사하라에서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가 정면으로 맞서고, 실제 영국까지 끼어들어서 거대한 탱크전을 벌였던 얘기가 한중일 버전으로 재연될 수도 있단 것인가? 불행히도, 그런 개연성은 대단히 높다."
저자는 '영토 밖 전쟁'의 가능성을 꽤 높게 보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도 한국은 '영토 밖 전쟁'에 군대를 보낸 적이 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이라크 파병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한국이 제국주의로 가는 첫 번째 문턱을 넘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념이나 대의명분이 아니라 '국익'을 이유로 군대를 전쟁터에 보냈다는 것. 이는 제국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상이라는 설명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익 있으면 파병하겠다'는 한국, 제국주의 문턱 넘었다"
"'국익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논의 자체가 파병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관계로까지 연결되는 것은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현상이다. 이익이 있어도 대부분의 국가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이렇다.
"이 파병의 의미를 조금 냉철하게 규정한다면, 미국을 등에 업은 일종의 전쟁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앞으로 경제적 이해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파병을 통해 세계전쟁에 가담하겠다는, 일종의 한국 자본주의의 질적 전환에 대한 '암묵적 선언'인 셈이다. 실제로 이라크에서 한국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파병 규모가 세 번째인 국가이며, 언제라도 이란이나 요르단과 같이 또 다른 전선으로 파병이 확대될 가능성 또한 다분한 상황이다."
더 무서운 일은 이런 변화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일어났다는 점이다. 저자의 설명이다.
"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강요에 마지못해 따른 게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가 해외에서의 군사활동을 강력히 원했고, 무엇보다 절반 가까운 국민이 한국 군대가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을 원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파병 결정이 민주적 절차 측면에서 심각하게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논의가 다소 일방적으로 흐르기는 했지만, 법적 절차에서 정부는 한국 자본주의가 원하는 전쟁을 결정했고, 국회는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이 파병에 동의한 것이다."
민주정부가 국회의 동의를 얻어 치르는 전쟁을 막을 방법은 묘연하다. 전쟁을 막기 위해 '평화', '인권', '정의' 등 보편적인 가치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계산기를 두드리며 "전쟁을 치르면 경제적으로 손해다"라는 명제를 입증해야 하는 사회. 한국은 어느새 이런 곳이 됐다.
삼족오 깃발 아래 숨은 제국주의적 열망
이런 변화는 언제 일어났을까? 저자는 '노무현 정부의 어느 한 시점'이라고 설명한다. 변화를 알리는 징후는 다양했다.
이 중 하나로, 저자는 반기문 UN사무총장이 취임 직후 인장에 '삼족오(三足烏)'를 새긴 사건을 꼽는다. 국내 공중파 방송사 전부가 시청률 황금시간대에 '주몽', '연개소문', '태왕사신기', '대조영' 등 고구려 관련 사극을 배치했을 무렵이다. 이런 드라마에서 삼족오, 즉 다리가 셋 달린 까마귀는 고구려의 국가 상징으로 묘사됐다.
실제로 고구려 군대가 드라마에서처럼 삼족오 깃발을 들고 전쟁을 치렀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시청자들은 선진화된 무력을 갖춘 중원의 군대를 물리치는 고구려 장수와 병사들에게 열광했다. 모든 채널에서 비슷비슷한 소재를 다룬 드라마를 보면서도 시청자들은 식상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드라마에 '고구려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는 듯한 내용이 담기면, 드라마 홈페이지는 비난 의견으로 도배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방송사들은 '고구려의 영광'을 경쟁적으로 장엄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세계 평화'를 과제로 삼고 있는 UN 사무총장의 인장에 '삼족오'가 새겨진 것은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삼족오'는 군사력에 바탕을 둔 패권국가에 대한 동경을 자극하는 드라마 속 소재일 따름이었다. '만주를 호령하는 고구려의 영광'과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는 UN 사무총장'은 아무리 좋게 봐도 한데 어울리기 어색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상한 일이 왜 벌어질까'라고 묻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고취되는 '고구려의 영광'에 기댄 광고만 늘어갔다. 민족주의 마케팅이 합리적 질문을 압도했던 셈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우물 안 개구리'의 로망
저자는 여러 사례를 들어 한국 사회 안에 제국주의에 대한 동경이 급격히 팽창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이 제국주의 국가가 될 힘은 없지 않나. 힘이 있어야 제국주의 흉내라도 내지.'
저자도 동의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한국은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려는 열정으로 잔뜩 들떠있지만, 그에 어울리는 실력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라는 표현을 끌어냈다. 여기서 "촌놈"은 지방 사람을 비하하는 뜻이라기보다, '우물 안 개구리'를 가리키는 쪽에 가깝다. 바깥세상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바깥세상에서 통할 수 있는 실력도 없으면서 패권에 대한 동경은 강한 사회. 그게 한국의 자화상이라는 이야기다.
영어만 알고, 역사와 인류학에 무지한 한국…"제국주의는 아무나 하나"
이런 상황을 뒷받침하는 사례는 많다. 대표적인 게 '국사(國史)'에 대한 홀대다. 고구려 사극에는 그토록 열광하는 사회에서, 한국사 연구자들은 끼니를 걱정한다. "국사학자가 명예롭지 못한 대우를 받는 제국주의 국가는 없다"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우리는 국사만 모르나. 그렇지 않다. 남의 나라 이야기에는 더 관심 없다. 저자는 한미FTA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던 당시를 예로 들었다. 앞서 저자는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를 통해 한미FTA가 낳을 부정적 영향에 대해 경고했다. 또 <프레시안> 지면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한미FTA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발표했다. 그래서 저자는 한미FTA 관련 토론회에 참석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미국에서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입만 열면 "미국에서는…"이라고 말했던 숱한 경제학자 가운데 실제로 미국 경제를 전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 대부분 미국에서 유학했지만, 정작 미국경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과 미국에 대해서만 무지한가. 그것도 아니다. 한국 대학은 '지역학'의 불모지대다. 그리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기초인 인류학이 홀대받는 곳이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에서, 인류학과가 설치된 대학의 수는 손으로 꼽아야 할 정도다. 제국주의 국가였던 나라 가운데 인류학을 소홀히 하는 곳은 없다.
그뿐 아니다. 한국의 엘리트 집단은 외국어에 대한 관심도 적다. '영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을 식민지로 삼을 게 아닌 이상, 영어 공부 열심히 하는 것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열망을 해소할 수는 없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한국 지식인들과 고급 관료들의 의식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은 파견지 언어에 대한 한국 외교관과 일본 외교관의 접근 방식이다. 일본 외교관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든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려고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외교부 안에서 제대로 대접받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 외교관들이 가장 선호하는 언어는 '영어'이며, 아주 특별히 노력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파견국의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경우를 보기 어렵다."
하긴, 이런 면모는 언론 보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른바 선진국 매체에서는 국제 기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또 국제 기사의 질도 매우 높다. 프랑스 언론에 실리는 아프리카 관련 기사는 수준이 높기로 유명하다. 아프리카에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있었다. 반면, 한국 언론은 국내 정치 기사의 비중이 높다. 국제 기사는 해당 언론사 논조에 맞춰 외신을 짜깁기한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 이르면, 한국의 식민지가 될 만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어떤 어수룩한 나라가 영어 밖에 못하는 나라의 식민지가 되겠는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애당초 한국은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과 달리 식민지를 경영해본 경험 자체가 없다. 그런데도, 많은 한국인들은 제국주의 흉내를 내고 싶어 한다. 그저 흉내에 그치면 다행이다.
너도 나도 대형차, 석유 낭비하는 한국…외부 자원에 목마른 경제
문제는 한국 경제의 구조가 식민지를 간절히 원하도록 짜여 있다는 점이다. '삼족오' 깃발에 대한 열광이 가볍게 스쳐가는 문화 현상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 경제는 수출의 비중이 극단적으로 높다.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며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대외경제의존도가 80%에 가까운 국민 경제는 흔한 사례가 아니다. 자전거 페달을 밟듯, 자원과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곳과 공장에서 쏟아내는 상품을 팔아넘길 곳을 계속 찾아 내지 않으면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경제 구조다.
게다가 한국인들을 기를 쓰고 중대형 승용차를 타려 한다. 소형차를 타면 무시당한다는 생각까지 갖고 있다. 안정적인 석유 공급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사회다.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지난 50년 간 한국에서 석유 소비가 줄어들었던 해는 딱 한 해, 바로 1998년 IMF 경제위기 때이다. 그리고 3년 후, 경제가 다시 회복되면서 2001년에 최초의 경차였던 티코가 단종되었고, 2002년에 아토스가 단종되었다.
일본은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지나면서 800cc 경차가 국민차가 되었고, 4만 달러를 바라보는 유럽 국가들은 최근 600cc 도시용 승용차 개발에 국민경제의 승부를 걸려고 하는 중이다. 반면 한국은 2만 달러를 막 넘은 시점에서 십대들의 승용차 구매 90%가 2000cc급 이상이다. 미국을 제외하면 승용차 크기가 두 번째로 큰 나라가 한국이다."
큰 차를 타고 다니려니, 석유를 많이 쓸 수밖에 없다. 한국은 석유 화학 산업의 비중도 높다. 박정희 정권이 중화학 공업에 투자를 몰아줬던 결과다.
'중후장대형' 산업이 전쟁을 부른다…석유 수송로 지키려는 동북아 군사 질서 재편
그런데, 석유 화학 산업을 포함한 이른바 '중후장대형 산업'은 대체로 전쟁과 가까운 산업으로 분류된다. 안정적인 석유 수송로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 해군이 대만 해협 근처에서 석유 수송로를 막는다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중후장대형 산업'의 비중이 높은 한국 경제는 타격을 입는다. 그래서 '대양해군'이 필요해진다. 또 석유 수송로를 보호하고, 중국을 견제하기에 요긴한 장소인 제주, 광주 등이 군사적 요충지로 부상한다. 실제로 '평화의 섬' 제주에는 군사기지가 들어설 전망이고, 광주에는 미사일이 배치됐다.
한국의 이런 움직임은 다시 중국과 일본을 자극한다. 결국, 서로에 대한 증오가 서린 역사를 지닌 동북아 3국은 군사력 경쟁에 돌입한다.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DJ독트린'의 이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긴장 속에서 한국이 출구로 찾은 게 북한이다. 제국주의 비슷한 짓을 꼭 하고 싶은데, 영어 밖에 할 줄 몰라서 식민지를 찾지 못하는 나라인 한국으로선 유일한 선택지라는 것.
여기서부터 민감한 내용이 나온다. 저자는 개혁 진영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판의 성역'으로 통했던 햇볕정책에 칼을 들이댄다. 저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관되게 추진한 햇볕정책이 단순한 대북정책 이상이라고 평가한다. "한국 외교사는 물론이고 한국 자본주의의 장기적 흐름에도 큰 영향을 준 사건"이라는 것.
그래서 저자는 햇볕정책을 'DJ독트린'이라고 격상해서 부른다. 저자에 따르면, 'DJ독트린'은 두 개의 명제로 구성돼 있다. '제1명제'는 "한국은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지 않겠다"라는 것. '제2명제'는 "한국은 북한에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라는 것.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결국 지난 10년 동안의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DJ독트린은 이렇게 두 개의 명제를 통해서 명확한 국가적 경제행위 하나를 형성하게 된다. 즉, '남한 자본의 북한 진출'이다. …지금의 한국 자본주의를 형성시켰던 바탕에 해당하는 섬유산업 등 제조업들을 어떻게 유지하고 또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갈 것인가에 대해, 한국은 실제로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조업이 하나 둘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로 이전되는 데 대해 공포스러울 정도의 위기감이 왔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70년대 이후의 영국에서 제조업의 해외 이전으로 벌어진 일종의 '산업 공동화(空洞化)' 혹은 '역(逆)산업화' 현상을 목격한 바 있기 때문에, 이런 공포는 단순한 위기감이 아니라 일정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DJ독트린이 탄생할 수 있었다.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에서 최근의 개성공단까지, 이른바 역사적인 6·15선언 위에 일련의 대북 경협사업이 서 있다는 건 부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 자본주의에서 이제 북한이라는 존재는 지난 10년을 거치면서 경제적인 의미로 '식민지'에 더 가까워졌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먼 나라에 외부 식민지를 갖기 어려운 한국 자본주의 입장에서 북한만큼 만만한 식민지가 또 있을까? 중국보다 가깝고, 동남아보다 임금이 싸고, 아프리카보다 훨씬 양질의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북한을 식민지로 전환시키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인(?) 눈으로 볼 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DJ독트린'의 패권적 속성…제국주의적 열망의 탈출구
북한 정권의 급격한 붕괴를 막아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유지한다는 면에서 'DJ독트린'은 큰 효용을 발휘했다. 하지만 저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DJ독트린'에 담겨 있는 패권적 속성이 점점 강화됐다"고 설명한다. 김대중 정부에 비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노무현 정부가 이런 속성을 강화하는 쪽에 힘을 실었다. 이명박 정부 역시 이런 속성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DJ독트린 등장 후 10년, 이제 정권도 바뀌었으므로 DJ독트린도 폐기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언젠가 새로운 평화 독트린에 의해 대체되기 전까지 DJ독트린은 그 패권적 속성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한국이 북한을 붕괴시키는 매우 적대적인 방식으로 대북정책의 기본 방향을 바꾸는 경우를 제외하면, DJ독트린의 근본적인 내용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 한국 자본주의가 DJ독트린의 실질적인 내용을 더 갈망하고 있으므로 이런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질 것이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의 자본은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지금 북한을 지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돈을 그 어느 때보다 애타게 갈구하는 중이다.
…DJ독트린은 한편에선 통일 근본주의를 거쳐 쇼비니즘에 가까운 민족 패권주의와 만나고, 다른 한편에선 이윤 법칙을 통해 자본의 민족 패권주의와 만나게 되었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도 하고, 경제성장도 도모하고, 더불어 민족의 숙원이던 만주로의 진출도 꾀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따라 철도망과 도로망도 건설하며 영원한 경제번영을 이루자는 이야기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얘기이기는 하다.
지금 한국에서 통일 근본주의와 이윤 중심주의가 결합하는 이런 과정은 형태상으로는 19세기 말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탄생을 이뤄냈던 힘과 동일한 것이며, 지금 한국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민족패권주의는 현실세계에서는 한국형 경제패권주의를 탄생시킨 힘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하면 다르다? 다를 까닭이 없다. 자본의 법칙은 대체로 동일하게 관철되는 법이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1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자본의 법칙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19세기에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조율하던 영국의 힘이 세계대전을 막아주지 못했던 것처럼, 영원할 것 같은 미국 중심의 조율하는 힘도 영원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비좁은 탈출구, 열쇠는 10대가 쥐고 있다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많은 한국인들은 '고구려의 영광'이 재현되기를 꿈꾸지만, 동북아시아의 현 상황은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과 비슷하다는 것. 그리고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유럽 국가들을 당시의 패권국가였던 영국이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듯, 다시 중화제국을 꿈꾸는 중국, 군사적 패권에 욕심을 내기 시작한 일본,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 활용하여 '고구려의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한국 사이의 갈등을 풀 방법은 없다는 이야기다.
정말 해법이 없을까? 저자는 아주 좁은 출구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출구의 문을 여는 열쇠는 한·중·일의 10대 청소년들이 쥐고 있다. 동북아 3국의 갈등이 전면화 될 시기에 성인이 돼 사회를 주도할 이들이기 때문이다. 한·중·일의 10대 청소년들이 전쟁이 아닌 평화를 바라는 열정을 내면화한다면, 동북아시아는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던 20세기 초 유럽의 선례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암기 위주 교육'과 '전쟁 선동'은 동전의 양면
하지만 가능성은 낮다. '교육 파시즘' 때문이다. 극단적인 암기 위주의 교육은 청소년들에게서 생각하는 힘과 감수성을 빼앗아 갔다. 그래서 전쟁을 부추기는 극우파의 선동에 쉽게 속아 넘어갈 위험이 있다. 암기 위주 교육과 전쟁 선동은 동전의 양면이다. 실제로 군대 내무실에서는 종종 '암기 강요 행위'가 이뤄진다.
수학이나 과학마저도 문제 유형과 풀이과정을 외우도록 부추기는 나라는 이들 3국외에는 없다. 게다가 한국정부는 한술 더 떠서 '영어 몰입교육'과 같은 선동적인 정책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턱대고 외우는 일만 반복하는 청소년들을 영어 훈련에 몰입시키면 결과는 뻔하다. 모두 바보가 된다.
이런 경쟁에서 승리한 청소년은 한국에선 엘리트 취급을 받겠지만, '영어 잘하는 바보'를 벗어날 수 없다. 한국인 엘리트가 미국인 바보의 수준이 되는 셈.
정부는 왜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려 할까?
저자는 "대부분의 지배자들은 자식들을 이미 미국으로 빼돌린 상태라서, 한국에서 이뤄지는 감시와 억압은 그 자식들이 나중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조건이 되고 있다. 이 바보 나라에서 교육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이 된다"라고 지적한다.
청소년들을 이렇게 바보로 만드는 시도는 원래 우파의 신념과 어긋난다. 미래 한국을 이끌어갈 청소년들이 더 건강하고 현명해지기를 바라는 게 우파의 자세다. 민주적 토론을 중시하는 전통을 갖고 있는 좌파 역시 청소년들이 더 똑똑해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 하나는 '내 자식만 잘 되면'하는 극단적인 자식 이기주의에 빠진 부모들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청소년들이 '88만원 세대'로 전락할 위험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자식이 '88만원 세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위 5%에 속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염원 역시 간절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단 내 자식 만이라도 상위 5%의 안전지대로 피신시키자"라는 생각을 낳았다.
그리고 모든 부모가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협동은 사라지고 무한 경쟁만 남는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은 아이들을 바보로 만든다. 많은 부모들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랑곳 하지 않는다.
"남의 집 자식도 똑같이 바보 되면, 공평한 게임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경제학자다운' 설명을 내놓는다. "남의 집 자식도 똑같이 바보가 되면, 이 게임은 문제없는 것으로 안전하게 돌아간다. 아주 공평한 게임이다."
정부가 바보 만드는 교육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통념과 달리, 저자는 현재 한국을 이끌어 나가는 세력이 원하는 인재상은 '경제전쟁을 수행하는 전사'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OECD 상층부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인재를 원한다면, 아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을 용인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이들을 어떤 어른으로 키우려 할까?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상징적인 경제 전쟁이 아니라 총칼을 드는 진짜 전쟁이고. 애국심이 충만해져 언제든지 전선으로 뛰쳐나갈 신체 건장한 바보들이다."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청소년들을 끊임없이 경쟁 속으로 몰아댄다. 그런데, 과연 이 대통령은 한국 청소년들이 '애국심에 충만한 바보'가 되기를 바랄까? 정말 전쟁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문마저 닫으려 하는 걸까? 물론, 대통령이 이런 의도에 따라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은 없다.
전쟁산업은 무기산업만이 아니다…"평화로 돈 버는 인구 늘어야 전쟁 막는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의도에서건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넓히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건설 사업에 대한 집착이다. 통념과 달리, 건설업은 '평화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은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적 이익이 있으면 전쟁터에 군대를 보낼 수 있다"라는 선례를 남겼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막으려면, "전쟁하면, 경제적으로 손해다"라고 설득해야 한다. 슬픈 일이지만, 그렇게 됐다. 이는 한국의 경제 활동 인구의 과반수가 "전쟁나면 손해 입을 게 뻔한" 산업에 종사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런 산업을 '평화산업'이라고 부른다. 이와 대칭을 이루는 개념이 '전쟁산업'이다.
흔히 탱크나 총을 만드는 산업만 '전쟁산업'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저자는 통조림 산업의 예를 든다. 식품 산업은 흔히 '평화산업'으로 여겨지지만, 통조림 업자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돈벼락을 맞았던 경험이 있다. 이런 선례가 있는 한, 불경기를 맞은 통조림 업자들이 다시 전쟁이 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전쟁산업의 모사꾼'은 건설업…"부숴야 새 집 짓지"
이렇게 보면, 의외로 '전쟁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국면에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인구 가운데 일부 역시 '차라리 전쟁이라도 났으면'하는 바람을 품을 수 있다. 전쟁은 대개 완전 고용 상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전쟁산업'의 '간판 타자'이며, '실질적인 모사꾼' 역할을 하는 산업으로, 저자는 '건설업'을 꼽는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선진국이라고 하기에는 가공할 정도로 높은 건설업 비중을 보여준 일본 경제를 개번 매코맥은 1998년에 '토건국가'라고 지칭한 바 있다. 이러한 건설업이 사실상 군산복합체와 에너지 산업의 지지를 받으며 일본을 점차 '평화국가'에서 '보통국가', 그리고 장기적으로 '전쟁국가'로 복귀시킬 것이라는 시나리오는, 유럽 쪽의 전문가들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설명은 한국에 대해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오히려 한국은 일본보다 더 심각한 '토건국가'다. 문득 의문이 든다. "'건설'은 파괴, 전쟁 등과 반대 개념 아닌가. 그런데 건설업이 전쟁산업이라니."
저자는 말한다. "집을 부숴야 새 집을 지을 게 아닌가." 실제로 한국 정부가 이라크에 보낸 군대 역시 '건설'을 위한 부대였다. 이어진 저자의 설명이다.
건설 권력, 국내 공사 다 끝나면 '전사'가 된 아이들 데리고 어디로 갈까?
"사실 건설자본은 전쟁에서 가장 막대한 이익을 얻지만, 전쟁 이후의 참혹한 현장에서 재건을 맡기 때문에 스스로를 평화세력으로 위장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건설자본들은 전쟁터에서 '평화재건'이라는 깃발을 내거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이유로 전쟁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세력은 실제로는 군산복합체라기보다는 건설자본이라는 껍질을 쓴 채 전쟁하자고 나서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건설업자 출신이 정치권력까지 갖고 있다. 단지 대통령만이 아니다. 건설자본은 광고로 보수언론을 먹여살리고, 지방 토호와 결탁한다. 그래서 견고한 권력을 휘두르는 '건설족'을 이룬다. 그리고 이 권력은 아이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몰아 생각할 틈을 빼앗는 한편, 끊임없이 새로운 공사를 벌이려 한다.
이런 권력이 나라 안에서 공사 현장을 찾지 못하면, '애국심 충만한 바보'가 된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향할까. 소름끼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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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청계천은 과연 아름다운가 (한국, 남경욱 기자, 2008/06/21 03:26:40)
직선들의 대한민국/우석훈 지음/웅진지식하우스 발행ㆍ224쪽ㆍ1만2,000원
대운하라는 발상을 하게 한 힘은 무엇인가. 지난해 <88만원세대>로 주목을 끈 저자는 개발이 점점 가속화돼 대운하로 정점을 이룬 지난 10년간의 한국 사회를 움직여온 힘을 ‘도시미학’과 그 뒤에 숨은 ‘건설미학’에서 찾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에 한 청계천 복원사업은 아름다운 조경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청계천은 지금 그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단 가시적 아름다움이 있으면 그것을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이성이나 상식만큼 미학이라는 요소가 한국인들에게는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청계천은 ‘생태복원’이 아니고 보건적 안정성도 입증되지 않은 도시조경사업에 불과하며 임시로 만든 물길에 물고기를 풀어놓는 ‘어항’에 불과하다면서 이러한 미학을 거스른다. 많은 한국인이 원래 있던 것을 깎아내고 그 위에 무엇인가 짓는 것, 시멘트 위에 색을 칠하고 인공장식물을 덧댄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특히 한국정치인은 “시멘트만 보면 환장할 정도로 좋아하고, 그것이 ‘민족의 융성’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미학이야말로 대운하를 비롯한 많은 개발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역대 대통령의 생태의식 수준을 살펴보면 환경보존에 대한 의식이 가장 높았던 이는 환경비전을 만들어 국가정책의 틀을 환경쪽으로 이동시킨 김영삼 대통령이었고, 김대중 정부 때는 ‘말로만 하는’ 환경의 시대였으며, 노무현 대통령 시기는 ‘말로도 안 하는’ 시기’ 였다고 분석한다.
도시화율이 85.2%가 넘는 상황에서 한국사회의 상상력, 특히 예술적 상상력은 모두 도시미학에 갇혀버렸다는 지적이 날카롭다. “노동운동에서 소설을 쓰고 싶어 도망쳐 온 공지영은 분당의 아파트에 갇혔다. 가장 먼저 생태시학을 주장했던 김지하는 일산의 오피스텔에서 더 이상 상상력을 발동하지 못한다. 수많은 드라마 PD들은 여의도에서 청담동 사이의 88도로 안에 갇혀있다. 90년대 예술혼을 갖고 싶어하던 건축가들은 테헤란로에 갇혀있다.”
그러나 대운하 사건에서 건설미학과 생태미학의 충돌을 감지하면서 “건설미학이 다른 미학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고 희망 섞인 진단을 한다.
건설미학은 2006년 판교 신도시 분양에서 2007년 종부세 도입까지의 클라이맥스를 거쳐 내리막길로 들어선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예술가들이 아름다움에 대한 실험과 새로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건설미학은 다시 되살아날 것으로 진단한다. 경제학자가 미학적 관점에서 사회평론을 하는 이유는 “미학이 궁극의 철학이며 경제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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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경제학자 ‘생태·평화’를 말하다 (시사인 [42호] 2008년 07월 01일 (화) 10:54:50 차형석 기자)
우석훈 박사의 신간 두 권이 화제다. 두 권 모두 서점가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 사회는 ‘100평 정도 농사를 지어 우리 밀 소주를 만드는 재미에 빠지고 싶은’ 한 경제학자를 쉴 새 없이 호출해댄다.
1964년 4월4일자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1위부터 5위까지를 비틀스가 차지한 적이 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틀스가 전성기일 때 일이다. 최근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사회과학 부문 주간 베스트셀러 순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최근 우석훈 박사(40)가 잇따라 출간한 <촌놈들의 제국주의>(개마고원)와 <직선들의 대한민국>(웅진지식하우스)이 각각 1, 2위에 올랐다. 그가 박권일씨와 함께 집필한 <88만원 세대>도 9위에 랭크됐다.
우석훈 박사가 쓴 책은 ‘직관력의 힘’이 돋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지적 시민권’을 획득한 <88만원 세대>가 대표적이다. 그동안 한국의 여러 ‘세대론’은 특정한 정치적 경험을 공유한 세대가 이전 세대와 자신(혹은 특정 세대)을 차별화하고, 그들이 이전 세대와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변화한 이후에도 ‘세대론’으로 자기들의 지분을 높여가는 방식으로 사용된 예가 많았다. 반면 <88만원 세대>는 현재의 20대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구조 안에서 왜 그들이 그러할 수밖에 없는지, ‘세대 착취’라는 틀로 20대의 삶을 재정렬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번에 출간된 두 책에서도 ‘우석훈이 세상을 보는 법’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쓴 <88만원 세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 이어 ‘한국 경제대안 시리즈’ 제3권에 해당하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가 보기에, 노무현 정부 때 한국 경제의 제국주의적 전환이 나타난다. “식민지를 만들어낼 능력도, 식민지 경영의 경험도 없으면서 생존의 돌파구는 식민지가 요구되는 제국주의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한국 자본주의”. 우석훈 박사는 이를 ‘촌놈들의 제국주의’라고 이름붙였다.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남북 경협은 그에게 그 징후로 읽힌다. 여기에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로 유명한 경제학자 도넬라 메도스의 틀을 빌린다. 도넬라 메도스는 자원 부족 현상이 전세계적으로 2050년에 나타나고, 2030년 즈음부터 자원 갈등으로 인한 분쟁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우석훈 박사는 한·중·일 3국도 석유 등 자원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군비를 늘릴 가능성이 있고, 이를 제어하지 못하면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누구나 그 시기가 온다고 예상하지만, 그 시기가 지금 당장이 아니라서 실감하지 않는 ‘자원 부족 시기’라는 키워드를 통해 한·중·일의 국제경제학을 말한다. 그는 이 책을 지금 10대가 많이 읽었으면 하고 바란다. 왜냐? “자원 부족 시기가 오면 지금 10대가 사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지금 나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우석훈이 한국을 보는 법’에 가깝다. 이 사회비평서는 대운하로 상징되는 한국의 ‘건설 미학’을 갈파한다. 그리고 그는 ‘생태 미학’으로의 전환을 말한다(백화점에서 주로 통용되는 웰빙이 아니라 생태!).
인파이터라기보다는 재치 있는 아웃복서 같은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1994년 노르웨이 동계올림픽에서 노르웨이 사람들은 왜 메인 스타디움을 빼고는 철거가 가능한 형태로 경기장을 지었을까?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실제로 어린이의 아토피 피부염 발병률이 상당히 높은 초고층 아파트 광고를 보면서 왜 ‘아름답다’고 느낄까? 왜 우리는 100층이 넘는 초고층 건물에 환호하고, 그 경제 효과에 열광하는가 등등. 그가 보기에 대운하의 논리나 작은 천변길을 포장해 주차장으로 활용하자는 논리는 뿌리가 같다. 그가 조어한 ‘건설 미학’이다. 한국은 이 ‘건설 미학’에 상당히 포섭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번 국회의원 선거 때 뉴타운 공약을 보자. 서울은 집 없는 사람이 50%이고, 집 가진 사람도 뉴타운 지역에 재정착할 사람은 10%에 불과하다. 90%의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불리한 정책에 대한 투표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가? 자기의 경제적 이익에 맞추어 투표해야 경제적으로 설명이 되는데, 뉴타운과 관련한 투표 행위는 경제로는 설명이 안 된다.” 이는 경제학자가 ‘미학’이라는 용어를 동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석훈 박사는 ‘은퇴’를 꿈꾸며 방문자가 꽤 많았던 블로그를 싹 닫은 적이 있다. “은퇴는 스무 살 때 나와 한 약속이다. 마흔 살까지 열심히 살고, 40세에 은퇴하자고. 힘들 때는 그 약속으로 버텼다.” 그에게 은퇴는 경제학은 안 하고 ‘그냥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농사를 짓거나 작곡을 하며 재미있게 사는 것. 하긴 그가 대학 시절 국악동아리 친구인 소설가 김영하씨와 합주를 하는 풍경이 연출되면 재미있겠다. 애초 40세로 시한을 정했는데, 벌여놓은 일이 많아 지연되었다. “대안경제 시리즈 제4권, 생태경제학 시리즈, 문화·농업·과학·정당과 언론에 관한 경제학을 다루는 ‘국가의 기본’ 시리즈 4권을 마무리하면 쉬려고 한다.” 글을 빨리 쓰는 편이고, 하루 서너 시간씩 꾸준히 쓴다. 내년쯤 집필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그는 최근 다시 블로그에 글을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촛불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촛불은 유럽의 신좌파적 흐름과 유사하다. ‘계급’ 혹은 다른 어떤 단어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여태껏 자기 세력화가 안 되어 있는 그룹들, 즉 사회 의식이 있는 가정주부와 10대가 움직였다. ‘배운 여자’라는 표현에는 사회적 발언과 참여에 대한 당연한 권리가 담겨 있다. 이거는 필승이다. 절대로 안 질 것이다.”
우석훈 박사는 ‘전업 인터뷰어’ 지승호씨와 함께 만든 인터뷰집의 맺음말에서 지씨에 대해 이렇게 썼다. “매달 책을 내겠다는 이 사나이를 도대체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그가 그의 뜨개질을 멈추지 않고 있는 한, 우리는 이길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지지는 않을 것이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좋은 흐름이 오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빌리자. 우석훈과 함께라면, 우리는 지지 않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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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30년 이내에 한·중·일 제국주의 충돌할 수도... (오마이뉴스, 이윤기 기자, 2008.07.02 13:58)
[서평] 우석훈이 쓴 미래경제학 <촌놈들의 제국주의>
그런데 20년이 흐른 지금, 한국 사회가 '제국주의'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에는 한국사회가 식민지를 만들어내지도 못하였고, 식민지를 만들 가능성과 능력도 없으면서, 식민지가 없이는 지탱하기 어려운 제국주의에서 생존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깊은 우려도 함께 담고 있다.
이틈에서 한국은 북한과도 충돌하고 일본, 중국과도 틈틈이 충돌하며 왜곡된 경제의 길을 걸어갈 가능성이 높다. 만약 한-중-일 삼국이 끝없는 팽창과 경쟁관계로 치닫는다면, 향후 30년 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바로 우석훈의 주장이다. '한·중·일을 위한 평화 경제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우석훈이 쓴 한국경제 대안시리즈 3권 <촌놈들의 제국주의>에는 이처럼 전쟁의 위험에 대한 심각하고 무거운 경고가 들어있다.
한국경제 대안시리즈 1권에서 '88만원 세대'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우석훈은, 이번 책에서 한국자본주의를 '촌놈'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한국 젊은이들이 사망 각서까지 쓰면서 아프가니스탄 선교에 나서는 현상을 어설픈 제국주의라 부른다. "아무런 준비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17~18세기에 유럽이 했던 제국주의 길을 조절장치 하나 없이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슬픈 죽음들은 한국자본주의 발전과정의 합리적 전개에 관한 논리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본문 중에서)
서구열강들과 달리 한국은 한 번도 제국주의 경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면서, 종교적 이유든 외교적 이유든 외국에서 아프가니스탄 납치사건과 같은 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제국주의 비슷한 걸 하고 싶은데, 능력이 안 따라주다 보니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역사가 기계적으로 순환된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한 중 일 세 나라 모습이 19세기 중반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가 서로 경쟁하며 독자적 ‘민족국가’를 키워나가던 시기와 닮았다는 것이다. “제어되지 않은 팽창, 무한한 외부 자원 및 시장을 요구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어느 순간 전쟁은 일어나게 되어있다...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 규모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 전쟁을 부르는 힘도 커진다는 것을 지난 2세기 동안의 세계사가 보여준다.”(본문 중에서)
실제로 일본과 중국은 남중국해 석유수송로를 둘러싸고 언제든지 충돌할 위험을 안고 있고, 독도와 관련된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한일관계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세 나라가 아프리카에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들어섰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라고 한다. 이런 과격한 민족주의는 이십대나 십대로 내려가도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일본과 중국 역시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지은이의 판단이다.
2007년 여름 한국을 강타한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은 18~19세기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기독교를 앞세워 식민지를 개방하였던 것처럼 한국 기독교인들도 수년전부터 동남아와 중동에 진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일본, 독일과 마찬가지로 피납 당하는 국민이 된 것은 어설프지만 제국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되고는 싶으나 미국 눈치를 살펴야 하고, 또 아무도 한국 같은 엉성한 나라에게 기꺼이 식민지가 될 턱이 없는 이 기묘한 현상을 우리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본문 중에서)
다음은 지은이가 주장하는 한국형 ‘촌놈 자본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첫째, 오랫동안 유엔기후협약분과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우석훈은 2007년 발리에서 작성된 UN기후변화 협약인 ‘발리 로드맵’에 의해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과 받은 새로운 협상에서 한국은 개도국 지위를 벗어났다고 한다. 21세기로 넘어오는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부터 한국은 선진국으로 질적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선진국으로의 질적 변화가 ‘한국 제국주의’로 전환이라면, 그 전환점은 분명 노무현 정부의 어느 한 시점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국내 경제위기 극복 과정에서 파시즘으로 전환하면서 제국주의 체제를 강화한 독일, 이탈리아와 노무현 정권기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을 한국 제국주의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좌파정권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 정권에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 이라크 파병은 민족 패권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한국이 비용을 지불하는 경제적 군사 파병으로 한국자본주의 역사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며, 본격적인 제국주의형 자원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 용병에 가까웠던 월남전과는 달리 순전히 ‘국익’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강요에 의한 마지못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해외 군사활동을 강력히 바라는 정부와 국익(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고 믿었던 국민들이 원해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는 주장이다.
셋째, 수출주도형 산업국가인 한국은 외연확대에 의해 움직여온 경제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대체로 외부 힘을 원동력으로 작동하는 경제가 패권주의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연변지구와 동남아로 확대되기 시작한 한국의 경제패권주의는 조금씩 제국주의의 형상을 갖춰가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정치 및 이념은 아직 제국주의에 적합하지 않지만, 한국경제는 이미 제국주의 구조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넷째, ‘다이나믹 코리아’를 국정운용의 기조로 삼은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에 한국자본주의의 기본성격이 패권주의적으로 전환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운 국정원칙으로서 ‘동북아 중심국가론’ 역시 건설 산업을 중심으로 국가의 제국주의적 재편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섯째,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동남아시아나 베트남 같은 곳에서 한류는 전형적인 제국주의형 문화 속성을 나타내고 있고, 한류에 대한 국민적 열광은 정부 정책과 문화 예술계마저도 제국주의적 흐름에 급속하게 편성시키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특히, 황우석 사건은 제국주의를 향한 사회문화적 전환을 보여주는 시금석과 같다는 것이다. 국민 80%가 줄기세포 연구로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국익’ 때문에 과학계의 진실, 가임여성들의 인권, 불확실한 경제성 추정 등의 문제를 모두 덮고 진행되었던 황우석 사건은 수출중심주의에 대한 열광과 기본적인 궤를 같이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98% 국민이 유전공학을 이용한 줄기세포 수출산업화에 찬성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이는 그만큼 한국에서 국가주의와 패권적 팽창에 대해서 반대할 힘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미 인문학이나 철학도 인류 보편주의나 역사적 상식에 비추어 한국의 팽창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셈이다.”(본문 중에서)
여섯째, 이미 80%를 넘어선 한국의 대외의존도가 싫든 좋든 외부시장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 주목하라고 한다. 노무현 정부 4년째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 ‘경제 영토’라는 단어는 단순한 정책 마케팅을 넘어서 것으로, 이미 한국경제는 식민지 없이는 지탱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식은, 한국자본주의가 이미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단독으로 제국주의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을 등에 업고 사실상 제국주의로서 기능하려고 한다는 가설에 있다.”(본문 중에서) 따라서 한미 FTA에 대한 노무현 정부가 보여준 과도한 집착 역시 이러한 경제영토 확장이라는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일곱째,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반공형 극우파와 민족주의형 극우파들이 빠른 속도로 극우사회의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좌파들마저 ‘부국강병’을 외치는 작금의 모습을 종합해보면, 노무현 정부 5년은 한국 제국주의가 사회적으로 첫발을 내디딘 시기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이 외에도 <촌놈들의 제국주의>에는 한국사회와 경제가 ‘제국주의적’ 성향을 보여주는 크고 작은 징후들이 다양한 사례를 들어 소개되고 있다. 식민지를 만들 능력도 가능성도 없으면서 제국주의 흐름에 편승해버린 ‘촌놈 제국주의’ 한국사회와 경제의 미래는 무엇인가? 우석훈은 필연적으로 “내부 식민지 전략의 강화와 건설자본형 제국주의”로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과 조짐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북한 당국자들이 이 대목을 읽는다면,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분노에 찬 성명서를 발표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다음과 같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중국보다 가깝고 동남아보다 임금이 싸고 아프리카보다 훨씬 양질의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북한을 식민지로 전환시키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인(?)눈으로 볼 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본문 중에서)
‘햇볕정책’이든, ‘대북강경책’이든, 이제는 상대정부를 인정하고 내부 식민지로 가느냐, 아니면 상대정권을 무너뜨리고 가느냐의 차이만 남았을 뿐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주장이다. 통일 근본주의와 이윤 중심의 민족 패권주의는 결국 북한을 경제 식민지화 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고, 이윤 중심주의에 기반한 자본의 북한 진출 경향은 점차 강화될 것이라고 한다.
우석훈은, 북한과의 경제통합에서 ①생태도시와 생태건축,②생태농업, ③자연생태 보전 이라는 원칙이 지켜져야 하지만 금강산 골프장 같은 일이 일어나거나 핵폐기장 같은 혐오시설이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치지 못한다. 아울러, 남북통합을 바탕으로 한민족 패권주의가 득세한다면 국방비는 늘어나고 동북아시아에서 긴장은 더욱 심화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 30년 동안, 한-중-일 삼국을 둘러싼 극우파 블럭 확대와 생태적 위기, 성장의 한계, 석유자원 중심의 에너지 위기, 국가 단위의 빈부격차 문제들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군산복합체와 제국주의 산업구조는 이런 갈등과 위기를 높이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다분히 막연한 ‘평화 우위’를 말하지만, 현실에서 평화가 전쟁을 누르는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전쟁이 벌어지거나 전쟁과 가까워질 때는 돈을 버는 특정한 사람들과 특정 직업이 존재하는 반면, 평화가 유지될 때 이 평화의 경제 가치는 일종의 공공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에게도 경제적 혜택을 직접적으로 주지 못한다.”(본문 중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평화를 누리는 것이야 좋아하지만, 정작 그 평화라는 공공재를 위해 애쓰려는 개인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중, 일 삼국이 앞으로 30년 평화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별 국가단위에서 “평화가 현실적으로 필요한 시민들로 국민경제의 절반을 유지해야”하며, 평화로부터 이익을 얻는 산업이 육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쟁 없는 유럽’에 대한 열망이 담긴 EU 통합과 비슷한 한, 중, 일 경제 통합을 통하여 평화체제 구축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중, 일에서 평화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현실에서 다양하게 시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석훈은 닫는 글을 통해 특별히 학교를 통해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인 현상을 돌아보아보자고 호소한다. 수업은 더 적게 하고 대학등록금을 50만원 수준으로 낮추어, 억압은 줄이고 자유를 늘리며 다양성을 넓히지 않으면, 더 이상 십대들이 버틸 수 없는 사회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 68혁명처럼 결국 중, 고생들이 못 참겠다고 들고 일어나”기 전에 “스위스나 스웨덴처럼 어른들이 알아서 바꾸어”주지 않으면, 종국에는 아이들이 든 ‘촛불’이 ‘횃불’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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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식 '건설미학'이 아름다운가 (오마이뉴스, 이윤기 (ymcaman) 기자, 2008.07.27 13:27)
[서평] 우석훈이 쓴 <직선들의 대한민국>
성난 쇠고기 민심이 촛불로 뜨겁게 타오르던 지난 달 중순 이명박 대통령은 특별회견을 통해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운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반도 운하를 반대하던 사람들 누구도 더 이상 운하를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후에도 운하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명박 대통령의 '불도저'를 세울 것인가? <88만원 세대>로 잘 알려져 있는 우석훈이 경부운하로 대표되는 건설공화국 대한민국의 불도저를 세울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하여 <직선들의 대한민국>(웅진 지식하우스 펴냄)을 썼다.
우석훈은 이 책을 통해 대운하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경제적 흐름에 대한 이해와 시대정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담론을 살펴보고 불도저를 세울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겠단다.
경부운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정상이 아니거나 무엇에 씌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경제학자인 우석훈은 한국 경제구조 자체에 경부 운하사업을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는 힘과 사회적 여건이 존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경부운하 사업이 추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사업은 언제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
"대운하는 단순히 이명박이 지나치게 토목건설을 지향하는 사람이라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통합민주당에 비해 한나라당이 건설자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정당이라서 벌어진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2008년 총선의 공약만 봐도 그렇다. 통합민주당의 지역공약에는 경제성이 전혀 없어 이미 오래전에 정부에서 사실상 폐기한 경인운하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석훈은 통합민주당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도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이른바 '불도저 공약'을 내걸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근한 예로 쇠고기 정국을 기반으로 민주노동당 대표가 된 강기갑 의원이 지역구인 사천 지역 광포만 매립 동의에 서명한 일로 여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는 것. 즉 한국사회에서 토목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개발공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정당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지은이는 그것이 한국경제가 가진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기인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떤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학'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이성'으로는 뻔한 결론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독일 운하를 보고 와서 어떤 사람은 이걸 반드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은 이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석훈은 경제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한국인과 한국사회와 특성을 속도 문화에 대한 중독과 성과주의에 치우쳐 마비된 합리성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직선들의 대한민국> 첫 장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왜 경쟁을 할까"하는 문제제기를 한다. 자전거는 기본적으로 자동차에 비하여 '느림'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교통수단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라는 것.
"자전거를 타는 한국인들에게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달리 여전히 메갈로마니아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심지어 그들끼리도 잠재적 경쟁자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자전거는 모두 친구이고 반갑지만, 같은 방향으로 가는 자전거는 전부 경쟁자다. 특히 아줌마에게 추월당한 20대는 때로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느림의 속도를 즐기고 건강해지려고 자전거를 타지만, 속도주의와 성과주의에 중독된 한국자본주의에 내재화된 문화가 자전거를 타면서도 속도와 성과, 경쟁을 숭배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고나면 얼마 안가서 원래 자전거에는 부착되어 있지 않은 '속도계'를 구입해서 최고 속도와 주행거리를 측정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시작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뒤통수를 '쾅'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바로 딱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에는 마산에서 임진각까지 자전거로 종주를 했고, 지난 겨울에는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 일주를 했다. 평소에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날이 많고, 업무 때문에 가까운 곳을 갈 때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그래도 아직 한 대 10만원도 안하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마니아' 수준은 아니다.
그런데, 나 역시 임진각까지 자전거 종주를 앞두고 연습을 시작하면서 속도계를 구입했다. 하루에 몇 킬로미터를 달렸는지, 최고속도는 얼마였는지, 평균속도는 얼마였는지 이런 걸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속도와 성과와 경쟁을 숭배하는 일이 몸에 뱄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석훈은 타인에게 추월당하거나 정지하여 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성과주의는 자전거만이 아니라 수영장에서도 심지어 요가원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속도와 규모 그리고 등수에 대한 숭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또 우석훈은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한국인의 합리성은 성과주의에 마비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비정규직 젊은이가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이명박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비정규직이 비정규직 강화를 공약으로 내건 정당에 투표하는 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와 기업을 위한 정책을 내건 정당을 지지하는 일, 집이 없는 사람이 집값이 오르면 환호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모두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결국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경제 이성보다 비합리적인 '종교적 믿음'이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우석훈은 주장한다. 청계천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로가 뚫리고 최신형 건물들이 들어서면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는 건설미학과 이어져 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만의 주도적인 미학은 '건설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래 있던 것을 깎아내고 그 위에 무엇인가 짓는 것, 시멘트 위에 색을 칠하고 인공 장식물을 덧댄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한국인과 한국정치인들의 미학적 특징은 시멘트만 보면 환장할 정도로 좋아하고 그것을 민족의 융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토론하고 논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는 것. 우석훈에 따르면 시대정신과 같은 시대미학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건설미학'이라는 것이다. 타워팰리스가 한국에서 가장 좋은 집을 대표하는 것도, 도시마다 '랜드마크'를 건설하려는 것도 바로 이런 건설미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새만금이건, 대운하건, 남해안벨트건 모두 건설미학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 우석훈의 주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반도대운하 추진 역시 중앙관료정치와 지역 토호라는 두 구조가 만나서 꽃 피우는 건설미학이라는 것.
경제이성과 상식 차원에서는 이미 끝난 논쟁임에도 불구하고 경부운하 문제가 수면 위와 아래를 오르내리는 것 역시 바로 건설미학 때문이다. 제대로 된 조감도와 투기심리가 만나고 적정 시점에서 보상금만 풀리면 언제든지 국민여론을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이다. 대운하문제에 대하여 마음 놓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건설회사 사장 출신의 대통령과 관료들이 이러한 건설미학의 작동원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한국인들은 경제성장은 마치 건설과 개발로만 할 수 있는 것으로 믿게 됐으며 '막연한 기대감'과 '환상적인 조감도' 앞에서는 어떤 합리적인 비판도 수용되지 않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 같은 건설미학을 우리 삶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은 수두룩하다. "강북도 강남만큼 땅값이 올라야 한다" "우리 동네가 멋지게 되면 정말 좋겠다" "서울을 대표하는 건물이 되겠네" "우리 지역에도 문화회관은 하나 있어야지"와 같은 표현들이다.
“한국인들은 큰 것을 사랑하고, 새로 생긴 것을 사랑하고, 인공적인 것을 사랑한다. 이러한 가치관이 동반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패권주의 성향이다. 힘없는 것은 죽어도 그만이고, 나보다 약한 것은 짓밟아도 그만이며,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은 죽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것. 이것이 미학적 가치의 위치에 있다."
서울에서만 100층이 넘는 초고층 빌딩이 여섯 동이나 세워지고, 전국적으로 열두 동이 추진중이라고 한다. '랜드마크'라는 이름이 붙는 이런 건물들은 필요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100층이 넘는 이런 건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어진다는 것이 우석훈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인가? 우석훈은 <88만원 세대> 이후 <촌놈들의 제국주의>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와 같은 여러 책을 통해서 가장 부지런히 한국사회와 한국경제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학자다.
곧게 뻗은 도시개발과 주상복합 아파트로 상징되는 건설미학이 판치는 '직선들의 대한민국'에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우석훈의 생각이다. 아니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건설미학을 대체할 수 있는 희망은 '생태미학'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생태미학이 희망이 될 수 있는 외부적 조건으로 고유가와 석유자원의 고갈이 점점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과 기후변화협약을 포함하는 국제적으로 추진되는 국민경제의 생태적 전환이 가속화되는 흐름이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녹색평론>을 중심으로 버티고 있는 예술가와 학자들이 있고,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환경단체 회원들과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승용차에 비하여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생활협동조합으로 묶여진 30만 명에 더해, 머지않아 광우병 위험에 저항하는 100만 명 수준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생태미학을 지지하는 더 큰 힘은 역설적이게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나올 것이라고 한다. 초고층 아파트가 고급 주택으로 인정받는 흐름이 곧 무너질 것이고, 도시 빈민 중의 일부가 농업으로 직업을 바꾸는 흐름이 발생한다는 것. 아파트를 계속해서 지으면 국민경제가 돌아갈 것 같지만, 건설미학과 도시미학이 어느 순간에는 한계점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우석훈은 경고하고 있다.
또한, 불교는 생명평화가 진보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고, 가톨릭 역시 생명평화와 강력한 결합을 보이고 있다. 또 진보적 기독교계도 생명평화 담론을 적극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며 원불교를 포함하는 4대 종단이 모두 '생태미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 이제 종교로부터 발현되는 생명과 평화를 표현하는 '생태미학'은 한국사회를 바꾸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는 것.
우석훈이 상상하는 아름다움과 생태미학은 이렇다. 랜드마크가 없어도 되는 공존의 아름다움이 구현되는 도시를 상상해보자. "사람들은 2~3층짜리 건물이 늘어서 있는 작은 골목길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걸어가는 속도가 늦어지고 주위를 살펴보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길 주위의 건물이 높아질 수록사람들의 보행속도는 빨라지고, 실제로 가게에 들어가서 물건을 구경하거나 물건을 사는 사람이 줄어든다."
우석훈운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다른 가치관을 가진 힘에 의해서 유지되고, 아무것도 짓지 않는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건설미학에 대한 해체를 향해 다함께 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사회에 이기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승리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오직 큰 것만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 흐름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백범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우석훈은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 독자들에게 "경제의 시대에 살고 싶은가, 아니면 아름다움의 시대에 살고 싶은가?"를 묻고 있다. 그는 아름다움의 시대에 살고 싶다고 한다. 독자 여러분들은 어떤 시대에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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